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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 わたし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2026년 3월 8일 주일예배)
본문 로마서 5:1~11
롬 5: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2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오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4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5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제 때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7 의인을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은 드뭅니다. 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10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일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더 확실한 일입니다. 11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1 このように、わたしたちは信仰によって義とされたのだから、わたし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神との間に平和を得ており、 2 このキリストのお陰で、今の恵みに信仰によって導き入れられ、神の栄光にあずかる希望を誇りにしています。 3 そればかりでなく、苦難をも誇りとします。わたしたちは知っているのです、苦難は忍耐を、4 忍耐は練達を、練達は希望を生むということを。 5 希望はわたしたちを欺くことがありません。わたしたちに与えられた聖霊によって、神の愛がわたしたちの心に注がれているからです。 6 実にキリストは、わたしたちがまだ弱かったころ、定められた時に、不信心な者のために死んでくださった。 7 正しい人のために死ぬ者はほとんどいません。善い人のために命を惜しまない者ならいるかもしれません。 8 しかし、わたし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わたしたちのために死んでくださったことにより、神はわたしたちに対する愛を示されました。 9 それで今や、わたしたちはキリストの血によって義とされたのですから、キリストによって神の怒りから救われるのは、なおさらのことです。 10 敵であったときでさえ、御子の死によって神と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であれば、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今は、御子の命によって救われるのはなおさらです。 11 それだけでなく、わたし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わたしたちは神を誇りとしています。今やこのキリストを通して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からです。
지난 주일에는 사순절 두 번째 주일 성서일과의 본문을 통해서 부르심과 약속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내용은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마찬가지 아브람을 축복하시기 위해 부르신 그 부르심으로 오늘날의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일상과 인생을 평가할 때 노력에 의한 실력으로 얻은 결과로만 헤아리지 않고, 축복의 근원이 되게 하실 것을 약속하시며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볼 수 있는 영적인 감각이 회복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플러스 인생이라는 제목의 예화가 있습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귀하게 자란 젊은이가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절망에 빠져 거리를 떠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겨울, 거리에 쓰러져 죽어 가던 그를 한 늙은 노인이 구해 주었습니다. 젊은이는 노인의 배려로 몸을 녹이고 허기를 달랜 뒤 노인과 함께 길을 걸었습니다. 노인은 멀리서 빛나는 교회의 십자가를 가리키며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저게 뭘로 보이나?”
젊은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십자가 아닙니까?”
“그렇지, 그리고 또 다른 것은 안 보이나?”
젊은이는 십자가를 한참이나 바라보았지만, 그건 그냥 십자가일 뿐이었습니다. 잠시 뒤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더하기’ 표시로는 안 보이는가?” 그제야 젊은이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아, 그렇군요. 더하기 표시네요.”
“아마도 자네는 지금껏 뺄셈만 하며 살아왔나보군. 그래서는 될 일도 안 되는 법이야. 이제부터는 덧셈하는 훈련을 하며 열심히 일해 보게나. 자네의 인생은 크게 바뀔 걸세.”
성경과 그리스도의 사랑인 복음을 믿는 삶은 이 예화에 나오는 것처럼 이미 플러스를 얻고 시작하는 인생입니다. 건강한 교회에서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 이미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을 선포합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은 어떤 실력의 산물이 아닌 플러스 된 선물로 받는다는 것도 선포하고 있지요. 바울은 제자인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5)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혹은 구원을 위한 모든 값을 예수님께서 이미 지불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8-9)
그러니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 오늘 성경의 본문도 자신의 공로나 혹은 인간적으로 선을 쌓는 것이나, 공덕의 결과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지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구원의 문을 열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열린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삶. 그분과 함께 화해하고, 관계를 회복하고, 소통하는 삶이 구원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액운이나 불행에서 지켜주는 부적따위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복되고 놀라운 보호 아래에 있음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증거이며 증표라고 해야 합니다.
기복적인 종교나 미신을 믿는 사람들은 부적을 그저 달고만 다닙니다. 하지만, 성도는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이미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에 있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오늘의 본문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평화를 누린다고 선언합니다. 구원이란 인간이 어떻게 노력했느냐로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느냐로 받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확실하게 눈이 열리길 축복합니다.
그럼 그렇게 구원의 문을 열고 들어간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일까요? 여기서 ‘평화’란 ‘평안’ 혹은 ‘평강’, ‘평온하여 안심할 수 있는 모습’이라는 말로 해석되는 ‘에이레네’라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안에서 안도감을 느끼며 살 수 있는 일상생활을 경험하게 된다는 뜻인데요.
하나님 안에서의 ‘평강’, 혹은 ‘평화’란 세속적인 환난이 몰아쳐오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환난을 피할 수 있을까를 또 염려하며 몸부림을 치거나 안절부절하며 불안해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환난이 다가오는 것에 대해 오히려 기분 좋은 긴장감을 느끼게 되는데요. 마치 학교 운동회에서 릴레이 선수로 뽑힌 어린이가 하루라도 빨리 운동회 날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지요.
따라서 예수님을 의지하는 성도는 환난을 만날 때 비로소 자신의 믿음이 어떠한 능력인지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3절에 ‘환난’이 ‘인내력’을 가져온다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환난’이라고 번역된 ‘뜨리케신’이란 원어는 ‘압박’, ‘고뇌’, ‘핍박’, ‘고통’ 등을 의미합니다. 특히 예수를 믿고 나서 새롭게 생겨나거나 증가하는 내적, 외적인 고민거리, 현실적인 불편함, 그리고 그에 따르는 양심의 가책, 영적 혹은 심리적 갈등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해 근심할 일이 생기는 것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후 7:1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환난’이나 ‘고뇌’는 우리에게 인내력을 연습시키는 훈련 교관과 같은 것이지요.
이 때의 ‘인내’에는 ‘의연함’이라는 의미도 들어 있는데요. 그래서 ‘인내’란 단순히 고통과 좋지 않은 일을 만났을 때 단지 시간이 흐르기만 고대하면서 일상을 방관하는… 그래서 겨우겨우 마지못해 견디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하는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섭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태도, 그리고, 마침내 그 부르심과 약속의 보화를 발견하게 된 사람의 자세를 말합니다.
인내가 가져오는 ‘단련된 인격’은 시험, 시련, 끈기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특별히 금화 동전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불로 달궈서 검사했던 것을 뜻하던 말이었다고 합니다. 즉 고난과 환난의 때에 인내함으로 결실하는 단련된 인격의 열매는 나의 신앙이, 나의 사람됨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혹은 깊은 지 얕은 지, 또는 강한 지 약한 지를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내면의 견고함에 대해서 하나님께 대하여도 증명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될 것입니다. 또한 자기 스스로에게 증명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대부분 신도(神道)의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는 일본인들의 사회적 무의식 속에는 잠재적인 원령(怨霊)을 만들지 않기 위해 현실에서 서로에게 표면적인 배려를 베푼다고 분석하는 이론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원한을 품으면 결국 나의 현실생활의 영역에 해코지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미리 친절을 베풀어 차단하겠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회심리적인 배경에서 가면을 써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일본사회에서 병리적인 현상인 引きこもり, 혹은 우울증을 겪는 이들이 많이 생긴다는 주장과 의견도 있습니다.
그와 대조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축복의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원수까지도 사랑하신 예수님의 적극적인 사랑입니다. 비록 인간적인 입장에서는 원수로 여겨지는 이들이라도, 그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로 여기며 주님의 힘을 빌어 함께 사랑하는 것이 원수 사랑의 핵심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 없었다면 결국 우리는 각자의 업보나 혹은 행위의 결과에 따라서 정죄받고 인과응보를 따라 멸망하는 길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벽을 허물어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 2:14)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도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넘쳐흐르도록 부어 주시길, 그래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능력과 기쁨이 참고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이러한 연단은 마침내 소망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비록 현실의 일상은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비전, 그리고 뜻과 섭리하심이 서려 있다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망입니다. 이 소망의 전제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반드시 실현된다는 복음의 약속을 바라보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자녀들이 엄마에게 아무리 꾸중을 듣고 혼이 나더라도 엄마는 반드시 나에게 저녁을 차려 줄 것이라는 너무도 명확한 사실에 대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구원의 문에 들어서면 반드시 천국잔치가 마련되어 있는데, 그것을 마음에 품은 소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바로 환란을 견디고, 고난을 견디고, 미움을 견디고, 죄의 유혹을 견뎌내는 믿음인 것이지요. 모든 악한 것을 이겨내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하나님께서 넘치게 부어 주십니다. 성령의 충만하심과 그 기름 부으심으로 우리는 인내하게 되고, 연단을 흔쾌히 받으며, 소망을 바라보며, 믿음에 충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내 힘과 의지와 노력과 실력으로 견디고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으로…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이 모든 것을 이겨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온전히 우리를 사로잡으신다고도 할 수 있지요.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기름부으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선을 행하기를 포기할 때가 있지만, 그 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기대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기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 (신 31:6)
그러니, 나는 못하지만, 하나님이라면 다 하실 수 있어… 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이미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경험이나 지적인 동의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채우심과 그 사랑으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복을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현실에서 그 채우심과 사랑을 보이셨을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부활하심으로 그 사실을 확증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뚜렷하게 증거하는 ‘증명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증거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9:23)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는데 고난과 어려움, 그리고 짜증스러운 일이 닥칠 때,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라고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일부러 고난을 자초하고, 힘들고 어려운 괴로움을 억지로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니죠. 이미 우리는 수고와 무거운 짐을 진 것과 같은 삶의 고통을, 혹은 문제의 삶을 사는 경우가 많지 않나요? 주님을 그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우리가 우리 삶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쉼을 얻는 길은 오로지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자기 짐은 주님께 내려 놓고,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를 지고 살면,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면서 체감하게 되는 고난과 그 삶과 생명은 오히려 그 자체로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증거품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죄와 악이 가득한 부조리한 삶 속에서도 예수를 고백하고 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바로 내 인생의 십자가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르심과 약속이 축복의 근원임을 믿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잘났기 때문에 혹은 견딜만 한 상황이라서, 경험적으로 그 십자가를 지고 사나요? 물론 우리는 각자가 그렇게 못난 것도 없다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성경은 우리가 죄인이었고, 연약하였고, 원수였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 그림을 한 번 보십시오. ‘악한사람’이라고 적힌 주홍글씨를 목에 걸고 주변에서 날아오는 정죄의 돌을 맞으며 고난 가운데 서 있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당신의 보혈을 한 방울 흘리셔서 그 글자판에 점 하나를 찍으셨습니다. 그는 이제 ‘악한사람’이 아닌 ‘약한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저주하는 자들까지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거부하기에 그 사랑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일 뿐…. 하나님은 이 지구상의 단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가 어떤 나약함과 사악함을 가졌을 지라도, 그가 어떤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을지라도, 그가 아무리 하나님을 저주할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포기하지도, 미워하지도, 심판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를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자리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불쌍하고 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범죄에 취약해지기도 하고, 하나님을 거부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한심한 존재였을 때에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 그리고 그 보혈로 우리를 덮으셨습니다. 구원의 문빗장을 열어 두셨습니다. 십자가는 그 구원의 약속과 사랑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눈 앞의 가치기준이 술렁거리는 세대에, 안절부절하며 안도하지 못하는 세대에 우리의 믿음이 더욱 황금과 같이 빛나기를 갈망합니다. 단지 플러스를 더하는 인생을 사는 것으로 만족하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피해를 받지 않기 위해 선행과 덕을 쌓는 세속적인 인생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안에 이미 넘치게 부어 주시는 성령의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넘쳐 흐르고 있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붓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세속의 온갖 더러움과 죄와 악과 유혹을 넉넉히 이기는 일상생활의 간증이 넘쳐나시길…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과 행복하게 동행하는 절제의 사순절기를 생활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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