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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7 / 주여! 만족하게 하소서. (시81:8-16)
오늘은 새해 첫 주일입니다. 올해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작년에 우리는 ‘주가 행하시게 하자.’라는 믿음과 기도로 한 해를 살아왔습니다. 그랬기에 우리는 지난 일 년간의 우리의 모든 행사를 주님이 행해주셨음을 믿습니다.
이렇듯 지난 일 년을 주가 행해주셨음을 믿고 살아왔기에 올해는 주가 행해주신 결과들을 보게 될 터인데, 그 결과는 주께서 우리 각 사람을 만족하게 하시는 은혜로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런 소망을 담아 새해의 교회 표어를 ‘주여! 만족하게 하소서.’라고 정했습니다.
표어 성구는 시편 81:16절에 나오는 말씀으로, “또 내가 기름진 밀을 그들에게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하게 하리라 하셨도다.”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한번 따라 하시겠습니다.) “주여! 만족하게 하소서.”
성경을 보면 시편 81편은 표제어가 <아삽의 시,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으며 신년이나 초막절 등의 주요 절기 때 제사 의식에 쓰이던 찬송 시로 분류가 됩니다.
제목과 관련해서 잠시 설명을 드리자면, ‘아삽’은 다윗 시대의 악장이었던 사람의 이름으로, 요즘으로 치면 예배 중에 찬양대 지휘자에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깃딧에 맞춘 노래’라고 했는데, ‘깃딧’의 ‘정확한 의미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기쁜 곡조’라는 뜻으로, 특정한 노래를 연주하는 ‘악기’나 특정한 노래의 ‘리듬’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건 상식 정도로만 알아 두시고 정작 중요한 것은 본 시가 중요한 절기에 주로 사용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중요한 절기에 사용될 정도라면 중요한 의미나 교훈을 담고 있는 시라는 얘긴데, 그러면 시가 전해 주는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시에 담긴 목적이 “우리가 예배드리고 찬송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를 알려주는 데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가 전해 주려고 하는 우리가 예배드리고 찬송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요?
한마디로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치고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이 되신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능력이 되신다는 것을 ‘아는 것’과 그 능력을 내가 ‘누리며 사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경우에는 어떠신가요? 하나님이 나의 능력이 되신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고 사시지만 실제로는 그 능력을 얼만큼이나 누리며 사시는지요?
늘 말씀드리지만, 아는 것은 믿음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이 되신다.’는 말이 우리에게서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실생활에 즉시 적용할 수 있는 뭔가 다른 표현으로 바꿀 필요가 있는데, 그렇게 본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이 되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표현해 보자면 “네 소원, 내가 이루어 줄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 어떤 소원이 있든. 그 소원이 무엇이든 하나님이 ‘내가 다 이루어 줄게.’라고 큰 소리 치실 수 있으시다면 하나님께는 그 정도의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확신하는 믿음을 갖기 위해서라면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은 나의 능력이 되신다.’는 고백보다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네 소원, 내가 이루어 줄게!”라고 말씀하고 계심을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시편 81편.’ 그러면 많은 사람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구절이 10절 말씀인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입니다.
그런데 달랑 이 말씀만 떼어서 생각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본문의 마지막 단어가 ‘채우리라.’가 아니라, ‘채우리라 하였으나.’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이 채우시려 했어도 채워지지 못했다는 겁니다.
왜일까요?
11절 말씀을 보면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10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하나님이 말씀하신 ‘채우리라’의 조건이 뭐였습니까?
‘네 입을 크게 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복이 채워지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이 못 채우셔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그들의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이스라엘은 믿음에서 이미 실패한 사람들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것’은 사람들이지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겁니다. 그랬기에 하나님은 실패한 이스라엘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주고 계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13절 말씀인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입니다.
앞서 ‘입을 크게 열라’고 한 것이 혹시라도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를 몰라서 못 했을 수도 있었다고 한다면, 이번엔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첫째. “내 말을 들어라.” 둘째. “내 도를 따르라.”
그리고 다시 약속해 주십니다. 그 말씀이 바로 올해 우리의 표어 성구인 16절 말씀으로, 그리하면 “또 내가 기름진 밀을 그들에게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하게 하리라 하셨도다.”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때 ‘만족하게 하신다.’는 말씀은 ‘원하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올해 하나님은 저나 여러분을 향해서도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 소원, 내가 이루어 줄게!”라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올 한해를 하나님이 내 소원을 이루어 주심으로 인해 ‘주가 만족하게 하시는 삶’을 살아갈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여러분을 축복하며 권면을 드립니다. 올 한해 하나님을 향해서는 매 순간 “주여. 만족하게 하소서”라는 소망을 품고, 여러분 각자의 인생에서 만족하기를 원하는 것들을 간구하는 기도와 함께, 결국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기도 제목을 만족하게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소망과 기도와 믿음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을 향해 “그 소원, 내가 이루어 줄게!”라고 약속하신 대로 결국엔 우리가 만족할 만한 복과 은혜들로 역사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런 만족한 인생이 되기 위해 하나님이 내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한다면 가장 먼저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우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했던 10절 말씀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는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의 마무리가 본문에서처럼 ‘하였으나’가 아니라, ‘하신 대로’로 끝나게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채우리라 하신 대로.’ 그러면 만족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자니 어찌해야겠습니까?
입을 크게 열어야겠지요.
그렇다면 입을 크게 연다는 것은 어떻게 하라는 말씀인 걸까요?
부르짖으라. 즉 ‘기도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입을 크게 열라.’는 말씀을 ‘만족하게 하리라.’와 연결시켜 보면 ‘소원을 말해봐.’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원을 말해봐.’라고 하시고는 곧이어 말씀하시기를 ‘그 소원 내가 이루어 줄게.’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바라는 소원이 없다면 몰라도 있다면 올해는 이전 어느 때보다 더 많이, 더 열심히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종종 백화점에 가서도 깎아달라는 말이라도 해 보라고 합니다.
깎아달라는 말은 시장에서나 통하는 거라고요?
아닙니다. 어디서든, 무엇이든 요청하지 않으면 얻는 것도 없습니다. 경험상 백화점에서도 요청하면 깎아주기도 하더라고요.
하나님께도 요청하는 것이 없으면 얻는 응답도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이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해 주신다는 말은 아닙니다.
12절 후반부를 보세요.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소원이 있는데, 그 소원을 이루려는 데, 하나님은 그런 그를 ‘임의대로’ 행하게 하셨다고 한다면, 과연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행복과 원하는 소원을 성취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지요?
우리의 인생이 내 ‘임의대로’ 사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하나님이 내게도 ‘채우리라’의 역사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한다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서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가 아니라, “기도 대로 행하게 하였도다.”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린 매 순간 모든 일에 대해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누구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면 응답을 받습니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누가 됐든 기도하지 않으면 응답도 없습니다.
‘기도하면’과 ‘기도 하지 않으면’이 이런 차이를 가져옵니다.
그러면 ‘기도하면 될 텐데.’라고 하겠지만, 문제는 누구라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기도하지 않거나 기도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은 내가 아니고, 나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며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자니 실패한 건 나일지라도 하나님껜 실패가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애쓰고 수고했어도 더 이상의 방법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런 나에게도 하나님은 언제나 ‘다시 한번 더’의 기회를 주신다는 것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또한 내 인생의 소원들을 채워주시기 위해 움직이시는 시작점이 바로 우리의 기도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도 절대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이 만족하게 해 주시기를 원한다면 기도하는 것에서부터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어서 하나님이 내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한다면 매사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앞서 기도의 입을 여는 데 실패했던 이스라엘에게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주시면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첫째가 “내 말을 들으라.”이고, 둘째가 “내 도를 따르라.”였습니다.
이때 이 두 말씀을 하나로 합치면 어찌 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말씀대로 순종하라.’가 됩니다.
그런데 솔직히 순종을 말함에 있어서 우리가 몰라서 못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안 하려니까 못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들에게 ‘공부해라.’라고 한다고 했을 때 자녀들이 공부해야 하는 걸 몰라서 안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기 싫거나 할 필요를 못 느끼니까 안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우리에게 순종을 말씀하시면서 ‘들으라.’에서 그치지 않고 ‘따르라.’를 추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순종하라고 하실 때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라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부모와 자식 간의 예를 들자면 ‘공부해라. 해라.’ 해도 안 하는 자녀를 보며 부모는 마지막으로 자녀를 향해 ‘너 좋으라고 공부하라는 거지, 나 좋자고 그러냐?’라는 말까지 합니다.
순종은 절대로 우리가 ‘순종은 해 드릴게요.’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순종은 ‘나 좋자고’ 할 일이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5장에서도 보면 문둥병을 치료받기 위해 엘리사를 찾았던 나아만은 뭔가 대단한 치료법이나 특별한 약이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가 기껏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는 말을 듣고는 분노하여 떠나려 합니다. 이때 병의 치유를 위해 나아만에게 엘리사를 추천했던 종이 나서서 말하기를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라고 합니다.
이 장면에서 보자면 엘리사 입장에서는 나아만이 요단강에서 씻든 말든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아만의 입장에서는 병이 낫고자 하면 엘리사의 말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생각엔 어떠신가요? 당시 요단강이 무슨 기적의 강물이라도 되기에 엘리사가 그런 지시를 했던 걸까요?
여기서 우린 ‘순종의 상관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나아만은 자기의 필요에 의해 엘리사를 찾았습니다. 그런 나아만에게 엘리사는 나아만이 소원을 이룰 방법을 일러줍니다.
이때부터 선택은 오로지 나아만의 몫입니다. 엘리사 말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내 생각대로 할 것인가?
나아만은 엘리사가 한 말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불순종을 택하려 합니다. 이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는 말씀이 중요해집니다.
나아만이 들은 말씀대로 따른다면 순종이겠지만, 안 따른다면 불순종입니다. 결과도 순종했다면 병이 나았겠지만, 불순종했다면 병은 그대로일 것입니다.
순종을 위해서라면 우리도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보다 더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을까?”를.
예를 들어 소원을 이루기 위해 큰 돈을 투자해야 한다고 하면 하지 않겠는지요? 또한 만족하기 위해 내 능력의 한계치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하면 하려고 하지 않겠는지요?
그나마 돈이 없거나 내 능력이 부족하다면 그마저도 못 할 겁니다. 그런데 못 하는 건 못한다고 쳐도 할 수 있는 것이 있음에도 안 해서 불순종하는 거라면 하나님도 구제할 방법이 없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라는 권면 앞에서 기도할 수 있는데 걱정만 하고 있다면 그건 아주 안 좋은 불순종입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기만 하라고 하시는데 근심만 하고 있다면 아주 불행한 불순종입니다.
15절을 보세요.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는 그에게 복종하는 체할지라도 그들의 시대는 영원히 계속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일고의 가치도 두지 않으십니다. 설사 그들이 하나님께 굽실거리는 척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향한 심판은 계속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향해서는 어떠신가요?
거듭해서 순종할 것을, 또한 말씀대로 따르기를 권면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14절을 보세요. “그리하면”이란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너희가 순종하고 따르면’이란 말입니다.
‘그리하면’. 첫째, 모든 원수를 물리쳐 주리라. 둘째, 기름진 밀을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하게 하리라.
이 두 가지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이유이며, 우리를 만족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결과입니다.
순종은 내가 하려고 해야 할 수 있는 게 순종입니다.
아닌 말로 내가 순종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은 하나도 아쉬울 게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마치 순종을 구걸이라도 하듯 우리에게 순종할 것을 권면하고 계십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이 나를 아직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어느 유행가 가사 중에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이라고 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렇다면 ‘아직도 너는 내 사랑.’이라는 말씀은 누가 누구에게 하신 사랑 고백일까요?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말씀인 것을 아시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이기에 하나님은 내게도 소원을 말해보라 하시면서 약속하시기를 ‘그 소원 내가 이루어 줄게.’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올 한해 이 하나님께로부터 만족하게 하시는 은혜받기를 소망하신다면 이제는 순종하기를 결단해야 합니다.
올 한해 우리가 ‘주님이 만족하게 하시는 삶’을 살기를 소망한다면 우리 역시나 올 한해 ‘주님이 만족하게 해 주실 수 있는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렇게 순종함에 있어서 우선은 ‘내 입을 크게 여는 것.’ 즉 ‘기도하는 것’에서부터 순종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는 중에 이런저런 하나님의 말씀에 자원하여 순종하려고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채우리라’고 하셨으니, 그렇게 주님이 채워주심으로 결국엔 올 한해를 만족한 삶을 살게 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