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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의 떡과 물을 먹을지라도
역대하 18:1~11
when?
최근에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성경은 역대하입니다. 역대 하에는 많은 왕들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무려 4장이나 되는 많은 분량을 들여 소개하고 있는 왕은 남 유다의 여호사밧 왕입니다. 여호사밧 왕은 아사 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사람입니다. 역대 하 17장 3절에는 “여호와께서 여호사밧과 함께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며 바알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여호사밧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셨고(대하 17:5), 여호사밧이 주변 나라들로부터 조공을 받게 하실 만큼 축복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고…”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여호사밧은 부귀와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생은 잘 나갈 때 조심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여호사밧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성공했을 때 큰 오점(汚點)을 남겼습니다. 여호사밧이 남긴 오점이 얼마나 큰지, 이 오점 때문에 여호사밧은 고통을 당했고, 훗날 여호사밧이 죽은 후에도 그 자녀들과 그 자녀의 자녀들까지 무려 3대(代)가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과연 여호사밧이 남긴 인생 최대의 오점이 무엇이었을까요? 우리 다함께 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고 아합 가문과 혼인함으로 인척 관계를 맺었더라.”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은혜로 부귀와 영광을 얻었지만, 그만 북 왕국 아합 왕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여 친인척관계를 맺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여호사밧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그동안 아버지 아사 때부터 이어지던 북 왕국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끊고 새로운 평화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합이 누구입니까? 북 왕국 역사를 통틀어 가장 악한 왕이 아닙니까? 아합은 그의 아내 이세벨과 더불어 열정적으로 바알을 숭배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아합 왕이 통치하는 동안 북 왕국 이스라엘은 큰 영적침체를 만나 수많은 사람들이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바알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평화가 좋다고 하지만, 이런 바알 숭배자와 손을 잡게 될 때 여호사밧 왕도 큰 영적침체와 퇴락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이 아합과 친인척 관계를 맺은 지 2년이 지난 어느 날, 이 두 사람은 성대한 잔치를 벌이고 즐거운 친교를 나눕니다. 잔치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어가자 아합 왕은 여호사밧 왕에게 길르앗 라못을 공격하기 위해 함께 힘을 모으자고 제안합니다. 원래 길르앗 라못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땅이었지만, 지금은 아람 왕에게 빼앗겨 있던 처지였습니다. 여호사밧은 아합 왕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친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여호사밧 왕은 전쟁에 나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자고 제안합니다. 길르앗 라못을 빼앗는 일이 정말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신도 기꺼이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합 왕은 북 왕국에 있던 선지자 사백 명을 모으고, 그들에게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싸울지 말지를 묻습니다. 그런데 왕을 위해 준비된 사백 명의 선지자들은 하나 같이 길르앗 라못을 빼앗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예언합니다.
여호사밧 왕은 사백 명의 선지자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사백 명의 선지자들 외에 또 다른 선지자가 없는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아합 왕은 미가야 라는 선지자가 있지는 하지만, 그는 자신에 대해서 좋은 일로는 예언하지 않고, 항상 나쁜 일로만 예언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아합 왕에게 미움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이런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을 듣기 원했습니다. 그리고 사신을 보내 미가야 선지자를 왕들 앞에 데려오게 하였습니다.
what’s problem?
사신이 미가야를 데리러 간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사백 명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왕이 듣고 싶던 말을 전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선지자 시드기야였습니다. 시드기야가 무엇이라고 예언했는지 우리 10절과 11절을 찾아서 한 음성으로 읽겠습니다.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 하고 여러 선지자들도 그와 같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서 승리를 거두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하더라.”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무슨 사람 머릿수로 결정되는 것인가요? 사백 명의 선지자들이 다 하나 같이 왕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예언하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될 수는 없잖아요? 더군다나 기가 막힌 것은 사백 명의 대표자인 시드기야의 태도입니다.
시드기야는 철로 뿔을 만들어 가지고 왕 앞에서 예언을 했습니다. 일종의 실물교육인 거지요. 아마도 시드기야는 철로 된 뿔을 휘두르면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라고 예언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영적으로 민감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런 실물교육이 굉장히 효과가 큽니다.
제가 보기에 시드기야는 굉장히 교활한 사람 같습니다. 그는 아합 왕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영적으로 어두운 아합 왕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했습니다. 여러분은 시드기야가 뿔을 만들어 아람을 진멸하게 한다는 예언이 모세의 축복을 인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신명기 33장에 보면, 모세가 죽기 직전에 이스라엘 자손들을 각 지파별로 축복하였습니다. 모세는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를 향해 다음과 같이 축복했습니다.
“그들은 첫 수송아지와 같은 힘으로, 황소의 뿔과 같은 위력으로, 그 뿔로 만방을 들이받아 땅 끝까지 휩쓸 것이니, 에브라임의 자손은 만만이요, 므낫세의 자손은 천천이다.”(표준새번역)
과거 모세는 뿔로 만방을 들이받아 땅 끝까지 휩쓸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지금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는 시청각 자료까지 만들어 뿔로 아람을 찔러 진멸하리라고 예언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힌 노릇입니까? 진정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경고의 메시지를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고후 11:14~15)”
분명 성경은 사탄도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얼마든지 가장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말세에는 이런 현상들이 더 자주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말세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은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은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씀만 골라 먹으려는 영적인 편식을 버리고, 주께서 내게 어떤 말씀을 주시던지 내가 아멘으로 순종하겠다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와 여러분이 영적인 분별력을 잃고 사리사욕을 좇아 행하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는, 마귀에게 시험 받으시는 예수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사탄은 무려 40일을 금식하신 예수님에게 나타나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시험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사탄의 두 번째 시험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탄이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다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뛰어 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험이 진짜 어려운 이유는 사탄이 자신의 시험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 먹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마 4:5~6).”
‘그가 사자들을 명하여 너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도록 너를 받들어 줄 것’이라는 뒷부분의 말씀은 사탄이 시편 91편 11절과 12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시편 91편은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하나님이 보호해 주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만 천하에 드러내기 위해서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사람까지 하나님이 보호해 주신다는 약속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탄은 우리를 속입니다.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나의 의를 드러내라고 우리를 부추깁니다. 마치 하나님을 믿으면 어떤 일을 저질러도 면죄부가 주어지고, 승리의 보증수표가 발행될 것처럼 우리를 속입니다. 하나님께는 결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자신의 사리사욕을 좇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2장 17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우리는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말해야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말해야 합니다. 이러한 좋은 모범을 보인 선지자가 있습니다. 바로 미가야 선지자입니다.
what?
두 왕은 예언을 듣기 위해 미가야 선지자를 불렀습니다.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자가 미가야에게 말했습니다. “선지자들이 모두 왕에게 좋게 말하니 당신도 그 사람들처럼 왕에게 좋게 말하소서.” 이 말을 들은 미아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13절)”
미야가 선지자는 왕이 듣고 싶은 말을 전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말하겠노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왕 앞에 섰을 때 그는 단호하게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미가야 선지자가 왕들 앞에서 무엇이라고 예언하였는지 우리 모두 16절을 찾아서 한 음성으로 읽겠습니다.
“그가 이르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하는지라.”
미가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질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 예언은 이번 전쟁을 통해서 왕이 죽게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무리는 주인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평안히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동안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아합 왕 때문에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아합 왕이 죽음으로 오히려 백성들은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또 미가야는 하늘에서 벌어지는 천상회의 장면을 묘사하였는데, 하나님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선지자들의 입에 넣으셔서, 왕을 죽게 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미가야의 예언을 들은 아합 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아합 왕은 미가야가 전한 예언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지 않았습니다. 또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아합 왕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려 미가야 선지자를 옥에 가두고 고난의 떡과 고난이 물을 먹게 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도 미가야의 뺨을 치며 모욕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가야 선지자는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증거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미가야 선지자의 모습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습니까?
미가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고난의 떡’과 ‘고난의 물’을 먹어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고난’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라하츠’입니다. 이 ‘라하츠’라는 단어가 동일하게 사용된 곳이 출애굽기 3장 9절입니다.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왕 바로에 의해 430년 동안이나 큰 고난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된 노등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었고,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에게까지 상달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겪게 되는 고통은 실제적인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미가야처럼,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고난의 떡과 고난의 물을 먹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0:29).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고난의 떡과 물을 먹을지라도, 우리에게는 주님이 평안과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복음을 위해 많은 고난을 받았던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1장 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미가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은 아합 왕에게 그대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놓은 도전은 잠시 있다가 없어질 고난의 떡과 물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과 확신이 내 안에 있는지의 문제입니다.
how?
자,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떻게 됩니까? 여호사밧 왕과 아합 왕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길르앗 라못을 쳤습니다. 이 때 아합 왕은 꾀를 내어 여호사밧 왕에게 자신의 왕복을 입히고 자신은 왕이 아닌 것처럼 변장하였습니다. 아마도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이 마음에 걸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33절에 보면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쏘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 사람이 아합 왕을 겨냥하고 활을 당긴 것도 아닙니다. 그저 ‘무심코’ 활을 당겼을 뿐입니다. 그런데 무심코 당겨진 화살이 정확하게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에 박혔습니다. 갑옷 솔기는 갑옷의 부분과 부분을 이은 자리를 가리킵니다. 아합 왕이 전술이 부족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아니면 준비가 부족했나요?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보호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무심코 쏜 화살이 어떻게 아합 왕의 갑옷 솔기에 박혔을까요?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는 없으니까요.
시골에서 올라온 어느 할아버지가 세종 문화회관 앞길을 걷다 말고 “여기도 귀뚜라미가 우네.”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 말을 들은 청년이 “아니, 자동차가 저렇게 달리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오가는 소음 많은 거리에서 정말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리세요?”라고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그렇다고 하면서, 가로수 나뭇잎을 들어 귀뚜라미를 찾아 보여 주었습니다. 놀라는 청년에게 할아버지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듣고 싶은 것을 골라 듣는 능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호주머니에서 100원짜리 동전을 꺼내 길에 던졌습니다. 그러자 길을 걷던 거의 모든 사람이 동전 떨어지는 쪽을 향해 몸을 돌렸습니다. 귀뚜라미 소리는 듣지 못하지만 돈 소리에 대해서는 청각이 반응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까? 아니면 돈 소리가 들립니까? 이 소란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한기채, 「습관, 신앙을 말하다」, 토기장이, 「생명의 삶 플러스」, 2018년 12월 호, p. 287에서 재인용.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이 세상 가운데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눈에는 비록 우연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이 땅 가운데서도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혹시 여러분이 고난의 떡과 물을 먹게 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승리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