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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1장
1.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1-6)
스가랴는 학개와 동일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따라서 스가랴 선지자가 외치는 말도, 바벨론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을 재건축 하는 유다 백성을 향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미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축하고 있는 유다 백성들을 향해서, 선지자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3절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떠났음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이미 하나님에게로 돌아온 사람에게, 돌아오라고 말하는 것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는 유다 백성은, 하나님에게서 떠난 자란 뜻이 되는데, 이것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유다 백성에게, ‘내게로 돌아오라’고 외친다면, 그들의 상황과 형편을 기준으로 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성전을 다시 건축하고 있는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외친다면, 그것은 그들의 상황이나 형편과 상관없이, 그들을 하나님에게서 떠난 자로 여긴다는 뜻이 됩니다. 곧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성전을 건축한다고 해도, 여전히 하나님에게서 떠난 상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하나님에게서 떠난 자로 봅니까, 아니면 돌아온 자로 봅니까? 아마 자신을 하나님에게서 떠난 자로 보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쨌든 교회를 다니고 있고, 그것은 곧 하나님을 믿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났다면, 교회를 다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떠나고 돌아오는 것은, 교회를 떠나고 다니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다니고, 사람들이 말하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보시기에는 하나님에게서 떠난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일까요? 4절을 보면 ‘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고 하면서, 조상들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 돌아오라는 하나님이 말씀을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한 조상의 악한 길, 악한 행위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보이는 것을 신뢰하는 것을 뜻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것을 신뢰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우상을 섬기는 길에서 벗어나지를 않았고, 보이는 성전과 성전에서 제사하는 자신들의 행위를, 신앙으로 붙드는 삶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 백성이 비록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을 다시 건축하고 있다고 해도, 그들의 사고방식이 조상과 다르지 않다면,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곧 하나님에게서 떠난 상태로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에 돌아온 유다의 실상이었기 때문에, ‘내게로 돌아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하셨고, 그 말씀대로 모든 것을 인도하시고 이루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고 신뢰하는 것이 신앙이고, 그것이 곧 여호와에게 돌아온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성도와 함께 하시고, 그들을 위로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냥 막연하게 신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시고,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도는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그같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이 원하는 자기 인생을 살고 싶다는 욕망으로, 자신이 물려받을 것을 받아서 떠났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돼지가 먹는 것으로 배고픔을 달래야 하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을 때, 아버지로부터 떠난 것이 곧 인생의 실패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돌아가는 그 심정은 아들이 아니라, 일꾼의 하나로 여겨도 좋다는 심정이었습니다.
만약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다시 돈을 받아서 실패를 만회하고, 기어코 원하는 인생을 살겠다는 의도로 돌아간 것이라면, 그것은 아버지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신에게 머물러 있는 것이고, 따라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줄 힘을 바라보고, 그것을 신뢰하는 것일 뿐입니다.
몸은 아버지에게로 향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아버지에게서 떠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다 백성들의 형편이었던 것입니다.
진심으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아버지에게서 떠난 것이 곧 실패라는 것을 깨닫고, 품꾼의 하나로 여김 받아도 좋으니까, 아버지의 집에 있겠다는 그 심정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함께 하는 그 집에 거하는 것이, 곧 기쁨이고 복임을 아는 것입니다.
유다가 다시 건축하는 성전은, 하나님이 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덮어주시는, 자비의 하나님으로 함께 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상징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다는 성전을 통해서, 그리고 성전에서의 제사를 통해서, 자신들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전에서 제사하는 자신들의 행위를 신뢰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행위를 근거로 해서, 복을 받기를 기대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서 떠나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는 무엇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온 자가 받고 누릴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모든 죄를 덮으시고 용서하시는 사랑이고 자비하심입니다. 이 사랑과 자비를 구하는 자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에게 돌아온 자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버지를 떠난 것이, 곧 실패를 의미하고 저주를 의미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을 기준으로 성공과 실패를 논하지 않습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그대로 있든, 예루살렘에 돌아왔든, 중요한 것은 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죄를 덮어주시고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돌아온 것에 해당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 돌아온 그들에게는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성도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전을 건축한다고 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하고 제물을 바친다고 해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멸망하기 전 유다에게는 화려한 성전이 있었고, 제사와 제물을 바치는 일에도 열심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멸망을 받은 것은, 하나님에게서 떠났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떠난 자로 제사하고 제물을 바쳤을 뿐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돌아온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까? 그런 것이라면 여러분에게는 자신이 하나님을 떠난, 실패자임을 절감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비와 긍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할 것입니다.
2. 환상(1) - 처음 두 가지의 환상(7-21)
사람들은 편한 세상을 원합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나라나 주변 환경이나 형편 모든 것이, 자기 육체를 편하게 해 줄 수 있는 조건으로 구축되기를 열망합니다. 하지만 그 열망은 언제나 좌절로 이어질 뿐입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편한 세상은, 주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죄를 지은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법칙은, 땀 흘리고 수고하며 살아가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도 죄 지은 인간에게 주어진 몫이기 때문에,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사람이 편한 삶을 추구한다는 것부터가,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분에 넘치는 헛된 망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마라에 이르렀을 때,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이 모세를 원망했고, 하나님께서 물을 달게 하심으로 마실 수 있게 하십니다. 그처럼 우리는 인생의 맛이 쓸 때, 하나님을 원망하며 단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그런 방식으로 인도하시고 다스리지 않습니다. 쓴물을 달게 하셨던 것은, 하나님께서 비록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신다고 해도,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섬기는 자로 살아갈 뿐임을 드러내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실 수 없는 쓴 물을 만난다고 해도, 그 쓴물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스가랴 선지자가 본 8가지의 환상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환상에 대한 내용입니다. 먼저 8절에 보면, 한 사람이 붉은 말을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에 서 있고, 그 뒤에는 붉은 말과 자줏빛 말과 백마가 서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입니다(10절). 이들이 땅에 두루 다니면서 본 결과는, 온 땅이 평온하고 조용하더라는 것입니다(11절). 평온하고 조용한 세상이야 말로, 온 사람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반면 유다의 형편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도 평온하고, 조용한 세상을 살았습니까?
스가랴는 유다가 패망하고 바벨론에 끌려가서, 칠십년 동안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가, 겨우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축하던 시기에 활동을 했습니다. 따라서 스가랴가 활동하던 시기의 유다는, 조용하고 평온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12절 “여호와의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세상은 평온하고 조용한 삶을 누리게 하시면서, 유다는 하나님의 노하심으로 칠십 년을 고생했는데, 언제까지 그들의 고생이 계속되게 하실 것입니까?’라는 말입니다.
이 같은 천사의 말에 대해 하나님께서 15-17절의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안일한 여러 나라들을 심판하시고, 예루살렘을 다시 건축하여, 번성하고 풍부한 곳으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일한 여러 나라들은,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에 긍휼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내신 영으로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을 사는 성도와, 기존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없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위한 인생만을 살아가기 바쁜 사람들은, 무조건 아무 일 없이 조용하고 편안한 인생만을 원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구하는 것도, 인생에 닥칠 수 있는 모든 불행으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신을 찾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힘들고 어려우면, 힘든 세월이 빨리 끝나기만 바랍니다. 인생은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하면서, 즐거운 세월이 주어지기를 학수고대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안일함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말 탄 사람이 두루 다니며 본 세상은, 조용하고 평온했습니다. 반면에 유다는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누가 봐도 조용하고 평온한 세상이 복을 누리는 것이겠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세상을 안일한 여러 나라들이라고 말씀합니다.
평온하고 조용해서 게으르게 산다는 것이 아니라, 조용함과 평온함에 파 묻혀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 대해 관심이 없고, 구하지도 않는 것을 안일한 것으로 말씀한 것입니다.
조용하고 평온한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 관심을 둘 이유가 있겠습니까? 아쉬울 것이 없는데, 하나님을 찾을 필요성을 느끼겠습니까? 하나님의 긍휼이 없이도, 원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전혀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이 곧 안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심판하시고, 유다를 다시 풍성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과연 복 있는 자입니까? 육체적으로 편안한 삶을 산다고 해서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세상은 이러한 복을 추구하지만, 종국에 가서는 그것도 복이 아님이 드러납니다. 편안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심판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짐 받을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할 줄 아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조용하고 평온한 인생을 누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아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야 말로 진심으로 복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의 고통은 의미 없는 것이 아니고, 단순한 징벌도 아닙니다. 유다 역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대해, 관심이 없던 안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의 삶이, 풍요로워지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외적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생각이나 추구하는 것들은,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과 동일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고통으로 끌어가시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은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 일하시는 분임을 신뢰하는 백성으로 세우고자 하십니다.
3절에서 ‘내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백성으로, 하나님께 나올 것을 촉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다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백성으로 나올 때,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자비와 긍휼을 보게 될 것이고,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성도 된 자가 추구하고 신뢰할 것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조용하고 평온한 삶을 누구나 원하지만, 그것을 복된 삶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복은 육신을 기준으로 판단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기준 되어 판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삶이 힘들다고 해도, 그 힘듦이 나를 돌아보게 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생각하게 하며, 나를 하나님께로 끌어가시기 위한 사랑이고 자비라는 것을 깨달을 때, 힘들고 어려운 것들은 오히려 크나큰 유익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이러한 성도가 ‘고난도 내게 유익이라’는 기도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안일하지 않은 삶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18절부터 보면, 4개의 뿔이 보인 두 번째 환상이 있습니다. 4개의 뿔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흩뜨린 뿔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대장장이 네 명을 보이시는데, 그들은 유다 땅을 흩뜨린 여러 나라의 뿔들을 떨어뜨리기 위해 온 자들입니다. 곧 안일한 여러 나라들을 심판하기 위한 대장장이들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용하고 평온한 세상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보내신 대장장이들이, 세상을 깨뜨리기 위해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이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배우며, 이 배움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안목이 우리에게 있다면, 어려움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평온하다고 해서 안일함으로 나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모든 마음과 시선을 주께 두게 하는데 있습니다. 자기 백성을 이러한 성도로 세우시기 위해, 영을 보내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세상이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가 곧 새로운 세상을 사는, 새로운 백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육신의 편안함보다는, 새로운 백성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복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