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하면’과 ‘괜찮다’ 사이: ― 김수영이냐, 서정주냐-김수영(1921.11.27~1968.06.18) 시인 탄생99주기에 부쳐
임동확
김수영은 그의 산문 「창작 자유의 조건」에서 “시를 쓰는 사람, 문학을 하는 사람의 처지로서는 ‘이만하면’이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모든 창작활동은 ‘언론 자유’를 포함,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척도나 규범을 넘어선 것’으로써 그에 대한 일체의 ‘중간사’나 타협이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김수영의 이 같은 단호한 태도는 그의 시 「공자의 생활난」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의 시 「묘정의 노래」를 제외하면 실제적으로 등단작에 해당하는 「공자의 생활난」 속에서 그는 “동무여 이제 나는”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사물의 수량과 한도와/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바로 보마”라고 선언하고 있다. 김수영은 초기부터 사물과 사회현상을 합리적이고 궁극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야무진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와 달리, 서정주의 경우, 어느 순간 “‘식민지에 태어난 고단한 삶이라도 처자 이끌고 생겨날 자손들도 생각하며 잘 참아 견디어 살아나가야겠’다는, 순응과 체념”의 “마음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러면서 “1943년” “일본말 잡지” “『국민문학』의 편집일”을 돕거나 천연덕스럽게 “친일적인 글 몇 편”(『서정주 문학앨범』)을 써댄다.
그러나 서정주의 이같은 태도는 그저 우연이 아니다. 그의 초기 시를 대표하는 「자화상」이 보여주듯이 그는 처음부터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살아“왔”던 모습이다. 청년기적인 방황과 갈등을 고려하더라도,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었다는 고백처럼 처음부터 제어되지 않는 감정의 분출과 방향이 없는 불투명한 세계인식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그렇다고 물론 두 시인 간의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중의 하나가 이들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잦은 한자와 한자 용어 사용이다. 그들 모두 유년기에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하였으며, 사서삼경(四書三經) 등 한문적(漢文的) 교양에 노출되어 있다. 알게 모르게 유교주의적 윤리와 가치관에 기반한 일종의 ‘선비의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서로 닮아 있다. 우린 그들의 시들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학식과 인품을 갖춘 유교적 인격체를 뜻하는 선비적 교양과 지식이 투영되어 있는 것을 곧잘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동양 전래의 유교적 의식과 교양을 수용한 결과는 천양지차(天壤之差)다. 예컨대 내심 “깨끗한 선비로서의 높은 정신을 지”(「일기초(抄) 1」)켜가고 했던 김수영의 경우, 그의 시 「공자의 생활난」이 보여주고 있듯이 실제 사물과 세상의 이치를 객관적으로 연구하여 지식을 완전하게 한다는 의미의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이를 자기 인격 완성을 위한 경건함으로서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자세로 나타난다. ‘이만 하면’으로 대변되는 적당히 타협하거나 안주하는 것을 거부하는, 그야말로 시인이란 이름에 걸맞는 역할과 행위가 실천되어야 한다는 유교적 정명사상(正名思想)이 관철되어 있는 게 김수영의 시세계다.
반면에 한문으로 된 「옥루몽」을 호구지책으로 번역할 만큼 한학에 밝았으며 박한영 대종사의 문하에서 불경(佛經) 공부를 하기도 했던 서정주의 경우, 그의 시를 지배하는 것은 외적 수양법으로서 널리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정확한 지식을 얻는 유교적 ‘궁리(窮理)’나 내적 수양법으로서 항상 몸과 마음을 삼가서 바르게 가지는 유교적 ‘거경(居敬)’과 거리가 멀다. 일찍이 그의 시 「자화상」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보고 듣는 것을 분명하고 투명하게 하는’(視思明 聽思總) 선비의 행동 자세보다는 일정하게 사는 곳과 하는 일이 없이 방탕하게 생활하는 ‘부랑자 의식’이 강하다. 처음 무과(武科)에 급제하지 못한 조선 시대의 호반(虎班)을 가리켰으나, 후일 돈 잘 쓰고 잘 노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로 변질된 ‘한량(閑良) 의식’이 지배적이다.
김수영과 서정주 사이의 결정적 차이는 바로 이것이다.
결코 ‘이만하면’을 허용하지 않았던 김수영은, 비록 궁핍하지만 “올바른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당대의 잘못된 권력에 저항함과 더불어 깨끗함과 고상함을 잃지 않은 선비적 자세로 끝까지 자신만의 “길을 걸어 왔”(「아메리카 타임지」, 1949)다. 그러니까 김수영은 이해(利害)와 의리(義理)가 충동할 때 의리를 택하거나 ‘모든 행동에는 예의염치가 있어야 한다(行己有恥)’는, 올바른 선비의 도리를 지켜온 시인이다. ‘이만하면’을 일체 허용하지 않으려 하면서 새로운 한국 시의 문법을 창안했던 김수영의 경우, 당대 역사와 실존의 모호성 속에서 “죽음의 벽을 뚫고 나가기 위한” 시적 “숙제”와 “행동”의 “윤리”(「설사의 알리바이」)를 치열하게 모색했던 결과, 그는 사후(死後) 50년이 지나도 살아남을 ‘50년 후의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반면에 서정주는 “누이의 어깨 넘어/누이의 수繡틀 속의 꽃밭을 보듯” 건들건들 “세상”을 “보”(「학(鶴)」)고자 했다. 서정주는 자기 위로적이고 자기 기만적인 “괜찬타”(「내리는 눈발 속에서는」)의 남발 속에서 마침내 스스로를 속이는데 그치지 않고, 끝내 민족을 배신하고 양민을 학살한 독재자를 찬양하는 인격적 파탄의 시인으로 전락해 갔다. 생의 주요 고비마다 끝없는 “일탈(逸脫)”과 시대착오적인 “관류(貫流)”를 거듭하다가 “개화 일본인”들이 “도색(塗色)해 놓”은 “허무”(「한국성사략(韓國星史略」)주의 내지 적당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순수문학’의 대가,―그러나 사후 채 2~3년도 견디지 못하고 그 위상이 급격하게 추락한―실상 ‘극우문학’의 우두머리에 지나지 않은, 공자적 의미의 ‘향원(鄕原, 德之賊也)’의 표상이 서정주 시인이다.
오늘 2020년 11월 27일 김수영 탄생 99주기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년 김수영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김수영이냐? 서정주냐?의 문제가 단지 문학계 내부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단적으로 과연 한국인 내지 한 인간으로서 ‘제정신을 갖고 사느냐, 아니냐’의 문제라는 점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늘의 한국시단엔 여전히 김수영보다 서정주의 아류가 더 우세하다. 심지어 서정주를 반대하는 진영조차 서정주류의 ‘시시껄렁함’이나 맹목적인 ‘가족주의’가 곧잘 확인된다. 아직도 우리 주변엔 서정주가 너무 많고, 김수영은 아주 적다.(『민족문학연구회』회보 제1호).
#임동확 논평
#김수영 탄생 99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