투르의 성 마르티노는 서기 316년 오늘날 헝가리의 솜버트헤이에 해당하는 로마 제국의 판노니아 속주의 ‘사바리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로마군 소속 기마 부대인 보조군의 고위 장교였는데, 이탈리아 북부 ‘티치눔’(오늘날의 파비아)에 주둔했기 때문에 그 역시 아버지를 따라 ‘티치눔’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열 살 때 그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교회에 나가서 예비 신자가 되었는데, 기독교는 313년 로마 제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밀라노 칙령을 선언함으로써 합법적인 종교로 공인받긴 하였으나 당시까지만 해도 기독교는 로마 사회의 상류층 사이에서는 거의 신봉되지 않았으며, 군인들 사이에서도 ‘미트라교’를 믿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 상태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제국 전역에 성당이 활발하게 세워지기 시작함에 따라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이 무역로를 따라 유입되면서 제국 동부에는 각 도시권을 중심으로 수많은 기독교인이 거주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로마 시민들에게 기독교는 여전히 소수의 종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5세가 되던 해 그는 기병대 ‘알라’(부대 이름)에 입대하여 334년경 지금의 프랑스 아미앵에 해당하는 갈리아의 ‘사마로브리바’에 주둔하면서 고대 로마의 관직표인 ‘노티티아디그니타툼’에 등재된 중기병 부대에서 복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의 부대는 의장대였기 때문에 전투에 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술피키우스 세베루스(마르티노의 제자이자 초기 그리스도교 금욕주의 작가)에 의하면, 마르티노는 군대에 2년 더 복무했다고 하는데, ‘자크 퐁텐’(중세 프랑스의 작가)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양심과 전장을 누비는 군인으로서의 생활 사이에 괴리감을 느껴 생전에 군대에 오래 복무한 것을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수의 학자는 마르티노가 정해진 복무기간인 25년을 모두 채웠다고 보고 있으며, 또한 그가 속한 군대의 특성상 전장에 피를 흘리는 등 부득이하게 기독교인으로서의 양심을 위반할 만한 그 어떠한 일도 하지 않았으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오늘날의 독일 보름스에 해당하는 보르베토마구스의 갈리아족과의 전투가 시작되기 전, 신앙 때문에 전장에 나가 사람을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저는 그리스도의 병사입니다. 따라서 저는 싸울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명령 불복종에다가 비겁하다는 비난을 받으며 감옥에 투옥되고 말았는데, 그렇게 자신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자, 그는 무장하지 않은 채 부대 앞에 앞장서겠노라고 상관들에게 건의했고, 처음에는 비관적이었던 상관들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를 앞세워 진격 명령을 내리려던 순간, 갈리아족이 먼저 평화 제의를 해오는 바람에 다행히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군복무가 해제되어 이탈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소를 깨닫고 ‘카이사로두눔’(현재 프랑스의 투르)으로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삼위일체 기독교 신앙의 주요 지지자인 푸아티에의 ‘힐라리오’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황실 궁정에 널리 퍼져있던 아리우스주의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는 죄목으로 ‘힐라리오’가 픽타비움(현재 프랑스 푸아티에)으로 유배를 가게 되자, 그는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오게 되는데, 도중에 알프스의 산적을 만나게 되었으나 오히려 산적을 개종시키기도 했습니다. 이후 꿈속에서 집으로 다시 찾아가라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은 그는 밀라노를 떠나 알프스산맥을 가로질러 판노니아로 넘어가게 됩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어머니와 몇몇 마을 사람들을 개종시켰으나 끝내 아버지만은 개종시키지 못했습니다. 이후 일리리아(발칸 반도의 북서부지역)에 머무는 동안 열정적으로 전교 활동과 아리우스파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던 그는 결국 많은 이들의 미움을 사 그곳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일리리쿰(일리리아 왕국의 자리에 세워진 로마 속주)에서 돌아오던 길에 공교롭게도 그는 밀라노의 아리우스파 대주교인 ‘아욱센티우스’와 맞닥뜨리게 되는데, 그 자리에서 대주교는 마르티노를 그 도시에서 강제로 추방하는 것이었습니다. 초기 사료에 의하면, 이후 그는 ‘리구니아해’의 ‘갈리나라’라고 불리는 섬에 머물며 홀로 은수생활을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서기 361년, 스승이었던 ‘힐라리오’가 자신의 주교좌로 돌아오자, 마르티노는 그와 재회하여 인근에 수도원을 세우게 되는데, 이 수도원은 훗날 유럽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수도원으로 알려진 베네딕도회의 ‘리귀제’ 수도원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후 이 수도원은 지역 복음화의 중심지가 되었고, 마르티노는 멈추지 않고 갈리아 서부 지역을 돌아다니며 대중을 상대로 설교하며 전교 활동에 전념하게 됩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훗날 유럽 각지에서 그를 주인공으로 한 수많은 지역 민담이 만들어지고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십 년 뒤인 서기 371년 투르의 주교로 임명된 그는 바른 품성 언행으로 투르 시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어 주교로서 호평을 받게 되는데, 처음에 그는 투르지방의 병자들을 보살펴 달라는 지역 주민들의 요청을 받고 그곳으로 갔으나 사실은 주민들이 그를 주교로 모시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으로. 그는 결국 자신이 속았다는 점을 알면서도 할 수 없이 주교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또 다른 이야기로는, 그가 자신이 주교로 서임된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 거위들을 가둔 헛간에 숨었는데 거위들이 놀라 시끄럽게 우는 바람에 주민들에게 발각되어 끌려 나오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옷과 머리가 헝클어지는 등 주교가 될 인물로서 적합하지 않다며 몇몇 사람들이 반대하기도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주교가 된 그는 열정적으로 이교도의 신전과 우상 등을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는데, 당시 주민들 사이에 ‘드루이드교’가 민간 신앙으로 뿌리 깊게 퍼져있던 시기라 더욱더 그들의 반대와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번은 어떤 마을에서 그가 오래된 이교의 신전을 부수고 신전 가까이에 있던 소나무를 베려고 하자, 그곳에 있던 이교도의 사제와 그를 따르는 신도들이 신전이 무너지는 동안에는 주님의 권세에 눌려 쥐 죽은 듯 조용히 있더니 오히려 소나무가 베어질 때는 참지 못하고 튀어나와 일하는데 훼방을 놓았다고 합니다. 술피키우스는 이후 마르티노가 투르의 교구장직에서 물러나 자신이 세운 수도원인 마르무티에 수도원에 가서 살았다고 확인하였습니다.
이 수도원은 루아르강 반대편에서 투르를 마주 보는 형태로 지어져 있는데, 이곳에서 마르티노와 그를 보좌하던 일부 수사들은 나무로 지어진 작은 수도실에 거주했으며, 그 밖의 다른 수사들은 바위를 깎아 만든 동굴에 거주했다고 합니다. 그는 주교로서 본당 사목에 특히 열정적이어서 1년에 꼭 한 번씩은 걷거나 당나귀나 배를 타고 교구 소속 본당들을 사목 방문했다고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수도원을 지속적으로 세우기도 했는데, 자신의 교구인 투르에는 물론 샤르트르, 파리, 오툉, 비엔과 같은 먼 지역까지 수도원 설립을 확대하였습니다. 술피키우스가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르티노가 비엔에서 눈병에 걸린 놀라의 ‘바울리노’ 주교를 만나 기도하자 기적적으로 그의 눈병이 치유되었다고 합니다.
또 한번은, 이교도들이, 자신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전나무를 마르티노가 베어내는 것에 마지못해 동의하면서 전제 조건으로 나무가 쓰러지는 쪽에 마르티노가 서 있어야 한다고 내걸었는데, 마르티노가 이에 흔쾌히 동의하고 나무를 베었지만, 잘려진 나무는 그를 피해 쓰러지면서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르티노는 죄수들을 석방하는 일에도 앞장섰는데, 그가 누군가의 사면을 요청하면 그것을 거절할 이유나 명문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당국자들은 물론 황제마저도 그가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갖은 이유를 달아 그를 피하며 만나지 않으려고 애썼다고 합니다.
한번은, 금욕주의 종파인 ‘프리실리아누스’주의자들 때문에 혼란을 겪기도 했는데, 제1차 사라고사 교회회의에서 그들을 이단자로 공개 단죄하게 되자 그들은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이타키우스 주교를 포함한 히스파니아의 몇몇 주교들이 ‘마그누스 막시무스’ 황제에게 그들을 고발하기에 이르렀는데, 마르티노 역시 그들의 논리에는 강력히 반대했지만, 그들 역시 종교인이었기에 황제의 세속 법정에 세워지는 것은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암브로시오와 함께 이단자들을 사형에 처하자는 것뿐만 아니라 황제가 이단 시비 문제에 개입하도록 하는 이타키우스의 방침에 반대하며 황제를 설득하여 이단자들을 살리기 위해 애쓰게 되는데, 그럼에도 황제는 385년에 결국 이단자들을 참수하고 말았습니다.
마르티노가 젊은 시절 로마 군인으로 갈리아에서 근무할 때 체험한 환시는 훗날 세간에서 그를 언급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이야기로, 하루는 그가 ‘아미앵’이라는 도시의 성문에 이르렀을 때 남루한 옷을 입은 한 걸인을 만나게 되는데, 이를 본 그는 측은한 마음에 그 걸인에게 외투의 절반을 잘라 주었고, 그날 밤, 자신이 걸인에게 주었던 외투를 걸친 예수님이 나타나 동행한 천사들에게 “마르티노는 아직 예비 신자이지만 나에게 이 옷을 입혀주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며 꿈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한편 그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잘려있던 외투가 완전히 새것처럼 복구되어 있더라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서기 397년, 그가 갈리아 중부에 있는 캉데생마르탱에서 선종한 뒤 그의 외투는 유명한 성유물 가운데 하나로 인식되어 투르 인근에 있는 ‘마르무티에’수도원에 있는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 왕조 군주들의 기도실에 보관되었는데, 중세에 이르러 ‘성 마르티노의 기적의 망토’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며 프랑스 국왕이 전투에 참여할 때 직접 들고 나가기도 했고, 기타 서약을 맹세할 때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세간의 관심에서 차츰 멀어졌다가 679년 왕실 보물창고를 정리하던 중 발견되어 다시 이목을 끌게 되었고, 798년경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생드니 대성당의 수사들에게 양도한 ‘뤼자르슈’ 궁전으로 옮겨져 보관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성유물 함에 든 성 마르티노의 외투를 관리하는 사제를 ‘카펠라누’라고 불렀는데, 이후 군대에서 복무한 모든 사제를 가리켜 ‘카펠라니’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를 프랑스어로는 ‘샤프롱’이라고 번역했는데, 이 단어가 군종 사제를 칭하는 영어 단어인 ‘챠플린’의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성유물을 보관하기 위한 작은 임시 성당을 가리키는 용어인 ‘카펠라’라는 말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 세월이 흐르며 외투와의 연관성보다는 ‘어떤 공동체나 그곳에 모이는 일부 특정 신자 집단의 편익을 위해 마련된 하느님 경배의 장소’라는 의미가 더 강하게 들어 있는 영어의 ‘채플’이라는 말로 변하게 되었는데, 이 용어 또한 결과적으로 과거 성 마르티노의 외투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 위의 글은 위키백과를 참고로 작성하였음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