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지난 일, 되새겨 본 기쁜 날/ 이병준
오늘은 KBS <아침 마당> 프로에서 학교 졸업식 추억이 테마가 되어서 유심히 들어 보았다. 사람은 다 유치원에서 부터 시작해 초등 중등 고등 대학 등 졸업식을 안 거친 사람은 없을 게다. 주제를 잘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 있었다. 어느 부인이 자기는 초 중 고 졸업식 때 송사와 답사를 6회에 걸쳐서 했다는 얘기를 했다. 그 얘길 듣고 나도 같은 경험이 있어서 색다른 감동으로 학창시절의 추억이 떠올라서 적어 본다.
나도 당시 국민학교는 고향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에 소재하는 다덕국민학교를 졸업할 때부터 송사 답사를 한 기억이 떠올랐다. 초
등 5학년 때 송사, 6학년 때 답사, 중 2학년 때 송사,3학년 때 답사, 고 2때 송사, 고 3때 답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그 당시는 중학교도
시험 봐서 합격해야 들어가던 시절이라 일류 이류 삼류로 학교를 구분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봉화 시골에서 대구중앙중학교 (당시
중앙상고 병설) 입학이니 내 입장에서는 이류, 삼류를 찾을 처지가 아니었다. 어머니께서 머리 비녀 찌르고 대구중학교 원서 사러 서무과에 갔더니 담당자가 아래 위로 훑어
보고 하는 말이 "촌에서 일등했더라도 이 학교는 시험이 어려워서 합격하기가 힘듭니
다" 라고 해도 돈을 내미니까 원서는 주어서 받아 왔다고 했다. 결국 대구중학교는 포기
하고 중앙중학교에 입학한 것이 중앙상고를 졸업하고 제일은행에 입사하게된 단초가 된 것이다.
중학교 때 1학년 4반인데 입학 첫날 단임선
생님이 급장을 뽑는데 "너희들은 서로가 잘
모르기 때문에 내가 이름 부르는 네사람
중에서 선택해주면 좋겠다"고 하면서 내 이름
은 네번째로 호명했다. 나는 아하, 나는 반에
서 성적이 4등이구나 하고 내심으로 짐작하고 속으로 잘하면 2학기엔 장학생이 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결국 2학기엔 반면제 장학생이 되어 공납금 절반 면제를 받고 2학년 1학기부터 고 3학년 1학기까지는
전액면제 장학생이 되어 무사히 학교는 마칠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공납금 내고 학교 다닐 형편이 못 되었다. 전면 장학생이 되면 학생회비 450원만 내면 되니까 졸업할 수 있었다. 고3 2학기는 취직 시험이 각 분야별
모집이 있어서 수업도 시험도 제대로 이루어
지지 못했고 나는 은행시험 합격 소식 듣고
수업 집중도가 나태해져 반면 장학생이 되었
다. 다행히 졸업도 하기 전 제일은행에 1968년 1월 4일 입사해서 연수를 마치고 1월 21일 1개월 봉급에 부임여비 포함해서 받고 1월 23일 졸업식에 2학기 등록금 4500원을 납부하고 졸업장을 받아 온 기억
이 아직도 생생하다.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때, 그 당시는 은행 시험이 9월에서 11월 경에 거의 이루어졌다. 그 중에 제일은행 채용 시험이 제일 먼저
였다. 9월경에 시행되고 발표를 기다리고 있
던 차에 10월 9일 한글날 기념 교내 백일장
이 있어 운동장에 모여 글짓기를 하고 있었고 그날의 글제가"이슬" 이었다.나는 산문으로 중간 쯤 쓰고 있는데 담임 선생님이 싱글
벙글 웃으시며 내 자리로 오시더니 "너 제일
은행 합격 통보 받았다" 고 귀에 대고 살짜기 말씀해 주셨다. 나로서는 두번째 기쁨이다. 중학교 시험 합격이 첫번째이고 두번째는 제일은행 시험 합격이다. 1968년 그 당시 상고에서 은행합격은 그야말로 영광이었다.
그때는 일류 대학 합격에 버금가는 영광이었
고 대학 갈 실력이 되는 대도 가난한 생활
환경 때문에 진학을 포기하고 취직을 선택
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시절이었다. 웬만한
살림 형편이 안되면 대학 갈 엄두도 못내던 시절이었다.
지금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 그 당시는 최악의 빈곤으로 고교졸업후에 곧바로 취직
을 안하면 생존이 어려운 상태이니 어떻게 하든지 직장을 잡아야하니 취업 시험에 전심
전력해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더 먼 앞을 짚어보지 못해서 대학공부를 접은 것이 두고두고 후회로 가슴
에 멍울져 풀리지 않고 있는 상태다. 그
당시에 상고 출신들의 로망은 은행이었고, 다음 순이 한국전력, 대한통운 순으로 직장 선호도가 매겨질 정도였다.
대학 공부를 접은 것에 대한 후회가 완전히
풀어진 건 아니지만 그러나 지금은 후회하지 않는다. 좀 아쉬워할 정도로 맺힌 후회를 녹
여내린 셈이다. 상고 나와서 제일은행 입행,
한국씨티은행으로 전직(轉職)해서 은행의 꽃이라는 지점장까지 역임 주특기 살려서 직장생활도 무사히 마쳤으니 후회도 없다.
기초 학문인 대학을 비록 나오지는 못했지만
한시 번역을 할 정도이니 한문학과 졸업한
수준은 되고, 시와 수필부문에 등단을 해서
대상도 수상했으니 국문학과 졸업 수준은 되는 셈이다. 서예는 한글만 고집스레 써서 공모전에 입ㆍ특선 대상도 수상 했으니 서예학과를 졸업한거나 진배없다. 대학은 능인불교대학을 기초반 4개월, 중급반 1년, 법사대학원 2년해서 3년 4개월을 직장 퇴근후에 야간에 공부해서 졸업했으니
내 생에 가장 높은 가치의 학문 탐구에 몰입한 시간이었다. 비록 사회의 정규대학은 아닐지
라도 불교는 인간 자신에게 질문의 화두를 던지는 고고한 학문으로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택한 일 지금 생각해도 고희를
바라보는 내 나이, 가장 적합한 시기에 배워
야 할 학문으로 인식되어 졸업을 했고 지금도 만족하니 4년제 정규대학 못 나온거 이제는 후회하지 않을 만하다.
공연히 고희를 지난 이 나이에 돌이킬 수 없
는 지난일에 얽매이기 보다는 당당하게 자위
함이 정신 건강에도 이롭다는 생각으로 자존
의 가치를 높이고 누릴 생각으로 내 생을 마칠 것을 다짐한다. 존재의 목표는 스스로 깨닫고 자존의 가치를 높혀가야만 하기에 그 분야에 괄목할 만한 족적, 남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족적을 남기고 가야하는 게 아주 평범하지만 비범한 인생사의 업(業)을 이루는 셈이 아니
겠는가. 나이, 그 연륜에 걸맞는 지족(知足)의
자각과 인식이 중요한 때(時)임을 사유해본다. ( 2022.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