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그 기쁘고 슬펐던 날들이여!
홍옥숙
오랜만이다.
예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창동분식’의 우동과 김밥을 먹으면서 못내 감회가 새롭다. 찌그러졌던 냄비가 새것으로 바뀌고 옛날 간간히 마주치던 총각이 중년 티가 날 법한 새 주인이 되어 바쁘게 움직이고 있으니 참 많은 시간이 흐르긴 했다. 하기야 그때 초등생이던 막내가 30살씩이나 되어 엄마를 대접한다고 지금 이렇게 마주 앉았으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아마 지금의 주인도 예전 주인할머니의 막내아들이지 싶다.
골목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을 뿐더러 상권을 많이 뺏겨버린 곳이면서도 문을 닫지 못하는 것은 나 같은 만년단골들이 꾸준히 찾고 있는 이유도 있을 것 같다.
언제던가 일본에서 겨울을 나게 되었을 때, 늘큰한 국물의 일본우동을 먹으며 나는 이 집의 김밥과 우동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이 골목의 냄새까지도 그리워서 골목길을 걸을 때면 코를 킁킁거리기도 했었으니까.
마산은 골목문화의 대명사다. 그래서 근대역사의 격랑 속에 마산이 움직이면 막을 수 없다는 말이 생겨났다고도 한다. 물론 마산사람들의 기질도 있겠지만 골목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말이다. 지금은 합성동에 그 자리를 내어주었으나 오랫동안 번화가의 자리를 지키던 창동거리는 특히 골목들로 유명한 곳이다. 거미줄 같은 수많은 골목에서 문화와 사랑의 꽃이 피어났었다. 허나, 모든 것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인지라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진 지금의 골목들은 흘러간 영화의 포스트를 연상시키고 있다.
골목마다 사람들이 넘쳐나고, 거기에 들어앉은 찻집과 상점마다에도 사람들로 채워지고, 더구나 예술인들의 아지트였던 고모령이 있던 창동골목, 그 골목들이 아련하다.
스스로 창동허새비라 칭하며 뒤틀린 몸으로 골목을 누비던 뇌성마비 시인 이선관, 문예지 추천이나 신춘문예 같은 어떠한 형식도 취하지 않고 문단에 나왔으며 비록 장애를 가진 몸이었으나 온몸을 바쳐 세상의 부당함과 불의에 저항하는 글을 썼던 시인이다. 마산의 변두리인 추산동의 월셋방을 전전하며 외롭게 살다간 그였지만 <애국자>를 비롯한 주옥같은 그의 시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읽는 이의 가슴을 뜨겁게 적실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또 한 사람, 강원도 홍천에서 마산으로 내려와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리어커 행상까지 해가며 비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창동골목에 나타나던 최명학 시인, 오로지 재능만으로 비중이 묵직한 ≪월간문학≫ 추천시인이었던 그는 50중반의 나이로 아깝게 생을 마쳤지만 감성 짙은 그의 시 <소곡(小曲)>은 알게 모르게 지금도 많은 이에게 사랑받고 있음이랴.
사람이 사람과
사는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는 사람은
알 일이다.
꽃이 저를 흔드는
바람의 뜻을 모르듯
사람은 사람이
곁에 서 있는
뜻을 모른다.
흔들흔들 흔들리며
꽃이 살아 있듯
부대끼는 슬픔으로
사람은 산다.
— 최명학의 <소곡(小曲)>
언제 읽어도 새롭게 일어나 흔들리는 삶의 슬픔, 그리고 사랑의 슬픔이여! 그는 자신의 시처럼 살았고, 또 그렇게 갔다.
그리고 ‘달빛사냥꾼’이라 불리며 늘 술에 취해있으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말로 곧잘 사람을 당황시키던 허청륭 화백이, 그 날도 술이 취한 채로 이 골목의 어디에선가 나에게 던진 말,
“수필도 문학입니까?”
나는 이들에게서 향기를 맡았다. 진한 삶의 향기, 사람의 향기였다. 생각컨대 그것은 내 젊음의 향기와 다르지 않음이다. 분명 기쁜 날들이었고 소중한 날들이었음에도 덜 아문 상처같이 아프기도 하다. 덜 아문 상처같은 아픔도 있다.
겉포장은 그럴듯했기에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지만 사실은 정신과 상담을 받을 만큼 그즈음의 내 생활은 늘 불안 초조의 연속이었다. 지금도 환영처럼 보이는 것은, 쓰라린 위를 움켜쥐고 장군동의 우리 집 뒤에 있던 내과병동 복도에서 이름이 호명되기를 기다리며 유령처럼 앉았던 내 모습이다. 수면내시경도 없던 시절, 일 년에 두 번씩은 위내시경검사를 받으며 괴로움에 몸서리치던 날들이었다.
계절이 오는지 가는지도 잊고 살았다. 그날도 병원진료를 마치고 약국 앞에서(그때는 병원 안에 약국이 있었다.) 약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무심히 창 너머를 바라보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병원 뜰에 서있는 나무들의 노랑 빨강 잎들이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그때 내 입에서 흘러나온 말,
“아, 가을이구나!”
듣기에 따라서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나의 상심 내지 상처는 눈물이 고일 정도의 큰 것이어서 젊은 나이의 내가 왜 이렇게밖에 살지 못하는지 한탄치 않을 수 없었던 날들…. 그러면서도 꾸준히 창동골목을 드나들면서 이 집의 우동을 먹으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글을 썼다. 그것은 어쩌면 절벽으로 떨어져버릴 것만 같은 위태로운 내 삶의 유일한 외줄 같은 것이었다. 사랑이었으며 삶이었으며 그리고 그밖의 모든 것이었다.
그렇게 마산에서의 내 시절은 아름답고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슬픈 것이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이라 했던가. 세월은 갔어도 창동골목에서의 수많은 추억들을 떠올리면 방금 놓쳐버린 버스처럼 손에 잡힐 듯 아쉽고 애틋하기만 하다.
마산, 그 기쁘고 슬펐던 날들이여!
위태롭던 청춘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