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동에 있는 대한 불교 조계종 소속 사찰. 활구참선을 수행하는 도량, 용화선원.
미륵보살은 인도의 바라나시국에서 태어나 석가모니불의 교화를 받으며 수도하셨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은 뒤 도솔천에 올라가 현재 天人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다고 하는데 아직 부처가 되기 전의 단계에 있기 때문에 보살이라고 부른다. 미륵보살은 석가모니불이 入滅하신지 56억 7천만년이 되는 때, 이 사바세계에 태어나 화림원(華林園)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여 3회에 걸친 설법으로 모두 272억의 중생들을 성불시킨다고 하는데 (이것을 龍華三會의 설법이라 한다), 이 때에 우리 모두가 참석하여 다함께 성불하자는 간절한 바램에서 새벽예불시 아득한 과거세로부터 지어온 자기의 잘못을 참회하는 십악참회를 하고 도솔천 내원궁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면서 법회 때마다 조실스님과 원장스님의 참선법문을 듣고서 평상시에 늘 참선수행정진을 열심히 해 나가면 틀림없이 미래의 불국토인 용화세계에 태어나 성불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寺名을 龍華禪院으로 이름을 지었다.
1950년에 청신녀(淸信女) 정금강심이 기린산 남측 주안 신사 터에 용해사(龍海寺)를 창건하였고, 1955년 승려 정 전강(鄭田岡)을 조실로 추대하고 용화사(龍華寺)로 개칭하였다. 1961년 용화 선원(龍華 禪院)으로 개칭하여 참선 도량으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1968년에는 용화 선원을 중건1975년 정전강의 열반과 동시에 전법 제자인 송담이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법보전 신축, 증축하였다. 1992년에 시민 선원, 1998년에 용화 선원 불교 문화원, 1999년에 용화 선원 불교 수련원을 개원하였다. 2000년 7월 선화당을 신축하였다. 2001년 3월에 용화 유치원과 동년 12월에 용화 선원 문화 센터를 개원하였다. 2000년 4월에 인제 용화 선원[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하추리]을, 2010년 11월에 광주 용화 선원[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봉골길 228]을 각각 개원하였다.
2018년 현재 주요 건축물로는 법보전, 법보 선원, 고려 후기의 법천사 지광 국사 현묘 사리탑을 모범으로 하여 1991년에 건립한 전강 대종사의 진신 사리탑이 있다. 그 외에 요사채인 선화당, 대중 스님들의 객실로 사용되는 화림당, 육각 모임지붕에 청기와를 얹은 정자(亭子) 형식 건물인 범종각과 범종, 시민 선원, 일주문 등이 있다.
전강선사
전강(田岡, 1898년 ~ 1974년)은 한국 현대 불교의 대선사이며, 석가모니 이래 제77대 조사이다. 경허(75대) - 만공(76대) - 전강(77대)으로 법맥이 이어졌다. 조사는 전 세계에 한 명이고, 선지식은 전 세계에 다수이다. 둘 다 깨달은 사람, 즉 부처를 말한다.
본관은 동래(東萊). 성은 정씨(鄭氏). 첫 법명은 영신(永信). 법명은 전강(田岡). 전라남도 곡성 출신. 아버지는 해룡(海龍)이며, 어머니는 황계수(黃桂秀)이다. 만공에서 이어지는 선종 제77대의 법맥을 전수하였고 용화사 법보선원, 용주사 중앙선원 등을 창설하여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제창하였다. 23세에 견성하시어 혜봉, 혜월, 용성, 한암, 보월, 만공 등 당대의 6대 선지식과 법거량을 하여 모두 인가를 받으시고 25세에 만공선사의 법맥을 이으셨습니다. 그 후 1961년에 용화사에 선원을 개설하신 이래로 수많은 수행자들과 수행하다. 1975년에 열반. 송담 스님이 법통을 이어 오늘에 이르러 참선수행도량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생애와 활동사항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恩師)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戒師)로 출가하였다. 1918년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한 뒤, 도반의 죽음에 무상함을 느껴 김천 직지사(直指寺) 천불선원(千佛禪院)으로 가서 제산 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정진하였다.
예산 보덕사(報德寺)·정혜사(定慧寺) 등에서 피를 쏟고 머리가 터져가며, 백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하던 중, 23세 때인 1921년에 개오(開悟)하였다. 이때부터 당대의 선사들을 순례하며 인가(印可)를 받았다.
1923년 금강산 지장암(地藏庵)의 한암(漢巖)에게 찾아가 탁마(琢磨)하였으며, 같은 해 서울 대각사(大覺寺)의 용성(龍城)을 찾아가 제일구(第一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고, 부산 선암사(仙巖寺)의 혜월(慧月)에게는 공적영지(空寂靈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다.
1923년 수덕사 금선대의 만공(滿空)을 찾아갔으나 인가를 받지 못하여, 다시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잡고 정진하였다. 반 철 만에 마조(馬祖)의 원상(圓相) 공안의 뜻이 드러나면서 깨달음을 얻고 만공의 인가를 받았다. 그 뒤, 주요 공안에 대한 탁마를 두루 마친 뒤, 만공은 전법게로서 선종 제77대의 법맥을 전수하였다.
33세 때인 1931년 통도사보광선원(普光禪院) 조실(祖室)을 시작으로, 1934년 법주사 복천선원(福泉禪院), 1936년 김천 수도선원(修道禪院), 1948년광주 자운사(紫雲寺) 등의 조실을 역임하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광주에서 가게를 차리고 제자 송담(松潭)의 깨달음을 위해 힘썼다.
그 뒤 1955년부터 해남 대흥사(大興寺) 주지, 담양 보광사(普光寺) 조실, 인천 보각사(普覺寺) 조실을 역임하였고, 1959년 구례 화엄사 주지 및 전라남도 종무원장(宗務院長)이 되었다. 1960년 망월사(望月寺) 조실로 있다가, 1961년인천 용화사(龍華寺)에 법보선원(法寶禪院)을 개설하여 그곳에서 15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와 함께 1962년 대구 동화사(桐華寺) 조실, 1966년 부산 범어사(梵魚寺) 조실, 1967년 천축사(天竺寺) 무문관(無門關) 조실 및 대한불교조계종 장로원 장로를 역임하였고, 1970년 용주사(龍珠寺)에 중앙선원을 창설하였으며, 1974년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였다. 1975년 1월 13일 영가(靈駕)를 위한 천도법문(薦度法門)을 마치고, 제자들을 모아 마지막 설법을 한 뒤 입적하였다.
제자로는 전법(傳法) 제자인 송담을 비롯하여, 정공(正空), 정우(正愚), 정무(正無), 정대(正大), 정락(正樂) 등 50여 명과 손상좌 200여 명이 있다. 저서로는 『전강법어집』이 있으며, 입적한 날까지 10여 년 동안 새벽마다 설법한 700여 개의 육성 테이프가 남아 있다.
용화선원의 모든 운영 중심은 스님들과 신도들의 정진수행. 특히 일반신도에게는 법회를 중심으로 신행활동을 하면서 불교의 진수 활구참선을 널리 수행할 수 있도록 보살선방과 시민선방을 개설하여 참선입문에 도움을 주며, 조실 전강스님과 송담스님의 주옥같은 법문을 언제든지 육성으로 들으실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널리 전파하고 있다.
참선은 어느 분의 가르침을 받고 수행해 나가느냐 하는 문제가 무척 중요합니다. 참선을 가르치는 스승과 도량은 많지만 우리 용화선원은 이러한 점에 있어서 많은 수행자들에게 더 없이 소중한 정신적인 귀의처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인가
혜월, 혜봉, 용성, 한암, 만공, 보월 등 당대의 6대 선지식들로 부터 모두 견성을 인가받았다. 만공스님한테 가서 처음에 한 번 탈락하고 다시 찾아가서 인가를 받았다. 인가란 정말 깨달았는지 여부를 시험해 보고 합격 판정을 하는 것을 말한다. 선불교에서는 인가가 매우 중요하며, 자신보다 먼저 깨달은 수행자에게 모두 인가받는 것이 관례다.
보월
보월은 만공의 맏제자로 깨달은 승려이다. 만공의 법맥을 이었다. 문제는, 법맥을 이은 제자가 스승보다 먼저, 40세에 요절했다는 것이다. 물론 보월은 열반하기 전에 제자인 금오를 인가했다. 그러나 이 문제로, 법맥이 금오로 가는가 아니면 만공이 새로 법맥을 정해주어야 하는가가 문제되었고, 만공은 전강을 새로운 법맥으로 인정했다. 대신 만공은 금오에게 보월의 법맥임을 증명하는 건당식을 열어주고 전법게를 내렸다. 그리하여 석가모니 이래 선불교 제76대 조사는 만공이고, 제77대 조사는 전강이 되었다.
제자
중국 당나라 때 "남혜능 북신수"", "남설봉 북조주"에 빗대어, 70년대 한국 불교는 "남경봉 북전강" 이었다가, 오늘날은 "남진제 북송담"이라고 하는데, 인천 용화사의 송담은 전강의 맏제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