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나 기제사를 지낼 때면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어제는 집안 대소간이 다 모여 성묘를 하면서
어김없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고...
6.25 이후 얼마나 찢어지게 가난했던지
장가도 못들고 남의 집에서 머슴을 살던 홍총각은
아버지 기일이 되어도 제사를 올릴 수가 없었다.
제수를 장만할 돈도 없고,
제상을 차릴 줄도 몰랐고,
축지방을 쓸 줄도 모르고...
그러나 출천지효자(出天之孝子)인 홍총각은
기일이 되면 어느 서당촌장께 부탁하여 겨우 얻은 지방을
가슴에 품고 아버지 산소에 올라 두 번 절을 하고는
"아부지! 지가 못나고 박복해서
일년에 한 번 드리는 제삿날에도
음식 한 접씨를 못해 올립니다요.
그러니 저를 따라 장터거리로 가입시다요.
거기서 드시고 싶으신 것 실컷 잡수시쇼잉!"
이렇게 말씀을 고하고는 지방을 저고리 안 섶에 달고
조심조심 산을 내려와 장터거리로 향했다.
떡집 앞을 지날 때는 저고리 앞섶을 제치고
"아부지, 떡 잡수쇼잉."
푸줏간을 지날 땐
"아부지, 고기요 실컨 잡수쇼잉"
이렇게 과일가게며 술집, 어물전 그리고
심지어는 엿판이나 묵판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맛을 보여드렸다.
그러다가 어촌에서 도회로 가는 어물차가 지나기에
얼른 저고리 섶을 들추고
"아부지, 저그 어물차 오는구먼요.
실컷 잡수쇼잉!" 했는데
정작 차가 가까이 왔을 때 보니
어물차가 아니고 똥차였단다.
홍총각 기가 막혀 저고리를 벗어 거꾸로 들고
"아부지 얼른 토하시쇼잉! 얼릉요!" 하며
방방 뛰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홍총각이 주인(실지 인물 이 종국씨)에게
실토한 것인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곁가지인지 모르겠으되
우스개같지만 그 효성과 용기가 감동을 주기도 한다.
젯상을 아무리 걸게 차린들 죽은 사람이 와서 먹을까만
우리 시댁 같은 경우는
젯상을 차리고 제사를 모신 후에
반드시 그분 살아계실 때의 이야기로 꽃을 피우곤 한다.
그 시절 사람들의 생활상이라든가
한약방을 하시며 있었던 일화라든가
부모님(우리로선 할아버지 할머니)께 어떻게 효도를 하셨다던가
(아버님 형제분이 네 분이신데 현재
김제군 성덕면에 4형제 효자비가 세워져 있다)
한 얘기 또 하고 또 해도 지칠 줄을 모른다.
돌아가시고 안 계시니 안타깝도록 그리운 것이겠지
만일 지금까지 살아계셔서 어느 아들이 모셔야 했다면
며느리들 분명 불만도 많았을테지만......
그렇더라도 아버님이 살아계셔서
"아가, 세째야!" 하고
불러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버님!" 하고 부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존경하는 울 님들께서는 좋은 아들 딸 노릇하고 계시죠?
부모님 안계신 저같은 사람이
님들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 있지 마시고
계실 때 잘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