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이 불법 비상계엄을 선포한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은, 김건희를 향해 오는 압박 때문이었다.
윤석열 주변의 실태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다.
건진법사, 천공, 명태균, 노상원.....이들은 정부 김건희와 어울렸던 사이비들이다.
윤석열은 사이비 점쟁이 법사들을 이용한 김건희의 수렴청정에 휩싸여 있었다.
법사는 일반적으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설파하고 중생을 불문으로 이끄는 스승으로서의 승려를 말하는데, 좁은 의미에서는 경전에 능통한 수행자, 넓은 의미에서는 부처와 제자들을 모두 이른다.
보살, 처사, 법사, 거사는 불교와 한국 전통문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호칭들이다.
이들은 각각 불교의 수행과 실천, 학문과 덕행, 교화와 전법, 재가신도의 역할을 대표하는 존재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이들의 정신과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지표가 되고 있다.
보통 법사들의 경문은 크게 안택류, 축원류,축사류,해원류로 분류해서 볼 수 있다.
안택류는 집안의 신령들을 위하는 경문들로서,조왕경,성주경 등이며,이는 법사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경문 중 하나인데,앉은굿의 거의 모든 의례는 안택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수렴청정은 발(垂簾)을 쳐놓고 왕을 대신해 정무를 본 최초의 인물은 당나라 측천무후다. 그 전까지는 태후가 섭정을 하더라도 황제와 나란히 앉아서 신하들을 접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측천무후가 황제 의자 뒤편에 발을 설치해 놓고 앉은 이유는 딴 데 있었다. 병약하다고는 하지만 남편(고종)을 대신해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별로 떳떳하지 못한데다 황태자까지 정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발은 정상적으로 정치 전면에 나설 수 없는 형편에서 나온 일종의 방편이었던 셈이다.
수렴청정할 때 수렴을 설치하는 장소, 앉는 방향과 위치 등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송나라 때는 황제와 태후가 수렴 안에 함께 앉았는데 황제가 왼쪽, 태후가 오른쪽이었다고 한다. 태후가 황제보다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명종 때 문정황후는 처음에는 침소인 충순당 창문을 열고 발을 내려놓은 채 왕과 신하들을 접견했고, 뒤에 편전으로 장소를 옮긴 뒤에도 왕은 수렴 밖에 있었다고 한다.
불교는 예언을 하거나 좀처럼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
특히, 불교의 일부로 잘못 알려진 점쟁이의 법당은 불교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렇게 오해 하게된 이유는, 우리나라의 불교는 무속신앙과 깊은 연관이 있다.
절 뒤편에는 어느 절이고, 삼성각이 있는데 그것이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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