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7일(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침묵 속에 주님께 향하는 마음
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라고 한다. 여기서 대화는 은유적인 표현이다. 보이지 않고 들을 수 없는 하느님과 어떻게 말을 주고받을 수 있겠나. 대화 형식으로 묵상을 하기도 하지만 그 또한 독백이고 상상 속의 대화다. 그래서 대화라고 쓰고 관계라고 알아듣는다. 기도는 하느님과 나 사이 관계다. 그 관계는 마땅히 가깝고 친밀해져야 한다. 계속 가까워져서 하나가 되기를 바라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고 사랑은 서로 하나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나와 하나가 되기를 바라신다는 거는 이미 다 알려졌으니 이제 나만 하느님께로 가까이 다가서면 된다.
예수님을 맞아들인 마르타는 손님맞이로 분주했다. 반면에 그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경청했다. 손님맞이에 둘 다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손님에게 대한 관심이다. 상점 직원이 내가 사려는 물건을 설명해 줄 때 그것의 장단점을 솔직히 말하고, 내가 그것을 어떻게 어떤 용도로 쓸지 그리고 좀 더 나아가 내 경제적 형편까지 살피면서 이 상품 저 상품을 소개하고 추천한다면 그 직원을 신뢰하게 된다. 그가 비싼 거가 아니라 나에게 필요한 거를 고르게 도와준다는 걸 알게 되는 거다. 처음 간 식당에서 음식을 고르지 못하는 손님에게 적당한 음식을 추천해 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 마디로 손님의 마음을 읽어주는 거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다. 그러니 하느님보다는 예수님을 부른다. 어려운 말로 기도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거다. 그분을 부르고 청하고 가르침을 받고 그분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따른다. 이 모든 게 그분과 맺는 인격적인 관계다. 그런데 그런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데에 가장 큰 어려움은 그분 말씀을 들을 수 없다는 거다. 그분 마음과 사랑에 대해서는 수없이 들어 머리로는 잘 알지만 마음으로는 느끼지 못한다. 거기에 더해서 수도원 안에 마귀들이 우글우글하다는 말처럼 묵상이나 관상을 시작하면 분심과 잡념이 따라붙는다. 예수님과 가까워지는 걸 방해하는 거다. 놀 때는 생각 안 하면서 기도할 때는 이런저런 계획 걱정 때로는 나랏일까지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 중에 가장 큰 어려움은 역시 침묵이다. 침묵은 하느님이 가장 잘 쓰시는 언어라고 한다. 기도는 대화라지만 실제로는 들음이고 경청이다. 하느님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마음에 깊이 새기는 거다. 그런데 침묵으로 말씀하시니 귀로 들음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침묵을 들어야 한다니 말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첫째 조건이 ‘자신을 버림’이다. 나의 바람 청원 걱정 계획 감정 등 나의 모든 걸 버린다. 그러면 내 안도 조용해지고 침묵하게 된다. 그래서 남는 건 하느님을 향하는 오롯한 마음, 예수님과 친해지고자 하는 바람, 하느님 사랑뿐이다. 그 신적인 고요와 침묵 속에 머무른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 15,4)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15,9) 그래서 마리아는 참으로 좋은 몫을 택한 거다. 결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2)
예수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십시오. 완전한 침묵과 고요 속에서 주님을 향하는 마음을 가르쳐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기도할 때마다 달라붙는 분심과 잡념을 알아채고 그것들이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두는 법을 가르쳐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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