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산고등학교 교목 도정호 바오로 신부
2월 22일 연중 제7주일
복음 루가 6, 27∼38
<주일 부산평화방송 오늘의 강론은 방송하지 않습니다. 다음은 천주교 부산교구 주보에 게재된 주일 강론입니다.>
이왕이면 내가 먼저
미움의 정도에 크고 작은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 각자는 싫은 사람, 불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같은 아파트, 같은 동네 옆집에 살면서 사사건건 간섭을 하는 사람이 나의 원수일 수 있습니다. 한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직장 동료가 나의 원수일 수 있습니다. 고자질하는 사람이 나의 원수일 수 있습니다. 한 때는 연인이었지만 나를 버리고 가버린 상대방이 나의 미움의 대상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 대면하기 싫은 사람, 나를 미워하고, 모욕을 주고, 비난을 하고, 말도 안되는 헛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에게 우리는 미움의 감정이 생기고, 그 결과는 쉽게 용서가 되지 않고, 축복을 해 준다는 것을 있을 수 없고, 사랑할 마음이 생길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 식의 해결방법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 실컷 미워하고 욕하고, 피해를 본 만큼의 대가를 주는 방법입니다. 우리들이 용서를 베풀 마음이 생기는 시기는 실컷 미워하고 욕한 다음 그 대상이 어려움에 처해지고, 가엽고 불쌍하게 느껴질 때 그때서야 용서할 마음이 생깁니다. 혹시 상대방이 변화가 된다면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서로 서로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사람이 변하기를....나름대로의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말입니다. 이 모습이 솔직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그러한데 우리가 실천하기에는 어려운 해결 방식을 오늘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제시하고 계십니다. 너무 이상적인 방법으로 느껴집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예수님의, 하느님의 일처리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런 방법들을 말씀하셨는지 그 실마리를 예수님 당신의 모범에서 찾아보고 싶습니다. 그분은 갖은 비난과 모함으로 사람에게 당했습니다. 감히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 스스로 그냥 내어놓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까요? 당신을 미워하고, 모함하고 죽이려는 사람, 끝내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그 사람들. 바로 그 사람에게...
당신은 화풀이를 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엽게 보시며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 하느님께 청하셨습니다. 인간 예수께서 그 모범을 보여주셨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우리에게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주님을 보면서 우리를 다시 들여다봅시다. 우리가 주님만큼 내세울 것이 있는가? 주님만큼 상처를 받았는가? 주님만큼 오해를 받았고, 모욕을 받았는가? 어렵겠지만 조용한 침묵 속에서 주님을 바라봅시다. 또 서로 서로가 상대방을 보면서 기다리고 있다면 이왕이면 내가 먼저 달라지고 변화되도록 해 봅시다. 내가 먼저 낮아지고, 내가 먼저 내어주고 그리고 내가 먼저 남에게 바라는 대로 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