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은 박정환에게 유독 약했다.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졌다. 12전 3승 9패로 밀리고 있으니까 거의 '천적' 수준이다. 모 9단이 2009년 김지석과 박정환의 '천원전' 결승을 지켜 보면서 이런 식의 말을 했다. 그때 김지석은 거의 판 맛을 보지 못했다. 당시 김지석은 박정환에게 무기력했다.
"김지석은 너무 심할 정도로 달려든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런 건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잘 통한다. 갑자기 센 사람을 만나면 스스로가 먹잇감이 되고 만다. 박정환이 세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한 이런 식의 승부가 계속될 거다."
김지석이 판 맛을 제대로 못 본 상대가 박정환 말고도 한 명 더 있다. 이세돌이다. 김지석이 16전 4승 12패로 밀린다. 그나마 김지석이 박정환에 비해서 이 성적을 견딜만한건 이세돌이 랭킹1위이며 한국바둑의 1인자이고 김지석이 수학한 권갑룡 도장출신의 선배라는 점이 될 것이다.
이세돌은 예전부터 김지석의 재능을 예뻐했다. 같은 도장 출신인 것도 있고 김지석의 기풍이 '이세돌'류에 가까운 것도 한가지 이유다. 심지어 김지석이 갓 입단해 신예기사로 활동할 무렵에는 지도기에 가까운 실전을 무수히 두었다. 올해 2월 초, 이세돌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지석을 '포스트 이세돌'로 지명했다. 후배기사인 김지석에 대한 애정과 믿음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세돌을 결승무대에서 먼저 넘어선 것은 12살 차이가 나는 박정환이었다. 올해 3월에 열린 맥심커피배 결승3번기에서였다. 박정환은 2-0으로 이세돌을 넘었다. 이 결과만 놓고보면 '포스트 이세돌'을 김지석으로 부르기에 조금 멋쩍다. - 사실 나이차를 떠나 박정환을 '제2의 이세돌, 이창호'로 부르기엔 박정환이 훌쩍 컸다. 이창호-이세돌이 없는 농심신라면배 우승을 마무리한 것도 박정환이고 세계대회(개인전)에서 1번의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한 박정환이다. 박정환은 이제 그냥 박정환이다.
한국랭킹 3위 김지석의 앞에는 랭킹1위 이세돌과 랭킹 2위 박정환이 있으며 김지석은 둘 모두에게 '전적'상 약하다. 김지석이 그 두 명의 천적중 올해 이세돌과 결승 무대에서 만났다. 국내 프로기전 중 우승상금 규모가 제법 큰 GS배(7000만원!)다. 김지석이 '이세돌의 말'을 지켜내는 방법은 한 가지다. 이세돌을 이기면 된다. '포스트 이세돌'이 되는 것이다. 또한 '제2의 이세돌이나 포스트 이세돌'이 아닌 그냥 김지석이 되는 길이기도하다.
세계대회와 중국갑조리그의 뛰어난 활약에도 불구하고 김지석은 타이틀 1개 획득(한국물가정보배, 대 이창호)이 전부다. 1개를 추가할 기회였던 작년 한국물가정보배 결승에선 신예 안성준에게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경향상 KB바둑리그, 중국갑조리그, 농심신라면배, 초상부동산배 같은 단체전에 강했고 1:1의 개인전에선 약했다.
이세돌의 우승횟수는 41회. 타이틀 결승무대에 올라서면 잘 지지않는 편이지만 올해 초 맥심커피배에서 박정환의 일격을 받으며 균열이 하나 생겼다. 김지석이 그 균열을 또 한 차례 파고들 수 있을 지가 이번 타이틀 전의 관건인 셈이다.
이세돌은 불확실성의 확률에 스스로를 내몬다. 자신의 몸과 정신, 바둑의 판세를 가혹하게 내몰아 놓은 다음 절체정명의 순간에서 승리를 쟁취한다. - 스스로를 불확실의 상황으로 가혹하게 내몰다보니 이세돌의 국후 총평은 "이판은 내가 불리했다"라는 식의 비관이 많다. - 끝내기의 강점을 가진 두터운 기풍, 혹은 기회를 기다려 한 건 터뜨리는 힘바둑, 타개에 승부를 거는 실리바둑 등 거의 모든 종류의 기풍이 이세돌이 몰고 간 불확실성앞에서 갈 길을 잃고 헤매는 경우가 무척 많았다.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처럼 위기 속으로 모든 것을 몰아넣는 이세돌의 승부 방식은 여전히 정상급의 프로들을 당황시키는데 충분하다. 그런 불확실성 속에서도 '최선의 수'를 찾지못해 실수가 많아서 만족할 수 없다고 항시 말하는 게 바로 이세돌이다.
중앙일보는 김지석의 기풍을 '피 튀긴다'라고 표현했다. 박정환에게 무너지던 2009년보다 랭킹도 올랐고 승률도 당연히 좋아졌다. 피튀기는 원래의 기풍도 여전하다. 스스로를 가혹하게 내모는 승부방식은 확실히 '이세돌 '과에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를 결승무대의 맛좋은 '먹잇감'으로 들이대지는 않을 것이다. 최근 김지석이 벌이는 전투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대부분 그의 상대들이였다. 확실히, 좀 더 무턱대고 들이대던 2009년보다 현재의 김지석은 훨씬 더 강하다.
누구의 피가 튀길 지는 아직 모른다. 4월 16일 제18기 GS칼텍스배 결승5번기 제1국에서 누구의 피가 튀는 지를 감상할 수 있다.
4월 16일 벌어지는 결승 1국은 홍기표 5단의 해설로 오후 7시부터 사이버오로에서 생중계한다. 2국은 17일(목진석 9단 해설 오후7시), 3, 4국은 22, 24일, 5국은 5월 1일에 열릴 예정이며 사이버오로에서 프로기사의 해설로 생중계한다. 전기 우승자는 이세돌 9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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