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익는 마을의 책 이야기
장하준 지음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노각무침
요즘 우리집 밥상에 거의 매일 오르는 반찬은 노각무침이다. 텃밭에서 기른 노각을 깨끗이 씻어 껍질을 벗기고 씨앗을 긁어낸 후 소금에 절였다가 양념에 버무린다. 땀이 많이 나는 여름철, 달달하고 새콤한 노각무침은 우리 가족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늙은 오이’라는 뜻의 노각은 처음에는 오이마냥 자라다가 노랗게 영글어가면서 튼실한 살집에 껍질이 갈라지기 시작한다. 텃밭에서 노각을 발견한 아내는 조용히 싱크대에 노각을 올려둔다. 손질하고 양념하는 일은 내 몫이다. 몇 달 전부터 매일 두어 개 정도의 밑반찬을 만들기 시작한 내 눈은 ‘레시피’라는 세 글자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설명서를 따라 조립하는 장난감처럼 잘 따라 한 레시피는 맛있는 음식과 함께 성취감마저 준다.
레시피
고백하건대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가장 큰 이유는 책 제목 마지막에 붙은 ‘레시피’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원제의 제목을 직역하면 ‘먹을 수 있는 경제학’이다. 경제학을 먹을 수 있다니 경제학자라서 할 수 있는 상상일까? 머리말에 등장하는 저자의 요리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음식 이야기로 경제학 문외한을 낚아보려던 저자의 의도에 제대로 걸려들고 말았다. 저자가 이 책을 처음 구상한 것은 2006년이었다고 한다. 긴 시간, 여러 사람의 도움을 거쳐 2022년에 이르러서야 영어판 초판이 발행된다. 만약 2006년, 아니 불과 몇 년 전에만 출판되었더라도 이 책을 스스로 골라서 읽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을 만나는 과정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레시피라면 관심이 많지만 경제학 분야는 잘 모른다. 다행히 저자는 나 같은 문외한들을 위해 최대한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니 용기를 가져본다.
쌀 한 톨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라는 노래가 있다. 쌀 한 톨 안에는 그 쌀 한 톨이 만들어지기까지 영향을 준 바람과 천둥, 비와 햇살, 외로운 별빛과 농부의 새벽까지, 나락 한 알 속에 우주의 무게가 담겨 있다는 노래이다. 쌀 한 톨에서 생명과 평화, 우주의 무게를 헤아리는 상상력이 인상적인 노래였다. 쌀 한 톨에서 우주를 헤아리던 노래꾼처럼, 저자는 음식에서 경제학을 헤아린다. 음식에 담긴 역사와, 음식에 인생을 바쳤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 이면에 담긴 불평등과 고통의 역사를 풀어나간다. 마늘이나 멸치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식재료도 있고, 라임이나 오크라 같은 생소한 재료들도 있다. 음식에 대한 에피소드로 관심을 끌고는 어느새 경제학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때로는 불편한 이야기들을, 때로는 편견을 깨뜨리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이미 알려진 이야기도 있고, 처음 듣는 이야기도 있지만 초심자들을 위해 어려운 용어는 자제하고 적절한 유비를 통해 친절하게 설명한다.
음식과 경제학의 유비
가끔은 저자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그 연결고리가 억지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대부분 개연성 있는 연결이었고, 각 장의 말미에 음식과 경제학의 유비를 통해 주제를 요약하는 것도 깔끔했다. 초콜릿 중독에 대한 자기고백과 고추를 못 먹는 사람들을 향해 ‘겁쟁이들!’이라며 놀리는 특유의 어조도 재미있었다. 경제학 이야기를 하려고 곁들였다기엔 음식에 대한 사전조사와 표현들에 애정이 담겨 있었다. 음식과 경제학 둘 다를 사랑하는 사람이 쓴 글 다웠다. 저자는 이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음식 관련 조사에만 최소 여섯 명 이상의 조교를 동원했다. 책 전체를 읽고 의견을 낸 사람만 스무 명이 넘는다. ‘레시피’라는 글자에 이 정도의 정성을 쏟는 사람이라니, 그의 손길을 거친 음식이 어떤 맛일지 문득 궁금해진다. 이전에 장하준의 책을 읽었을 때에도 좋기는 했지만, 머리말에서부터 요리 얘기를 하는 순간 그는 이미 내 옆에 와 있었다.
경제학을 잘 먹는 네 가지 방법
경제학은 나에게 생소하고 어려운 분야이다. 그래서 경제학 책은 잘 찾지 않게 된다. 요리를 통해 경제학에 관심을 가지게 하려던 저자의 시도는 나에게 딱 맞는 레시피였다. 경제학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매일 먹는 음식 같은 우리의 일상이 아닐까? 저자는 경제학이 다만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서 사람의 정체성마저 규정한다고 말한다. 수년 동안 먹은 음식이 곧 나 자신이라던 누군가의 말이 생각나는 지점이다. 저자는 맺는말에서 경제학을 잘 먹는 법으로 네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골고루 먹을 것. 둘째, 열린 마음을 가질 것. 셋째, 재료의 출처와 기원을 확인할 것. 넷째, 상상력을 동원할 것. 어디 경제학 분야만 그러할까? 독서와 학문 전반에, 심지어 요리와 일상의 많은 부분에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나의 동거인은 음식에 상상력과 열린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때로는 그 상상력이 예상치 못한 맛있는 결과를 가져온다. 아직 초보인 나에게는 레시피를 넘어서는 용기가 없다. 경제학도 요리도 한 걸음 더 나아가야겠지만, 우선은 기초부터 다져야겠다.
책 익는 마을 홍 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