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인 문태준의 출현은, 시가 시인에 의해 얼마든지 새로워질 수 있는 말의 향연임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해주어 즐거웠다. 그러나 심사 과정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수상작은 결국 일종의 상대평가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독자적인 절대의 세계로 자신의 개성을 확고하게 구축해온 적잖은 시인들이 양보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진급의 최하림. 김명인 그리고 중견급의 문인수. 김신용 등의 작품도 결코 만만찮은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모든 욕심을 비워 이윽고 그 몸 자체가 가볍게 자연과 하나의 지경을 이룬 듯한 최하림의 시는 인생의 서늘한 시간들을 조용히 보여 준다. 그러나 풍경으로서의 자연을 뛰어넘지 않음으로써, 혹은 그 속으로 깊이 침잠하지 않음으로써 시인만의 시적 자아에 비교적 무심한, 표표한 시편들은 어딘가 달관의 수상(隨想)을 즐기는 듯 한 인상이다. 시인에대한 기대가 큰 탓일까, 아쉬움이 남았다.
삶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진정성이 돋보이는 시 세계를 경구적 통찰을 통해 꾸준히 선보인 김명인에 대한 안타까움도 절실하였다. 시적 대상들과 시의 정신사이에 통일감이 더 분명하였으면 이해의 감동이 높았을 것이다.
문인수의 시도 갈수록 진경에 이르고 있다는 점에 모두 같은 의견이었다. 특히 사물 하나하나에 쏟는 애정과 그 묘사의 깊이는 탁월하다.
한편 노동자 시인 김신용의 등장은 작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가 충격일 수 있는 것은 한때 지게를 졌고, 지금도 비슷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그의 현실에 있지 않다. 놀라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가 상당한 상상력과 상징의 교환을 자유롭게 행하고 있는 우수한 시인이라는 사실의 재발견이다.
좀 더 집중이 이루어진다면, 우리 시는 그로 말미암아 매우 넓은 진폭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수상시인 문태준에 대해서는 오직 상찬과 격려만이 필요한 단계이다.
이 젊은 시인의 앞날이 어떤 변모를 보일런지 아무도 알 수 없으나 ‘누가 울고 간다’‘가재미’ 연작 등이 보여주고 있는 말의 탱탱한, 유장한, 서늘한, 그러면서도 유머러스한 행진은, 그 맞은 편에 놓여 있는 답답한 일상에 홀연히 생기를 불어넣어준다. 특히 동사를 크게 활용하는, 흐르는 상상력이 자기갱신의 힘을 발휘한다.
문태준이라는 서정 시인의 탄생은 우리 시를 위무의 성소(聖所)로 이끄는 언어의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