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이전 한반도 한강유역으로부터 중남부지방에 걸쳐 형성되어 있었던 여러 부족에 대한 통칭.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을 말한다. 삼한의 지리적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마한은 한강유역으로부터 충청·전라도에 걸쳐 있었으며, 진한은 경기·강원도 일부, 변한은 낙동강유역 경상도에 비정된다. 삼한사회에 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기록은 《후한서》 <동이전(東夷傳)>이며, 이를 부연하여 정리한 것이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이다. 이에 의하면 마한은 55개,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개의 소국으로 구성되었다.
형성
《사기(史記)》 <조선전>과 《한서(漢書)》 <조선전>에 의하면 BC 2세기 경까지도 한반도 중남부지역은 <진국(辰國)> 또는 <중국(衆國)>으로 기록되었으며, 진한 또는 삼한 모두가 이 진국으로부터 발전된 것으로 되어 있다. 삼한의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견해가 다양하나, 종래 마한족·진한족·변한족의 별개 종족집단이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이주, 정착하여 이루어졌다는 주장보다는 선주토착집단의 점진적인 발전 결과로 삼한이 대두하였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고고학적 자료를 근거로 할 때 한강유역을 경계로 남부지역이 특색있는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한 때는 청동기시대이며, 이들이 <한족(韓族)>으로 불리게 된 것은 초기 철기시대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따라서 <한>이라는 칭호가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와는 별개로 한족사회의 형성과 토착화과정은 청동기문화 단계에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삼한과 소국(小國)
삼한사회를 구성하는 기본단위인 각 소국의 형성과정은 민무늬토기문화 단계의 대소규모 단위집단들이 다수 통합되어 단일한 정치집단으로 기능하게 되는 역사적 발전과정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삼한사회의 70여 소국들은 지역과 문화배경, 형성 주체에 따라 시기와 과정이 다양하게 대두하였다. 종래 삼한의 각 소국들은 <부족국가>로 통칭되어 왔는데, 1970년대 이후 고대국가의 기원을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성읍국가(城邑國家)> <읍락국가(邑落國家)> <군장사회(君長社會)>와 같은 새로운 용어와 개념의 설정이 시도되고 있다. 실제로 마한·진한이 지역별 소국연맹체(小國聯盟體)로 성립된 것은 철기가 보편화된 1세기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소국의 구성과 지배기능
마한은 삼한의 기간(基幹)으로서 가장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는데, 목지(目支;지금의 稷山)·백제(伯濟;慶州지방이 중심임) 등 54개국의 지역적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다. 마한의 각 소국의 총 호수는 10만여 호였으며, 큰 나라는 1만여 호였고 작은 나라는 수천호였다. 특히 목지국은 진국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그 왕은 진왕(辰王)이라 일컬어 마한 여러 나라의 맹주처럼 군림하였으며, 삼한 초기에는 진왕의 세력이 진한·변한에까지 미쳤다고 한다. 진한과 변한은 총 호수가 4∼5만인데, 큰 나라는 4000∼5000호였고 작은 나라는 600∼700호에 불과하였다. 이와 같은 삼한 78개의 소국은 다수 읍락(邑落)을 포괄하는 씨족적 지연집단(地緣集團)으로서, 국읍에는 소국의 규모에 따라서 신지(臣智)·험측(險側)·번예(樊濊)·살해(殺奚)·읍차(邑借) 등의 정치적 통솔자를 세우고 대내외적으로 단일한 단위집단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다. 국읍의 주수(主帥)는 읍락간의 교역과 소국간의 교역활동을 주관하는 경제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고, 읍락 거수(渠帥)가 개별적으로 행사하던 군사력을 전체적으로 통솔하는 군사책임자였다. 이와 함께 마한의 여러 국읍에는 정치를 맡은 군장 이외에 천신을 제사하는 <천군(天君)>을 두어, 5월과 10월 곡식의 파종과 추수가 끝날 때마다 행하는 제천의식(祭天儀式)을 주관하게 하였다. 정치·경제적인 지배권력 못지않게 종교적인 영향력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던 이러한 상태는 국읍의 지배권력이 미약한 초기단계의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며, 제정(祭政)이 기능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삼한사회의 지배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 뒤 BC 2세기 이후에는 정치적 지배기능만을 가지는 새로운 성격의 지배자가 대두되기 시작하여 삼한사회의 보편적이고 주도적인 지배세력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이러한 변화는 철기문화의 보급을 배경으로 단위집단 지배자로서 제사장의 기능보다 정치·군사적 통솔자로서의 구실이 중요시된 전반적인 추세를 반영한다.
소국의 성장과 삼한의 분립
삼한에서는 철이 많이 산출되었는데, BC 1세기 후반 이래 철기사용이 보편화되고 철을 매개로 활발한 물자교역이 전개되면서 각 집단간의 세력격차가 심화되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인 변화를 배경으로 소국의 정치적 지배기능의 강화와 새로운 편제질서의 확립이 이루어졌다. 국읍의 주수는 유력한 읍락과의 혼인, 교역의 성공적 수행, 대외국적인 군사활동의 전개를 통하여 지배권력을 강화하고, 거수를 지배세력으로 흡수하면서, 읍락집단에 대한 통제력으로 한계를 극복하게 된다. 또 군대지휘, 조세징수와 관리 등 중요 통치기능이 전문화되면서 지배조직의 체계화도 진행되었다. 이와 동시에 소국의 대내적 성장과 대외적 팽창, 무력대립 등에서 상승작용을 거듭함에 따라 지역별로 유력한 소국을 중심으로 소국연맹체가 대두되었다. 그 중에서 변진(弁辰)의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구야국(狗邪國)·안야국(安邪國)과 같은 소국들처럼 5∼6세기 무렵까지 독자적으로 존속한 것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일정한 맹주국을 주축으로 하는 지역별 소국연맹체의 구성원으로 편제되어 2, 3세기경에는 경주사로국을 중심으로 하는 진한 소국연맹체, 한강 유역의 백제국 중심의 소국연맹체, 마한지역의 목지국 중심의 소국연맹체로 통합되었다.
산업과 풍속
삼한은 평야가 많고 토지가 비옥하여 일찍부터 벼농사가 행해졌고, 수리시설로서 저수지가 많이 마련되었으며, 길쌈과 양잠도 널리 행해졌다. 목축도 성했으며 해안지대에서는 어업이 성행하였다. 혼인과 예절에 있어서 남녀의 구별이 있었으며, 법과 형벌은 일반적으로 엄하였다. 장례는 대개 후하게 지냈는데, 마한에서는 장사에 관(棺)만 쓰고 곽(槨;外棺)을 쓰지 않았으며 소와 말을 순장(殉葬)하는 풍속이 있었다. 변진에서는 큰 새의 깃털을 장례에 사용하고 죽은 자가 승천하는 것으로 믿었다 한다. 남부지방에서는 남자 가운데 편두 및 문신(文身)을 하는 풍속이 있었는데 이것은 남방 해양족속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한의 여러 나라에서는 소도(蘇塗)라고 하는 신역(神域)을 두고 제사하였는데, 소도는 도망하여 들어간 죄인도 잡지 못할 정도로 법률의 힘이 미치지 못하던 곳이었다. 이러한 삼한의 풍속은 뒷날 신라·백제·가야문화의 기초가 되었다.
첫댓글 예전에 최두환선생님께서, 고구려의 최후를 맞은 '목저성'에 대하여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고대의 마한지역에 이름이 유사한 목지국이라는 것을 발견 했습니다...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삼한은 평야가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해안지대의 기록도 보임으로써, 산악지대인 중앙아시아와는 거리가 좀 있었던 듯 싶습니다..
또한, 결혼의 제도가 있고, 남녀의 구별이 있었다고 기록됩니다... 그렇지 않은 집단도 많이 있었나 봅니다...
진한(辰韓) : 《삼국지》 <동이전>에 의하면 진한과 변한(弁韓)은 섞여 살았다고 하는데 대체로 변한은 낙동강 하류유역과 서쪽지방에, 진한은 낙동강 동쪽지방에 형성되었으리라고 추정되며 언어·풍속·의식주 등이 서로 같았다. 청동기와 철기문화가 유입되면서 위씨조선계(衛氏朝鮮系) 유민과 토착민이 정치·경제적으로 불안전한 균형상태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진한이 나중에 신라로 바뀌게 됩니다... 바로 이 낙동강이 Astrakhan이 있는 '볼가강'이 아니겠습니까? 가야는 바로 그 아래 낙동강하류, 신라는 낙동강 동쪽, 너무나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그곳이 바로 진한이며 신라가 됩니다...
볼가강에 무슨 금이 넘처 나나여 금과 철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를 대충 위치로 보나여.. 모든게 맞아야 합니다. 몇가지 맞다고 그곳이다 말이 안되져
불가강 신라라면 백제랑 어찌 싸우나여 좀 말이 되는 걸 말야해 하져
볼가강 서북쪽이 모두 불가족이었습니다... 불가족의 범위는 생각보다 상당히 광범위합니다... 백제의 영역도 그렇다고 봅니다... 이동하는 역사입니다... 삼국은 엄밀히 유목문화입니다...
해당위치에서 가야->신라->금->후금->청까지 유사점이 너무 많아요... 이제는 거부할 수 없는 대세입니다... 여기에 맞춰서 해석을 해야 합니다... 별자리를 통한 해석도 일치를 합니다... 금과 철을 함께 찾아 봅시다... 이 지역에서 나와줘야 말이 되긴 합니다..^^..
동서양의 문헌을 찾아보면 볼수록, 확신이 더욱 강하게 듭니다... 김규형님이 자신있다면, 저의 확신을 산산히 깨줘 보십시요..^^...
금과 철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백제의 본토는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입니다. 고구려가 있는데 백제가 무슨 말이 되나여
주요 철광석 매장지는 우랄 지역, 쿠르스크 지방, 콜라반도, 동시베리아 지역, 극동지역,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에 분포해 있다. 이러한 막대한 철광석 생산량을 바탕으로 우랄·쿠르스크·쿠즈네츠크 지방에는 대규모 철강공업이 발달하였고, 도처에 크고 작은 철강공장이 들어서 있다. 그밖에 비철금속은 우랄 지역(망간 ·크롬 ·니켈 ·코발트 ·구리 ·납 ·아연)과 시베리아(망간 ·티탄 ·니켈·몰리브덴 ·텅스텐 ·구리 ·납 ·아연) 및 극동지역(텅스텐·금·다이아몬드·주석 ·납 ·아연)에 집중 매장되어 있다
카스피해 부근도 철이 있을 수 있네요....
건국초기부터 현 동북3성의 동부지역의 천연자원의 개발이용과 고구려 이래의 농업과 수공업의 발전, 주변국들과의 대외교역을 확대하여 국력증대를 기하였던 것이다. 주로 생산되는 명품가운데서는 위성(位城)의 철, 현주(顕州)의 포(布), 노주(盧洲)의 벼, 옥주(玉州)의 면(綿) 등이 있었으며 특히 위성은 중경현덕부 내의 가장 큰 현성으로써 제철산업의 중심지의 하나였다고 한다. 이는 고구려의 발달된 기술을 이어받아 제철기술이 매우 높은 수준 이였으며 발해 멸망 후 거란은 발해유민들을 주요 철 생산지에 집단 이주시켜 제철산업에 종사시켰다
발해의 산업을 말하는 것으로 쿠르스크는 러시아 서부입니다. 발해의 영토이며 후 거란의 영토입니다
신라의 기후가 절대 볼가강과 다릅니다
현재와 수백년전의 기후는 상당히 다릅니다...
중국이 철의 주 산지입니다
현재의 관점이네요... 예전에는 철을 생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의 주요 산지가 되었을 수는 없을까요?...
저의 관심은 현재가 아니라 2000여년전의 철의 주산지가 어디였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수천년전에 철을 쓰면 얼마나 쓸가여.. 지금처럼 많이 않쓰죠 그러니 그렇게 말하면 문제가 있죠 철을 다 소비했다고 말하기엔
기후는 잘 변하지 않죠. 내륙지방의 사막화가 변수이긴 한 데, 사막화 빼고는 20세기 초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고 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