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차 음미
주중이면 퇴근 후 한 차례 연초삼거리로 산책을 다녀온다. 연초삼거리는 면소재지로 산기슭 학교에서 걸어 이십여 분 정도 떨어졌다. 교정을 나서 바로 가는 경우도 있으나 와실로 들어 옷차림을 바꾸어 길을 나서기도 한다. 그때는 연사 들녘을 거쳐 연초천 둑길을 따라 걸어간다. 그러면 아침 출근길 둘렀던 산책로를 한 번 더 걷는 셈이다. 왕복으로 걸으면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다.
연초삼거리로 가는 이유는 생필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생필품이라고는 아침저녁 끓여 먹는 찌개 재료들이다. 두부와 버섯에 풋고추면 된다. 감자나 양파를 사기도 한다. 곡차를 챙기기도 하는데 제원이 다양했다. 지역 양조장보다 먼 데서 온 곡차들이 풍미가 더 있어 선호한다. 올봄 들어서는 일요일 점심나절 창원에서 거제로 건너오면서 대금산 주막에 들려 마련하는 농주가 있기도 하다.
한 달이 되어 가려나. 가끔 산행을 함께 다니는 벗으로부터 카톡으로 온 사진과 문자를 받았다. 그는 지방지 기사를 사진으로 찍어 보냈는데 서민이 즐겨 드는 막걸리 값이 줄줄이 오른다는 내용이었다. 막걸리를 빚는 재료가 될 곡물 가격이 올라 양조장에부터 출고가가 제법 올라간다고 했다. 회신을 주길 퇴직 후 내 소망이 막걸리를 손수 빚어 보는 것인데 그날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지난 주중에도 퇴근 후 한 차례 연초삼거리로 나갔더랬다. 농협 마트에서 새송이버섯과 두부를 사고 계란도 챙겼다. 주류 코너에는 다양한 종류가 진열되어 있었다. 안주가 부담되는 소주는 언제나 내 선택지에서 제외 되었다. 각처의 곡차들은 여러 종류였다. 거제 성포 행운막걸리와 외포의 얼쑤막걸리가 보였다만 내 마음을 얻지 못했다. 통영 산양의 막걸리도 있었지만 맛이 별로였다.
거제에서 곡차를 빚는 양조장은 성포와 외포 말고도 한 군데 더 있다. 남부면 면소재지가 저구인데 그곳 막걸리가 명품이었다. 남부면은 고현에서 멀지만 연초에서는 더 먼 곳이다. 몇 차례 시음한 저구막걸리는 누룩내음이 살짝 나며 맛이 좋았다. 여든이 넘어 뵈던 노부부가 빚어내는 명품 막걸리였다. 가업을 승계할 아들이나 직원이 없는지 외지로까지 판로를 개척하지 못해 유감이었다.
지역 양조장보다 맛이 좋은 막걸리는 많았다. 동래 산성막걸리가 떠올랐다. 경기도에서 내려온 지평막걸리도 괜찮았다. 트롯 열풍으로 뜬 가수가 광고 모델에 나온 예천 영탁막걸리와 전라도 황칠막걸리도 명품이었다. 연초 농협은 시골이라선지 내가 음미하고 싶은 막걸리들이 진열되어 있지 않았다. ‘꿩 대신 닭’이라고 차선으로 구미를 당기는 충청도 알밤막걸리와 옥수수막걸리를 골랐다.
연초 농협 마트에서 알밤막걸리와 옥수수막걸리를 네 병 마련했다. 먼저 챙긴 찌개거리와 함께 봉지에 담아 와실로 들었다. 사실 내가 음용할 곡차는 이미 확보가 되어 있었다. 일요일 낮에 카풀로 함께 다니는 지기와 거가대교를 건너 장목 외포 나들목에서 시골길로 들어 대금산 꼭뒤로 간다. 산중에 위치한 상명마을 대금산 주막에 들려 공 씨 할머니가 빚은 전통 농주를 두 병씩 마련한다.
대금산 주막 할머니는 집 앞의 논에다 벼농사가 힘들어 심은 고사리를 채집해 삶아 말림이 봄철 일거리였다. 엊그제 지기와 들렸더니 반갑게 맞아주었다. 각자 2리터 생수병에 담아둔 농주를 두 병씩 챙겼다. 할머니는 생수병에 가득 채운 농주를 한 병에 6천원에 팔았다. 곡차 값을 치르면서 시중 막걸리 값이 오르니 할머니도 올려 받으셔야 하지 않느냐고 여쭈니 그럴 생각이 없다고 했다.
연초 농협 마트에서 막걸리를 더 준비함은 대금산 주막 곡차로는 부족해서다. 퇴근 후 주중 닷새 동안 생수병 두 병에 담긴 곡차가 모자랄 때가 있었다. 일과를 마치면 오갈 곳 없어 곧장 와실로 든다. 해가 길어진 즈음이라도 코로나 국면에 시내버스로 이동해 갯가로 산책을 나가보지도 못한다. 퇴근해 와실로 들어 밥이 지어질 사이 곡차 잔을 먼저 비움이 상례다. 봄날은 이렇게 가더이다. 21.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