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 먹은 노인들도 허리 펴고 춤추는 곳… 삶에 대한 의지로 최고봉에 서다
해외기행 | 빙하 위 트레킹에 도전하다 - 스위스 융프라우
Swiss 세상 마지막 남은 청정지역 스위스 융프라우에 도달했다. 계절도, 공간도 의미를 잃고 마는 험준한 협곡 사이 사이에서도 사람들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인간의 자연 정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융프라우 철도’가 벌써 2012년이면 완공 100주년이 된다. 주민들은 ‘인터포크 융프라우 축제’를 새롭게 열었다.
융프라우요흐에서 즐기는 빙하 트레킹. 묀히 산장으로 가는
이 코스 위에 서면 장엄한 알레취 빙하가 한눈에 들어온다.
스위스 융프라우 지역을 도는 철도여행은 대개 베른주에 위치한 인터라켄(Interlaken)에서 시작된다. 이곳에서 출발한 철도는 알프스의 봉우리인 아이거(Eiger)와 묀히(Monch)를 철로로 뚫고 지나 3454m의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까지 도달한다. 기적을 현실로 만들어낸 덕분에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은 느긋하게 천혜의 설경을 만끽할 수 있다.
인터라켄오스트(Interlaken Ost)역에서 짐을 미리 오늘의 숙소가 될 클라이네샤이덱(Kleine Scheidegg)으로 보내두고 가뿐한 몸으로 첫 번째 목적지인 라우터브루넨(Lauterbrunnen)으로 향했다. 능선을 따라 경사진 철로 위를 달리는 열차 창 밖 가득 초록 평원이 펼쳐지고, 옹기종기 모인 스위스의 아담한 가정집이 펼쳐졌다.
산과 산 사이 계곡을 끼고 오르는 철로에 접어들었을 때 가이드인 수전이 설명을 덧붙인다.“빙하가 녹아 흘러내린 물은 그린델발트(Grindelwald)와 라우터브루넨 양쪽
계곡으로 각각 흘러내리는데, 그린델발트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은 검고 라우터브루넨 쪽 계곡물은 희다고 해서 이름도 그렇게 붙여졌죠. 지질 성분 때문에 그렇다는군요.”
그러나 여행객들의 눈에는 하얀 기포가 조금 더 많고 적음의 차이만 보일 뿐, 똑같이 차갑고 청명한 계곡의 물줄기로만 비친다. 열차를 타고 가는 사이 사이 험준한 협곡과 계곡이 연출하는 아찔한 직선을 내려다보면 마치 그 풍경 속으로 빨려들 것만 같다. 라우터브루넨은 반 세기 전 알프스 북쪽에 살던 이들이 남쪽으로 이주해 만든 마을이다.
산과
산 사이의 U자형 지역에 들어앉은 마을에서 쌀쌀한 오전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다. 험준한 땅에 터전을 잡은 주민들에게 내리는 젖줄인 양 300m 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슈타우프바흐(Staubbach) 폭포. 사실 이 풍경은 여름에 수량이 많을 때 봐야 더 장관이라고 한다.
빙하가 녹는 계절에는 양쪽 계곡에서 80여 개의 폭포가 떨어진다니 ‘샘이 솟는 마을’이라는 의미가 이해된다. 마을을 내려가다 보면 마을의 시작과 함께 세워진 오래된 교회가 보인다. 이주 당시 원래 살던 마을의 교회에서 메고 온 이 종은 이동하는 과정에서
몇 번이나 떨어져 구르는 바람에 이곳 저곳 성하지 않다.
종 표면에 부조로 새긴 마리아 역시 본 모습을 잃고 희미한 형상으로만 남았다. 열차가 위로 올라갈수록 풍경은 점점 봄에서 겨울로 바뀌어간다. 순식간이다. 초록이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이내 온통 고운 설탕을 뿌려놓은 듯한 설원만 펼쳐진다. 그 와중에 열차는 벵엔(Wengen)에 도착했다.
이곳은 무공해 도시다.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다. 해마다 수많은 스키·보드 미니아들이 각종 장비를 열차에 싣고 이곳을 찾는다.
22개의 호텔이 집결된 리조트 마을이지만,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본격적인 시즌이 시작되기 전이어서 고요하고 한산했다. 벵엔에서 조금 위쪽인 라우버호른(Lauberhorn)에서는 매년 1월 중순 스키 월드컵이 열린다고 한다.
이때가 되면 눈으로 덮인 산등성이는 자연이 내려준 스릴 만점의 슬로프로 변신한다고. 철이 일러 이곳에서 스키를 타지 못함을 아쉬워하는 사이 오전 11시가 됐다. 멀리 융프라우의 세자매 봉우리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 내린다. 이제 융프라우 열차는 최정상의 역 융프라우요흐로 올라간다.
점점
철도의 경사가 가팔라지는가 싶더니 아이거글래처(Eiger gletscher)역부터는 암반을 뚫은 터널로 진입했다. 그런데 터널에 진입하면서부터 몸 상태가 이상해진다. 머리가 멍하고 속이 울렁거리며 몸이 무겁다. 고산병이다. 처음 접하는 3000m 고도의 환경에 몸이 적응하지 못한 탓이다. 별 수 없다. 사람들의 충고대로 물을 자주 마시는 수밖에.
묀히와 아이거 봉우리를 배경으로 달리는 융프라우 열차
융프라우 철도에서 만난 한국어 안내
그렇다고 아이거 북벽 한가운데 정차하는 아이거반트(Eigerwand)역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2865m 높이에 위치한 이 역은 아이거 암반 속에서 북벽 바깥을 볼 수 있도록 유리로 창을 냈다. 직각으로 떨어져 내리는 날카로운 아이거의 경사면 위를 우리가 지나왔다니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매섭게 몰아친 바람이 창을 두드린다.
“갑자기 어제부터 기온이 떨어져서 겨울 날씨가 됐어요. 빙하 트레킹이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가이드의 목소리가 둔해진
귓가를 스쳐갔다. 이국에서 만나는 우리말처럼 반가운 것이 또 있을까? 융프라우 철도 안에 설치된 LCD 모니터에는 우리 기업의 이름이 뚜렷하게 찍혀 있고, 각국의 언어로 융프라우 철도의 역사를 설명하는 방송에도 한국어가 포함돼 있다. 방송에 귀를 기울이던 중 드디어 융프라우요흐에 도착했다.
3454m에 달하는 높이만큼 몸의 피로도도 더해진다. 천천히 움직이도록 주의하며 융프라우요흐 건물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벽 전면이 커다란 유리창인 레스토랑 내부에 들어서자 24km까지 이어지는 알레취(Aletsch) 빙하가
멀리 펼쳐진다. 밖은 온통 눈 덮인 산뿐이다. 하늘과 태양, 그리고 그 빛을 온전히 받아내 하늘로 반사하는 하얀 스크린 같다.
날이 이렇게 화창하니, 알레취 빙하 위를 걷는 빙하 트레킹은 무리 없이 가능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초고속 승강기로 올라가는 스핑크스테라스에서 알프스의 웅장한 산을 바라보니 가슴 가득 호기가 차오른다. 등반에 제법 일가견이 있어 보이는 다른 일행들도 빙하 트레킹을 재촉했다. 가이드는 신중했다.
“강풍이 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찬성 의견이 우세하다. 빙하 위를 기계로 다져 만든 트레킹 코스는 한눈에 보기에는 눈길이라는 점이 특이할 뿐, 하이킹을 하기에는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트레킹 코스 위에서 보는 빙하는 잠든 바다 같다. 끝없고 넓고 깊이를 알 수 없다. 그 곁으로 바위와 협곡을 드러낸 산이 거인처럼 불쑥불쑥 솟아있다.
하늘과 알프스 사이에 선 인간은 무력하게 1m도 채 안 되는 보폭으로 걸음을 옮길 뿐이다. 자연이 안겨주는 것은 경이와 신비, 그리고 두려움이다. 거대한 존재에 쫓기듯 일행을 쫓아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몸 상태가 심상찮다. 천천히 움직인다고 생각했는데도 호흡이 가쁘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장기에 돌덩이를 단 듯 몸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다. 시계가 온통 하얀 곳에서는 거리감조차 잃는다. 돌아가려고 해도 이미 얼마나 걸어왔는지 알 수 없다. 어느새 빙하 위로 거센 강풍까지 몰아친다. 아뿔싸! 길 위에는 우리 일행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한 여성이 트레킹 시작 지점에서 걸어오다 멀리서 강풍에 시달리는 우리 일행을 보더니 사진 몇 장 찍고 조용히 돌아섰다.
묀히 산장까지
걷는 빙하 트레킹 코스는 편도 1시간 정도 걸린다. 내가 걸어온 길은 30분 거리, 딱 절반이다. 일행과 거리차도 너무 많이 벌어진 것을 보고 결국 중도에서 포기했다. 돌아가는 길에는 더 심한 강풍이 몰아쳤다.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쌓인 눈이 날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기를 몇 차례. 등을 떼미는 세찬 바람에 설원 저편으로 날려갈까 납작 엎드린다.
그러나 지친 몸보다 사람을 더욱 힘겹게 하는 것은 고립감과 무력감이다. 트레킹 코스 위에는 다른 누구도 없고 웅장한 자연만 무심히 인간을 내려다봤다. 알프스에
도전했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아마 이 두려움을 이겨내고자 산에 오른 것 아닐까? 간신히 코스 입구에 다다랐는데 뒤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린다.
기계차가 코스 위를 돌아다니며 눈을 다져 안전성을 점검하는 것이다. 방금 전까지 두려움에 떨던 스스로를 기억해내니 실소가 터져 나왔다. 융프라우에는 멋진 트레킹 코스가 많지만, 대부분의 트레커는 여름에 찾아와 초록 알프스의 경치와 야생화를 감상한다. 그러나 초겨울이나 이른 봄 정도 기후가 크게 걱정되지 않는 환경에서라면 설산 트레킹도 권할 만하다.
쉬니케플라테 산악호텔에서 열린 인터포크 융프라우 축제에
참여한 주민들이 포크댄스를 추고 있다.
냉정한 산의 모습에 경이를 느끼는 것도 감동적일 것이다. 잠시 따끈한 커피를 마셔 몸을 녹이고 이곳 저곳을 둘러본다. 가이드의 배려로 융프라우요흐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만나 내부 시설을 돌아볼 수 있었다. 이곳에는 기념품가게는 물론 알프스 연구전시실과 두 산악안내인이 만든 얼음궁전도 있다.
얼음으로 만든 아치형 지붕과 거대한 기둥 등 구조물이 관광객의 시선을 빼앗는다. “여기는 철저히 고립된 장소나 다름 없기 때문에 안전에 각별히 신경을 씁니다. 모든 직원이 소방대원 자격증을
획득할 정도입니다. 태양열 설비를 갖추고 눈 녹인 물을 적극 활용하는 등 자원도 효율적으로 활용하죠.”
융프라우의 하루는 꼭두새벽부터 시작된다. 다시 열차로 짐을 부친 후 쉬니케플라테(Schynige Platte)로 향한다. 아직 잠이 덜 깬 알프스는 푸르스름한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다. 철도는 이 거대한 산맥 가장 깊은 협곡을 따라 돌며 길을 내준다. 오늘의 목적지인 쉬니케플라테로 가려면 우선 인터라켄 인근인 빌더스빌(Wilderswil)까지 가서 쉬니케플라테로 가는 철도로 갈아타야 한다.
쉬니케플라테로
오르는 열차는 한쪽으로는 융프라우·묀히·아이거 등 세 봉우리의 전경을, 다른 한쪽으로는 인터라켄을 가운데 둔 두 개의 거대한 호수, 브리엔츠(brienz)와 툰(Thun)의 전경을 볼 수 있다. 천길 낭떠러지 위를 아슬아슬하게 오르다 보면 오팔 보석과 비슷한 푸른 호수가 서서히 드러난다.
작은 열차에는 이 지역 주민들이 가득 탑승했다. 쉬니케플라테에서 열리는 ‘인터포크융프라우(Interfolk Jungfrau)축제’에 참가하거나 관람하러 가는 사람들이다. 흔히 알프스 전통 복장 하면 떠오르는 모습 그대로다.
남자들은 붉은 테를 두른 재킷에 조끼와 모자를 갖춰 정장차림을 했고, 여자들은 봉긋한 소매의 블라우스에 어깨끈이 달린 원피스를 입었다.
잡담을 나누며 큰소리로 웃는 등 제법 들뜬 모습이다. 여름이 되면 이곳에 있는 알핀가든(Alpin Garden)에는 500여 종의 야생화가 알프스의 산을 배경으로 만개한다. 수목원 같은 인공정원과 달리 자연 그대로의 꽃밭을 볼 수 있는 데다 경관도 좋아 트레커들에게 큰 인기다. 이날은 가랑비가 오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다소 흐린 날씨였는데 안개가 끼었다 걷히면서 드러나는 맞은편
산맥의 모습이 그야말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인터포크축제는 올해 처음 시작된 융프라우 지역의 스위스 전통 공연 행사다. 총 4일 동안 이곳과 피르스트(First)·클라이넥샤이텍·하더쿨름(Harder Kulm)에서 번갈아 열리며 민속음악, 노래와 춤, 그리고 전통 공예품과 게임이 준비되어 있다. 스위스를 처음 방문하는 여행객에게는 이 지역을 한번에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행사가 진행되는 쉬니케플라테 산악호텔 앞 광장에는 커다란 모닥불이 들어섰다. 행사를 준비하는
남성들의 손길이 바빠졌다. 게임이라고 해봐야 말굽을 던져 땅에 꽂은 쇠막대기에 걸기, 삼지창과 비슷한 농기구로 볏단을 찍어 흰 색으로 그려놓은 원 안에 던지기 등 단순하고 간단한 것들뿐이다.
그런데 은근히 볏단이 잘 꿰이지 않는다. 한 주민이 먼저 시범을 보여줘 따라 했더니 조금 실력이 나아졌다. 아쉽게 원 밖으로 나가기는 했지만 제법 멀리 던졌더니 주민들이 박수를 쳐준다. 이방인들이 즐기는 모습에 무척 기쁜 표정이다. 호텔 안에서는 복장을 갖춰 입은 10명 남짓 되는 사람이 스위스의 전통악기 알펜호른(Alpenhorn)을
불며 전통음악을 연주했다.
느리고 웅장해 어딘지 가스펠 멜로디와 닮은 음악이 홀을 메운다. 알펜호른을 연주할 때는 항상 스위스 깃발과 해당 주의 깃발을 양쪽에 내걸 정도로 이 음색에는 스위스인의 자부심과 긍지가 담겨 있다.
일행 중 한 명은 공연 후 연주자의 권유로 직접 알펜호른을 불어보기도 했는데, 그냥 부는 것이 아니라 허밍 하는 소리를 입으로 내어 악기가 울리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공연팀은 지역의 알펜호른동호회 회원들이라고 한다.
축제 참가자들이 스위스 전통악기인 알펜호른 연주를 선보이고 있다.
지역 문화와 전통의 긍지, 인터포크축제
행사의 진행자가 음료를 권한다. 따끈하고 달콤하면서 커피향과 알코올향이 난다. 이 지방에서 마시는 알코올 음료인 모양이다.
“마당에서도 파는 것 같던데, 나가서 경치를 보며 마시면 더 좋을 거예요.”
광장의 모닥불 위에는 솥을 걸고 그 안에 물과 커피콩·알코올 등을 넣고 끓이고 있다. 일행과 나눠 마시는 도중 안개가 서서히 걷힌다.
방한복 사이를 파고드는 바람을 막아보고자 모닥불 곁으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어디에 가든 사는 모습은 모두 비슷하다. 온기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고, 사람 사이 정을 그리워한다.
융프라우는 세계적 관광명소지만 주민들의 현실은 한국의 농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젊은이들은 떠나고 노령인구만 남는다. 그래도 그들은 이 지역 문화와 전통의 긍지와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오늘 이 행사를 준비했다. 홀에서 빙글빙글 돌며 포크댄스를 추는 50대 여성의 볼이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합창에
참가한 할아버지는 싱글벙글 웃으며 나비넥타이를 매만진다. 주민 간의 끈끈한 정과 결속력이 이 인터포크 행사를 더욱 훈훈하게 덥히고 있었다. 다음 목적지인 피르스트로 가기 위해서는 그린델발트에서 곤돌라를 타야 한다. 아쉽지만 점심을 마치고 역으로 내려갔다. 역에는 수업을 마치고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초등학생들이 잔뜩 모여있다.
전통의상을 입은 금발의 아이들은 천진한 웃음을 터뜨리며 사람들의 플래시 세례에 답한다. 그란델발트에서 출발한 곤돌라는 2개의 정거장을 지나쳐 피르스트로 간다. 지금껏
묀히와 융프라우 쪽을 여행했다면 여기서부터 아이거와 슈렉호른(Schreckhorn) 가까이로 다가가는 셈이다.
피르스트를 등지고 바라보면 아이거와 슈렉호른 사이의 깊고 긴 V자형 계곡이 한눈에 들어온다. 흐르던 빙하가 속도를 늦추고 결국 멈추면 겨울이다. 빙하를 등지고 사는 마을을 개척한 최초의 사람들은 어떤 절박한 심정이었을까? 아마 그것은 아이거와 묀히를 뚫어 열차를 내는 것 이상의 결심이었으리라.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피르스트 산장이 시끌벅적하다. 인터포크축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공예품전시장 한 편에서는 몇 명의 여성이 앉아 레이스를 직조해 다양한 형태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 개의 실마다 작은 나무 막대를 달아 표시를 한다. 이들 실을 몇 백 개씩 교차시켜 레이스를 짜나가는 것이다.
“너무 복잡해 보여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나요?”
“사실 어렵고 시간도 드는 작업이죠. 이 마을은 폭설이나 눈사태 등 자연환경 때문에 겨울철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요. 그 무료함을 달래 주는 취미죠.”
스위스의
험난한 자연이 낳은 작품은 또 있다. 바로 자전거썰매다. 나무로 만든 이 자전거는 바퀴 대신 썰매 날이 자전거 다리 아래 붙어있다. 경사진 눈밭 위에서 핸들을 잡고 안장에 앉아 내려오는 것이라는데 도통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바람을 타고 자유에 몸을 맡기는 하강
“그린델발트에서는 자전거썰매챔피언대회도 열린다고요.”
직접 이 자전거를 만든다는 남성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원하는 사람들은 직접 타볼 수도 있는 모양이다. 이날
인터포크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이 지역 중년부인의 모임 ‘노스탤지어’의 화려한 무대였다. 20여 명의 중년여성이 200년 전 사진에서 튀어나온 듯한 드레스 차림에 깃털 달린 모자, 양산까지 갖추고 귀부인의 어엿한 자태를 뽐내며 등장했다.
이들은 명랑한 멜로디의 노래를 합창으로 불렀는데 관객들로부터 엄청난 갈채를 받았다. “우리는 옛날의 향수를 추억하기 위해 만든 모임이에요. 그 시대의 정신과 의복양식에 대해 같이 나누며 즐기는 거죠.” 한 여성이 노스탤지어에 관한 팸플릿을 건네며 설명한다. 빅토리아시대를
연상케 하는 복장은 어느 여성이든 한 번쯤 입어보고 싶은 것 아닐까 싶다.
피르스트에서 아래 마을로 내려갈 때 정상에서 줄에 몸을 연결하고 뛰어내려 케이블을 따라 날아 내려가는 피르스트 플라이어를 타고 간다. 까마득히 100m 아래가 내려다보이는 벼랑 끝에서 뛰어내려 총 800m 구간을 시속 90km로 내려간다. 단 1분 만에 한 정거장 거리를 쏜살같이 내려오는 스릴을 즐길 수 있다.
그 뒤에는 보르트(bort)에서 그린델발트까지 트로티바이크(Trottibike)를 타고 간다. 트로티바이크는
페달이 없고 발을 얹는 판과 작은 바퀴 두 개만 달린 자전거다. 경사가 계속되는 이곳 지형에서 큰 힘 들이지 않고 느긋하게 타고 가며 지역의 목장과 초원 등 넉넉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게 해줬다.
거칠 것 없이 바람을 헤치고 달리며 젖소가 느긋하게 풀을 뜯는 목장을 구경한다. 멀리 첨탑이 있는 교회에서 종소리가 들려온다.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가볍게 달리고 싶다. 그리고 이 자유로운 느낌이 끝나지 않기를 소망하는 사이 어느덧 길은 평지로 이어진다. 그린델발트에 도착한 것이다.
융프라우에
있는 동안 고산증세는 서서히 나아졌지만 산사람의 병이 옮아온 것 같다. 산의 정적과 고요가 그립다. 자는 동안에도 폐 속을 뻐근하게 울리던 그 맑은 대기를 원한다. 거대한 산맥과 빙하 아래에 인간은 그저 그림자에 기생하듯 작게 숨쉴 뿐, 그래도 그 산장의 밤들은 얼마나 평안했던가? 생각에 잠겨 걷던 나는 그린델발트를 누비는 자동차 경적 소리에 화들짝 놀라 비켜선다. 이미 나는 평지에 속한 사람이었다.
(월간중앙 201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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