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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고후 6:11-18
11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17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고후 6:11-18 / 사랑하는 고린도 교회 형제들이여, 나는 하고 싶은 맡을 다 털어놓았습니다. 마음 깊이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12) 우리 사이에 아직도 냉랭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나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의 사랑이 너무 적어서 내게까지 닿지 않고 또 나를 끌어당기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13) 나는 지금 여러분을 나의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마음을 열어 주십시오. 우리의 사랑에 보답해 주십시오. 14) [불신자와 짝짓지 말라]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과 짝짓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백성과 죄의 백성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단 말입니까? 빛과 어둠이 어떻게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15) 그리스도와 벨리알 사이에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지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믿지 않는 사람과 손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떻게 하나가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ㄱ) `내가 너희와 함께 몸소 이리저리 나다니리라.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겨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ㄱ. 레26:12) 17) 그러므로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습니다. ㄴ) `떠나라, 떠나라, 이 더러운 바벨론에서 떠나라! 더러운 물건을 다 버리고 정결한 사람이 되어라! (ㄴ. 사52:11) 18) 나는 너희 아버지가 너희는 내 자녀가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마음을 넓히라고 합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과 멍에를 같이 메지 말고 우상도 섬기지 말라고 합니다.
마음을 넓히라(11-13) 바울 일행은 고린도의 성도들을 향하여 자신들이 숨김없이 말하고 마음을 넓게 열었으므로 그들 또한 마음을 넓혀서 받아 달라고 하였습니다. 진정한 신뢰와 깊은 관계는 마음을 엶으로써 형성됩니다. 여기서 “마음을 넓히라”는 말은 너그러운 마음과 신뢰성과 애정이 있는 마음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열려야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마음을 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나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자신들을 향하여 마음을 닫은 줄로 오해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실제는 고린도의 성도들이 마음을 닫은 것이었습니다. 마음은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합니다. 열릴 때도 있고, 닫힐 때도 있습니다. 또한 좁은 마음도 있고, 넓은 마음도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닫힌 마음을 열고, 좁은 마음도 넓히라고 하였습니다.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14-18) 의와 불법, 그리스도와 벨리알,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신자와 불신자는 본질적으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우상의 신전에 드나들거나 함께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고린도인들은 그 도시의 시민으로서 우상의 신전 제사에 참여하였습니다. 만약 참여하지 않으면 공동체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우상 숭배자들과 함께하는 것은 파멸에 이르게 되므로 그들과 함께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사야가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에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 스스로 정결하게 할지어다”(사 52:11)라고 선포한 것처럼 바울도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생각과 삶의 양식도 거룩해져야 합니다.
적용: 닫힌 마음이나 좁은 마음으로 교회 지도자들이나 성도들과 불편한 적이 있었습니까? 어떻게 해결하였는지 서로 나누어 봅시다.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노력의 원동력을 심어주는 연설가 '레스 브라운'은 미국 버려진 건물 바닥에서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적 한 선생님이 레스의 삶을 바꿔놓았습니다. 수업 시간에 칠판에 적힌 문제를 풀 수 없다는 레스를 향해 선생님은 "아니, 넌 할 수 있어!"라고 말했지만, 레스는 자신은 지적 장애가 있다면서 계속 거부했습니다. 선생님은 눈을 맞추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에 대한 누군가의 의견이 결코 너의 현실이 될 필요는 없단다." 이 말을 들은 레스는 마음속에 꿈이라는 희망을 품기 시작했고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 설 교 >
마음을 넓히라
계강현목사(금광교회) / 고린도후서 6:11-13
중년 여자 셋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첫 번째 여자가 말하길, “난 요즘 들어 기억력이 부쩍 줄어드는 것 같아. 오늘 아침에 계단 중간에 서서 생각을 했는데, 내가 계단을 올라가던 중인지 내려가던 중인지 기억이 안 나더라고….” 두 번째 여자도 한몫 거들었다. “나는 더해. 어제 침대에 앉아 있었는데, 내가 자려던 중인지 일어나던 중인지 기억이 안 났다니까!” 그러자 세 번째 여자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희들 정말 늙었구나! 나는 아직도 기억력이 좋아. 이 튼튼한 나무처럼 말이야.”라고 말하면서 식탁을 똑똑 두드렸다. 그러더니 깜짝 놀란 표정으로 “누구세요?” 하곤 일어서서 현관으로 가더란다.
나도 좀 건망증이 심해서 아내에게 자주 면박을 받곤 했다. 벌안 사거리에서 기다리면서 아내가 “여보, 성경마트에 들려서 장 좀 보고 가야 되요.” 얘기를 했는데, 신호 기다리다가 동사무소 지나서 그냥 쌩 하고 가려고 한 거다. 고 사이에 잊어버린 거다. 아니나 다를까? “여보! 도대체 내 말은 코로 듣는 거야! 정신을 어디다 두고 사는 거야!” 레시벨 높은 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운전대를 돌렸다. 사실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러는 건데 그럴 때는 참 억울하고 서럽다. 그럴 때 내가 하는 말이, “당신도 나이 들어봐라. 나를 이해하게 될 거다.” 그런데 요즘은 좀 역전이 되는 것 같다. 아내가 휴대폰을 잊어버리고 이리저리 찾을 때가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고후 6:11-13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간곡히 부탁하기를, “고린도 사람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넓혀 놓았습니다. 12 우리가 여러분을 옹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옹졸한 것입니다. 13 나는 자녀들을 타이르듯이 말합니다. 보답하는 셈으로 여러분도 마음을 넓히십시오.”고 했다. 옹졸하게, 속 좁게 살지 말라는 얘기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우리 인간은 마음을 넓히려고 들면 바다처럼 넓어질 수도 있지만, 좁아지려 하면 바늘구멍처럼 한없이 좁아질 수도 있다.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좁히지 말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크게 넓히며 사는 나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나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과 복음을 받아 누리는 자들이 아닌가? 그러니 마음을 좀 넓혀라. 죽고 사는 문제 아니면 좀 성내지 말고 여유 있게 넘어가라. 그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이다.
어떤 면에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 짓지 않으려고 조심하다 보면 마음이 좁아지기 쉽다. 요즘 히브리서 묵상을 하고 있는데, 히 12:14을 보니까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십시오."라고 말씀한다. 거룩하게 사는 것은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께 집중하는 삶이라면 더불어 화평한 것은 이웃 사랑, 마음을 넓혀야 하는 삶이 아닌가 싶다.
비신자들은 술 마시며 풀기도 하는데, 신자들은 한 번 삐치거나 마음이 토라지면 수년씩 가는 걸 본다. 남과 화목할 줄 모르고 남을 이해하거나 용납할 줄 모르는 협소한 마음의 사람이 되기 쉽다. 마음이 좁아지면 자기도 불행하고 남도 피곤하게 만들고 불행하게 만든다. 어떨 때 우리 마음이 좁아지는지를 살펴서 그걸 경계하고 오히려 역으로 마음을 넓히면 좋겠다.
1. 용서하지 못할 때 마음이 좁아진다.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용서하라는 말씀을 들었다. 베드로는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마 18:21)하고 자기 딴에는 큰 맘 먹고 물어 보았다. 그때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고 대답하셨다. 꼭 490번을 얘기하신 게 아니라, 무한히 넓은 마음을 가지고 용서하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 취급도 못 받던 세리도 용납하고 창기가 찾아와도 용납하고 십자가에서 회개하는 강도도 용납하시고 구원해주셨다. 심지어 자기를 못 박고 옷을 찢어 나누던 로마 군병들에게도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 23:34) 끝까지 용서하셨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이집트로 팔려가서 온갖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수십 년 만에 총리로 출세한 요셉은 어느 날 뜻하지 않게 양식을 구하러 찾아온 형들을 다 용서하고 잘 대해주었다. 얼마나 넓은 마음인가? 그가 용서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도 은혜(유익)을 주신다는 섭리와 주권을 믿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나를 키울 때 용서하지 않고 규칙대로만 하셨다면 내가 남아 있을 수 있을까? 하나님이 나에게 율법대로 처리하셨다면 우리 중에 살아남아있을 사람이 몇이나 있겠나? 다 돌에 맞아 죽었지! 그저 한없이 품어주시고 용서하시고 용납하시고 그러셨기에 오늘 내가 있는 거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도 그런 부모의 심정으로 용서하고 용납하고 품어주고 기다려줘야 한다. 사람들을 대할 때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남에게 대해서는 관대하고 나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 반대로 할 때가 많다. 나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남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하는 거다. 이게 마음이 좁아지는 지름길이다. 마음을 좁혀서 누구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용납하지 못하는 삶을 살 때 스스로도 고통을 당하게 된다. 항상 다른 사람들의 관심, 사랑, 도움, 인정을 받으려고만 하는 사람은 만족이 없고 불행해진다.
여러분! 제발 넓은 마음을 가지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화평하게 살자. 알란 패턴, “한 가지 변함없는 법칙이 있다. 우리가 깊은 상처를 입었을 때, 용서하지 않는 한 치유도 없다는 것이다.” 사실 용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나 자신을 위해서 정말로 필요한 것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상처 때문에 제대로 올바른 인격을 갖추지 못하고 왜곡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주는 삶을 살게 된다.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해결 안 된다. 다른 사람에게 화살을 돌려서 공격하는 것으로는 더 문제를 크게 만들기만 할 뿐이다. 내 속에서 해결해야 한다.
늘 술에 취해서 엄마와 싸우시던 아빠, 그 밑에서 사는 어린아이들은 마음에 원자폭탄이 터지는 크기의 상처를 입는다고 한다. 늘 다투시던 부모님, 그 가운데 일찍 잠을 청하며 그 상황을 피하고 싶었던 어린 자식들의 마음은 멍들어있고 불안에 떨고 있는 것이다. 그게 커서도 무의식 속에 자리잡혀있어서 부부관계와 자녀교육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럴 때 그런 상처로부터 치료받는 길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 부모를 빨리 용서하고 마음에서 그 상처를 지워버리는 거다. 어렸을 때 그 상황은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아닌가? 부모가 아이를 미워해서 그렇게 했다기보다, 뭣도 모르고 그렇게 하셨는데, 어린 자녀에게는 큰 상처가 된 것이다. 우리 부모들은 그런 것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행동했다. 지금이라도 여쭤보면 그런 줄 몰랐다고 할 것이 뻔하다. 그러니 그런 걸 가지고 나만 괜히 얽혀서 현재까지 영향 받으며 손해보고 살 필요가 없다. 그럴 때 치유의 우선과제는 그 부모를 용서하는 거다. 용서를 선언하고 상처를 마음에서 지워버리기로 작정하고 기도하라. 그게 부모가 되었든 형제가 되었든 친척이 되었든, 어떤 사람이든 간에 빨리 용서하고 상처를 지워버려라.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냥 조건 없이 용서하는 거다. “보답하는 셈으로 여러분도 마음을 넓히십시오.”(고후 6:13) “주님, 내가 오늘 ooo을 용서하겠습니다.” 그렇게 결단하고 기도해라. 그럴 때 치유가 일어나고 내가 건강해지고 우리 가정이 건강해지고 공동체가 건강해질 수 있다.
2. 시기와 질투심이 마음을 좁게 만든다.
사람들이 누굴 시기하고 질투할까? 자기와 가까운 사람을 시기 질투한다. 잘 모르는 사람을 시기하거나 질투할 필요가 없다. 왜 시기, 질투하나? 그 사람이 내 형제자매요 하늘나라 백성이요 영원히 함께 살 사람인 줄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그 사람이 원수가 아니라 주 안에서 형제자매다. 오히려 우리는 기쁠 때 같이 기뻐해주고 슬플 때 같이 슬퍼해주는 그런 관계인 줄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왜 멸망당한 줄 아는가? 교만 때문에 자기 멋대로 제사장이 드릴 제사를 드렸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 하나님 말씀과 사무엘 제사장의 말에 순종하지 않고 제 멋대로 하다가 버림받았다. 그런데 그가 멸망의 길을 가도록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 있다. 다윗이 이스라엘 대적 골리앗을 죽이고 난 뒤에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노래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 사울은 시기, 질투심이 마음에 생겼다. 그때부터 그는 점점 마음이 좁아지더니 다윗을 미워하며 주목하다가 창을 던져 죽이려고 했다. 자기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간계를 꾸며 다윗을 블레셋 전쟁에서 죽게 하려고 딸 미갈을 줄 테이니 블레셋 사람을 100명 죽이고 그 증표로 표피를 100개 가져오라고 한다. 사랑하는 딸의 사랑을 이용하여 시기하는 다윗을 죽이는 미끼로 사용하는 매정한 아비가 된 것이다. 뭐가 그를 그토록 삭막하게 만들었는가? 시기와 질투심이! 우리도 마음을 좁히기 시작하면 한없이 좁아져서 밴댕이 소갈딱지같이 좁아지는 거다.
반면에 다윗은 오히려 마음을 넓혀서 자기를 죽이려고 좇아오는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으나 죽이지 않고 살려준다. 결국 마음이 점점 좁아진 사울은 전쟁하다가 블레셋 군대에 포위되자 자살로 인생을 마감하게 되지만, 다윗은 왕위에 오르게 된다. ‘마음을 넓히는 자는 흥하고 마음을 좁히는 자는 망한다.’ 이건 성경이 아니라, 사울과 다윗을 통해 얻은 내 교훈이다.
우리가 마음을 계속 좁히고 있으면 마귀만 좋아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래서 엡 4:26-27,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27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고 말씀하는 거다. 제발 툴툴 털어버리고 잊어버려라! 당사자를 만나서 해결해버릴 것은 지체하지 말고 빨리 하라. 계속 마음을 좁게 하고 있는 것은 마귀로 하여금 틈타도록 여지를 주는 어리석인 일이다. 마음이 좁아지려고 할 때 빨리 간파해서 지체하지 말고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여 빨리빨리 마음을 넓히는 작업을 해야만 한다. 바로 하라. 냉큼 풀어버리라! 이게 지혜다. 시기와 질투심이 꽈리를 틀지 못하도록 물리치고 자꾸 마음을 넓히는 나와 여러분이 되길 바란다.
3. 이기심이 가득할 때 마음이 좁아진다.
사람이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자기중심으로 살게 되면 점점 마음이 좁아지고 자기만 아는 인생이 되고 만다. 이런 이기주의자들은 언제나 불안하고 불행하게 산다. 다른 사람을 볼 때 모두 자기를 해치려는 사람으로만 보이고 자기를 무시하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잊지 못할 사건 하나는 서울에 있는 남서울은혜교회 홍정길 목사님이 예전에 강남구 일원동에 장애인 밀알학교를 세우던 때 일이다. 그 동네 아파트 사람들이 다 들고 일어나서 반대 데모를 했다. 왜? 집값 떨어진다고.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데모한 사람들 중에는 교회 다니는 신자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아니 기독교인들은 장애인을 위한 학교, 밀알학교 건축을 찬성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랬더니 하는 말이 “다른 곳에 지으면 우리가 후원금을 모아서 도와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러나 우리 동네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밀알학교 설립은 안 됩니다.” 결국 밀알학교는 그런 와중에도 그곳에 세워졌다. 가치 있는 일이고 꼭 필요한 일이라면 내게 손해가 되어도 용납해야하는 것이 사람이 할 일이고 기독교인들이 할 일 아닌가? 극한 이기주의가 이 사회와 심지어 교회까지 점령해가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가정교회 목장을 하다 보니까, 나 자신, 내 가족 밖에 모르던 우리가 점점 다른 목원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심지어 얼굴도 모르는 vip들에게까지 관심을 갖고 기도하고 사랑으로 섬기게 된다. 지옥 갈 영혼을 천국백성 만들고 인생을 변화시키는 게 얼마나 가치 있고 행복한 일인지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이기주의가 아니라 이타주의의 섬기는 삶을 보고 배우게 된다.
여러분, 이기심으로 사는 사람은 점점 마음이 좁아지고 불행해 지지만, 이타심으로 사는 사람은 점점 마음이 넓어지고 기쁘고 행복하게 살게 된다. 받아보기만 한 사람은 받는 게 제일 행복한 줄 알지만, 줘 본 사람은 줄 때 더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건 순종해서 경험한 사람만이 알게 되는 행복이다.
4. 은혜가 떨어지면 마음이 좁아진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면 우리 마음이 넓어지지만, 은혜가 떨어지면 마음이 당연히 좁아진다. 고후 6:1-2,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 2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은혜의 때에, 나는 네 말을 들어주었다. 구원의 날에, 나는 너를 도와주었다’ 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 바울사도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v4ff.에서 밝히고 있듯이,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하였던 것이다. 사역에 따르는 고난을 다 이겨냈고, 사랑의 미덕으로 사역했고, 의롭게 사역했고, 겉으로는 다르게 보일지 모르지만 내실 있게 사역했다. 이게 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고 제대로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고린도 교인들에게 놓여 진 장애물은 놀랍게도 사도 바울이었다. 사도 바울이 잘못한 것이 없었음에도 오해 때문에 그들은 은혜의 자리로 나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에 대한 오해를 풀지 못하고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그들은 은혜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내 마음이 옹졸해진 것이 아니라 너희 마음이 옹졸해진 것이니, 너희 마음을 넓혀서 나를 받아들이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럴 때 은혜를 누릴 수가 있게 될 것이다. 은혜가 임할 때 마음을 넓힐 수 있지만, 이미 우리는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역으로 마음을 넓히려고 결단할 때 은혜를 받을 수도 있다.
오늘 우리들도 얼마든지 사람이 은혜 받는 일에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에 장애가 없어야 은혜를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오래 전에 미국 캘리포니아에 6년간 가뭄이 들자, 저수지 물이 다 마르고 바닥이 쫙 갈라졌는데, 그 저수지 안에서 2차 대전 때 추락한 일본군 비행기와 죽은 조종사의 시체가 드러났다. 우리는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인 줄 착각하고 살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말라봐라. 하나님 없으면 메마른 사막과 같고 황량한 광야와 같은 존재들이다. 금방 퍽퍽하고 풀풀 먼지가 나고 곧 시체 썩는 냄새가 난다. 메마르고 까칠하고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부정적인 사람인 것이 드러난다. 그나마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니까 그 정도 사랑하며 사는 거다.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니까 그 정도 남에게 대할 수 있는 거다. 하나님의 능력이 주어지니까 그 정도 사역하고 있는 거다.
우리가 자꾸 착각하는 게 뭐냐 하면 내가 태어날 때부터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내 능력과 내 힘으로 예수 잘 믿을 수 있고, 죄와 싸워 승리할 수 있고, 의를 행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거다. 내 지혜와 능력으로 목장 사역 잘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거다. 여러분, 절대 아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금방 메말라버리는 것이 우리들의 실상이다. 이걸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성령으로 날마다 충만하기를 구해야 한다. 성령님 의지하고 순간순간 살아가야 한다. 자신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사역하려고 할 때부터 우리는 실패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죄 사함과 지혜와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부어진 것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필요하다. 왜 우리들이 변화가 많고 갈팡질팡하는 신앙생활을 하는지 아나? 자신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기도 없이, 말씀 없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 하루를 살아봐라. 금방 삭막해진다.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은혜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성령 충만을 순간순간 구해야 한다. 죄를 자백하고 성령 충만을 구하는 자에게 우리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눅 11:13, “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성령의 생수가 우리 속에 강같이 흐를 때 넓은 마음으로 사역하게 된다. 눅 6:38, "남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니, 되를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서, 너희 품에 안겨 주실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고, 시기와 질투심을 버리고, 이기심을 버리고 성령 충만을 구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부으심 받아 넓은 마음을 소유하자. 그래서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면 그냥 넘어가는 성숙한 사람이 되자. 그렇게 하나님이 편하게 쓸 수 있는 주의 일꾼들이 다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넓히라고 하시는 것들
고후06장 11~13절 / 계강현목사
이 지구상에 현재 78억 2천 만 명 이상의 인구가 살고 있지만 나와 똑같은 지문을 가진 사람, 나와 똑같은 눈동자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지문이나 홍채로 신원조회가 가능하다. 내가 머리가 희기 전에 가끔 주위로부터 어느 아나운서 닮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나운서 닮았다고 하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나? No!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계강현 목사이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대로 살다가 갈 계강현 목사일 뿐이다. 이 세상에 나와 비슷한 사람은 있을지 모르나 나와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독특한 존재다. 나와 여러분 모두가 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독특하고도 유일한 존재이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특별한 자녀이다.
그런데 이렇게 각자 다 개성이 있다 보니까, 나와 같지 않은 것 때문에 때론 갈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갈등하는 걸 보면 대게 자기와 같으라고 요구하는 거다.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달라는 거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쉽나? 상대방도 똑같이 자기 같으라고 요구할 테니 말이다. 그래서 인간관계에 갈등이 생긴다.
그래서 우리의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한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넓히라”고 명령하신 것이 있다. 우리 사람이 넓히려고 들면 바다처럼 넓어질 수도 있고, 좁아지려면 바늘구멍처럼 한없이 좁아질 수도 있다. 자신을 좁히거나 위축시키지 말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크게 넓히면 우리 자신에게 복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넓히라”고 말씀하신 것이 구체적으로 뭔지 살펴보며 은혜 나누자.
1. 네 마음을 넓히라.
고후 6:11-13에 보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간곡히 부탁하기를 “고린도 사람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넓혀 놓았습니다. 12 우리가 여러분을 옹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옹졸한 것입니다. 13 나는 자녀들을 타이르듯이 말합니다. 보답하는 셈으로 여러분도 마음을 넓히십시오.”고 말씀했다. ‘마음을 넓히십시오.’고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명령하신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사도의 복음전도와 희생적인 섬김으로 세워진 교회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개척자, 설립자란 의미다. 청빙 받은 목사와 개척한 목사는 많이 다르지 않은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사도에 대해 마음을 좁혀서 비난과 공격을 해댔다. 거짓교사들의 말에 선동되어 바울은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도 아닌데 어떻게 사도가 될 수 있느냐며 사도권을 의심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면서, 고전 7:1-2, “내가 자유인이 아닙니까? 내가 사도가 아닙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를 뵙지 못하였습니까?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내가 일해서 얻은 열매가 아닙니까?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 몰라도, 여러분에게는 사도입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나의 사도직을 보증하는 표입니다.”라고 말씀했다.
또한 고후 6:1ff.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라고 경고하며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어떤 비방도 받지 않으려고 직업을 갖고 일하며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했다. 환란과 궁핍과 고난 가운데서도 깨끗하고 거짓 없이 참으며 살았다. 그러니 바울 자신에 대한 오해를 버리고 보답하는 셈으로 고린도 교인들도 마음을 넓히라고 권면하고 있다.
바울사도가 이렇게 고린도 교인들에게 “마음을 넓히십시오!”하고 권면한 것은 우리가 얼마든지 마음을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줄 아는 게 믿음이다. 그러니 이 말씀을 들으면서 ‘내 마음을 내가 마음대로 넓힐 수 있나?’ 이러면서 도망가면 안 된다. 내가 내 마음을 주장하지 못하면 누가 하나? 마귀가 하도록 내버려 두겠나? 집에는 잠금장치를 몇 개씩 하면서 잘 지키면서 왜 자신의 마음은 지키지 않고 마귀에게 안방을 내주나? 내 마음은 내가 책임지고 지켜야 하고 넓혀야 한다. 그래서 잠 16:32,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고 말씀한다. 내 마음의 주인은 나다. 내가 다스리고 점령하고 넓힐 수 있다.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라는 우리말 속담도 있지 않나? 우리나라와 중국 불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화엄경’에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신라시대 원효대사는 8살 어린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 유학을 가기 위해 길을 떠났다. 해가 뉘엿뉘엿 지자, 당황성 근처 어느 무덤가에서 잠을 청하게 되었다. 목이 말라 잠이 깼는데, 주위가 온통 컴컴한 거다. 더듬다가 근처에 바가지에 담긴 물이 손에 잡혀서 급히 마셨다. 그런데 그 물이 정말 꿀맛 같았다. 그런데 날이 새고 보니, 자기가 마신 물이 바가지는 해골이고 물은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보았다. 갑자기 토를 하다가, 원효대사는 문득 그런 통찰이 떠올랐다. ‘물 자체는 변한 것이 없지만, 어제는 맛있게 먹었고, 오늘은 토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여기에서 원효대사는 더러움과 깨끗함뿐만 아니라 객관적이라고 믿었던 세계도 사실은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화염경에 나온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에서 지어낸다.’의 뜻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게 다 옳지는 않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서 천국은 실제하는 것이지 마음에서 있다고 해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한 측면은 옳다. 적용할 만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마음은 나도 모르게 독선과 고집과 편견으로 좁아지기 쉽다. 어떤 면에선 크리스천들이 죄를 짓지 않으려고 조심하다가 보면 불신자보다도 더 마음이 좁아지기 쉽다. 비신자들은 관계가 깨졌을 때 술 한 잔 하면서 풀면 다 풀리고 그러는데,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은 더 오랫동안 마음을 좁게 한 채 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남과 화목할 줄 모르고 남을 이해하거나 용납할 줄 모르는 협소한 마음의 외골수의 사람이 되기 쉽다. 마음이 좁아지면 남도 불행하게 만들고 자기도 불행하게 되고 만다. 마음을 넓힐 때 인간관계도 승리하게 되고 사역에도 승리하게 되고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떨 때 우리 마음이 좁아지는가?
첫째, 시기와 질투심이 마음을 좁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런 마음은 초장부터 경계하고 버려야 한다. 사람들이 누굴 시기하고 질투하나? 나와 가까운 관계의 사람을 시기 질투한다. 잘 모르는 사람은 시기하거나 질투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왜 시기하나? 그 사람이 내 형제, 자매요 하늘나라 백성이요 영원히 함께 살 사람인 줄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그 사람이 원수가 아니라 주 안에서 형제, 자매이다. 우리는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해주고 슬픈 일이 있을 때 같이 슬퍼해주는 그런 관계인 줄 잊었기 때문이다.
사울 왕은 다윗이 블레셋 거인 골리앗 장군을 죽이고 난 뒤에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하는 소리를 들은 순간, 시기와 질투에 노예가 되고 말았다. 결국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왕이 되고 말지 않나? 반면에 다윗은 마음을 넓혀서 자기를 죽이려고 쫓아오는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여러 번의 기회 가운데서도 살려준다. 결국 마음이 점점 좁아진 사울은 전쟁하다가 불레셋 군대에 포위되자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마음이 점점 넓어지는 자는 흥하고 마음이 점점 좁아지는 자는 망하는 거다. 우리가 마음을 계속 좁히고 있으면 마귀만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거다. 그래서 엡 4:26,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고 말씀하는 거다. 툴툴 털어버리고 잊어버리라. 당사자를 만나 해결해버릴 것은 지체하지 말고 해결하라. 계속 마음을 좁게 하고 있는 것은 마귀로 하여금 틈타도록 여지를 주는 어리석인 일이다. 마음이 좁아지려고 할 때 빨리 간파해서 지체하지 말고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여 빨리빨리 마음을 넓히는 작업을 해야만 한다. 남이 잘되는 것 시기하다가 내 마음이 좁아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시기와 질투심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물리치고 자꾸 마음을 넓혀야 한다.
둘째, 이기심이 가득할 때 마음이 좁아진다. 사람이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자기중심으로 살게 되면 점점 마음이 좁아지고 자기만 아는 좁은 인생이 되고 만다. 자신의 감정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예민하고 쉽게 삐지고 토라진다. 이런 이기주의자들은 언제나 불안하고 불행하게 산다. 다른 사람을 볼 때 모두 자기를 해치려는 사람으로만 보이고 자기를 무시하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화장터가 우리 지역에 들어오는 것은 결사반대하면서도 가족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우리 지역은 왜 이런 시설도 없냐며 비싼 돈 주고 타 지역에 가서 장례를 치르는 것을 불평한다. 공공시설이고 뭐고 자기 땅에 이익이 되지 않으면 피나게 투쟁한다. 우리 성도들은 남에게 양보할 줄 알고 남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일이 나에게 손해가 될지라도 넓은 마음으로 그것을 수용할 때 참 행복이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이기심으로 사는 사람은 마음이 자꾸 좁아지고 불행하지만, 이타심으로 사는 사람은 마음이 자꾸 넓어지고 기쁘고 행복하게 산다.
셋째, 남을 용서하지 못할 때 마음이 좁아진다.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용서하라는 말씀도 듣고 “하루에 일곱 번까지 용서할까요?” 마치 큰 맘 먹고 과시하듯이 물어 보았다가, 예수님이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고 하자 침묵하고 말았다. 꼭 490번이 아니라 무한히 넓은 마음을 가지고 용서하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 취급도 못 받던 세리도 용납하고 창기가 찾아와도 용납하고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회개하는 강도도 용납하시고 구원해 주셨다. 심지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며 옷을 제비뽑아 나누던 로마 군병들에게도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 23:34)하시며 용서하셨다.
여러분! 우리들도 폭 넓은 마음을 가지고 용서하고 이해하는 성도가 되자. 알란 패턴은 “한 가지 변함없는 법칙이 있다. 우리가 깊은 상처를 입었을 때, 용서하지 않는 한 치유도 없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용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을 위해서 정말로 필요한 것이다.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쓴 뿌리 때문에 제대로 올바른 인격을 갖지 못하고 왜곡된 삶을 살고 안정되지 못한 불안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주는 삶을 살게 된다. 명심하고 한 번 따라 하자. “나는 자녀들을 타이르듯이 말합니다. 보답하는 셈으로 여러분도 마음을 넓히십시오.”(고후 6:13)
2. 네 입을 넓게 열라.
시 81:10에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너희의 입을 크게 벌려라. 내가 마음껏 먹여 주겠다.”고 명령하신다. 개역한글판에서는 “네 입을 넓게 열라.”로 번역하였다. 다 같은 의미다. 이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줄 분명히 알고 그에게 입을 크게 벌려 기도하고 갈망하라는 뜻이다. 이 말은 우리 믿음을 크게 가지라는 얘기다. 믿음이 적으면 마음이 좁아지지만 믿음을 크게 가지면 마음이 넓어진다. 우리의 믿음과 포부가 크면 클수록 그만큼 크게 채워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이집트 땅에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켜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광야 40년간을 인도하여 구원해내신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으려는 강퍅한 이집트 왕 바로의 반대와 저지에도 불구하고 10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때마다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이시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20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고 입히고 구원하셨다.
오늘 죄악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저 하늘나라까지 우리를 안전하게 생명싸개로 싸매시고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시며 권능의 오른 팔로 붙드시고 사막에 강을, 광야에 길을 내시며 인도하시고 구원해내실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크게 그리고 많이 갈망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자는 입을 넓게 열어 기도하고 갈망한다. 도우심을 기대한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자는 기도하지 않는다. 의심하며 기도해도 안 될 거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또 부정적으로 말한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아예 입을 열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구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입을 열기는 여는데 넓게 열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네 입을 크게 벌려라. 내가 마음껏 먹여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입을 크게 열지 않으면 하나님이 많은 것으로 채워주실 수가 없다. 하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고 천하 만물이 우리 아버지의 것이고 없는 것이 없으신 아버지시니 기왕이면 적게 구하지 말고 큰 믿음과 포부를 가지고 크게 구해야 하나님이 크게 이루어 주신다.
어떤 사람이 낚시질을 하는데 30cm자로 재서 더 큰 고기는 다 놔주고 30cm 미만의 고기만 망태기에 잡아넣더란다. 옆에서 그걸 보고 있던 한 사람이 “왜 당신은 큰 고기는 놔주고 자로 재서 적은 것만 잡는 거예요?” 물었더니 하는 말, “우리 집 프라이팬이 30cm밖에 안되기 때문에 큰 건 버리는 겁니다.” 그러더란다. 그럴 게 아니라 프라이팬을 큰 거 하나 더 사든지, 아니면 생선을 잘라서 구우면 되지 않나? 그릇을 크게 준비하든지 마음을 넓히면 안 될게 없다. 좁게 마음을 먹으니까 생각이 막히고 창의력이 나오지 않는 거다.
여러분, 큰일을 도모하고자 하는가? 크게 쓰임 받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큰 믿음으로 입을 크고 넓게 열어 기도하라. 대상 4: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해 주시고, 내 영토를 넓혀 주시고, 주님의 손으로 나를 도우시어 불행을 막아 주시고, 고통을 받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하고 간구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가 구한 것을 이루어 주셨다.” 자기 영달을 위해서 구하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교회와 복음을 위해서 야베스처럼 크게 구하는 자들이 되자.
월리암 케리(William Carey)는 “하나님을 위하여 큰일을 도모하라”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정말 그는 선교 역사상 큰일을 한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19세기 미국대각성운동의 설교가 필립스 부룩스(Phillips Brooks)는 “당신의 능력에 맞는 일을 구하지 말고 일에 맞는 능력을 주실 것을 기도하라.”고 말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을 목표로 정하고 나아가는 방법을 찾았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길을 찾아보고 목적지를 정한 것이 아니다. 노만 빈센트 필(Norman V. Peale) 박사는 “생각을 바꾸면 자기 세계도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내가 아는 인도에서 가발을 수입하는 사업을 하시는 장로님은 자기 평생에 해외에 교회를 10개 세우겠노라고 작정을 하시고 실천하고 계신데 벌써 5개를 지었다. 아시아에 어려운 나라에서는 우리나라보다 적은 돈으로 교회를 지을 수 있다. 사업하는 분들은 모두 이런 큰 꿈을 가지고 큰 믿음으로 하나님에게 입을 열어 기도해보라. 하나님이 왜 안 들어주시겠나? 왜 하나님이 축복해주시지 않겠나?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장맛비가 억수로 내려도 주발을 덮어놓으면 물 한 방울 받을 수 없고, 주발을 바로 놓으면 주발만큼만 모이고, 대야로 받으면 대야에 모이게 되고 큰 물통에 받으면 큰 물통에 넘치게 된다. 좁은 마음을 버리고 우리의 생각과 믿음과 기도를 크게 하는 버릇을 키우자. 먼저 안 될 것부터 생각하면서 좁아지지 말고 큰 꿈과 포부를 갖자. 입을 크게 열어 주님의 채우심을 받기 바란다. 구하지 않는 자는 얻지 못한다. 하나님의 보화의 밥상이 차려져 있어도 기도하지 않는 자는 누릴 수 없다. 조금 기도하는 자는 조금 얻고, 많이 기도하는 자는 많이 얻는다. 적게 구하는 자는 적게 얻지만 크고 넓게 구하는 자는 크고 넓게 채워주신다.
내일부터 평세를 위한 특새로 모인다. 기도하지 않으면 내가 일하는 만큼만 얻게 되지만,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만큼을 얻게 된다. 사람 마음을 바꾸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성령님이 감동주시고 도전하실 때, 말씀을 통해 각성을 주실 때 사람은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그래서 우리가 평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열심히 목장을 오픈하고 섬겨도, 간증을 아무리 멋들어지게 준비해도, 강의를 능란하게 전해도 성령님이 역사하지 않으시면 천사들에게 아무런 변화와 헌신을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해야 한다. 목자목녀로 헌신하려는 마음으로 오는 천사보다는 관망하는 자세와 두고 보자는 마음으로 오는 천사들이 더 많다. 담임목사님이 가라고 해서 온 천사들도 있다. 직장과 사업장 때문에 온전히 참석하기가 쉽지 않으니 기도해 달라는 천사들도 있다. 그러니 기도가 필요하지 않겠나? 발걸음을 교회와 목장에 디디자마자, 성령님의 강력하신 역사가 압도하도록 기도하자. 또한 평세가 그저 몇몇 교우들의 행사가 아니라, 전교회의 헌신과 사역이 되고 감사가 되고 교회가 가정교회로 부흥하는 계기가 되기 위해서는 전교인이 기도해야 한다. 본당에만 오지 말고, 비전센터에도 와서 함께 기도하자. 온라인 송출하면 된다. 크게 넓게 입을 열자. 하나님이 채워주신다. 기적을 베풀어주신다.
말씀을 맺자. 우리의 좁아진 마음을 크게 넓히고, 믿음 없이 적게 구하던 기도에서 벗어나 큰 믿음으로 입을 넓게 벌려 구해서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며 사는 교우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넓은 마음 큰 사람
고후06장 11~13절 / 이중표목사
하나님은 우리에게 향하신 기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짧은 인생 살아가는 동안 서로 사랑하며 서로 이해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을 힘들고 괴롭게 살아갑니다. 그것은 환경적인 영향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마음 때문입니다. 마음이 옹졸하고 은혜를 조금밖에 못받아서 스스로 인생을 괴롭고 답답하게 만들어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마음이 좁고 답답한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매사에 불평이 많고, 오해도 많고, 사소한 일로 다른 사람과 다투면서 괴롭게 살아갑니다. 그 반면에 마음을 넓게 가지므로 인생을 평화롭고 여유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넓은 사람은 매사에 이해심이 많고, 긍정적이며 다른 사람을 좋게 하고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우리가 가정생활 하면서 부부간에 넓은 마음으로 사는지 아니면 사소한 일로 티격태격하면서 힘들어하는지, 또 내가 예수 믿은 후 좁았던 내 마음이 넓어졌는지, 이해심도 많아졌고 생각도 깊어졌는지,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성격도 좋아졌고, 여유있는 인생으로 변화되었는지 아니면 고집불통으로, 독선과 편견이 많은 인간으로 전락했는지 자기 자신을 성찰해 보십시다.
제가 목회하면서 교인들을 보면 여러 종류가 있지만 크게 구분한다면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고 또 하나는 마음이 좁은 사람입니다. 공부를 많이 했는데도 마음이 좁은 사람이 있습니다. 인물은 잘 생겼는데 속이 좁아서 만나면 답답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특별한 사회적인 지위를 갖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넉넉하고 매사에 이해심이 많아서 가까이 가면 편안한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날 이 사회가 시끄럽고 소란한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좁기 때문입니다. 교인들 중에도 마음이 좁아서 다락방 모일 때 사소한 일로 불평하는 것을 눈으로 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이 좁아서 교회에 분쟁이 많았음을 보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는 신령한 은사를 많이 받아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지만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성적으로 문란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사도성에 대해서 폄론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정통 사도가 아니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식같이 사랑해준 교인들이 서로 분쟁하면서 ‘나는 바울파다, 게바파다, 아볼로파다, 그리스도파다’라고 할 때 고린도 교회를 세운 지도자로서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11-13절)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고린도의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넓게 열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옹색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옹색한 것입니다. 나는 내 자녀들에게 이르듯이 말합니다, 보답하는 뜻으로 여러분도 마음을 넓히십시오.”(11-13절)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가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내 사랑하는 성도들아 마음을 좀 넓혀다오. 그래야 이 험악한 인생을 사는데 그대들이 행복할 것 아닌가. 내 마음의 뜻이 그러하니 오늘 말씀을 듣는 중에 옹졸한 사람이 있으면 좀 넓혀서 넉넉한 인간으로 변화를 받으라”
우리는 마음이 넓은 사람을 큰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 통이 큰데...’ 마음이 넓어야 큰 사람입니다. 아무리 인물이 좋고 공부를 많이 했어도 속이 좁으면 작은 사람입니다. 시어머니가 큰 마음을 가져야 며느리가 살기가 편하지 사소한 일로 삐딱하면 가정이 편할 날이 없습니다. 남편이 넓은 마음을 가져야지 사소한 일로 오해하고 삐지기나 하면 아내가 살기가 힘듭니다.
넓은 마음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감사한다는 것은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0)
우리가 넓은 마음을 가지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자식이 마음이 넓으면 부모의 은혜를 압니다.
‘경외하므로 피차 복종하라’ 경외하는 것이 뭡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두려운 마음으로 복종하고 사는 것입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 남편 안만났으면 내가 처녀로 늙을텐데 그래도 나를 구제해 준 것이 감사하지’ 그런 마음을 가져야 순종이 됩니다. “종들아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나를 채용해 주어서 내가 일할 수 있게 해준 사장님이 너무 감사해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 ‘부모님이 나를 낳아주었기에 내가 세상에 존재하지’ 이 마음을 가질 때 부모의 은혜가 감사해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가질 때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인생 사는 것 전체가 은혜요, 모든 삶이 다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자기를 비웠습니다. 종의 형체를 가졌습니다.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님의 마음이 무슨 마음입니까?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넓은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는 사람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소나무는 큰 나무이기 때문에 가시넝쿨이 몸을 휘감아도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찬바람 부는 겨울이 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찬바람이 불면 가시넝쿨은 우수수 다 떨어집니다. 그리고 소나무만 독야청청 홀로 서 있습니다.
여물 먹는 소는 산에서 고기 잡아먹는 사자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여물 먹고도 땀 흘리면서 자기 할 일을 다 합니다.
비둘기는 콩알 먹으면서도 고기를 먹는 독수리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자기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시 37:1)
악한 자가 잘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하게 사는 것으로 이미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다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교수 모임에 가서 여자 교수님의 간증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분이 어렸을 때 6.25사변이 일어나서 아버지는 전사하고 어머니가 혼자 남대문으로, 서울역으로 다니면서 떡 장사를 해서 자식을 공부시켰습니다. 이 분이 대학원을 졸업하고 공부 잘하는 남편을 만나서 함께 외국 유학을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대학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둘이 대학 교수하면서 벌이가 좀 넉넉하니까 이 분이 남편을 설득시켜서 친정 엄마를 모시게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함께 살다가 어머니 생신이 되어서 생일 잔치를 하면서 딸이 어머니에게 묻습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소원이 뭐에요.” 그때 어머니가 잠잠히 딸에게 그럽니다. “딸아, 네가 내가 다니는 교회에 다니면 소원이 없겠다.” “알았어요. 제가 어머니 다니는 교회에 나갈께요.”
그전에는 어머니 혼자 먼길을 버스 타고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런데 딸이 교회에 나오면서부터는 자가용으로 어머니를 모셨습니다. 첫날 그 권사님의 딸이 교회에 나왔다고 하니까 새가족에서 박수치면서 환영해 주었습니다. 이 분이 환영을 받고 친교실에 앉아 있는데 한 분이 오더니 “아이고 교수님, 제 아들이 실력이 시원치 않아서 대학에 번번이 떨어지는데 어떻게 들어가는 길이 없을까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조금 있다가 저쪽에서 여 집사님들끼리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휴 저것은 새로 와가지고 너무 설쳐” 하면서 흉을 보면서 험담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또 건넛방에서 남전도회 무슨 회의를 한다는데 “혼자 해먹으라고 그래” 하고 삿대질을 하면서 서로 싸움을 합니다. 그것을 보고 이 분이 ‘이 교회 두 번 다시 안온다.’ 각심을 하고 어머니를 강제로 끌다시피 해서 집으로 갔습니다. 친정 어머니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딸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오늘 교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 딸은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면서 두 번 다시 교회에 안가기로 작심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눈을 지그시 감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날 평생 교회에 다녔어도 하나님 한분 좋아서 다녔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불평하는 소리를 하나도 듣지 못했는데 너는 어쩌다가 그렇게 교회에 와서 불평하는 소리만 들었니” 이 말에 대학 교수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감사하면서 살기도 인생이 부족한데 너는 어찌해서 불평할 것만 봤니’ 자기는 대학원도 나오고 박사가 되었기에 속 깊고 생각있는 인생으로 자부해왔는데 어머니의 말을 듣고 자신이 얼마나 속좁은 사람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어머니의 마음이 그렇게 넓고 깊은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다, 우리 어머님이 수십년 교회 다닌 것이 헛것이 아니었구나! 그 넓은 마음, 그 깊은 생각, 우리 아버지 전사하고 그 많은 세월동안 한번도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수십년 청상과부로 나를 길러 주셨거늘 내가 어찌 몰랐던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머니를 보니 어머니가 어떻게 위대한지 자신이 그렇게 왜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박사라고, 대학 교수라고 목에 힘 주었는데 너무 작은 자신을 본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큰 사람이 누구입니까? 큰 마음을 가진 자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사소한 것 때문에 자기 자신이 왜소하게 보인 일이 있습니까 그러면 오늘로서 끝내십시오. 인생 짧습니다. 넓은 마음을 가지고 큰 사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둘째, 화목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가능한대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내가 고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주시고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고칠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의 과거를 고칠 수 없습니다. 죽음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남의 성격을 고칠 수 없습니다. 날씨를 고칠 수 없습니다. “비가 오면 비가 와도 좋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불어도 좋다”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넓은 마음이 무슨 마음입니까? 다른 사람과 화목하는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온유한 마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화평합니다. 친절하고 이해심이 많습니다. 인간관계를 바르게 맺고 살아갑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엡 4:2)
관용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남을 존중하고, 격려하고, 허물을 덮는 넓은 마음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거의가 다 마음이 왜소합니다. 핵가족화로 부모와 자녀들이 서로 떨어져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녀들도 하나, 둘씩만 낳아서 기르고 방도 한 사람이 하나씩 쓰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밖에 모릅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모릅니다. 옛날 가난한 시절에는 방이 없으니까 형제들이 다 한 방에서 살았습니다. 밤에 잘 때 이불 하나로 자니까 서로 밀고 당기면서 자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면서 서로를 배려해 주면서 정감있게 살았습니다.
어떤 젊은 부부가 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하는데 부인이 깜빡하고 물건 하나를 덜 샀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잠깐만 서 있으라고 하고는 다시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사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어디 한군데를 유심히 쳐다보는 것입니다. 뭘 그렇게 열심히 쳐다보나 하고 봤더니 아가씨를 쳐다보는 것입니다. 부인이 열받어가지고 남편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어디를 그렇게 눈 빠지게 쳐다봐” 하고 버럭 화를 냈습니다. 그 일로 이 부부는 1년 6개월동안 싸웠다고 합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잉꼬부부가 있었습니다. 이 부부도 주일날 예배 끝나고 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하고 돌아오는데 남편이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면서 한 여자를 유심히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인이 남편에게 가까이 가서 “여보, 이제 다 봤소 다 봤으면 갑시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 얼마나 착한 마음입니까 넉넉한 마음입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런 넉넉한 여유를 가져야 가정이 편합니다. 이상한 남자들 참 많습니다.
오래전 얘기입니다. 제가 어느 성도님 댁에 심방을 갔는데 목사님이 온다고 음식을 잘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남편한테 그랬습니다. “아이고 우리 자매님 음식 솜씨가 좋아서 참 맛있네요.” 그랬더니 남편이 기분 나쁜 투로 “오늘만 그럽니다. 나한테는 한번도 이렇게 맛있는 음식 해준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을 합니까 평상시에 누가 그렇게 먹습니까 손님이 온다고 하니까 대접하려고 그렇게 준비를 한 것인데 그것을 삐딱하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또 한번은 어느 자매님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심방 가서 남편에게 그랬습니다. “성도님, 우리 집사님은 참 미인이셔요.” 자기 아내 예쁘다고 하면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그런데 제가 다녀간 후에 남편이 아내에게 “목사가 속이 앙큼하구만 남의 부인을 탐내게... 교회 나가지 마” 하면서 뭐라고 해서 그것으로 둘이 다퉜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인이 한달동안 교회에 못나왔습니다.
혹시 속좁은 부인 있습니까 또 속좁은 남편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마음을 넓히십시오. 사도 바울도 말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이여, 마음을 넓히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서로 화목하게 사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없습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
서로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좋게 보면 자기도 좋고 다른 사람도 편한 것을 사소한 것 가지고 다투고 싸움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요즘 신문에 화제가 되고 있는 한 인물이 틱낫한이라는 스님입니다. 불교 승려요, 베트남 시인으로 한국에 평화운동을 하러 왔습니다. 저도 이 분의 대표적인 책「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와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기쁠 때만 웃어야 하는 것 아니다. 웃음은 입으로 하는 수행이다. 기쁘지 않더라도 웃고 있으면 얼굴 근육은 부드러워진다.” 이런 내용이 그 속에 담겨 있습니다.
화를 풀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상처를 풀어야 합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은 못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내 상처의 응어리를 풀어야 인생이 풀립니다.
셋째, 자기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면 넓은 마음이 뭡니까? 자기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자기를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것이 자기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불행한 과거를 원망하고 ‘나는 팔자가 사나워’ 하면서 탄식합니다. 자랄 때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부모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상처받은 과거를 용서하지 못한채 탄식하고 저주하면서 괴롭게 살아갑니다. 자기 자신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부모님도 그대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준 유일한 은혜의 부모님 아닙니까 과거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용서해야 합니다. 자기 용모가 까마면 까만대로 ‘은혜를 많이 받으라고 바싹 구웠구나!’ 하면서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출생, 성격,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감사하면 모든 것이 축복이 됩니다. 부모가 나에게 준 병도 축복이고, 상처도 축복이고, 모든 것이 다 축복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어렸을 때부터 자기 아버지가 어머니 때리는 것을 늘 보고 자랐습니다. 그것을 보고 자기 마음속에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저렇게 살아서는 안된다. 우리 아버지처럼 살아서는 안된다. 나는 결혼하면 절대로 내 아내를 때리지 않을 것이다. 내 아내를 사랑하며 돌보며 살 것이다.’ 자기 마음속에 분노를 느끼면서 다짐을 했습니다. 이 사람이 장성해서 예수 믿고 집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아내를 때리지 않겠다던 다짐은 물거품이 되고 자기 아버지가 했던 대로 자기 아내를 구박하고 때렸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님 설교 들을 때는 ‘내가 이렇게 해서는 안되지’ 하면서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자신을 원망했습니다. ‘내가 왜 이럴까 내가 그렇게 자랄 때 우리 아버지를 보고 그래서는 안된다고 수없이 다짐했는데 내가 우리 아버지의 모습대로 살다니...’
인간은 두 종류의 생애를 배우게 됩니다. 하나는 미워하는 사람을 닮고 또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닮게 됩니다. 왜 미워하는 사람을 닮느냐? 밤에도 그 사람 미워하면서 생각하고, 낮에도 그 사람 생각하면서 미워하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이 자기 마음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 사람을 닮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어느 순간에 그 사람을 닮아가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과거에 아버지가 잘못을 했다면 아버지를 용서해야 됩니다. 거기에서 태어난 나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가 몰라서 그랬지’ 하면서 내 속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됩니다.
시어머니 밑에서 시집살이 한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며느리 얻으면 절대로 저렇게 안해야지’ 다짐합니다. 그러나 이 며느리가 나중에 시어머니가 되면 옛날에 시어머니가 자기에게 했던 행동을 며느리에게 똑같이 하게 됩니다. 그 시어머니를 용서하지 않았기 때입니다. 시어머니를 용서해야 그 독이 자기에게 들어오지 않고 은혜가 들어옵니다.
예수 믿으면 마음이 넓어져야 됩니다. 생각이 깊어져야 됩니다. 감사가 하늘로 높아가야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내게 임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봄이 오면 나무 가지가 부드러워져서 꽃이 피고, 얼었던 땅이 녹습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
이수영목사 / 고후 6:14-7:1
신22:10에 보면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라.” 합니다. “겨리”란 소 두 마리가 끄는 큰 쟁기입니다. “겨리한다”는 것은 소 두 마리가 짝이 되어 한 쟁기를 끌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라”는 말씀은 소든지 나귀든지 같은 짐승을 짝지어 논밭을 갈게 하고, 종류가 다른 두 짐승이 한 멍에를 메고 쟁기를 끌게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수레나 자동차가 바로 가려면 좌우 바퀴의 크기가 꼭 같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레나 자동차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한 방향으로만 뱅뱅 돌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키와 몸집과 힘이 각각 다른 두 짐승으로 하여금 한 멍에를 메고 쟁기를 끌게 하면 논밭을 가는 작업이 잘 이루어질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라”는 명령은 효율적인 농사의 방법 중 하나를 가르치는 말씀이긴 하지만 단지 농사의 요령 즉 짐승 부리는 방법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명령을 주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 금지명령에는 분명 영적인 의미, 신앙적 교훈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간파했던 것입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신앙적 권면을 하는 데 그 명령을 활용한 것입니다. 본문 14절에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먼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권면을 시작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함께 메는 일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지를 수사학적으로 표현을 바꾸어가며 여러 차례 반복하여 묻습니다. 14절 하반절부터 16절 상반절까지를 봅니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벨리알은 사탄의 다른 이름입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이렇게 다섯 차례나 반문을 거듭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함께 메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다른 종류의 두 짐승에게 한 멍에를 메우는 것을 영적인 일에 적용시킨 대표적인 예는 하나님의 전에서 예배드리는 신자들이 또한 우상의 신전에 드나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넓게는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을 드러내는 일체의 행위에 적용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들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며 사도 바울이 내세운 가장 강력한 이유는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본문 16절 상반절에서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하고는 이어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구약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처소로 여겨진 것은 모세 때는 성막이었고 솔로몬 왕 때부터는 그가 지은 성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는 그 자신이 하나님의 참된 성전이라 하셨습니다. 주님의 사자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남편이 될 요셉에게 꿈에 나타나서 알려준 말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한 것이었으며 “임마누엘”이란 말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마1:23). 또 요2:18-21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무슨 표적을 보이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셨고 유대인들이 되묻기를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예수님께서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했습니다(골2:9). 이제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새 성전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이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쓰고 난 후에 이어서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뽑아 그 근거로 제시한 하나님의 말씀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6절 하반절부터 18절까지가 그 말씀들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에 대한 사도 바울 자신의 설명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그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한 사도 바울의 권면의 이유가 다름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또 알아야 할 것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않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7:1에서 그 물음에 답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이 약속을 가진 우리”라고 한 데서 “이 약속”이란 두말 할 것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라는 말과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라는 말과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라는 말 하나하나에 주목하며 그 말들 사이의 상호관계성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라는 말과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라는 말 사이의 관계성입니다. 이 두 말은 긴밀히 연관된 것입니다. 거룩함의 본뜻은 구별됨입니다. 만유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당신 외의 모든 피조물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사람들과 온전히 구별되는 것은 바로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는 것 또는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 사이의 관계성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는 것 또는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데로 나아가야 하고 또 그것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말로만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하면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고 행실이 깨끗해지지 않으면 거짓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고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일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그 동기가 되고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허사가 되기 쉽습니다. 거룩해지고 깨끗해지려는 의지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면 쉽게 무너지고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과 어울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과 순수성과 기준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과 담 쌓고 살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해서 이 세상과 완전히 담 쌓고 살 수는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과 담 쌓고 산다면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마5:13) 하신 말씀이나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 하신 말씀은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또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하신 지상 명령도 실현불가능한 일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말씀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과는 분명히 달라야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잃지 말라는 뜻일 것입니다. 삶의 의미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며 행복관이 다르고 삶의 목표와 방식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우리의 정체성이 상실되거나 희석되기 쉽습니다.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히려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말은 믿지 않는 자들과 상종하거나 접촉조차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그들과 같아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으면 우리가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짠 맛을 잃는 소금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불 꺼진 등이 어둠 속에서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과 달라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이 세상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만 살고 이 세상에서는 살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세상을 바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을 지으시고 이 세상을 사랑하시며 이 세상을 참으시고 이 세상을 용서하시며 이 세상을 변화시키시고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들며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려면 이 세상과 같아져서는 안 되고 이 세상과 달라야 한다는 것, 이것은 역설인 것 같지만 진리입니다. 이 세상과 함께해야 하지만 이 세상과 멍에를 함께 메지는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영과 육을 더럽히는 온갖 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에게서 모든 불법을 몰아내야 합니다. 우리 안의 모든 어두운 생각과 행실을 쫓아버려야 합니다.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온갖 사탄의 역사를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온갖 우상을 다 제거해야 합니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자녀임을 한 시도 잊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쉴 새 없이 우리의 영과 육을 더럽히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날마다 깨끗하게 해주시기를 성령님께 간구하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답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청교도의 신앙
고후 6장 14~7:1 / 한경직목사
오늘 이 본문을 기초로 해서 청교도의 신앙을 다시 한 번 생각하려 합니다. 이렇게 더러운 것을 온전히 버리고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생활을 이루겠다는 것은 사도 시대 이후의 모든 경건한 신도들의 한결같은 염원이요 노력이었습니다. 물론 일반 교계가 부패하여진 시기에도 이름은 다르나 목적은 이와 같은 운동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일어났으니 교회사(敎會史)를 보면 중고 시대(中古時代)에 교회가 침체하여졌을 때에도 조용한 곳을 찾아 자기의 생활을 깨끗이 하려고 애쓴 수도원 제도가 발전되었고, 또 특히 「카다리」(Cathari-결백이라는 뜻)란 일종의 교파가 일어난 것이나 루터, 쯔빙글리, 칼빈의 종교 개혁도 다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 말한 이 모든 것이 청교도 아닌 것은 아니나, 교회 역사상 청교도라 함은 十七세기 중엽 영국 제임스 一세로부터 차알스 二세까지 거의 一세기 동안 영국 안에서 당시 로마 교회로 기울어지는 경향과 영국 국교를 상대로 한 순수한 신앙을 위하여 투쟁한 교도들과 또 이들 중에서 핍박을 피하여 미 대륙에 이주하여 뉴우잉글랜드 주에 세우고 미국을 건설한 교도들의 총칭입니다.
영국의 종교 개혁은 독일이나 스위스의 그것과는 그 성질이 달라서 十六세기 헨리 八세 때에 로마 교황과 관계를 끊고 영국 국교를 설립했으며 왕이 교회의 수장(首長)이 되고 캔터베리 대감독이 교회를 지도하였으나, 로마교의 잔재 즉 제사의 복장이나 예배의 의식 같은 것은 그냥 답습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독일과 제네바의 개혁을 아는 자 중에는 이에 불만을 품고 이 잔재를 일소하고 순수한 기독교의 확립을 원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당시 국교의 의식주의와 복잡한 성례, 감독 정치 등을 반대했기 때문에 많은 핍박을 받았으니 북미주에 이주하여 새 나라를 건설한 이들도 이들 청교도들이었고 크롬웰을 중심으로 한 국내 혁명도 이들의 손을 통하여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 청교도들이 가졌던 신앙과 생활은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오늘 위기에 처하여 있는 대한 교계를 돌아보며 이를 생각함은 무의미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첫째, 그들의 특색은 신앙의 기초를 성경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즉 그들의 신앙은 성경 중심이었으니 성경을 무엇보다도 존중했고 애독했습니다. 一六一一년 제임스 一세가 五十四인의 학자들을 명하여 영어로 번역케 한 신구약성경을 그 후 三년만에 완성해서 이를 흠정역(James Version)이라고 하는 바, 이를 애독한 청교도들은 생활과 도덕의 표준을 여기서 찾았고 교회와 국가의 정치적 표준도 여기서 얻었던 것입니다. 유명한 역사가 그린은 말하기를『영국인은 오직 한 책만 읽는 인민이 되었는데 그 책은 곧 성경이다』라고 할만큼 그들은 성경을 애독하였습니다.
둘째로, 그들의 신학 사상은 단순하였으니 사도 바울, 어거스틴, 칼빈을 통하여 전하여진 칼빈주의가 그들의 신학 사상이었습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였으므로 인간이 자력으로는 자기를 구원할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인간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으로, 그의 사랑과 자비로 인하여, 십자가의 주를 우리가 공손히 믿는 데서 구원을 얻는다는 단순한 신학 사상을 가졌을 뿐 아니라, 그들의 예배도 하나님 중심의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의식주의를 배제하고 마음에 우러나오는 대로 찬송을 부르며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고 정신적 신령한 예배를 엄숙하게 보았습니다. 얼마나 그들의 예배가 엄격하였던지 뉴우잉글랜드 교회에서는 예배 시간에 졸든 가 웃든 가 하면 벌을 주는 일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또 이러한 신앙을 가진 그들은 안식일을 지극히 엄수하였으니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레 중 하루를 하나님께 그려 이 날을 하나님의 날로 지켜 성전에 나아가 예배를 복 예배를 본 후에는 전도와 위문(慰問)에 힘썼으며 경마(競馬)나 연극 같은 오락을 금지하였고 또 노동하는 것을 금하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도덕 생활도 아주 엄격하였으니 하나님의 뜻은 그들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문제를 작정할 때에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할까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문제여서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떠한 희생도 아끼지 않고 이를 감행하며 인간의 권위에 대항한 것이 그들의 정신이었습니다. 그들의 염원은 하나님의 뜻이 가정에, 사회에, 국가와 정치에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활은 자연히 질박검소(質朴儉素)하였고 근면 정직하였고 충성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절제 생활을 하여 술과 경마와 연극 같은 오락과 향락을 버렸으니 세상과 타협이 없는 건전하고 깨끗한 생활, 세상에 물들지 않는 생황이 그들의 윤리 사상의 근본 원리였던 것입니다.
이상 말한 것은 역사적으로 고찰한 기독교 중심 생활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반면에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 중심을 떠나서 좌우 곁길로 나가는 사조가 있습니다.
첫째로 신신학의 사조(Modernism)가 이것입니다. 이 사상은 과학적 분위기에 쌓인 현대인에게 기독교를 이해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실 사상적으로 세상과 타협한 신학인바 이 사상은 자연주의와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합리주의가 그 골자로서 근본적으로 불신(不信)의 태도에서 나오는 사상입니다.
이 사상은 고대 교회로부터 나타난 것인데 시대가 감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을 뿐이니 이二세기의 노스틱주의, 四세기의 아리우수주의, 그 후에는 펠라기우수주의, 종교 개혁 이후에는 예수는 인간 즉 위대한 인간이라는 소시니안주의, 十九세기에 이르러 특히 독일 류빙겐 대학을 중심으로 현재주의 사상, 신 신학으로 우리 교회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상은 우리 믿는 사람의 신앙적 태도를 회의(懷疑)하게 하여 신앙을 무력하게 합니다. 스트라우스(strauss) 같은 이는 성경을 과학적 견지에서 보면 예수 님의 생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신화(神話)라고 주장하여 교계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결국 그의 말로는 유물론자, 무신론자로 전락되어 죽었고 이 사상의 지배를 받은 독일 교회는 아주 무력한 교회가 되어 생기를 잃어 결국 비스마르크, 히틀러에게 좌우되는 교회로 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내가 미국의 프린스톤에 있을 때 신 신학을 가르치는 모 신학교에서 온 어떤 신학생에게 왜 프린스톤으로 왔느냐고 물었더니 『거기 있으니까 목사 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없어지게 되므로 아주 없어지기 전에 왔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 되려고 신학교에 간 학생에게 목사 되고 싶지 않게 만드는 것이 곧 신신학의 영향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신앙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읽어야 성령이 임하는 것이지, 불신하는 태도로, 불 경건한 마음으로 성경을 연구한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얼른 생각하기에 그 시대 그 시대의 사상과 타협하여 가면서 전도하면 신자가 많이 생길 것 같지만, 타협해서 얻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죄와 싸우는 회개하는 사람을 많이 얻을 것이며 죄를 책망하지 않으면 귀로 듣기는 좋을지 모르나 회개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이와 반면에 극우사조(極右思潮)라 할까, 소위 극단적 영파(靈派)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이성(理性)의 요소를 전혀 무시하고 극단적인 감정에 흘러 광신(狂信) 내지 미신에 빠지는 사상입니다. 이들은 오직「자기만 의롭다」는 자홀(自惚)에 빠져 기성교회(旣成敎會)를 부인하며 또 극단적 문자주의(文字主義)에 빠져 성경의 근본 정신을 망각하여 사소한 문제로 교회의 분열을 꾀하며 교회의 분해 작용을 촉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대(古代)의 몬타너스, 도나터스주의가 그러하며, 종교 개혁 이후에 재세례파(再洗禮派), 칠일 안식일과(七日 安息日派), 소위 평북 철산(鐵山)의 새 주파(主派) 들이 곧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상이 있어 교회를 잠식(蠶食)한다는 것도 분명히 알아 경계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보세요, 오늘의 대한 교계와 전 세계의 교계를 영적 안목으로 볼 때 기독교가 직면하고 있는 양대 강적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유물주의 사상(唯物主義思想)입니다. 공산주의라는 말을 타고 사회 정의와 무산자 해방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인간의 최대 본능인 물욕에 호소하여 인간을 동물로 환원케 하며 하나님도 모르고 유물론적 견지에서 인간 생명을 보아 테러, 방축(放逐), 약탈(掠奪) 등을 일삼고 기독교를 박멸하려는 자로 이는 소련을 통하여 들어옵니다.
또 하나는 속세주의(俗世主義)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과 세상 것과 타협하려고 하여 이 세속 생활과 같은 오락과 향락을 마음껏 누리고 또 예수도 믿어 구원을 얻으려 합니다. 술도 먹고 담배도 태우고 투전도 하고 극장에도 가고 이혼(離婚)도 하고 주일날에 오락도 하고 자유연애도 하는 등 그야말로 넓은 길로 가면서 예수를 믿자고 하는 자들인 바, 이는 소위 기독교국이라는 미국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오늘 대한교회는 이 양대 강적을 정복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이를 정복하고 이 부패케 하는 사조를 밀어 내버리려면 물 탄 피계죽 같은 소위 신 신학적인 미온적 신앙이나 감정에 치우친 맹목적인 미신적 신앙을 가지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을 기초로 한 건전하고 열렬한 청교도들이 가졌던 이 복음주의 신앙이 아니면 아니 됩니다.
나는 이때야말로 이런 신앙과 생활을 결심하는 이들의 대동단결로 십자군(十字軍)을 조직할 때하고 생각합니다.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고후 6:14~18 / 지용수목사
오지에서 양치기를 하면서도 바이올린을 즐기며 음악과 함께 사는, 삶의 멋을 아는 한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할아버지가 바이올린을 켜려고 보니 바이올린의 음이 엉망이었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조율이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 방송국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월 ○○일 ○시에 A음을 알려주세요. 그러면 제가 거기에 맞추어 바이올린을 조율하겠습니다.’ 방송국에서 그 편지를 받고 그 시간에 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할아버지가 기뻐하며 거기에 맞추어 바이올린을 조율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다시 바이올린을 켜며 즐겁게 살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기본음이 중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기본인 도리를 다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남편의 도리, 자식의 도리, 직장인의 도리, 국민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맞추고 하나님 자녀의 도리를 다하면 다른 것은 따라오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조율이 되지 않고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맞추면 효도하는 자녀가 되고 훌륭한 남편, 훌륭한 아내가 되고, 훌륭한 직장인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께 맞추면 다 맞추어지게 됩니다.
이 시간에도 나를 하나님께 맞추는 지혜자가 되어서 삶이 음악이 되고 아름답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낮 말씀은 특별히 중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혹 어떤 사정으로 낮 말씀을 듣지 못한 분은 말씀 테이프를 구하여서 듣고 마음을 넓혀 이 험한 세상에서 웃으며 밝고 행복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많은 사람을 구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에 주시는 말씀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제게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중에 믿지 않는 사람과 깊이 사귀고 있는 분이 계시나 봅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깊이 사귀면 결국은 모래를 씹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모래를 씹으면 죽을 맛이 납니다. 이 세상을 살다 보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도 굉장히 매력 있고 괜찮아 보여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라는 오늘 말씀을 늘 생각하여 실수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농사짓는 방법이 우리와 다릅니다. 우리는 논을 갈 때 소 한 마리에 한 멍에를 씌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소 두 마리에 한 멍에를 씌웁니다.
수레를 끌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아비나답의 집에 있는 하나님의 법궤를 수레로 옮길 때도 황소 두 마리가 그 수레를 끌었습니다. 어깨에 메고 옮겨야 하는 법궤를 수레로 옮기다가 사람이 죽고 법궤 옮기는 일도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힘든 부분은 힘들게 믿어야지, 그것도 가볍게 믿으려 하면 실패합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힘든 것은 힘들게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소 두 마리로 하여금 한 수레를 끌게 합니다.
그런데 신명기 22장 10절에 보면,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수레를 끌 때나 밭을 갈 때 소는 소끼리 나귀는 나귀끼리 한 멍에를 씌워야지, 소와 나귀에게 한 멍에를 씌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와 나귀는 속도도 다르고 힘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다른 것들끼리 짝을 지워서 일하게 하면 서로가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소는 소끼리, 나귀는 나귀끼리 짝이 되어야 서로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일을 편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기에도 좋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말씀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이 말씀은, 소는 소끼리 나귀는 나귀끼리 멍에를 메야지 나귀와 소가 한 멍에를 메면 안 되는 것처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과 어찌 사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벨리알(무가치하고 악하다는 말로 마귀, 사탄의 별명)이 어찌 조화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떻게 관계를 하겠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의 전각이 어떻게 조화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우상의 전각인 절이 어찌 조화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특별히 16절부터 죽 보면,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For we are the temple of the living God.)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를 영접하시고 아들을 삼아 주셔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어떻게 세상의 자녀와 멍에를 같이 메겠느냐는 것입니다. 멍에를 메는 것은 그냥 사귀는 것이 아니라 깊이 사귀는 것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5장 9절에서 10절에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음행하는 자들, 토색하는 자들,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전혀 사귀지 않으려면 우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되는데, 그렇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가 물건을 사고 팔 때나 반상회 때, 체육대회 때, 또는 어떤 일을 할 때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합니다.
오늘 본문의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는 말씀의 뜻은 깊이 사귀지 말라는 것입니다. 코이노니아의 사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코이노니아의 사귐이란 성찬을 함께 하는 깊은 사귐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는 말씀은 믿지 않는 자와 깊은 사귐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같은 일을 연합해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요셉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 보디발의 집에서 일했습니다. 다니엘도 우상 숭배하는 느부갓네살 왕의 총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우상 숭배자와 함께 일할 수는 있지만, 믿지 않는 자와 스스로, 고의적으로,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는 함께 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우선 보기에도 아름답지 않고 조화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양곡교회 목사인 제가 성주사 주지 스님과 월요일마다 만나서 함께 테니스를 하고 함께 점심을 먹으면 좋겠습니까? 이번 월요일에는 제가 성주사에 가서 그곳 주지 스님과 식사를 하고, 다음 월요일에는 성주사 스님이 우리 교회에 와서 저와 함께 식사를 하고 차를 나누어 마시면 좋겠습니까? 저와 스님이 함께 여행을 다니며 팔짱을 끼고 다니면 보기에 좋겠습니까? 법무부 장관과 조폭이 함께 운동을 하고 함께 여행을 다니면 보기에 좋겠습니까? 검사가 깡패와 친구가 되어서 깊이 사귀면 보기에 좋겠습니까? 그런 사귐은 보기에도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지 않으시는 사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지 않는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망합니다. 호박 넝쿨이 막 뻗어나가도 겨울이 되면 자취가 없어지듯이, 악한 자는 막 잘 되는 것 같아도 때가 되면 없어집니다. 아무리 눈을 닦고 보아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지 않을 자는 이래도 저래도 결국 망하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 북아프리카 알 알라메인에서 독일군과 영국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많은 병력을 투입한 양진영 모두 물이 떨어져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영국군이 물길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파이프를 연결해 놓고 물이 잘 흘러가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습니다. 혹 물이 제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아까운 물을 낭비하게 되니 시험삼아 파이프에 바닷물을 집어넣어 보았습니다. 물이 잘 흘렀습니다. 마침 그때 한 독일 정찰병이 파이프를 통해 영국군 진영으로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바로 상부에 보고를 했습니다. 독일 진영에서는 즉시 파이프를 자르고 그 물을 모두 마셨습니다. 여러분, 바닷물을 마시면 어떻게 됩니까? 목이 타서 못 견디게 됩니다. 독일군 대장부터 모두가 손을 들고 영국군 진영으로 와서 “물 좀 주시오. 물 좀 주시오. 우리를 살려 주시오.”하며 항복했습니다.
그래서 영국 군인들이 칼 한 번 쓰지 않고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이것이 우연한 일입니까? 짠 바닷물을 맛 본 순간에 그것이 바닷물이라는 것을 알았을 텐데 모두가 그냥 퍼마신 것은 하나님께서 독일군에게 패배를 주신 것입니다.
승리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패배를 주시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일군에게 패배를 주시니 독일이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독일군과 연합한 사람들도 함께 망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역대하 18장 1절에 보면, 여호사밧의 부귀와 영광이 극에 달했을 때 아합과 연혼합니다. 여호사밧은 아세라 목상을 다 찍어 없애고 하나님의 성전을 청결하게 하며 오로지 하나님을 섬기는, 복 있는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부귀와 영광이 극에 달하게 하셨습니다. 믿음의 결국은 영혼이 구원받고 하늘에서 큰 복을 누리는 것이지만, 우리가 믿음을 잘 지키고 주일을 잘 지키고 십일조를 잘 하고 부지런히 살면 이 땅에서도 부귀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위기입니다. 부와 귀와 영광이 극에 달했을 때 더 겸손해야 됩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은 영적으로 분별력을 잃어서 악명 높은 아합의 딸 아달랴를 자기 며느리로 삼았습니다. 세상에! 아합 왕의 딸 아달랴를 자기 아들 여호람의 아내로 삼았단 말입니다. 그의 생각에는 이스라엘 왕과 사돈이 되면 두 나라의 평화 관계가 지속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부터 그의 집이 기울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돈 아합 왕이 여호사밧 왕에게 말했습니다.
“왕이여, 내가 지금 아람 왕을 치러 가는데 함께 가겠습니까?”
그때 여호사밧이 거절했어야 되는데, “나는 당신과 일반이요,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일반이니 함께 가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아합은 변장을 하고 나갔는데 여호사밧은 왕복을 입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아람 왕이 군대 장관들에게 명을 내려서 다른 사람은 잡지 말고 이스라엘 왕 아합만 잡아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모든 병사들이 왕복을 입은 여호사밧 왕이 아합 왕인 줄 알고 여호사밧을 에워싸서 죽이려 했습니다. 다급한 여호사밧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소리가 무엇인지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워낙 급한 상황이니 “여호와 하나님!”이라 했을 것으로 저는 믿습니다. 자동차 사고가 나 보십시오. 엄마 아빠를 찾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거의 다 “주여! 주여!”라고 합니다. 죽게 된 상황이니 “하나님! 하나님!”하고 하나님을 불렀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 병사들에게 깨우침을 주셨나 봅니다. 그들이 그 소리를 듣고 “어! 아합 왕이 아니네.”하며 아합 왕을 찾아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아합이 변장해 있으니 그들이 아합 왕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공중을 향해 우연히 쏜 화살이 아합 왕의 갑옷 솔기를 뚫고 들어가서 아합 왕이 그 화살에 죽었습니다. 한 사람이 우연히 쏜 화살에 아합 왕이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이시려고 작정한 자는 결국 죽습니다. 어디로 도망가도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대하 19장 2절에 보면, 전쟁터에서 돌아온 여호사밧 왕을 하나님의 사람 예후가 책망합니다.
“왕이 어찌 하나님의 원수,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고 도와주는 것입니까? 이제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재앙이 왕에게 임할 것입니다. 왕께서 우상의 전각을 헐고 오로지 하나님만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셨지만 이제 하나님의 벌이 임할 것입니다.”
예후의 예언대로 벌이 임했습니다. 여호사밧이 죽고 여호람이 왕이 되자 그 부인 아달랴가 여호람에게 왕위를 지키려면 형제를 죽여야 된다고 꼬드겼습니다. 그래서 여호람은 왕이 되자마자 왕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어리석게 자기 친동생들을 다 죽였습니다. 여자 한 사람이 잘못 들어와서 집안이 망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 있는 며느리를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악을 행한 여호람을 치시어 창자가 빠져나와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의 아들이고 여호사밧의 손자인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습니다. 아하시야도 역시 우상을 섬기고 악한 아합 왕의 길을 갔습니다. 그의 어머니 아달랴가 그를 꼬드기니 그가 그 길을 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예후의 칼에 죽습니다. 아하시야가 죽자 아달랴는 자기가 왕이 되어 왕족의 씨를 진멸하려 했으나 아하시야의 한 아들이 살아 남았습니다. 그 외 여호사밧의 모든 씨는 다 죽었는데, 그것은 여호사밧이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했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도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서 믿게 하면 되지.”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모험입니다. 그 사람이 믿을지 믿지 않을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데도 여호사밧이 그런 결혼을 시켰다가 집안의 씨가 마르게 되었고, 유다 백성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는 결국 망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과 함께 하는 사람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시편 1편 1절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복 있는 사람은 의인과 사귀어 의인의 아이디어를 얻고 겸손한 자리에 앉으며 의로운 사람과 함께 걸어간다.’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는가, 누구와 함께 하는가’가 굉장히 중합니다. 사귐은 서로 주고받는 것이라 좋지 않은 사람을 만나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지 않으셔도 결국 자신이 손해를 보게 됩니다.
본문에 ‘너희는 따로 있고 더러운 것,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정한 사람, 믿지 않는 사람과 사귀고 함께 하면 결국 그를 닮아가게 됩니다. 술 좋아하는 사람을 자꾸 만나면 결국 술을 마시게 되고, 도박하는 사람을 자주 만나면 결국 도박하게 되고, 마약하는 사람을 만나면 결국 마약을 맛보게 되고, 노래방에 자주 가는 사람을 만나면 노래방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한 방에서 네 사람이 함께 지냈습니다. 저와 한 방에서 지냈던 사람 중 세 사람이 공부벌레였고 한 사람이 농땡이였습니다. 6개월이 지나니 그 농땡이도 공부벌레가 되어서 좋은 성적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한 사람은 공부벌레였는데 같은 방에 있는 세 사람이 농땡이였습니다. 6개월 지나니 그 사람도 시험을 앞두고도 영화관에 가는 농땡이로 되어 있었습니다.
누구를 만나느냐가 얼마나 중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도 조심해야 되지만 특별히 우리 자녀, 우리 형제, 우리 가족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않도록 늘 깨어서 기도해주고 조언해주고 지켜주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여호수아 22장에 보면, 요단강 저편에는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살고, 이편에는 다른 아홉 지파가 삽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두 지파 반의 사람들이 다른 아홉 지파와 함께 요단강 이편에서 전쟁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 여호수아가 그들을 격려하고 치하했습니다.
“너희들, 고맙다. 전쟁이 오래 계속되었는데 처자식이 있는 곳에 가지 않고 끝까지 의리를 지키고, 하나님의 명대로, 모세의 명대로 잘 싸워 주어서 고맙다. 이제 전쟁이 끝났으니 금, 은, 가축 등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가서 잘 살아라.”
그들이 자기 가족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이 요단 언덕 가에 이르렀을 때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우리는 죽고 우리의 자손들만 살 때 강 저편 아홉 지파 자손들이 자기들만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고 이편 우리 자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아니라고 따돌리면 어떻게 하지?”
“그래, 그러면 어떻게 하지?”
“우리가 증거물을 만들어 두자.”
그래서 그들이 거기에 큰 단을 쌓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아홉 지파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니, 그 사이에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려고 제단을 쌓아?”
아홉 지파 반이 칼을 뽑아 들고 두 지파 반을 죽이러 왔습니다. 내 형제가 우상을 섬기면 차라리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두 지파 반의 두령들이 나와서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아신다. 우리가 다른 신을 섬기려고 단을 쌓은 것이 아니다.”
“그러면 무어냐?”
“세월이 지나 우리와 형제들이 죽은 다음에는 자손들만 살 텐데, 우리가 이렇게 떨어져 살다보면 나중에 형제들의 자손이 우리 자손을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아니라며, 하나님과 상관없는 백성이라며 왕따를 시킬 수도 있지 않느냐? 그때 우리 자손도 형제들의 한 자손인 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인 것을 자손에게 증거로 남기기 위해 이 증거물을 세운 것이다.”
그러자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감동을 받고 즐거워하고 찬송하며 돌아갔습니다.
이스라엘 아홉 지파 반이 그들의 형제인 두 지파 반이 우상을 섬길까 봐 칼을 뽑은 것은 잘 한 일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우상을 섬기거나 믿지 않는 사람들과 멍에를 같이 메면 칼을 뽑는 마음으로 막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가정을 지키고 우리의 믿음을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혹 믿지 않는 사람과 깊이 사귀는 분이 계신다면 지금 이 시간에 성령님께서 정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매력이 자르르 흐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꺼벙하고 땟국물이 주르르 흘러도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사귀고 결혼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복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오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매력이 넘치고 아무리 멋있고 좋아도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결국에는 망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깊이 명심하면 절대로 여호사밧처럼 되지 않고 길이길이 복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위험한 연합
고후06장 14~18절 / 김홍도목사
이런 웃기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돼지우리에 중국 사람, 한국 사람, 일본 사람을 돼지와 함께 넣어놓고 누가 제일 더러운 것을 잘 참는지 테스트를 했더니 일본 사람이 제일 먼저 “에이 더러워서 못 참겠다”라고 하며 뛰어나오더랍니다. 그 다음에는 한국 사람이 뛰쳐나오고 뒤이어 돼지가 뛰쳐나오면서 “에이 더러워서 같이 못 있겠다”라고 하는데 중국 사람은 그대로 참고 있더랍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스개 소리이지 진담이 아닙니다. 앞으로는 중국과 인도가 세계를 제패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돼지는 돼지의 성품(nature)이 있어서 돼지들끼리 진흙 구덩이에서 같이 뒹굴며 살고 양은 양의 성품이 있어서 함께 초장에서 풀을 뜯어먹고 살듯이 거듭난 크리스천들은 신적인 성품(divine nature)이 있어서 결코 성품이 다른 무리들과 합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3~4절에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divine nature)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신의 성품을 가진 크리스천들은 절대로 연합해서는 안 되고 합병해서는 안 될 일들이 있습니다. 본문, 고린도후서 6장 14~17절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결코 연합해선 안 되고 합방해서는 안 되는,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고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관대하고 포용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바로 전 절에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믿지 않는 자와 전혀 사귀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결혼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의 정절을 버리고 크리스천이 불신자와 함께 굿을 하거나 돼지머리 앞에 절을 하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또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말씀을, 결혼을 해서 긴 베개를 같이 베는 것 같이 믿지 않는 자와 전혀 결혼하지 말라고 하는 뜻으로 이해하는 이도 있으나 할 수 있는 한 믿음 안에서 결혼을 하되 부득이 믿지 않는 자와 결혼을 할 결우, ① 신앙생활을 계속한다는 조건 혹은 같이 교회에 다닌다는 전제 하에 결혼을 해야 하고 ② 절대로 종교를 바꾸지 않는다는 것과 핍박을 받아도 순교를 각오하고 믿지 않배우자와 그 가족을 전도한다는 선교적 사명을 가져야 합니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고후6:14)”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서로 상반되는 일에 함께 교제하고 죄와 불법을 같이 자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고후6:15)라고 했는데 벨리알은 사탄 마귀를 의미하고 또 적그리스도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결코 조화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6:16)라고 했습니다. 인도에 갔더니 기독교 교회에서 가끔 힌두교, 불교, 모슬렘교가 함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본문 17절에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연합과 화평과 화목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절대로 연합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고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키는 연합, 죽음을 가져오는 연합이 있습니다.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①
② 1. 마귀와의 연합은 안 됩니다
③
④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연합의 첫째가 사탄 마귀와의 연합니다. 본문에도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귀신의 왕 혹은 적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⑤ 블룸하르트의 “투쟁과 소망”(윤관웅 박사 편저, Johann Christoph Blumhart, 1842-1919,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니라’고 함)에서 “그의 설교 역시 마귀 권세를 물리치고 기독교의 주권을 세우는 정권교체의 투쟁이었다. 이 전면적인 투쟁 속에서 성령의 새로운 부으심과 최후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고 투쟁이 완전히 종결되어 평화만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에 대한 갈급한 소망이 불타올랐다”라고 했습니다. 교회와 크리스천들은 마귀와 싸워서 승리한 후에 오는 평화이어야지 마귀와 타협하면서 화평과 연합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마귀와의 투쟁 없이 오는 평화와 연합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 책 p8에서 “투쟁하는 자는 권능의 성령강림과 승리자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구하지 않을 수 없고 투쟁하는 자만이 소망한다”라고 했고, “…칼빈을 세상의 영원한 번영을 약속하는 자본주의의 시조인양 여겨오던 종래의 칼빈 왜곡을 수정하고 그의 종말론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가 역설하는 ‘투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블룸하르트는 목회는 곧 영혼 간호이며 설교는 곧 마귀를 쫓는 축사(逐邪)라고 했습니다. 보렌 교수(Rudolf Bohren)는 “블룸하르트 목사의 설교에서는 언제나 마귀의 역사를 파괴하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느낄 수 있었다. 재능이나 기교나 말솜씨가 아니라 주님의 능력이 블룸하르트를 설교자로 만들었다”라고 했고 또 “블룸하르트의 설교는 사람들을 마귀로부터 풀어 자유하게 했다”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1장 20절에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신령한 목회는 마귀와의 싸움이며 사람들을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마귀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십자가의 보혈의 은총으로 죽은 영혼을 살려 구원하는 것은 기본적인 사역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또한 성도들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마귀와 싸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영적 싸움의 완전한 승리는 예수님이 재림하여 마귀들을 무저갱에 가두고 불못에 던지울 때 가능해집니다. 사탄 마귀는 대적하여 싸우는 대상이지 결코 화목하거나 연합해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2. 죄와의 연합은 안 됩니다.
사탄과 죄는 투쟁의 대상이지 화목하거나 연합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화평과 연합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원수 마귀와 화합하고 죄와 타협하면서 화목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10장 34~36절에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와 타협하며 마귀 앞에 무릎꿇어가면서 화평을 좇으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말씀의 검을 가지고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싸워야 할 대상과 사랑하고 화목해야 할 대상을 혼돈하고 있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키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교회, 승리의 주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는 잠잠하지 않고 끊임없이 싸우고 투쟁하는 교회입니다.
천주교가 부패하여 베드로 성당을 건축할 때 건축비 조달을 위해 면죄부를 파는 것을 비롯하여 성경에 위배되는 일을 하자, 루터가95조항의 항거문을 비텐버그(Witenburg) 대학 벽에 붙이며 투쟁할 때 1527년 4월 17일 카알 5세가 그에게 보름스(Worms) 의회에 출두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출교당하거나 죽을지도 모르니 가지 말라고 만류할 때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름스에 있는 모든 집 기왓장이 마귀가 되어 나를 공격할지라도 나는 그 자리에 가겠노라”고 하며 출두했습니다. 목숨을 건 투쟁이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가 죽지 않고, 흑암의 장막을 걷어치우고 살아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를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합니다. 이 말은 “프로테스트”(protest) 즉 “항거한다, 반항한다”라는 뜻입니다. 죄와 싸우지 않고 사탄과 싸우지 않는 교회는 생명력 있는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평생 사탄과 싸우며 목회했던 블룸하르트는 “투쟁과 소망”이란 책을 썼던 것입니다.
3. 이단 신학과 연합해선 안 됩니다 사단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파괴하는데 사용하는 가장 큰 도구는 자유주의 신학이며 이단 신학입니다. 어느 여성 신학자는 “머리에는 기독교, 가슴은 불교, 정신은 샤머니즘”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 노선을 따르는데,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고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으며 부처도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 고 변선환 교수의 신학사상입니다. 물론 십자가의 구속이나 부활도 믿지 않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구속이나 부활은 물론 천국이나 지옥도 믿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존재하느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말하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베 짜는 하나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죄 사함이나 영혼구원이 아니라 사회구원, 정치적 해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감리교의 모국인 영국에 1960년대에는 14,000여 개였던 교회가 지금은 8,000 교회가 죽어 없어지고 6,000여 개만 남았는데 그나마도 싸늘한 시체로 변해가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죽은 교회당은 술집이나 가구 전시장이나 심지어 이슬람교 회당(mosk)으로 팔려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감리교회가 1960년대에 1,200만이었는데 800만으로 줄었고, 한때는 350명이던 교회가 하루에 하나씩 문 닫는 형편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이단 신학의 교회와 합치지 않습니다. 감리교회의 보수 신학교, 애즈베리(Asbury)는 그렇게 합치자고 해도 완강히 버티고 있습니다. 그 신학교 나온 목사들은 다 목회를 잘하고 교회를 부흥시킵니다. 미국 연합감리교회(United Methodist)는 연합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함께 죽어가는 것입니다. 호주의 감리교회는 “연합하는 감리교”(uniting)라는 뜻입니다. 교회가 자꾸 죽으니까 자꾸 합치는 것입니다. 10여 년 전 영국 웨일즈(wales) 지방에 있는 100년의 역사를 가진 신학교들을 가 보았더니 신학생이 없으니까 재정이 없어서 이슬람교에서 일 년에 100만 불씩 보조를 받아 운영하고 있는 것을 보조를 받아 운영하고 있는것을 보았습니다. 삼위일체도 안 믿고 십자가의 구속이나 부활도 믿지 않고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니 그 교회가 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자유주의 신학, 이단 신학과는 연합할 것이 아니라 대적하고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송장과 산 사람을 함께 묶어놓으면 같이 죽는 것과 같습니다.
4. 붉은 용의 사상과 연합해선 안 됩니다
“붉은 용”은 사탄을 의미합니다. “붉은 색”은 피의 색깔이며 살인과 잔인함을 나타냅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마귀는 살인자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했습니다. 공산주의(communism)는 사탄의 사상(satanism)입니다. 잔인하게 살인 만행을 일삼고 거짓말을 진짜처럼 꾸며내고 지어내는 것이 공산당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공산당이나 주체사상한테 속으면 안 됩니다. 공산주의는 유물론(materealism) 사상입니다. 정신의 가치나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엥겔스(Friedrich Engels)는 “정신은 물질의 생물학적 부산물”이라고 하며 영혼의 영생불사나 내세나 부활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공산주의는 무신론입니다.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신은 필요 때문에 고안된 정신적 허구”라고 하면서 공산국가에서는 모든 교회를 다 파괴하고 크리스천들을 거의 다 죽이거나 투옥하거나 잔혹한 노동일을 하다가 죽게 만듭니다.
종교를 무산대중, 프롤레타리아의 원수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종교말살론”이기 때문에 타도의 제일 공격 목표가 교회입니다. 특히 큰 교회는 제일 우선순위입니다. 공산주의는 문자 그대로 남의 것도 빼앗아 나눠가져서 노동계급, 무산대중이 잘 사는 나라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상낙원(utopia)을 만들자고 했지만 하나같이 거지의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북한에서는 지난 몇 년 동안 3백만 명이나 굶어 죽었는데 금년은 더 어려운 식량난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굶주리는 동포에게 직접 양식 지급이나 국수를 만들어 줄 수 있다면 그것은 해야겠지만 절대로 돈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남한에서 준 돈으로 핵무기를 만들고 최신 비행기를 50대나 사들여 와서 남한을 향해 겨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1995년에서 2004년까지 “총 32억 7,970만 달러”, 2000년 이후 연평균 5억 9천만 불씩 지원해주었다는 것입니다(한국일보 2005.6.16,미주A4). 사탄의 힘을 키워준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위기는 “고려연방제”니, “낮은 단계의 연합”이니 하는 공산주의와의 연합입니다. 공산주의를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것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공산주의와의 연합은 나라가 망하는 길입니다. “연방”이나 “합방”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친공, 친북, 좌익사상에 물들고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목사들까지 우선 통일부터 하고 보자고 하는데 이보다 더 위태한 일은 없습니다. 남왕국의 선한 왕, 여호사밧이 북왕국의 악한 왕(왕후 이세벨)을 도와 전쟁을 하다가 죽을 뻔하고 돌아왔을 때, 역대하 19장 2절에 선지자 예후가 책망하기를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서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너그럽고 포용하고 화평을 도모해야겠지만 사탄 마귀와의 연합, 죄와의 연합, 이단 신학의 포용이나 붉은 용의 사상과 연합해서는 안 되고 대항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마음을 넓히라
고후06장 11~13절 / 지용수목사
미국 시애틀에 있는 파이크 플레이스라는 어시장은 세계적인 수산 시장입니다. 그곳에는 삶의 열정과 희망이 넘친답니다. 상인들이 기쁘고 신바람 나게 장사를 하여 그 시장이 유명한 관광코스가 되어 많은 관광객이 다녀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활기가 넘치는 시장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상인들이 서로 다투고 분위기가 축 처져 있는 짜증스러운 시장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상인들이 생각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날마다 손으로 생선을 만지고 다듬으며 손님과 가격을 흥정하는 자기들의 일이 대단하지도 않고 큰 성취감을 주는 것도 아니지만 어차피 그 일을 하며 살아야 되니 짜증을 내지 말고 열정을 갖고 신바람 나게 해보자고 했답니다. 그래서 모두가 기쁨으로 손님을 맞이하고 기쁨으로 생선을 다듬고 활기차게 일을 했답니다. 그랬더니 너도나도 몰려와 그 시장이 최고의 어시장이 되었고 거기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성공했다고 합니다. 마음을 고치지 않았을 때는 희망이 없었던 곳이 마음을 고치니 희망이 넘치는 곳이 된 것입니다.
성공과 실패는 마음에 달렸습니다. ‘내가 괴롭다.’ 라는 것은 마음이 괴로운 것입니다. ‘내가 즐겁다.’ 하는 것은 마음이 즐거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하며 기쁨을 억누르지 못했는데 그때 바울은 감옥에 있었습니다. 감옥에 있어도 마음이 기쁘니 기쁜 것입니다. 그러나 별장 같은 집에서 살아도 마음이 괴로우면 괴로운 것입니다.
사람이 성공하고 망하는 것도 마음에 달렸고 행복하고 불행한 것도 마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잠언 4장 23절에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마음 관리를 잘 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큰 인물입니까? 키가 크면 큰 인물입니까? 아닙니다. 키가 크든 작든 마음이 큰 사람이 큰 인물입니다. 누가 훌륭한 사람입니까? 외모가 훌륭하면 훌륭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외모야 어떻든 마음이 훌륭해야 훌륭한 사람이고 마음이 아름다워야 아름다운 사람인 것입니다.
잠언 11장 22절에 말씀하십니다.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고리 같으니라』
외모가 아무리 잘 생기고 아름다워도 술집에서 뒹굴면 귀한 사람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을 따라 이새의 한 아들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기름을 부으러 갑니다. 키가 크고 잘 생긴 장남 엘리압이 늠름하게 나타나니 사무엘이 기름을 부으려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의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는 중심을 보느니라(Man looks at the outward appearance, but the Lord looks at the heart).”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십니다.
엘리압, 아비나답, 삼마……, 일곱 아들이 다 지나갔습니다. 그 잘 생긴 아들들을 하나님께서 좋아하지 않으시고 어린 다윗을 사랑하셔서 기름 부어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다윗의 외모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을 의식하여 외모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물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하여,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 몸을 매력 있고 균형 있게 가꾸며 단정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 사는 것도 중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마음을 아름답고 크게, 귀하게 가꾸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말했습니다.
“날마다 수염을 깎듯이 날마다 우리 마음을 관리해야 한다.”
남자들이 아침에 수염을 깎아도 오후가 되면 또 수염이 자랍니다. 그 이튿날 수염을 깎아도 그 다음 날 또 깎아야 합니다. 한 번 수염을 깎았다고 1년 동안 깎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을 한 번 새롭게 하고 큰 뜻을 품었다고 그냥 두면 안 됩니다. 날마다 수염을 깎듯이 날마다 우리 마음을 잘 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방을 아무리 깨끗하게 청소해도 또 먼지가 쌓입니다. 오늘 청소해도 내일 또 청소하고, 때로는 하루에 두세 번도 청소하듯이, 우리 마음을 언제나 깨끗하고 정결하고 아름답게 가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그냥 두면 마음의 방에 쓰레기들이 모여서 못 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언제나 아름답고 귀하게 잘 관리하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네 마음을 넓히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네 마음을 넓혀라(Open wide your hearts).”
이 말씀은 우연히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연히 말씀을 주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쓸데없는 말씀을 주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이사야 55장 10절에서 11절에 말씀하십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누가복음 21장 12절에서 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핍박을 받고 왕 앞에 끌려갈 때 무슨 말을 할까 연구하지 않기로 결심하라. 그때 너희 대적이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말을 할 수 있도록 너희에게 입의 지혜와 재주를 주겠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다가 핍박을 받고 법정에 끌려가도 우리가 할 말을 성령님께서 일러 주시는데, 하물며 목회자가 설교할 때 그 목회자가 마음대로 설교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냥 두시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목회자의 생각과 입을 붙잡으셔서 하나님께서 필요한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도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중에 마음이 바늘구멍처럼 좁아서 아내를 미워하는 분, 남편에게 반감을 갖고 있는 분, 시어머니나 형제, 혹은 직장의 상사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 말씀으로 그런 분들의 마음이 넓혀져서 좋지 않은 감정이 다 풀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또 이번 한 주간 살면서 직장이나 가정에서 다툴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어떤 친구와 논쟁하게 될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 문을 넓혀 주시어 월, 화, 수, 목, 금, 토를 살면서 혹 그런 일을 당해도 ‘그럴 수 있지.’하며 다투지 않고 잘 넘어가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신비롭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앞 장을 잘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5장에서 고린도 교인 몇 사람에 대해 좋지 않게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귀한 사도가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고린도 교인 몇 명이 아름답고 숭고하고 예수님을 닮은 목회자 바울을 오해하고 좋지 않게 말했습니다. 바울이 그것을 걱정했습니다. 그들이 그런 말을 자꾸 퍼뜨리면 교인들이 손해를 보게 됩니다. 또 교회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새 교우들이 그 말을 들으면 바울을 통해 은혜 받지 못하게 됩니다. 목회자를 비난하는 것은 마귀의 역사이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목회자를 비난할 일이 있어도 기도해야지, 비난하면 그 비난이 누룩처럼 퍼지게 되고 교인들이 그 목회자를 통해 설교를 듣는데 손해가 많습니다. 좋지 않은 소문이 들리는 목회자의 설교를 듣고 어떻게 은혜를 받겠습니까?
여러분, ‘그 식당은 깨끗하고 귀하다.’라는 말을 듣고 그 식당에 가면 음식이 다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식당은 지저분하고 더러워.’라는 말을 듣고 그 식당에 가면 음식이 깨끗해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입니다. 좋은 교회, 건강한 교회는 아름다운 소문이 퍼지는 것입니다. 모든 목사, 장로, 교우들의 소문이 아름답게 퍼지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자기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지는 것을 그냥 두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우리를 스스로 자천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위해 그들의 입을 막을 수 있는 자랑거리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우리가 미쳤어도 예수님을 위해 미쳤고 우리가 온전해도 교회와 너희를 위해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일하는데 왜 우리를 비방하는 것을 그냥 두느냐? 그들이 그런 말을 못하도록 받아치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울의 마음에 남았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그 편지를 받고 그대로 그들에게 치받아 말하면,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이단자나 사이비가 아니라면 그들도 결국 천국에 가게 될 텐데 말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이렇게 믿어서 천국에 가겠나?’라고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걱정이고, 제가 믿기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하는 사도행전 2장 21절 말씀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생활이 너무 좋지 않은 사람이 많으니 경고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해석할 때 어떤 말씀은 경고로 받아야 되고, 어떤 말씀은 문자대로 해석해야 됩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으면 여기에 손과 눈이 남아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저부터 눈도 손도 다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경고로 한 말씀입니다. 성경은 전체로 풀어야 됩니다. 성경 전체로 보면 아무리 부족해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망할래야 망할 수 없고 지옥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 예수님의 뜻은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자를 한 사람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도 잃지 않으십니다. 여러분과 저를 잃지 않으십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바울에 대해 좋지 않게 말하는 사람들도 천국에 갈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에서 왕따를 당하면 안타깝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들이 왕따를 당하기 전에 그들을 고치려고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이는 '우리가 진솔하고 편하게 너희에게 말한다. 우리의 마음은 넓게 열려 있다. 언제나 너희와 화목할 준비가 되어 있다.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말하듯 너희에게 말한다. 그러니 너희의 좁은 마음을 넓혀라.'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모든 성도를 자녀로 보았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서 1년 6개월 동안 눈물과 기도로 교회를 개척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을 구원했습니다. 그러니 바울의 눈에는 모든 성도가 자녀로 보였습니다. 나이가 많은 성도나 적은 성도나 다 자녀로 보였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를 행복하게 하시는 목사님들은 교인들을 품어주며 자녀처럼 생각합니다. 승리하는 교인들은 목사님을 목사님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아버지로 생각합니다. 목사님의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말씀으로 나를 양육하는 믿음의 아버지’로 봅니다. 그런 교인들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백발이 성성하다면 여러분에게 “나를 아버지라 부르시오.”하기가 좋을 텐데 제가 젊어서 그렇게 말하기가 조금 미안하지만 지금보다 20년이 더 젊어도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팔순이시고 저희 어머니께서 섬기시는 교회의 전도사님은 삼십 대이십니다. 그래도 제가 어머니께 “어머니, 전도사님은 어머니의 아버지입니다. 어머니를 말씀으로 기르시는 아버지이시니 잘 해드리세요.”라고 종종 말합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녀에게 말하듯이 너희에게 말한다. 그러니 보답하는 양으로라도 마음을 넓혀라.”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생각해 보아라. 내가 거기에서 교회를 세웠지 않느냐? 그리고 내가 기도하고 복음을 전해서 너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찌 나에 대해 좋지 않게 말하느냐?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양으로 은혜를 생각해서 너희의 마음을 넓혀 나와 화목하도록 해라. 나에 대해 좋지 않게 말하지 말고 잘 지내자.’
여러분, 은혜를 기억해야 됩니다. 인간의 매력은 은혜에 감사하고 그 은혜를 갚으며 사는 것입니다.
사울은 농사꾼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면 자나 깨나 하나님을 섬겨야 될 텐데,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전쟁에서 이기니 자기 기념비나 세우고 예배도 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사울 왕은 망합니다.
그러나 다윗 왕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습니다. 다윗도 사울처럼 시골 사람이었습니다. 양치는 시골 소년이었던 그는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신 하나님께 “주밖에는 다른 복이 내게 없습니다.”하며 늘 감사하고 아침 저녁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 성전 지을 준비를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다윗을 계속 세워 주신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만 갚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에게도 은혜를 갚았습니다. 다윗 왕이 급하게 피난을 가느라 침상도, 그릇도 하나 없이, 양식도 하나 없이 맨발로 궁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하 17장에 보면,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자원하여 자기 재산을 헐어 왕이 쓸 침상과 대야, 그릇은 물론 꿀, 양, 치즈, 버터 볶은 곡식, 밀 등을 준비하여 갖고 와서 왕과 왕의 군인들을 다 대접합니다. 다윗 왕은 그것을 잊지 못해 바르실래의 아들 김함을 궁궐로 데리고 와 자기 상에서 먹게 하고 일평생 잘 대합니다. 그리고 열왕기상 2장 7절을 보면, 세상을 떠날 때 아들 솔로몬에게 이렇게 유언합니다.
“아들아,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 잘해라. 네 상에서 먹게 하고 잘 해주어라. 그가 내게 잘 해주었다. 내가 압살롬을 피해 도망갈 때 내게 잘 해주었다.”
다윗은 멋있는 사람입니다.
또 자기를 도와준 친구 요나단의 은혜도 잊지 않았습니다. 도움을 받으며 우정을 나누었던 요나단이 세상을 떠나서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니 그의 아들 므비보셋과 그 자자손손에게 은혜를 갚습니다.
은혜를 갚는 것이 인간의 매력인 것입니다.
1923년 9월 1일, 도쿄와 요코하마 주변에 큰 지진이 일어나서 20만 명이 죽고, 250만 명이 집을 잃었습니다. 일본이 대란을 만난 것입니다. 그때 미국은 아가페 사랑으로 일본을 도왔습니다. 미국이 국익을 위해 다른 나라에 피해를 주는 일도 있겠지만, 미국의 본 바탕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미국 국민들이 일본을 위해 양식과 구제품을 모아 엄청나게 큰 배 150척에 그것들을 싣고 가서 일본을 살렸습니다. 그때 일본의 히로히토 왕이 “미국 대통령과 국민 여러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일본은 미국의 고마움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친필로도 썼습니다.
그런데 1943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했습니다. 미국 때문에 살았는데 미국을 공격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이 아니면 우리나라는 공산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유엔군이 왔지만 특별히 삼사만 명이나 되는 미군이 우리나라에 와서 죽었습니다. 또 맥아더 장군이 목숨을 걸고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시켜 지금 우리가 있지, 그렇지 않았으면 여러분도 저도 지금 공산당 밑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려울 때 미국에서 옷과 양식을 보내주어서 그것을 입고 먹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거를 다 잊어버리고 미국을 싫어하는 것은 미국을 배신하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이 한국에 대해 배신감을 느낀답니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배신하면 안 됩니다. 은혜를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젯밤에 말씀을 준비하다가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들이 생각났습니다. 귀한 아버지 어머니, 저희 교회 담임 목사님이셨던 조제봉 목사님에 대한 고마움이 막 밀려왔습니다. 조 목사님께서는 제가 군에 갈 때 훈련소 앞까지 데려다 주시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 아내 김영숙이 제게 시집오지 않으려 할 때, 처가 식구들이 모두 저와 결혼하지 말라고 쌍수를 들고 결혼을 말릴 때 저는 기도실에 들어가 사흘간 기도하고 있었는데, 목사님께서 서울까지 올라가셔서 김영숙을 불러내어 “용수는 보통 인물이 아니다. 지금은 그래도 앞으로 크게 될 사람이니 용수와 결혼해라.”라고 하셨답니다. 그래서 제 아내가 저하고 결혼했답니다. 그 사실을 저는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제게 그런 귀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또 저를 위해 한 달간 우시면서 저를 도와주신 고마우신 선생님도 계십니다. 저는 그분들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또 제가 우리 장로님들 앞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기가 쑥스럽지만, 제가 우리 교회를 섬기는 22년간 우리 장로님들이 한 번도 저를 아프게 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무엇을 합시다.”라고 했을 때 “하지 맙시다.”라고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늘 “예, 합시다.”라고 하신 우리 장로님들의 고마움을 제가 잊지 못합니다.
여러분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오늘 여기에 계시기까지 여러분을 도와주신 분들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 전화도 하고 감사 편지도 쓰고 명절 때에는 양말 한 켤레라도 선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에 대해 좋지 않게 말한 사람들 중 몇 사람은 바울의 편지를 받고 아마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 아버지 같은 바울에게 우리가 함부로 했구나. 이런 목사님이 또 어디에 계신다고.’하며 미안해 하고 마음을 넓혀서 바울과 화목한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마음을 넓히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먼저 자신이 좋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져 보십시오. 항상 그 사람 때문에 괴롭습니다. 기도도 잘 되지 않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사람이 생각나면 밥맛이 없어지고 소화가 되지 않습니다. 잠을 잘 때도 그 사람이 떠올라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다 결국에는 자신의 몸이 망가지게 됩니다. 마음의 즐거움이 양약인데, 누구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으면 마음의 즐거움이 없으니 병들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밥맛도 좋고 잠도 잘 오고 그래서 먼저 우리 자신이 건강합니다.
한 권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신혼 초 입덧이 아주 심할 때 인절미가 그렇게 먹고 싶었답니다. 마침 그때 옆집 아주머니가 하얀 쟁반에 인절미를 담아 가지고 오셨답니다.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남편과 같이 먹으려고 밥상을 차려 놓고 거기에 그 인절미도 올려놓았답니다. 그런데 퇴근해 온 남편이 웬 떡이냐고 하더니 아내에게는 먹어보라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그것을 혼자 다 먹어버리더랍니다. 그런 남편이 얼마나 섭섭하고 괘씸했던지 회갑이 지난 지금도 권사님은 떡만 보면 섭섭하고 화가 난답니다.
그 권사님은 바보입니다. 그러면 권사님이 손해를 봅니다. 대개 남자들은 집에서 음식을 먹을 때 아내가 먹지 않으면 미리 먹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돈도 벌어서 아내에게 다 갖다 주지 않습니까? 그 돈으로 떡을 사먹든지 해먹으면 되지 않습니까? 혹 남편이 함께 먹자는 말을 하지 않아도 함께 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그런 것을 일일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기 혼자 마음속에 꽁 하고 먹지 않았다가 30,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섭섭해 하면 누가 손해를 봅니까?
따라 합시다.
“마음을 넓히자.”
얼굴과 생각이 다 다르고 교육 받은 정도와 환경과 입장이 다 다른데 모든 사람이 어떻게 같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 서로 이해하고 화목하는 길은 마음을 넓혀서 ‘그럴 수 있지, 뭐.’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그럴 수 있지. 아내가 그럴 수 있지. 시어머님이 그럴 수 있지.’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시어머니의 입장을 생각하면 시어머니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넓히면 우리 자신의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한 가족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끼리 다투고 싸우면 하나님께서 우십니다.
시편 133편에 말씀하십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형제가 연합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의 이슬도 주시고 복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미국의 제 동생 목사님과 저는 입의 사탕도 서로 나누어 먹고 속옷도 구별없이 입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니 달라졌습니다. ‘내 것, 네 것’ 구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동생은 어떻게 하든 저는 ‘내 동생인데.’하며 동생을 안아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도 있고 잘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내 동생인데.’하며 동생이 실수하고 잘못한 것도 덮어주고 동생을 위해 기도해주니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어제도 동생과 통화를 했는데 “형님, 형님!” “그래, 그래.”하며 서로 깊은 사랑을 나누며 행복해 했습니다. 그리고 형제가 이렇게 사랑하며 살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사는 맛이 납니다.
사람은 결국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 밭에 심은 것은 거기에서만 거두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동쪽에 심은 것을 서쪽에서 거두고 북쪽에 심은 것을 남쪽에서 거두기도 하고, 내가 심은 것을 자식이 거두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중국 오나라에 원앙이라는 유명한 정승이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나 부자들에게는 애첩을 두는 풍습이 있어서 원앙에게도 애첩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말단 공무원인 한 종사관이 원앙의 한 애첩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를 너무나 사랑한 그는 죽을 각오를 하고 그 여자를 몰래 만나 사랑을 나누다가 선을 넘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그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원앙은 장래가 창창한 젊은이가 한 여자 때문에 인생을 망치게 되는 것이 마음 아파 모른 척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도둑이 자기 발이 저리다고, 종사관이 도망을 갔습니다. 평생 도망자로 살면 그의 인생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원앙은 사람을 시켜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가 여자 때문에 인생을 망치려 하나? 그리고 자네가 사랑하는 여자는 하나뿐이지만 내게는 여러 여자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자네가 사랑하는 여자를 데리고 가서 잘 살게.”
남자가 자기 여자를 남에게 주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여자가 셋, 넷이라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원앙은 자기 애첩을 종사관에게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의 세월이 흐른 후, 오나라 왕과 정승 원앙의 사이가 극도로 나빠졌습니다. 원앙은 오나라를 떠나 이웃 한나라로 가서 벼슬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나라 왕과 원앙의 관계를 모르는 한나라 왕이 어떠한 일로 원앙을 오나라에 파견했습니다. 오나라 왕은 원앙을 죽이기 위해 특공대 500명을 보내어 원앙의 숙소를 에워쌌습니다. 이제 원앙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오나라의 병권을 맡은 대장이 달려와서 그 특공대원들에게 술을 주어 마시게 했습니다. 그 500명이 다 술에 취해 잠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대장이 원앙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상공, 어서 피하십시오. 왕께서 상공을 죽이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특공대 500명이 이곳에 진을 치고 있는데, 지금은 술에 곯아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어서 피하십시오.”
“그대는 뉘신데 나를 살리려 하시오?”
“상공께서는 저를 잊으셨나이까? 상공께서는 상공의 시녀를 제게 주시고 저를 살려 주셨나이다. 제가 바로 그 종사관인데 승진해서 지금은 대장이 되었나이다. 말 한 필이 준비되어 있으니 어서 피하십시오.”
그래서 원앙이 살았다고 합니다. 자기 마음을 넓혀 잘못한 부하를 용서해 주고 그 부하에게 자기 애첩까지 주니 나중에 자기도 살게 된 것입니다.
선한 끝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마음을 먹고 살면 세상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받게 됩니다.
제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깨끗하고 귀한 정삼수 목사님께서 시무하시는 청주 상당교회는 오래 전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이웃을 위한 사랑의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제 마음이 끓어올랐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오늘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사랑의 헌금을 할 것입니다. 교회 로비에 사랑의 헌금함이 있으니 자유롭게 헌금하시기를 바랍니다.
며칠 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두 자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지 않아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는 서울에 가서 살고 있는 두 자매의 이야기를 듣고 제가 울었습니다. 이번 헌금은 그 자매에게 전달할 것입니다. 다음 달에도 헌금해서 어려운 이웃에게 우리의 사랑을 나누려고 합니다. 저부터 구제하는 일이 적어서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사랑의 구제를 하려고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작은 일이지만 이렇게 마음을 나누는 것도 우리의 마음을 넓히는 것이 되어서 우리 겨레 중 어려운 사람이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또 언젠가는 그분들 때문에 우리가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마음을 가장 크게 넓힐 수 있습니까?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제 몸은 작아도 마음은 큽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대통령을 위해서 매일 기도합니다. 때로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울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구의를 껴안고 지구촌을 위해서도 매일 기도합니다.
마음을 넓히면 주님의 마음처럼 세계를 구원하고 싶은 마음이 막 끓어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제가 20명 정도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전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때로는 공항에서도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멋있는 차림으로 열심히 뛰고 있지만 그들의 마지막 종착역이 어디입니까? 죽어서 흙이 되고 없어지면 차라리 좋은데, 영원히 멸망 받아 지옥으로 들어간단 말입니다. 지옥에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모릅니다.
우리의 마음이 넓어지면 집안, 이웃뿐 아니라 세계 만민을 위해 기도하고 구원할 마음이 생기는 줄로 믿습니다. 생명은 귀합니다.
어제 제가 창문을 열었더니 ‘윙’하며 말벌 같기도 하고 파리 같기도 한 이상하게 생긴 벌레 한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만일 그것이 벌일 경우에는 쏘이면 문제가 되니 잡으려고 자세히 보니 벌도 아니고 파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내 방에 들어오면 마실 물도 먹을 것도 하나 없는데 왜 여기에 들어왔니? 좀 나가라.”하며 내보내 주려고 하는데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설교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 벌레가 제 책상에 앉았습니다. 살짝 신문을 내밀었더니 벌레가 신문에 올라타서 그것을 창밖으로 내보냈습니다. 그런데 다시 방으로 들어오더니 어디에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씀을 준비하다 보니 제 책상에 앉아 졸고 있었습니다. 애처롭게 보여서 ‘주여, 이 생명이 살게 해 주세요.’하며 종이를 옆에 두었습니다. 조금 후에 보니 거기에 올라 앉아 있어서 창밖으로 내보냈더니 그 때서야 날아갔습니다. 제 마음이 얼마나 시원했는지 모릅니다. 어차피 며칠 뒤에 죽을 벌레이지만 죽을 때 죽어야지 일찍 죽으면 마음이 아프지 않습니까? 또 제 방에서 죽으면 저도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정말 마음을 열면 벌레 한 마리도, 나무 한 그루도 귀하게 보이고 자연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만 그루의 나무보다 더 귀한 것, 천하보다 더 귀한 것이 사람의 생명입니다. 그 생명을 우리가 그냥 볼 수 없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이 넓으면 그들을 구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을 넓히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고무줄을 당겨 놓으면 원 상태로 되돌아가듯이 우리 마음을 넓혀 놓아도 또 좁아지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넓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119편 32절에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리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넓혀 주세요.”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넓혀 놓으시면 넓은 마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마음을 넓게 열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