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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韓維)
[생원] 중종(中宗) 26년(153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2등(二等) 13위(18/10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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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지국(持國)
본인본관 청주(淸州)
거주지 한성([京])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유학(幼學)
[가족사항]
[부(父)]
성명 : 한형윤(韓亨允)[進]
품계 : 자헌대부(資憲大夫)
관직 : 행함경도관찰사(行咸鏡道觀察使)
겸직 : 겸 병마수군절도사(兼兵馬水軍節度使)
겸직 : 순찰사(巡察使)
[출전]
『가정10년신묘8월○일사마방목(嘉靖十年辛卯八月○日司馬榜目)』(국사편찬위원회[MF A지수208])
한형윤(韓亨允)
[문과] 성종(成宗) 23년(1492)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5위(15/33)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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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신경(信卿)
시호(諡號) 효헌(孝憲)【補】(주1)
생년 경인(庚寅) 1470년 (성종 1)
졸년 임진(壬辰)【補】(주2) 1532년 (중종 27)
향년 63세
합격연령 23세
본인본관 청주(淸州)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한성부좌윤, 경상도관찰사, 특진관 등을 역임한 문신. 서예가.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신경(信卿).
한혜(韓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중추부사 한계미(韓繼美)이고, 아버지는 사섬시부정(司贍寺副正) 한절(韓岊)이며, 어머니는 성준(成俊)의 딸이다.
출생 3개월 만에 어머니를 병으로 여의고, 1486년(성종 17) 진사가 되고 149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되고, 무예에도 능하여 선전관을 겸임하였다.
그 뒤 1493년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고, 그 해 겨울에 승문원주서가 되었다.
1495년(연산군 1) 전적을 거쳐 예조좌랑, 1497년 중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형조정랑·기주관·응교·전한을 역임하였다.
이어서 지제교·춘추관편수관·홍문관부교리·경연시강관을 거쳐 함경도어사가 되었다가 곧 진도로 내려가 왜구를 막지 못한 병사를 문책하고 돌아왔다.
1499년경기도·경상도의 어사가 되어 십포(十浦)의 불법사(不法事)를 다스렸다.
1503년 이조참의를 거쳐 이조참판이 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전라도 만경에 유배되었다. 왕의 실덕을 간하는 주동자로 지목되어 유배지에서 잡혀왔으나 주동자가 아님이 밝혀져 사대문 밖의 거주(居住)의 처분을 받았다가 이듬해 다시 투옥되어 진도로 유배되었다.
이 해에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첨지중추부사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한성부좌윤, 경상도와 경기도의 관찰사, 특진관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서예에 능한 당대의 명필가였다.
작품으로 「황보인묘비문(皇甫仁墓碑文)」·「성준묘비문(成俊墓碑文)」 등이 있다.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형윤(韓亨允))]
[문과] 연산(燕山) 3년(1497) 정사(丁巳) 중시(重試) 병과(丙科) 7위(09/10)
[진사] 성종(成宗) 17년(1486)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一等) 3위(3/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甲3‧乙7‧丙23]
전력 진사(進士)
관직 형조판서(刑曹判書)
관직 한림(翰林)
문과시제 책문(策問)
타과 1486년(성종 17)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1등(一等) 3위
본인문과 1497년(연산군 3) 정사(丁巳) 중시(重試) 문과(文科) 병과(丙科) 7위
기타 청백(淸白)
[가족사항]
[부(父)]
성명 : 한절(韓岊)
[조부(祖父)]
성명 : 한계미(韓繼美)
[증조부(曾祖父)]
성명 : 한혜(韓惠)[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성준(成俊)[文]
본관 : 창녕(昌寧)【補】
[처부(妻父)]
성명 : 최렬(崔洌)
본관 : 미상(未詳)
[가족과거]
종조부(從祖父) : 한계희(韓繼禧)[文]
[주 1]시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시호를 추가.
[주 2]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四(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한계미(韓繼美)
[중앙관] 조선전기 중앙관 찬성(贊成)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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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諡號) 문양(文襄)
문무구분 문관
생년 미상(未詳) (미상)1421년(세종 3)
졸년 미상(未詳) (미상)1471년(성종 2)
시대 조선전기
왕대 세조(世祖)
본관 미상(未詳)
활동분야 관료
항목 찬성(贊成)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오위도총부도총관, 좌찬성,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공보(公甫).
한수(韓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개국공신 한상경(韓尙敬)이고, 아버지는 함길도관찰출척사 한혜(韓惠)이며, 어머니는 성달생(成達生)의 딸이다. 그의 처는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언니로, 윤번(尹璠)의 딸이다.
1438년(세종 20) 18세의 나이에 음보로 충의위사용(忠義衛司勇)이 되고, 부사직으로 감찰을 역임하였다.
나주판관을 거쳐 1452년(문종 2) 형조도관좌랑(刑曹都官佐郎)에 제수되었다.
다음 해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갈 때 그를 보좌한 공로를 인정받아 군자판관이 되었다.
1455년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세조가 즉위하자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 3등에 책록되고 통훈대부(通訓大夫)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절충장군행호분시위사대호군지사간원사(折衝將軍行虎賁侍衛司大護軍知司諫院事)로 옮겨진 뒤 그 해 6월 동부승지로, 7월에 우부승지로, 10월에 좌부승지로 승진하였다.
1457년 우승지로 재직중 세자의 질병을 열심히 간호해 왕의 칭찬을 받았다.
1458년 9월 가선대부(嘉善大夫)로서 호조참판이 되고, 서원군(西原君)에 봉해졌다.
1461년 하삼도(下三道)의 부호(富戶)를 추쇄(推刷:부역 또는 병역 기피자를 찾아냄)해 평안도·황해도·강원도 등에 이주시켰다.
또한 안집도순찰사(安集都巡察使)가 되어 제방을 쌓고 진전(陳田)을 개간하는 등 북방 개척에 큰 공적을 세웠다.
1463년 자헌대부(資憲大夫)로서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세조는 군액 부족을 우려해 3도의 군적(軍籍)을 정비하도록 하였다.호구(戶口)의 증감을 정확하게 조사해 왕의 뜻에 부합하였다. 1465년 정헌대부(正憲大夫)로서 겸사복장(兼司僕將)이 되었다가 오위도총부도총관으로 옮겼다. 1467년 숭정대부(崇政大夫)로서 평안도병마수군절도사 겸 영변대도호부사로 부임하였다.
그 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평안도의 정병(精兵)을 이끌고 가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또한 숭록대부 우찬성 겸 오위도총부도총관이 되었다.
1469년(예종 1) 좌찬성으로 옮기고 이조판서를 겸하였다.1470년 보국숭록대부에 승품되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471년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고, 이어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계미(韓繼美))]
[중앙관] 조선전기 중앙관 이조판서(吏曹判書)
[지방관] 조선전기 지방관 평안도(平安道)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1462[임오(壬午)]
[관인정보]
제수년월 1467 [정해(丁亥)]
[품관 정보]
품관 종1품
[출전]
『청선고(淸選考)』(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603])
한혜(韓惠)
[문과] 태종(太宗) 17년(1417)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1[壯元]위(01/33)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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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 계미(癸未) 1403년 (태종 3)
졸년 신해(辛亥)【補】(주1) 1431년 (세종 13)
향년 29세
합격연령 15세
본인본관 청주(淸州)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1403년(태종 3)∼1431년(세종 1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증조부는 한공의(韓公義)이고, 조부는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 상당군(上黨君) 한수(韓修)이며, 부친은 개국공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상경(韓尙敬)이다. 모친은 오준량(吳俊良)의 딸이며, 전처는 이수(李穗)의 딸이고, 후처는 성달생(成達生)의 딸이다.
1414년(태종 14) 갑오식년사마시(甲午式年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고, 음직(蔭職)으로 벼슬에 나가 종묘서령(宗廟署令)으로 1417년(태종 17) 4월에 거행된 정유식년문과(丁酉式年文科)에 을과(乙科) 1등으로 급제하였다.
1419년(세종 1) 겸지사간원사(兼知司諫院事)를 지내고 다음해 동부대언(同副代言)‧좌대언(左代言) 등을 역임하였다.
임금이 각별히 신임하여 상왕과 초가정자에서 정사를 나누며 술자리를 할 때나 매사냥을 나설 때 대동했다. 또 당시 우의정 이원 등이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반송정(盤松亭)에서 진법(陳法)을 연습하니 임금이 한혜에게 명하여 선온(宣醞)을 가지고 가서 위로하게 하였다.
1423년 부친 한상경이 죽자, 그는 부친의 공신 봉작을 승습하여 청산군(淸山君)에 봉해졌다. 1426년 병조참의(兵曹參議), 다음해에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지내고 1428년 10월 좌군총제(左軍摠制)에 올랐다.
그 해 11월에는 절일사(節日使)에 임명되어 건어물 등의 방물을 가지고 명나라에 다녀왔다. 1429년에는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나갔고, 1430년 간신배의 불의함을 참지 못하여 해임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에 제수되었다.
그 다음해인 1431년 3월에 29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묘는 남양주 진접읍 금곡리에 있다.
[참고문헌]太宗實錄 世宗實錄 國朝榜目 南楊州市誌
[생원] 태종(太宗) 14년(1414)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생원] 2등(二等) 23위(28/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乙3‧丙7‧同進23]
전력 종묘서령(宗廟署令)
품계 가선대부(嘉善大夫)
관직 함경감사(咸鏡監司)
봉호 청산군(淸山君)
타과 1414년(태종 14)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二等) 23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한상경(韓尙敬)[麗文]
[조부(祖父)]
성명 : 한수(韓脩)[麗文]
[증조부(曾祖父)]
성명 : 한공의(韓公義)
[외조부(外祖父)]
성명 : 오준량(吳俊良)
본관 : 해주(海州)【補】
[처부(妻父)]
성명 : 이수(李穗)(주2)
본관 : 성주(星州)【補】
[처부(妻父)2]
성명 : 성달생(成達生)[武]
본관 : 창녕(昌寧)【補】
[가족과거]
자(子) : 한계희(韓繼禧)[文]
[주 1]졸년 : 「『세종실록』 51권, 세종13년(1431) 3월3일」 졸기 기사를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처부 : 『성주이씨족보(星州李氏族譜)』(1687, 국립중앙도서관[古2518-62-578-3]) 권下, [長~寒面]을 참고하여 처부1 본관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一(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한상경(韓尙敬)
[고려문과] 우왕(禑王) 8년(1382) 임술(壬戌) 임술방(壬戌榜) 을과(乙科) 3위(3/33)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D55CC0C1ACBDB1360X0
자(字) 숙경(叔敬)
호(號) 신재(信齋)
시호(諡號) 문간(文簡)
생년 경자(庚子)【補】(주1) 1360년 (공민왕 9)
졸년 계묘(癸卯) 1423년 (세종 5)
향년 64세
합격연령 23세
본인본관 청주(淸州)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이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숙경(叔敬)·경중(敬仲), 호는 신재(信齋).
할아버지는 호부상서 한공의(韓公義)이고, 아버지는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 한수(韓脩)이며, 어머니는 길창군(吉昌君)권적(權適)의 딸이다.
1382년(우왕 8) 문과에 급제하여, 예의좌랑·우정언·전리정랑(典理正郎)·예문응교·공부총랑(工部摠郎)·종부영(宗簿令)을 거쳐, 1392년(공양왕 4) 밀직사우부대언에 승진하였다.
이 해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하는 모의에 가담하고, 보새(寶璽)를 받들어 이성계에게 바쳤으며, 그 공으로 개국공신 3등에 추록되었다.
개국 후 중추원도승지가 되고,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도평의사사사에 승진되었으며, 충청도도관찰사가 되어 서원군(西原君)에 봉하여졌다.
다시 경기좌도도관찰사에 보직되었다가 태종 때 참찬의정부사·이조판서를 거쳐,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우의정·영의정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썼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상경(韓尙敬))]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乙3‧丙7‧同進23]
전력 서령(署令)
관직 우의정(右議政)(주2)
관직 영상(領相)
기타 훈신(勳臣)
[가족사항]
[부(父)]
성명 : 한수(韓脩)[麗文]
[조부(祖父)]
성명 : 한공의(韓公義)
[증조부(曾祖父)]
성명 : 한악(韓渥)
[외조부(外祖父)]
성명 : 권적(權適)
본관 : 안동(安東)【補】
[처부(妻父)]
성명 : 오준량(吳俊良)
본관 : 해주(海州)【補】
[안항(鴈行)]
형(兄) : 한상질(韓尙質)[麗文]
제(弟) : 한상덕(韓尙德)[麗文]
[주 1]생년 : 「『세종실록』 19권, 세종 5년(1423) 3월 7일」 졸기 기사를 참고하여 생년을 추가.
[주 2]관직 : 「대명홍무15년임술년5월일급제동년방목(大明洪武十五年壬戌年五月日及第同年牓[榜]目)」(『고문서집성(古文書集成)』23책(거창 초계정씨篇), 韓國精神文化硏究院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관직을 추가.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 卷之二(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4650-10])
한수(韓脩)
[고려문과] 충목왕(忠穆王) 3년(1347) 정해(丁亥) 정해방(丁亥榜) 을과(乙科) 3위(3/33)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2D55CC218FFFFB1333X0
자(字) 맹운(孟雲)
호(號) 유항(柳巷)
시호(諡號) 문경(文敬)
생년 계유(癸酉) 1333년 (충숙왕 후2)
졸년 갑자(甲子) 1384년 (우왕 10)
향년 52세
합격연령 15세
본인본관 청주(淸州)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고려후기 밀직제학, 동지밀직, 판후덕부사 등을 역임한 관리.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맹운(孟雲), 호는 유항(柳巷). 중찬(中贊) 한악(韓渥)의 손자이다.
일찍부터 문재(文才)가 뛰어나, 1347년(충목왕 3) 15세의 나이로 과거에 합격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충정왕 때 정방(政房)의 필도치(必闍赤:서기일을 맡은 관청)에 임명되었으며, 왕이 왕위를 내놓고 강화로 쫓겨날 때 시종해 따라갔다.
1353년(공민왕 2) 전의주부(典儀注簿)로 기용되어 다시 필도치가 되었고 이어 전리좌랑·성균사예·비서소감·병부시랑·국자감좨주 등을 역임하였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안동으로 피난할 때 호종했으며, 귀경 후 사복시판사를 거쳐 좌대언(左代言)으로 승진하였다.
1365년 신돈(辛旽)이 집권하자, 왕에게 신돈이 바른 사람이 아니라며 멀리할 것을 아뢰었다가 예의판서(禮儀判書)로 밀려난 다음 곧 관직에서 물러났다.
1371년 신돈이 주살되자 왕이 다시 불러 이부상서·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로 발탁했으며, 곧 승선(承宣)에 임명됨으로써 전선(銓選:인사행정)을 관장하게 되었다.
우왕대에 밀직제학·동지밀직 등을 지냈으나 공민왕 시해에 관여한 한안(韓安)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일시 유배되었으며, 1378년 배소에서 돌아와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지고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이 되었다.
이어 청성군(淸城君)에 개봉(改封)되고 1383년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에 이르렀다.
시서(詩書)에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초서와 예서에 능해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났다. 노국대장공주묘비(魯國大長公主墓碑)·회암사지공대사탑비(檜巖寺指空大師塔碑) 등과 현존하는 여주 신륵사보제선사사리석종비(神勒寺普濟禪師舍利石鐘碑)는 한수의 필적이다.
이색(李穡)과는 일찍부터 교분이 깊었고, 또한 『유항집(柳巷集)』이라는 시집을 남겼다고 한다. 『동문선』에「영모정행(永慕亭行)」등 시 여러 수가 수록되어 있고, 그 밖의 책에서도 한수의 시문이 산견된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수(韓脩))]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관직 대제학(大提學)
[가족사항]
[부(父)]
성명 : 한공의(韓公義)
[조부(祖父)]
성명 : 한악(韓渥)
[증조부(曾祖父)]
성명 : 한사기(韓謝奇)[麗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경사만(慶斯萬)
[처부(妻父)]
성명 : 권적(權適)
본관 : 안동(安東)【補】
[가족과거]
자(子) : 한상질(韓尙質)[麗文]
자(子) : 한상경(韓尙敬)[麗文]
자(子) : 한상덕(韓尙德)[麗文]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 卷之二(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4650-10])
한공의(韓公義)
출생일 1307년(충렬왕 복위9)
사망일 1365년(공민왕 14)
고려후기 산기상시, 호부상서, 밀직부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무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의지(宜之). 아버지는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악(韓渥)이며, 어머니는 동지밀직전리판서(同知密直典理判書) 원경(元卿)의 딸이다.
음보(蔭補)로 녹남부사(錄南部事)에 진출한 뒤, 충혜왕의 신임을 받아 호군(護軍)에 제수되고 여러 번 승진하여 대호군 삼사우윤(大護軍三司右尹)에 올랐다.
집권층의 비위에 거슬려 전주목사(全州牧使)로 좌천되었으나, 선정을 베풀어 충목왕 때 소부(小府)·위위(衛尉)·선공(繕工)의 세 판사(判事)를 역임하였다.
이어 대언(代言)이 되고, 왕이 승하하던 날에 “임금과 신하는 시종(始終)이 있어야 한다.”고 하니, 공민왕이 한공의를 신임하여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임명하였다.
다시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옮겼으며, 2년이 지나자 다시 형부(刑部)로 옮겼는데 송사처리가 공정하였다.
1364년(공민왕 13) 밀직부사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와서 이듬해 청성군(淸城君)에 봉하여졌다.
1365년 6월 신돈이 정권을 잡은 지 30여 일 만에 대신들을 참소하자 영도첨의(領都僉議) 이공수(李公遂), 시중(侍中) 경천흥(慶千興)과 함께 파면되었다. 시호는 평간(平簡)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공의(韓公義))]
한악(韓渥)
출생일 1274년(원종 15)
사망일 1342년(충혜왕 복위 3)
고려후기 삼사사, 중찬, 우정승 등을 역임한 관리.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간의대부(諫議大夫) 한사기(韓謝奇)의 아들이다.
1310년(충선왕 2) 우대언(右代言), 1320년(충숙왕 7) 선부전서(選部典書)를 지내고 이듬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어 왕이 원나라에 갈 때 호종하였다.
당시 고려의 왕위를 노리고 있던 심양왕 왕고(瀋陽王 王暠)가 여러가지로 왕을 참소하였는데 뛰어난 지략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함으로써 인정을 받았으며, 이 때의 공으로 1등공신이 되어 선력좌리공신(宣力佐理功臣)의 호를 받고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해졌다.첨의평리(僉議評理)와 찬성사를 거쳐 1330년(충혜왕 즉위년)에 삼사사(三司事), 이듬해 중찬(中贊)을 역임하고, 1340년(충혜왕 복위 1) 우정승에 이르렀다.
한어(漢語)와 몽고어에 능하였으며 성품이 신중하고 기량(器量)이 있었다고 한다.
충혜왕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사숙(思肅)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악(韓渥))]
한사기(韓謝奇)
[고려문과] 충렬왕(忠烈王) 5년(1279) 기묘(己卯) 기묘방(己卯榜) 병과(丙科) 3위(6/43)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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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본관 청주(淸州)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43명
관직 사의대부(司議大夫)
기타 『동문선(東文選)』 卷之86, 서(序), [하죽계안씨삼자등과시서(賀竹溪安氏三子登科詩序)](李穡)에 한사기(韓謝奇)‧한사겸(韓謝謙)‧한보(韓譜)가 3형제 등과로 나온다.
[가족사항]
[부(父)]
성명 : 한강(韓康)[麗文]
[조부(祖父)]
성명 : 한광윤(韓光胤)
[증조부(曾祖父)]
성명 : 한○○(韓○○)
[처부(妻父)]
성명 : 채인규(蔡仁規)【補】(주)
본관 : 평강(平康)【補】
[안항(鴈行)]
제(弟) : 한사겸(韓謝謙)[麗文]
제(弟) : 한보(韓譜)[麗文]
[주 1] 외조부 : [채인규묘지명(蔡仁揆墓誌銘)]과 『평강채씨대동보(平康蔡氏大同譜)』(1991) 권1, [1쪽]을 참고하여 처부를 추가.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 卷之二(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4650-10])
한강(韓康)
[고려문과] 고종(高宗) 99년미상(未詳) 시년미상(未詳)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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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初名) 한경(韓璟)
시호(諡號) 문혜(文惠)【補】(주1)
생년 무자(戊子)【補】(주2) 1228년 (고종 15)
졸년 계묘(癸卯)【補】(주3) 1303년 (충렬왕 29)
향년 76세
본인본관 청주(淸州)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고려후기 지밀직사사, 판삼사사, 찬성사 등을 역임한 관리.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한경(韓璟).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감찰어사가 되었다가 금주수(金州守)가 되었다. 금주는 항상 전부(田賦)가 정액(定額)에 미달하여 수령이 많이 파면되었는데 이곳에 부임하여 둔전(屯田)을 경영, 곡식 2,000여 석을 얻어 이민(吏民)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 공적으로 예부낭중(禮部郎中)에 제수되고 공부시랑 간의대부(工部侍郎諫議大夫)·국자대사성 한림학사(國子大司成翰林學士)를 지냈다.
충렬왕 때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고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옮겼다.
뒤에 찬성사로 치사(致仕)하였다.
충렬왕 때 시무(時務)에 관하여 건의하였는데, 그 내용은 종묘의 향사를 엄격히 할 것, 제사(諸司)의 시물(市物) 억매를 금할 것, 사체를 소중히 다룰 것, 살생을 금할 것, 사냥을 그치고 봉양을 절약하여 기갈을 진휼하게 할 것, 『법화경』을 숭상하고 독송할 것 등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강(韓康))]
[고려사마] 고종(高宗) 30년(1243) 계묘(癸卯) 진사시(進士試) 1등(一等) 1[壯元]위(1/20)
[이력사항]
관직 첨의중찬(僉議中贊)
[가족사항]
[부(父)]
성명 : 한광윤(韓光胤)[麗文]
[조부(祖父)]
성명 : 한희유(韓希愈)【補】(주4)
[증조부(曾祖父)]
성명 : 한혁(韓奕)【補】(주5)
[외조부(外祖父)]
성명 : 진각(陳慤)【補】(주6)
본관 : 나주(羅州)【補】
[처부(妻父)]
성명 : 임전우(任全祐)【補】(주7)
본관 : 함종(咸從)【補】
[주 1] 시호 : 『고려사(高麗史)』 제107권, 열전 제20, [한강]과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1949)를 참고하여 시호를 추가.
[주 2] 생년 : [1331년 한강(韓康) 준호구(准戶口)]와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1949)를 참고하여 생년을 추가.
[주 3] 졸년 : 『고려사(高麗史)』 제32권, 세가 제32, [충렬왕 계묘 29년(1303)]과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1949)를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4] 조부 : [1331년 한강(韓康) 준호구(准戶口)]와 『청주한씨대동보(淸州韓氏大同譜)』를 참고하여 조부를 추가.
[주 5] 증조부 : [1331년 한강(韓康) 준호구(准戶口)]와 『청주한씨대동보(淸州韓氏大同譜)』를 참고하여 증조부를 추가.
[주 6] 외조부 : [1331년 한강(韓康) 준호구(准戶口)]와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1949)를 참고하여 외조부를 추가. 이명 진의(陳懿), 고명 진세장(陳世長).
[주 7] 처부 : [1331년 한강(韓康) 준호구(准戶口)]와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1949)를 참고하여 처부를 추가.
[출전]
『高麗時代 蔭叙制와 科擧制 硏究』(朴龍雲, 一志社, 1990.[422_591])
한광윤(韓光胤)
[고려문과] 강종(康宗) 99년미상(未詳) 시년미상(未詳)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D55CAD11C724U9999X0
본인본관 청주(淸州)【補】(주1)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이력사항]
관직 예빈경(禮賓卿)
[가족사항]
[부(父)]
성명 : 한희유(韓希愈)【補】(주2)
[조부(祖父)]
성명 : 한혁(韓奕)【補】(주3)
[증조부(曾祖父)]
성명 : 한상휴(韓尙休)【補】(주4)
[처부(妻父)]
성명 : 진각(陳慤)(주5)
본관 : 나주(羅州)【補】
[주 1] 본관 : 『청주한씨대동족보(淸州韓氏大同族譜)』를 참고하여 본관을 추가.
[주 2] 부 : 『청주한씨대동족보(淸州韓氏大同族譜)』를 참고하여 부를 추가.
[주 3] 조부 : 『청주한씨대동족보(淸州韓氏大同族譜)』를 참고하여 조부를 추가.
[주 4] 증조부 : 『청주한씨대동족보(淸州韓氏大同族譜)』를 참고하여 증조부를 추가.
[주 5] 처부 : 『청주한씨대동족보(淸州韓氏大同族譜)』를 참고하여 처부를 추가. 진의(陳懿)라고도 한다. 초명은 진세장(陳世長)임.
[출전]
『高麗時代 蔭叙制와 科擧制 硏究』(朴龍雲, 一志社, 1990.[411_522])
한희유(韓希愈)
출생일 미상
사망일 1306년(충렬왕 32)
고려후기 동북면도지휘사, 지첨의부사, 첨의우중찬 등을 역임한 관리. 무신.
가주(嘉州) 출신. 원래 평안북도 박천군 가산면의 아전이었다.
군졸 출신으로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기 때문에 항상 왕의 은덕에 감격했고, 왕의 뜻이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성품이 소박하고 도량이 넓으며 활 쏘고 말 달리는 것을 잘했을 뿐만 아니라 담력도 대단해, 1280년(충렬왕 6) 5월에는 대장군으로서 김방경(金方慶)과 함께 고성(固城)·칠포(漆浦)에 침입한 왜적을 방비하는 책임을 맡았다.
일개 대정(隊正)에서 출발해 대장군이 되어, 모함도 많이 받았다.
1282년에는 영통사(靈通寺) 승려 홍탄(洪坦)이 개인감정으로 모함해 국문을 당한 적도 있으나, 무고가 발각되어 홍탄이 오히려 섬으로 귀양을 갔다.
그 뒤 1287년에 호두패(虎頭牌)를 받고 좌익만호(左翼萬戶)가 되었다.
1290년에는 쌍성(雙城)에 주둔해 합단적(哈丹賊:원의 반란군)의 침입에 대비했고, 같은 해 8월에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임명되었다.
다음해인 1291년에는 내안(乃顔)의 무리인 합단이 기병대를 거느리고 오자, 원나라에서는 설도간(薛闍干) 및 나만알대왕(那蠻歹大王)을 보내어 구원을 하였다.
그러나 또다시 정병(精兵)이 와서 대진하게 되자, 창을 잡고 말을 달려 적진 속에 돌진하자 적진이 놀라 무너져 버렸다. 또한 용사를 잡아 목을 베어 머리를 창 끝에 매달아 적진이 모두 전의를 잃고 크게 패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충청도에서 합단의 잔당을 추격해 적군 580여 명의 항복을 받았다.
충렬왕은 한희유를 소환해 강도(江都)에 머무르게 하다가, 다시 1291년에는 동북면도지휘사로 임명하였다. 원나라에서는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으로 임명해 삼주호부(三珠虎符)를 주고 궁시(弓矢)·옥대(玉帶)·은(銀) 등을 전공으로 하사하였다.
이어 다음해에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로 삼고 진변만호(鎭邊萬戶)를 삼았다.
1295년 8월에는 김신보(金信甫)의 참소로 조월도(祖月島)로 귀양 가게 되었고, 1299년 만호 인후(印侯)·김흔(金忻)과 밀직 원경(元卿)에 의해 불법한 일을 꾀했다며 체포당했다. 이 사건의 처리를 맡은 좌승 합산(哈散)은 왕과 함께 흥국사(興國寺)에서 닷새 동안 국문했으나 끝내 자복하지 않았다.
충렬왕은 이 사건이 원나라에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인후 등에게 부탁했으나, 인후·김흔은 원나라에 가서 이 사건을 알렸다.
그리하여 원나라에서 파견된 탑해(塔海)·활활불화(闊闊不花) 등에 의해 원나라에 호송되었으나, 1300년 왕이 원나라에 가서 한희유와 인후의 시비곡직을 밝혀 다시 환국하게 되었다.
1302년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임명되었고, 다음해에 첨의우중찬(僉議右中贊)에 임명되면서 7월에는 원나라의 명에 의해 석주(石胄)와 그 아들을 연경으로 압송하기도 하였다.
1305년 11월 충렬왕을 따라 연경에 행차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희유(韓希愈))]
첫댓글 생원 강응시의 처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