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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고후 7:8-16
8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12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13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
14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가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15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16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
고후 7:8-16 / 내가 지난번에 보낸 편지가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한 데 대해서 한때는 후회한 일도 있었지만 이제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편지가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잠시뿐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9) 이제 나는 그 편지 보낸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상처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상처의 고통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좋은 의미의 슬픔이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그러한 슬픔을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왔으니 결국 우리가 여러분에게 해를 끼친 것은 아닙니다. 10)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죄에서 돌아서서 영원한 생명을 찾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슬픔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런 슬픔을 비관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슬픔은 참다운 회개의 슬픔이 아닌 까닭에 영원한 죽음을 막아 내지 못합니다. 11) 주께서 주신 이 슬픔이 얼마나 여러분에게 유익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더 이상 어깨를 움츠리지 않고 진지해졌을 뿐만 아니라 성의를 갖게 되었으며, 내가 지적한 죄를 짓지 않으려고 열심으로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난 원인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나의 도움을 바랐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서 죄지은 자를 처벌했을 뿐 아니라 그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12) 내가 그 편지를 보낸 것도 실은 여러분이 얼마나 우리 일에 마음을 쓰고 있는가를 주께서 보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죄를 지은 자나 피해를 입은 그의 아버지를 돕는 것 이상의 목적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13) 이렇게 해서 여러분의 사랑은 우리의 힘을 북돋아 주었는데, 거기다가 또 디도를 따뜻하게 영접하고 평안하게 해주어 기쁨을 안고 돌아오게 해주었으니 그 기쁨은 이루 다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14) 디도가 떠나기 전에 내가 여러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한 말대로 여러분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나는 언제나 여러분에게 진실을 말해 왔습니다. 그리고 디도에게 자랑한 것도 이제 진실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15) 디도는 여러분이 기쁜 마음으로 자기 말을 듣고 간절한 마음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자기를 맞이해 준 일을 회상하고 전보다도 더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16) 이제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간격도 없어져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을 완전히 신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낸 것을 후회했습니다. 내용이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닌지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편지 때문에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편지를 받은 고린도의 성도들이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8-13) 바울은 먼저 쓴 편지에서 고린도 교회의 잘못을 지적한 준엄한 편지를 디도편에 보냈습니다. 충고를 들으면 마음이 아픕니다. 굉장히 아플 내용의 편지가 전달된 것 같습니다. 바울이 “근심케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8).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조금도 후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책망으로 고린도의 성도들은 잠시 근심했지만, 근심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죄를 발견하고 회개했습니다(9). 근심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고, 세상 근심이 있습니다. 세상 근심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을 위해서 근심하는 것입니다. 이런 근심은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줍니다(11). 바울은 먼저 쓴 편지를 고린도 교회에 보낸 이유를 밝힙니다. 고린도의 성도들이 바울의 일행들을 위한 마음이 간절해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12). 바울의 선교를 위해서 고린도 교회의 중보와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의 성도들은 바울의 책망으로 바울을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바울을 사모한다는 말을 듣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더욱이 디도가 그들에게 갔을 때 그들은 디도를 환대하였습니다. 이것이 바울에게 더욱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13).
디도 앞에서 우리가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14-16) 바울이 책망의 편지를 보낼 때, 디도의 걱정도 많이 한 것으로 보입니다. 편지를 보고 화가나서 디도를 쫓아낼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리 디도에게 고린도 교회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많이 자랑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의 성도들이 회개하자 바울은 디도에게 고린도의 성도들을 자랑한 것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되었습니다. 모든 자랑이 참되었기 때문입니다(14). 우리가 누군가를 칭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만나보니 모두 거짓이었다면 실망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감사의 마음으로 바울의 편지를 받아들였고, 고린도의 성도들이 두려움과 떨림으로 디도를 영접하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며 디도는 고린도의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더욱 깊어졌습니다(15). 바울은 또한 고린도의 성도들을 신뢰한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16).
적용: 고린도의 성도들은 바울의 편지를 통해 죄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향한 근심을 하며 변화되었습니다. 당신은 세상 근심들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어느 날 욕심 많은 여우가 포도밭을 지나가다 담 너머로 탐스럽게 익은 포도 열매를 발견했습니다. 여우는 포도밭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모색했고 울타리 사이에 난 구멍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여우는 구멍 사이로 들어가려 했지만 여우의 몸이 구멍보다 컸기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여우는 꾀를 내어 사흘을 굶어 몸이 구멍을 통과할 정도로 홀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성공적으로 구멍을 통과해 포도를 실컷 먹었습니다. 배부른 여우는 다시 포도원을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빵빵해진 배가 구멍에 걸려 나올 수 없었습니다. 결국, 여우는 사흘을 다시 굶어 몸이 홀쭉해져서야 포도밭을 나올 수 있었습니다.
< 설 교 >
사방으로 환난을 당할 때
고후 7장 05~16절 / 오정호목사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한 우리는 고통을 피할 수 없다’-토마스 아켐피스-
사람은 누구나 고난과 동행합니다. 문제는 고난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 고난의 현장에서 얼마나 주님을 찾고 경험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성도의 삶의 현장에 고난이 있고,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 실존하지만 주님은 비천한 자 즉, 실의에 빠진 자, 낙심한 자를 만나주십니다. 사도바울은 그의 고난과 환난의 현장에서 비천한 사람을 돌아보시고, 위로하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속에 일어나는 문제 가운데 우리를 위로하시고, 고난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십니다.
사람을 통하여 위로하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로하실 때 사람을 통하여 위로 하십니다. 사도바울은 겸손하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6절) 어려움 가운데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섬겼던 고린도 지역은 영적으로 참으로 어려운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가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성도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모여서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주님을 성실하게 따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가운데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불순종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사도바울은 디도를 통하여 편지를 보냅니다. 그 편지는 권면의 편지였습니다. 성도들을 일깨우는 편지였습니다. 또한 책망의 편지였습니다. 편지를 보내면서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주의 자녀답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기다리던 끝에 돌아온 디도는 말씀을 받고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걱정과 두려움에서 놓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디도를 통해 내가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게 되었도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는 하늘의 대사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과 뜻이 있어서 우리를 가족의 구성원으로,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로, 직장의 세우신 것입니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살전 5:14) 사도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가지고 오래 참으라고 교훈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도우심과 축복과 위로의 도구로 사용 받으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의식하고 사는 사람은 열매가 다릅니다. 삶의 태도가 다릅니다. 사명을 가진 자는 남다르게 삽니다. 목적이 분명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세우셨는가에 대해서 거룩한 질문을 가지고 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자기 정체감을 가지고 살아갈 때 세상은 우리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남에게 상처를 주는 도구로 쓰임 받으면 안 됩니다. 오히려 위로를 해야 합니다. 형제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합니다. 눈물 흘리는 형제자매들이 눈물이 씻김 받기를 바랍니다. 용기를 잃어버린 자들이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흔들렸던 사람들이 다시 믿음의 정도를 걷기를 원합니다. 사울 왕에게 쫓기는 다윗을 위하여 하나님은 요나단이라고 하는 위로의 친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의심받던 사울, 그는 회심했지만 많은 사람들과 사도들이 그의 회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때에 하나님께서 위로의 도구로 사용하신 사람이 있습니다. 바나바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인간관계속에서 상대를 축복하고 격려하는 요나단처럼 바나바처럼 쓰임 받아야 합니다.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을 숨기는 것은 결코 지혜롭지 못합니다. 어려울수록 공동체에 속한 지체들과 열린 교제를 적극적으로 펼쳐야 합니다.
두려움을 기쁨으로 변화시켜 주심으로 위로하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두려움을 기쁨으로 변화시킴으로 위로하십니다.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7절) 과거의 두려움이 기쁨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주님은 변화의 전문가이십니다.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9절)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를 인하여 안심함을 얻었음이니라”(13절) 내 마음의 두려움과 아픈 마음과 상처를 우리가 믿음으로 주의 제단에 올려놓을 때 주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셨던 것처럼 오늘도 여전히 살아계신 주님께서 슬픔을 변화시켜 기쁨으로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치료하심을 마음에 사모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인하여 범사에 담대한 고로 기뻐하노라”(16절)
한 세기 전에 히윗(Hewitt)이라고 하는 여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인해 병상에 눕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잊으셨는가, 이전에 받았던 은혜는 과연 무엇인가’하는 고민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그 마음에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 여성도의 믿음과 용기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 때에 히윗이 지은 찬송이 있습니다. 찬송 455장입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되었고 전날에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레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이 찬송으로 인해 탕자처럼 집을 떠난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왔고, 낙심한 사람이 많은 위로를 받았으며, 교만한 사람이 겸손하게 되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꿈을 잃어버린 사람이 다시금 하나님의 비전을 회복하였습니다. 찬송가운데 두려움을 기쁨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주님 앞에 인생을 맡긴다면 주님은 우리를 실망시키거나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새로운 능력과 은혜와 꿈과 비전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채우실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우리의 실패와 우리의 아픔과 우리의 눈물과 우리의 두려움을 올려놓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상상을 뛰어넘는 환대로써 위로하심
하나님께서는 상상을 뛰어 넘는 환대를 해주심으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하는 사울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에게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께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기사 내게 직분을 맡기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충성되게 보십니다. 우리에게는 충성됨이 없고, 등 돌리기 잘하고, 배신하기도 잘하고, 하염없이 원망하는 때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에게 있는 은사와 재능을 거두어 가지 않으십니다. 청년 요셉은 부모님께 잊혀지고, 형제는 그를 미워했으며, 이역만리에 던져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고난의 현장에 동행해 주셨습니다. 그를 붙잡으시고,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청년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살기로 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세상의 박자에 맞추어 살지 않고 하나님께 그의 뜻을 정하여 살기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놀랍게 들어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허락하시는 환대의 은총입니다. 이 환대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체험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 자녀들에게 체험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환대가 다른 사람의 축복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나를 환대하신 주님 앞에 나의 마음과 열정을 가지고 주를 섬기며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바울이 경험했던 환난과 두려운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계신 분이 계시거든 다시금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위로의 주님, 그 주님의 손길을 풍성하게 만나시고 환난과 고난과 고통이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깊이 있게 만나는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내 믿음과 사랑을 고백하는 은혜와 사랑이 더욱 강렬하게 빛을 발하기를 기대합시다.
헬렌켈러(Helen Keller)는 고백합니다. ‘성숙한 인격은 편안하고 조용하게 개발되지 않는다. 오직 경험과 고난과 시행착오를 통하여 영혼이 강건해 지고 삶의 비전이 명확해 지며 소원이 불붙게 되고 성공은 이루어진다.’
여러분!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환난을 뛰어넘게 하실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더욱 주님을 사모하고, 매순간 동행합시다.
근심에서 벗어나는 길
고린도후서 7장 8-11절 / 이한규목사
어느 날 바울은 교린도 교인들에게 바른 믿음을 권고하는 책망의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를 보내고 처음에는 고린도 교인들을 근심하게 한 것에 대해 후회했다. 그러나 그들을 잠시만 근심하게 한 후 회개에 이르게 하는 좋은 결과를 낳았다. 근심이 다 나쁜 것만은 아니다. 살다 보면 근심거리가 생기지만 그것에 너무 매이지 말라. 어떻게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1. 하나님께 근심을 맡기라
성경에는 300번 이상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나온다. 결국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죄이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로서 결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다. 예수님은 염려로 키를 한 자도 자라게 할 수 없다고 하셨다(마 6:27). 문제가 크고 돈이 없다고 아무리 많이 근심해도 전혀 소용이 없다. 그 시간에 좀 더 기도하고 좀 더 땀을 흘리는 것이 낫다.
불필요한 근심은 삶을 파괴하는 쓰레기와 같다. 집에 쓰레기를 남겨두면 온 집안에 악취가 진동하고 건강도 나빠지듯이 마음속에 근심을 품으면 그로 인해 마음과 육체가 병든다. 잠언 17장 2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고 마음을 병들게 한다. 상당히 많은 질병도 근심 때문에 생긴다. 그 근심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라.
가끔 사랑하는 사람이 힘든 일이 생긴 얘기를 들으면 가슴이 덜컹 한다. 가끔 목사에게 교인이 진지하게 “목사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라고 하면 그때도 가슴이 덜컹 한다. 그때 근심이 밀려오면 할 일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기도하는 일이다. 그때 기도하면 늘 생각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다. 이제까지의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앞으로도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이란 확신이 들면서 마음도 평안해진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면 평안이 생기고 하나님이 가장 좋은 문제 해결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2. 하나님의 근심을 맡으라
본문에 자주 언급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란 표현에는 비유적으로 세상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내포되어 있다. 영혼이 세상 근심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자신의 근심은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대신 하나님의 근심을 지라. 즉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짐을 지려고 하면 나의 세상 짐은 훨씬 가벼워진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내가 하나님 나라의 짐을 맡으면 하나님은 나의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신다. 하나님께 짐을 맡기면서 하나님의 짐을 맡을 때 기적의 주인공이 된다. 금식하고 철야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외면하면 사실상 응답도 없다.
지금 이 시간에 모든 근심과 불안의 짐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새로 찾아보라. 지금 불의하고 힘든 세상에서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려 살아갈 힘조차 없는 사람도 많다. 그의 이웃이 되어 주려고 힘쓸 때 삶의 무거운 짐이 가벼워질 것이다. 그처럼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신 일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살면 하나님은 나의 문제와 근심을 다 해결해 주실 것이다.
3.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라
본문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8번 나오는 ‘근심’이란 단어다. 그런데 그 단어가 그리 나쁘게 들리지 않는다. 근심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근심에는 불필요한 근심도 있지만 필요한 근심도 있다. 다만 어떤 근심이든지 근심하는 기간은 줄이라. 본문 8절에 언급된 “잠시만 근심하게 했다.”라는 표현에 주목하라. “무엇을 근심하느냐?” 하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얼마간 근심하느냐?” 하는 문제도 중요하다.
근심하는 문제에 대해 때로는 단호하게 결단하라. 근심이 계속되면 건강을 잃고 다른 중요한 일도 망치기에 근심할 때는 잠시만 근심하고 곧 결단하라. 시험 때문에 근심되면 지금부터 공부하기로 결단하고 리포트 제출이 근심되면 지금부터 리포트를 쓰기로 결단하라. 행동도 없이 근심만 하면 문제 해결이 더 어려워진다. 근심을 통해 좋은 결과를 만드는 생산적인 근심을 하고 낙심과 절망으로 이끄는 근심은 버리라. 그래서 받아들일 일은 받아들이고 그 일을 통해 최선의 의미를 창조해내라.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아픈 책망의 편지를 섰을 때 고린도 교인들의 감정이 상해서 그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더 멀리 할 수도 있었지만 감사하게도 그들은 곧 회개하고 하나님을 다시 가까이하면서 바울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고린도 교회의 근심은 회개의 열매를 맺는 것으로 귀결되어 고린도 교회의 근심과 바울의 근심은 아무런 해도 주지 않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되었다(9절).
하나님의 뜻이 아닌 망령된 근심은 후회를 낳고 사망으로 이끌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신령한 근심은 회개를 낳고 소망으로 이끈다(10절). 그처럼 근심할 때는 그 근심이 파멸적인 근심이 아닌 창조적인 근심이 되도록 하라.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되는 문제나 교인의 믿음 문제로는 근심했지만 힘든 환경에 대해서는 근심하지 않았다. 절망적인 결과에 대해서도 너무 근심하지 말고 어차피 이뤄질 일이 이뤄졌다고 여기라.
고린도 교인들의 근심과 사도 바울의 근심은 결과적으로 회개와 성결과 회복을 낳았다. 그처럼 근심을 통해 좋은 결과가 생기면 그 근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근심이 된다. 근심이 없기를 바라지 말고 필요하다면 근심하되 잠깐만 근심하면서 근심을 유익으로 만들라. 근심거리가 생기면 그때 그 근심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를 생각하고 행동에 나서서 반전의 역사를 이루라. 창조적으로 승화시킨 근심은 결코 해가 되지 않는다.
거룩한 근심
고후 7:8-11 / 박신진목사
신자의 회개
예수님을 영접하고 한번 거듭났으면 더 이상 회개가 필요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자꾸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속죄의 은총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것이다. 이 방향으로 너무 강조하면 구원파 이단에 빠지게 된다.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은 이미 의롭다함을 얻었고 왕 같은 제사장이며 택하신 백성이기 때문에 자꾸 회개를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거듭난 하나님 백성도 악하고 죄된 성품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늘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죄를 회개하면서 거룩함에 이르러야 한다.
웨슬리는 이런 두 가지 입장을 잘 종합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았다. 이때 구원받기에 합당한 회개가 필요한데, 이것을 ‘복음적인 회개’라 한다. 이 복음적인 회개는 한 번으로 가능하다. 예수님 영접하여 사죄함을 얻고 거듭난 것은 단 한 번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죄의 용서함을 받고 구원받았다 해도 구원을 온전히 이루고 성화를 계속하기 위해 회개가 필요한데, 이것을 ‘신자의 회개’라 하였다. 그러므로 이미 구원의 확증을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과 행실과 생각의 잘못들을 깨닫는 대로 회개하여 구원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복음적인 회개’는 회개하여 믿음으로 단 한번 이루는 것이지만, ‘신자의 회개’는 거듭 반복하여 행해야 한다.
우리는 매년 새봄을 맞이한다. 생명의 한 바퀴인 네 계절이 돌 동안 우리는 여러 가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른다. 이 모든 행위의 죄와 자범죄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속함 받은 것을 믿으라! 그러나 한편 그런 죄를 저지르게 되는 나의 연약함과 죄의 속성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새봄에 묵은 땅을 갈아엎어 씨앗을 뿌리는 것처럼, 철저히 회개하고 자기를 내어놓음으로 다시금 주님 앞에 바로 서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주님이 성전을 청결케 하심으로 예루살렘에서의 구원 사역이 시작되었듯이, 먼저 죄를 회개하고 청결케 해야 하나님의 일이 나타난다. 회개 없이 공을 세우고, 회개 없이 업적을 쌓고, 회개 없이 집을 지어도 다 헛된 것이어서, 나중에는 ‘이 집을 허물라!’는 주님의 추상같은 말씀을 들어야 한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스스로 의롭다 하는 죄인과 스스로 죄 있다 하는 의인들이다. 우리가 사순절에 가져야 할 회개의 자세가 바로 스스로 죄 있다 하는 믿음의 자세이다.
회개의 결과
사람들은 죄를 인정하기 싫어한다. 죄를 인정하고 그것 때문에 근심하거나 고민하거나 슬퍼하는 것을 패배라고 생각한다.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요, 죄 짓는 일보다 더 비참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서는 죄를 인정하고 죄지은 것을 죄인 줄 깨닫고 거룩한 근심에 빠질 때, 진정한 자유와 기쁨과 복이 임한다고 가르쳐 준다. 세상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고 몸의 건강까지 해친다. 세상 근심은 정말 힘든 일이어서, 사망으로 이르게 한다. 동물은 절망할 줄 모른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모형으로 영원을 바라보며 꿈꾸지만 자신의 죄성이 영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절망한다. 이런 실존적 절망 앞에서 인간은 근심걱정하며 고민하며 하나님께 나아간다. 인간에게만은 절대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영원을 향한 꿈이 있다.
따라서 본문은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지만, 한 가지 근심은 해도 좋다고 한다. 회개하기 위해 죄를 깨닫고 근심하는 것이다. 이것은 패배나 불행이 아니라, 하나님께 이르는 복된 길이다. 하나님 뜻에 맞는 근심은 회개를 가져오고, 열정과 의분과 두려워하는 마음과 그리워하는 마음과 바르게 함을 가져오기 때문에 구원을 이룬다. 거룩하게 되기 위하여, 영적 존재로 거듭나기 위하여 끊임없이 고민하고 씨름하며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하여 드디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라보게 된다.
죄를 깨닫고 고민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믿음의 태도이며, 죄 때문에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것은 성도의 마땅히 할 본분이다. 이때 거룩한 열정이 생긴다. 이때 잘못을 버릴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죄에 대하여 깊이 근심하며 마음 아파할 때 주님을 향한 새로운 사랑을 발견한다. 이때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진정한 변화가 생긴다. 바르게 회개하면, 깨끗하여져서 바르고 새롭게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 뜻에 맞는 회개 1: 하나님께 대한 회개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10절)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하나님 뜻에 맞게 근심하여 그분에게 합당한 회개를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본문이 말씀하는 하나님 뜻에 맞는 회개란 무엇일까? 하나님 뜻에 맞는 회개는 먼저 하나님께 대하여 회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옳다 하심에 비추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돌아보면서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 뜻에 맞는 회개다.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아무 잘못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아 잘못이 있다고 하면, 그것에 대하여 철저하게 회개하고 바로 잡아야 한다.
사람들은 자기 기준에 따라, 자기 양심과 감정이 잘못했다고 하면, 그때 후회하고 근심한다. 그러나 자기 마음에 잘못되었다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회개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 뜻에 맞는 회개가 아니다. 여러분, 객관적인 하나님 말씀과 종을 통하여 들려주시는 말씀, 혹은 어떤 사건들을 통하여 깨우쳐주시는 주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라. 내가 받기 어렵고 내 생각과 달라 내 마음이 허락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에 어긋난 것이 분명하면 회개해야 한다. 내 양심과 내 감정만 주장하는 것은 신자의 태도가 아니다.
여러분의 교회생활은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하게 이루어졌나? 혹시 스스로 적당히 타협하여 서로 칭찬해주고 무마해주면서 회개할 마음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가? 주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큰 것을 바라시지 않는다. 순수한 사랑과 변함없는 진실을 요구하심을 믿으라! 사도 베드로에게 초대교회와 위대한 선교의 역사를 맡기실 때, 얼마나 능력 있고 돈이 있는지, 자격을 갖추었는지를 묻지 않으시고,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를 확인하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이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며 진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가?
믿는 이로서 마땅한 개인 경건생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의무와 사명을 잘 감당했는지 돌아보아 회개하라. 기왕에 회개할 것을 철저히 좀 더 확실하게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의 기준을 몰라서 못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알지만 싫어서 회피하다보니 마음이 복잡해지고 이유가 많아지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있다. 올해도 사순절이 되었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라! 그러므로 철저히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내어놓음으로 주님 앞에서 새 사람을 입으라!
하나님 뜻에 맞는 회개 2: 행동으로 나타나는 회개
하나님 뜻에 맞는 회개는 마음으로 깨닫고 행동으로 나타나는 회개이다. 마음의 깨달음이 있어야 하고, 이것을 해야겠다, 혹은 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의지로 다져지는데, 이것이 행동과 생활로 타나나지 않는다면 열매가 없는 회개다.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제의 생활로 여러분의 회개가 나타나도록 노력하라.
세례 요한은 회개의 복음을 전했다. 회개하게 함으로 주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였다. 그때 세례 요한이 강조한 말씀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었다. 열매 없는 회개는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 없다. 회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당연히 참된 회개는 행동으로 열매를 맺게 된다.
행동으로 나타나는 회개는 우리를 더욱 강하게 하며 온전케 할 것이다. 감신 선한용 교수님에게서 들은 얘기다. 그분이 동대문에서 책을 한권 샀다. 그런데, 책방 주인이 잘못 계산하여 너무 많은 거스름돈을 주었다. 사실은 가난한 고학생 신분에 책값이 너무 부담이 되었는데, 거스름돈을 넘치게 받고 보니 이게 웬 횡재냐 싶어 도저히 돌려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은 거스름돈을 돌려주고 정직하게 말했다. 이것은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당장은 손해를 본 것 같았지만, 행위로 잘못된 것을 바로 잡자 이 젊은 고학생에게 담대함과 용기가 생겨나더라는 것이다.
자신에 대하여, 다른 사람에 대하여, 자기 일에 대하여 행동으로 회개가 나타나도록 하라. 잘못된 습관이나 버려야 할 행위들을 반복하고 있다면 회개하라, 그리고 거기에서 떠나라! 그때 진정한 자유와 평안과 복이 여러분에게 임할 것이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잘못 행하고 있는 것이 생각난다면 사순절 기간에 주님의 십자가에 못박고 회개하여 바꾸시기 바란다. 죄가 아무리 여러분을 편하게 만들고 달콤하더라도 해충 보듯이 진저리를 치며 떨쳐 버려야 한다. 그 달콤한 죄가 여러분의 영혼을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우리 사회에 ‘미투’(MeToo)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한편으로는 그렇게까지 선생님, 웃어른, 성직자까지 까발리면 어떻게 하느냐 염려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우리 사회에 한번은 이런 과정이 필요하지 않은가, 조심스럽게 인정했다. 그동안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마치 자연스런 욕망의 표현이요, 인생사는 재미이며 멋이라는 식으로 방관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권력자, 윗사람이라는 이유로 치욕스런 성희롱과 성추행을 일삼은 죄를 이 사회는 회개하고 나가야 한다. 건강한 사랑, 동등한 관계, 억압이나 일방적인 가슴앓이나 피해가 없는 건강한 사회를 기독교는 지지한다! 그리고 이 모든 죄에 대하여 우리는 이 사순절에 철저히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나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 뜻에 맞는 회개3: 인격이 새로워지는 회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사도 바울은 같은 서신 고린도후서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피조물, 새로 지음받은 사람이 된다고 말씀한다. 그런데 새 것이 되려면,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라고 하지 않는가! 이전 것이 지나가는 것이 진정한 회개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다면 더러움을 벗지 못한 것. 한번 넘어질 수 있다. 인간이기에 죄 지을 수 있다. 그러나 회개한다면 넘어진 말뚝에 다시 걸려 넘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회개는 인격이 새로워지는 회개가 되어야 한다.
이 사순절에 주의 말씀은 우리를 회개의 강가로 인도한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김을 받아 인격이 새로워지기를 바란다. 우리를 새롭게 할 이는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만이 인간의 죄를 씻고 진심으로 정결케 할 수 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11절)
한 제자가 광야에서 생활하는 스승을 찾아갔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숨은 죄를 회개했지만, 하나님이 그 회개를 받아주시고 죄를 용서해주실지 염려되어 물어보았다. 스승은 그에게 반문했다. “제자여, 자네는 옷이 찢어졌을 때 그것을 버리는가?” 제자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것을 다시 수선해서 입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말했다. “우리가 옷에도 그렇게 신경을 쓰는데 하나님이 자녀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으시겠는가?” 회개하면 정결해진다. 회개하면 용서받는다. 회개하면 인격을 고친다. 주님은 회개한 인격을 기쁘게 받으신다.
예배에 나온 사랑하는 모든 교우들께 평안을 전하고 축복을 말하기 전에 먼저 회개를 요청한다. 여러분! 사순절을 지키면서, 주안에서 죄 때문에 고민하라, 죄로 인하여 슬퍼하며 번민하시기 바란다. 회개할 때를 놓치면 모든 날 동안 내내 후회할 것이며 평생 후회할지도 모른다. 지극히 작은 것부터 회개하여 바꾸어 보자. 너무나 당연히 여겼던 죄들, 사랑하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였던 잘못들을 뉘우치라!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이러한 회개의 근심이 여러분 속에 간절하게 생겨나서, 하나님 뜻에 맞는 회개가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어떤 집사님이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다고 하였다. 목사님은 그를 면담했다. “집사님, 정말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십니까?” 그는 “네.”라고 짧게 대답했다. 목사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집사님, 다음에 예수님을 만나면 지난주일 제가 예수님께 고백한 죄가 무엇이었는지를 가르쳐 달라고 해보십시오.” 며칠 후 그 집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목사는 집사를 만나 물었다. “그래,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그 집사는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이 목사님의 죄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도 않으신다.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9절 말씀이다. 주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죄를 회개하며 안에서부터 새로워진다!! 이 사순절에 거룩한 근심에 잠겨 회개하면 참된 구원이 있고, 영생과 평안이 임한다. 회개하고 새로워지자! *
후회하십니까
고후 7장 8~10절 / 김근중목사
이번주간에는 주님의 은혜가운데 서울병원에서 김명희전도사 취임과 김지영전도사님 이임예배가 많은 분들이 모임가운데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생각하며 예배후에 목사님들과 담화를나누고 또한 기독교 연합회 목사니들과 6일부터 있는 연합부흥대성회를 위하여 기도와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고하며 주님의 사알을 다시한번 깨닫는 순간드리이었음을 알수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도 함께 하신 주님이 현재도 내일도 한게 하실것을 믿고 감사 드립니다, 서울병원 예배 마치고 낞에 어느 노인병원에 가서 노인병동에 거의 90세가 된 할머니 환자가 있었서 만나 봐었습니다, 그의 남편은 육군 상사로서 8년 전에 별세했습니다. 할머니의 병실은 과거를 기억할만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여행 선물과 세상을 떠난 친구들의 사진들이 책장과 벽을 장식했습니다. 그런데 90번째 생일날 과거를 기억 나게 해주는 중요한 물건들을 모두 떼어 내고 대신 자신이 가보고 싶은 곳과 알고 싶은 것들을 보여 주는 그림들로 대체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나를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이제부터 다시 살고 싶어요. 그리고 내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는 지는 해를 등지고 떠오르는 해를 환영하며 미소를 지은 것입니다.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과거에 얽매여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몸은 현재에 살고 잇지만 생각은 과거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책은 실제적인 자책과 무고한 자책이 있습니다. 실제적인 자책은 법이나 규약이나 가치관을 어겨서 객관적으로 확실한 잘못이 드러나고 그에 대한 책임이 분명할 때 일어납니다. 허나 무고한 자책은 법이나 규약이나 가치관을 어긴 사실이 없는 상태에서 주관적으로 느끼는 경험으로서 잘못한 일에 대한 책임이 분명하지 않을 때 일어납니다. 무고한 자책은 자신이 실제적으로 법을 어기지 않았어도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고 자신을 탓하는 감정입니다.
첫째;. 실제적 자책은 선용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잘못을 엄한 어조로 지적했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그 편지를 보고 근심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므로 바로 섰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바로선 모습을 전해 듣고 두번째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위로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고후7:10).
자책이 있을 때 그것이 실제적 자책인지 무고한 자책인지 구별한 다음에 무고한 자책이라면 제어해야 하고 실제적인 자책이라면 선용해야 합니다. 실제적인 자책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근심입니다. 래드 패롯이 말한 이른바 '경건한 근심'입니다. 자책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 자백하고, 자백하므로 일시적인 기분전환을 하게 되지만 잘못된 행동은 다시 재발하게 되고 그 재발된 행동으로 또다시 자책하게 됩니다. '자책→자백→재발→자책'의 싸이클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뜻대로 한 경건한 근심은 회개를 통해 점진적으로 변화를 가져오고 성숙하게 됩니다. 실제적으로 잘못하여 마음에 고통을 받는다면 그것은 부정적 요인이 아니라 우리가 좀더 바로 서고 온전케 되는 기회가 됩니다. 신앙 양심이 있는 사람은 당연히 그런 근심이 생겨야 하고 마음의 고통을 느껴야 합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자신이 범죄하여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경건한 근심을 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잘못으로 인한 고통을 치유의 한 부분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자책하는 사람은 마음의 고통을 잊으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기분이 나아지는 방법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려 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일시적으로 기분전환은 될지 모르나 다시 반복되고 더 큰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고통은 감수해야 합니다. 잘못을 바로 잡고 더 나은 변화와 성숙을 가져올 것을 바라보고 고통을 그 과정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미래의 영구적인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고통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자책은 이기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자책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춥니다. 자신이 받은 상처의 고통이 크기 때문에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그 상처로 인하여 고통스러워 한다는 사실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고통스러워 할 뿐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자신이 상처를 준 사람의 고통을 생각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다윗은 우리야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이후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양 떼를 많이 둔 한 부자가 애지 중지하며 기른 한 마리 양을 둔 가난한 사람의 양을 빼앗아 잡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윗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부자로 인해 한 마리 양을 빼앗긴 가난한 사람의 고통을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자는 마땅히 죽어야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4배나 갚아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그 부자가 곧 다윗 왕이라고 했고 다윗은 자신이 얼마나 우리야에게 고통을 주었는지 생각하고 회개했고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습니다 (삼하 12:5-24).
우리는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자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를 신뢰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 자신이 얼마나 옳은 사람인가를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하나님 앞에 용서받기 위해 자신을 몰아 붙이게 됩니다. 그러나 죄로 인한 자책의 감정은 혼자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될 줄 알고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될 줄 알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은혜로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믿고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요한일서1:9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둘째 ; 무고한 자책을 제어해야 합니다.
무고한 자책은 객관적 사실로 입증되지 않아도 자기가 느끼는 감정에 의해 자기 잘못으로 여기고 자기 스스로 고통스러워 하며 학대하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이 자책하고 있는 것이 무고한 자책이라면 해결해야 할 자책입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에 대해 완벽함을 요구하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을 완벽한 사람으로 여기고 자신에 대해 너무 높은 기준을 설정하게 되면 항상 실패를 경험하게 되고 실패할 때 자책하게 됩니다. 자신은 언제나 실수하지 않아야 하고 항상 원하는 것은 성취해야 하고 항상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완벽주의입니다. 완벽주의 성향은 늘 자신을 패배자로 만듭니다. 자신의 열등한 부분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도 실수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기대감을 낮추고 자기를 포기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높은 기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무고한 자책은 대부분 자신이 임의로 정해 놓은 높은 기대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감도 너무 높이 설정해서는 안되지만 다른 대상에 대한 기대감도 너무 높이 설정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은 기대를 낮추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가족이 언제나 나를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것, 직장에서 상사가 언제나 자신을 칭찬해 주기를 바라는 것, 사회에서 친구가 언제나 자기를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것, 교회에서 교우들이 언제나 자기에 대해 관대해 주기를 바라는 것 등은 그 자체가 어리석은 기대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기준을 수정해야 합니다.
원하지 않는 일에 대해 거절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거절해도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거절하는 방법을 익혀야 합니다. 자책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다른 사람이 부탁한 것에 대해 거절하지 못하여 마음이 편치 못하고 손해가 왔을 때 자신이 거절하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어떤 것을 요구했을 때 그것이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면 그 부탁을 거절해도 죄가 아닙니다. 모든 일에 다른 사람의 부탁을 들어 주는 것이 미덕만은 아닙니다. 친구가 돈을 빌려 달라고 할 때, 상사가 불합리한 것을 강요할 때, 마음에 부담이 되는 사람이 집을 방문한다고 할 때, 판매원이 물건을 사도록 설득할 때, 목사가 원치 않는 직책과 봉사를 요구할 때, 그것이 호의라 할지라도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이라면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판단하기가 힘들면 결정하기 전에 시간을 달라고 해서 좀더 생각할 수 있는 기간을 가지거나 그도 힘들면 조언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유익합니다. 확신이 서면 거절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을 솔직하게 말하고 정중한 표현으로 거절해야 합니다.
세째. 옳은 결정 방법을 익혀야 합니다.
네 자녀를 둔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네 자녀 가운데 하나는 창녀가 되었고 둘은 마약 중독자가 되었고 하나는 10년 전에 실종되었습니다. 상담자를 찾았습니다. 상담자가 그에게 "선생님 한가지 일을 하신다면 네 자녀를 모두 되찾을 수 있습니다."고 했습니다. "어떤 일입니까?" "오른 팔을 자른다면 자녀를 모두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칼을 주세요." 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더라도 자녀는 안 돌아올 수 있습니다. 혹 자녀가 돌아온다고 해도 이미 지나간 과거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이야기가 끝나는 곳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 보다는 이야기가 시작될 시점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후회를 한다는 것은 자책을 불러 일으켜 삶에 막대한 해를 입힙니다. 그렇다고 과거의 잘못된 일을 원 상태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잘못된 결정으로 인한 후회를 반복하면서 후회하지 않는 최선의 방책이 매 순간에서 가장 옳은 결정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최선의 결정이 앞으로 있을 후회를 최소화하는 것입니다. 최선의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의 동기와 목적을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일에 대해 결정을 했을 때 그렇게 결정하게 된 동기와 목적이 피상적으로 나타난 것 이면에 다른 숨겨진 동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피상적인 결정의 동기와 목적을 보면 그 결정이 당연히 옳은 결정 같지만 이면에 숨겨진 동기와 목적을 생각해 본면 전혀 옳지 못한 결정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사를 가려 한다면 그 진짜 이유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진짜 이유가 사소한 것이라면 이사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소한 문제는 해결될지라도 또 다른 문제들이 더 발생할 수 있으며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집과 직장과 학교와 교회를 옮기는 문제는 사소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전체적인 삶의 문제여야 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고려해 보았는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자격이나 실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결정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교육의 정도, 기술의 한계, 경제적 여건 등을 고려해야 합니다. 모든 중요한 결정에 있어서 큰 꿈을 가지고 큰 목표를 설정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고려해서 결정해야 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고려하면서 최선을 다하면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비교하면서 할 수 있는 결정을 해야 합니다.
기도해 보았는지 점검해 보았는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결정했어도 그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하고 그 방법을 적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 지혜를 구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약1:5-6). 또 아무리 빈틈없는 결정을 했어도 인생사는 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결정이 아무리 확실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면 성공하기 힘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과 부합한 결정인지 알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동시에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네째; 자신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쇼생크의 탈출'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브룩스는 십대 소년 시절에 무모한 폭행을 저질렀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40년 동안을 감옥 생활로 보냅니다. 40년 후 드디어 투옥 생활을 마친 다음에 말로만 듣던 자유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석방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출옥한 브룩스는 자신이 전혀 자유를 누릴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감옥에서는 스스로 결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감옥에서는 누군가가 대신 생각을 해 주었습니다. 감옥 생활에 익숙해져 있던 그는 감옥 밖에서의 생활은 위협적이었고 두렵게 했습니다. 그는 새롭게 찾은 자유가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에 안전한 감옥으로 돌아갈 방법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두려움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시 무시한 일이다." 내면의 부정적인 감정에 갇혀 살던 사람은 변화를 두려워 합니다.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은 낮은 자존감 때문에 일어납니다. 낮은 자존감은 어렸을 때부터 살아오면서 받은 충격과 상처로 인하여 형성된 것입니다. 낮은 자존감은 모든 사람과 사건과 사안에 대해 잘못 해석하고 왜곡된 판단과 결정을 하게 합니다. 잘못된 결정들은 자책을 하게 하고 패배감과 열등의식과 우울증으로 고통을 당하게 하고 결국 자기 존재를 부정하게 되어 스스로 갇힌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못하게 되고 용서하지 못하게 되고 화해하지 못하게 되고 스스로 고립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자신을 용서할 줄 알아야 모든 내면의 고통 문제가 해결되고 변화와 성숙된 삶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용서하셨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신 사실을 방아들이면 자신도 자기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으며 공중 권세를 잡은 사단을 따르던 자이며 우상과 세상을 따르던 자들이며 오직 물질과 육체를 신으로 삼고 살던 자들입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원수되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고 아들로 삼아 주시고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권세를 부여하셨습니다 (엡2:1-5).
자신이 자책하고 있는 것들도 용서하셨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현재에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들도 용서하십니다. 교만함이나 인색함 같은 추상적인 개념의 잘못된 부분 뿐만이 아닙니다. 배우자에게 신의를 저버린 일이나 자녀에게 폭언을 한 일이나 교우에게 상처되는 말을 한 일등 사소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회개하고 당사자에게 사과했다면 하나님도 용서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일1:9).
자신을 용서한다고 소리를 내어 선언해야 합니다. 시시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경험해 보면 그 심오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눈을 똑똑히 바라보고 "하나님이 날 용서하셨다. 나도 날 용서한다"는 선언을 해야 합니다. 무거운 짐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될 때까지 반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모든 후회와 자책과 수치심이라는 뿌리깊은 감정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제거되는 시작점이 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롬10:10).
이제부터 우리는 후회와 자책과 수치심을 떨쳐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를 원합니다.하루 빨리 늦어지며는 안됩니다, 그러나 너무 오래 기다렸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내면의 부정적인 감정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루를 더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될 수 있는 시작을 해야 합니다. 바로 지금이 그 때입니다. 오늘 자신을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로 결심하십시오. 오늘 자신을 용서한다는 선언을 하십시오. 혼자 해야 한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주의 성령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고후07장 08~11절 / 서정호목사
인류 역사가 지금까지 계속되면서 인간은 생존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 의, 식, 주를 위해 힘써왔고 지금도 삶의 질을 높이려고 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의, 식, 주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제 먹고 살만한 세상이 된 지금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걱정과 근심과 염려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기차의 냉동차 칸 안에 갇혔던 철도청 직원이 약 일곱 시간 후에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남들이 다 퇴근한 시간에 냉동차 칸에 들어갔다가 갇힌 그는 온 힘과 목청을 다하여 문을 두드리고 소리쳤으나 새벽에 순찰하는 사람이 이 칸을 점검하기까지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순찰하는 사람은 냉동차가 전기 고장으로 작동되어있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그럼에도 철도청 직원이 죽은 이유는 여기가 냉동차 칸 안이니까 몇 시간 갇혀있으면 얼어 죽을 것이라는 염려와 잘못된 관념으로 인한 것입니다. 냉동실에서 추워서 얼어 죽은 것이 아니라 가동되지 않아 춥지도 않은 냉동실 안에서 염려로 인한 심장마비로 죽은 것입니다.
세상에 실존하는 동물들 중에 위장에 구멍이 생기도록 염려하는 동물은 아마도 사람밖에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노력하지 않아도 날마다 염려하며 사는 일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러다 문득 염려 없는 날이면, 염려 안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불안할 정도로 염려는 습관을 넘어서 중독에 가까워져 있습니다. 실제로 염려꺼리가 있어서 염려이고, 염려꺼리가 없어서 또 걱정입니다.
어느 교회 집사님이 늘 범사에 염려가 충만하시기에 하나님께서 그 집사님의 염려꺼리를 모두 다 없애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집사님이 하는 말 '염려거리가 없어 큰 걱정이라고' 또 염려했다고 합니다. 아마, 염려도 은사(?)인가 봅니다. 염려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염려하기 마련입니다.
염려라는 토양위에다 말씀이라는 씨앗과 기도라는 비료를 뿌린다면 어떤 말씀이나 어떤 기도로도 성장과 응답으로 자랄 수 없음을 곧 알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염려를 붙들고 살게 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염려가 나를 붙들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염려는 일종의 병이며 그것도 중병에 속합니다.
염려라는 말은 본래 '목을 조르다. 나누어지다'라는 뜻이 있는데 염려가 우리 속에 스며들기 시작하면, 우리의 마음은 나누어지기 시작하고 그래서 신앙생활하면서도 갈등하는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인간이 염려하는 것 중에 85퍼센트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염려라고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필요 없는 소모적인 염려로 출혈을 하는가요? 뿐만 아니라, 염려해도 어쩔 수 없는 과거의 일들과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일들을 가불하여 미리 염려하지는 않는가요?
우리는 질병에 걸리면 병으로 죽는 것보다, 병으로 죽을지 모른다는 염려로 죽을 확률이 더 높다고 합니다. 또한 직장을 잃었을 때도 직장을 잃은 고통보다, 새 직장을 구하지 못할 수도 있음에 대한 염려가 더 많은 것입니다. 세상에 염려함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한가지인데 바로 두통입니다.
염려의 뿌리는 '나'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염려하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염려를 붙들어 매시는 분이십니다. 염려로 익숙해지고 염려로 세뇌된 우리의 토양을 맡김의 토양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염려가 있으나, 염려를 기도로 바꾸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문제가 많으나, 걱정이 안돼서 걱정인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의 대적 사단은 성도의 염려와 불평을 먹고 산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단을 배부르게 하려면 염려하고 범사에 불평할 것이고 사단을 굶기려면 염려를 기도로 바꾸어야 합니다.
변하거나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무한한 기적의 가능성이 충만한 미래에 집중해야 합니다. 염려는 또 다른 염려를 낳을 뿐이나,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낳습니다. 염려 중독증의 특효약은 빌립보서 4장 6절 말씀대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잘 맡기는 은혜
큰 은혜 중에 은혜는 잘 맡기는 은혜입니다. 상황은 여전히 어려운데 염려가 안 되는 것은,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 이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믿음의 정의는 염려를 주님께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쓰레기를 버리고 올 때 기분 나빠하거나 이미 버린 쓰레기를 아쉬워하거나, 다시 가져온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맡겨버리는 것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주님께 맡겨 버린 염려들로 인하여 마음에 평안이 흘러야 진짜 맡긴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걱정꺼리가 있어도 걱정이 안 되는 은혜, 문제가 있어도 잠을 푹 잘 수 있는 은혜 말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에게 맡겨지는 은혜, 버리는 축복. 더 나아가 걱정은 많은데 걱정이 안 되는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목욕탕에 가보면 카운터 뒤편에 이런 글이 씌어져 있습니다. "귀중품은 주인에게 맡기십시오. 맡긴 것만 책임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염려와 귀중한 것들을 우리 삶의 주인 되시는 주님께 맡기세요. 주님은 맡긴 것만 책임져 주십니다.
나무는 잎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나무는 떨어지는 자신의 잎이나 부서져 나가는 가지에 대해 아무런 염려를 하지 않습니다. 떨어지지 못하도록 기를 쓰거나 떨어지는 것을 잡으려고 전혀 안달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저 의연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들이 떨어져 나가는 재물이나 건강이나 생명 때문에 염려하고 절망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하찮은 나무보다도 더 못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근심하거나 탄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평생 살아가는 동안 알아야 될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근심 없는 사회가 없고 근심 없을 때가 없고 근심 없는 사람도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그 이면을 바라다보면 좋은 일만이 아니라 궂은일도 있고 또 궂은일만이 아니라 기쁜 일도 있고 이렇게 궂은일과 기쁜 일이 서로 교차하면서 인생이 점철되어 가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사실 사람의 행·불행은 표면에 나타나는 것보다도 그 이면 속에 감추어진 것이 행·불행의 더 큰 의미가 된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문제는 걱정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어떤 걱정을 하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이고 우리의 과제입니다. 우리가 하는 많은 근심이나 염려나 걱정들 중에는 쓸데없는 것도 참 많습니다.
지난 일에 대한 걱정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은 떠나버린 차와 마찬가지인데 이 과거지사, 지나버린 이 일을 가지고 끊임없이 걱정하며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능력은 세상의 지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것을 닫고 열 줄 아는 마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을 조절할 줄 아는 것도 또한 사람의 보이지 않는 큰 능력인 것입니다. 과거는 닫을 줄 알아야합니다. 지나간 일은 우리가 마음의 창문을 닫고 잊을 줄 알아야 됩니다. 울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되는 것에는 울고 힘쓰는 것이 오늘의 나를 병들게 하고 오늘의 나를 더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입니다.
기우
기우란 오지 않을 일, 있지도 않을 일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황당한 걱정 속에 매여 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걱정은 우리를 망하게 할 수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는 걱정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어떨까 하는 걱정, 이것은 사실 이기적이고 교만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걱정은 자아가 강하고 고집이 강한 사람에게 있는데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도 상하고 그 고집으로 남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오히려 얼마든지 더 좋은 일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안된 것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하고, 뜻을 꺾을 때 더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자기를 내세우려는 걱정, 날씨 때문에 하는 걱정, 병들까하는 걱정 등등도 있습니다.
인생은, 살아가는 삶에서 걱정 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걱정을 빼낼 수는 없는데 걱정을 하되 무엇을 걱정하고 어떤 일을 걱정하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고린도 교인들도 걱정과 근심을 했는데, 바울은 그 근심이 너희들 구원을 이루었고 그 근심이 너희를 깨끗하게 했고 그 근심이 너희들에게 복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근심은 망하게 하는 근심, 쓸데없는 근심도 있지만, 구원에 이르게 하는 좋은 근심도 있고 우리를 흥하게 하는 근심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좀 더 살펴보면 사도바울은 아주 어려움 중에 고린도교회를 개척해서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어렵게 세워진 교회, 눈물로 목회를 했던 이 고린도교회가 바울이 떠난 후에 부도덕한 사건과 교회분파 분쟁이 일어나서 교회가 크게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사랑하는 것만큼 무척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사랑 때문에 바울은 그들에게 책망을 했는데 직설적으로 책망을 했습니다. 이 책망을 하면서 바울은 무척이나 가슴이 아프고 또 바울 자신도 걱정을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랑의 책망을 했기 때문에 자기가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랑의 책망을 하자 그들은 이것을 받아들였고, 애통하고 회개하고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고 다시 경건해 지고 서로 화해했습니다. 이것을 본 바울의 마음은 참 기뻤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말씀으로 저희들에게 위로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죄가 분쟁 때문에 너희들의 마음뿐 아니라 내 마음에도 근심이 되었는데 그 근심이 회개를 이루고 오히려 열심인 신앙으로 발전했으니, 너희의 근심이 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근심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그러면서 바울은 근심에는 세상적인 근심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근심, 세상에 속한 근심은 상실과 욕심과 죄책에 관한 것입니다. 주식 사놓고 걱정하는 사람들, 누가 알아주지 않으면 걱정하는 사람들, 병들면 어떨까 걱정하는 사람들, 날 잡아놓고 비오면 어떨까 걱정하는 사람들, 바로 이런 것을 세상에 속한 근심으로 우리에게 해가 되고 결국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죄를 지어놓고 벌 받으면 어쩌나 하는 근심을 합니다. 죄에 대한 근심이 아니라 죄로 인한 결과와 벌에 대해서 근심하는 것인데 이 차이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죄 자체에 대해서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책벌과 형벌만 근심하는 것, 이건 세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죄 자체에 대해서 두려움이 있지만 사탄은 죄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들켜서 책망이나 비난이나 징계 받는 그 자체가 두렵다는 것인데 이런 근심은 세상적인 근심이요, 이런 근심은 회개에 이르지 못하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얻지 못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는데 이제 하나님 앞에 그 지은 죄를 은폐하려고 그 지은 죄와 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그 자체를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매 맞고 나서 한 기도가 자기 죄를 덮어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우슬초로 나를 씻겨주소서”. 하나님 앞에 자기 죄를 덮어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죄를 우슬초로 씻겨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제 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죄 자체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다윗에게 그 풍난이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죄 자체를 부끄러워하고 아파해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를 부끄러워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회개를 무서워하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복을 받을 사람은 죄를 두려워하되, 죄의 결과에 대해서는 용감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아파하고 내 양심에 물들여진 검은 그 죄악의 덩어리를 아파한 것이 아니라 들킬까봐서 내 체면 때문에 내 자존심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하고 걱정한다면 거기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말 쇼저라고 하는데이 말의 뜻은 병든 것에서 낳게 되고 망한 것에서 일으키게 되는 총체적인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하나님이 기뻐하는 근심은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뜻에 따른 근심을 해야 됩니다. 더 큰 십자가를 지지 못한 것을 근심해야 하고 더 충성하지 못한 것, 형제를 더 사랑하지 못한 것, 내 자아가 더 깨어지지 않는 것을 근심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혈기를 내서 내 마음대로 한 것을 우리는 근심할 줄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 뜻에 따른 근심은 축복된 것입니다. 이런 근심은 겸손으로 이어지고 회개로 이어져서 하나님의 긍휼함을 입어서 이전보다 더 좋은 자리로 하나님이 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허락하신 근심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근심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살까?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근심 걱정할 일들이 산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고린도 후서 7장 10절에 보면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후회할 수 없다는 것은 취소할 수 없는, 주저할 필요가 없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근심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구원일까요? 맨 날 과거나 현재의 죄를 뉘우치고 살아가는 것만 요구하지 않습니다. “회개는 잘못된 상태에서 뉘우치고 되돌아서는 것”과 또한 “주님과 함께 깨닫는 상태, 주님의 마음과 연합되는 상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는 사도행전 11장 18절에 나오는 생명을 얻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시 51편 17절에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하셨습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외면하지 않으신다”고 시인 다윗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 34편 18절에 “여호와께서는 마음이 상한 자에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심령을 구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57장 15절에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근심을 하면 마음이 상할 정도일까요? 하나님께 가까이 하려는 신앙의 몸부림이요, 천국을 향한 갈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42장 3절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61장 1절에도 마음이 상한 자를 고쳐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시 147편 3절과 호세아 6장 1절에 보면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66장 2절에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진리를 깨달으려고 애쓰는 자 곧 심령이 가난한 자, 생명을 얻으려고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자들이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하는 자”라고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상 것에 근심하는 것은 다양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근심은 아주 단순하며 오직 한 가지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 근심에서 자유를 얻는 길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근심을 하면 됩니다. 이제 우리가 어떤 근심을 해야 됩니까? 하나님 뜻대로 살자는 근심, 거룩한 근심, 이런 근심을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 죄도 덮어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더 귀하고 위대한 것을 허락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근심 세상 걱정 아무래도 소용이 없습니다. 때로는 작은 일이 풀려질지 모르지만 더 큰일이 꼬입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근심을 이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근심을 하는 것입니다. 자아를 이루기 위해서 근심하기보다는 내 자아를 깨뜨리기 위해서 근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근심해야 합니다. 체면을 차리기 위한 근심이 아니라 진실하기 위한 근심을 해야 합니다. 잘 살기 위한 근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살기 위해서 정말로 근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해 주신다고 했고 복을 주신다고 했으며 우리 길을 인도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근심하지 않고 근심 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근심이 우리를 망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근심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우리가 더 높은 사람 더 깨끗한 사람 더 거룩한, 값있는 사람으로 우리가 바뀌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값있는 삶을 위하여 이렇게 바울처럼 고린도 교인들처럼 근심하여서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하나님의 도움을 입는 하나님의 인생을 책임져주는 이런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이 되는 근심
고후 7:8~16 / 지용수목사
저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 엎드려 기도한 다음 찬송 열 장을 부르고 성경을 창세기 1장, 요한복음 3장, 요한계시록 22장, 신명기 28장, 시편 1편, 23편, 100편, 117편, 127편, 이사야 43장을 기본으로 읽습니다. 그리고 샤워를 하고 교회에 옵니다. 오늘도 그렇게 한 다음 설교 준비를 마무리하고 나왔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을 흙으로 빚어 자기 형상 곧 하나님 형상으로 지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낫으로 소꼴을 베다가 손을 다쳐 피가 나면 흙을 발랐습니다. 그때는 병원이나 약국에 잘 가지 않던 때라 피가 나면 흙을 발랐는데 그러면 피가 멈추고 상처가 곧 아물었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우리 몸이 흙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흙으로 지어진 연약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기 때문에 우리는 굉장한 존재입니다.
또한 우리 몸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모릅니다. 세포 하나하나가 신비롭습니다. 또 동맥과 정맥이 우리 몸 끝까지 퍼져 있어서 온갖 양분과 산소가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다 전달됩니다. 그리고 우리 몸에 바이러스를 비롯한 온갖 병균이 들어오면 흰피톨이 싸워줍니다. 또 신경이 온 몸에 분포되어 있어서 손등에 모기 한 마리만 앉아도 그것이 바로 뇌에 전달됩니다.
‘왼손 어느 지점에 모기 한 마리가 피를 빨아먹으려고 앉았다.’ 그러면 뇌가 바로 ‘눈아, 확인해라.’하는 명령을 내립니다. 눈이 바로 확인하여 뇌에 보고하면 또 뇌가 오른손에게 ‘오른손아, 모기를 잡아라.’라고 명령합니다. 명령을 받은 오른손이 손등에 있는 모기를 쳐서 잡습니다. 그러면 또 뇌가 눈에게 모기가 잡혔는지 확인해 보라는 명령을 내리고 눈은 확인 후 보고를 합니다.
이 일이 불과 영점 몇 초만에 이루어집니다. 얼마나 신비합니까?
그러나 그보다 더 신비로운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사람과 짐승은 다릅니다. 사람은 하늘을 보며 ‘어떻게 하면 저 하늘을 날아볼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 비행기를 만들어 납니다. ‘달나라에 가볼까?’하면 우주선을 만들어 달나라에 가게 됩니다. 바다를 보며 ‘바다 속에 들어가 볼까?’하다가 잠수함을 만들어 바다 속으로 들어갑니다. ‘높은 집을 지어볼까?’하면 고층 집을 짓게 됩니다. ‘빨리 달려볼까?’하면 자동차를 만들게 됩니다.
사람에게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있어서 생각하는 대로 길이 열리게 됩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서입니다. 사람은 창조는 못하지만 작은 것을 만들고 발명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몸 상태를 좌우합니다. 몸이 아무리 근사하고 아름다워도 마음이 지저분하면 지저분한 사람입니다. 몸이 아름답지 못해도 마음이 훌륭하면 그 사람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밝은 사람이 얼굴도 밝고 몸도 건강합니다. 마음이 어두우면 얼굴도 어둡고 몸도 좋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삶이 아름답습니다. 마음이 추한 사람은 삶이 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 관리도 잘 해야 하지만, 마음 관리를 더 잘 해야 되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건강에 대한 관심이 대단합니다. 건강하게 살려고 몸 관리를 하고 운동을 하고 음식도 조절해 가며 먹습니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 관리입니다. 마음이 건강해야 몸도 건강하기 때문입니다.
플라시보효과(가짜 약의 효과)라는 의학용어가 있습니다. 의학자들이 위장병 환자를 두 팀으로 나누어 한 팀에게는 기존의 약에 영양제 하나를 더 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한 팀에게는 같은 영양제를 더 넣어 주면서 최근에 발명된 특효약이니 효과가 아주 좋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일정한 기간이 지난 후 조사하니 아무 말도 듣지 않고 약을 먹은 팀의 환자들은 병이 별로 호전되지 않았는데, 특효약이라는 말을 듣고 약을 먹은 팀의 환자들 중에서는 30%가 건강이 좋아졌습니다. 똑같은 영양제이지만 특효약으로 알고 먹으니 치료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플라시보효과입니다.
이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아스피린을 장기 복용하는 사람을 두 팀으로 나누어 한 팀에게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그냥 먹게 하고, 다른 한 팀에게는 아스피린을 장기 복용하면 부작용이 올 수 있으니 조심해서 먹으라는 말을 했습니다.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아스피린을 장기 복용하면 부작용이 있다는 말을 들은 팀에 있는 많은 사람이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아무 말을 듣지 않고 그냥 약을 먹은 사람보다 세 배나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똑같은 약이지만 마음에 그렇게 입력하니 부작용이 온 것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마음의 즐거움은 최고의 약이 되고 마음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는 것입니다.
잠언 15장 13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얼굴이 빛나면 건강한 것입니다. 의사 선생님들은 사람의 얼굴만 보아도 그 사람이 건강한지 아닌지를 거의 안답니다. 마음이 기쁘면 건강하게 됩니다.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고, 심령이 상하면 얼굴이 상하고 몸이 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4장 23절에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근심하지 않아야 됩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야 됩니다. 우리의 마음 관리를 잘 해야 됩니다. 창이 항상 열려 있으면 그것은 창이라 할 수 없습니다. 찬바람과 비바람은 막아주고 시원한 바람은 들어오도록 닫았다 열었다 하는 것이 창입니다. 항상 열려 있는 것은 깨어진 창입니다. 우리 마음의 문도 괜찮은 것은 받아들이고 나쁜 것은 들어오지 않도록 닫아야 됩니다. 마음을 지키면서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근심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근심을 하라고 하십니까? 세상 근심은 사망을 낳게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니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하라고 하십니다.
스트레스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좋은 스트레스도 있습니다. 콜레스테롤이 우리 몸에 좋지 않다고 하지만 다 좋지 않은 것만은 아닙니다. 수술한 환자들 중에서는 콜레스테롤을 많이 섭취해야 되는 환자들도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근심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좋은 근심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좋은 것입니다.
바울이 실제로 그 예를 보여 주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사랑하면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잔소리를 하게 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은 관심이 있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도 아들에게 잔소리를 했습니다. 1부 예배를 마치고 나서 아들에게 “성경 잘 읽고 있니? 오늘도 성경 많이 읽고 예배 잘 드려라.”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는 자기 분신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눈물로 세운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책망을 많이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바울이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베드로)파, 그리스도파가 뭐냐?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성령도 한 분이시고 예수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인데 왜 교회를 갈라놓느냐?”하며 고린도 교회를 무섭게 책망합니다. 3장에도 보면, “너희는 한 가족이다. 그런데 한 가족끼리 왜 시기 질투를 하느냐? 이 장로가 왜 저 장로를 시기하느냐?”하고 책망합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 교인들 중에서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죄를 짓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향해서도 강하게 책망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린도전서 3:16-17)
또 사도 바울이 세운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서 은근히 사도 바울을 따돌리고 자기가 왕 노릇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도 “너희가 왕 노릇 하는구나.”하고 책망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21절에 보면,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라고 사도 바울이 교인들을 책망합니다.
그렇게 책망하는 편지를 고린도 교회에 보내고 나니 바울은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들이 내 편지를 받고 마음이 상해서 주저앉으면 어떻게 할까? 나도 부족하면서 너무 심하게 말했나?’
그래서 디도를 보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가서 문제를 해결하라고 디도를 보냈는데, 시간이 지나도 디도가 오지 않았습니다. 바울을 미워하는 교인들이 디도를 해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괜히 그런 편지를 보냈구나.’하며 후회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따뜻한 설교, 위로의 설교, 희망적인 설교를 했을 때는 괜찮은데, 여러분을 책망하는 설교를 하고 나면 마음이 아파서 후회할 때가 있습니다.
바울도 마음이 아파서 후회하고 있는데, 디도가 밝은 얼굴로 마게도냐에 와서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바울 사도님, 기뻐하세요. 사도님께서 보내신 편지를 읽고 교인들이 사도님을 오해했다며 마음 아파하면서 회개했습니다. 지금 사도님을 매우 그리워하며 열심히 충성하고 있어서 교회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같이 부족한 사람이 갔는데도 바울 사도께서 보낸 사람이라며 두려워하고 떨면서 저를 영접하고 제 말에 다 순종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내고 나서 후회하며 마음 아파했는데, 그 편지를 읽은 교인들이 회개하고 열심을 회복하여 교회가 더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때 바울은 ‘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오히려 구원을 이루게 되는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에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해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근심해야 되는데 근심하지 않으면 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주시는 근심은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바울의 편지를 읽고 회개했습니다.
오늘날 이 편지는 무엇입니까? 설교가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다가 마음에 부담이 오거나 찔림이 올 때 그냥 지나가면 안 됩니다. 그러면 화가 오게 됩니다. 마음에 부담이 오거나 찔림이 오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 아파하고 근심하고 가슴 치며 회개할 때 큰 복에 이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무엘하 11장에 보면, 다윗이 죄에 풍덩 빠집니다. ‘풍덩’ 하는 소리를 지금의 우리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죄에 빠졌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무엇을 해도 잘되었습니다. 그의 장군들이 어디에 가서 싸워도 이겼습니다. 그러니 다윗은 마음이 너무나 편안했습니다. 요압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나가서 암몬 족속과 싸우고 있는데도 편안하게 낮잠을 즐기고, 해질 녘에는 습관을 따라 왕궁 옥상에 올라가 산책을 했습니다. 그러다 못 볼 것을 보았습니다. 한 아리따운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는 곳에 그의 시선이 닿았습니다.
아무리 점잖고 훌륭한 사람이라도 어떤 분위기가 되면 실수할 수 있습니다. 신부님들은 결혼까지 포기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신부님이 할머니 수녀님과 또 아주 예쁘고 젊은 수녀님과 함께 택시를 탔습니다. 신부님이 가운데 앉고 양옆에 수녀님들이 앉았습니다. 택시가 모퉁이를 휙 도니 신부님의 몸이 할머니 수녀님 몸에 닿았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이 “주여,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조금 후에 택시가 또 모퉁이를 휙 돌았습니다. 이번에는 택시가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 신부님의 몸이 예쁘고 젊은 수녀님 몸에 닿았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이 “주여, 뜻대로 하소서.”라고 했답니다. 누가 지어낸 이야기이겠지만, 아무리 점잖고 훌륭한 사람이라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의 부교역자들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신뢰합니다. 우리 부목사님들은 신앙의 가정에서 자란 분들로 아주 훌륭하십니다. 그러나 심방할 때 여자 교우와 단 둘이 자동차를 타거나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면 그날로 우리 교회를 그만 두게 되어 있습니다.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날 제가 새벽기도를 마친 후 자동차를 타고 혼자 집으로 가는데 한 여집사님이 버스 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비가 제법 내리고 있어서 제가 차를 세우고 집사님을 태워 드리려다가 ‘참, 안 되지. 그러면 사표를 써야지.’하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러니 우리 교회에는 사고가 없습니다. 항상 조심해서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윗이 목욕하는 여자를 보았을 때 ‘아이고, 못 볼 것을 보았네. 캄캄한 밤도 아닌데 여자가 어찌 밖에서 목욕을 하나?’ 하고 지나가야 하는데, “예쁘다, 예뻐!” 하며 계속해서 보다가 죄에 풍덩 빠진 것입니다. 저는 밧세바가 다윗을 유혹하려고 주변의 분위기도 아름답게 해놓고 다윗이 산책하는 시간에 맞추어 목욕을 했다고 봅니다. 만일 밧세바가 때를 박박 밀면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면 다윗이 유혹을 받았겠습니까? 밧세바가 아름다운 분위기에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목욕을 하니 유혹을 당한 다윗이 그를 끌어들여 함께 잠을 잔 줄로 믿습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한 후에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다 끝난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끝나지 않았습니다.
따라 합시다.
“죄는 끝나지 않는다.”
죄를 지으면 그 때부터 죄의 종이 됩니다. 가정주부가 나이트 클럽에 갔다가 어떤 남자를 만나 춤을 추고 실수를 한 후 ‘아이고, 이제 다시는 나이트 클럽에 가지 않아야지.’라고 다짐해도, 안 됩니다. 그 남자가 전화를 해서 “돈 갖고 나와. 돈 갖고 나오지 않으면 남편에게 일러바칠 거야.”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으면 그 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한 번 일을 저지른 다음 그 일을 끝내고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에게서 잉태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그 여자 밧세바는 자기 부하 장군의 부인입니다. 부하 장군은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고 있는데 그 부인을 끌어다 범했으니 얼마나 나쁜 왕입니까? 아기가 태어나면 세상 사람들이 그 사실을 다 알게 되어 “하나님을 믿는 다윗 왕이 장군의 부인을 끌어들여 아기를 낳았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망신, 자기 망신입니다.
다윗은 그 일을 덮으려고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 장군을 급히 불러들여 휴가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충성심이 특심한 우리아 장군은 “내 상관과 부하들이 지금 전장에서 생명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집에 가서 아내와 편안히 잘 수 있겠나?” 하며 집에 가지 않고 왕궁 문에서 신복들과 함께 잤습니다. 다윗은 자기 계획대로 되지 않으니 우리아를 불러 술을 권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 한두 잔만 마시지 취하도록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우리아를 술에 취하게 하여 술기운에 집에 가서 자도록 하려고 자꾸 술을 권했습니다. 우리아는 왕이 주는 잔이라 거절하지 못하고 마셔서 술에 취했지만 그 날도 집에 가지 않고 왕궁 문에서 잤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요압 장군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우리아 장군이 돌아가거든 최전방에 보내어 죽게 하라.’
편지를 받은 요압 장군이 우리아 장군을 최전방으로 보내어 적의 손에 죽게 했습니다.
너무 고집을 부리면 좋지 않습니다. 우리아가 고집을 부리지 않고 집에 가서 잤으면 죽지 않았을 텐데, 고집을 부리다가 죽었습니다.
그 보고를 받은 다윗은 밧세바를 왕궁으로 데리고 와서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마음에 가책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의 왕들은 예쁜 여자를 보면 그 남편을 죽이고 여자를 빼앗는 일을 예사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자기 아내 사라가 너무 예쁘니 사라 때문에 자기가 죽을까 봐 사라에게 오빠라고 부르게 한 것입니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께서 괘씸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셨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와서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왕이여, 한 성에 사는 두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은 부자라 양과 소가 많았고 다른 한 사람은 가난해서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암양 새끼를 자기 딸처럼 사랑했습니다. 그 암양을 그의 자식과 함께 키우고 그의 먹는 것을 먹이며 그의 품에서 재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잣집에 손님이 오니 그 부자가 자신의 양을 잡지 않고 가난한 사람의 양을 빼앗아 손님에게 대접했습니다.”
나단의 이야기를 듣고 다윗이 노하여 말했습니다.
“그렇게 악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맹세코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리고 그가 빼앗은 양의 네 배를 갚아야 한다.”
그러자 나단이 말했습니다.
“왕께서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왕을 택하셔서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시고 사울 왕의 칼에서 구원해 주셔서 이 나라를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처를 주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부족하면 더 주실 터인데 어찌 하나님을 멸시하여 우리아를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아 취하셨습니까? 그것 때문에 왕의 집에 칼이 떠나지 않을 것이고 왕의 처들이 백주에 다른 사람에게 당할 것이고 재앙이 계속 될 것입니다.”
그때 다윗이 “감히 왕 앞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하며 나단을 칼로 칠 수 있는데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하며 근심하고 애통해 하며 베개가 눈물에 젖도록 울며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죽지 않고 하나님께 용서받았습니다. 만일 그때 다윗이 근심하지 않고 애통해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죽이셨을 것입니다.
한 권사님에게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모 병원의 마취과장으로 아주 착실한 의사였는데 나이트클럽에 한 번 갔다가 그곳의 여자에게 빠져 삼 년간 외도했습니다. 나중에는 교회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내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얼마 후 나이트클럽의 여자가 그를 죽였습니다. “당신 부인과 이혼하고 나랑 결혼해요.”하며 졸라대는 여자에게 “내가 너를 좋아하지만 내 아내와 이혼은 할 수 없다.”라고 하니 그 여자가 앙심을 품고 의사를 잠들게 한 후 그 방에 연탄불을 피워 놓고 도망을 간 것입니다. 그래서 34세밖에 되지 않은 그 젊은 의사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었습니다.
발인 예배를 드리고 관을 차에 옮길 때 그 의사의 어머니인 권사님이 제 손을 붙잡고 놓지를 않았습니다.
“목사님, 오늘이 우리 아들 생일입니다. 생일날에 장례식을 합니다.”
저는 그 말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도 그 의사를 몇 번이나 만나서 제 자리에 돌아오도록 권면했지만 교회에 나오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빨리 회개했으면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씀으로 감동을 주어 회개하게 할 때는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 말씀을 듣는 중에 ‘집사인 내가 이런 일을 하면 안 되는데……. 그런 곳에 가면 안 되는데……. 내가 왜 이러지?’ 하는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그런 분은 오늘 이 시간에 근심하고 애통하는 회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것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냥 두면 안 됩니다.
따라 합시다.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느니라.”
술은 음식입니다. 디모데전서에 나오는 대로 포도주 같은 것은 조금만 쓰면 약이 되기도 하지만 노아처럼 많이 마시면 추태를 부리게 되고 방탕하게 되는 것입니다. 담배는 음식이 아닙니다. 그리고 백해무익한 것이니 피우지 않아야 됩니다. 특히 교인은 담배를 피우지 않아야 됩니다. 그러나 새 교우는 담배를 피우면서 교회에 나와도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 되었는데도 계속해서 도둑 담배를 피우는 것은 잘못입니다. 헌 신자가 담배를 피운다면 담배를 앞에 놓고 ‘담배 하나 끊지 못하다니! 담배 한 개비가 나의 생명을 5분씩 단축시키는데 내가 왜 이것을 피우나? 이것 하나 못 끊는 남자가 무슨 일을 하겠는가?’하며 근심해야 됩니다.
어느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불조심 포스터를 그리게 했답니다. 그때 한 학생이 이런 재미난 포스터를 그렸답니다. 담배를 물고 있는 소에게 개가 라이터 불을 켜서 담뱃불을 붙여 주는 그림을 그리고 그 아래에 ‘소나 개나 불조심’이라고 썼답니다.
그런데 소는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소가 미련해도 몸에 좋지 않은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개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에 좋지 않는 담배를 한 개비도 피우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5분씩 갉아먹는 담배를 피워서 되겠습니까? 담배를 앞에 놓고 근심하고 애통해 하며 끊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것 하나 못 끊어서 되겠습니까? 끊게 해주세요. 끊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근심해야 할 것이 죄뿐만이 아닙니다.
제가 전에는 개인 전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기차를 타면 기차에서 전도하고 군에 가면 군에서 전도했습니다. 그런데 말씀 준비에 전념하다 보니 전도를 거의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특별히 전도에 대한 설교를 하고 나면 마음이 더 무거웠습니다. 하루는 어느 성서학자가 쓴 책을 읽는데 거기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양이 새끼를 낳지, 목자가 새끼를 낳느냐? 목자는 양에게 꼴을 잘 먹이면 된다. 목사는 전도하러 다니지 말고 교인들에게 열심히 전도하게 하고, 말씀을 잘 먹이도록 해야 된다. 그래야 교회가 된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한참을 그냥 지냈습니다. 그런데 전도에 대한 설교를 할 때마다 다시 마음이 아파 오고 무거워졌습니다. 하루는 기도하는데 성령께서 ‘너 왜 요즘에는 전도하지 않느냐?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우물가 뙤약볕에서 기다리고 계시다가도 전도하셨는데 네가 왜 전도하지 않느냐?'라고 책망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그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하자.’라고 다짐했습니다. 요즘에는 전도지를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전도합니다.
지난 주 집회 기간에 잠시 시간을 내어 강사 목사님을 모시고 거제 포로 수용소를 다녀왔습니다. 강사 목사님 부친께서도 목사님이신데 거제 수용소에서 군목으로 섬기셨다고 하셔서 특별히 함께 다녀왔습니다. 그날 새벽 기도 시간에 “하나님, 오늘은 배를 타고 거제도에 갈 겁니다. 도와 주세요.”라고 기도하는데 ‘거제도에 갈 때 배의 승객들에게 전도하자. 한 시간 동안 배를 타고 가면 심심할 텐데 전도지를 읽게 하자.’하는 감동이 왔습니다. 또 사탕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사탕도 준비했습니다. 전도지만 주는 것보다 사탕도 주면 더 좋을 것 같아서 전도지와 사탕을 가방에 넣어 가지고 배를 탔습니다.
저는 평일에 거제도에 가는 사람들은 수수한 시골 사람들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과는 달리 배를 타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거의 다 반짝반짝 했습니다. 특별히 한 사람은 어깨에 힘을 주고 서 있었는데 굉장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 사람 옆에 수행원 일곱 사람이 붙어 서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더니 그 사람에게 “승진을 축하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제 마음이 복잡해졌습니다.
‘저렇게 힘을 주고 서 있는 사람에게 사탕을 주면 받겠나? 시골 사람들은 사탕을 주면 좋아하겠지만 저 사람들이 사탕을 받겠나?’
배에 올라 자리에 앉아서 ‘주님, 제가 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목에 힘을 준 저 사람을 보니 전도를 못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더니, 성령께서 ‘그 사람은 흙덩어리다. 목에 힘을 주었지만 그 사람은 흙덩어리에 불과하다.’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마음을 크게 먹고 웃으며 사탕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박실장님이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제가 사탕을 주면서 “심심한데 사탕 드세요.”라고 하니 “무슨 의미로 주세요?”하고 묻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냥 드리는 거예요.”라고 대답하는 제 바로 뒤에서 점잖은 우리 박실장님이 전도지를 내밀었습니다. 목에 힘을 준 그 사람에게도 사탕을 주었더니 그 사람이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했습니다. 한참 사탕을 나누어주고 있는데 멋있는 어떤 부인이 저를 보고 “아이고, 우리 앞동에 사시는 목사님이시네요.”라고 했습니다. 또 배의 구석에 가니 우리 교우가 있었습니다. 그날 배의 구석구석까지 다니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생각하니 배의 선장과 기관장에게는 전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래도 그날 ‘아, 오늘은 많은 사람에게 전도를 했구나.’하는 마음에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습니다.
성령께서 근심하게 하실 때 우리가 근심하고 결단하면 구원의 길이, 기쁨의 길이, 축복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끊으면 하나님의 선물이 옵니다. 예레미야 5장 25절에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시는 복이 우리에게 다가오다가 우리에게 죄가 있으니 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끊으면 축복이 계속해서 올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조금 더 전진하여 우리가 충성하면 상이 옵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아도 충성하지 못하면 ‘내가 이래서 되겠나.’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록펠러는 40대에 세계적인 재벌이 되고 50대에 세계 최고의 재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건강이 나빠져 의사로부터 일 년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내가 사업가로서는 성공했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죽게 되는구나.’하며 근심했습니다. 그때 담임 목사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록펠러씨, 당신이 벌어놓은 그 많은 돈으로 무엇을 하실 겁니까? 당신이 돌아가시면 그 많은 재산이 어떻게 될까요?”
따라 합시다.
“가진 것은 책임이다.”
남보다 더 많이 배웠거나 더 많이 가진 것이 있는 사람은 그에 대한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도 책임이 큽니다.
록펠러가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갈 때 40분 일찍 가서 기도하고 십일조도 드렸지만, 그 때까지 충성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건강이 나빠져 일 년 안에 죽을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기도하며 근심하니 목사님 말씀이 떠올라 충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내가 죽으면 이 재산이 무슨 소용이 있나?’
그래서 그는 6000개 교회에 파이프 오르간을 봉헌하고, 대학을 60개나 세우고, 곳곳에 교회를 지었습니다. 뉴욕 강변에는 세계적인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일 년 안에 죽을 줄 알았던 그가 일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나도 죽지 않고 점점 건강해져 백 세 가까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돈을 아끼지 않고 사용하니 사업도 더 흥왕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근심하게 하실 때 근심하면 복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때때로「지금까지 내가 한 일 주께서 보시고 훗날에 나를 보고 무어라 하실까」하는 찬송을 부릅니다.
그리고 고민합니다.
‘내가 이렇게 좋은 차를 타도 괜찮은가? 내가 이렇게 살다가 주님을 만나도 괜찮은가? 내가 이렇게 어머니를 섬기다가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면 어떻게 할까?’
그러나 이런 근심, 이런 고민은 절대로 우리에게 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복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복이 되는 것입니다.
교인이 삼백 명쯤 되는 미국의 어느 교회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 교회에서 일하던 관리 집사님이 사표를 내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목사님이 기도를 하는데 그 마을의 한 청년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그 청년은 술꾼, 도박꾼으로 소문난 방탕한 청년이어서 아무도 그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완전히 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앞길이 구만 리 같은 청년을 구해주고 싶어서 그 청년을 불렀습니다.
“자네, 우리 교회의 관리인이 되어 청소도 깨끗이 하고 교회를 관리해 주게. 그러면 교회에서 매달 월급을 줄 걸세.”
“목사님, 저 같은 술꾼에게도 일을 맡기십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청년은 교회에서 일하면서도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여전히 방탕했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하나님 앞에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나 같은 몹쓸 인간을 목사님께서 특별히 택하셔서 일을 맡겨 주셨는데, 이런 좋은 기회를 주셨는데 방탕한 생활을 계속하면 되겠나?’
그는 고민하다가 회개하고 술과 담배를 끊었습니다. 방탕한 생활을 끊고 귀하게 살았습니다. 그의 삶이 귀하니 교회에서 그에게 교사 일도 맡겼습니다. 그는 교사 일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다 좋은 직장에 취직이 되어 그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얼마의 세월이 지난 후 목사님도 그 교회를 사임하고 다른 교회로 가게 되었습니다. 새로 부임할 교회에 갔더니 그 교회의 책임자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사택이 계획한 대로 완공되지 않아서 며칠만 우리 교우 댁에 계셔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 댁에 가시면 목사님께서 깜짝 놀라실 겁니다.”
그리고는 목사님을 으리으리한 저택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그 집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이 있어서 보니 전에 교회를 관리했던 청년이었습니다. 그 청년이 바로 그 집의 주인이었습니다. 목사님이 깜짝 놀라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니, 그의 변한 모습에 감동을 받은 재벌 삼촌이 그에게 큰 재산을 떼어주어서 그것으로 은행을 세우고 은행장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고마워 은행장이 되어서도 교회 청소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가 청년 시절에 교회 일을 하면서도 그대로 방탕하게 살았다면 그런 길이 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근심하고 애통하며 방탕한 생활을 끊으니 새 길이 열린 것입니다.
아무리 경제가 어려워도,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길은 있습니다.
우리가 근심하고 애통하며 바르게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된 길로 인도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하는 근심
고후07장 08~16절 / 이필재목사
우리 인간과 동물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살아갑니다. 본능만 채워지면 그만입니다. 배만 부르면 그 이상은 필요 없잖아요? 사자들을 보십시오. 배가 고플 때는 그렇게 사력을 다해서 먹잇감을 추격하고 자연스럽게 뜯어먹잖아요? 일단 배가 부르면 먹잇감들이 바로 옆에 있어도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그게 동물입니다. 그런데 비해서 우리 인간은 지금보다도 앞날을 생각하는 미래 지향적 삶을 삽니다. 오늘 고생스러워도 미래 보장이 있기 때문에 그 고생을 즐겁게 감수합니다. 오늘 배고파도 배부를 내일을 생각하면서 참고 견디고 고생을 감수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러다 보니 생기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항상 미래 불안입니다. 미래 지향적 존재라서 생기는 미래 불안이 있습니다. 이 미래 불안이 곧 근심으로 변해서 마음의 불편을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 중에서 지나간 일에 대한 평가를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만이 가진 하나의 인간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 바울은 8절에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라는 말로 오늘 성경말씀이 시작이 되었는데 이 “후회”라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의 아름다운 능력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동물들은 후회를 안 하잖아요? ‘아! 이때 내가 잘못했다.’ 이것은 아주 아름다운 인간 모습입니다. 지난 일을 평가하고 그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는 의미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바울에 대해서 아주 좋지 않은 말을 하고 “사도도 아닌데 사도라고 하고 속여서 많이 빼앗아 가고…….” 이런 말을 합니다. 교회가 많이 어지러워졌을 때 바울은 그 소리를 듣고 얼마나 화가 납니까? “뭐라고? 내가 무엇을 빼앗았는데?” 사실 그런 오해를 받을 때는 참 속상합니다. 그래서 과격스러운 표현의 편지를 그 사람들에게 보냈습니다. 나한테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한번 해볼래?” 그래서 그것을 지금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심하게 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과격스럽게 책망을 한 것이 내 마음에 과거에는 후회감을 주었는데 그 과격한 책망 편지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이 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시켜서 현재 상황을 바울에게 잘 전해 주었기 때문에 이 편지의 내용은 그동안에 있었던 피차의 오해가 완전히 풀린 것에 대한 기쁨으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여러 가지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자녀들과 관계가 불편해질 때가 있죠. 요즘은 자녀 출산이 하나 또는 둘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전부 왕자나 공주 분위기로 성장을 합니다. 선생님에게는 마땅히 종아리를 맞아야 교육이 되는데도 맞았다 하면 엄마들이 가서 따지니까 ‘한국 교육이 이렇게 무서워졌구나!’ 이런 생각이 많습니다. 옛날에는 가난한 집안에는 아이들이 더 많았습니다. 10명도 있었습니다. 엄마, 아빠들이 그 아이들은 돌봐주기 힘들잖아요? 그러니까 아이들 보고 부모들의 언사가 항상 조폭 같습니다. 말썽이나 피었다 하면 우선 뺨따귀부터 하나 올라갑니다. 그러면 귀사대귀라고 합니다. “나가서 죽으라.”라 하지 않고 “나가서 뒈지라.”라고 합니다. 다 그렇게 자랐습니다. 그런데도 안 뒈지고 잘 살았습니다. 일 년에도 뺨따귀 수없이 맞고 그 소리 수없이 들으면서 다들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과격한 부모들이 자녀한테 진짜 혼나는 때가 있습니다. 진짜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아니, 어디 간 거야?” “나가라고 했잖아?” 연락도 안하고 “잘 먹고 잘 살아라. 나가서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 행방불명이 됩니다. 지금과 같이 사람을 찾던 시스템이 되어있는 때가 아닙니다. 그래서 한 달, 두 달 안 들어오면 후회합니다. “내가 지나쳤나? 이놈이 나가랬다고 정말 나가?” 이렇게 자녀들 관계가 험악해질 때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신문광고란에 많이 나왔습니다. 요즘에는 아무리 봐도 그런 광고가 없습니다. “아무개, 아무개야! 돌아오기만 해라. 아버지, 어머니가 잘못했다. 모든 문제는 다 해결했다.” 옛날에는 많이 났습니다. 그런 관계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의 글 속에도 과격 용어가 많습니다. 뭐라고 합니까? “그런 용어는 교회에서 내어 쫓아라. 그런 사람은 불신자보다도 더 악한 자니라.” 나옵니다. 그래서 너무 지나치게 과격 용어를 사용한 것에 대한 후회를 했는데 그러기 때문에 온 하나의 좋은 결과가 “디도를 통해서 내가 들었으므로 너무 기쁘다. 과거에 내가 너무 과격한 용어를 쓴 것을 후회한다.” 이렇게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후회는 일종의 회개 운동에 속합니다. 바람직한 인간의 발전적 기회라고 평가할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인 과격책망 편지로 인해서 후회감에 빠졌던 이 바울이 그 일로 아름다운 일이 생긴 것에 대한 기쁨을 나타내면서 한 가지 진리를 만들어냈습니다. 10절입니다. 다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무엇이고 세상 근심이 무엇인가? 이것을 한번 구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같이 늘 설교를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설교를 하고 나서 ‘오늘 내가 설교를 잘 했나? 혹시 잘못한 부분이 있는가, 없는가?’ 이것은 설교자들에게 항상 따라오는 스트레스입니다. 야고보 감독이 예수님의 친동생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맡아서 30년을 목회한 초대교회 최고의 지도자입니다. 그 일을 마치면서 야고보서에 기록했잖아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의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이렇게 말한 것은 자기가 돌아보니까 잘못한 부분들이 많이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근심이고 무엇이 세상 근심인가? 여러 가지 이유나 조건들을 말할 수 있다고 보는데 먼저 이 걱정과 근심을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최소화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먼저 필요합니다.
우리가 흔하게 사용하는 단어 가운데 “기우”라는 말을 씁니다. 중국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옛날 중국에 “기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조그만 나라에 이상한 사람이 하나 있어서 소문이 나서 이 한반도까지 소문이 온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날마다 그 사람은 평생을 걱정 근심을 하는데 무슨 걱정 근심을 했느냐? ‘이러다 땅이 꺼지면 어떡하나?’ ‘이러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면 어떡하나?’ 이런 걱정을 그렇게 많이 해서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을 공연히 걱정할 때는 “기우야! 당신들 기나라 사람들과 똑같아. 그게 왜 그렇게 돼?” 그런데 기우적 걱정근심에서 해방되는 거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벗어나지 못합니다. 미래지향적 존재가 되다 보니까 지나치게 기우적 미래 불안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많은 사람의 근심과 걱정은 이미 지나간 일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유난히도 과거 정리가 어려운 민족이 바로 우리 백성이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수백 년 전에 지나간 일을 지금 그것을 가지고 현재 불안을 만드는 일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심합니다. 내가 증거를 대볼까요? 태재고개를 넘어가서 조금 가다가 왼쪽으로 좌회전하면 정몽주 선생의 묘지가 있잖아요? 정몽주 선생은 고려 말년 충신으로서 이성계와 정적이 되어서 서로 안 좋다가 600년 전에 이방원과 조영규를 시켜서 선죽교에서 살해되었잖아요? 그래서 그 600년 전 일 때문에 지금도 정몽주 후손과 이성계 후손은 결혼을 안 합니다. 600년 전 일입니다. 하나님은 지나간 죄인은 기억도 안하시겠다고 하셨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그게 안 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파벌 싸움이 많은 것입니다. 과거를 전혀 용서를 못합니다. 가장 큰 세상적 근심은 내 뜻과 내 소원대로 되지 않는데 대한 불안감 때문에 날마다 기우에 우리가 기울어지게 됩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 집니다. 절대로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데 바로 그 갈등 부분이 항상 나에게 걱정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뜻은 어쩔 수 없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을 해야 되는데 그것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저는 결혼 주례하는 날 일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가 많습니다. 날씨가 아주 맑고 좋은 날은 “보십시오. 오늘 두 사람이 결혼 하는 날은 하나님인 날씨까지 이렇게 맑고 밝은 날을 주셔서 저 강렬한 태양빛을 보십시오. 이것은 신랑, 신부의 앞날이 오늘과 같이 환하게 빛나게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아주 기분 좋아합니다. 비가 오면 “하늘에서 내리는 것은 다 하나님의 축복 사인입니다. 오늘 이 결혼식 날 복비가 이렇게 철철 넘치니 신부, 신랑 앞날은 복이 철철 넘쳐 강물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또 좋아합니다. 비는 안 오는데 구름만 잔뜩 껴있는 날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여호와께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도 밤의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로다. 이 구름은 어떤 장애물에 대한 방어용어로 성경에 많이 나와 있잖아요? 앞으로 일평생 살아가면서 어떤 장애가 나타날 때 하나님이 구름으로 가려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살기 편안하잖아요? 권사님이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에 하도 비가 쏟아져서 하관 작업을 못할 만큼 어려웠습니다. 장의사에서 천막을 하나 쳐주어서 천막 안에 모두 모여서 하관 예배를 드리니까 상주들이 조문객들에게 미안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이는 겁니다. “어휴! 어떡하나? 이렇게 비가 많이 오니…….” “가만히 계십시오. 부담 갖지 마십시오.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님도 운명하실 때 큰 맑던 날이 별안간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는데 이 권사님을 얼마나 주님이 사랑하셨는지 오늘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것은 주님도 슬퍼하시는 겁니다. 눈물 흘려주시는 것입니다. 본래 유명한 사람들의 장례식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모차르트의 장례식도 이렇게 비가 왔습니다. 이 권사님이 노래를 잘하셔서 모차르트 같이 비가 오는 겁니다.” 말씀 드렸습니다. “사람이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우리 모두가 슬퍼 마음이 젖었는데 옷까지 젖게 해주는 것입니다. 옷이 젖으면 세탁하면 되지 그게 뭐가 그리 큰 문제입니까? 괜찮습니다.” 이 기우에 젖어들면 우리 삶의 자연스러운 진행도 걱정을 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늙어갑니다. “어떡하지? 점점 늙어!” 그러면 점점 젊어지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자연스러운 인생의 지혜인데 뭐가 그리 슬픕니까? 늙는 것을 서러워하면 더 빨리 늙습니다. 누구든지 병이 납니다. 누구든지 죽습니다. 기우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종류의 걱정, 근심이 너무 많습니다. 거기서만 해방되어도 삶이 행복하고 기쁩니다. “항상 걱정하라. 쉬지 말고 고민하라. 범사에 원망하라. 이는 너희를 향하신 마귀복음 1장 1절이니라.”
여러분! 이런 정의를 한번 해보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큰 근심이 하나 생겼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한 가지를 잘 생각하면 해결이 됩니다. 근심거리가 있습니다. 이 어려운 문제가 내 근심을 통해서 해결된 것인가, 아닌가? 해결된다면 근심을 해야 됩니다. 그러나 해결이 안 됩니다. 근심할수록 안 됩니다. 두 번째! 그 근심이 당신의 건강의 문제가 아니라면 해방을 받으라. 왜냐하면 다른 것들은 또 얻을 수 있는 것이니까! 돈도, 명예도, 이웃 관계도 다 좋아질 수 있습니다. 건강의 문제가 아니라면 어떤 것도 또다시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니까! 만약 지금 나의 큰 근심이 건강 문제라면 한 가지만 생각하면 됩니다. 고칠 수 있는 병인가, 불치의 병인가? 고칠 수 있다면 근심하지 말라. 고칠 수 있으니까! 그 다음에 고칠 수 없는 것이라면 죽을 것인가, 아닌가만 생각하자. 마지막에 가서 만약 죽을 것이라면 한 가지만 생각하면 해결이 됩니다. 천국에 갈 확실한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그러면 다 해결이 됩니다. 해결이 안 되는 거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평생을 통해서 이렇게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모든 전체가 다 하나님 나라 가려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천국 가기 원하는 사람 다 손들라고 했더니 다 손들어서 오늘 가면 어떠냐고 했더니 하나도 안 들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오늘 이 바울은 근심을 하려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소원을 이 세상에서 더 많이 이루어드릴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전도해야 되고, 어떻게 봉사해야 되고, 어떻게 드릴 것이며, 어떻게 선교를 효과 있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내가 하나님께 더 크게 쓰임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근심을 하라 이겁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어떻게 저 놈의 고집불통의 남편을 예수 믿게 할까?’ 근심해도 괜찮다 이겁니다. ‘어떻게 해야 저 시어머니를 내가 사랑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근심은 할수록 좋다 이겁니다. 지금 바울은 고린도 교회 때문에 근심했던 모든 일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좋은 결과가 되었음을 기뻐하는 겁니다. “내가 너무나 화가 나서 내가 그렇게 헌신적인 목회를 하고 나를 통해서 예수 믿게 된 사람들이 나한테 그렇게 안 좋은 이야기를 하니까 화가 날 거 아닙니까? 그래서 과격한 용어로 편지를 썼는데 그것 때문에 좀 근심을 했으나 그 편지가 오히려 맞다. 바울 사도의 이 말이 맞다. 그래서 오히려 좋은 회개에 이르러서 지금 사이가 아주 좋아진 것에 대해서 잠시 근심이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오게 했다.” 이러는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 지금은 완전히 서로 신뢰하게 되어서 너무 기쁘고 모든 오해가 다 풀리고 피차 신뢰 회복이 이루어졌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의 성격은 두 가지 관계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교인과 우리 목사, 그리고 우리 교인과 교인 이 사이가 몇 가지 비유로 설명할 수 있는 그런 관계성을 이루는데 첫째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성에서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관계성은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사실 나와 관계가 먼 사람들과는 아무 문제가 안 생깁니다. 관계가 멀기 때문입니다. 남의 부인과 싸우는 사람이 있습니까? 싸울 일이 없잖아요? 그러나 자기 부인과는 부부 싸움을 하잖아요?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 공동체도 바로 한 공동체에 있기 때문에 생기는 어쩔 수 없는 부작용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됩니다. 고린도 교회도 지금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성은 가깝다보니까 원망과 신뢰가 항상 교차됩니다. 부모와 자식도 원망스러울 때가 많잖아요? 관계성이 부모와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부모와는 아무 관계성이 없기 때문에 무슨 문제도 안 생기잖아요? ‘아버지, 어머니가 나한테 좀 더 잘해줄 수 있을 텐데 움켜잡고 주지도 않고 다 사셨는데 얼마나 더 사시려고 저렇게 잔뜩 가지고 계시다니…….’ 이렇게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부모님은 희생 그 자체라고 고맙게 느낄 때도 많이 있습니다. 이 관계성은 어쩔 수 없이 일생동안 up and down 되면서 항상 그렇습니다. 교회가 그렇습니다. 자식과 부모가 그렇습니다. 또, 연애하는 사랑관계로 나타납니다. 연애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주 작은 것도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항상 삐칩니다. 왜 삐치는 겁니까? 가깝기 때문에 삐치는 겁니다.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 왜 삐칩니까? 삐칠 이유가 없잖아요? 그런데 가깝게 사랑하다 보니까 조금만 것도 섭섭해서 삐치는 겁니다. 이 교회가 그렇습니다. 항상 우리는 여기 모입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누구와 시간을 제일 많이 보냅니까? 이 교회를 늘 나오시는 분들은 새벽에 나오지요? 또, 여선교회, 남선교회, 봉사회, 선교회 항상 먼저 나옵니다. 주일날 나오지요, 수요일 날 나오지요, 낮에 나오지요, 밤에 나오지요, 생일날 만나지요. 그러다가 “먹자” 하면 또 만나지요. 집안 식구들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 가까운 사이에 그런 문제점이 발생합니다. 고린도교회가 그래서 이런 문제들이 어떻게 보면 꾸질꾸질스러운 이야기같이 다 들리는 겁니다.
해결 방법이 뭔가? 세상 기준에서 하나님의 구원기준으로 가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려는 것이지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당신과 내가 만난 것은 우리 만남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에 한 동반자로 이렇게 만나서 우리가 일을 하나는 것이지 세상 기준으로 보면 아무 할 일이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세상적 근심을 하나님의 구원 중심적 근심으로 바꿀 때 모든 문제는 해결된단 말입니다. 삶의 목표와 그리고 방향이 아주 뚜렷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위하여! 그럴 때 이 공동체는 아주 훌륭해지는 겁니다. 교회가 목표를 정한 것이 세상적일 때는 그 교회는 큰 시험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초점을 맞추어서 모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모든 만남이 그것을 위해서 할 때 아름답게 된단 말입니다. 오늘 이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고 잠시나마 아주 관계가 험악해진 것에 대한 후회가 오히려 나중에는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인데 우리들의 모든 관계도 넉넉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적으로 말을 하면 오해될 일도 많고 슬픈 일도 많지만 이것은 다 하나님의 인간 구원을 위한 쓰임을 받기 위한 그런 관계에서 우리가 이렇게 된 일이니까 그 관점에서는 오해될 것도 없고 삐칠 것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 16절을 다 같이 읽는 것으로 끝나겠습니다. 16절 말씀 마지막을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 아멘!
유익한 근심
고후07장 10절 / 김홍도목사
대부분의 근심, 걱정은 건강에도 해롭고 영적으로도 해롭습니다. 모든 질병의 80% 이상이 근심, 불안, 스트레스 때문에 생긴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익한 근심이 있습니다. 꼭 해야 될 근심이 있습니다. 해야 될 근심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 10절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가령 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 교통사고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제멋대로 운전한다면 해가 지기 전에 시체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1. 유익한 근심
① 자기의 영적 상태를 위해 하는 근심
예수님의 8복 가운데 두 번째 복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라고 했습니다. 자기 죄에 대하여 애통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죄 사함의 기쁨이나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14살에 유부녀와 간통하여 사생아를 낳을 정도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했습니다. 죄악된 생각이 날 때마다 팔뚝을 물어뜯으며 몸부림을 치며 통회했습니다. 너무 애통하다가 졸도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그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자가 되었습니다.
에스겔 9장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이 예루살렘에 임하는 모습이 있는데 그 이유는 예루살렘과 그 성전에까지 동서남북에 우상이 가득하고 거기 절할 뿐 아니라 성전 안에서 동방 태양에 엎드려 경배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 성읍을 관할하는 천사들이 각각 먹 그릇을 차고 돌아다니며 이마에 표를 하는데, 9장 4~5절에 보면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아껴 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라고 하시며 6절에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즉 남녀노소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모조리 다 죽이되 그 죄악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 이마에 표를 받은 사람들은 해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성읍과 성전의 죄악으로 인하여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데 그 죄악을 안타까워하며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는 표를 해두었다가 심판을 면하게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6~7절에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성전을 더럽혀 시체로 모든 뜰에 채우라…”라고 했습니다. 거룩해야 될 성전에서 죄를 지을 때 먼저 무서운 심판을 행하셨다는 것이고 “늙은이들부터 시작하라” 하신 것은 “영적으로 늙은 자”, 난 아래 주를 보면 “장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가 되어야 할 “늙은” 혹은 “장로”들을 심판하라는 말씀입니다.
죄악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울어야 할 텐데 근심도 탄식도 하지 않으므로 심판 받은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예수님 믿으면서도 술이나 담배를 끊는 못하는 문제도 그것 때문에 근심하고 애통하는 마음이 강하면 얼마든지 끊을 수 있습니다. 즉 술, 담배 먹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하냐, 그것 때문에 근심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더 강하냐, 둘 중에 강한 편이 승리하게 됩니다.
시편 32편 3~4절에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한 다윗이 그의 죄와 심령상태를 위하여 얼마나 애통하며 안타까워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근심은 대단히 유익한 근심입니다.
② 나라를 위한 근심
우리가 잘못 생각하기 쉬운 것은 우리는 장차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이니까 세상 나라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도 죄 값으로 장차 멸망할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시며 우셨습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모세도, 이사야나 예레미야도 모두 애국자였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예레미야애가 2장 11절에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처녀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혼미함이로다”라고 했고, 18절~19절에 “…시온의 성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로 쉬게 하지 말지어다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북한 주민의 형편이 이와 같고, 만일 적화통일이 된다면 남한도 그 꼴이 되고 맙니다. 예레미야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듣기 싫어하는 말씀을 곧이곧대로 선포하니까 그를 때리고 옥에 가두고 온갖 핍박을 다 가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도 “이제는 바른 말하지 말아야 되겠다”라고 생각하면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쳐 견딜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20장 8~9절에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치욕과 핍박이 너무 심해서 “에이! 이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아야지” 하면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쳐서 견딜 수 없다고 탄식하며 근심한 모습을 봅니다. 이렇게 나라를 위해서 근심하며 탄식하고 우는 사람이 있어야 그 나라가 보존됩니다.
디모데전서 2장 1절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나라를 위하여 근심하는 사람이 기도하게 됩니다. 나라가 공산화의 위기에 처했는데 근심도 하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공산화 통일이 된다면 교회는 다 파괴되고 크리스천들은 다 죽거나 투옥되거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죽도록 일하다 죽게 되는데 걱정이 안 됩니까?
③ 교회를 위한 근심
참 신앙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고 위하여 근심도 하고 걱정도 하게 마련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근심도 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도 하지 않고 헌신도 하지 않습니다. 학개서에 보면 하나님의 성전은 황무해졌는데 그것을 걱정하지 않고 자기들은 고급 저택, 판벽한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전 건축할 시기가 아니라고만 할 때에 하나님이 책망했습니다.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학1:4). 성전에 무관심한 죄 때문에 한재, 풍재가 임하고 돈을 벌어도 뚫어진 전대에 넣는 것 같아서 다 새어나가고 만다고 하셨습니다. 교회 일을 내 집 일보다 더 생각하고 염려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어찌 귀히 여기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교회야 파괴되든 말든, 망가지든 말든 자기의 세력이나 확장하고 인기 놀음이나 하고 파당이나 만들면서 교회를 전혀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를 먼저 생각하고 근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교인들을 분류해 보면 세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① 사글셋방 같은 교인, ② 전세방 같은 교인, ③ 내 집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사글셋방 같은 교인은 교회에 대한 아무런 애착이나 걱정도 전혀 하지 않고 의무상 예배만 드리고 헌금대 돌아갈 때 잔돈푼이나 집어넣고 떠날 때는 미련 없이 떠나는 교인이요, 전세방 같은 교인은 “내 교회”란 생각 없이 얼마동안 다니다 옮긴다는 생각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입니다. 사글셋방이나 전세방 사는 사람들은 집이 망가지든 말든 아무런 애착도 없고 근심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를 사랑하거나 근심하지 않는 교인들입니다. “내 집” 같은 교인은 교회를 위하여 늘 근심하며 헌신,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자자손손 뿌리를 내리며 교회 중심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를 내 집보다 더 사랑하면서 근심하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복된 근심입니다.
2. 유익한 근심으로 얻는 복 영적으로 하는 근심 혹은 심령상태를 염려하고 근심하는 사람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가?
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얻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한 말씀대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긍휼히 여기심을 받고 특별한 보호를 받습니다. 에스겔 9장에 있는 말씀대로 성전이 더렵혀짐과 나라의 죄악을 인하여 “울며 탄식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임할 때 특별히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 것같이 이런 거룩한 근심을 하는 사람들은 특별히 긍휼히 여기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② 기도의 힘을 얻게 됨
거듭난 신자는 영적인 부담감을 갖고 살게 되는데 그 영적인 짐이 기도로 변하여 기도해야 그 근심의 짐이 덜어집니다. 나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영적 상태를 걱정하고 탄식하면서, 기도하는 사람이 될 때 정상적인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영적인 근심과 걱정은 기도의 힘을 얻게 합니다.
③ 능력을 받게 됩니다
저의 경험으로는 다음 주일에는 무슨 말씀을 전해야 하나 하고 걱정을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하면 그 주일에는 그만큼 큰 능력이 나타나고 은혜를 많이 끼치게 됩니다. 그러나 별 걱정을 하지 않고 책만 보고 준비해서 강단에 서면 능력이 안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무거운 짐을 느끼지 않고 걱정하지 않고 강단에 서면 은혜가 넘치지 않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대로 제가 아는 모 교단의 교단장 김 목사님은 미국에서 연합 부흥회 인도를 부탁받았는데 중학생 실력도 안 되는 영어로 설교를 해야 되니 얼마나 걱정이 되었겠습니까? 거의 두 달 동안을 “주님, 어떻게 합니까?” 걱정을 하며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무릎 꿇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웬 일입니까? 강단에 서자 능력이 임하는데 쥐 뜯어먹은 것 같은 영어로 떠듬떠듬 한마디씩 하는데도 막 회개가 터지고 눈물, 콧물 흘리고 방언들을 하기도 하고 청중이 삼단 쓰러지듯 쓰러지며 은혜를 받더랍니다. 그 능력이 왜 나타났습니까? 영적 부담감을 갖고 걱정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전광훈 목사님이 청교도 집회 때마다 설교하시는 내용이, 고린도전서 2장 3절의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라고 했는데 다음 절에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즉 바울이 심히 떨었던 이유는 성령과 능력이 나타나지 아니할까봐 심히 걱정하고 떨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나 사람의 말로는 은혜를 끼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걱정하며 떨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걱정은 정말 유익한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과 걱정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더 성령과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 걱정을 많이 하고 기도하면 무서운 진노와 심판을 면할 수가 있습니다. 스바냐 2장 1절에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명령이 시행되기 전, 광음이 겨같이 날아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가 임하기 전에 걱정하고 회개하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잘 되겠지, 설마 무슨 일이 있을라구” 하며 무사태평하게 지내다가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가 임한 다음에는 이미 늦어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분은 저에게 “김 목사는 뭘 그렇게 반공을 외치며 날카로운 설교를 하느냐”라고 합니다. 공산화되는 것이 얼마나 처참하고 끔찍한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요엘 1장 13~14절에 “제사장들아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지어다 단에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곡할지어다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와서 굵은 베를 입고 밤이 맞도록 누울지어다…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포하여 장로들과 이 땅 모든 거민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 2장 18절에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근심하고 탄식하며 울었더니 하나님이 그 처절한 비국을 면하게 해주셨습니다. 걱정과 눈물이 나라를 구원했습니다.
회개, 구원에 이르는 관문
고후07장 10절 / 박봉수목사
한 나라나 한 도시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곳이 있습니다. 바로 ‘관문’(關門)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신라시대부터 관문을 설치하여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했습니다. 지금도 전국 곳곳에 옛 관문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오늘도 관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인천공항을 들 수 있습니다.
이 관문에서는 우선 사람을 조사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 사람이 들어올 자격을 갖춘 사람인지 면밀하게 조사합니다. 다음으로 그 사람의 짐을 조사합니다. 짐 안에 마약류나 나라가 금하는 물품이 있지는 않는지, 무기가 있지는 않는지 면밀하게 조사합니다.
어쨌든 누구든지 어느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이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영적인 세계에도 관문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 4:17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천국이 가까이 오고 있으니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이 가까이 오고 있으니,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회개가 천국에 들어가는 관문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여기서 회개를 구원에 이르는 회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회개가 구원의 관문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관문이고, 천국에 이르는 관문입니다. 회개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회개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회개란 무엇인가?
그러면 회개란 무엇일까요? 먼저 회개가 아니면서 회개라고 오해할 수 있는 것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반성 또는 뉘우침입니다. 마 27장을 보면 가룟 유다가 자살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30을 받고 자기가 3년간 모셔왔던 주님을 팔아넘겼습니다. 그런데 재판과정을 지켜보니까 사태가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갑니다. 유다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총독에게 넘기는 것입니다.
유다는 그제서야 자기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받은 돈을 도로 유다 종교지도자들에게 가져다주며 말했습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뉘우친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는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하고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반성 또는 뉘우침만으로는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회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죄의 고백입니다. 천주교에서는 ‘고해성사’를 합니다. 이 고해성사는 천주교가 오랜 세월 지켜온 일종에 전통이기도 합니다. 초대교회 시절 교부들은 이 회개라는 말을 라틴어 ‘파에니텐시아’ (paenitentia)라는 말로 번역해서 사용했습니다. 이 말은 ‘신의 은총으로 용서받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 죄의 용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한 말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하나님을 대신한 교부들 앞에 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교부들은 저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죄 지은 것을 상쇄하기 위해 어떤 영적 훈련의 과제를 줍니다. 그리고 이것을 잘 이행했을 때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전통이 오늘까지 천주교에 이어져오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죄를 범한 교인들이 단지 신부나 사제에게 와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용서를 받았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 용서를 위해 신부나 사제가 명하는 영적 훈련의 과정을 완수했다고 죄 문제가 해결됐다고 믿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물론 이런 종교의식은 회개하는 일에 도움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자체가 회개는 아닙니다. 자칫 이 고해성사가 참된 회개로 나아가는 길을 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참된 회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성경 원어로 회개라는 말은 ‘메타노이아’(metanoia)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변화’를 뜻하는 ‘메타’(meta)라는 말과 마음의 생각을 뜻하는 ‘노이아’(noia)가 합해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메타노이아라는 말은 마음의 생각이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속사람이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조셉 얼라인이라는 분이 쓴 [돌이켜 회개하라]는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당신이 ‘진짜 회개’로 ‘진짜 구원’을 받았다면 당신은 매사에 기쁘고 감사가 넘치며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일이 가장 행복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당신의 상태는 어떠한가? 감사보다 불평이, 기쁨보다 근심이, 사랑보다 미움이 더 많지 않은가? 성경을 읽는 것보다 다른 것들을 더 즐기고 있지 않은가? 기도하는 것보다 사람과 이야기하는 데서 더 위로를 받고 있지 않은가? 당신이 그런 상태라면, 당신이 받았다고 굳게 믿고 있는 ‘구원’을 다시 한 번 냉정하게 살펴보고 스스로 확증해보라!
당신의 마음을 깊이 살펴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철저히 다루실 때까지 쉬지 말라.
교회 다니고 세례만 받으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 교회 봉사 잘하고 직분자면 다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말씀은 듣고 알아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 회개했다고는 하지만 삶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는 사람! 당신은 아직 돌이키지 않았다!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하라!
그렇습니다. 회개는 내 마음 속에서 나를 짓누르는 죄의식을 털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내 앞에 닥친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속사람이 변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변하고, 내 마음이 변하고, 내 삶이 변하는 것입니다.
신학에서는 회개를 두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합니다. 하나는 ‘칭의를 위한 회개’이고, 다른 하나는 ‘성화를 위한 회개’입니다. 여기서 칭의는 처음 예수를 믿고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성화는 칭의 과정을 거친 뒤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예수를 닮아가며 성숙해져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 두 가지 과정 모두에서 회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선 칭의를 위한 회개를 살펴보겠습니다. 행 2:38을 보면 베드로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받은 뒤에 아직 예수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그리고 행 3:19을 보면 베드로가 또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며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그러니까 불신자들이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과정에서 반드시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 믿지 않고 살았던 죄, 하나님 없이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 살았던 죄를 회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원죄’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칭의를 위한 회개는 원죄를 회개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칭의를 위한 회개를 통해서 구원의 관문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성화를 위한 회개입니다. 일단 회개하고 구원의 관문에 들어선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롬 7:19-20을 보면 바울은 자신이 사도이면서도 예수 믿으며 겪어 온 연약한 삶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비록 우리가 구원의 관문에 들어서긴 했지만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죄를 저지르며 삽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자범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화를 위한 회개는 이 자범죄를 회개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성화를 위한 회개를 통해서 더욱 성숙해 지며 마지막까지 구원을 이루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는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우리가 회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회개는 우리 자신이 새롭게 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인격 즉 우리의 지(知), 정(情), 의(意)가 새롭게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선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회개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서 시작됩니다. 눅 5:8을 보면 주목할 만한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가 고기잡이를 하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아직 잘 모르지만 직감적으로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눈이 열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이토록 뼈저리게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자기는 법 없이도 살 사람처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죄인이라면 저 감옥에 수감되어있는 사람들 이야기로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서니 갑자기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는 내가 지은 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깨달을 때 본격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요 16:8을 보면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우리 안에 성령이 임하시게 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시게 되면 우선 우리가 저지른 죄를 지적해 주십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것이 죄인 줄 모르고 살았던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 안에서 그것이 죄라고 지적하시고 책망하십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내가 지은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시 51:3에서 시인이 고백했던 것처럼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내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도대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죄를 범하고 있는지 깨닫고 인정해야 합니다.
다음 감정이 바뀌어야 합니다.
회개는 마음의 통회로 절정에 이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르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죄 때문에 하는 근심을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저지른 죄를 깨닫게 되자 마음 속에 깊은 근심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깊이 했던 가장 대표적인 사람으로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시 6편을 보면 다윗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1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에 정말 큰 영적 두려움을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6-7을 보면 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저지른 죄를 낱낱이 깨닫고 난 뒤에 눈물로 통회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저지른 죄로 인한 근심 때문에 눈이 다 쇠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내 감정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깊은 두려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저지른 구체적인 죄가 생각나서 하나님 앞에 근심하며 눈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행동이 바뀌어야 합니다.
회개는 행동의 실천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눅 19장을 보면 삭개오 이야기가 나옵니다. 원래 삭개오는 세리장으로 당시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살았습니다. 세금을 착복했고, 가난한 사람들을 힘들게 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가 달라졌습니다. 19:8을 보면 자발적으로 예수님께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바로 잡겠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새롭게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몇 해 전에 개봉된 영화 [밀양]은 여러 가지로 우리 기독교 신앙을 돌아보게 합니다.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회개를 꼬집고 있습니다.
아이를 유괴해서 살해한 범인이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아이의 엄마가 범인을 찾아 면회를 왔습니다. 범인과 대화하면서 범인이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내심 용서해 줄 생각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범인이 예수 믿은 뒤에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이 엄마가 왜 내 아이를 죽였느냐고 울부짖으며 따졌습니다. 이 때 범인이 놀라운 말을 합니다. “나는 예수 믿고 죄를 회개했기 때문에 용서 받았다. 나는 마음이 홀가분하다!” 그 말을 들은 아이엄마는 더 큰 충격을 받아 기절해 버리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내가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통회하며 회개 기도를 드렸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일단락이 져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세상과의 관계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아직 해결할 문제가 남았습니다. 내가 죄를 저질러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그들에게 배상하고 그들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세상 법을 어겼다면 세상 법에 따라 죄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죄를 반복해서 저지르지 않도록 우리 삶이 변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관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오며 저질러 온 그 모든 죄들에 대해 회개해야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으면서 연약하여 때로는 알고 또 때로는 모르고 저질러 온 죄들을 지속적으로 회개해야 구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회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지적해 주실 때 우리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저지른 죄에 대해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통회하는 마음을 주실 때 내가 저지른 죄 때문에 근심하게 되고 눈물로 참회할 수 있게 됩니다. 나아가 성령께서 용기를 주실 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고난 당하는 것이 유익이라
>성경본문|
고후07장 10절 ~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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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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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허호익목사
>비 고|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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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당하는 것이 유익이라" (고린도후서 12:7~10)
우리가 사는 세상에 고난이나 고통이나 고민이 없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더욱이 예수 믿는 사람에게 왜 고난이 있는지? ━ 남보다 열심히 교회에도 다니고 기도도 열심히 하는데, 어려움을 당하는 분들을 보면 민망할 때가 있다. 또 처음 예수 믿는 분들 가운데, 얼마 동안 열심히 교회에 다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보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어보면 낙심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예수 믿고 가정에 어려움이 있어서 그만 다니기로 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전에 어떤 새 신자는 칠곡에서 돼지를 먹이는데, 돼지 새끼가 죽어서 교회에 다니지 않겠다고 낙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해서 어려움이 없다거나 고난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구약 이사야 43장에 보면,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자,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너는 내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후에 그리고 2절에 보면,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사 43:1~3상)
무슨 말씀인가? 하나님의 구속을 받은 사람, 다시 말해서 예수 믿는 사람에게 물 가운데로 지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강을 건너는 일이나, 불 가운데로 지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고,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믿는 사람도 병에 걸리기도 하고, 자녀가 대학 입시에 떨어지기도 하고, 사업에 실패하기도 하며, 우환질고를 당할 수 있다. 그러나 다 같은 우환질고(憂患疾苦)이지만, 그 당하는 목적이 다르고 대하는 방법이 다르고 자세가 다릅니다. 의미가 다른 것이다.
욥은 고통이 절정에 달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욥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精金) 같이 나오리라" 이 신앙고백에는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첫째는, 고난과 고통, 자신의 사정을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이고, 둘째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단련하시는 훈련과정이라는 믿음이며, 셋째는, 고난의 결과 자기는 정금(精金) 같이, 즉 불순물이 완벽하게 제거된 순금이 된다는 확신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고난 중에 있는 성도가 있는가?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는가? 오해를 받고 믿음이 흔들리며 하나님의 사랑까지 의심하시는 분이 계시는가? 하나님은 나의 사정을 모르시고 내가 당하는 고난과 고통을 외면하신다고 생각되시는 분이 있는가? 욥의 이 고백을 다시 들으시기 바란다.
우리를 정금 같이 만드시기 위해 지금의 고난이 있다. 우리를 더 위대한 하나님의 종으로 사용하시기 위해 지금 훈련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시어 항상 주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해 지금도 우리를 연단시키고 단련시키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바울 사도에게도 고난이 있었다. 바울에게만 고난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고난'이라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구약의 요셉이 그랬고, 모세도, 다윗도, 다니엘도 다「고난의 대학」을 졸업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되었다.
오늘 본문에는 대사도, 바울이 당한 고난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바울에게 찌르는 가시가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 '찌르는 가시'가 무엇인지, 성경에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잘 알 수 없지만, 학자들은 '이것이 바울의 육체적 질병을 가르킨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한다. 다시 말하면, 바울 사도에게 육체적 질병이 있었는데, 그는 이 병을 낫게 해달라고 세 번이나 주님께 기도드렸지만, 하나님의 대답은 오히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으로 응답해 주셨다. 오늘의 본문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이 부분을 공동번역 성서로 한 번 읽어보겠다. 7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이다.
"내가 굉장한 계시를 받았다 해서 지나치게 교만해지면 안될 테니까 나는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하나 얻었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줄곧 괴롭혀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고통이 내게서 떠나게 해 주시기를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다만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번번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도록 더 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겠습니다"(고후 12:7~9)
여러분, 이해가 되는가? 바울 사도는 자신에게 있는 고통, 육체의 찌르는 가시를 없이해 달라고 세 번이나 주님께 기도드렸지만, 주님의 대답은 "너는 이미 내 은혜를 충분히 받았다"라고 말씀하셨다. 생각해보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 같습니다. 고통을 없이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고통은 없이 하지도 않은 채 '너는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는 말씀은 동문서답이요 역설 같은 말씀이다. 그러나 바로 이 패러독스(Paradox)가 우리 기독교 신앙의 진리이기도 하다. '고난이 곧 은총이라'고 하는 것은 확실히 놀라운 역설이다. 그러나 이 역설은 우리 크리스쳔의 세계에서는 대단히 확실한 진리인 것이다.
오히려 가난이 축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육체의 질병이 영혼을 치료하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알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으며, 우리에게 닥쳐오는 고통과 시련이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우리에게 주어진 이 고난이 어떻게 해서 유익한 것이 되는지? 어떻게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이 되는지, 몇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보자.
1. 고난은 인간을 죄악으로부터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목적으로 주어질 때가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할 때, 하나님께서는 막대기를 드셔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셨다. 또 신약에 나오는『탕자 비유』에서도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먹을 것이 없어 배를 움켜쥐는 고난 때문에 아버지 생각했다고 했다. 어느 장로님은 6․25를 회상하면서 "6․25는 나를 회개하게 하고 예수 잘 믿게 하는 은총의 시기였다"고 말했습니다마는, 확실히 인간은 이런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 같다.
세상에서 부자가 되어 육신의 만족과 안일에 젖어서 하나님이니, 교회니, 신앙이니 하는 영적인 문제에 추호의 관심도 없이 오로지 사업과 장사, 그리고 명예라는 현실 문제에 전념함으로 선택의 문제를 외면하고 버림받은 기아로 살아가기보다 차라리 가난이라고 하는 고난이 계기가 되어 영적인 문제를 해결할 때 어느 것이 더 나은 축복이겠는가? 오늘 이 자리에는 육신의 질병이나 가난, 자녀의 문제 등 고난이 없었다면 예수 믿지 않았을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고난이 계기가 되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된 것은 정말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도 고난 당하는 것이 유익이라고 할 수 있다.
2. 교육과 훈련의 의미로 받는 고난이 있다.
아마 남자 교우들은 군대에서 기합을 많이 받아보신 줄 안다. 요즈음은 그런 무지막지한 기합이 없는 줄 압니다만, 그저 "이유는 없지만 목적이 있는 기합이다" 하면서 기합을 준다. 『이유는 없지만 목적이 있는 기합』는 말이 그 당시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니 이해가 된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도 마찬가지다. 이 고난이 왜 오는지, 또 무엇 때문에 이런 아픈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시고 우리를 연단하시며,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훈련시키기 위해서 때로는 이유 모를 고난을 주시는 것이다. 욥이 받은 고난이 그러했고,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가 받은 고난이 여기에 속하는 고난이다.
캐나다 토론토(Toronto)에 가면 거대한 수족관이 있다. 그 수족관에는 바다에 있는 모든 물고기들과 해양 생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처음에 그 수족관에다 물고기들을 넣을 때의 이야기다. 이 수족관에 태평양 연안의 많은 물고기 종류를 전시할 준비를 하고 자동차로 운송계획을 세웠다. 태평양의 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온도와 수압이며 햇빛의 양(量)도 그대로 했다. 많은 물고기들을 싣고 두 주일이 걸려 토론토에 도착했는데, 와서보니 물고기들이 모두 죽었다. 태평양 바다의 조건과 꼭 같이 해서 운송했는데 고기들이 모두 죽은 것이다. 몇 번이나 시도를 했지만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수족관의 학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 년을 두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그러다가 한 가지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물고기들에게 적당한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물고기 운반 차량에 바다의 악동이라고 하는 문어새끼, 상어새끼 같은 무법자들을 넣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태평양 바다의 온도와 수압, 햇빛을 맟춰 편안히 2주일 동안 물고기들을 수송했을 때는 모두 죽었는데, 괴상한 악동들과 같이 올 때는 한 마리도 죽지 않고 다 살았다는 것이다. 문어새끼들과 상어새끼들이 물고기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니기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고, 정신을 차리고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물고기들이 다 살았다는 것이다.
그렇다. 바닷 속의 여러 물고기들이 살 수 있는 조건은 항상 바다 밑에 있는 조류의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의지와, 수많은 악동들, 문제어들에서 벗어나려는 긴장의 의지가 살아가는 지혜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도 오직 편안과 안일만 주어진다면 그 영혼은 결국 타락으로 죽음 가운데 빠질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에 주어지는 시련과 고난과 아픔들은 결코 상처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악동들, 악사건들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지혜와 의지 그리고 성숙된 인격을 키울 수 있게 해 준다는 교훈을 우리는 이 어류 수송의 예(例)에서 배워야 하겠다.
3. 또한 고난은 인간을 보다 깨끗하게 만드시려고 뜨거운 용광로를 지나게 하는 성결의 의미가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확실히 믿음이 있다. 그러나 믿음뿐만 아니라, 동시에 다른 것들도 많이 있다. 욕심도 있고, 불같은 성격도 있고, 미움이나 시기, 질투 같은 것들이 있어서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 혹은 세상적인 것을 자랑하고 싶고 뽑내고 싶고 교만에 빠지게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불 속에 들어가고, 시험을 만나고, 환난을 겪게 되면 용광로 안에서 불순물들이 녹아버리듯이 이런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은 다 녹아 없어지고 마지막에는 순수한 믿음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7절에서 말하기를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고, 가도 바울은 로마서 5장 3절 이하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고난의 가시는 땅과 하늘, 즉 우리 인간과 하나님의 보좌를 연결하는 사닥다리이며, 우리를 보다 선하게, 깨끗하게, 그리고 훌륭하게 만들어주는 위대한 스승인 것이다. 우리 가운데 육신의 질병으로 고민하는 사람이 있는가? 사업이 잘 안되어서 곤경에 빠진 분들이 있나? 아니면 가정의 문제가, 또는 자녀의 문제가, 생활의 문제가 고통스러운 가시와 같이 아프게 찔려오는 고난을 당한 분들이 있는가? 절망과 시험 가운데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가는 분이 이 자리에는 없나?
여러분의 그 위기(危機)는 하나님의 기회이다.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처럼, 여러분의 연약함과 고난의 가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여러분에게 머무는 거룩한 장소이다. 이제, 여러분의 지혜나 인간적인 조건을 자랑하지 말고 온전히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고 기도하시기 바란다.
일찍이 일본의 하천풍언(賀川豊彦)은 말하기를 "고난은 인생의 부록이요 예술이라"고 하였지만, 우리 크리스쳔들이 고난 가운데 육적으로 연약을 느낄 때, 그 영성(靈性)은 능력이 무한하신 주님께 접근해지며, 거기에서 새로운 위로와 힘을 얻는 것이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믿음이 자라고,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겸손을 배우고, 우리의 연약을 깨닫고, 한계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모난 부분, 울퉁불퉁한 덩어리들이 깨트려지고 부셔져서 진흙과 같이 된 후에,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새로운 질그릇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하나님은 토기장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토기장이다. 아무 쓸모없는 진흙과 같은 우리들을 때로는 부서뜨리기도 하시고, 때로는 아예 반죽을 만드셔서 짓이기고 밟으시다가 때가 되면 우리를 새로운 창조물, 위대한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만드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다 고난을 받았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였던 것이다.
시편 119편 71절 말씀을 한번 찾아보자(P. 892).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다고 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지도 못했다. 그러나 고난 당하고 나서, 고난이 나를 연단한 후에는 비로소 바르게 행할 수가 있었다는 말씀이다.
그 다음 71절 말씀을 또 보자. 시편 119편 71절 말씀이다.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고난을 통하여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으니,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신앙은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이요 깊은 신앙이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주의 율례,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라고 시인은 고백하고 있다. 고난을 통하여 말씀의 비밀을 깨닫고,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며,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지어질 뿐 아니라,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언제나 체험하며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란다. 깊은 영성(靈性)의 소유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후회 없는 삶
고후07장 10~11 / 엄기호목사
4년 만에 신작 시집 <다보탑을 줍다>를 내놓은 시인 유안진(63세)씨가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한번도 시에 혼신의 힘을 쏟아본 적이 없었던 것이 후회스럽고, 허상을 좇았던 자신이 후회스럽다”라고 고백한 내용이 맘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인생이란 후회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나고 보면 어느 것 하나 후회되지 않는 일이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지도 모릅니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나면 그제야 소중함을 깨닫고 후회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우리에게 시간이 지나도 후회할 것이 없는 것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으며,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지만,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 것인가?’,‘어떻게 하면 한 사람이라도 전도할 수 있을까?’하며 하나님의 의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한 근심,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일을 위한 근심 등이 바로 후회가 없게 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함께 후회할 것이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또 어떤 노력을 해야 할 까요?
거짓이 없는 삶
동양에서 예로부터 내려오며 인정해주는 거짓말이 있습니다. 첫째가, ‘용은’(容隱)으로, 부모나 스승 또는 상전의 죄를 거짓으로 숨겨주라는 것이며, 둘째는 ‘규은’(閨隱)으로, 여자가 밉더라도 곱다고 말해주라고 했고, 셋째는, ‘환은’(患隱)으로, 불치의 환자에게 소생할 수 있다며 거짓말하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해를 주지 않을 뿐더러 잠시 사람들을 웃게도 하는 이런 거짓말을 라틴계에서는‘하얀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얀 거짓말이라고 해도 거짓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며, 진리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거짓의 시대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진실이 아닌 허상과 거짓에 미혹되고 있으며, 익숙해 있습니다. 출세하기 위해 거짓말하고, 부를 축적하고 성공하기 위해 거짓말을 합니다. 또 인기를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생존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거짓말을 합니다.
사람들이 많은 후회를 하는 것은 진실하지 못한 삶, 거짓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가면을 쓰듯 자신을 숨기고 가식과 거짓으로 치장한 거짓된 삶은 반드시 훗날에 후회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진실하신 하나님은 우리 또한 진실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날 크리스천들 중에도 거짓된 삶을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부귀와 영화, 순간의 쾌락과 욕망을 위해, 거짓행위나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합니다. 그러나 진실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거짓은 사탄에 속한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요 8:44).
신앙생활은 흉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내 영혼이 진실하게 주님을 향하고, 내 믿음이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은 진실한 자만이 가능합니다. 믿음이 진실하고(딤전 1:5), 예배에 진실하고(요 4:23~24), 생활이 진실하고(시 15:2: 고후 1:12: 엡 4:25),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진실하며(고후 2:17), 언행의 진실(롬 13:11~14)을 보일 때 주님과의 진정한 교통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진실의 본을 보여준 무죄하고 궤사가 없으신 예수님처럼(벧전 2:22), 간사한 것이 없는 나다나엘(요 1:47)처럼, 간사나 부정이나 궤계가 없는 권면을 한 사도 바울(살전 2:3~5)처럼 진실한 삶을 사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성실한 삶
인생의 수많은 후회들이 시간을 낭비하는 태만에서 옵니다. 남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아니하든, 인정하든 인정하지 아니하든 관계없이 자신이 맡은 일을 책임 있게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달란트를 받아서 땅에 묻어 둔 종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평소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 태만하게 놀던 학생은 시험지를 손에 들고는 후회하게 되고, 남들이 씨 뿌리고 가꾸고 땀 흘리고 수고할 때 게으름 피우며 놀던 농부는 추수할 때에 후회하게 됩니다(잠 10:4, 19:24, 20:4). 게으른 자의 삶은 결국 나중에 후회라는 이름의 열매 밖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우리들의 삶을 물론 우리의 신앙생활이 너무 게으르지 않습니까? 깊이 반성할 일입니다.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면 은혜 받을 수 있는데도 태만하여 나의 축복으로 삼지 못하고, 게을러서 기도하지 못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응답이 보류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시간마다 부지런히 참석하기만 하면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을 수 있는데도, 게을러 집에서 한가히 시간을 보냄으로 말씀 충만, 성령 충만, 은혜 충만을 받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영혼이 잘 될 때 범사가 형통합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이 빈궁하고 곤핍하면 우리의 삶 또한 곤핍하게 될 뿐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이 고백하는 최고의 자산은‘성실성’과 ‘기쁜 마음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한 자가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실하지 못한 삶에는 언제든지 후회가 뒤따르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성실보다 더 나은 지혜는 없다는 말과 성실보다 더 나은 성공의 지름길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인내하는 삶
많은 사람들이 순간적인 고통과 감정, 정욕 등을 참지 못함으로 영원한 후회를 남깁니다.
잠언서 기자는“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오래 참느니라”(잠 12:16)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명심보감에는 “한 때의 분한 것을 참으면 백날의 근심을 면할 수 있다”고 했고, 공자는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일에 낭패한다”고 했습니다.
과거 우리들이 참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해서 가슴을 치며 후회했던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순간만 참으면 영원한 기쁨이 올 수가 있는데 인내하지 못해서 물질적인 어려움은 물론 영혼의 곤고함을 경험한 일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가슴에 두고두고 남는 후회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반성하며, 인내하지 못했음을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혈기를 참아야 합니다.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육신의 정욕을 참아야 합니다. 어떤 고통도, 어떤 시험도 인내하는 사람에게는 굴복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쓰라린 고통과 수치를 참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셨습니다(사 53:7). 이에 우리도 예수님처럼, 인내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괴롭고 어려운 문제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될 때, 주님을 바라보며 인내하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롬 8:25 ; 살전 5:14).
고난과 어려움을 참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인내는 소망을 이루고 성공을 거두며 축복을 받는 결과를 가져옵니다(롬 5:4). 환난의 때(눅 21:16~19)에도, 죄악을 대적할 때(계 2:2~3)에도, 교회를 돌볼 때(고후 12:12)에도,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칠 때(딤후 4:2)에도 참고 견디며 인내하기 바랍니다. 인내하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릴 때까지 인내하시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우리는 후회 없는 삶을 사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부모와 형제와 이웃에게 상처를 주거나, 사랑을 표현하지 못해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 성도, 그릇된 언행 때문에 하나님께서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거룩한 근심을 하는 성도, 거짓 없는 진실한 삶,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삶, 그리고 참고 인내하는 삶을 사는 성도가 되어 후회가 없을 인생을 만들어가야겠습니다.
진정한 부흥
고후07장 13~16절 / 이규왕목사
사람마다 간절히 원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아엠에프 못지않은 불황의 늪에서 벗어나 경제가 부흥되고, 침체 국면에 접어든 교회가 부흥되고, 예수를 믿지만 무미건조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내가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기를 소원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부흥이라는 말이 단 한 번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처럼 국가의 부흥, 교회의 부흥, 개인의 부흥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이처럼 자주 부흥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과연 부흥이란 무슨 뜻일까요? 그렇다면 과연 부흥이란 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일까요?
성경에 수많은 말이 나오지만 부흥이라는 말은 단 한번만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부흥이라는 말을 찾아보기 어려운 반면에 현실적으로 사람들은 자주 말하고 듣고 친숙해져 있는 단어가 부흥이라는 말입니다.
(합 3: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여기서 부흥이란? 히브리어로 어근은 ‘살다’에서 왔으며, "번영하다" to prosper, "생명을 유지하다" 혹은 "건강을 회복시키다" to restore to health "치료하다" to heal, "회복하다" recover 라는 말로 사용되어진 것을 통해서 부흥이란 뜻이 무엇인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은 생명력이 약해져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라면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생명력을 잃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부흥은 곧 생명력의 부활을 뜻하는 것으로 죽은 사람이 이전보다 더 건강한 모습으로 되살아나는 것처럼 이전보다 더 아름답게 회복되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희망이 바로 부활에 있는 것처럼 개인이나 교회의 희망은 부흥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인이나 교회가 부흥이 필요한 때가 어떤 상태이며, 개인과 교회가 어떻게 부흥될 수 있으며, 과연 부흥이 되었다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우리 모두 부흥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1. 바울을 아프게 한 교회
바울 사도는 감정도 눈물도 없는 청동 인간이 아니라 우리들과 똑같이 아픔과 배고픔과 슬픔과 두려움을 느끼는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연약함을 핑계로 주를 위해 보다 더 충성을 하며 살지 못하고 있는 반면에 바울은 우리와 동일한 육체를 가지고도 우리와 비교가 되지 않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복음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였습니다.
그러한 바울 사도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고 두렵게 만든 사람들은 이교도나 불신자 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바울을 사랑하고 위로하고 존경해야 할 고린도 교인들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땀 흘려 심고, 눈물로 물을 주고, 말씀으로 자라게 한 교회와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는
1) 배은망덕하게도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 중에 어떤 지역에는 오래 머물고 어떤 지역에서는 금방 떠나는 것이 불공평한 처사라고 비난을 하였습니다.
2) 율법 주의자들의 사주를 받아 할례를 거부하는 바울이 증거하는 복음은 율법을 파괴하는 반 율법주의적인 사상을 가르친다고 비난하였습니다.
3)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헌금을 빙자하여 개인이 착복한 것처럼 모함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4) 심지어 바울이 열두 사도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자칭 사도이지 정통 사도가 아니라고 사도의 권위까지 부인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고린도 교회를 보면서 오늘 우리도 고린도 교회처럼 만사에 있어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행동의 주체가 되지 말아야 함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는 깨끗할까요? 흠이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비난을 받아야 할 주체로 어느 교회보다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교회 내의 분쟁(고전 3:3), 교만함(고전 4:18), 음행(고전 5:1), 불의(고전 6:1) 영적 은사의 무절제(고전12-14장), 육체적인 부활 부인(고전 1512), 이단 사상의 용납(고전 15:12) 등 문제들로 감히 바울을 비판할 처지가 아니라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곪아 터진 교회였습니다.
만일 오늘 내가 바울의 입장이라면 그러한 비난과 모함의 소리를 듣는다면 심정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배은망덕한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에 맡겨 버리고 그 열정과 관심을 심성이 좋은 교회에 더 많이 쏟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세운 교회가 여러 교회이기 때문에 그 까짓 고린도 교회 하나 쯤은 얼마든지 포기하여도 아까울 것이 없고 도리어 앓던 이를 발치한 것처럼 시원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바울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마치 여러 명의 자식을 둔 부모가 효자 만이 아니라 속을 썩이는 불효자식일지라도 버릴 수 없는 것처럼, 바울은 고린도 교회 때문에 비록 마음고생을 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다른 어느 교회보다 더 많은 애정을 쏟았습니다.
그와 같은 바울의 심정이 고린도 교회를 위해 보낸 서신에서 잘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 비난이나 책망보다는 문제점이 무엇인지 하나하나를 집어서 그 원인과 대안과 개선책을 제시해 준 말씀들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한 곳을 소개한다면 고린도 교회의 모든 문제의 본질은 오직 하나 사랑의 결핍이기 때문에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오직 사랑의 회복뿐 임을 가르친 것입니다.
(고전 13: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이 말씀은 단지 고린도 교회만 해당 되는 말씀이 아니라 가고 오는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옥같은 생명의 말씀으로 영혼의 보약이며, 영원한 진리입니다. 그것은 마치 진주조개가 내면의 상처를 감싸기 위해 영롱한 진주를 만들어 낸 것과도 같은 영적인 보화가 된 것입니다.
2. 바울을 위로하시는 하나님
바울 사도가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가진 사람이었다는 증거는 안팎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을 당하게 될 때 우리와 달리 마음이 담대하고 평안 했던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위대한 사도 바울이었지만 우리들과 너무나 동일하게 고린도 교회의 문제로 인해 마음에 불안과 두려움을 느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음을 통해서 바울의 인간적인 면을 적나라하게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후 7:5)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그것은 바울이 사도였지만 막상 고난으로 인해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밖으로는 사방으로부터 환난과 다툼으로 인해 마음으로는 두려움이 가득했었다는 말은 흔히 말하는 내우외환(內憂外患)에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의 복합적인 고난에 처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배은망덕한 고린도 교회에 대해 끝까지 사랑과 인내심을 가질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비결은 바울의 의지나 인내심에 있지 않고 고난 중에 있는 바울을 하나님이 버려두시지 않고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후 7:6)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여기서 ‘낙심한 자’라는 말은 어려운 상황이나 비천한 상태, 또는 강력한 외부 세력이나 부한 자들에 의해 굴복당하고, 억압받는 상태에 있는 자를 뜻합니다.
또한 ‘위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은 성령을 가리켜 보혜사라고 하는데 ‘보혜사’라는 말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은 똑같은 단어로서 격려하고 권고하고 훈계하고 격려하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고난당하고 있는 바울을 위로하셨을까요? 하늘에서 천군과 천사를 보내어 위로하셨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은 바울을 사람을 통해서 위로하게 하셨으니 그 사람이 다름 아닌 바울에게 디모데처럼 믿음의 아들인 디도였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도 믿음 없는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다면 오늘 우리는 더 말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상처를 받은 사도 바울이 천사로부터 위로를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의 성도들을 통해서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살전 3:7)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사실 사도 바울은 디도를 고린도 교회에 보내 놓고서 마음에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없었던 것은 바울 사도를 거부한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제자인 디도를 얕보고 들을 리가 없다는 인간적인 불신과 염려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경험한 바로는 그러한 경우 오히려 중재를 잘못함으로 인해 관계가 더더욱 악화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디도는 그 같은 염려가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도록 너무나 일을 잘 처리하였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눈물로 기록하여 보낸 편지지만 글을 가지고서는 느낄 수 없는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중심 어린 사랑이 얼마나 간곡한 것인가를 전달하는 일을 하므로 고린도 교회로 하여금 바울에 대한 오해를 풀도록 중재한 일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디도는 고린도 교회를 가지 못하는 바울을 대신하여 고린도 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변화 가운데서 긍정적인 변화만을 바울에게 전함으로 바울의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염려를 진정시키는 긍정적인 중재를 한 일입니다.
그와 같은 디도의 모습은 마치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기 위해 화목제물이 되신 주님을 닮은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단은 여전히 사람들을 불화하게 만들고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게 하는 일을 조장하는 반면에, 하나님은 서로 화해하고 사랑하고 하나가 되게하는 일을 합니다.
1) 어떤 사람은 고린도교회처럼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비난하여 상처를 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상처 받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용기를 돋아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2) 어떤 사람을 서로를 이간시켜 불화를 조장하는 일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불화하고 있는 사람을 긍정적으로 중재하여 디모데처럼 화목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둘 다 주의 일이고 교회를 위한 일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나는 어떤 편에서 어떤 일을 하였으며, 앞으로 나는 어느 편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마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롬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3. 바울 사도의 기쁨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재차 방문하지 않은 궁극적인 이유는 힘이 들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고린도 교회를 위하는 일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으나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변덕스러운 사람으로 오해하고 비난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관심과 사랑은 식어지지 않았으며 그 중심을 담아 눈물의 편지를 써서 디도 편에 보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눈물로 기록한 바울의 편지를 보고 크게 근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근심은 두려움과 회개하는 마음으로 볂하였습니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고린도 교회에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보낸 편지를 읽고 들으면서 자기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사랑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고후 7:7)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가운데 한 사람 두 사람씩 자기들의 잘못된 생각과 언행으로 인해 바울 사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마음에 진실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냉담하고 배은망덕했던 고린도 교회에 그러한 변화가 어찌 일어날 수 있었을 까요? 그것을 가리켜서 오늘 성경은 두 가지 근심으로 비유하였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고, 또 하나는 세상 근심입니다.
1)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많이 하면 할 수 록 거룩해지지만 세상 근심은 오히려 사람을 부패하게 만들게 됩니다.
2)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지만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여기서 인간이 인간의 생각을 다 알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가 어찌 높고 크고 깊고 넓은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로버트슨은 이를 가리켜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회개하는 것이라고 알기 쉽게 풀이하였 습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는 단순히 자기의 과오를 인정하고 뉘우치는 정도가 아닙니다. 회개는 신앙생활에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으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담을 헐어버리고 화목하게 만드는 유일한 지름길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회개하는 일은 인간의 의지로 마음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음을 열어주시고 회개의 문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이미 열어 놓아 주셨기 때문에 회개가 가능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사람의 굳은 양심을 제하고 부드럽게 하여 주심으로 지정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2) 과거에서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따라서 방향 전환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인 것입니다.
3) 사람이 거듭나는 중생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이지만 회개의 역사는 성령이 내 안에서 양심을 두드리심을 깨닫는 자가 그 성령의 깨우치심에 순종하고자 하는 나의 의지에 변화가 반드시 순종해야만 하는 신인 합동 사역입니다.
4) 회개에는 반드시 죄를 깨닫는 이성적인 변화와 마음에 슬픔과 죄에 대한 협오감으로 인해 그 죄를 버리고자 하는 결단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5) 진정한 회개는 죄를 버리는 것으로 다가 아니라 인생의 방향을 온전히 하나님께로 전환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언행심사로 변화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강퍅했던 고린도 교회가 바울이 보낸 눈물의 편지를 읽고서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으나 디도가 가서 사도 바울이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하여 다 전하였을 때 그 말을 들은 고린도 교회에 놀라운 회개의 역사와 더불어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나안 땅을 향해 진격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각 지파 가운데 용맹스런 사람을 한 사람씩 선발하여 가나안 땅을 두루 정탐하고 돌아와서 두 그룹으로 의견을 달리하여 열 명의 정탐꾼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므로 대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낙담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와 갈렙 두 사람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던 다른 정탐꾼들과 달리 긍정인 믿음의 눈으로 여리고를 정탐하고 돌아와 신앙적인 보고를 하였으니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자기들도 분명히 가나안을 점령할 수 있다는 긍적인 승리의 보고를 하였습니다.
오늘 성경에서도 디도는 후자의 두 정탐꾼처럼 바울 사도에게 말도 많고 탓도 많고 문제도 많은 고린도 교회의 부정적인 면은 일체 함구를 하고 바울이 보낸 눈물의 편지를 고린도 교회가 접수하여 읽고 들은 후에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였을 뿐 아니라 고린도 교회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가 어떤 것인지를 바울에게 전하여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가 회개하고서 맺은 여러 가지의 열매들입니다.
(고후 7: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이와 같은 고린도 교회의 회개는 매우 파격적이고 전폭적인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고린도 교회가 보여준 회개의 열매들은
1) 간절하게 하며-자신들의 죄악된 모습을 바로 잡고자 진지한 관심을 보이고,
2) 변증하게 하며-그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겸손히 고백하고,
3) 분하게 하며-자기 자신이 지금까지 잘못 살고 잘못 믿은 죄에 대해 분노하고, 4) 두렵게 하며-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두려워하고,
5) 사모하게 하며-배척했던 바울을 다시 만나기를 사모하고,
6) 열심있게 하며-바울의 가르침을 준행하는 열정과
7) 벌하게 하며-그들이 용납하고 한 편이 되었던 이단자들을 처벌하는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 난 것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고린도 교회의 문제로 가슴에 큰 응어리를 끌어안고 고민하고 낙담하고 근심했던 바울에게 먹구름을 헤치고 밝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마음에 감격과 큰 기쁨이 흘러넘치게 만들었습니다.
(고후 7:13)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동안 내가 누구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처럼 문제가 많은 아니, 문제의 진원지가 되는 목사 장로 집사가 아니었습니까? 누가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렇게 개탄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상황이 가정, 학교, 사회, 직장 심지어 교회안에서까지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는 일방적인 말들이 왜 그리도 많고, 정작 사랑하는 마음을 상실 한 채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고 일방적인지? 사랑하는 마음이 풍성해야 할 가정과 교회에서도 상처를 받고 싸우고 심지어 결별을 선언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무엇보다 내가 그러한 가정과 사회와 교회를 만드는 장본인이 아닌가? 하는 자기 반성과 더불어 이제 우리도 고린도 교회와 같이 성경 말씀을 듣는 중에 마음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만일 그와 같은 회개의 역사가 없이 아무리 주일 마다 좋은 설교를 듣고 성경에 대해서 공부를 한다고 해서 내 인생이 달라지겠는가? 내가 달라지지 않는데 내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나 교회가 달라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너나를 막론하고 문제가 있고 없고의 차이를 논할 때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바울의 편지를 읽고 디도의 설교를 들은 고린도 교회가 회개하고 단절되었던 바울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피차 신뢰를 회복한 것과 같은 회개와 회복의 축복이 절실한 때인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부흥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는세상 근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신령한 근심인 회개를 열심히 하는 교회입니다.
그와 같은 고린도 교회의 변화가 바울 사도에게 큰 위로와 기쁨을 주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로 회복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같이 하나님 금번 기회를 통해 우리 교회도 고린도교회와 같은 대대적인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부흥을 주옵소서! 그래서 우리 마음에 바울이 체험한 더울 많이 기뻐한 것과 같은 넘치는 기쁨을 맛보게 하옵소서! 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준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금번 특별 새벽 기도회와 연이어 계속되는 가을맞이 심령 부흥회를 통해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 일어나야 할 회개와 변화입니다. 그러한 변화가 일어날 때 진정한 부흥이 무엇이며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