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8일(금)
* 시작 기도
(왕하 21:1) 므낫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12세라. 예루살렘에서 55년간 다스리니라.
(왕하 20:6) 내가 네(히스기야) 날에 15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주님...
히스기야는 죽을 병에 걸렸다가 그의 수명이 15년 연장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므낫세는 12세에 왕이 되어 55년간 예루살렘에서 통치하였습니다(주전 697-642년).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히스기야의 연명이 악의 씨앗인 므낫세를 낳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히스기야 역시 그의 아버지 아하스와 14년 동안 공동통치를 하였고(주전 729-715년), 그가 단독적으로 왕이 되어 29년간 다스렸습니다.
그것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아들 므낫세와도 11년간 공동통치를 하였던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선왕 아하스가 앗수르에 굴복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것을 보았고, 한편으로 왕이 되어 공동통치를 할 때에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하여 자기와 함께 아들 므낫세와 공동통치를 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므낫세는 히스기야의 연명 기간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가 병에 걸리기 전에 태어난 것이지요.
그리고 11년 동안 아버지와 함께 통치를 하다가 아버지가 죽고 난 후 44년을 단독으로 통치한 것입니다.
설령 아버지의 연명 기간에 므낫세가 태어났다 할지라도 악인을 통하여 악이 실행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누가 손가락질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바로 죄인 중에 괴수인 므낫세인데 말입니다.
이런 나를 불쌍히 여기사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이 하루도 주님 안에서 연합하여 동행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시 68:1-18
제목 : 의인은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
2 연기가 불려 가듯이 그들을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3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4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
5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6 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하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7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서 행진하셨을 때에 (셀라)
8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
9 하나님이여 주께서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기업이 곤핍할 때에 주께서 그것을 견고하게 하셨고
10 주의 회중을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가난한 나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11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들은 큰 무리라.
12 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고 도망하니 집에 있던 여자들도 탈취물을 나누도다.
13 너희가 양 우리에 누울 때에는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도다.
14 전능하신 이가 왕들을 그 중에서 흩으실 때에는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
15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임이여 바산의 산은 높은 산이로다.
16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계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냐?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원히 계시리로다.
17 하나님의 병거는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18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 반역자들로부터도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
* 나의 묵상
시편 68편은 다양한 주제를 섭렵하고 있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회고, 찬양, 감사, 구원의 호소, 저주 등 시편에 기록된 거의 대부분의 표현들이 망라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또한 한 가지 주제로 일목요연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은 곧 하나님의 행동하심이다.
주의 백성들을 위하여 친히 싸우시고 승리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영원한 안식처인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는 주의 손길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움직이시면 원수들은 흩어질 것이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도망할 것이다.
연기가 바람에 밀려가듯, 양초가 불 앞에서 녹듯이 악한 원수들은 하나님 앞에서 망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인 의인들은 하나님을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고 즐거워할 것이다.
구름을 타고 광야에서 일하시는 주님을 위하여 길을 예비하라.
그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니 그를 노래하고 그 앞에서 뛰놀 것이다.
그의 안식처에 계시는 주님은 고아의 아버지이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다.
하나님은 고독한 자들에게는 안식처를 주시며 감옥에 갇힌 자들은 거기로부터 인도해 내셔서 자유를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들이 거할 곳은 황무하고 거친 땅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의 모든 백성들 앞서 나가실 때 땅이 진동하고 비가 쏟아지며 시내 산까지도 떨며 진동하였다.
주의 기업이 곤고하고 바짝 마를 때 주께서는 흡족한 비를 주셔서 메마른 땅을 흠뻑 젖게 하셨다.
거기에 풍성한 곡식을 내게 하셨으며 주의 온 백성들을 그 아름다운 땅에서 살게 하셨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에게 주의 은혜의 단비를 부어주신다.
주께서 말씀을 주시자 큰 무리가 그 소식을 알렸다.
치러 왔던 왕들과 군사들이 허겁지겁 달아났다.
그들이 버려두고 간 물건들을 사람들이 취하여 나눈다.
장막에서 잠자던 자들도 부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은금으로 깃과 날개를 단 비둘기 같을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땅의 왕들을 흩으시는 모습이 마치 살몬에 눈이 날리는 것 같다.
바산의 산은 아주 웅장하며 산봉우리도 많이 있다.
바산의 산들아, 왜 너희는 하나님께서 보금자리로 삼으신 시온산을 깔보느냐?
왜 너희들은 영원히 거하실 시온산을 질투하느냐?
주의 병거는 수천 수만이다.
주께서 수많은 병거를 거느리고 시내산에서 성전으로 행차하신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실 때 수많은 포로들을 이끄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예무을 받으셨고 나아가 하나님께 대항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예물을 받으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원수들과의 싸움에서 친히 싸워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거칠고 황량한 광야에서 친히 비를 주시고 구름으로 덮어 안식할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해 주시는 하나님.
비록 가난한 고아와 과부일지라도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돌보신다.
그들에게 아버지와 의의 재판장이 되어주셔서 참 자유를 누리게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맛을 본 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주님을 기뻐하며 뛰놀게 하신다.
하나님은 이처럼 육신의 힘이 없는 군인, 먹을 것과 가진 것이 없는 고아와 과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는 약한 자들을 돌보신다.
결코 그들을 방치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아픔을 체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고아나 과부 그리고 연약한 자라고 해서 무조건 돌봐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오늘 본문 3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의인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의인은 그저 인간적으로 착한 일 하는 사람이나, 인간적으로 없어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의인이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한다.
義란 어떤 행위를 통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인 책임을 다하는 상태를 의라고 한다.
따라서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서 의와 불의가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창세전 아버지께로부터 말씀으로 태어나셨다(요 5:26).
그렇게 태어나신 아들이 창조의 역사에 참여하여 아버지 앞에서 얼마나 기뻐하며 뛰놀았는지 모른다.
그의 기쁨은 창조도 창조이지만 아버지 존재 자체를 기뻐했던 것이다.
(잠 8:30-31)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다(히, 페리 코레시스)는 말은 원어적인 의미로 기뻐서 춤을 추며 뛰놀았다는 뜻이다.
대여섯 살 되는 아들이 엄마 앞에서 엄마라는 존재 자체가 좋아서 재롱을 부리는 것과 똑같다.
이런 어린 아이는 엄마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다.
이것이 바로 양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다.
엄마가 어린 아이의 양식이 된다는 말이다.
자녀들은 엄마를 먹고 산다.
그렇다면 어린 아이와 같은 나 또한 나의 진짜 부모이신 주님을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닌가?
내게 한시적인 생명을 주신 육신의 부모를 뛰어넘어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난 생명’을 주신 주님이 나의 양식이 되어야 함은 자명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진리이다.
나는 무엇을 먹고 사는가?
나의 양식은 무엇인가?
나는 세상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살았다.
나는 세상의 명예와 부 그리고 보란듯한 인생을 먹고 살아왔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먹고 살았다.
나는 철저하게 3A가 나의 양식이었음을 고백한다.
남들 보기에 보란듯한 삶(Appearance), 내가 하는 일은 무조건 성공해야 하는 것(Achivement), 그리고 윤택한 삶(Affluence)을 먹고 산 것이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기뻐하고 즐거워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으면 늘 염려와 불안에 휩싸여 고민 가운데 살아왔다.
이런 나의 삶에는 평안이 없었다.
그리스도인으로써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나의 삶의 목적이 썩어지고 없어질 이 세상, 곧 만물 안에 있었기 때문에 항상성이 있을 리 만무하였다.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나의 삶은 요동쳤다.
그러다가 복음을 알게 되었고 나의 삶의 목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목적을 두고 살았던 이 땅에서의 삶은 모형과 그림자일 뿐, 진짜 인생의 실체는 만물 안이 아니라 만물 위에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림자를 보고 그것이 진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나는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그러니 삶에 항상성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물 위에 나의 삶의 목적이 있기에 이제 이 땅에서 사는 삶은 그 나라에서 누릴 영생을 맛보면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주님 앞에서 뛰놀 수 있다.
이는 주님과 말씀으로 교제와 사귐을 가질 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참 영생이요 생명을 가진 자의 모습이다.
다만 만물 안에 있는 것들로 대화의 주제를 삼을 때, 나는 주눅이 든다.
그것에 대하여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을 닫는다.
나는 결코 나 스스로 의인이 될 수 없다.
나는 죄인이며 그것도 죄인 중에 괴수이다.
이런 내가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는 의인이 되었다는 것은 나의 義가 아니라 참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나의 죄를 다 짊어지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게 생명을 주신 주님의 말씀을 먹고 산다.
그 말씀이 내게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 말씀을 먹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아직 사위가 어두워 조용하다.
그러나 내 영혼은 기뻐 춤춘다.
내게 생명주신 주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솟아나는 샘물이 있기에 이제 건조하고 메마른 땅이 닥칠지라도 걱정하지 않는다.
그 땅조차 주님께서 내게 필요해서 주시는 것임을 알기에 거기에 감사할 줄 아는 자로 살아갈 것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묵상을 시작할 때는 정말 답답하고 심령이 우울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교제를 하고 나니 감옥에서 나온 것 같은 자유를 느낍니다.
나를 심령의 감옥에서 이끌어 내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내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주의 말씀 앞에서 잠잠히 거할 때 주의 행동하심으로 이끌어 가심이 진리임을 다시 한 번 확신합니다.
나는 무엇을 먹고 사는가?
나의 양식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항상 생각하며 그 양식을 던져버리지 않도록 늘 깨어있게 하소서.
주의 사랑하는 영혼들을 주의 안식으로 이끌어 주를 사랑하듯 뭇 영혼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