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30일 (음 9.16)
어제는 배움지기 일기를 걸렀습니다.
평소의 성격대로라면 밀린 날까지 애써 채워서 썼겠지만
이제 그러지 않아보려 합니다.
가버린 날은 그렇게 가버린대로
의미가 있지 않겠나 싶어져서요.
#1.
어제는 음력 9월 15일.
보름달이 어여뻤던 날이었습니다.
'아, 그렇다면 오늘이 작년 바로 그 날?'
작년 11월 10일이 역사적인 날이라고들 했잖아요.
마을 이장님들, 동문분들께서 기분좋게 마음을 모아주셨던 날이라고,
그래서 이 날을 개교기념일로 삼아도 좋겠다고도 했지요.
그런데 휴대폰 달력을 다시 보니,
작년 11월 10일은 음력 10월 15일이었더군요.
올해 윤3월이 끼어있어 아리송했던 모양입니다.
올해 음 10.15 = 양 11.28
내년 음 10.15 = 양 11.17
음력 9월 15일이면 어떻고, 10월 15일이면 어쩌리요.
우리가 한마음 모두어 그 날을 기리면 좋겠다 싶습니다.
#2.
어제부터 아이들과 마을 포행길에 나섰습니다.
포행(布行)
스님들이 참선을 하다 잠시 졸음을 깨기 위해 한가로이 뜰을 걷는 것이라는데요,
그만큼 정성스럽게 느릿느릿 자연과 동화되어 걷는 것에 의미를 둔다고 들었습니다.
사랑 (민들레. 너구리)
어린 (신난다. 아몽)
배움 (구랑실. 제니스)
이렇게 세 모둠을 가위바위보로 나누었어요.
같은 걸 낸 두 사람씩 먼저 짝을 지어갔는데,
해 놓고 나니 절묘하단 생각이 들었어요.
남녀 짝꿍...??!!
어제 와온. 하사. 계당 마을에 이어
오늘은 상내. 선학. 농주 마을을 걸었습니다.
먼 마을들은 차량 샘들께서 흔쾌히 마음을 내어 주셔서
오고 가는 길에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침산책을 안하고 바로 배움터에 들어와 가족별로 도시락을 쌉니다.
덕분에 배움지기들도 오자마자 밥 짓고 김치 챙기느라 아침이 분주하지요.
오늘은 제가 일이 있어 너구리에게 밥짓기 부탁을 했는데요,
밥솥을 열어보니 검정콩이 하트 모양으로 놓여져 있지 뭐예요.
아이들이 와! 감탄을 합니다.
정작 너구리는 우째 그리 되었는 지 영문을 모르고... 거 참...
암튼 덕분에 기분좋게 도시락을 쌌지요.
#3.
오늘 저희 배움 모둠은 농주마을로.
왜, 배움터 들어오시다 보면 '弄珠里'라고 커다란 비석이 세워진 곳 있잖아요?
(옆에 '파람바구'라고 새겨져 있고. 여기에도 전설이... 나중에 애들한테 들으세요^^)
농주마을은 '용이 구슬을 가지고 논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龍山이 바로 앞에 있잖아요.
오늘 가 보니 갈대가 흐드러지게 패어 가히 장관이었습니다.
태식.현보가 쌍으로 곰돌이차를 (자기들 말로는 간발의 차로) 놓쳐
시내버스를 타고 들어오는 바람에 (or 덕분에) 나머지 아이들은
이 갈대밭 사이에서 술래잡기를 하고 원없이 놀았습니다.
"애들이 가자고 할 때까지 있어보게요."
이게 구랑실 스타일
"자, 태식.현보 도착했다. 가자!"
이게 제니스 스타일
어디선가 들려오는 고운 선율...
그 소리를 따라가니 두 소녀가 갈대숲에 앉아 리코더를 불고 있어요.
구름 위에 앉아있는 어린 선녀들 같았어요. 어찌나 예쁘던지요.
이게 솔비재희 스타일.
그걸 본 현수,
"선생님, 요즘 쯔쯔가무시 조심해야 하지 않나요?"
이게 현수 스타일.
다들 도시로 돈 벌러 나가고
이제는 마을 가구수가 총 12호밖에 안되는데
최고령 할머니가 85세, 최연소 할머니가 67세,
조금 서글픈건 온 마을 통틀어 할아버지는
딱 두 분 밖에 안 계시다는 것!
"내가 삼십에 혼자된 후로 지금껏 뼈빠지게 일해가매 애들 다 키웠어..."
올해 칠십다섯이라시는 할머니, 말씀 끝에 한이 맺혀있습니다.
아이들과 고구마순을 벗기시는 걸 도와드렸습니다.
정신대 끌려가기 싫어 열일곱에 시집 오셨다는
곱디고운 85세 할머니도 뵈었어요.
'애들 추운디 집에 와서 뜨신 데서 밥 맥이라'시며
자꾸만 손짓을 하셨어요.
농주가 워낙 좁아 아이들 성에 차지 않았나봐요.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웃 송잠마을까지 달려갔더라구요.
97세 최고령 할머니를 뵙고 온 아이들은 거의 흥분 상태.
새싹 다빈이까지 얼굴에 화색이 돕니다.
나이를 말씀하시며 눈물을 글썽이셨다나요?
현수, 보민, 효건, 은성이가
동생들을 챙기고 다니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특히 씨앗 건영. 태언. 연호는 여태 섞여보지 못했던
형누나들과 함께 하니 그저 신이 나는 모양입니다.
#4.
점심 도시락은 마을회관(일명 glass house)에서.
(어제 계당마을에선 마을 당산나무 아래서 먹었는데)
여럿이 함께 먹으니 어찌나 맛있는지요!
센스쟁이 엄마들이 오늘 반찬 메뉴를 살짝 비틀어
밖에서 먹기 편하고 맛있는 걸로 준비해 주셨더라구요.
어젠 건영이가 제 밥 한 숟갈과 김치를 더 달라더니
오늘은 준혁이, 재희가 밥이 모자라다며 슬쩍 합니다.
기분이 걍(!) 좋아집니다.
아이들 간식으로 젤리를 나눠주는데요,
구랑실이 머리를 써서 어제 세 개씩 나눠주시며,
'내일 비닐껍질 가져 온 수 만큼 젤리를 주겠다' 하셨지요.
효과 만점!!
그런데 잠시 후 건영이가 다가오더니,
"나 껍질 하나 주웠는데?" 하며 처분을 기다립니다.
눈이 마주친 구랑실과 저는 웃음을 참으며,
"그럼 우리 건영이는 내일 네 개 줘야지."
그랬는데 오늘 건영이가 내민 껍질은 장장 여섯 개!!
오늘은 개인별 퀴즈대회를 열었어요.
자기가 공부한 내용을 문제 내는 사람한테 젤리 한 개,
맞힌 사람에게 한 개, 아무도 못 맞히면 출제자가 두 개.
씨앗부터 8학년까지 올라갔는데요,
오! 아이들의 실력이 대단하대요.
(훗날 발표 시간 있으니 그때까진 쉿!)
#5.
1시경 배움터로 돌아오니 밴드 선생님이 오셨답니다.
7-8학년 밴드들(지금까진 이름이 '땀내밴드'인디...)이
콘테이너 연습실로 들어가고 저도 따라...
드럼. 베이스. 기타 두 대 조율하는데만 20분이 걸렸습니다.
드럼 나사를 조이고, 베이스 배터리를 갈고, 튜닝하고...
"야, 니네 튜닝은 했냐?"
"네!"
"언제?"
"어제요."
"어제 튜닝했다고 오늘도 악기가 그 소리를 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곁에서 보니 된소리 깨나 듣더군요.
그런데 현수. 승보. 예승. 윤수의 표정은 밝기만 합니다.
"저... 선생님, 보컬은...?"
"그냥 신나게만 부르세요."
"(기어가는 소리로) 네에..."
#6.
이어지는 운동회 연습.
온몸풀기(국민체조란 용어 대신) -> 더불어 달리기 (이인삼각)
-> 줄다리기 -> 이어달리기 -> 박 터뜨리기까지 이어지는 총연습.
이제 아이들이 제법 줄도 서고, 제 갈 길도 갑니다.
사랑.배움팀이 이어달리기에서 반바퀴 이상 차이가 나
오늘부턴 긴급 처방을 내렸습니다. 7-8 남자선수 교체.
그 덕이었을까요?
오늘은 정말 한발짝 차이로 나란히 결승선 도착.
그동안 간극을 줄이기 위해 배움지기들이 중간에 들어가
속도 조절을 해 주곤 했는데 구랑실이 이건 아니다 하셨고 다들 동의했습니다.
온 힘을 다 해 달리고, 그 결과에 흔쾌해 지는 것이 진짜 공부다 이거죠!
점점 무르익어 갑니다.
잔치준비가 우리를 절로 신명나게 합니다.
그 날은 나를 위한 날이라고 하셨죠?
그래요, 그런가봐요.
우리 아이들도 그걸 잘 배우면 좋겠어요.
#7.
간밤에 불던 강풍.
밤새 교문에 달아두고 온 6m 플래카드 생각 뿐.
아니나 다를까 아침에 보니
훌러덩 민망하게 뒤집어져 있더군요.
'마을아 미안해...'가 '플래카드야 미안해...'로 바뀌어야 할 듯.
그래도 바람개비와 스컹크가 바람을 예측,
일부러 아랫도리를 고정하지 않고 가셔서 찢어지지는 않았더라구요.
오늘은 삼거리에 대형 9m 플래카드를 걸었습니다.
나빌레(성우파)와 봄숲, 7-8학년 멋진 청년들(!)이 가세했습니다.
아직 직접 못봤는데 아주아주 고된 작업이었답니다.
애쓰셨어요. 고맙습니다.
지금도 창밖에 바람이 불어대네요.
왜 잔치 전엔 이리도 바람이 불까요.
잔칫날 온전한 플래카드를 본 적이 없네요.
오늘은 9m에게 너에게 빛을 보내야 하니...?
#8.
오늘 은행나무 집에선
풍경소리 11월호 발송 작업으로 바쁜 손길이 오갔습니다.
영혼이 맑은 사람들께 보내드리는 거룩한 이 일이
이제 광주에서 순천으로 옮겨왔습니다.
좋은 기운도 함께 받았습니다.
#9.
내일도 마을 포행을 갑니다.
가면 갈수록 왜 가야 하는 지, 왜 만나야 하는 지 저절로 알게 됩니다.
어젯밤 잔치영상을 만들며 왜 눈시울이 붉어졌는지... 알 것 같아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10.
밴드연습을 마치고 아이들과 나서는 길,
달빛이 앞마당을 환히 비추네요.
"달빛 하나만 있어도... 달빛 하나만 있어도..."
혼자 중얼중얼.
아, 언제 우리 달빛 포행 가실래요?
첫댓글 온몸풀기, 더불어리기 좋아요
아! 농주에도 정신대 끌려갈 뻔 한 조선의 여인이 계셨군요.....잊지 말아야 합니다. - 역사를 잊으면 반드시 반복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