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 1: 3 죄악과 패역을 보게하시며
합 1: 3 죄악과 패역을 보게하시며 -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
하박국은 당시 사회문제만으로 고통스러워한 것은 아니었다.
하박국 선지자는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보고 탄식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자신의 이러한 탄식을 듣지도 않으시고 구원치도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1]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1) 어찌하여
2절과 마찬가지로 '어찌하여'의 히브리어 '라마'는 애가의 전형적인 표현으로 문장 전체를 강조한다.
* 시 10: 1 -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 시 44: 23-24 - 23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24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 시 74: 1, 11 - 1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기르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나이까? 11 주께서 어찌하여 주의 손 곧 주의 오른손을 거두시나이까? 주의 품에서 손을 빼내시어 그들을 멸하소서.
* 시 80: 12 -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 시 88: 1 -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2)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죄악'의 히브리어 '아웬'과 '패역'의 히브리어 '아말'은 다른 구절들에서도 서로 관련되어 등장하는 용어로 여기서는 민수기의 축복 내용과 상반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 민 23: 21 -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이로써 민수기의 약속과 상반된 현재 상황을 부각시키는 듯한다
* 합 3: 2 -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이 단어는 각각 '죄악'(evil)과 '불화'(trouble)로 번역할 수 있으며(NIV), 공의가 왜곡되고 사회적인 억압이 팽배한 상황을 묘사하는 데에 주로 사용되었다.
* 렘 6: 7 - 샘이 그 물을 솟구쳐냄 같이 그가 그 악을 드러내니 폭력과 탈취가 거기에서 들리며 질병과 살상이 내 앞에 계속하느니라.
* 렘 20: 8 -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 겔 45: 9 -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아! 너희에게 만족하니라. 너희는 포악과 겁탈을 제거하여 버리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내 백성에게 속여 빼앗는 것을 그칠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암 3: 10 -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본 구절에서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의인이 고난받고 악인이 번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심없이 방관하신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여호야김 왕의 통치 기간(B. C. 609-598)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이방신을 섬겼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신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한다.
* 렘 22: 3, 13-17 - 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13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4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큰 집과 넓은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문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 15 네가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16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7 그러나 네 두 눈과 마음은 탐욕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포악을 행하려 할 뿐이니라.
여기서 강조하는 사실이 무엇인지를 아는가? '왜 내게 보이시며, 왜 내 눈으로 보게 하시며 왜 내 앞에 이런 일이 있는가?'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묻는 말이다.
이것을 우리 개인에게 국한해서 말하면 '하나님 왜 우리의 형편은 이렇듯 궁핍합니까? 예수를 잘 믿어보려고 하지만 하나님을 불신하는 세계가 내 자신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처지가 다른 곳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좀 잘 살고 싶고 남의 눈치보지 않고 이 세상을 좀 더 편하게 살고 싶습니다. 친절한 세상에서 서로 위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내 답답한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교회가 어디 없습니까?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왜 해결하지 않으십니까? 나를 왜 이렇게 피곤하게 하십니까? 나를 왜 슬프게 하십니까?
그래도 나는 잘못된 현실을 볼 줄 아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지전능하다는 하나님은 왜 이런 현실을 내버려두십니까?' 하박국은 자신의 처지에서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생각했다.
2]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1) 겁탈과 강포
그의 절규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처절했다. 그는 무척 상한 심령으로 괴롭고 슬픔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격한 괴로움을 표면에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어찌하여, 라고 한숨 섞인 탄식을 했다. 하박국 선지자가 유다의 죄악을 보고 괴로워했다면 하나님은 더 괴로워하신다.
하박국 선지자가 절규했다면 하나님은 더욱더 크게 절규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경고장은 하나님의 탄식과 절규를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하박국 선지자는 왜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생각했습니까? 여기서 하박국이 말하는 침묵은 단순히 하나님이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단순히 말하지 못하는 하나님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그보다 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지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이와 같은 일을 내버려두십니까?
(2)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변론과 분쟁'(strife and conflict)은 평행어로서 분노와 알력으로 인한 다툼을 일컫는 말이다.
* 잠 15: 18 -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 렘 15: 10 -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어머니여 어머니께서 나를 온 세계에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만날 자로 낳으셨도다. 내가 꾸어 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꾸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간에 일어났던 분쟁을 가리키는 것으로 당시의 심각한 사회상을 묘사한다.
하박국 선지자는 유다 백성이 바벨론 군대보다 더 의롭고 유다 백성은 바벨론 군대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대하 33장 9절을 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이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모든 나라보다 더욱 심하였더라” (대하 33: 9).
바벨론 사람도 우상숭배를 했지만, 유다 백성이 더 심하게 우상숭배를 했다는 것이다. 바벨론도 악하지만 유다가 더 악했다는 것이 하나님의 평가였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유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의로워서 베푼 것이 아니라 악해도 은혜를 베푸셨다는 의미다. 하박국과 유다 백성은 자기들이 의로워서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잘못 생각한 것이다.
북한과 남한을 볼 때 북한이 의로운지 남한이 의로운지 물어보면 대답하기 어렵다. 솔직히 기독교 부흥은 북한에서 먼저 일어났다. 평양 장대현 교회도 북한 사람들이 세운 것이고 또 북한 사람들이 내려와 영락교회를 세워서 많은 일들을 했다. 남한 사람들은 신앙에 있어서는 북한보다 앞서 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남한에는 은혜를 베푸시고 북한에는 혹독한 시련을 주셨다. 이것은 우리가 의로워서 그런 건 아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북한에게도 베풀어주시기를 위해 간구해야 할 줄로 믿는다.
그러므로 하박국의 불평은 옳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더 의로운데 악인을 통해 우리를 징계하시느냐는 질문은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의 부흥과 개혁을 위해 기도하는 하박국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방식으로 응답하고 계신 것이다.
유다 백성은 70년간 포로 생활을 하였다. 우리는 일제 35년 고통의 역사가 있기에 이방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
독립기념관에 가보면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을 죽인 것이 전시되어 있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 땅에서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유다 백성은 끌려가서 70년 동안 이국땅에 살았다. 타향살이 10년도 서럽다는데 70년이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 137: 1). 우리가 우상숭배를 하니까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의 본거지로 보내셨고, 있어보니 왜 쓸데없고 무의미한 우상숭배를 하였는지 후회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고 살아계신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벨론 사람들이 바벨론 강변에서 찬송가를 불러보라고 해도 이방인 앞에서 어찌 시온의 노래를 부를 수 있냐고 거절했다.
그들은 70년 포로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우상숭배가 얼마나 악하고 무의미한 것인지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알게 되었다. 바벨론 포로생활 이후 유다 백성에게 더 이상 우상숭배로 인한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박국 선지자가 기도하던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응답하신 것이다.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바꿀 수 없는 어제보다 기대할 수 없는 내일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오늘이 가장 좋은 하루입니다.
평생 단 한번 오는 오늘 보람있게 보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