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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효순과 미선을 기억하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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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김현철 PD
효순& 미선의 그 어린 넋을 기억하는가? "아직도 약을 먹는다.. 하루 4시간 밖에 자지 못한다. 난 매일 사고가 기억난다." - 마크워커(여중생 사망사건 당시 미 궤도차량운전병) - <W>와의 인터뷰 중에서... 2002년 6월 13일, 두명의 여중생이 미군 궤도차량에 깔려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로부터 2년 10개월,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은 6월 13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기억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사고의 진실과 절반의 기억들의 근거는 무엇인지 쫓아가 보았다.
사고차량 운전사 마크 워커의 변호사였던 가이 워맥. 이라크 포로학대를 한 미군들을 변호한 인물이기도 한 그는 전 세계 미군이 주둔한 곳, 미군 범죄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간다. 마약밀매혐의로 기소된 미군을 변호하기 위해 일본에 나타난 그를 요코스카 해군기지에서 만나 당시 재판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리고, 사고차량 운전사 마크 워커를 만났다. 2004년 10월에 제대해, 현재 정신과 상담을받고 있다고 말하는 워커의 얼굴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러나 사람을 대하는 그의 모습은 정상적이지는 않았다. 대인기피증에 걸려있는 그의 모습을 「W」가 최초로 확인했다. - 생생한 취재 현장 뒷이야기 -
4월 2일 사고 부대 카투사 A 인터뷰
“재수없다.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우리 가서 불독처럼 샤워나하자” 라고 사고 당일 사고부대 중대장 메이슨이 부대사람들을 앞에 두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이번 사건에 대한 미군의 생각일까? 한 명, 특수한 한 명의 생각일까? 그러나 인터뷰시에 그는 절대 내부의 이야기를 할 수 없다고 했다. 마크 워커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그 부분에 대해서만 말 해줄 수 있다고 했다. 제대한지 2년이 넘었지만 그는 아직도 군대에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당시 엄격한 통제를 받아서 내부 검열을 많이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카투사 A는 워커의 괴로움에 대해서 옆에서 보았기 때문에 그의 기억의 많은 부분을 워커의 괴로움으로 채우고 있었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들었던 것으로 기억을 채우고 있었다. 볼 수 있는 만큼 느끼고 못 보면 느낄 수 없는 것 사실이었다.
한국국민들이 그 당시 너무 미군을 매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미군들도 많이 괴로워하고 힘들어했다고 했다. 효순 미선이에 대해서는 자신들도 괴로웠다고... 중대장의 말도 사건의 실체에 대한 어떠한 말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전화상으로 한 말도 자신은 한적이 없다고 했다. 당혹스러웠다.
4월 6일 카투사 B 전화인터뷰
그 역시 본 것을 가지고 사고를 형성하고 있었다. 한국전체가 너무 몰아쳤다고. 2002년 6월에. 두 명의 여중생의 죽음. 이들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사고 부대내의 한국인 군인. 카투사. 군대내에 있어서 통제와 강제, 어쩌면 객관적인 전체모습을 볼 수 없게 만들었을 수도. 군인은 그것도 미군 부대내에서 근무하는 군인, 카투사 전사회가 몰아치는 가운데 그 몰아침을 받는 부대내의 사람으로서 그들은 자기들을 보호할 장치나 자기 자신을 설득시키지 못했다면 군생활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4월 8일 - 9일
일본 요코하마의 미해군기지 요코수카에서 당시 사고 차량의 운전병 가이 워맥을 만나다. 그는 해외 주둔 미군을 변호하는 것이 영광이라고 했다. 전세계의 미군을 변호하지만 막상 그는 영어외에 다른 언어가 필요없었다. 대부분 미군 군사법정에서 재판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는 미군 해병대 중령으로 제대. 아들과 딸도 그의 일을 돕고 있다고.
일본 요코수마 미군 기지 옆에서 가이 워맥을 인터뷰하는 김 PD와 촬영팀
독일, 쿠웨이트, 일본, 이라크 미군이 있는 곳은 대부분 간 적이 있다고 했다. 한국도 7-8번 사건 때문에 온 적이 있다고 했다. 미군의 범죄 변호, 매도하지 않으리라. 한계라 규정짓지 않으리라. 그의 신념을 보리라. 신념의 위험성을 보리라.
가이 워맥은 당시 미군 검찰이 큰 실수를 했다고 말했다. 첫째는 니노병장이 소녀들을 보고도 너무나 당황해서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는 자술서가 있는데도 검찰측이 그것을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는 점. 둘째는 당시 맨 앞에서 차량을 이끌었던 메이슨 중대장을 기소하지 않은 점. 메이슨 중대장은 그날 그 차량이 그곳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미군법을 어겼고 여중생들을 보고도 뒤의 차량들에게 무선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잘못을 했다는 점. 법의 심판을 피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면서 또 강하게 주장, 워커는 무죄라고. 워커는 왼쪽에 앉아 있어서 오른쪽을 전혀 볼 수 없었다고. 워커의 무죄는 당연한 결과였다고.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그러나 워커의 전방주시 소홀은 조금 냄새가 났다.
그는 이라크 포로를 학대한 상병 찰스 그레이너를 변호하기도 했다. 30년형이 예정되었는데 자신의 변호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고. 그래도 그는 너무 무거운 형벌을 받았다고 주장. 한국에서는 두명의 여중생이 죽었는데 두 명다 무죄로 나왔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모순이라고(contradictory) 생각한다. 그러나 기억해라. 워커는 무죄고 니노가 유죄였다, 그러나 그는 법의 심판을 피했다는 사실을”
한미관계는 이렇게 contradictory한 측면들이 많은 건 아닌지. 평상시보다 우리의 자존심을 조금 세우려고 하다보면.
4월 11일 비행기안
‘우린 아홉이고 너는 열이다, 우린 밤낮 결핍에 시달리며 성난 채로 살아간다’ 한국과 미국의 관계, 아홉과 열, 그리고 성난 채로 살아가는 모습, 느낌이 온다. 효순이와 미선이는 사람으로서는 어쩌면 가장 처절하게 죽었다. 그러나 둘의 죽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대변해 줄 사람은 재판과정내에 아무도 없었다. 미국은 참 보호장치들이 많았다. 가치를 전달할 매체들도 많고.(SOFA, 군사재판, 변호사, 성남 공항, 우리 관료들, 정치인들까지, 우리내부의 인식까지)
자기 발 딛고 선 곳에서 본 것이 전부인 사람들 들으려 하지 않고 들어도 흘려보내는 사람들, 밉지 않았다. 이제 잔인해지자. 그들의 눈을 고집을 한계를 이용하자. 퍼즐맞추기를 하자. 그 맞추어진 퍼즐은 또 하나의 새로운 진실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그 진실은 바로 “2002년 6월 13” <절반의 기억 2002년 6월 13일>일 것이다.
* 모두들 자기 합리화, 각자 선택한 재료로 집을 짓고 그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진실찾기로 시작된 촬영. 혐오를 거쳐 다시 내 몸에 소름돋게 한다. 소름, 이게 없으면 난 못 살지!! 생각한다. '그래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아! 당신들이 본 것과 들은 것 생각한 것들만 말해다오. 왜 저 부분을 보지 못했냐고 다그치지 않으리라. 나 역시 당신들이 본 것을 못 보고 있으니까. 겸손해지자. 듣고 조합해하자. 판단중지(EPOCHE) 당신들이 본 것이 전부라고는 말하지 말아 달라. 믿지도 말아달라, 나도 그럴테니. 당신들의 생각이 행동이 진실이라는 마음, 그 마음을 살해한다'
부리가 붉은 새여 (백무산의 시)
우리가 온 몸으로 거부해야 할 것은 내 안에도 있다. 항시 있다. 더 이상 밖으로 책임을 떠 넘기지 마라. 이 손바닥 위에도 있다.
4월 12일 애틀랜타 공항 도착
“HOLD ON!!"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사람들, 9.11이후 첫 미국출장. 플래스틱 장갑을 낀 손으로 내 몸을 더듬었다. 인간과 인간사이에 플래스틱이, 두려움이 들어와 있었다. 무엇을 찾기 보다 자신들의 뭔가를 감추기 위해 하는 행동같았다. 우리는 수치심을 느끼고 긴장하고 작아지고. 우리가 받는 수치심, 그것으로 그들의 두려움을 감추고 있었다. 거만함과 퉁명스러움으로 두려움을 감추고 있었다. 두려움이 많은 나라라는 느낌. 두려움은 자기 자신에 충실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2002년 사고 차량 운전병 마크 워커에게 변호사비를 모금해서 전달한 애틀랜타에 살고 있는 한국인 박선근씨를 만났다. 그의 현재 이름은 써니 박. 그는 왜 그랬냐는 물음에 “살려고 그랬다. 내가 뭐 좋아서 그랬겠느냐?” 고 대답했다. 두려움 많은 미국에서 두려운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 돈을 워커의 누나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미국인이라고 했다. 한국에 미련을 두면 후회한다고. 미국인들은 자신을 한국인으로 보고 한국인들은 자신을 미국인으로 본다고 했다. 당시 애틀랜타 지역 언론이 한국을 보호하러간 미군이 훈련 중 사고로 두 여중생이 죽었는데 그런 미군을 처벌하라고 대규모로 시위하는 것이 이해가 안된다며 반한 분위기가 일었다고 한다. 그래서 돈봉투를 들고 모금행사에 가서 워커누나에게 돈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두 여중생은 생각해 보았냐고 물었다.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다고 했다. 무엇이 사건을 이렇게 다른 시각에서 보게 만드는가? 그 무엇이 어쩌면 내가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리라. 현재 애틀랜타에는 한인이 10만명 정도, 어떤 젊은이는 그에게 돌을 던지려고 했다고 했다. 같은 한인이라고 보는 지점이 달랐다. 어떤 아주머니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왜 미군을 주냐고, 그 죽은 여중생들을 줘야지. 써니 박은 이 한인들이 못보았던 뭔가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발딛고 선 곳이 다른 지점이었든지.
4월 13일 워커의 부대로 출발
삼엄한 경계. 들어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코디 혼자 들어가 보기로 했다. 돌아왔다. 워커는 제대했다는 전언과 함께. 쉽지 않구나. 여기 오면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지. 이런 무모한 짓을 하다니.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애틀랜타에만 워커가 44명. 한없이 막막했다.
내가 왜 여기서 워커를 만나야 하는 걸까? 묻고 대답하자. 세속적 욕심인가? 누군가에게 아픔을 다시 배가시키는 것인가? 나의 진심은 무엇인지?
부대로 들어가보기로 결정. 어렵게 통과, 아니 얼떨결에 통과. 부대 건물 찾는데 약 3시간. 도시였다. 커다란 도시. 부대건물 앞에서 만난 한 미군은 워커를 안다고 했다. 지금 여기 없다고. 제대했다고. 허리가 아파서 제대했다고. 그는 워커의 전화번호 열자리를 우리에게 건넸다. 770-***-**** 전화상으로 워커 설득, 그는 내일 만나겠다고 했다. 부대에서 5시간 정도 떨어진 그의 고향에서 살고 있다고 하면서.
기뻤지만 사지가 쪽 오그라드는 느낌. 내 오기에 세상이 조금씩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70%는 들뜨고 30%는 내 뒤가 보였다. 모두들 너무 들떠 어색했다. 너무도 큰 슬픔이 앞서 있었기에 들뜸이 어색했다.
4월 14일 사고 2년 10개월 후
오전부터 전화가 되지 않았다. 워커가 피하는 듯했다. 뭔가 마음을 잡는 그 뭔가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일까? 내 마음은 이미 다 풀어 놓았는데 당황스러웠다. 오후에도 전화는 통하질 않았다. 풀어 놓은 그 마음을 의무감이라는 끈으로 다시 묶었다. 가족들이 설득작업에 들어 간 것일까? 우리의 설득은 결국 피보다 진하지 못한 물이 되는 걸까? 그래 그것이 맞는 일일지도. ‘언론은 혼란의 오른팔’이라고 누군가 말했지.
맥도날드에서 만난 워커는 내내 얼굴에 두 손을 대고 있었다. 자신은 인터뷰를 할 수 없다고. 효순이 미선이 부모님을 생각하면 도저히 얼굴을 내밀고 인터뷰를 할 수 없다고. 자신도 아들이 둘 있는데 그 아들을 잃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 가족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가늠할 수 있다고. 정말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고도 했다.
아직도 사고 장면이 매일 플래쉬 백처럼 생각난다. 하루 4시간 이상 잠을 자지 못한다. 정신과 치료를 상당히 오랜 기간 받았고 아직도 약을 먹고 있다고. 무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워커는. 미군 사법제도가 그렇게 보호하려고 애썼던 워커는 일상이 파괴되어 있었다. 인생에서 돌리고 싶은 하루는 2002년 6월 13일이라고. 카투사들이 사고 후에도 계속 관심갖고 말 걸어주고 해서 너무 고마웠다고. 맥도널드 바로 옆 테이블에서 햄버거를 먹고 있는 보통의 미국인이 워커는 아니었다.
워커는 어떤 식으로 묘사해야 하나? 상대적 절대적 두 기준을 교차하며 그려야 한다. 넘쳐서도 모자라서도 안된다. 무른 사람 앞에서 내가 보였다. 잔인함이 살아가는 근거가 되어 버린 나. 웃는 것도 우는 것도 남들보다 한 발 늦은 나. 나는 왜 프로그램을 만들까?
4월 14일 당시 사고 부대 중대장 전화연결
우리가 보낸 이메일이 화나게 했다고. 사건이 조작되고 편향적으로 언론에서 보도했다고 했다. 자신은 재수없다 불독처럼 샤워나 하자라는 말을 한 것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카투사들 거의 전부가 들었다고 했는데. 효순 미선을 보았느냐? 보았다. 무전을 했느냐? 벌써 인터뷰 하고 있는 것인가? 당신은 이미 답했다.
내가 듣고 보고 싶은 것들은 이들이 갖고 있지 않은 2002년 6월 13일 절반의 기억들이었다. 그들이 기억 역시 절반이었다. 거짓은 아닌 절반.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던 절반의 기억. 중대장 메이슨은 자신은 처벌을 받았다고 했다. 중대장의 가장 중요한 권한인 부대를 이끌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했다고 했다. 중대장은 자신이 지금 어떠한 말을 해도 어떠한 일도 변화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하게 이야기했다. 검찰이 법정에 자기를 부르지 않았다고도 했다.
4월 15일
가이 워맥이 유죄라고 강하게 주장했던 니노 병장을 찾아 텍사스로 향했다. Ft HOOD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미군 부대라고 했다. 부대의 빈틈없음과 밀도가 느껴지지 않았다. 니노부대를 찾았으나 니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야기로만 전해 듣고 있는 사람이 한명 있었다. 전역했거나 이라크로 파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워커역시 니노는 사고후 미국으로 돌아와 바로 제대를 했다고 증언했었다.
한미관계는 아니다. 내 눈이 향해 있는 곳이. 미국이 가지고 있는 그들의 가치, 인간 모두를 대변해주는 장치들을 보고 보여주리라. 잘 갖추어진 너무 철저하게 자신들의 보호위주로 이루어진 장치들, 그래서 조금은 질투도 나는 그 보호장치들을 보리라. 너무나 모두를 갖고 있어 조금은 불완전한 그 장치를 보고 싶다. 법정에서 아무도 대변해 주지 않았던 두 죽음을 딛고 보겠다.
현재 전 세계 약 30여개국에 미군은 주둔하고 있다. 그 미군이 가는 곳이 어디든지 미국법은 따라 간다고 가이 워맥 변호사는 말했다. 미군과 미국법, 그리고 주둔지의 법과 사람들, 영원히 충돌과 충격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첫댓글
주한미군
여중생압살사건
지기님 너무 섬뜩하거나 부적절 하면 삭제 하셔도 좋습니다
여기가 어디 땅인가? 가슴이 메입니다
잊지 않으마,,
눈물이 아래로 도로위에,,
너희 주검앞에 결연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