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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2)
고후 8:1-9
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6 그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그가 이미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 하였노라
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8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 설 교 >
은혜를 풍성하게 합시다.
고후08장 1~7절 / 조학환목사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나 안 다니는 사람들이나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교회에서 헌금을 은근히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헌금 때문에 교회 오기를 꺼려하기도 하고 성도들 중에도 헌금으로 말미암아 스트레스를 받거나 때론 시험에 들 때도 있습니다. 사실 돈에 관한 문제는 교회 뿐 아니라 어느 곳에서든 상당히 민감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친구나 이웃 간에는 말할 것도 없고 형제간이나 심지어는 부모 자식 간에도 돈 문제는 가장 말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도 헌금에 관한 문제는 가능한 회피하고 싶고 가급적 부담을 드리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헌금함도 돌리지 않고, 강단에서 헌금하신 분의 이름도 부르지 않고 있습니다. 강단에서 이름을 부르면 헌금한 것을 광고하는 것 같기도 하고 드리지 못한 분은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헌금하신 분을 확인해 드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주보에는 싣고 있습니다. 이렇게 헌금은 이래저래 서로에게 부담스러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계속 침묵할 수는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명령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계속 덮고 간다면 직무유기이기 때문에 부득불 말씀 드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십일조나 기타 헌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렇습니다. 헌금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순종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명령입니다. 그래서 신14:22에서는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라고 말씀하셨고, 레27:32절에서는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고 하셨고, 눅11:42절에서는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으로 모셨다면 그 말씀에 순종하여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곧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종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요 생명이요 은혜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의 말씀 안에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드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분명히 하나님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복의 근원이십니다. 분명히 진리이시고 생명이십니다. 따라서 그 말씀 안에 우리가 살길이 있습니다. 복받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 따라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 따라서 마땅히 드릴 것을 드릴 줄 아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 할 때에 분명히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2. 헌금은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헌금의 두 번째 의미는 헌금은 돈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 관한 문제요, 믿음에 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마6:21절을 보겠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음이 있는 곳에는 몸도 물질도 시간도 열정도 따라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작년에 제 큰 아들이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오실 거라고 여겼던 분들 중에 못 오신 분도 계셨습니다. 우리 교인들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물론 다 사정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왠지 좀 서운했습니다. 왜 서운했을까요? 축의금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분들의 저에 대한 마음 때문입니다. 나의 존재가 그들에게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면 다른 이유를 일단 접어놓고 왔을 터인데 나라는 존재가 그들이 다른 것을 포기할 만큼 크지는 않았기 때문에 못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자녀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농사일이나 기타 다른 모든 일을 젖혀 놓고 가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내 자녀가 농사일이나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 내 삶에 있어서 예수님이 가장 크고 소중하고 가장 사랑하는 존재라면 어떻겠습니까? 세상의 다른 모든 일을 젖혀두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달려가지 않겠습니까? 우리 몸과 물질과 시간과 열정이 따라가지 않겠습니까?
유행가에 보면 무조건이라는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가사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당신이 부르면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넘어 무조건 달려가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그래서 당신이 부르면 열일 젖혀 놓고 그곳이 어디든 저 땅 끝까지라도 달려가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별도 달도 다따주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지옥까지 따라가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해도 결코 지옥까지는 따라가면 안됩니다.
여하튼 헌금을 드린다는 것은 마음과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사랑한다는 마음의 표현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이며, 또한 세상의 것은 곧 썩어져 사라지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런 믿음과 마음이 있다면 당연히 몸과 물질과 시간이 그쪽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정녕 주님을 사랑한다면 어찌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이 가지 않겠습니까? 정녕 모든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이 있다면, 또한 세상의 것은 곧 썩어 없어지는 것이고 저 하늘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고 그래서 그 나라를 바라보며 산다면 어찌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그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나를 위하여 생명까지 내어 주신 주님,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주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그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주님앞에 드리는 삶을 통하여 주께 영광 돌려드리고 여러분도 진정 자유와 기쁨과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헌금은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렇습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며, 우리 마음과 믿음의 표현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그런 말씀인데요,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너무나 힘든 상황에서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한 마게도냐 교인들을 칭찬하면서 고린도교회도 이 은혜에 동참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헌금의 의미를 깨우쳐 주고 있는데 첫 번째가 바로 은혜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에는 은혜라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 먼저 1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또 4절에서는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라는 말씀이 있고, 6절에서는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또 7절에서는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은혜가 뭡니까? 하나님께서 조건없이 베풀어주신 혜택을 말합니다. 그런데 마게도냐 교인들은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을 조건없이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은총을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됩니다. 구원받은 것 뿐 아니라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인 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요,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게 되면 또 어떻게 됩니까? 할렐루야 찬송이 나오고 마음에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이렇게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되면 또 어떻게 됩니까? 물론 주님을 사랑하고 영광을 돌리고 감사와 기쁨으로 섬기게 됩니다. 더 나아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귀히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도 힘들었지만 자신보다 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힘껏 헌금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2,3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보십시오. 극심한 가난가운데서도 풍성한 연보를 하였다. 힘대로 할 뿐 아니라 도리어 힘에 넘치도록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신들도 어려운데 힘에 넘치도록 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받은 바 너무나 큰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넘치는 기쁨과 감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나 같은 것을 사랑하셨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을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 영원한 생명,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감사와 기쁨이 없겠습니까? 이런 감사가 있다면 어찌 응답이 없겠으며 어찌 섬김과 헌신과 드림이 없겠습니까? 이런 은혜를 받으면 세상의 것들은 실상 그렇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살아 숨쉬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음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세상의 지식 권세 명예 물질 없어도 그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감사하고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입니다. 그래서 물질 따위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드리고 어찌하든지 조금이라도 더 드리고 싶어서 안달이 납니다. 그런 삶에 진정한 자유와 평안과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게 천국의 은총을 여기서 앞당겨 누리다가 마침내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바로 이런 은혜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난 속에서도 정말 기쁨과 감사함으로 힘에 겹도록 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받은 자의 모습이요, 이것이 바로 마게도냐 교인들이 받았던 가장 큰 은혜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은헤중의 은혜입니다. 예수님 믿게 된 것이 은혜중의 은혜요, 예수님 믿고 보니 내 맘속에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이 은혜중의 은혜입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를 많이 얻은 것이 은혜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마음 속에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가득차는 것이 진정한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이 가장 부요한 사람이고 가장 행복한 인생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자들은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자신을 사용할 줄 아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정말로 마음속으로 영혼속으로 온전히 깊이 깨닫고 느끼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여러분의 심령이 은혜로 가득 채워지고 그래서 심령이 더욱 부요해져서 정말 감사 충만, 은혜 충만, 기쁨 충만한 인생이 되시고 나아가 주님께나 이웃에게도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헌금은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요, 마음을 드리는 것이요, 은혜에 대한 응답이며 나아가 자신의 몸과 마음과 정성과 뜻을 드리는 것입니다.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그들은 우리가 바라던 것 이상으로 하였습니다. 그들이 우리가 바라는 것 이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그들 자신을 주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주님께 드렸기에 우리를 위해서도 기꺼운 마음으로 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헌금이라는 것은 단순히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마음의 문제요, 은혜에 대한 응답의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더 본질적으로는 존재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의 소유인지에 대한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생명을 주신 주님께 자신을 바쳤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드렸고 자신을 드렸기 때문에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았기에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주님께 드렸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생명도 시간도 물질도 능력도 지혜도 이성도 모두가 하나님께서 공짜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주님의 소유인 것입니다. 아니 원래부터 주님의 소유입니다. 이걸 알고 인정한다면 감사와 기쁨으로 헌신과 헌금과 섬김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헌금이나 헌신이 왜 힘이 듭니까?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소유권을 바르게 인정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 힘으로 내가 노력해서 내가 열심히 수고해서 내가 번 돈이기에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상29:14절을 보십시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실제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생명, 지혜, 능력, 의지, 육신, 땅, 하늘, 공기, 물 다 어디서 왔습니까? 하나님이 주시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도 없고 생명을 이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분명한 사실을 모르고 혹은 알면서도 애써 부인하면서 모든 것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하지도 못하고 올바르게 사용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농부가 암소 한 마리를 길렀는데 어느 날 송아지 두 마리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이 농부가 기분이 너무 좋아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 소가 기특하게도 송아지를 두 마리나 낳았어. 그래서 한 마리는 하나님께 드릴 거야.” 신앙이 별로 없던 남편이 그런 소리를 하니까 아내는 기분이 너무 좋아 “아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남편이 이제 믿음이 좀 들었나 봅니다.”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남편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들어오더니 맥빠진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여보, 송아지 한 마리가 죽었어.’ 그래서 부인이 누구 송아지가 죽었느냐고 묻자 남편은 “주님의 송아지가 죽었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왜 하필 주님의 송아지가 죽었을까요? 우리도 그럴 때가 많지 않을까요? 뭔가 무슨 변명거리를 만들어 일단 내 몫을 먼저 떼어 놓고 주님의 몫에서 제해 버리는 거지요. 그러나 나를 비롯한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주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생명주신 것을 기억한다면 주님의 몫은 그대로 놔두고 내 몫에서 제해야 되지 않을까요?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조금 무거운 주제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냥 회피할 문제는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문제요, 신앙의 문제요, 마음의 문제요, 존재에 관한 문제입니다. 무엇에 우선권을 두는지, 무엇을 중요시 여기는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는지를 알려주는 바로미터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주님께 감사와 기쁨으로 드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혜가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소중하다면, 우리가 누릴 저 영광의 나라가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영광스럽고 굉장한 것이라면 감사와 기쁨으로 드릴 줄 아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이 주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와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은혜로운 마음, 넉넉한 마음, 풍성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세상 누구보다도 부요하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가운데 주의 역사 이루며 살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진정으로 부요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삶
고후 8:1-5 / 박봉수목사
고린도후서는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여러 차례 서신교환을 했습니다.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만도 네 차례입니다. 그 중에 이 고린도 후서는 마지막 편지입니다.
바울은 2차전도 여행 때 주로 유럽지역,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의 그리스 지역을 중심으로 사역을 했습니다. 이 때 놀라운 선교의 열매가 겨둬져서 여러 교회들이 생겨났습니다. 우선 북쪽의 마게도니야 지역에 여러 교회들이 생겨났습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그리고 베뢰아 교회를 말합니다. 그리고 남쪽 아가야 지역에도 교회가 생겨났는데 그것이 고린도 교회입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3차 전도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이 때 에베소에 머물며 아시아지역을 중심으로 사역을 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고 있을 때 고린도 교회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겨서 교회가 혼란스럽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 도움을 청해왔습니다. 바울이 사람을 보내기도 하고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교회가 점차 안정되어갔습니다.
이제 3차 전도여행을 마치면서 2차 전도여행 때 세워졌던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마게도니야 지역의 교회들을 방문하고 있을 때 바울의 명을 받고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온 디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때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로 가기 전에 다시 한 번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가기 전에 불편한 여러 문제들이 다 마무리 되고 좋은 관계 속에서 만나고자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 후서입니다.
이제 본문을 보겠습니다. 지금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들을 방문하는 중입니다. 이 교회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사실 바울은 이 교회들에서 오랜 시간 사역을 하지 못했습니다. 박해가 일어나서 도망치듯 이 지역을 떠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가 막 생겨날 즈음에 그 지역을 떠났습니다. 대신 누가에게 이곳에 남아 교회들을 돌보게 했습니다.
그런데 후에 다시 이 지역을 방문해 보니 오래 머물지 못하고 잠시 복음을 전하고 떠났지만 정말 귀한 교회들이 세워져있는 것입니다. 저들의 신앙생활이 자기가 상상했던 것보다 훌륭했습니다. 이에 비해 고린도 교회는 1년 6개월이나 되는 긴 시간 사역했지만 오히려 이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에게 배워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고린도 교인들에게 도전을 받고 그리고 본을 삼으라고 마게도냐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마게도냐 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풍성한 은혜
사도 바울이 소개하고 있는 마게도냐 교인들의 풍성한 삶은 우선 풍성한 은혜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풍성한 은혜는 저들이 살아가고 있는 풍성한 삶의 소중한 요소일 뿐 아니라 저들이 살아가고 있는 풍성한 삶의 근본 원인이기도 합니다.
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란 도대체 어떤 은혜일까요?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저들이 은혜 받은 사람들로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을 뿐입니다.
행 16-17장을 보면 바울이 이 마게도냐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 저들에게 어떤 은혜가 임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 가정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보겠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 점보는 여인에게서 귀신을 내 쫓았다고 그 주인이 고소하는 바람에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옥중에서 한 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송하자 지진이 일어나며 옥문이 다 열리고 매인 것이 다 풀렸습니다. 간수가 자다가 깨어 죄수들이 다 도망친 줄 알고 그 책임이 두려워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이 때 바울과 실라가 자기들이 여기 있다 하며 자결을 막았습니다. 그러자 간수가 물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이 때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간수가 저들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믿고 모두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저들이 받은 은혜는 무엇보다 구원의 은혜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와 그 가정이 다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여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교회가 바로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그리고 베뢰아 교회 즉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이렇게 복음을 받고 예수를 믿고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저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보다도 구원의 은혜입니다. 이 구원의 은혜가 저들에게 풍성하게 임하면서 저들의 삶을 풍성한 삶으로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어느 집사님 간증을 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편안한 삶을 살고 있던 어느 날 소화가 잘 안 되고 가슴이 답답해서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답니다. 의사가 남편을 불러서는 위암인 것 같은데 상태가 심각하다 하더랍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하나님께 기도하기로 결단했답니다. 기도하면서 가족들이 크게 깨달았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고도 제대로 감사하지 못했고, 은혜 갚는 삶보다는 그저 편안한 삶을 누리려고만 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로 회개하고 이 집사님을 고쳐주시면 새롭게 살겠다고 서원했답니다.
다시 정밀검사를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았답니다. 의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랍니다. 단순한 위계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동명이인이 있어서 챠트가 바뀐 것을 모르고 그렇게 진단했다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다시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답니다. 우선 하나님께 자기들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에 감사드렸답니다. 그리고 이 번 이 일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깊이 느끼게 하시려고 섭리하신 은혜의 역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깨달은 은혜를 마음에 새기고 은혜 갚는 삶을 살기로 더욱 뜨겁게 결단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일로 자기들이 더욱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게 됐고, 이 때문에 자기들의 삶이 더욱 풍성해졌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게도냐 교인들처럼 우리도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 풍성한 은혜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풍성한 기쁨
사도 바울은 풍성한 은혜 가운데 살고 있는 마게도냐 교인들이 풍성한 기쁨을 맛보며 살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게도냐 교인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넘치는 기쁨을 맛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풍성한 은혜 안에 살고 있는 마게도냐 교인들은 환난 가운데서 시련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넘치는 기쁨을 맛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들이 겪었던 환난은 무엇일까요? 본문에 구체적으로 저들이 어떤 환난을 당했는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대신 살전 2:14 말씀을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의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인들에게 예수 믿는다고 박해를 받았던 것처럼, 이 마게도냐 교인들도 이 지역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다고 박해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지역에 와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난동꾼들이라고 모함을 했습니다. 이 지역 사람들이 저들의 말을 믿고 저들과 함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습니다.
이곳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믿기 전에는 이렇게 환난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예수를 믿는 신앙을 가지게 되면서,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과거에 없던 심한 환난의 시련을 겪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저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마게도냐 교인들이 이런 과거에 없던 심한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뻐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넘치는 기쁨을 누리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편지로 이런 마게도냐 교인들의 풍성한 기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가 맛보는 기쁨을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외적인 기쁨입니다. 우리 겉 사람이 맛보는 기쁨을 말합니다. 바라고 소원하던 일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좋은 일들이 일어날 때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외적인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내적인 기쁨입니다. 우리 속사람이 맛보는 기쁨을 말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만날 때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때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의 영혼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게 될 때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내적인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내적인 기쁨은 외적인 상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내가 편안한 가운데 내적인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인생의 위기 가운데서도 내적인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더더욱 내가 큰 환난의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내적인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인생의 위기와 환란의 시련 속에서 더 강렬하게 내적인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고난과 기쁨을 연결해서 말씀하는 곳이 참 많습니다. 신약 성경에 무려 21곳이나 됩니다. 대표적인 곳 몇 곳을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약 1:2-3/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골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롬 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렇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모두가 다 내적인 기쁨에 관한 말씀입니다. 고난 속에서 더 풍성한 내적인 기쁨을 맛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마게도냐 교인들이 이런 내적인 기쁨을 맛보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 환난의 시련과 고통 속에서 넘치는 기쁨을 맛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런 내적인 기쁨을 맛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비록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이런 내적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아니 고난 가운데 있을수록 넘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더욱 풍성한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풍성한 헌신
바울은 마게도냐 교인들이 풍성한 은혜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고 있는데 그 모습 가운데 또 하나가 바로 풍성한 헌신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마게도냐 교인들은 극심한 가난 속에 살아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금을 풍성하게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자원해서 자발적으로 헌금을 하고 있는데 바울이 볼 때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 헌금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마게도냐 교인들은 극심한 가난을 겪으며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지역은 천연자원이 풍부한 지역입니다. 원래 이 지역 사람들이 잘 살았습니다. 과거 알렉산더가 이 지역에서 나라를 일으켜 세계를 제패할 정도로 이 지역은 물자가 풍부한 곳입니다. 그런데 로마가 이 지역을 식민통치하면서 경제적인 수탈이 극심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 사람들은 노예수준으로 가난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로부터 예루살렘 교회의 경제적인 어려움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지금 자기들도 지독한 가난에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조차 힘든 상황인데 저들이 십시일반으로 헌금을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차마 저들의 형편 때문에 헌금 문제를 이야기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자발적으로 헌금에 나섰습니다. 바울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이야기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풍성한 은혜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받은바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고 있는데 마침 예루살렘 교회가 큰 어려움 가운데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들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받은바 은혜를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가진 것은 없지만 최선을 다해서 나누기로 한 것입니다.
겔 47장을 보면 에스겔 선지자가 본 환상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데리시고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펼쳐지는 놀라운 일을 보여주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 물이 성전 뜰을 적십니다. 그리고 그 물이 성전 문밖으로 스며 나오고 있었습니다. 성전 밖으로 조금 나아가 보니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발목에까지 찹니다. 다시 더 나아가 보니 물이 무릎에 차고, 또 다시 더 나아가 보니 큰 강이 되었습니다. 그 강 주변을 보니 각종 나무가 우거지고 물속에 수많은 물고기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강이 바다로 흘러들어 바닷물이 되살아나고 생명의 축제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성전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세상으로 흐르는 장면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은혜가 흐르게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은혜를 흐르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힘닿는 대로 최선을 다해 헌금하고, 또 헌신하여 섬겼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받은 풍성한 은혜를 흐르게 한 것입니다. 그 결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 그 은혜를 누렸습니다. 멀리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 은혜를 누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가 흐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풍성한 헌신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부흥하고, 주변 어려운 이웃들이 그 은혜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풍성한 삶을 삽니다.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그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풍성한 은혜로 환난 중에서도 기쁨을 맛보고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그 풍성한 은혜를 풍성한 헌신으로 갚으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은혜가 흐르게 해야 하겠습니다.
은혜를 풍성하게 합시다.
고후 8:1~7 / 조학환목사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나 안 다니는 사람들이나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교회에서 헌금을 은근히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헌금 때문에 교회 오기를 꺼려하기도 하고 성도들 중에도 헌금으로 말미암아 스트레스를 받거나 때론 시험에 들 때도 있습니다. 사실 돈에 관한 문제는 교회 뿐 아니라 어느 곳에서든 상당히 민감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친구나 이웃 간에는 말할 것도 없고 형제간이나 심지어는 부모 자식 간에도 돈 문제는 가장 말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도 헌금에 관한 문제는 가능한 회피하고 싶고 가급적 부담을 드리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헌금함도 돌리지 않고, 강단에서 헌금하신 분의 이름도 부르지 않고 있습니다. 강단에서 이름을 부르면 헌금한 것을 광고하는 것 같기도 하고 드리지 못한 분은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헌금하신 분을 확인해 드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주보에는 싣고 있습니다. 이렇게 헌금은 이래저래 서로에게 부담스러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계속 침묵할 수는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명령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계속 덮고 간다면 직무유기이기 때문에 부득불 말씀 드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십일조나 기타 헌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렇습니다. 헌금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순종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명령입니다. 그래서 신14:22에서는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라고 말씀하셨고, 레27:32절에서는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고 하셨고, 눅11:42절에서는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으로 모셨다면 그 말씀에 순종하여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곧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종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요 생명이요 은혜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의 말씀 안에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드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분명히 하나님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복의 근원이십니다. 분명히 진리이시고 생명이십니다. 따라서 그 말씀 안에 우리가 살길이 있습니다. 복받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 따라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 따라서 마땅히 드릴 것을 드릴 줄 아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 할 때에 분명히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2. 헌금은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헌금의 두 번째 의미는 헌금은 돈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 관한 문제요, 믿음에 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마6:21절을 보겠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음이 있는 곳에는 몸도 물질도 시간도 열정도 따라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작년에 제 큰 아들이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오실 거라고 여겼던 분들 중에 못 오신 분도 계셨습니다. 우리 교인들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물론 다 사정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왠지 좀 서운했습니다. 왜 서운했을까요? 축의금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분들의 저에 대한 마음 때문입니다. 나의 존재가 그들에게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면 다른 이유를 일단 접어놓고 왔을 터인데 나라는 존재가 그들이 다른 것을 포기할 만큼 크지는 않았기 때문에 못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자녀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농사일이나 기타 다른 모든 일을 젖혀 놓고 가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내 자녀가 농사일이나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 내 삶에 있어서 예수님이 가장 크고 소중하고 가장 사랑하는 존재라면 어떻겠습니까? 세상의 다른 모든 일을 젖혀두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달려가지 않겠습니까? 우리 몸과 물질과 시간과 열정이 따라가지 않겠습니까?
유행가에 보면 무조건이라는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가사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당신이 부르면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넘어 무조건 달려가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그래서 당신이 부르면 열일 젖혀 놓고 그곳이 어디든 저 땅 끝까지라도 달려가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별도 달도 다따주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지옥까지 따라가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해도 결코 지옥까지는 따라가면 안됩니다.
여하튼 헌금을 드린다는 것은 마음과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사랑한다는 마음의 표현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이며, 또한 세상의 것은 곧 썩어져 사라지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런 믿음과 마음이 있다면 당연히 몸과 물질과 시간이 그쪽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정녕 주님을 사랑한다면 어찌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이 가지 않겠습니까? 정녕 모든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이 있다면, 또한 세상의 것은 곧 썩어 없어지는 것이고 저 하늘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고 그래서 그 나라를 바라보며 산다면 어찌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그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나를 위하여 생명까지 내어 주신 주님,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주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그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주님앞에 드리는 삶을 통하여 주께 영광 돌려드리고 여러분도 진정 자유와 기쁨과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헌금은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렇습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며, 우리 마음과 믿음의 표현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그런 말씀인데요,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너무나 힘든 상황에서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한 마게도냐 교인들을 칭찬하면서 고린도교회도 이 은혜에 동참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헌금의 의미를 깨우쳐 주고 있는데 첫 번째가 바로 은혜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에는 은혜라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 먼저 1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또 4절에서는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라는 말씀이 있고, 6절에서는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또 7절에서는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은혜가 뭡니까? 하나님께서 조건없이 베풀어주신 혜택을 말합니다. 그런데 마게도냐 교인들은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을 조건없이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은총을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됩니다. 구원받은 것 뿐 아니라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인 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요,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게 되면 또 어떻게 됩니까? 할렐루야 찬송이 나오고 마음에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이렇게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되면 또 어떻게 됩니까? 물론 주님을 사랑하고 영광을 돌리고 감사와 기쁨으로 섬기게 됩니다. 더 나아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귀히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도 힘들었지만 자신보다 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힘껏 헌금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2,3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보십시오. 극심한 가난가운데서도 풍성한 연보를 하였다. 힘대로 할 뿐 아니라 도리어 힘에 넘치도록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신들도 어려운데 힘에 넘치도록 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받은 바 너무나 큰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넘치는 기쁨과 감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나 같은 것을 사랑하셨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을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 영원한 생명,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감사와 기쁨이 없겠습니까? 이런 감사가 있다면 어찌 응답이 없겠으며 어찌 섬김과 헌신과 드림이 없겠습니까? 이런 은혜를 받으면 세상의 것들은 실상 그렇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살아 숨쉬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음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세상의 지식 권세 명예 물질 없어도 그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감사하고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입니다. 그래서 물질 따위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드리고 어찌하든지 조금이라도 더 드리고 싶어서 안달이 납니다. 그런 삶에 진정한 자유와 평안과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게 천국의 은총을 여기서 앞당겨 누리다가 마침내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바로 이런 은혜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난 속에서도 정말 기쁨과 감사함으로 힘에 겹도록 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받은 자의 모습이요, 이것이 바로 마게도냐 교인들이 받았던 가장 큰 은혜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은헤중의 은혜입니다. 예수님 믿게 된 것이 은혜중의 은혜요, 예수님 믿고 보니 내 맘속에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이 은혜중의 은혜입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를 많이 얻은 것이 은혜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마음 속에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가득차는 것이 진정한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이 가장 부요한 사람이고 가장 행복한 인생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자들은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자신을 사용할 줄 아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정말로 마음속으로 영혼속으로 온전히 깊이 깨닫고 느끼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여러분의 심령이 은혜로 가득 채워지고 그래서 심령이 더욱 부요해져서 정말 감사 충만, 은혜 충만, 기쁨 충만한 인생이 되시고 나아가 주님께나 이웃에게도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헌금은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요, 마음을 드리는 것이요, 은혜에 대한 응답이며 나아가 자신의 몸과 마음과 정성과 뜻을 드리는 것입니다.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그들은 우리가 바라던 것 이상으로 하였습니다. 그들이 우리가 바라는 것 이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그들 자신을 주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주님께 드렸기에 우리를 위해서도 기꺼운 마음으로 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헌금이라는 것은 단순히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마음의 문제요, 은혜에 대한 응답의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더 본질적으로는 존재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의 소유인지에 대한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생명을 주신 주님께 자신을 바쳤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드렸고 자신을 드렸기 때문에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았기에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주님께 드렸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생명도 시간도 물질도 능력도 지혜도 이성도 모두가 하나님께서 공짜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주님의 소유인 것입니다. 아니 원래부터 주님의 소유입니다. 이걸 알고 인정한다면 감사와 기쁨으로 헌신과 헌금과 섬김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헌금이나 헌신이 왜 힘이 듭니까?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소유권을 바르게 인정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 힘으로 내가 노력해서 내가 열심히 수고해서 내가 번 돈이기에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상29:14절을 보십시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실제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생명, 지혜, 능력, 의지, 육신, 땅, 하늘, 공기, 물 다 어디서 왔습니까? 하나님이 주시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도 없고 생명을 이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분명한 사실을 모르고 혹은 알면서도 애써 부인하면서 모든 것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하지도 못하고 올바르게 사용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농부가 암소 한 마리를 길렀는데 어느 날 송아지 두 마리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이 농부가 기분이 너무 좋아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 소가 기특하게도 송아지를 두 마리나 낳았어. 그래서 한 마리는 하나님께 드릴 거야.” 신앙이 별로 없던 남편이 그런 소리를 하니까 아내는 기분이 너무 좋아 “아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남편이 이제 믿음이 좀 들었나 봅니다.”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남편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들어오더니 맥빠진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여보, 송아지 한 마리가 죽었어.’ 그래서 부인이 누구 송아지가 죽었느냐고 묻자 남편은 “주님의 송아지가 죽었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왜 하필 주님의 송아지가 죽었을까요? 우리도 그럴 때가 많지 않을까요? 뭔가 무슨 변명거리를 만들어 일단 내 몫을 먼저 떼어 놓고 주님의 몫에서 제해 버리는 거지요. 그러나 나를 비롯한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주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생명주신 것을 기억한다면 주님의 몫은 그대로 놔두고 내 몫에서 제해야 되지 않을까요?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조금 무거운 주제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냥 회피할 문제는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문제요, 신앙의 문제요, 마음의 문제요, 존재에 관한 문제입니다. 무엇에 우선권을 두는지, 무엇을 중요시 여기는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는지를 알려주는 바로미터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주님께 감사와 기쁨으로 드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혜가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소중하다면, 우리가 누릴 저 영광의 나라가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영광스럽고 굉장한 것이라면 감사와 기쁨으로 드릴 줄 아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이 주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와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은혜로운 마음, 넉넉한 마음, 풍성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세상 누구보다도 부요하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가운데 주의 역사 이루며 살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진정으로 부요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에 주신 은혜
김광일목사 / 고후 8:1-9
“주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는 작가 정연희(鄭然喜)의 장편소설입니다. 주인공 맹의순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27세에 세상을 떠난 실제 인물입니다. 평양 장대현 교회 맹광호 장로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해방 후 월남하여 한신대학에 다니던 중에 6.25 전쟁이 일어났고, 인민군에게 붙잡혀 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여 남쪽으로 피난을 가다 인민군 패잔병으로 몰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됩니다. 수용소에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항상 찬송을 부르고, 시편 23편을 외우면서 부상을 당한 중공군 포로들의 간호를 위해 봉사하며 복음 전파에 힘썼습니다. 그들의 발을 씻겨 주었고, 죽어가는 결핵환자를 붙잡고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2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는 가운데 맹의순은 포로수용소의 포로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됩니다. 그 후 억울함이 받아들여져 석방이 결정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그는 수용소에 남아 포로들을 계속 돌보기로 작정했습니다. 성 프랜시스의 헌신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 프랜시스의 기도를 인용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 어찌 천국을 즐기겠습니까? 주여, 저주 받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시든지, 아니면 저를 지옥으로 보내 고통 받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소서. 그리고 만일 그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없다면 차라리 지옥에 살며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겠습니다. 나로 하여금 이곳에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그는 성 프랜시스의 기도를 몸소 실천하려 한다면서 친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결코 희생도 아니고 어떤 것도 아닐세. 이곳에 있는 형제들과 함께 있을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고난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결국 과로로 그는 27세의 젊은 나이로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중공군 포로들은 통곡을 하며 추도의 글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우리처럼 포로의 옷을 입은 그가 미군의사들을 도우며 병동을 찾아오던 초기에 우리는 그를 경멸하고 무시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늘 온화했고, 우리를 돕는 행동은 희생정신으로 언제나 꾸밈없이 한결같았습니다. 1952년 8월 11일, 새벽 3시, 그날도 맹선생은 환자들을 다 씻어준 다음, 언제나처럼 시편 23편을 중국말로 더듬더듬 읽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외치더니, 그 자리에 쓰러지셨고, 결국 우리의 곁을 떠나셨습니다. 우리는 심히 통곡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맹선생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맹선생과 함께 주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통곡합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쳤습니다. 은혜의 잔이 차고 넘쳤습니다.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3차 전도여행길에 오른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머물며 아시아지역을 중심으로 사역을 했습니다. 에베소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 교회가 혼란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가 점차 안정되어간다는 소식을 디도를 통해 듣게 됩니다. 그리고 마게도냐 교회들도 하나님께 은혜 받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마게도냐 교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무엇입니까? 용서 받을 조건을 갖추지 못한 마게도냐 교인들은 조건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관대함을 입은 것입니다. 흔히 ‘하나님의 은혜’ 라고 하면 물질적인 복을 베푸시거나, 일이 잘되게 해주시거나, 말씀에 감동을 받는 것들 즉 나를 위한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구제하고 헌금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을 위해 구제하고 교회를 위하여 봉사할 마음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구제와 봉사를 할 때 가능하도록 능력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게도냐 교회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은혜입니까? 그리고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어떻게 나타나야 합니까?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첫째로 기쁨으로 행하는가
아프리카 선교사 데이빗 리빙스턴 (David Livingstone)이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강연을 할 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선교사 직분을 맡기셨다는 사실에 대해 기쁨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희생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지고 있는 엄청난 빚을 생각한다면 그것을 어찌 희생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결코 그 빚을 갚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수고한 것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해 볼 때,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결코 희생을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자기 자신을 바치시려고 아버지의 높은 보좌를 떠나신 그분의 위대한 희생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의 그것을 희생이라 말해서는 안 됩니다.” 리빙스턴은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기쁨으로 하였습니다. 무엇도 그의 기쁨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큰 기쁨,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없을지라도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행복했습니다. 기쁨으로 일하면 사탄이 물러갑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기쁨이 넘치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 2절입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마게도냐 교인들은 현실을 초월한 기쁨이 항상 내재해 있었습니다. 그 기쁨은 모든 역경을 감당해 나갈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고통을 겪으면서도 넘치는 기쁨을 맛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은 후 닥치는 시련을 당하면서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넘치는 기쁨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의 기쁨은 외적인 기쁨이 아니라 내적인 기쁨입니다. 속사람이 맛보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영혼이 하나님을 만날 때 기쁨이요 속사람이 말씀을 깨달을 때 맛보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기도 응답을 체험하게 될 때 얻는 기쁨입니다. 내적인 기쁨은 외적 상황과 관계가 없습니다. 오히려 위기와 환란의 시련 속에서 더 강렬하게 기쁨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비록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쁨이 넘치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자원하여 드리는가
알버트 슈바이처 (Albert Schweitzer)는 친구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자신의 생애를 고백했습니다. “자네가 이 편지를 받기 전에 아마 난 죽을 것 같네.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더라도 슬퍼하지 말게나. 나는 세상에서 제일 축복받은 자로 생각하고 싶네. 불쌍한 사람들을 섬기는 사업에 60여 년간 자원하여 헌신할 수 있었고, 90세의 노구를 이끄는 이 순간까지 계속할 수 있음은 과거나 현재나 변함없이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섭리이신 줄을 확신하고 진심을 다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고 싶네.” 슈바이처는 자신에게 주어진 생애를 끝마치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평화로운 상태에서 자신을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고백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삶이 채워진다면 자원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마게도냐 교인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 가운데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가진 것은 없지만 자원하여 나누려 한 것입니다. 자원하여 드림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본받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은 억지로나 사람 앞에서 부득이한 마음으로 연보하지 않았습니다. 구제 헌금 하는 일에 바울이 권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연보의 뜻은 ‘단순’입니다. 단순은 연보의 본질입니다. 복잡한 마음이 없이, 단순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목적으로 드려야 합니다. 마게도냐 교회의 연보는 주께 대한 감사로 드리며, 고난 중에 있는 형제들에 대한 애정에 자원하여 나누는 헌금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원하여 드리는 희생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사랑으로 섬기는가
우리나라 초대 교회 지도자 가운데 최흥종(崔興琮)은 전라도 광주에서 처음으로 예수 믿고 세례 받은 사람입니다. 광주 교회의 최초 장로, 광주 출신 최초의 목사가 된 그는 원래 장터와 뒷골목을 주름잡던 주먹이었습니다. 후에 마음을 잡고 포사이드(Wiley Hamilton Forsythe) 의료 선교사를 만나 조수로 일하게 됩니다. 포사이드가 광주로 올 때 길 안내를 했는데 도중에 구걸하는 거지를 만납니다. 나병에 걸려 잘 걷지 못하는 여자였습니다. 최흥종은 무의식적으로 피했는데, 포사이드는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려 그녀를 안아 말에 태우고 자신이 고삐를 잡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멀찌감치 따라가던 최흥종에게 이 모습은 이해할 수 없는 충격이었습니다. 광주에 도착하자 포사이드는 길에서 만난 나병환자를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그런데 먼저 와 있던 환자들이 나병환자하고 함께 지낼 수 없다고 반발하는 바람에 벽돌을 굽던 가마터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에서 포사이드 선교사는 나환자를 직접 안아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최흥종은 바라만 볼 뿐이었습니다. 순간 환자를 옮기던 중에 환자가 들고 있던 지팡이가 떨어졌습니다. 선교사는 지팡이를 집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끝내 나병환자가 가지고 있던 피고름이 묻은 지팡이를 집을 수 없었습니다. 그날 밤부터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왜 그는 하는데 나는 하지 못하는가? 나는 내 동족인데도 피해 도망했는데 어떻게 그는 자식 대하듯이 안을 수가 있었나? 그와 나 사이에 무엇이 다른가?” 마침내 답을 얻었습니다. “그렇다. 사랑의 차이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렇게’ 사는 것이다. 나도 사랑으로 살아야겠다.” 그리고 최흥종은 무등산 골짜기에 집을 짓고 나병환자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이 치료 받도록 재산을 내놓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나병 전문 요양원인 광주한센병원이며 후에 여수 애양원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본문 8절입니다.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 기근 가운데 있는 예루살렘 성도들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가 임할 때 가능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진실함을 증명하는 길은 형제된 성도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사랑에는 구체적인 행동이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사정을 들으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구제를 작정하였습니다. 사랑한다면 아낌없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주님을 위하여 아낌없이 드리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생명까지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마게도냐 교인들이 보여준 헌신적인 사랑에 견주어 고린도 교인들의 사랑이 진실한 것임을 증명하고자 한다면 사랑으로 섬기라고 바울은 권면합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영국의 시골에 살던 두 명의 젊은이가 도시로 옮겨와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시골교회의 따뜻한 분위기와 다른 도시 교회 분위기에 적응하기가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일 년이나 지났지만 아는 척하는 교인이 없었습니다. 두 청년은 너무하다는 생각에 결단하였는데 내용은 서로 달랐습니다. 한 청년은 다음 주까지 교인들이 아는 체 하지 않으면 이 교회를 나오지 않겠다고 결단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청년은 다음 주에 아무도 아는 체하지 않으면 먼저 말을 걸겠다고 결단했습니다. 다음 주에도 교회는 두 청년에게 아무도 아는 체하지 않았습니다. 결단한 대로 한 청년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반대로 다른 청년은 교인들을 찾아가 말을 건넸고 적극적으로 교회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청년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 안에 가르치는 은사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교회의 어린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놀랍게 변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소중하게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너무도 기뻤습니다. 후에 청년은 신학교에 가서 훈련을 받고 목회자로 성장했는데 이 청년이 바로 청교도 시대를 대표하는 리차드 백스터 (Richard Baxter) 목사입니다.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교회를 바라보는 구경꾼입니까? 자발적 참여자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받고 적극적으로 교회 안에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소중한 일원으로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당신의 교회로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은혜를 통해 어떠한 시련이라도 넘치는 기쁨으로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자원하여 드리는 일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섬기는 일을 행함으로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거룩한 일에 동참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이수영목사 / 고후 8:1-15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에게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연보를 해 줄 것을 권면하는 글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로부터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생각해달라고 부탁을 받은 바 있습니다(갈2:10). 그렇지 않아도 본래부터 그런 일을 힘써 행해왔던(갈2:10) 사도 바울은 그 목적으로 이방 땅의 교회들에게서 모금하는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에게 편지하면서도 그 일을 언급하기를 잊지 않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남을 위해 놀라운 자기희생을 보여준 두 가지 사례를 들며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헌금하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례는 마게도니야 지방의 교회들 즉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의 교회들입니다. 먼저 본문 1-2절을 다시 보면 사도 바울은 쓰기를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들이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렇게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한 것이 그들의 삶이 평안하고 풍요로웠기 때문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써 보낼 당시의 마게도냐 교회들이 처해있던 상황은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이라는 말로 묘사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쁨이 넘쳤고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연보도 풍성하게 넘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 받은 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의 이러한 모습을 알림으로써 사도 바울은 물질적으로 비교적 부요했던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이 큰 도전을 받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증언은 계속됩니다. 본문 3-5절을 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마게도냐 교회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능력 이상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자원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크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희생과 헌신은 먼저는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바울의 권면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기꺼이 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자신들은 가난하면서도 남을 위해서는 풍성히 베풀 줄 안 마게도냐 교회들의 신자들을 소개한 사도 바울은 모든 면에서 풍성하고 뛰어난 고린도 교회이니만큼 남을 위한 사랑을 증명함에 있어서도 뛰어날 것을 권면합니다. 본문 7-8절입니다: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연보를 하도록 독려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이 든 남을 위한 놀라운 자기희생의 두 번째 사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본문 9절을 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뜻이 곧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하늘의 영광을 소유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가난하게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등하심과 하늘의 모든 영광과 권세를 버리시고 자기를 비우셨으며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가난한 자였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것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죄의 노예일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노예는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 안에서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를 믿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한 모든 죄가 대속되는 은혜를 입었고 죄의 노예상태로부터 해방되었으며 구원과 영생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부요해질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사랑을 거저 받은 사람이라면 우리 또한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사랑을 베풀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사도 바울은 말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것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그 놀라운 사랑을 되돌려 갚는 방법이며 기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아낌 없이 그 연보에 동참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권면한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지만 사랑을 베푸는 사람 자신에게 유익이 됩니다. 사도 바울도 본문 10절에서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합니다.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은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이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이 보내기는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보내지만 사실 그 연보를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시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 11절 끝과 12절에서 썼습니다: “있는 대로 하라.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기꺼이 돕고자 하는 의지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하나님은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은 그들은 평안하게 해주고 막상 돕는 이들은 어려워지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고통의 짐을 함께 나누어 모두가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3-14절을 봅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14절에서 사도 바울은 지금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여유가 있어서 가난한 이들을 돕지만 거꾸로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가난해질 때는 또 다른 교회 성도들로부터 도움을 받게 됨으로써 언제나 모두가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의 또 다른 유익함이라는 것입니다.
끝으로 사도 바울은 출애굽 한 옛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의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매일의 양식으로 주신 만나를 거둘 때의 일을 상기시킵니다. 본문 15절입니다: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모두가 필요한 대로 골고루 나누는 삶임을 하나님께서 일찍이 가르쳐주셨음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은 바로 예루살렘 교회가 유무상통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본을 보인 교회임을 상기시키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모교회가 겪는 어려움을 다른 교회들이 함께 나누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임을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알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게도냐 교회들이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위하여 그들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한 일을 가리키며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라고 했다는 사실을 주목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환난과 시련을 경감시켜 주셨다거나 그들의 극심한 가난을 없애주셨음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그들이 오히려 기쁨이 넘치고 다른 교회를 위한 연보를 풍성히 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박해와 고난과 물질적 가난 가운데서 오히려 영적 부요함과 너그러움의 부요함을 누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반면에 물질의 부요함은 도리어 영적 빈곤함을 불러올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은혜중심의 교회
정필도목사 / 고후서 8장 1절~7절
오늘은 우리 수영로교회가 창립(1975. 6. 1)한 지 35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그동안 함께해주시고 축복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저는 30대 초반에 개척을 시작하여 이제는 70을 바라보게 되었지만, 그동안 한 것이 너무 없어서 하나님 앞에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저는 수영로교회를 개척할 때 우리 교회가 말씀 중심의 교회, 은혜중심의 교회, 선교하는 교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1. 우리 교회는 말씀 중심의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요,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 교회는 무엇보다도 말씀 중심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은혜를 받는 통로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기도를 통해서이고, 둘째는 말씀을 통해서이고, 셋째는 은혜 받은 사람을 통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가장 건전하고 열매가 좋은 것은 말씀을 통해서 받게 되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말씀의 은혜가 충만할 때 가장 건강한 교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교회는 말씀을 통해서 은혜 받은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성장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으면 ‘큰 믿음’이 생기고 따라서 놀라운 열매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은혜 받은 사람이 많을수록 성장하고 부흥합니다. 성도들이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으면 기도운동, 전도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고, 충성된 일꾼이 일어나서 교회가 부흥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14절 이하에 보면 베드로의 설교가 나옵니다. 베드로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37절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대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말씀의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말씀 중심의 교회가 되어서 항상 말씀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2. 우리 교회는 은혜 중심의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은혜를 받아야 영적으로 건강해지고 그 심령이 부요해집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지 못하면, 영적으로 허약해지고 그 심령이 메마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예배도 은혜가 넘치는 예배가 되어야 하고, 찬양도, 성경공부도 은혜가 넘쳐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은혜가 넘쳐야 합니다. 당회를 해도 은혜가 되고, 제직회를 해도, 기도회를 해도, 무엇을 하든지 은혜가 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은혜 충만한 교회가 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은혜를 받으면 반드시 변화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도 지난 35년 동안 얼마나 잘 변화되었는지 모릅니다. 35년 전에 수영로터리에 개척을 했을 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은 좋지만, 속 썩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를 보면 집을 사달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자꾸 싸우려고 들고, 어떤 사람은 이간질하고, 어떤 사람은 비방하였습니다. 얼마나 속상한지 저는 날마다 강단에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정도가 너무 심해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저를 데려가시든지, 그 사람을 내쫓아주시든지’라고 기도했습니다. 지금 그분은 우리교회에 잘 나오고 계시고, 점잖고, 너무 좋게 변화가 되셨습니다. 성도들이 은혜를 받으니 얼마나 예쁘게 변하는지, 모두가 착하고, 온순하고, 온유하고, 순수하여서 어린아이같이 변화하였습니다. 우리 장로님들도 얼마나 좋게 변하셨는지, 언제부터인가 장로님들이 모이면 한 시간씩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시고, 서로 안아주고, 축복하시는데, 얼마나 감동이 되는지 모릅니다. 세계의 어느 교회를 가도 우리 교회처럼 하는 곳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교회를 축복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은혜를 받으니 이렇게 변화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가 되는 것은 성령의 은혜이고, 역사로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성령의 능력은 크고 완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혜가 임하면 어떤 사람이라도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한국의 유명한 목사님 가운데 한 분인 김익두 목사님은 부흥사이고, 말씀의 능력도 있고, 병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는 능력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목사가 되기 전에는 얼마나 못된 깡패였는지, 동네 사람들이 아침마다 김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고 동네를 다닐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 사람들에게 김익두가 죽었다는 부고장이 날아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참 잘 되었다고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이 분이 예수 믿고 신학교에 가서 전도사가 된 것입니다. 죽었다던 김익두가 나타났는데, 성경책을 끼고 나타난 것입니다. 짓궂은 동네 사람은 정말 변했는지 알아보자면서 바가지에 물을 담아 지나가던 김익두 목사님에게 끼얹었습니다. 옛날 같으면 뼈도 안 남을 일인데, 김익두 목사님은 옷을 털면서 “내가 변화되었으니 복 받은 줄 알라!”고 하면서 지나갔다고 합니다. 이처럼 성령이 역사하면 변화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전적으로 성령의 은혜를 사모합니다. 전적으로 성령이 역사하시기를 의지합니다. 이를 위해서 성령께서 역사해주시기를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가집니다. “성령이여! 우리 교회를 맡아주시옵소서. 각 사람을 만나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 결과 지금은 성령께서 99%를 다 해주십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면서 목회를 하니, 저의 목회는 너무나 기쁘고 즐겁습니다. “이것도 주님이 하셨군요.”라고 감사드리게 됩니다.
특히 우리 교회는 예배 중에 임하시는 성령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새로 등록하시는 분들이 간증하시기를 우리 교회에 예배드리러 왔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기 시작해서 말씀을 들으면서도 울고, 찬양을 하면서도 울고, 그렇게 눈물이 난다고 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주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만져주시고, 안아주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제가 중국 장춘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 그 많은 성도들이 제 말씀을 들으면서 울기 시작하는데 여기저기서 우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배 후에 중국 목사님들과 이야기를 하는데, 알고 보니 통역하시는 분이 평생 처음으로 불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을 받아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눈물이 나는데,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감동을 받아서 울면서 통역을 하니까 설교자보다 더 좋은 통역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통역자 덕분에 성도들 전체가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두 성령이 하신 일인 줄 믿습니다.
교회의 부흥은 성령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게 될 때 대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2~47절에 보면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행전 9장 31절에 보면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와 갈릴리 교회들이 평안하여 든든히 서고, 수가 많아진 것은 성령의 은혜로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생수의 강과 같은 성령의 은혜로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저도 기도를 많이 하지만, 우리 성도들도 모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사모하고,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은혜를 받을 때까지 끈질기게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끈질기게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은혜를 받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능력도 생기고, 신앙생활이 기쁘고 즐겁고, 간증거리가 많게 됩니다. 교회에 가는 것이 좋고, 봉사하고 전도하는 것이 좋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이 좋고, 그냥 너무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열매가 아주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열매가 충만하면 크고 작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교회는 놀랍게 부흥하게 됩니다.
3. 우리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선교는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8~20절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라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사명’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6장 15절에 보면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주님이 분명하게 말씀하였습니다.
에스겔 3장 17~18절에는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라고 하였습니다.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에게 전도하지 않고, 말씀을 전하지 않아서, 그대로 죄 가운데서 죽는다면 그 피 값을 우리에게서 찾겠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35년 전에 수영로교회를 창립할 때 부산 복음화와 민족 복음화, 세계선교의 꿈을 가지고 <세계 선교 교회>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주보에 선교사 100명, 농어촌 100개 교회를 세우겠다는 목표를 정해서 적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선교하는 교회를 부산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선교사를 100명이나 파송하겠다는 계획은 허망한 꿈같이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파송 선교사가 135명이나 되고, 후원 선교사가 1,400명이나 됩니다. 앞으로 한 가정에서 선교사 한 명씩을 감당한다면 선교사 5천 명을 파송하고도 남을 줄 믿습니다. 특히 안식년을 맞이하는 선교사들이나, 우리 교회를 방문하는 선교사들을 위해서 <엘레브>라는 선교관을 마련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인 줄 믿습니다.
선교는 희생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선교는 선교사로 현지에 파송되는 사람과 그를 후원하는 성도들이 합쳐져서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선교하기 위해서는 많은 선교비가 필요합니다. 그뿐 아니라 선교사들이 현지에서 일하다 보면 몸에 병이 나기도 하고,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에게는 성도들의 사랑과 위로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선교사를 만나시면 꼭 안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어떤 선교사가 오든지 우리 교회의 원칙은 반드시 숙식을 제공하고, 떠날 때에는 적은 액수지만 교통비를 드려서 보낸다고 결정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선교사님들 중에는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것이 우리에게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교사들을 사랑하는 성도들 중에는 “목사님, 언제든지 말씀만 하시면 선교사님들 대접은 제가 맡아서 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선교사님들이 오셔서 갑자기 대접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는 농어촌 250개 교회를 후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시에 있는 미자립 교회 30개의 교회를 돕고 있습니다. 이렇게 도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마게도냐 교회는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돕기 위해서 구제 연보를 모금했습니다. 예루살렘에 큰 환란이 임해서 성도들이 피하고 도망 다니다 보니 농사도 못하고, 일을 못하니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교인들 중에 어려움 당하는 사람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마게도냐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모금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게도냐 교회가 부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환란의 많은 시련을 당하면서도, 극심한 가난 속에 살면서도 넘치는 기쁨으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3절에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렇게 할 때 더욱더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할 일이 많습니다. 부산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과 그 자녀들을 도와야 하고, 부산에 있는 탈북자들과 그 가족도 도와야 하고, 대안학교, 무료병원은 지금은 미비해서 좀 더 확장해야 하겠고,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의 양부모 되기도 해야 하고, 양로원에 있는 노인들과 독거노인들을 양부모로 모시기도 해야겠고, 청소년 가장도 도와야 하고, 부부가 함께 직장 생활을 하는 가정의 자녀들을 위한 시설도 마련해야 하겠고, 복지시설도 해야 하는 등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베풀어야 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주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주님이 약속하였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큰 꿈과 비전을 가지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이 꿈을 모두 함께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원합니다.
은혜에 동참하는 마음
고후 8:1-15 / 윤영택목사
우리가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구약과 신약시대의 헌금은 그 방법과 사용처에 약간의 다름이 있습니다. 구약의 헌금(헌물)은 성막이나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생활, 성전 보수와 관리, 또는 구제사업에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의 헌금은 복음 전하는 일군들의 후원금으로 사용되었으며, 초대 예루살렘이나 이방인의 교회들에서는 오늘날처럼 건물이 없던 때이니 예배당 건축이나 관리보다는 많은 부분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헌금의 용도는 차이가 있지만 헌금의 목적과 정신은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에게 크게 다른 점은 없습니다.
한국 교회 일각에서는 구약의 율법이 완성된 오늘날도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옳으냐 아니냐 라는 주제로 끝없는 토론을 벌이는 중입니다. 어느 쪽이 옳고 그름을 떠나 물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그만큼 많다는 반증입니다. 율법적인 잣대를 제시하며 십일조를 당연한 의무로 강조하는 사람도 있고 폐기된 규칙으로 여기는 양극단의 주장이 있습니다. 상반되는 주장에는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어 귀담아 들을만한 내용도 있습니다.
헌금의 이름과 방법이 서로 다를 뿐 자발적인 감사의 표현이 분명하다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에 대해 열을 내어 비판할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염려되는 쪽은 십일조의 정신을 왜곡하는 극단적 주장들입니다. 자발적인 헌금이 아니라 억지로라도 십일조를 준수하려는 사람이 있는데 그 이유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복 혹은 징계에 촛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조건부적인 헌금생활입니다. 내가 이만큼 드렸으니 하나님으로부터 그 이상의 복을 받을 것이며 또 받아야 한다는 투자금 상환 같은 기대감에서 드리는 헌금이기에 건강하지 못한 헌금생활입니다.
또 하나 우려되는 주장은 십일조가 신약에 와서는 폐기된 것인데 아직도 십일조를 실시하는 것은 교인들에게 물질적 압박감을 가중시키며 교회가 헌금을 더 많이 거두어 들이려고 강요하는 악법이라고 비판하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헌금이라는 물질적 부담으로부터 자유하고픈 구실을 삼아 이기적인 동기에서 나온 주장이라면 역시 건강하지 못한 십일조 폐기론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의식을 가진 많은 교우들은 헌금의 자발적인 정신을 존중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십일조를 드리며 본인의 의지와 신앙고백을 따라 십일조 이상의 물질을 헌금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교우 여러분, 요즘 우리 교회가 돈이 부족한가? 헌금이 줄어 강조하려고 이런 설교를 하는가? 하며 너무 부정적으로 받지 말고 성경이 말씀하는 그리스도인의 헌금생활 혹은 물질관이 무엇인가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기 바랍니다. 오늘 분문을 통해 헌금에 대한 성경적인 기준을 찾아보고 여러분의 헌금생활이 하나님 앞에서 보다 건강한 믿음생활의 한 부분이 되기 바랍니다.
교회는 다른 단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물질이 필요하고 그 물질을 모으는 방법이나 사용 방법 등을 논할 때 다양한 생각이 있습니다. 교회가 평안할 때 그리고 물질이 건강하게 사용되고 있을 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교회의 재정운영이 세속적인 단체들보다 더 추하고 부끄러운 모양을 드러내는 요소로 부각될 수 있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불신자들이 교회를 비판할 때 가장 먼저 꺼내는 이슈 중에 하나가 돈 문제입니다. 교회가 교인들의 돈을 억지로 끌어모아 세금도 내지 않는 돈으로 목회자들의 배를 불리고 교회 재산만 늘리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요즘 한국 교회는 ‘모여라, 돈내라, 집짓자’ 이것 밖에 하는 일이 없다고 비난합니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겉만 보고 하는 말도 있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 하는 말처럼 교회가 반성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할 부분도 많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대학 1학년 때 같은 과 친구를 교회에 데리고 갔습니다. 불신자가 아니라 전에 지방에서 교회를 다니던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마침 예배당 건축 설명회가 있던 주일이었습니다. 산동네 작은 예배당이 건물이 낡았고 또 재개발을 하게 되어 새 건물을 지어야 할 시기였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기도하며 준비하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건축위원장 장로님이 교우들에게 건축헌금에 대한 설명과 헌금 참여 방법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을 듣던 이 친구가 마음이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교회는 왜 맨날 돈내라는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다시는 이 교회에 나오지 않겠다 했습니다. 그 교회가 항상 헌금 이야기를 하는 교회도 아니고 예배당 건축을 준비해오던 일이었는데 그 배경을 모르는 그 친구에게는 일단 듣기 불편한 돈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어릴 때 친구들에게 교회 가자고 전도하면 짖궂은 녀석들이 놀리며 부르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예배당에 갔더니 눈감으라 해놓고 신발 훔쳐 가더라’ 마루 바닥에서 예배드리던 시절 신발을 신발장에 두고 들어갔는데 집에 갈 때 신발을 찾으면 누가 바꿔 신고 가거나 없어질 때가 있었습니다. 어쩌다 친구 따라 교회에 왔다가 신발을 잃어버렸으니 이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그런데 아이들이 부르던 또 한 소절의 가사는 ‘예배당에 갔더니 매미채를 돌리며 돈내노라 하더라’였습니다.
어린 마음에 이런 비아냥이 얼마나 속상하고 듣기 싫은 것이었는지 여러분도 경험했을 것입니다. 철없는 어린 아이들이 내뱉는 비아냥이지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어린 친구들에게도 교회 가면 돈내라고 하는 말이 그렇게 부담스럽고 싫더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교회에서 헌금 이야기 하는 것이 불편하고 부담스런 주제입니다. 기독교 초창기에 목회했던 사도 바울은 일찍이 이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을 예견하였고 또 이미 교회 안에 그런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지방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며 성도들이 헌금을 어떻게 드리고 또 관리해야 할 것인가 그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대로 우리 교회의 헌금봉투는 가능하면 헌금의 종류를 간소화하고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려고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고급용지에 인쇄된 헌금봉투를 사용하던 분들이 보기에 좀 촌스럽게 생겼습니다. 본인이 기독교인이 아님을 밝힌 어떤 여학생이 우리 교회를 방문했다가 헌금봉투를 보고 자신의 블로그에 봉투를 찍은 사진과 짧은 글을 올린 것을 우연히 본 적이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우리 교회 봉투에 스탬프로 찍은 ‘겨자씨’라는 헌금 이름 때문입니다. 그 학생은 겨자씨라는 이름을 보고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궁금하여 예배중 기도시간에 킥킥대고 웃다가 주위 사람의 눈총을 받았다는 이야기까지 올렸습니다.
아마 우리 교인들 중 태반이 겨자씨 헌금이 무엇인지 모르고 무심코 지나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겨자씨 헌금을 정한 것이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일이고 그동안 아무 설명이 없었으니 당연합니다. 우리 교회가 영국교회 예배당을 빌려 사용하고 있지만 언젠가 필요하면 건물을 구입해야 할 날이 올 수도 있고 혹은 교인 수송차량 구입과 같은 큰 비용을 지출할 때 한꺼번에 헌금하기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종잣돈을 비축하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어 겨자씨라는 이름을 붙이고 헌금을 했었습니다. 말그대로 겨자씨가 아주 작지만 이 다음에 크게 자라면 큰 몫을 감당하리라는 기대감으로 붙인 이름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우들이 워낙 이동이 많다보니 세월이 흐르며 기억에서 잊혀졌고 또 새로 오신 분들은 의미를 모른체 봉투에만 이름이 남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아직은 작은 공동체이고 재정상황도 넉넉하지 못해 수입된 헌금의 많은 부분이 교역자의 생활비와 교회 내 행정, 예배와 일반 경상비로 지출이 되고 대외적으로 선교와 구제, 장학금 전달하는 일에는 아직은 많지 못합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가 대외적으로 지출하는 비용이 지금보다 더 많은 비율로 성장하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보다 건강한 교회가 되어 우리 교우들이 주의 선한 사업을 위해 즐거움으로 동참하는 마음이 더 자라나고 성도들의 경제사정도 함께 나아져 가길 바랍니다.
이번에 남전도회가 주관하는 선교기금 마련 바자회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마음을 합하여 협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먼저 나의 필요를 충분히 만족시킨 후 다른 사람의 필요에 관심을 가지고 나누려고 하면 어쩌면 평생 한 번도 선한 사업에 동참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가장 급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덜 필요한 것과 필요 없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순위를 정하고 나면 나에게 덜 급하고 별 필요 없는 것을 절약하여 다른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한 그 무엇을 위해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연보에 동참하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연보는 어려움을 만난 이웃을 돕기 위해 자원하여 내는 물질인데 수재를 만나거나 지진을 당한 이웃들을 도울 때 모금하는 돈을 의연금이라 하는 것처럼 연보는 의연금의 성격을 가졌습니다. 로마시대에 많은 피식민지 백성들이 기근과 가난에 허덕였습니다. 바울은 팔레스틴 지역을 넘어 아시아와 유럽지방까지 다니며 복음을 전하며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고 그곳 성도들과 계속하여 교제를 가졌습니다. 전도여행을 다니며 각 지역 교회의 형편을 알게 된 바울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한 교회를 볼 때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웃 교회들에게 형제교회 성도들의 고난에 동참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중에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지방이 마케도냐와 아가야 지방입니다. 마케도냐에 있는 성도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이 기근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청하여 바울에게 그들을 돕는 일에 동참하게 해달라 간청하였고 모금을 시작했습니다. 사실 마케도냐 지방의 교인들도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자기들도 어렵지만 더 어려움을 당한 예루살렘 형제들을 위해 힘닿는대로 모금에 동참하였으며 때로는 힘에 지나도록 헌금하였습니다. 바울은 마케도냐 성도들의 이런 열심을 보고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기대했던 이상으로 헌신하였는데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으며 다음에 우리에게까지도 그 사랑을 전달했으니 내가 그 일의 증인이라 하며 칭찬하였습니다.
바울은 마케도냐 교인들의 열심을 고린도교회에 소개하며 여러분도 이 일에 동참해달라고 호소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디도를 보내어 이 은혜로운 일을 시작하게 했었는데 이제 여러분이 모두 협력하여 그 일을 완수하라고 격려합니다. 여러분의 믿음과 말과 지혜와 열심 그리고 우리를 향한 사랑이 풍성한 것처럼 이 은혜로운 일에도 열심을 내어 동참하라 부탁합니다. 이것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여러분의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가 알아보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로만 혹은 마음으로만 그치지 말고 행동으로 증명하라는 바울의 말은 고린도교회 입장으로 거절하기 어려웠고 명령보다 부담스런 간절한 호소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연보를 거두는 일에 동참해야 하는 당위성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신 분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의 가난함으로 우리가 부요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명령으로 하지 않고 다만 나의 의견을 전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지난 해부터 마음에 두고 시작한 그 일을 이제 끝마치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할 마음만 있다면 여러분의 형편을 따라 받으실 것이며 없는 것을 바치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면 됩니다. 없는 것을 어찌 억지로 드리라 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은혜에 동참하는 마음 이것이 바울이 권하는 연보의 정신입니다.
둘째는, 평균의 원리입니다.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려고 여러분에게 짐지워 힘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골고루 나누어 균형을 이루도록 하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지금 여유가 있는 여러분이 어려운 형제를 도와준다면 그들 역시 넉넉할 때 여러분을 도와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균형을 이루어 서로를 돕는 일이 됩니다. 성경에 말씀하기를,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아니하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다’ (출 16:18) 하였습니다.
어디에서 읽었던 말씀입니까? 이스라엘이 광야를 여행할 때 아침마다 거두었던 출애굽기의 만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매일 아침마다 식구수 대로 먹을 만큼의 만나를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조금 많이 거둔 사람도 있고 적게 거둔 사람도 있었지만 되에 달아보면 신기하게도 식구들이 먹기에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은 적당량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욕심을 내어 더 많이 거두거나 남겨 내일을 위해 비축해두었습니다. 욕심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내일에 대한 불안함과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내일 아침에 만나가 없으면 어떻게 하지? 혹시 모르니 내일 먹을 것도 거둬놓자 했습니다.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먹고 남은 만나에 다음 날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매일 아침 하나님께서 은혜로 내려주신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
만나를 거두는 법칙은 광야를 통과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책임지고 먹여주신다는 믿음을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바울은 광야에서 거두었던 만나로부터 균등의 원칙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일용할 양식이 있으면 그것으로 감사하고 일용할 양식마저 없이 살아가는 가난한 이웃에게 내가 가진 것으로 나누는 마음 이것이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참으로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나도 당장 부족한데 혹은 나도 언젠가 부족할 수 있는데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면 나는 무엇으로 살까? 염려하며 내 것을 움켜쥐고 나누지 않는다고 하여 내 것이 많아지거나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입니다. 내가 가진 것 남에게 주고나면 나는 내일 무엇으로 먹고 살지? 없는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나 먼저 살고봐야 되겠으니 나눌 수 없다 하고 꽁꽁 묶어놓지만 그것이 결국 나도 사용하지 못하고 썩어지는 물질이 된다는 교훈을 꼭 기억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물질을 가지고 선한 일에 즐거이 사용하는 사람들이지 돈에 얽매이고 그것을 의지하며 돈에 지배당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람쥐나 청설모가 겨울을 대비하여 분주하게 먹이를 물어 나릅니다. 저렇게 열심히 감추는데 다 기억하고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어떤 글을 보았더니 다람쥐가 나중에 먹으려고 여기저기에 열심히 저장해 놓지만 다시 찾아먹는 것은 겨우 30%이고 나머지 70%는 찾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람쥐가 숨겨놓은 것을 찾지 못한 덕에 땅속에 숨겨진 도토리가 이듬해 싹이 나고 자라 생태계를 유지한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렇게 참 재미있습니다.
다람쥐보다 훨씬 지혜로운 인간이 내일을 대비하여 저축하고 저장하는 것이 어찌 나쁜 일이겠습니까? 오직 나만을 위해 쌓아놓고 어려운 이웃을 나몰라라 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는 약속을 믿지 못하고 이웃과 나누어야 할 것까지 끌어모아 나만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리석은 다람쥐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좋은 일에 써보지도 못한 재물의 대부분은 이런저런 일로 내 손을 떠나버립니다.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연보의 원리는 헌금의 원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이 그 은혜를 보답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드립니다. 헌금으로 그 은혜에 동참하며 하나님이 우리 곁에 두신 이웃의 필요를 함께 나누며 삽니다. 이웃 사랑은 마음으로 시작하여 나눔이라는 행동으로 그 사랑을 증명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헌금 외에도 여러가지 방법과 통로를 통해 이웃을 위한 나눔의 삶을 살고 있는 줄 압니다. 아무쪼록 그 일이 감사와 기쁨의 섬김이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하는 여러분의 섬김과 나눔으로 주의 은혜가 더 널리 전달되고 여러분의 삶이 주의 은혜로 날마다 기름지고 윤택하길 빕니다.
헌금에 담긴 정신
이동원목사 / 고후 8:1-9
1974년 저는 첫 미국 유학중에 여름 방학을 맞이하면서 카나다 토론토의 ‘Peoples church’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지금의 윌로우 크릭 교회나 새들백 교회만큼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교회이었습니다. 이 교회는 그 당시 오스왈드 스미스(Oswald Smith)라는 목사님이 시무하셨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이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미국 첫 유학으로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근교의 Bible college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 학교에서 카나다 쪽으로 국경을 건너가면 두세 시간이면 토론토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미국 친구와 함께 이 교회를 향해 가면서 마구 가슴이 설레이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제가 기독교 진리를 구도하고 있었던 20대초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님이 쓴 작은 전도 책자중 ‘나의 가장 사랑하는 나라’라는 글을 통해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구분하게 되는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이며, 기독교는 단순히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율법을 지키고 도덕적으로 살라고 가르치는 종교가 아니라, 우리의 어떤 율법을 지키려는 어떤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한 인생을 위해 아니 율법을 이미 깨트리고 죄인된 인생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오직 그분을 믿음으로서만 구원을 받는 다는 결정적인 진리를 깨닫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그 교회에 도착하여 성전에 들어서자마자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의 눈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때도 7월 초순이어서 그 교회에서 여름철 단기 선교와 단기 봉사를 떠난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고 장기 선교로 파송되는 한 선교사를 축복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스미스 목사님은 그 선교사님이 본 교회에서 파송되는 70번째 선교사이며 협력하는 선교사까지 합해서 이제 그 교회는 약200명의 선교사를 지원하게 되었고, 이 여름철 비슷한 숫자인 약 200여명의 교우들이 해외 선교의 장에 나아가 단기 선교로 봉사하게 되었다고 보고하고 계셨습니다. 당시의 한국 교회에는 단기 선교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고, 한줌의 해외 선교사 밖에 파송하지 못한 실정이어서 저에게는 이 숫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감동의 숫자였습니다. 저는 그 주일(1974년 7월초, 34년전) 그 교회 구석 코너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제가 한국에 돌아가 목회를 한다면 어느 날 제가 섬기게 될 교회가 이 구원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기 위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 ‘피플스 처치’만큼만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그리고 그 기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할렐루야!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시다. 오늘 주일로 우리 교회에서 단독으로 파송되는 선교사님이 85명, 협력하여 지원하게 된 선교사님이 265명, 도합 우리 교회는 350명의 선교사님들과 동역하게 되었고, 이번 여름철 단기 선교사로 봉사하는 교우들만 국내외를 합하여 3,662명의 교우들이 이 여름 선교의 장에서 땀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정녕 ‘구하고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가 이런 선교의 사명을 지속하는 교회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다시 되새겨야 할 헌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헌금을 통한 재정적인 헌신인 것입니다. 요즈음 전 세계적인 경제 침체와 함께 제일 타격을 입고 있는 것이 바로 세계 선교의 마당입니다.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 말은 경제적인 위축이 오면서 성도들이 헌금을 통한 헌신에서 제일 먼저 후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바울 사도가 칭찬한 1세기의 마게도냐 교회들의 모범에서 헌금의 정신을 다시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매주 드리는 헌금-이 헌금에 담아야 할 우리의 정신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1. 헌금은 헌신의 정신을 담아야 합니다.
본문 5절에 보면 “우리가 바라던 것 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고 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의 배경은 예루살렘에 기근이 왔을 때 그 지역 성도들의 고생의 소식을 듣고 마게도냐 지역의 성도들이 헌금을 드린 상황을 바울이 칭찬하며 격려한 말씀입니다. 그들이 헌금을 할 때 그들은 단순히 헌금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리는 헌신을 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헌금은 단순한 물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헌금은 물질의 헌납이나 봉헌을 통해 자신을 드리는 헌신의 행위라고 바울은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헌금 행위는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몇 푼의 돈의 문제가 아니라, 돈의 배후에 존재하는 헌신에 대한 우리의 철학을 시험하고 테스트하는 과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막12:41-44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느 날 예루살렘 성전의 뜰에 위치한 헌금함에 헌금하는 사람들을 주목하고 계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막12:41입니다.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그날 예루살렘 성전 뜰에 서 계시던 주님이 오늘 우리가 섬기는 동일한 주님이시라면 그는 또한 매 주일 헌금함을 지나며 헌금하는 우리의 모습을 주목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가 이렇게 우리를 주목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헌금의 양에 대한 관심 때문이실까요? 아닙니다. 이 헌금에 담겨야 할 우리의 헌신을 주목하시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이 인상 깊은 장면은 두 렙돈을 헌금함에 드린 한 가난한 과부 여인의 에피소드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막12:44입니다. “그들은 다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은 두개의 렙돈 배후에 존재한 자신의 전부를 드리고 싶어 한 그녀의 헌신을 평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헌금에 나 자신을 담아 드려야 합니다. 헌금은 헌신인 것입니다.
2. 헌금은 희생적인 헌신의 정신을 담아야 합니다.
우리의 헌신이 정말 의미있는 헌신이 되려면 희생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한 주석가는 소수의 교인들에 불과한 초대 교회가 당시의 세상을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는 초대 교인들의 희생적인 헌신 특히 희생적인 헌금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 대표적인 실례가 오늘 바울 사도가 본문에서 천거하는 마게도냐 교인들일 것입니다. 본문의 2절을 보십시오. “환난의 많은 시련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이 말도 안되는 헌신을 주목해 보십시오. 자신들이 환난과 시련속에 있었고 극심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넘치는 기쁨으로 풍성한 연보를 남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다음 절 3절을 보십시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한마디로 놀라운 희생이 아닙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런 희생의 헌금 정신이야말로 하나님이 마게도냐 교인들에게 주신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절입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나는 저와 여러분이 이런 은혜를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독일 고백 교회의 목사이면서 나치 독일에 항거했던 본 훼퍼 목사는 당시의 독일 교회가 무력하게 나치 국가에 종속되어 영향력을 상실한 원인이 교회가 ‘값싼 은혜’(cheap grace)에 도취한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달리 말하면 ‘대가를 지불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어떨까요? 초대 교회가 소수의 교인들로 세상을 바꾸었던 것이 희생적인 헌신 때문이었다면 오늘의 교인수가 적지 않은 다수가 되었음에도 세상에 영향을 주지 못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희생의 정신을 상실한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예수 믿고 이만큼 삶의 풍요와 평안을 누리고 있음이 우리의 선배들의 희생에 빚지고 있는 것이라면 오늘 우리는 실제로 너무 안이한 삶 속에만 안주하려고만 하는 것이 아닐까요?
본래 구약성경에서부터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영어로 표기하면 "sacrifice"라 했습니다. 제물은 곧 희생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자신을 제물로 드린다는 말은 곧 희생한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구약성경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다윗왕이 아리우나라는 사람의 타작 마당을 방문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 경치 좋은 언덕에서 그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요즘 말로 예배를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물이 없었습니다. 그때 이 마당의 주인이 왕이 자기 처소에 왕림하여 제사를 드린다 하니까 너무 감격해서 자기가 제물을 가져오겠다고 합니다. 그때 다윗 왕의 고백을 기억하십니까? 삼하24:24입니다. “왕이 아리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다윗을 쓰신 이유를 짐작할만 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의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또 한번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사람은 희생적으로 자신을 드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헌금의 정신-바로 이런 희생적인 헌신의 정신이어야 합니다.
3. 헌금은 사랑으로 희생하는 정신을 담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마게도냐 교인들의 모범을 칭찬하며 고린도 교인들에게 부탁하는 8절의 바울의 권면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다.” 여기 사랑의 증명이란 표현을 주목하십시오. 바울은 희생적인 헌금 정신에 이어 사랑에 기초한 헌금 정신을 가르치고자 한 것입니다. 포드(Ford)라는 설교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은 법을 따라 드리는 의무의 정신이지만 그 이상을 드리는 것은 사랑의 증명이라”. 그렇습니다. 옛 언약인 구약의 율법은 우리에게 모든 소유의 십분의 일을 드리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 법을 따라 드리는 것은 율법에 대한 우리의 당연하고도 의무적인 순종인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새 언약의 정신을 따라 십분의 일 이상도 드릴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사랑의 고백이요, 사랑의 응답이요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랑의 증명인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굉장한 희생을 하면서도 사랑의 정신으로 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13:3에서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을 드릴 때 정말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금하나, 이 헌금이 사용될 대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 그리고 진실로 선교지의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리고 있는가를 우리는 스스로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한다면 아낌없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그 분을 위하여 그리고 그분의 기뻐하시는 목적을 위해 진정 아낌없이 드리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미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하고자 자신의 생명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가 할일은 너무도 많고 광대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는 성도들의 희생적인 사랑의 헌신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우님이 자식 때문에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고 불평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그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한 성도가 이런 말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제가 한 말씀드리겠으니 양해하고 들어 주십시오. 혹시 모르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얼마 전 저의 자식을 잃었습니다. 저에게는 자식만 살아 있다면 아니 자식을 다시 살릴 수만 있다면 어떤 희생이라도 기쁘게 감당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헌금의 태도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드린 헌금으로 잃어버린 영혼을 살리고 구원할 수만 있다면, 아니 주님의 사랑을 모르는 이 세상에 그의 사랑을 증거 할 수만 있다면, 저는 저 자신을 기꺼이 사랑으로 희생적으로 드릴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우리의 헌금에 담아야 할 고백적 정신입니다.
재물이 화가 되지 않고 복이 되려면
고후 8장 / 최영기목사
저희 교회에는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지난여름 중국 선교를 갈 때에 한 자매님이 임신 중이면서도 약속한 선교라 따라 나섰는데 입덧을 심하게 해서 비행기 여행을 하기가 힘든 것을 알고 한 성도가 비행기 표를 business class로 upgrade해 주어서 평안하게 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성도님은 최근에 개업을 했는데 자본이 없을 텐데 어떻게 했느냐고 했더니 자기가 어떤 가게에서 일할 때에 주인이 우리 교인이었는데 장래가 있어보였는지 여유 되는대로 갚으라고 하면서 돈을 꾸어주어서 가게를 장만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돈이 남에게는 도움이 되고 자신에게는 기쁨과 보람을 줄 수 있지만 잘못하면 돈이 재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위에서 보면 가난할 때에는 괜찮았는데 돈을 버는 과정 가운데에 친구를 다 잃어서 외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을 봅니다. 가난할 때에는 부부가 사이좋게 지내다가 돈을 벌면서 남편이 유흥업소에 출입을 하게 되고 마침내는 이혼의 지경에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돈이 많으니까 자녀들이 원하는 것은 다 사주어서 자녀들이 사치할 줄만 알고 생활력은 없는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드는 부모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돈을 화가 되지 아니하고 복이 되게 할 수 있을까요?
Ⅰ. 재물의 영적 파워를 인식한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하나님과 재물을 비교하여 말씀하셨습니다(마 6:24). 우리는 여기에서 눈여겨 보아야할 것이 재물을 하나님과 라이벌 관계에 놓았던 것입니다. 재물을 의인화해서 말씀하시고 둘 다 섬길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섬김의 대상은 인격체라야합니다.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재물 뒤에는 하나님에 버금가는 영적인 파워를 가진 인격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악령을 말합니다. 아프리카 같은 곳을 방문한 분이 기념품이라고 우상을 사서 집에 갖다 놓은 후에 집에 우환이 생기기도 하고 악몽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조각품인 우상 자체에 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상을 매체로 역사하는 악령 때문입니다. 재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물을 매개체로 악한 영이 역사하여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고 재물을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재물이 주인이 될 때에 재물은 복이 되지 못하고 화가 됩니다. 많은 분들이 재물을 자신이 마음대로 관리할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물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대상이 아닙니다. 재물이 복이 되기 위하여서는 재물이 영적인 파워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확실히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재물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재물은 화가 되지 아니하고 복이 될 것입니다.
Ⅱ. 평형을 이루는데 사용한다
재물이 화가 되지 않고 복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서는 재물을 평형을 이루는 데 사용하여야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경제적인 궁핍함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내리는 것을 계기로 교인 숫자가 급작이 수천 명이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외국에 살면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잠시 왔다가 주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본토인들이 땅을 팔아 헌금을 했는데 당시 흉년이 든 탓도 있겠지만 재산 증식의 길이 사라져서 교회가 가난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비할 때에 고린도 교회는 부자였습니다. 그래서 이를 돕자는 것인데 사도 바울은 이를 평형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13절).
세상은 죄로 인하여서 파괴되었습니다. 파괴의 결과 중의 하나가 경제적인 불평등입니다. 예를 들어서 북한 동포들이 굶주리는 것은 악한 지도자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와 악이 사회에 스며들면서 구조적으로 경제적인 불평등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돈이 많은 사람은 더 많은 돈을 벌지만 돈이 없는 사람은 더 가난해지는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이 재물을 사용하여서 이러한 불평등을 줄여가는 것입니다. 평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교 헌금을 보낼 때마다 이러한 경제적인 불평등을 줄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연변 조양 교회 김춘엽 목사님이 우리 교회 세미나에 다녀가신 후 가정 교회를 시작하여 곳곳에 많은 가정 교회를 개척하셨습니다. 한 전도사에게 한 달에 80-100불을 제공하면 생활에 크게 염려 않고 교회 개척에 집중할 수 있다고 해서 어떤 분이 개척 교회를 하면 2년간 생활비를 보내드리기로 하고 도와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달에 수천 불을 필요로 하는데 한 달에 100불로 생활이 된다는 것은 경제적인 불균형이 얼마나 큰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이기 때문에 미국에서 가난하다고 하는 사람도 세계적으로 볼 때에는 큰 부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교사에게 선교 헌금을 보낼 때마다 우리는 이러한 재물의 평형을 이루는 데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부자 나라인 미국에 산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는데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미국이 풍요한 나라가 된 것은 주님의 뜻대로 나름대로 살려고 애를 썼고 주님이 주신 가치관에 충실하면서 산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신 풍요를 즐기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이를 평형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하면 자신도 모르게 재물의 노예가 되어서 재물이 복이 되지 않고 화가 되고 기쁨과 만족을 주기 보다는 두려움과 염려를 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온 세상에 평형을 가져올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맺어주실 때에 최선을 다하여 경제적인 평형을 위하여 일해야합니다.
우리가 평형을 이루는 것을 사명으로 알아야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셨습니다(마 5:13-14). 죄로 인하여 오염된 세상을 맑게 하고 악으로 인하여 어두운 세상을 밝게 하라는 말입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는 말하자면 악으로 인하여 파괴된 세상을 회복시키라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평형을 추구한다는 것은 경제적인 면에서 파괴된 세상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경제적인 평형을 추구하는 것이 사명이라면 이곳에는 희생이 들어가야 합니다. 제가 항상 말씀드리지만 희생이 들어가지 않은 교회 봉사는 사역이 아니라 취미 생활입니다. 취미 생활은 시간이 있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고, 재미가 있을 때에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없든지, 돈이 없든지, 재미가 없으면 않습니다. 그러나 사역은 시간을 바쳐서, 재물을 바쳐서, 재미가 없어도 합니다.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헌신이 들어가지 않은 헌금은 헌금이 아니라 적선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케도니아 교회를 크게 칭찬하고 있습니다(1-5절). 이들은 희생적으로 기쁨으로 자원하여서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재물을 통하여 주님을 섬기기 원하면 여유 있는 만치만 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을 넣어 섬겨야합니다. 다 쓰고 남아서 바치는 것이 아니라 쓰고 싶은 것을 안 쓰고 섬기는 것입니다. 이번 건축 약정을 할 때에 교인들 거의 모두 다가 희생을 넣어서 바쳤습니다. 사고 싶은 것을 사지 않고 쓰고 싶은 것을 쓰지 않고 바쳤습니다. 우리 가정도 아내가 사용하는 차 마일리지가 15만 마일을 넘어서서 바꿀 때가 되었지만 건축 헌금이 끝난 2년 후로 미루었습니다. 성도님들은 건축 헌금만이 아니라 모든 헌금에 희생을 넣어서 헌금이 적선이 되지 아니하고 진정으로 헌금이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Ⅲ. 믿음 성장의 도구로 사용한다
전에 부흥 목사님들이 헌금 많이 하는 사람을 믿음이 좋은 사람처럼 추어주면 속으로 못마땅해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저의를 의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목회를 해보니까 그런 분들의 견해에도 일리가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헌금과 믿음의 정도에는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헌금을 많이 한다고 믿음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헌금에 인색한 사람이 믿음이 좋은 예는 극히 적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다 희생적으로 헌금을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영적 체험도 많고 성경 지식도 많고 전도도 열심히 하는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이들이 영적으로 어리고 육적이라는 사람이라고 평을 하고 있습니다(고전 3:1). 당시 이유는 그들이 다투고 싸우는 것을 증거도 제시하고 있습니다(고전 3:3).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영적으로 어린 또 하나의 증거를 봅니다. 헌금에 인색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마케도니아 교회의 예를 들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에 참여할 것을 권유합니다. 이런 권유가 필요했던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약정을 해 놓고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0-11절).
헌금은 믿음의 측정 기준이 되기도 하지만 믿음이 자라게 하는 도구도 욉니다. 우리의 신앙 성장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재물입니다. 예수님이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면서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인하여 믿음이 자라지 못하는 사람을 가시덤불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씨에 비유하셨습니다(마 13:22). 앞서서 재물에는 영적인 파워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의 종이 되어있습니다. 좋은 예가 예수님을 만났던 부자 청년입니다. 잘 아시는 얘기지만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자 청년이 예수님 에게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재물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고 있음을 꿰뚫어보셨습니다. 그래서 있는 재물을 다 팔고 자신을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때에 이 청년은 베드로처럼 있는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좇지 못했습니다(막 10:21-22). 이 청년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는 재물이 이 청년의 주인이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헌금에 인색한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재물이 주인이기 때문인 수가 많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이 희생적인 헌금입니다. 희생적인 헌금은 재물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만듭니다. 재물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비로소 믿음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여러분들도 십일조를 시작하면서 믿음이 부쩍 자랐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희생적인 헌금은 우리를 재물의 파워로부터 해방시키고 우리의 믿음이 자라도록 도와줍니다.
Ⅳ. 전도에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한다
재물을 사명을 완수하는 도구로 사용하여서 화가 되지 않고 복이 되게 하려면 재물에 관해서 흠이 없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어떤 목자들은 저를 찾아와서 이런 하소연을 합니다. 어떤 전도 대상자를 교회에 초청하면 전에 돈으로 인하여 문제가 있었던 분이 우리 교회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나오지 않겠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참 마음이 아픕니다. 사건에는 항상 양면이 있으니까 양쪽 얘기를 다 들어보아야 하겠지만 어쨌든 재물이 전도에 지장이 되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참된 하나님이 아니면 가짜 하나님이라도 섬겨야 되게 되어있습니다. 많은 분들에게는 재물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돈 문제에 민감합니다. 오늘은 성경 주제가 헌금이라 할 수 없이 하지만 제가 서울 침례교회에 부임해 와서 헌금에 관한 설교를 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이유는 혹시라도 안 믿는 분들이 교회에 왔다가 이런 설교를 듣고 마음에 상처를 받을까 우려되어서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믿는 사람들도 재물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금전 문제에 민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재물에 관하여 산뜻한 마음을 가질 뿐만이 아니라 오해를 받지 않도록 조심해야합니다. 사도 바울 도 구제 헌금을 걷기 위하여 고린도에 디도를 보내면서 다른 사람들을 동반시킵니다. 평판이 좋은 사람들을 동반시킵니다(16-18절). 이유는 오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함입니다(20-21절).
제가 서울 침례교회에 부임하였을 때에 목회자 사례비 항목을 보니까 생활비, 주택비, 목회비, 도서비, 차량비, 휴가비 등 굉장히 복잡하게 되어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미국에서는 목회자에게 세금 공제 혜택을 주니까 이것을 위하여 그런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에는 이렇게 복잡하게 해 놓으면 새로 믿는 사람들이 볼 때에 꼼수를 쓰는 것 같은 인상을 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생활비와 주택비와 목회비, 셋으로 간소화 해 달라고 부탁을 하여 지금까지 그렇게 해오고 있습니다. 제가 친분이 있는 목사님이 방문하는 경우에는 교회 예산에 접대비가 있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대접합니다. 행에라도 금전으로 인하여 오해를 불러일으켜서 사역에 지장이 있을까 싶어서입니다.
재물은 사명을 완수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재물로 인하여 사역에 지장이 되도록 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도 복음의 일군이 되려면 돈 문제에 깨끗하시기 바랍니다. 돈 문제로 인하여 사역에 지장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돈 문제에 깨끗하기 위해서 돈을 꾼 성도들은 꼭 갚으시기 바랍니다. 액수가 많아서 다 갚을 수가 없으면 작은 액수라도 매달 갚으셔서 돈 떼어먹는 사람이라는 소문이 나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꾼 돈을 갚는 것을 갚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셔서 돈을 다 갚기 전에는 집이나 차나 가구 사는 것을 보류하시기 바랍니다. 휴가 가는 것도 비행기 타고 가는 휴가는 삼가시기 바랍니다.
돈을 사역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하여서 약간 손해를 볼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9절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는 금전적인 가난보다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신 사건을 의미할 것입니다(빌 2:6-7). 그러나 원칙은 우리가 기억해야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하여 가난해 지셨다면 우리도 이웃을 위하여 가난해질 수도 있기 않겠습니까? 믿는 분들끼리 동업을 하다가 싸우고 헤어지고 주위 사람들에게 덕이 되지 않는 것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둘 중의 한 사람이 손해를 볼 생각을 하면 그처럼 주위 분들에게 빈축을 사고 전도에 지장을 주지는 않을 텐데.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하여 가난해지신 예수님을 생각하여서 물질에 있어서 관대하고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을 기대하고 손해도 보기로 결심할 때에 우리는 재물의 노예가 되지 아니하고 재물을 사명을 위하여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