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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7.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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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7.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10.26. 19:05
신성한 봉사!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과 사랑의 이름으로 거룩한 봉사에로 부르십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제국과 그리스도 영성 신성한 봉사 2026년 10월 26일 월요일 종교를 초월한 영적 스승 미라바이 스타는 예수님께서 유다 신앙 전통 안에서 전해주신 가장 큰 계명, 곧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을 중심에 두고 묵상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나눕니다.: 2세기 탈무드의 대가 랍비 아키바는 토라의 모든 본질이 레위기 19장 18절,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에 담겨 있다고 말했습니다. 탈무드에는 또 다른 영적 스승인 랍비 힐렐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어느 이방인이 랍비 샴마이를 찾아와 "한 발로 서 있는 동안 토라 전체를 가르쳐 주면 유다교로 개종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샴마이는 분노하여 그를 내쫓았지만, 힐렐은 한 발로 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게 미운 일을 이웃에게 행하지 말라. 이것이 토라의 전부이고, 나머지는 주석일 뿐이다. 이제 가서 배우라." 그 말을 듣고 그 이방인은 즉시 개종했다고 합니다. 유다교는 궁극의 존재이신 하느님께서 모든 속성을 초월하시며 인간의 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느님께서 인간의 처지에 깊이 관여하신다고도 고백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고, 그분의 본성이 무한한 자비라면, 친절을 베풀고 박해받는 이를 지켜내는 노력은 기도와 토라 공부만큼이나 영적 삶에 필수적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며, 서로를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존재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자신이 그분의 모습 안에서 살아가듯이 말입니다. 자비는 뿌리와 같아서, 그 뿌리에서 하늘의 사랑(헤세드, 사랑의 자비)과 정의(체다카, 의로움)의 살아 있는 행위가 꽃을 피웁니다. 체다카는 흔히 자선과 혼동되지만, 단순히 큰 선행을 베푸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다면, 나눔은 모든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이웃에게 나누지 않는 것은 거룩하신 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 체다카의 행위는 하느님을 거룩하게 한다고 전해집니다. 곧 우리의 의로움이 거룩하신 분을 더욱 거룩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행동으로 드러내도록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 신앙 공동체에게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셨습니다. 곧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이 두 계명을 따르는 길은 하느님의 신비를 향해 위로 오르는 영적 갈망과, 서로 안에서 거룩함을 드러내려는 우리의 헌신 사이의 균형을 요구합니다. 산상설교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이라 부르십니다. 사랑의 메시지를 모든 이에게 전할 때, 그들은 영적 삶의 참된 맛을 드러내고 인간 경험 속에서 가장 귀한 것을 지켜내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이름으로 드리는 거룩한 봉사가 세상의 명예나 물질적 부보다 훨씬 더 값진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은 우리가 의로움 안에 굳건히 서서,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단순히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신 것이라 믿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다면, 그들을 해치거나, 빼앗거나, 외면하거나, 굶주리게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요청이지만, 선하고 살가운 세상을 위한 유일한 희망입니다. — JC E. Reference Mirabai Starr, God of Love: A Guide to the Heart of Judaism, Christianity, and Islam (Monkfish Book Publishing, 2026), 87–88.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amuel Oakes, untitled (detail), 2021, photo, Broadway, UK.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누군가에게 건네는 빵처럼, 우리는 보이지 않는 이웃에게 손을 내밀도록 초대받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축복을 주고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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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7.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2026.10.26 21:51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13,18-21
예수님께서 두 번이나 물으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리고 뜻밖의 것을 꺼내십니다. 웅장한 성전도, 강한 군대도 아닙니다. 손톱 끝에 얹히는 ‘겨자씨 한 알’과 반죽 속에 사라지는 ‘누룩 한 줌’입니다.
먼저 겨자씨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겨자씨는 ‘가장 작은 것’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심으면 자라서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듭니다.’ 여기서 새들은 온갖 민족과 사람들을 뜻합니다. 작은 씨앗이 자라, 지친 이들이 쉬어 갈 그늘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그러합니다. 갈릴래아의 어부 몇 사람에게서 시작해, 가난하고 지친 이들이 깃드는 나무가 되었습니다.
이어 누룩입니다. 겨자씨가 ‘밖으로 자라남’이라면, 누룩은 ‘안으로 스며듦’입니다. 어떤 여자가 누룩을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습니다.’ 직역하면 ‘감추어 넣었다’입니다. 누룩은 반죽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용히, 쉬지 않고 일하여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오릅니다.’ 보이지 않는 작은 것이 전체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밀가루 서 말이면 백 명이 넘게 먹을 양입니다. 작은 누룩 한 줌이 그 큰 반죽을 다 살립니다.
성 대 바실리오가 즐겨 가르쳤듯, 하느님의 일은 요란하지 않게, 그러나 어김없이 자랍니다. 겨자씨는 자라는 소리를 내지 않고, 누룩은 반죽 속에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도 그렇게 우리 안에서 조용히 일하십니다.
사랑·기쁨 주간의 눈으로 보면 이 두 비유는 곧 ‘사랑’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흔히 큰 사랑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작은 것으로 시작합니다. 어제 예수님께서 굽은 여인 ‘한 사람’을 일으키시자, ‘군중이 모두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 온 반죽을 부풀린 것입니다. 소화 데레사가 말한 ‘작은 길’도 이것입니다 ―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그리고 여기에 기쁨의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는 결과를 다 볼 수 없습니다. 씨를 심은 사람은 나무 그늘을 보지 못하고 눈감을 수도 있고, 누룩을 넣은 이는 반죽 속을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자라게 하십니다. 그러니 조급함을 내려놓고, 오늘 내 자리에 사랑 한 알을 심습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큰 것’만 좇느라 오늘의 작은 사랑을 미루지 않는가? 나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심고 감출 줄 아는가? 나는 지친 이가 깃들 수 있는 ‘그늘’이 되어 주는가? 나는 자라게 하시는 분을 믿고 조급함을 내려놓는가?
주님, 작은 사랑 한 알을 오늘 제 자리에 심게 하소서. 드러나지 않는 누룩이 되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는 당신을 믿으며 기뻐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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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7.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10.27 02:12
- 내게 정원은 있는가? 내게 누룩은 있는가?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비유입니다. 복음 전체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는 많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를 잘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고, 그래서 어떻게든지 알게 해 주시려고 갖은 애를 쓰시는 표시일 텐데 오늘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라는 표현에도 주님의 이런 고심이 묻어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주님은 하느님 나라를 알게 하려고 이렇게 애를 쓰시는데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하느님 나라를 알려고 애를 쓸까요?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씨를 뿌리기 위한 정원은 있나요?
오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진정 우리에게 정원은 있습니까? 아무 꽃이라도 심을 정원이 있긴 있습니까?
있다면 어떤 씨가 심겨 있습니까? 잡초만 심겨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정원이라고도 밭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우리에게 정원이 없다면 왜 없고, 정원이 있어도 다른 정원은 있지만 겨자씨를 뿌릴 정원은 왜 없는 것입니까?
제 생각에 하느님을 조금이라도 믿는 사람이라면 겨자씨를 뿌릴 정원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밀밭의 가라지처럼 다른 씨도 심겨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정원엔 종종 하느님 나라와 세속이 같이 있습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 나라 씨앗과 세속의 씨앗이 같이 심겨 있습니다.
그래서 세속의 씨앗을 잘 솎아내면 하느님 나라의 정원이 되고, 솎아내는 수고를 전혀 하지 않으면 세속의 쑥대밭이 될 것입니다.
정원을 잘 가꾸면 하느님의 사랑이 날로 자라는 하느님 나라가 될 것이고 잘못 가꾸면 사랑은 자라지 않고 욕망만 자라는 세속의 밭이 될 것입니다.
또 이렇게 오늘 비유를 성찰할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누룩이 있으며,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가 되게 할 누룩이 있는가?
사랑의 누룩이 있는가? 미움의 누룩이 있는가? 선의 누룩이 있는가? 악의 누룩이 있는가?
내게는 우리 공동체에 선과 사랑이 자라게 하는 누룩이 있는가? 반대로 우리 공동체를 병들게 하는 미움과 악의 누룩만 있는가?
이런 질문만 드리는 오늘 저이고, 이런 성찰을 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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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7.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10.27. 05:07
하느님께서 책임을 지시는 곳에서는 자그만 것들이 크게 자라납니다....
예수님의 시대에 사람들은 메시아의 나라가 큰 환호와 승리 속에 세워지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에고는 언제나 "큰일"을 찾는 법입니다. 강한 확신을 외치는 말 속에는 오히려 깊은 의심이 숨어 있습니다.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강한 확신"으로 믿지 않습니다. 그냥 그렇다고 알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의 광고는 언제나 요란한 말과 과장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허망함을 알면서도, 결국 필요 없는 물건을 사게 됩니다. 광고업자들은 우리를 "소비자"라 부릅니다. 창조적인 존재도, 하느님의 자녀도, 경이로운 존재도 아닌, 단순한 소비자로. 이는 참된 겸손이 아니라 왜곡된 겸손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그 이상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아기로 태어나셨을 때, 그분을 맞이한 이는 정치계의 권력자들나 종교의 지도자들이 아니라 들판의 소박한 목동들이었습니다. 말씀이 역사 속에 들어오신 방식이 그렇게 겸손하고 단순했듯, 하느님의 나라도 가장 작은 것, 가장 겸손한 것에서 시작됩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지만 큰 나무로 자라고, 누룩은 적은 양으로도 온 반죽을 부풀립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알아보려면 요란한 이론이나 격렬한 논쟁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 작은 사랑의 실천들을 눈여겨보아야 하고 또 자그맣더라도 감사할 일들을 발견해내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이전에도 여러 번 느꼈던 것입니다만, 오늘 새벽 샤워를 하면서 '내'가 한 수고는 별로 없는데 이렇게 맑은 물로 샤워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하고 황송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지금 차를 마시면서 이 묵상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자그만, 아니 너무도 큰 감사의 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이 방에 대해서도, 지금 입고 있는 옷에 대해서도... 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감사할 모든 것입니다. 이런 감사의 마음 안에서 예전에도 한 번 언급해 드렸던 '김소운' 작가의 "가난한 날의 행복"에 나오는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특히 그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 말입니다. 실직한 남편이 자그만 직장을 다니는 부인을 위해 밥상을 차려 놓고 일자리를 찾으러 나갔는데, 그 밥상 위에는 밥 한 그릇과 간장 한 종지가 놓여 있었고 신문지로 덮여 있던 밥상 위에 남편이 써 놓고 간 쪽지가 있었습니다. "왕후의 밥 걸인의 찬. 이걸로 우선 시장기만 속여 두오." 그러고는 그 다음 이런 내용이 나오지요... "낯익는 남편의 글씨였다. 순간 아내는 눈물이 핑 돌았다. 왕후가 된 것보다도 더 행복했다. 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행복감에 가슴이 부풀었다...." 이것이 바로 겨자씨와 누룩으로 비유되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풍족함이 일반적인 현실인 지금, 우리는 부족함을 안고 사는 살아가는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자그만 행복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의식하고 새기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감사하고 황송한 마음으로 말입니다.... 젊은 나이에 사업에 성공한 어떤 사람이 인터뷰를 하게 되었는데, 어떤 기자가 그의 성공 비결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의 모든 성공은 주님께서 주신 은총 덕분입니다. 대학 시절부터 저는 언제나 하느님께 첫 자리를 드리려 노력해 왔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언제나 저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는 이어서 자신이 삶의 화두처럼 붙들고 있던 단순한 "좌우명" 하나를 소개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책임을 지시는 곳에서는 자그만 것들이 크게 자라납니다. 자그만 것들이라도 주님의 손에 맡겨진다면 그 자그만 선물도 커다란 은총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는 자그만 일들 속에서도 하느님의 손길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그분 은총이 풍성히 흘러넘쳐 놀라운 기적을 이루지 않겠습니까?! 불평할 일을 먼저 마음에 떠올리기보다 감사할 일을 먼저 찾고자 하는 마음,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을 하느님 나라의 현실로 바꾸어 주는 비결일 겁니다. 또 이것이 바로 지금 여기에 계신 하느님 사랑을 알아차리는 진정한 마음의 전환, 즉 회심일 겁니다! 죄와 어둠에서 돌아서려는 우리의 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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