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5일(연중 제27주일) 성실함과 믿음
“주님, 당신께서 구해 주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폭력이다!’ 하고 소리쳐야 합니까? … 어찌하여 제가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재난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제 앞에는 억압과 폭력뿐, 이느니 시비요 생기느니 싸움뿐입니다.”(하바 1,2-3) 약 3천 년 전에 한 예언자가 하느님께 한 불평이고 하소연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게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모든 이가 공정과 정의를 원하는데 그것은 일부 사람들의 입에만 있을 뿐 실제 우리 삶에는 없는 거 같다.
불의한 현실과 자연재해로 가난한 이들만 고통을 겪는 거 같아서 공의롭고 자비로운 하느님이 계신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무신론자들의 주장에 딱히 반박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한다. 그런 현실 앞에서 그냥 눈만 껌뻑거리고 있어야 할 거라고 말했던 교수 신부님 말이 기억난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하느님이 안 계신 거 같은 불의한 현실 속에서도 정의와 공정을 부르짖고 실천하며 끝까지 하느님 계명에 충실한 의인들이 있다. 그들은 하느님 말씀 때문에 수고하고 고생을 많이 했다. 때로는 불의하게 살해당하기도 했다. 그런 이들을 보고 사람들은 안타까움과 미안함으로 그들을 애도하기만 할 뿐이고 용기가 없는지 믿음이 부족한지 그들의 삶을 바꾸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헛수고라고 냉소하기도 한다. 의인들은 수고하고 고생하고 불의하게 죽임을 당했지만 그들의 내면은 평화로웠고 자신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을 거다. 오래전에 이미 지혜서는 의인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지혜 3,1-3)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하바 1,4) 바오로 사도는 이를 이렇게 해석했다.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로마 1,17) 성실함과 믿음을 같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이겠다. 한결같을 수 있는 건 깊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불의하고 불공정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자녀답게 산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비난하고 불평해 봐야 내 입만 더러워지고 마음만 어두워질 뿐이다. 세상은 본래 어둡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빛이라고 고백하고, 우리의 착한 행실로 빛을 내서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아보게 하라고 하셨겠나.(마태 5,16) 우리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사회정의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것을 뛰어넘는 하늘나라 시민법을 따른다. 원치 않는 임신이라도 그 태아는 내 소유물이 아니다. ‘태어난 사람이 태어날 사람을 차별대우해서는 안 됩니다.’ 생명을 위한 기도 중에 한 교우가 들고 있던 피켓 내용이다. 임신이 안 된다고 억지로 인위적으로, 다른 수정체들을 세포 정도로 여기며 마구 버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살인이다. 임신 때문에 고통받는 여성과 가족의 아픔을 모르지 않는다.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살인에 동의할 수는 없다. 사유재산권은 절대적이지 않다.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동선이 우선하기 때문에 공동선을 위해서 사유재산권이 제한되기도 한다. 이 밖에도 우리가 알고 지켜야 할 사회교리가 많다. 우리는 성당 안에서만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도 하느님의 자녀다. 아니 성당 밖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더욱 빛을 내야 한다. 주위가 어두울수록 빛이 더 빛나는 법이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로 바르게 살아가는 데 걸림돌은 사회교리 지식이 부족한 거 말고 또 다른 게 하나 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늘 부족한 거다. 믿음이다. 예수님 말씀이 진리고 생명이고 우리 모두의 참된 평화라는 믿음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배운 대로 실천하려고 하면 응원보다는 방해가 더 많다. 반대, 예상보다 더 많은 요구, 어려움, 무관심 등이 그런 것들이다. 사람들이 산에 버린 쓰레기를 기분 좋게 주워 왔는데 입구에 있던 쓰레기통이 없어졌다. 그러면 그 쓰레기들을 집으로 가져와서 처리해야 한다. 예상보다 더 많이 수고해야 하고 내 것도 내어놔야 한다. 용기 내서 어렵게 시도한 선행인데 그런 난관에 부딪히면 실망하고 포기하고 원망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하고 싶지 않게 된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들 때가 내 믿음이 도전받지만 동시에 굳건해질 수 있는 기회다. 사실 하느님 말씀은 선택이 아니라 복종해야 할 구원의 법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리고 세상이 그러거나 말거나 교회에서 배운 대로 믿는 대로 끝까지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 때에 사도들이 그랬던 거처럼 우리도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하고 청해야 한다. 그래서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라고 자연스럽게 대답할 수 있게 될 거다. 그런 의인들을 하느님이 얼마나 더 사랑하시겠나!
예수님, 믿음이 부족한 저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어린이처럼 단순하게 믿고 의인처럼 순교자처럼 용감하게 실천하겠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목숨보다 소중한 이 믿음을 지켜주시고 계속 커지게 도와주소서. 아멘.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