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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 약 35,000년 전 석기시대에 거주했던 사람들의 유적이 스페인 전역에서 발견된다. 켈트계 사람들이 기원전 9세기 경에 이주해왔다. 기원전 200년경부터 로마인들이 이 지역을 지배했으나, 약 5세기 초에 침입한 서고트족에게 지배권을 빼앗겼다. 8세기 초 북아프리카로부터 온 이슬람교도인 무어인들이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점령했다. 그리고 카스티야, 아라곤, 포르투갈과 같은 기독교도 왕국들이 점차로 이 지역을 다시 정복할 때까지 이슬람교도 통치가 이어졌다.
스페인은 1479년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1세의 결혼으로 통합을 이루었다. 마지막 이슬람 왕국이었던 그라나다 왕국이 1492년에 함락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아메리카 대륙에 거대한 식민지를 건설했다. 1516년에는 합스부르크 왕가로 왕위가 넘어갔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는 1700년 부르봉 왕가의 펠리페 5세가 최초의 스페인 왕으로 즉위하면서 막을 내렸다. 펠리페 5세의 왕위 계승으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유발되었고, 유럽의 많은 영토를 잃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아메리카 대륙 대부분의 스페인 식민지에서 혁명에 불이 붙었다. 1898년 스페인은 미국과의 전쟁으로 해외 식민지의 대부분을 잃었다.
1931년 스페인은 공화국이 되었다. 스페인 내란(1936~39)은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국가주의자(내셔널리스트)들의 승리로 끝났다. 1975년 프랑코 사망 후 그의 계승자인 후안 카를로스 1세가 국가 원수로 즉위함으로써 군주정이 부활했고, 1978년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여 입헌군주국을 세웠다.
1982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1986년 유럽공동체(European Community/EC)에 가입했다. 1992년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첫번째 항해 500주년을 기념하여 세비야 국제박람회와 바르셀로나 올림픽경기대회를 개최했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로 들어오면서 일부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은 독립을 요구하면서 테러 활동을 계속했다. 하지만 2004년 3월 11일 마드리드에서 있었던 폭탄 테러는 호전적인 이슬람교도에 의한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유럽에서 발생한 가장 최악의 테러 행위였다.
선사시대에는 켈트족 등 북부 아프리카와 서유럽 민족이 반도 북부에 정착했다. 지중해 연안에는 북부 아프리카인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이며, 고대 그리스인과 페니키아인들이 동부 및 남부 해안을, 그리고 카르타고인들이 남동부를 차지했다. 그후 로마인들이 처음으로 반도 전역을 정복했다.
로마의 몰락 이후 반달족과 서고트족 등 게르만계 민족이 이동해왔고, 711년 아랍인의 침입 이후 8세기에 걸쳐 아랍의 지배하에 놓였다. 그러나 이후 유럽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스페인은 프랑스·이탈리아·포르투갈 등 인접 국가와 유사한 지중해 유럽 국가가 되었다. 의 5세기에 걸친 통합과정을 거치면서 생활양식과 문화적인 전통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인종적·문화적으로 통합되어 집시를 제외하고 눈에 띄는 소수 민족은 없다. 그라나다·마드리드·바르셀로나·무르시아 등의 도시에서 비교적 큰 집시 공동체가 발견된다.
스페인 국민들이 가장 많이 믿는 종교는 로마 가톨릭교 이다. 대다수의 스페인인들은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결혼하며, 성당 묘지에 묻힌다. 그러나 산업화·도시화로 교회가 스페인인들의 일상생활에까지 미쳤던 막대한 영향력이 줄어드는 등, 스페인인들의 종교생활이 변해가고 있다. 소수 종교 가운데는 개신교가 가장 많은 신자를 확보하고 있다
국왕은 국가의 수반으로서 모든 외교관계에 있어서 스페인을 대표한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새 법을 승인하거나 거부할 권리를 가지며, 의회를 소집하거나 해산시킬 수 있다. 그밖에 국민투표 요구권, 총리를 비롯한 각료들의 임명권·해임권, 총리직 후보자를 추천할 수 있는 권리 등을 가진다. 또한 군통수권자로서 전쟁을 선포하고 평화조약을 조인할 수 있다
모든 시기에 걸쳐 나타났던 스페인 문화의 특성은 그리스도교의 영감, 개별성을 존중하는 인문주의 경향, 적당한 절충주의, 정신 세계의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한 분투 등이다. 현대의 스페인은 유럽의 지적 흐름에 개방되어 있으나, 독특한 사유 및 행동양식의 특성을 버리지 않는다. 바르셀로나에는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까지 카탈루냐인 안토니오 가우디가 건축한 호텔·아파트·교회 등이 있는데, 이들의 건축양식은 매우 독특하다.
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들이 이베리아 반도에 거주했으나 빙하기 마지막 시기에 사라졌다.
그후 1만 5,000년전 호모사피엔스들이 반도에 살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알타미라 동굴에 벽화를 남겼다. 엘 아르가르 농경문화가 시작된 BC 2000년경부터는 야금기술이 발달하여 청동·은·금 등을 제련했다. 이베리아 반도는 BC 1000년경 해상무역문화를 꽃피웠던 타르테소스족들과 교류를 가졌다. BC 9∼8세기에 피레네 산맥을 통해 이주해온 중앙 유럽의 켈트계 부족들이 원주민들과 혼혈족인 켈트이베리아족을 형성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한 BC 218년 로마인들의 이베리아 반도에 대한 공략이 시작되어 그후 2세기에 걸쳐 진행되다가 결국 로마인들이 반도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했다.
그후 AD 5세기에 게르만계 부족들이 침략해왔으며, 그중 서고트족이 가장 강한 세력으로 부상하여 반도 전역에 걸친 왕국을 세우고 7세기초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8세기초에는 이슬람교도들이 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그후 그리스도교 세력인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재정복을 시도해 13세기말에는 이슬람교도들이 통치했던 대부분의 지역을 탈환했다.
1479년 아라곤의 페르난도 3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가 결혼함으로써 두 왕국은 하나가 되었고 1492년 이슬람교도들의 마지막 보루였던 그라나다 왕국마저 함락시켰다. 14세기말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들을 거느린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1516년 네덜란드의 통치자였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로스 1세가 페르난도에 이어 왕위를 승계했다. 그후 카를로스 1세는 1519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어 카를 5세라고도 불렸다.
1555∼56년에 카를로스는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왕위를 자신의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넘겨주었다. 합스부르크가 출신의 스페인 왕들 가운데 가장 스페인적이라는 평을 받은 펠리페 2세는 종교광으로 로마 가톨릭교를 수호하고 프로테스탄트를 말소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스페인은 희생이 큰 전쟁들을 치러야 했고 모험적인 군사행위에 휩쓸리게 되었으며 재정은 바닥이 났다. 펠리페 2세 이후 3명의 합스부르크가 왕들은 모두 성격이 유약하여 스페인이 급격히 쇠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700년 카를 2세가 후손 없이 사망하고 부르봉 왕가의 앙주 공(公)이 스페인의 펠리페 5세로 등극함으로써 합스부르크 시대는 막을 내렸다.
펠리페의 등극으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1∼14)이 유발되었고 전쟁 결과 스페인은 벨기에·룩셈부르크·밀라노·사르데냐·나폴리를 잃었다. 180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자신의 형인 조제프를 왕좌에 앉혔다. 그러나 영국과 스페인 군대가 나폴레옹의 군대를 물리쳐 1814년 부르봉 왕가는 복위되었다. 이 전쟁에서의 승리로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들의 혁명을 크게 부채질했으며, 스페인은 1898년 미국과의 전쟁을 끝으로 해외식민지의 대부분을 잃었다.
1931년 공화제에 대한 압도적인 찬성으로 끝난 선거 결과에 승복하여 알폰세 8세가 퇴위한 후 스페인은 공화국이 되었다. 그후 1936년 공화파와 국가주의자(파시스트)들의 대립이 스페인 내란으로 확대되었다. 프란시스코 프란코가 이끄는 국가주의자들은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로부터 군대를 지원받았으며, 공화파는 국내외의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그리고 자유주의적 경향을 가진 사람들의 지원과 소련의 도움을 받았다.내란은 결국 1939년 3월 마드리드를 장악한 국가주의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11월 20일 프랑코가 사망하고 이틀 후에 후안 카를로스가 왕위에 오르면서 군주제가 부활되었다. 카를로스는 스페인의 민주화에 크게 힘썼다. 1977년에 실시된 선거로 새로 구성된 의회는 정치·경제의 민주화에 착수하여 로마 가톨릭교의 공식적인 지위를 박탈했으며, 자유기업제도와 인권을 보장했다. 또한 여러지방에 제한적 자치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바스크분리주의집단(ETA)의 테러 할동은 계속되었다. 1978년 입헌군주제를 표방한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1982년 선거에서 사회 노동당이 승리해 펠리페 곤살레스 마르케스를 총리로 한 사회주의 정권이 등장했다. 스페인은 한때 서유럽에서 상대적으로 이질적인 국가였지만 차츰 여타 유럽 국가들에 적절히 동화되었으며, 1986년에는 EEC의 일원이 되었다. 1989년 10월 사회노동당이 재집권에 성공했다. 1990년대 들어서도 중앙정부와 에우스카르디·카탈루냐 등 자치정부와의 사이에 긴장관계가 계속되었다. 스페인 정부는 주요 무역 파트너인 유럽공동체(EC)와의 보다 긴밀한 정치적 연대와 대외적인 국가신임도의 제고를 위해 힘을 쏟았다. 1992년 스페인은 세비야 국제박람회를 비롯해 바르셀로나 올림픽경기대회, 그리고 콜럼버스 신대륙발견 500주년 기념행사 등을 대대적으로 개최했다
1936년 스페인 내전 결과 약 100만 명의 스페인인들이 죽거나 이민을 떠났으며, 스페인은 혹독한 정치탄압과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프랑코는 헌법을 대신해 일련의 기본법으로 40여 년간 스페인을 자의적으로 통치했으며, 국가원수·총리·군총사령관과 유일한 합법정당인 팔랑헤당의 당수직을 겸임함으로써 절대권력을 행사했다. 1945년 이후 서방 강대국들로부터 노골적으로 적대시당한 스페인은 UN에서 추방당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프랑코는 교회와 결탁하고 UN으로부터의 추방을 민족단결이라는 미명하에 지지세력을 결집하는 계기로 이용했다. 그러나 냉전체제하에서 미국은 스페인에 대한 적대관계를 철회할 수밖에 없었으며, 1953년 스페인은 미국과 협정을 맺고 군사기지를 제공하는 대신 재정지원을 받았다. 이무렵 스페인은 비교적 안정된 상태를 누렸다. 1960년대에 시작된 경제기적은 1973년까지 계속되어 스페인은 전통적인 농업국가에서 신흥공업국으로 변모했다.
스페인과 한국의 관계는 1593년 일본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신부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éspedes)가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병력을 따라 조선에 1년간 체류했던 것을 최초의 기록으로 한다. 이후 선교사 루이스 데 구스만(Luis de Guzman)과 블라스코 이바네스(Blasco Ibanez)의 기록을 통해 스페인에 점차 조선이 알려지게 되었다.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수립된 것은 1950년 3월이었으며, 1970년 4월에는 주스페인 상주 대사관이, 1973년 10월에는 주한 스페인 대사관이 개설되었다.
정상외교는 1995년 6월 국제연합에서 김영상 대통령과 곤잘레스(Gonzalez) 총리가 개별 회담을 갖은 이래 1996년에는 카를로스(Carlos) 국왕이 국빈 방한 했으며, 2007년 2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스페인에 국빈 방문했다. 또한 2008년에는 북경에서 개최된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가 계기가 되어, 이명박 대통령과 사파테로(Zapatero) 스페인 총리가 개별 회담을 갖고 양국간의 협력 방안을 논의한 바 있다. 비극적인 내전과 급속한 경제발전, 민주주의 정치체제 등 유사한 역사적 사건들을 지나온 양국은 국제사회에서 건전한 협력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알람브라궁전 -1492년 에스파냐 역사에서 매우 기념비적인 위업 두 가지가 달성되었다. 에스파냐는 이탈리아 탐험가 콜럼버스를 지원하여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는 데 일조했고 에스파냐의 마지막 이슬람 왕조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그라나다왕국을 점령하여 오랜 염원이던 통일을 이루었다. 그라나다왕국은 에스파냐의 기독교 군주인 페르디난도와 여왕 이사벨라에게 항복함으로써 700년 이상 계속된 이슬람의 역사를 마감했다.
원래 그라나다는 아랍인들에 의해 고대도시 일리베리스 근처에 세워진 도시인데 이 고대도시를 중심으로 무하마드 이븐 나스르(Muhammad ibn Nasr)가 나스르왕조(그라나다왕국, 1231~1492)을 열면서 번창했다. 14세기 그라나다왕국은 예술과 과학이 번성했고 학교와 사원 · 공중목욕탕이 즐비했으며 화려한 이슬람문화를 꽃피웠다.
그라나다왕국은 군사력이 아니라 외교적 수완으로 안달루시아 지방의 다른 이슬람 세력보다 2세기 이상 더 오래 에스파냐 기독교도들의 공격(국토회복운동)을 버텨낼 수 있었다. 나스르왕조는 이슬람 세력인 모로코의 마린왕조와 에스파냐 기독교도로부터 협공을 받고 있었는데 그들의 공격에 그라나다왕국이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븐 나스르는 놀라운 결단을 내렸다. 이슬람이 아니라 기독교 진영에 가담한 것이었다. 그는 에스파냐의 페르난도 3세와 강화조약을 체결하면서 해마다 조공을 바치고 전쟁이 일어나면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나스르왕조는 이슬람과 기독교 세력 간의 알력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안달루시아 지역의 또 다른 막강한 이슬람 세력인 코르도바가 멸망할 때에도 폭풍에 휘말리지 않았다.
그라나다에 근거지를 정한 이븐 나스르는 한때 베르베르인들이 축성한 알카사바(Alcazaba)라는 요새가 서 있던 언덕 위에 궁전을 짓기 시작했다. 폐허가 된 요새를 코란에서 묘사한 지상천국으로 바꾸어놓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토목전문가로 하여금 시에라네바다산맥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개울의 물줄기를 바꾸어 운하와 수조 · 분수 · 정원에 물을 댈 수 있도록 관개수를 개발하게 했다. 그의 계획은 여기까지였다. 기록에 따르면 “1238년 술탄은 알람브라라는 궁전으로 올라가서 조사한 뒤 성의 토대를 표시하고 건물을 관리하라고 명했다. 성벽은 그 해가 가기 전에 완성되었다. 술탄은 또한 강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수로를 텄다.”
뛰어난 이슬람 건축물인 알람브라궁전을 완성하는 것은 그의 후계자들의 몫이었다. 알람브라란 이름은 ‘붉은색(alHamra)’이라는 아랍어에서 유래했다. 성벽을 지을 때 붉은색 점토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알람브라궁전에는 남부 유럽적이고 동양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두 개의 커다란 정원이 있는데 그 주변에 많은 방이 배치되어 있다. 궁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정원이 아라야네스 정원이다. 아라야네스는 그라나다 정원의 전형적인 모습을 간직한 곳인데 주변을 둘러싼 건물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다
아라야네스 정원에 면한 옛 성채인 코마레스탑 내부에 대사의 홀이 있다. 살라 데 로스 엠바야도레스(대사의 홀)는 1334~1354년에 건설되었는데 방에 들어서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그림들이 숲을 이룬다. 건물 내부를 장식하는 장식 띠들 사이에 있는 하얀 대리석에는 알라의 이름과 코란의 구절이 수천 번 새겨져 있다. 천장은 모가라베스라고 하는 종유석 장식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데 이슬람의 우주철학에 나오는 일곱 개의 천국을 묘사했다고 한다. 아라야네스 정원에서 왼쪽으로 가면 유명한 사자궁전이 나온다. 대리석 기둥 124개로 받친 아케이드로 사방이 둘러져 있는 이 궁전의 분수에는 설화석고로 제작한 수반이 있는데 여기에 모인 물이 열두 마리 사자들의 입을 통해 나온다. 이곳은 원래 하렘으로 왕 이외의 남성은 출입금지였으며 2층에는 후궁들이 살았다.
자궁전 양옆으로 알람브라궁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바닥에 깐 두 개의 대리석 판에서 이름이 유래한 살라 데 라스 도스 에르마나스(Sala de las dos Hermanas, 두 자매의 방)와 다른 하나는 살라 데 로스 아벤세라헤스(Sala de los Abencerrages)이다. 두 방 모두 뛰어난 솜씨로 채색하고 유약을 바른 채색타일로 재벽을 마감했다. 특히 살라 데 로스 아벤세라헤스의 스투코 천장은 종유석이 5000개의 벽감을 형성해 마치 벌집처럼 보인다. 종려나무를 연상케 하는 가는 기둥, 정원을 감싸고 있는 아늑한 회랑, 종유석 모양의 수많은 아치 등이 한데 어우러져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알람브라궁전의 자재로는 목재 · 벽돌 · 석고 · 갈색타일을 사용했다. 석각은 매우 드물게 사용했고 대리석은 포장 · 기둥 · 대접받침에만 사용했다. 벽 · 천장 · 바닥의 장식은 주로 나무 · 타일 · 석고로 되어 있다. 특히 아름다운 살라 데 로스 엠바야도레스의 천장은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여러 가지 색체의 타일이 실내와 외관의 넓은 공간을 채워 빛의 반사에 의해 강렬한 색조감을 느끼게 한다. 특별한 조각이 없이 이들 재료만으로 화려함과 우아함을 표현한 기술은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온 것처럼 느끼게 할 정도인데 당대의 건축기술이 매우 발달했음을 보여준다.
심 산
우측 카사바 성탑▼
알카사바 요새 ▼
메수아르궁▼
나스르궁전,
나스르 궁전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왕의 집무실이자 생활 공간으로 사용된 곳이다.
14세기 중반 이후 건설되었으며
그 이후로도 수차례 증축, 개축되었다.
나스르 궁전에서 유명한 아라비아 문양의 타일들과
아라야네스정원, 사자의 정원 등을 통해
이슬람 문화가 녹아져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사자궁전 ▼
성 니콜라스 전망대 ▼
헤네랄리페 정원 ▼
성을 지키전 대포(성채에 설치)▼
카를5세궁 ▼
아라야네스 정원 ▼
아라야네스 정원 ▼
그라나다 대성당 ▼
알바이신 지구 ▼
알카사바성 ▼
알카사바 성 ▼
카를 5세 궁 ▼
세바스챤 정원▼
이슬람 문양▼
알람브라정원 ▼
파르탈 정원▼
아라야네스 정원 ▼
린다하라 정원▼
두 자매의방▼
사자궁전 ▼
카를5세 궁전 ▼
1 층은 스페인 이슬람 미술관으로, 2 층은 알함브라의 공예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이 있다.
한 때 투우장으로 쓰였으나 지금은 여름에 그라나다 음악 무용제 장소로 이용된다 ▼
알카사바성▼
알카사바성▼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