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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이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고후 8:10-24
10 이 일에 관하여 나의 뜻을 알리노니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11 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12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13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14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15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16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17 그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18 또 그와 함께 그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19 이뿐 아니라 그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아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20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에 대하여 아무도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21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22 또 그들과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 우리는 그가 여러 가지 일에 간절한 것을 여러 번 확인하였거니와 이제 그가 너희를 크게 믿으므로 더욱 간절하니라
23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24 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에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그들에게 보이라
고후 8:10-24 / 여러분이 이미 일년 전에 시작한 이 일을 이제 훌륭하게 마무리져 주십시오. 헌금을 하자는 의견을 제일 먼저 낸 이들도 여러분이고 그 일을 제일 먼저 실천한 것도 여러분입니다. 11) 그렇게 열성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니 여러분이 가진 것 중에서 바칠 수 있는 것은 다 바쳐서 기쁨으로 이 계획을 완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처음 시작할 때 가졌던 여러분의 그 열정을 이제 행동으로 보여주십시오. 12) 만일 여러분이 참다운 열의만 있다면 얼마를 바치느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바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가진 것을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13) 물론 나는 여러분의 고귀한 헌금을 거두어다가 어려운 사람들을 좀더 편안하게 살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에서 이런 말을 하는게 아닙니다. 14) 다만 여러분이 왜 그들을 도와야 하는지를 알려 공평하게 하려는 것뿐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부요하기 때문에 그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훗날 여러분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다시 그들이 여러분을 도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서로 필요한 것을 함께 나누는 셈이 되지 않겠습니까? 15) 그러기에 성경에서도 ㄱ) `많이 거둔 자도 남는 것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쪼록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나누십시오. (ㄱ. 출16:18) 16) [디도 일행의 파견] 내가 여러분에게 쏟은 관심을 디도에게도 갖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17) 그는 내 권유를 기쁘게 받아들여 다시 여러분을 방문할 뜻을 굳혔습니다. 그는 아마 나의 권유가 없었더라도 여러분이 보고 싶어 꼭 그곳에 가려 했을 것입니다. 18) 나는 또 잘 알려져 있는 성도 한 사람을 그에게 딸려 보낼 생각입니다. 그는 모든 교회에서 복음의 설교자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사람일 뿐 아니라 19) 나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보내는 헌금을 가지고 가도록 여러 교회가 선발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서로 도우며 살고자 하는 우리의 열성을 나타내기 위해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20) 우리가 그들을 함께 보내는 것은 많은 액수의 헌금을 취급하는 일에 혹시나 사람들의 의혹을 사는 일이 생길까봐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뒷말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21)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정직하다는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나는 이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확인받고자 이 계획을 세웠습니다. 22) 그들과 함께 또 한 형제를 보냅니다. 우리는 여러 경험을 통해서 이 사람이 열렬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여러분이 남을 돕는 일에 열심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이번 여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3) ㄱ) 만일 디도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 이가 있거든 나와 함께 여러분을 돕는 나의 동역자라고 말해 주십시오. 그리고 다른 두 형제에 대해서는 이곳 교회의 대표이며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범이 되는 인물이라고 말해 주십시오. (ㄱ. 70인역 잠3:4) 24) 아무쪼록 나를 대하듯 여러분의 사랑을 이 사람들에게 쏟아주어, 내가 사람들 앞에서 여러분을 자랑한 것이 사실이 되도록 해주십시오.
선한 의도를 가지고 마음을 모을지라도 우여곡절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선한 일을 이루는 여정은 멈춰서는 안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 특별히 같은 신앙을 가진 형제들을 돕는 일은 더욱 그렇습니다.
선한 일을 회복하라(10-21)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이 전에 이 모금에 참여하기로 했던 것을 떠올려 줍니다. 하지만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연보를 모으는 일을 완수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앞선 고린도후서 2장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서 보면, 바울은 고린도에 두 번째 방문했을 당시 그곳의 어떤 성도로부터 모욕을 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고는 에베소로 떠나게 되었고 이후 디도에게 화해의 임무를 맡겨 고린도에 대신 방문하게 했던 것입니다. 화해와 회복의 기쁨을 나누면서 예전에 계획하던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돕는 일을 다시 진행하게 합니다. 이를 통해 관계의 회복이 선한 비전과 사명의 회복으로 이어지게 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모든 일을 강요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선한 일은 자발적일 때 그 의미가 더 깊어집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도 자발적인 헌신을 기뻐하십니다. 성도는 복음을 전하는 일과 그와 관련된 선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일들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 존중하고 절제하며 헌신, 협력할 때 더욱 성숙하게 됩니다.
선한 동역자 디도(22-24) 디도와 동행한 인물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를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지극히 신실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는 동역자였습니다. 어쩌면 고린도의 성도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먼저 디도는 바울에게 나의 동역자로 불릴 만큼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친밀할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디도는 바울의 사역에 동역하며 적지 않은 공헌을 했습니다. ‘교회의 사자’라는 표현은 당시 사도들에 준하는 권위 또한 가지고 있었고 신뢰를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권위와 신뢰를 인정받고 있는 디도와 그 동행에게 고린도 교회가 성숙함과 헌신 그리고 교회의 연합하는 모습을 보여주라고 당부합니다. 그것은 또 다른 교회들에게 모범이 되고 도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이렇게 각 교회는 서로 선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숙한 신앙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적용 : 당신의 선한 믿음의 동역자는 누구이고 어떤 비전을 함께 하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행복한 결혼과 따듯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랑’같은 개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서로 간에 지켜야 하는 ‘예의’와 상대에 대한 ‘인정’과 상대를 존중하는 ‘언어’같은 것들입니다. 개념적인 단어인 사랑은 형식적인 언어와 태도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니 머리로 알고 있어 말로만 사랑이라고 답하고, 말로만 사랑한다고 할 것이 아니라 상대가 알 수 있도록 행함과 태도를 통해 진실함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 설 교 >
간절한 마음으로 섬기는 일꾼들
이수영목사 / 고후 8:16~24
오늘 본문에 바로 앞서는 글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연보를 해줄 것을 간곡하게 권면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권면의 연속입니다. 본문 마지막 24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다시 한 번 “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에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그들에게 보이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마게도냐 교회들이 그들 자신의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한 것처럼 고린도 교회 신자들도 예루살렘의 성도들에 대한 사랑의 관심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고, 그렇게 해서 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그렇게 권면하는 24절의 글을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 말은 그 앞에서 한 모든 말을 상기시키며 “그러니까 염려하지 말고 믿고”의 뜻이 담긴 말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그들이 거둔 연보가 과연 정확하게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 하는 염려나 의심은 전혀 할 필요 없이 마음 놓고 연보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그런 권면을 하는 것이겠습니까?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자기들이 거둔 연보가 바르게 관리되고 그들의 뜻대로 온전히 예루살렘에 전달될 수 있으리라고 전적인 신뢰를 갖도록 그가 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거둔 연보를 받기 위하여 믿을 만한 사람들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소개하는 글입니다.
사도 바울이 제일 먼저 소개하는 사람은 디도입니다. 본문 16-17절에서 사도 바울은 쓰기를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디도에 관하여 말하며 두 번씩이나 강조한 것은 그의 마음의 “간절함”입니다. 이 간절함은 다른 말로 하면 “열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이라고 썼습니다. 즉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위하여 가지고 있는 열심과 같은 열심을 디도가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디도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위하여 사도 바울만큼이나 열심을 갖고 있었는데 고린도 교회에 다녀오라는 권면을 받고는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즉 더 열심히 자원하여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런 열심을 하나님께서 디도의 마음에 주신 것을 감사한다고 썼습니다. 그 열심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순수하고 진실한 열심일 것입니다. 사적인 욕심이나 동기가 없는 열심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23절에서 다시 한 번 디도에 대해 언급하며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라고 합니다. “나의 동료”, “나의 동역자”란 말은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바울의 삶과 사명을 꼭 같이 나누고 있는 이란 뜻입니다. 바울의 편지 속에서 이런 영예를 얻은 사람은 디도 외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자신 있게 그를 보내는 것이고 고린도 교회 신자들은 전적인 신뢰를 가지고 그를 영접하며 그에게 연보를 맡길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의 연보를 받아오기 위하여 디도만 보낸 것이 아니라 다른 두 사람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에 대해서는 본문 18-19절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또 그와 함께 그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이뿐 아니라 그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아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누구라고 이름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그 형제”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미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그가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여러 교회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며 복음을 위하여 일하는 가운데 두루 칭찬을 받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아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가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말은 바울이 일방적으로 지명한 사람이 아니고 여러 교회가 선정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그 선정에 있어서 바울의 의중이 개입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튼 공개적이고 객관적인 선정의 과정을 거친 검증된 사람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도록 여러 교회에 의해 선정된 것인가 하는 데 대해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이란 바로 여러 교회들로부터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연보를 거두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우리와 동행”한다는 것은 여러 교회에서 거둔 연보를 전하기 위하여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에 동행할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즉 그는 디도와 함께 고린도 교회에 다녀와서는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에도 같이 갈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 교회가 그를 그런 일을 하도록 택한 것은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동일한 주”라고 한 우리말 번역은 좋은 번역 같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 자신”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원”이라 한 것은 사도 바울의 “선한 의지”를 뜻하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의 영광을 위하여”라 함으로써 연보를 거두고 그것을 잘 관리하는 일이 결코 세상적인 일이 아니고 영적인 일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도와 함께 고린도로 보낸 두 사람 중 다른 한 사람에 대해서는 본문 22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 그들과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 우리는 그가 여러 가지 일에 간절한 것을 여러 번 확인하였거니와 이제 그가 너희를 크게 믿으므로 더욱 간절하니라.” 이 사람을 말하면서도 사도 바울은 “간절함” 즉 “열심”이란 말을 두 번씩이나 쓰고 있습니다. 그가 여러 가지 일에 열심인 것을 여러 번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를 크게 믿고 있으며, 그러기에 그는 더욱 더 열심을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앞서 언급한 사람을 언급할 때는 “그 형제”라고 한 데 반해 이 사람에 대해서는 그저 “우리의 한 형제”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이 사람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이 사람의 열심을 사도 바울 자신이 여러 번 확인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자신의 전적인 신뢰를 보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디도와 함께 고린도 교회에 다녀오도록 보낸 두 사람을 소개한 사도 바울은 본문 23절 하반절에서 그들을 가리키며 쓰기를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합니다.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란 말은 여러 교회가 선거를 통해 뽑아 보내는 정식 대표들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디도가 바울이 지명해 보내는 대표라면 이들은 여러 교회가 뽑아 보내는 대표들이라는 말입니다. 또 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것은 그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했으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중요한 사명을 맡겨 고린도 교회로 보낸 이들이 모두 간절한 마음으로 섬기는 즉 열심 있는 사역자들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열심이 있어야 할 것이며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들을 들어 크게 쓰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교회 일은 열심만으로 되는 것은 아님을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열심만으로 된다면 사도 바울은 스스로 “나의 동료요 나의 동역자”라 부르던 디도 한 사람만 보내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디도 외에 여러 교회에서 칭찬 받고 열심 있는 사역자들로 인정 받는 두 사람을 함께 보낸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많은 경우 서로 믿고 은혜 가운데 일들이 이루어지곤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일들은 아주 객관적이고 정확하며 투명해야 합니다. 특히 돈이 관련된 일일 때는 그렇습니다. 공금을 다루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항상 의심과 비방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교회에서 돈을 다루는 일도 한 점의 의혹이 없도록 조심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연보를 거두어 전달하는 일을 자기 혼자 하거나 디도 한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여러 사람이 함께 하게 한 것은 혹시라도 연보를 거두고 관리함에 있어서 부정이나 소홀함이 없을까 의심하는 사람과 근거 없는 비방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런 생각을 사도 바울은 본문 20-21절에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에 대하여 아무도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 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주 앞에서 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아주 양심적인 사람들이 어떤 일을 정직하게 행하기는 하지만 그 일의 객관적이고 확실한 증거를 남겨놓지 않아서 오해를 사거나 의혹을 받는 경우를 봅니다. 그런 사람들이 흔히 “나는 하나님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떳떳하게 말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런 말만 가지고는 신자들 사이의 의혹과 비방을 잠재우기에 부족해서 아쉬울 때가 많습니다. 조금 귀찮더라도 교회의 덕을 세우고 교우들이 늘 마음이 편하고 화평하기 위하여 최대한 투명하며 정확하고 객관적인 관리상태를 보여주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돈은 물론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돈이라는 것은 달리 생각하면 주인이 없는 돈으로 여겨지기 쉽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내 것 아닌데 뭐.” 하는 생각에 젖어 너도 나도 마구 낭비하거나 남용하기 쉬운 게 교회 돈입니다. 자기 용돈 쓰듯 교회 돈 쓰다가 교인들 시험 들게 만들고 교회 안에 평지풍파 일으키는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 일에 열심 있는 우리가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깨끗한 양심으로 교회 일을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 혼자 속으로 깨끗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객관적이고 정확하며 투명하게 교회 일을 하는 노력을 함께 기울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다 같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교회를 섬기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사명을 감당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은?
이삼규목사 / 고후 8:16-24
사람은 무엇을 중심으로 사느냐에 따라 4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익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편리를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쾌락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넷째는 사명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사명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독자적인 경영과 이노베이션(미야타 와하키로 저)" 책에서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탁월한 기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것입니다.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이익의 질을 높이라는 것입니다.
기업이 이익을 내는 데는 비용이나 경비를 절감하여 이익을 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좋은 이익은 높은 생산성을 통해 이익을 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더 질 좋은 이익은 제품과 서비스를 통해 독자성 있는 이익을 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전략과 관리를 통시에 추구하라고 말합니다.
전략을 통해 이익을 남기고 관리를 통해 낭비를 방지하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원점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점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도 일평생 살면서 사명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원점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인으로 성공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사명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호흡이 멈추는 순간까지 사명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귀한 사명을 허락하시고 그 일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우리교회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1. 칭찬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는 은사를 따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은사와 재능이 있다 할지라도 우선 점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으로 칭찬받는 사람인가?’하는 것입니다. 즉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모든 교회로부터 칭찬을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헌금을 맡아서 전달할 일꾼으로 디도와 두 형제를 보냈습니다. 무엇보다 디도는 간절한 마음으로 자원해서 고린도 교회로 갔습니다. 디도와 함께 한 형제들 또한 복음을 믿으면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고, 교회가 감당하는 여러 사역에 평소에 동참했던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을 통해서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간절함으로 자원하는 일꾼이어야 합니다.
고후 8:16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후 8:17 그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소개하는 첫 번째 일군은 디도라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디도를 어떻게 소개합니까?
고후 8:23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1>나의 동료-디도를 '나의 동료'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디도와 바울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한가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동료'라는 뜻은 파트너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보통 어렸을 때부터 사귀는 친밀한 친구를 부를 때 '동무'라고 부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디도는 그런 친밀감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2>나의 동역자-'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디도는 바울과 함께 주님의 교회인 고린도교회를 위하여 수고하는 동역자였습니다.
3>교회의 사자-'사자'라는 본래 단어의 의미는 '사도'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각 교회의 지도자로서 특히 구제를 위한 연보를 관리하는 일군으로 임명되었음을 말씀합니다.
4>그리스도의 영광-이들의 빛나는 업적 때문에 주님께 영광이 돌아갔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귀하게 소개한 디도에게 있었던 특징이 무엇이었을 까요? 그것은 '간절함'입니다. 간절함이라는 말은 '스푸데'라고 하는데 이 말은 '스퓨도'(서두르다, 재촉하다)라는 말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간절함이라는 말은 어떤 일에 대한 열정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디도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같은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가진 열정을 디도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어떤 열정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려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려는 구령의 열정이 있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려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열정이 디도에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열정을 주시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디도의 마음에 불붙는 뜨거운 열정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속에 있는 열정이 디도의 마음에도 있었는데 오늘 본문17절에 보면 더욱 간절함이 디도에게 있었다고 말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이 칭찬 받는 일군이 되고 싶습니까? 디도가 가진 열정이 필요합니다. 열정을 가진 사람만이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뜨뜻미지근하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간절함 곧 열정이 필요합니다.
영국에 매리 존스라는 시골 처녀가 있었습니다. 매리는 남의 집 가정부 일을 하며 푼푼이 돈을 모았습니다. 그녀가 돈을 모은 것은 한 가지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제 평생 소원은 성경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어요”
마침내 매리는 성경을 살 만큼의 돈을 모았습니다. 그녀는 무려 40㎞를 달려가 성경을 구입했습니다. 매리에게 성경을 판 사람은 그녀의 순수한 신앙, 성경을 사랑하는 마음에 감동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영국의 기독교인들이 이 소식을 듣고 성경을 싼값에 구입할 수 있는 기관설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였습니다. 그 결과 영국성서공회가 설립됐습니다. 한 소녀의 작은 열정이 전 세계에 성경을 보급하는 운동을 펴는 성서공회를 탄생시킨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위대한 일은 소수의 작은 열정에서 시작됩니다.
롬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비록 달란트가 부족하고 미숙하다고 하여도 열정을 가진 사람이 인정받는 일군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일군은 한 마디로 열정이 부족하였던 것입니다. 달란트는 사용할수록 늘어나게 됩니다. 여러분이 칭찬 받는 일군이 되기를 원합니까? 열정을 가지십시오. 큰일을 하는 사람은 항상 열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2)복음으로 칭찬 받는 자여야 합니다.
고후 8:18 또 그와 함께 그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하나님의 일꾼은 복음으로 칭찬을 받는 자여야 합니다. 복음으로 칭찬을 받는 다는 것은 복음을 굳게 확신하며 믿는 바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꾼에게 요구되는 항목 중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복음에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즉 복음으로써 칭찬을 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추천했던 일꾼들은 모든 교회에서 복음으로 칭찬받는 일꾼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으로 인해 기쁘게 사역을 시작했다가 어느 순간부터 일로써 사역을 감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십자가 복음을 묵상해야 합니다. 복음으로 인해 구원받고 사명이 주어졌음을 한 순간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는 칭찬을 하고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1>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고후 10:18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2>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롬 14: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3>교회로부터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행 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이웃에게도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나는 하나님께만 칭찬 받으면 그만 이라는 생각이나, 사람만 의식하고 칭찬받으려는 것은 둘 다 잘못되었습니다. 칭찬받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때 상급을 받게 됩니다.
*사람에게 칭찬을 받을 때 덕이 있게 됩니다.
*교회에서 칭찬을 받을 때 교회가 부흥하게 됩니다.
*이웃에게 칭찬을 받을 때 예수님이 증거됩니다.
2. 항상 조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도덕적 기준에 미치지 못할 때, 세상은 교회를 비난합니다. 세상은 보다 엄격한 잣대로 교회를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거액의 연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매우 신중하게 행동했습니다.
고후 8:20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에 대하여 아무도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고후 8:21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 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예루살렘을 위한 고린도 교회의 헌금은 거액이었습니다. 이럴 때 디도가 혼자 가서 처리하면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복음으로 칭찬을 받고 모든 교회의 택함을 받은 한 형제를 디도와 같이 보내 일하게 하였습니다. 의심을 받는 결과 훼방을 받게 되므로, 혼자 보내지 않고 두 사람을 보낸 것은 그만큼 모든 일에 조심한다는 말입니다. 선한 일에도 조심을 해야 하는데, 헌금을 걷고 관리하고 구제하는 방법까지도 조심을 해야 합니다. 모든 일을 조심해서 처리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단의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지난번에 아이티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총회 산하 모든 교회들이 아이티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구제 헌금을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도 참여한 바가 있습니다만 거액의 구제헌금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잘못되어 지금도 총회에서 조사하고 잘못된 부분을 환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회계를 보시는 분들을 칭찬하고 싶습니다. 항상 결산이 끝나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산화가 이루어진 덕분도 있지만 과거에 전산처리를 하지 않을 때도 우리 회계를 맡은 장로님들과 집사님들은 정확하게 처리를 하였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항상 재정관리가 투명해야 합니다. 언제 장부를 보아도 명확한 결산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열정이 없는 사람은 그 일을 뒤로 미룹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 기억이 희미해집니다. 그러면 대충 기록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맞지 않습니다. 그것을 맞추려면 밤을 꼬박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맞추어지면 다행이지만 그래도 맞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만일 이런 분이 교회 살림을 맡아서 관리한다면 문제가 많을 것입니다.
바울이 디도와 함께 보내는 일군은 여러 번 테스트를 거쳐서 인정을 받은 사람입니다. 특히 정직함에 인정을 받은 사람입니다.
재미 사업가인 백영중이라고 하는 분은, 현재 미국의 '강철왕'이라는 별명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그가 쓴 책이 "나는 정직과 성실로 미국을 정복했다"라고 하는 이름의 책이 있습니다.참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패코스틱이라고 하는 큰 회사의 회장인데, 아이빔(I-beam)을 생산 판매해서 연 매출액이 2억 불이 넘는다고 합니다. 경량철골 관계에서는 시장 점유율이 60%를 차지하고 있는 큰 회사의 회장이 되었습니다. 이 백 회장은 북한 선천에서 태어났고, 혈혈단신 혼자서 월남을 해 가지고 남한에서 살아보려고 하다가 잘 안 돼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미국에 건너가서 많은 고생을 하게 되었고 이제는 자수성가하여 강철회사 회장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주어서 좋은 분들을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좋은 기회를 주신 것을 늘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너무 고달프고 어려울 때, 식당에서 일을 할 때, 그 어려운 가운데서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북에서 쫓겨나 남에서 못 살고 미국에 왔는데, 이 이상 더 물러설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오직 성실과 정직을 삶의 모토로 삶고 살아왔습니다. ‘노 머니 노 잉글리시(No Money No English)’ 돈도 없고 영어도 못한 사람이지만 그런데 대 기업의 회장이 된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된 것은 그의 열정과 정직이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교회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을 겪는 성도를 위해서 거액의 헌금을 하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물질을 내어 놓는 섬김은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혹여 이를 관리하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실수하거나 부정이 개입된다면 이는 큰 비난거리가 될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목적이 잘못된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도덕적, 윤리적 기준에 어긋난 방법으로 일을 처리해서 안 됩니다. 교회의 거룩함은 세상이 제시하는 도덕성 그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세상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감당할 때, 일의 효율성과 편의를 위해 세상의 법을 어기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제시하는 것보다 더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일을 하기 전에 자신의 윤리 의식을 점검해야 합니다. 교회가 감당하는 사역은 세상에서 행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의 윤리적 기준을 생각해야 하며 신중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효율성이 아닌 거룩함을 드러내야 합니다.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행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3. 사랑하며 함께 감당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디도와 함께 또 한 명의 형제를 보냈습니다. 바울은 디도를 자신의 동료이자 동역자라고 소개했고, 함께 하는 형제들은 교회의 사자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고후 8:23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가 디도 일행을 사랑으로 영접하는 것은 바울을 맞이하는 것이요, 교회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명을 감당할 때에 함께 할 수 있는 동역자를 세우고 그들을 사랑으로 격려해야 합니다. 바울은 디도라는 동역자와 사역을 나눠 감당하였습니다. 동역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적절하게 배치하고 믿고 맡겨야 합니다.
동역자에게 사랑과 격려로 힘을 줘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동역자가 감당하고 있는 일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일은 곧 성도 모두의 일이 됩니다. 자신이 관계되지 않는 일이라 하더라도 관심을 갖고 사랑으로 격려하며 도울 수 있는 부분은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합니다.
자기 혼자만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셨으므로 다른 사람의 능력을 인정하고 은사와 능력에 맞게 사역을 배분하고 함께 감당해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어려운 성도를 돕는 일, 복음을 전하는 일 등 여러 가지 사명이 있습니다. 교회에 주신 이러한 사명에 그 누구도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힘껏 도와야 합니다. 거창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마음을 다해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우리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굳게 붙들고 칭찬받는 사명자들이 됩시다. 항상 조심하는 사명자들이 됩니다. 사랑하며 함께 일하는 사명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의 황금사슬
고린도후서 8:16~9:15 / 김형익목사
바울 사도는 계속해서 헌금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짓기 위해서 실제적인 언급과 함께 ‘돈’에 대한혹은 ‘헌금’, ‘주는 것(베푸는 것)’에 대한 중요한 신앙적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 사도는 이 일을 위해 세 사람을 고린도교회에 파견하면서 자기가 왜 그들을 보내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고 또 고린도교회에게 그들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1. 디도와 형제들을 보내는 동기(8:16~24)
A. 디도와 두 형제(16~19, 22~23)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의 모금을 마치기 위하여 파견한 사람은 디도를 포함하여 세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오늘날에도 교회의 일군에 대한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해줍니다.
첫번째 인물은 디도입니다. 디도는 이미 바울 사도의 중간편지를 전달하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을 감당했을 뿐 아니라, 그 때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디도를 영접하고 순종한 바 있었기에(고후 7:15) 이미 고린도 교회와의 사이에 정서적으로도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어있었습니다. 디도의 마음 속에도 이제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가지고 있는 간절한 마음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 간절한 마음은 관계에서 오는 태도입니다. 일에 대한 것이기 이전에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한 불붙는 사랑이 디도의 마음 속에 생긴 것입니다. 교회는 늘 일 이전에 사람이 우선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일을 위해서 사람을 이용하시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교회 생활에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이런 점에서 디도는 가장 적임자였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에게 이 일을 권하자 디도의 마음에는 더욱 불붙는 마음이 일어나 시켜서가 아니라 자원함으로 이 일을 맡겠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에게 있어 이보다 귀한 자질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디도를 가리켜 말하기를, ‘나의 동무,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라고 합니다(8:23). 동무란 말은 ‘partner’란 말입니다. 바울 사도와 함께 멍에를 진 자입니다. 이런 동역자가 있을 때 어찌 일이 힘들게 느껴지겠습니까? 디도는 실로 바울 사도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두번째 인물과 세번째 인물은 익명으로 소개됩니다. 두번째 인물은 8:18에 소개되는데, 그는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입니다. 아마도 이런 말로 보아서 그는 이미 복음전도자로서 유명한 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많은 추측을 하였는데, 누가가 아니면 바나바나 실라와 같은 인물들이 아니겠는가 생각을 합니다마는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그는 모든 교회의 칭찬을 받을 뿐 아니라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은 자였습니다(8:19). ‘택함을 입었다’는 표현은 선출되었다는 말인데, 아마도 이 모금을 위하여 그는 여러 교회의 대표로서 선출된 자였을 것입니다. 그는 신뢰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그가 선출된 목적을 여기서 분명히 합니다. 그것은 주의 영광을 드러내고 바울 사도와 교회들의 바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8:19). 이 모금의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그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정이 아니었다면 바울 사도는 진작에 이 (부탁하기) 어려운 일을 그것도 바울 사도로 하여금 쓸데없는 오해와 비난을 불러일으키게 만든 일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 ‘돈’과 관련된 일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이것이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영예와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인물은 두번째 사람처럼 교회에서 선출된 사람인지, 바울 사도의 일행 중에서 사도가 직접 파견한 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전자에 속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가 두번째 인물과 함께 이 인물을 소개하면서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언급하기 때문입니다(8:23). 여기 ‘사자’란 말은 사도를 의미하는 단어인데, 여기서는 고유적 사도란 의미가 아니라 ‘보냄을 받은 자’란 문자 그대로의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이미 사람들을 향한 열심 면에서 검증된 바 있는 인물입니다(8:22). 더우기 그는 고린도교회에 대한 신뢰가 커서 이 임무를 맡는데 아주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그리스도께 영예가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8:23). 그들의 삶과 사역을 통하여 그렇게 해온 사람들이라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칭찬이 없을만큼 사도는 이 세 사람을 보내며 그들을 고린도교회에서 천거합니다.
누군가 저를 소개할 때 이렇게 소개할 수 있다면 이보다 영광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김형익으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나의 동역자요, ……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고 말입니다. 비록 세 사람의 이름 중에 우리가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디도 뿐이지만, 이들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기뻐하시는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 안에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사람들이 되어가야 하겠습니다.
B. 바울이 받았던 오해와 바울이 조심하려는 태도(8:20~21)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세 사람을 보내는 이유를 밝힙니다. 우리는 이미 바울 사도가 일 년 전에 시작한 모금을 인하여 고린도교회로부터 불필요한 오해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대다수의 성도들이 회개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거짓 사도들의 영향에 있는 사람들은 바울 사도가 다시 모금을 마치라고 종용하게 된다면 다시 이런 비난을 서슴지 않을 것이고 바울 사도는 어리석게도 그들에게 비난의 빌미를 제공해줄 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언제나 그래왔었겠지만, 특별히 자신이 얼마나 이 일을 하는데 있어서 조심하고 있는지 밝혀줍니다.
8:20입니다. 사도가 조심하는 것은 이 모금의 일,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고린도교회에서만 된 모금이 아니라, 마게도냐 교회들과 기타 다른 곳에서도 거두어진 것이라고 볼 때 적지 않은 돈이었을 것입니다. 사도가 밝히는 바와 같이 ‘거액’이었을 것입니다. 사도는 나아가 주님 앞에서 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조심하려고 한다고 말합니다(8:21).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믿어주는 것이 훌륭한 것이 아니라, 조심하여 넘어지지 않도록(훼방하지 못하게) 방안을 강구하여 행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할수록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가 돈과 관련된 업무를 할 때 그렇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그 돈을 직접 다루지 않을 의도를 보여줍니다. 바울 사도는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 아니라 믿을만한 사람을 세 사람이나 보냅니다. 조심하는 것입니다.
선교사로 있을 때, 늘 시간과 함께 신경을 써야했던 일이 바로 재정업무였습니다. 연간 들어오는 모든 재정을 한푼도 틀림없이(선물비로 들어오거나 현지의 수입 조차도) 맞추어서 보고서를 만들어 제출해야했습니다. 모든 영수증을 다 첨부하여 적어도 2년 이상은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선교사들을 믿지 않아서입니까? 아니지요. 선교사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자기를 믿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절대로 이런 점에서 자기를 믿지 마십시오. 우리가 다 죄인이라는 것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넘어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을 너무 믿지 마십시오.
바울 사도는 돈을 자신이 직접 다루지 않았습니다. 조심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복음의 사역이 지장을 받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특별히 돈을 다룰 때 조심해야 할 것을 말씀해줍니다.
C. 고린도 성도들의 회개의 진정성은 연보를 마치는데 달려있다(8:24; 8:8; 9:13).
바울 사도가 이 ‘은혜의 일’(8:19)을 마치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돈을 모으는 것’ 자체의 목적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목회적 차원에서 고린도교회에게 바울 사도가 계속 도전하는 것은 이 연보를 하는 것, 마치는 것은 바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회개가 진정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8:24을 보십시오. 그들은 여러 교회 앞에서 그들의 사랑을 보여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앞서 8절에서도 말한 바 있습니다.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9:13에서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이 연보?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함을 섬기기 위한 모금?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받은?헛되이 받지 않은?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하나의 방법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를 개척한 목자의 마음으로 그들이 그렇게 그들의 믿음과 사랑의 증거를 드러내주기를 간절히 바랬던 것입니다.
2. 미리 준비해서 헌금을 마쳐야 할 이유(9:1~5)
바울 사도가 서신의 이 부분에서 유독 강조하는 것은 내가 방문할 때 헌금을 급하게 또는 마지 못해서 하는 일이 없도록 미리 다 준비해서 마치라는 것입니다. 그저 편하게 가자고 하지 않습니다. 또 그저 액수만 채우면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헌금의 본질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A. 바울의 자랑(9:2~4)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에서 마게도냐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8장 초두에서 이미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 사도의 말씀을 보면 사실은 마게도냐교회가 그렇게 헌금을 하게 된 것도 고린도교회가 1년 전부터 이 일을 준비했다고 바울 사도가 자랑했던 것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먼저 이런 바울 사도의 자랑이 헛되지 않게 되었으면 한다는 개인적인 바램을 적고 있습니다.
B. 참 연보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9:5).
그러나 그런 개인적인 이유?즉, 바울 사도가 부끄러움을 당할지도 모르는?만은 아니었습니다. 5절에 ‘참 연보’란 말을 씁니다. 가짜 연보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는 연보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연보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해서 자원함으로 하는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만일 그들이 바울 사도가 그들을 방문할 때까지 기다린다면, 바울 사도는 이 일을 위하여 엄히 명하게 될 것이고, 그들은 자원하는 마음보다는 급한 마음으로 억지로 내는 부분이 많이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것은 바울 사도가 원하는 바가 아닐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 연보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돈에 대하여 ‘지나치게’ 언급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부분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이 ‘지나치게’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과, 과연 돈에 대하여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돈을 통해서 은혜와 믿음에 대하여 말하는가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돈에 대하여 좀 ‘지나치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돈에 대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대해서, 그리고 은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구별이 필요한 것입니다.
게다가 바울 사도가 지금 여기서 사용하는 ‘연보’란 단어는 본래 ‘축복’(blessing)을 의미하는 말이고 이차적으로 ‘풍성하다’(bountiful)는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물질을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후하게) 주신 축복’이라고 이해할 뿐만 아니라 이 축복은 다시 우리 자신을 통하여 (후하게) 나누어져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8장과 9장에 연보란 말이 많이 사용되지만 독특하게 여기 9:5에서만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3. 은혜의 황금 사슬(9:6~15)
이제 이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이 본문이 단순히 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뭔가 놀랍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되는 결과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돈을 의미하는 황금 사슬이 아니라 ‘은혜의 황금사슬’입니다.
A. 하나님이 주시는 넘치는 은혜(9:8) ?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고)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심(9:8) ?
9:8을 먼저 봅니다. ‘하나님이 넘치게 주시는 은혜’에 대해서 먼저 말합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그리고 기독교적이라는 말하는 봉사나 사역이나 행동의 유일한 출발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먼저 드려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갚으시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주시되, 인색하게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색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후하신 분이십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우리는 후하게 주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제대로 하나님을 만나면 후하게 주시는 하나님을 닮아서 후하게 베푸는 자가 됩니다. 그는 결코 인색한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발치에서 향유를 허비한 여인을 칭찬하신 분이십니다. 제자들은 인색했지만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눅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야고보는 후히 주시는 분이라고 이렇게 설명합니다.
약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어찌 이것 뿐이겠습니까? 본문에는 이와 유사한 표현이 무척 많이 나온다는 사실을 관찰하셨습니까? 6절에서 ‘많이’ 심는다고 할 때 이 표현도 후하게란 의미입니다. 8절에, ‘넘치게’, ‘넉넉하여’ 또 ‘넘치게’, 10절에 ‘풍성하게’와 ‘더하게’ 11절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12절에 ‘많은 감사’, ‘넘쳤느니라’, 13절에 ‘후한 연보’, 14절에 ‘지극한 은혜’, 15절에 ‘말할 수 없는’ 이 모든 어휘들이 다 하나님의 후하심을 반영하는 것들이란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후하게 베푸시는 분이시며 우리 모두가 다 그 수혜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후하게 베푸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왜 하나님께서 이토록 후하게 넘치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항상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럴 수 있다면 말입니다. 지금 바울 사도가 돈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까? 아니지요. 은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돈을 달라고 구해야겠습니까? 돈을 달라고 구해서 돈을 얻은 사람은 이렇게 나누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구하여 돈을 은혜로 얻은 사람은, 이것을 축복으로 여기기에 그 결과,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의 한 가정에 시야가 머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시야, 하나님의 관점은 우주적입니다. 적어도 온 세상을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함이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가 되게 하지 마십시오. 이럴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후히 주시는 은혜입니다.
여기 ‘착한 일’이란 것도 바로 하나님 자신의 성품인 ‘선하심’에 대한 언급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반영되는 일에 부요해지는 것입니다. 그 뜻은 또 ‘유용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유용함을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다면 우리는 어디에서도 필요없는 존재가 아니라 유용한 사람이 됩니다. 은혜, 오직 은혜입니다.
B.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9:11) ?
그래서 어떤 일이 구체적으로 고린도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너그럽게 연보를 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요?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보지도 못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해서 입니다. 여기 사용되는 연보란 단어는 본래 ‘후하다’는 뜻을 가진 5절에서 쓰인 단어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연보는 또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
i. (예루살렘)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9:12) ?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사모하고(9:14) 저희가 하나님께 감사함(9:11,12) ? 하나님이 주시는 넘치는 은혜(9:8)
여기서는 몇 가지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첫째로 매우 실제적인 결과입니다. 12절이지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의 부족함이 보충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을 보면, 그 예루살렘 성도들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알지 못하는 선교사님이나 어떤 민족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게 되거나 특별한 은혜의 관계를 맺게 된다면 그 마음의 간절함을 가지고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돈이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으로 갔고, 기도가 예루살렘에서 고린도로 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감히 이렇게 도전합니다. 돈으로 심어 여러분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거둘 수만 있다면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은혜의 황금사슬은 이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감사가 넘치게 합니다. 첫째는 예루살렘 성도들이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11절에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고, 12절에는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라고 합니다. 이뿐 아니라 바울 사도 자신도 15절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것이 결국 어디로 다시 돌아가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영광은 다시 어디로 흘러가겠습니까? 바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 자신에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8절로 돌아가,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로 다시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황금사슬’입니까?
ii.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함을 증명함(9:13)
고린도 성도들의 헌금은 두번째 결과를 맺게 되는데, 그들 자신의 믿음의 참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이 (봉사의) 직무?모금과 관련된?로 증거를 삼는다고 했습니다. 무슨 증거입니까? 고린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이 순종의 행위로써 그 참됨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참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 믿음의 참됨을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그 증거의 하나로 성경에서 제시되는 것이 바로 ‘베푸는 것’, ‘연보’라는 것입니다. 돈으로 믿음을 증명한다. 놀랍지 않습니까?
iii. 너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9:13) ? 하나님이 주시는 넘치는 은혜(9:8)
고린도 교회의 헌금이 가져오는 세번째이며 궁극적인 결과입니다. 13절 하반절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도운 것은 단지 예루살렘 교회만을 ‘후한 연보로’ 도왔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그렇게 돕는 자들이다라는 인식을 주게 되고 이것을 알게 되고 듣게 되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이 일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것을 이미 8:19에서 밝힌대로 입니다. 하나님게서 받으신 영광은 다시 그들 자신 고린도 성도들에게 넘치는 은혜로 부어지게 될 것입니다.
C.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함(9:15) ? 하나님이 주시는 넘치는 은혜(9:8)
오늘 본문의 전체 구조를 보면 하나의 형식이 있습니다. 8:16이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시작되고 있고, 마지막 구절인 9:15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마무리됩니다. 이것은 매우 의도적인 표현입니다. 이 연보 전체에 대한 본격적인 설명은 궁극적으로 바울 사도의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시작되고 감사로 마무리됩니다. 여기서 다루는 것이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알게 하는 것입니다. 모금액이 채워졌기 때문이 아니라 이 ‘은혜의 황금사슬’을 생각하는 바울 사도의 마음 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9:15) 감사가 넘치는 것입니다.
9:15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4. ‘돈’의 신학?주는 것 / 연보 / 헌금
‘돈’의 신학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이 정리되어야 우리의 신앙이 제대로 성장하게 되어있습니다. 돈 특별히 여기서 언급하는 돈은 ‘주는 것 혹은 베푸는 것’이고 ‘연보’?후함을 의미하는?이며, 이것은 나아가 오늘날의 ‘헌금’이란 개념과 연관될 수 있습니다. 아니, 본래 신약적으로 헌금의 의미가 이런 것이란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A. 감사보다 기쁨에서 나와야 참 헌금이다(9:7).
9장 7절에서 바울 사도가 언급했습니다.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하라는 말은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생각해서 마음을 먼저 정하여 헌금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충동적으로 하게 되면 많이 할지는 몰라도 시험에 들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해야한다는 것은 ‘인색하게’ 계산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6절의 말씀이 이것을 설명합니다. ‘적게 심는다’는 말은 ‘인색하게’ 심는다는 말입니다. 그 반대는 ‘풍성하게’ 심는 것입니다. 그런 자는 풍성히 거둡니다. 왜 심고 거둠의 원리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까? 궁극적으로 ‘베푸는 것’은 은혜의 황금사슬에서 보여주는대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내지도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강요받아서 내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부흥회에서는 이런 식의 강요가 무비판적으로 행해지는 것을 봅니다. 성경에서 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많이 내는 자’를 사랑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많이 내는 자’를 사랑할지 모릅니다. 목사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많은 지혜로운 목사님들의 충고를 들어 저는 개개인의 헌금을 보지 않습니다. 저에게도, 여러분에게도 유익한 것이 될 것입니다.
‘즐겨 낸다’는 표현은 헌금을 드리는 동기의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즐거움과 기쁨으로부터 헌금을 내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이 기쁨은 감사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감사는 과거와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신앙적 태도입니다. 하지만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서 헌금을 드리는 것이 강조된다면 베풀게 되는 것이 자칫 ‘하나님은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선하신 분’이라는 내용보다도 더 ‘감사하는 우리의 도덕적 자질’의 표현이 될 수 있어서 ‘자기의’로 빠질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헌금의 우선적 동기로 ‘기쁨’과 ‘즐거움’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B. 헌금은 믿음의 표현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과 행하고 계시는 일, 그리고 행하실 일로 인해서 우리가 여전히 만족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을 향한 지속적인 신뢰이다.
헌금은 우리의 믿음이 참된 믿음임을 증거합니다. 우리가 지금 현재 가지고 있는 돈으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 신앙이고,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과 행하고 계시는 일, 그리고 행하실 일로 인해서 우리가 여전히 만족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을 향한 지속적인 신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언제나?과거와 현재와 미래에도?채우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베풂은 믿음의 표현입니다. 풍성한 나눔, 넘치는 연보는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표현으로서의 헌금은 앞에서 말한 감사의 표현으로서의 헌금과도 큰 대조를 드러냅니다. 과거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서 하는 헌금은 자칫 우리의 물질의 ‘잉여분’(surplus)을 가지고 드리기가 쉽습니다. 남는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연보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믿음의 연보가 되기 위해서는 미래의 삶에 대하여 하나님께 대한 신뢰로부터 드려져야 합니다. 이것은 더 많은 돈을 축복으로 얻기 위해서 좀 더 투자를 하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태도가 오늘날 만연하고 이런 것을 조장하는 교회 지도자들도 있습니다마는, 매우 비성경적 동기, 다시 말하면 돈을 사랑하는 동기로, 돈을 더 얻기 위해서 주식을 사는 것처럼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되기에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고 그들의 신앙과 무관한 것이며, 영적으로 유익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헌금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헌금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많아서 감사하여 드린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누리고 있으며,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고 하나님 안에서 기쁘기 때문에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것이 감사해서 드리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기 때문에 드리는 것입니다.
C. 헌금은 사랑의 표현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들에게 언제나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의 흘러넘침이다.
헌금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두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늘 채워주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나에게 후하신 하나님, 나의 필요를 늘 후하게 채우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쁨이 흘러넘치게 되면 우리는 ‘의무적으로’가 아니라 ‘기쁨으로’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실제적인 무엇인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베풀라는 요청은 우리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신뢰함으로써 돈과 자신에 대한 우상숭배로부터 벗어나라는 요청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돈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에 관한 말씀인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To talk about money is to talk about God).’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 넘치는 은혜, 풍성한 은혜를 저희 모두에게 베푸심으로 우리가 후하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며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되는’ 이 은혜의 황금사슬을 참으로 경험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를 주시기를 구합니다. 아멘.
은혜의 일
고후 8장 16~24절 / 김창인목사
"이뿐 아니라 저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우리의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19절)
우리가 종종 듣는 이 "은혜"라는 단어는 "카리스"라고 하는데, 그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첫째는, 기쁘다 혹은 기쁨이란 뜻이고 둘째는, 선물이란 뜻이며 셋째는, 매력이란 뜻이 있습니다. 은혜를 기쁨이라 할 때, 은혜를 받으면 기쁨이 샘솟을 만큼 충만해집니다. 이 기쁨은 은혜의 내용을 말합니다. 선물이라 할 때는, 은혜 받는 방법에 있어서 은혜를 값없이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은혜의 결과가 매력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예수님을 아주 매력이 없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하나님에 대해서도 매력이 없었는데 은혜를 받은 후에는 예수님이 매우 매력적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도 아주 매력이 있습니다.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삶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결과로 이런 매력이 생기게 됩니다.
I. 감사하는 일(16-17절)
16절과 17절 사이에 보면 "감사"라는 말이 나오는데, 은혜받고 할 일은 먼저 감사하는 것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16절)
은혜를 받은 사도 바울은 제일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무엇 때문에 감사하다고 하는 것입니까? 디도라고 하는 사람은 바울과 똑같은 간절한 마음이 있는데 그 간절한 마음은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디도가 결심하여 만들어 낸 마음도 아니고, 훈련함으로 얻어진 마음도 아니며, 인간의 훈련이나 결심에 관계없이 하나님이 그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간절함이 있을 때, 그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디도의 마음속에 바울과 똑같은 간절한 마음이 있는데, 하나님이 그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주정 신학자는 "간절"이란 말을 "열심"으로 바꾸어 생각하기도 합니다. 본래 간절하다는 뜻은 "속도를 낸다", "속력을 낸다"는 말입니다. 또 서둔다는 뜻도 있습니다. 간절하다는 말을 쉽게 풀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주일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 예배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은 속도를 냅니다. 재촉하고 서두르는 것입니다. 꾸물거리지 않습니다. 교회에 가서 앞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재촉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열심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간절함이 없는 사람은 예배 도중에 들어와서 축도 할 때 나가버리고 맙니다. 이 사람들은 예배를 안 드리려고 하니 괴롭고, 드리려니 지루하여 설교만 듣고 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예배를 마친 후에 등록하라는 것이 귀찮으니까 설교 시간에 나와 뒤에 앉았다가 축도 할 때 나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절함이라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것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간절하여 날마다 성경을 펴놓고 늘 상고하였습니다. 간절한 사람들은 성경을 읽는 데도 간절합니다. 설교를 듣는 데도 간절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땀을 흘리고 힘쓰며 애써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도 간절해야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이 간절함이 없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간절함이 생길 때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간절함은 우리의 결단이나 훈련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간절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이 생기면 자세가 달라지고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 첫째 할 일은 감사할 일인데, 그 감사의 조건은 간절한 마음이며 이 마음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므로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② 순종함에 감사
"저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17절 상)
여기 권함을 받았다고 하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바울과 디모데는 지금 마케도니아에 있습니다. 고린도에 가려면 며칠 걸립니다. 그러나 고린도로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어서 그 곳 교인들이 굶으며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퍼져 나와 우리에게 그 복음이 전파되어, 신령한 것을 받아 신령한 것으로 빚졌으니 당연히 우리가 그들을 위해 헌금을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디도를 책임자로 세웠습니다. 헌금을 걷으러 가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에서 헌금하자고 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하물며 멀리 있는 교회에 가서 헌금을 하게 하고 그 헌금을 가지고 오라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더욱이 고린도 교회는 편하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 싸우는데, 바울이 고린도로 간다면 쫓겨올 형편이어서 갈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디도로 하여금 수습하게 하였습니다. 아무도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구제금 모금을 위해 디도를 또 보내려고 합니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가지 않겠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디도는 바울이 권할 때 그 권함을 받고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일이라면 어떠한 일을 시켜도 감당하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이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면, 나를 필요로 한다면 가겠습니다."하는 자세입니다. 순종! 우리의 믿음에서 순종을 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에게 그의 믿음 생활을 위해 그의 고향을 떠나라고 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가야 할 곳을 알려 주셨습니까? 무조건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이라고 미리 알려주셔서 아브라함이 그 땅의 지리나 풍습, 기후 등을 다 알아본 후에 갈만한 곳이면 가겠다고 하였다면, 지금도 못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떠나라"하면 "떠나겠습니다"하는 자세였는데, 이것은 모험이었습니다. 그리고 백 살에 얻은 아들을 "바치라"하면 바치려는 자세였습니다. 그 당시에 여러 명의 첩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한 명의 첩을 통해 한 아들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쫓아내라고 하셨을 때, 울며 사정할 수 있었지만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하라 하면 반대 없이 모두 순종하였습니다. 믿음의 별명은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순종을 빼고 난 믿음은 껍데기뿐입니다.
본문에도, "무슨 일이든지 간에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내가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자세가 순종입니다. 순종하는 믿음과 자세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순종함에 감사를 드려야겠습니다.
③ 자원봉사 함에 감사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17절 하)
자원봉사라는 말은 참 좋습니다. 어떤 사람은 누가 시키니까 할 수 없이 하기도 하며, 시켰을 때야 하려는 자세를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억지 봉사도 좋고, 거절할 수 없어서 하는 봉사도 좋고, 누가 해주었으면 할 때 지적을 받고 봉사하는 것도 좋습니다.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검둥이 시몬이 수천리의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자신이 못 박힐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쓰러지곤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죄를 지었으며 못 박혀 죽는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창피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꾸 쓰러지려니까 로마 병정들이 그 검둥이를 붙잡아 위협을 하면서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게 하였습니다. 억지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 로마서 16장에 보면, 바울 사도가 로마 교회의 훌륭하고 귀한 분들에게 문안하는 귀절 속에 루포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고 하면서 그녀가 곧 바울 자신의 어머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서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모습을 보고, 가족에게 돌아가서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하고, 로마에 가서 그의 아내와 아들이 로마 교회를 세우는데 어머니 구실을 하게 한 것은 바로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봉사하여 받은 축복입니다. 귀한 축복입니다.
억지로 봉사하고도 많은 축복을 받았다면 자원하여 봉사하는 것이 얼마나 더 귀하겠습니까. 일감을 찾아 그 일을 자기 일로 알고 하는 자원 봉사를 하여야 합니다. 디도는 자원하여 그 어려운 일에 봉사하려고 하였습니다. 누가 여비를 주는 것도 아니며 고생은 고생대로 하는 일에 자원봉사 하였습니다. 이런 것이 내가 결심해서 되는 것입니까? 자원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먼저 감사를 하였습니다. 간절한 마음, 순종하는 마음, 자원하는 마음이 있을 때 감사하였습니다.
II. 영광 되는 일(18-22절)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그 일이 하나님 앞에 영광스러운 것이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항상 표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다고 생각되면 하고, 저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된다고 생각되면 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이 말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그 말을 하고 싶어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듯 은혜를 받은 사람이 두 번째 해야 할 일은 영광 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① 칭찬의 영광
우리가 칭찬을 많이 받을 때에 그것이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서 남에게 욕을 들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합니다. 칭찬을 받으므로 얻게 되는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18절에 "또 저와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칭찬을 받는다고 하였습니까. 복음으로 칭찬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구제함으로써 칭찬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길 모르는 사람에게 친절히 안내해 주며 직접 집까지 모셔다 드림으로써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칭찬을 받는다고 하는 말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가 복음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데 얼마나 열심으로 전하는지 그가 속한 교회에서 그를 따를 자가 없습니다. 복음을 위해 희생하며 봉사하는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칭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도둑놈에게 욕을 먹는다고 영광이 안 된다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에게서는 욕을 먹을수록 영광이 됩니다. 그들이 같이 도둑질하자고 할 때 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들은 욕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욕을 먹어서 영광이 되는 것보다는 착한 사람, 정상적인 사람에게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밖에서는 칭찬을 받는데 교회에서는 칭찬을 받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복음으로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이뿐 아니라 저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우리의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19절)
즉 이 사람은 교회의 대표자가 될 만큼 칭찬을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훌륭하다고 칭찬을 받아도 다른 교회에서는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기록된 사람은 모든 교회의 택함을 받을 정도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은혜를 맡은 일에 우리와 동행하는 자란 무엇을 가리키는 말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바울 사도와 주의 종을 가리킵니다. 즉, 은혜가 되는 일에는 꼭 주의 종과 동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주의 종과 동행해야 합니다. 주의 종이 모르게 어떤 일을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는 주의 종과 동행하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주의 종들이 칭찬을 해 주었는데 이런 칭찬은 귀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항상 칭찬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② 조심의 영광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20절)
모든 일에 조심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예루살렘을 위한 고린도 교회의 헌금은 거액이었습니다. 이럴 때 디도가 혼자 가서 처리하면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복음으로 칭찬을 받고 모든 교회의 택함을 받은 한 형제를 디도와 같이 보내 일하게 하였습니다. 의심을 받는 결과 훼방을 받게 되므로, 혼자 보내지 않고 두 사람을 보낸 것은 그만큼 모든 일에 조심한다는 말입니다. 선한 일에도 조심을 해야 하는데, 헌금을 걷고 관리하고 구제하는 방법까지도 조심을 해야 합니다. 모든 일을 조심해서 처리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헌금 수납하는 것, 관리하는 것, 쓰는 것에 대해서 일정한 절차를 취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구제할 때에 조심해야 된다고 하는 것은, 구제하여 주면서 싸움이 일어나게 하여 사람을 잃어버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가 구제 때문에 유대파와 헬라파로 나뉘어 싸우고 말았습니다.
며칠 전, 제직 한 분이 신장염에 걸렸는데도 돈이 없어서 병원에 입원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새벽 기도 시간에 광고는 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 이렇게 불쌍한 집사 한 분이 있으니 축복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어떤 분이 돈을 가지고 와서, 절대로 이름을 밝히지 말고 입원비에 보태도록 해 달라고 하여서 그 돈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병이 나아서 퇴원을 했습니다. 그래서 퇴원한 후에 어떤 분이 이름 없이 돈을 주었는데, 그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고 감사는 하나님께 하도록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일이 왼 손이 하는 것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졸업반이면서 등록금이 없어서 등록을 못하는 한 신학생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내 사정으로는 도와줄 여유가 없어서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구역회를 마치고 나갈 때 구역장 한 분이 나를 찾아 왔습니다. 그분이 돈을 좀 내어놓으면서 필요한 분에게 전하여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면, 신학생에게 등록금으로 주어도 되겠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신학생에게 직접 전달할 것을 말씀 드렸을 때, 그분은 저더러 알아서 해주기를 부탁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 학생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름 없이 도움을 준 그분을 위해 기도하여 줄 것을 부탁하였는데, 그 다음 해 졸업을 하고 고마워 하면서 시골로 내려갔습니다.
우리는 구제할 떼 조심을 해야 합니다. 구제하고 영광을 내가 받지 말고, 또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여야 합니다. 사람을 보내어 같이 일하게 하며 구제하는 일들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해야 합니다.
③ 합격의 영광
"또 저와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 우리가 여러 가지 일에 그 간절한 것을 여러번 시험하였거니와 이제 저가 너희를 크게 믿은 고로 더욱 간절하니라"(22절)
대학 입학 예비고사를 잘 보고 대학에 들어가면 얼마나 기쁘고 영광스럽습니까. 대학교에 들어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험을 치릅니까? 이런 시험들을 거친 후에 합격되면 영광입니다. 바울 사도가 두 사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끼고 한 사람을 더 보내려고 하여, 그 사람을 시험하여 열심이 있는지, 얼마나 간절한지를 알아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 교회에 나와서도 열심을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럴 때면 목사는 주의 깊게 관찰합니다. 저 열심이 얼마나 오래 갈까? 이렇게 관찰한 후에 틀림없다고 생각되면 그 사람은 꼭 열매를 맺습니다. 본문에도, 또 다른 사람을 보내는데 그 사람이 얼마나 열심이 있는지 여러 가지로 시험을 하여 그 열심이 진실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주님도 우리의 열심, 믿음, 그 밖의 모든 것을 여러번 시험하십니다. 이 시험에서 합격되는 날, 주님이 우리를 주의 일에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쓰실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영광 되는 일입니다.
III. 자랑하는 일(23-24절)
은혜를 받으면 자랑을 해야 합니다. 자기를 높이고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① 동역자 자랑
다른 말로는 교역자라는 말입니다.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23절 상)라는 말씀 속에서 바울은 디도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디도는 본래 헬라인이요,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며 안디옥에서 살다가 바울의 전도를 받고 예수 믿고 훌륭하게 믿음이 자라났습니다. 이제는 바울과 같이 전도하러 다니는 동역자, 교역자입니다. 그리고 디도를 고린도에 보내면서 많은 칭찬을 해서 보내었습니다. 이렇듯 은혜를 받은 사람은 교역자를 자랑합니다. 교역자를 칭찬하지 않고 헐뜯기만 하면, 1년 52주 교회에 나와 앉아 있어도 말씀의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바울 사도는 디도를 자랑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② 형제 자랑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23절 하)
이 말씀은 디도와 함께 보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마케도니아 교회의 대표자가 아니라 그 지방 여러 교회의 대표자로서, 저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아무개가 우리 교회에 있다는 것이 영광입니다. 이것을 부흥회에 가서 말하게 도리 때 얼마나 큰 영광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교회에 훌륭한 사람이 있을 때 자랑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③ 교회 자랑
"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에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저희에게 보이라"(24절)
즉,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자랑입니다. 우리의 자녀 중에 제 집을 헐뜯고 다니는 자식이 제대로 된 자식입니까? 자기를 낳아 주고 키워 주신 것만도 감사한데 부모와 가정에 대해 불평하고 다닌다면 잘못된 자식입니다. 그러므로 제 집과 부모를 자랑하고 다니는 것이 옳은 것처럼 믿는 우리는 자기의 교회를 자랑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교회를 자랑하고 다닙니다
성도가 은혜를 바로 받았으면 은혜의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은혜의 일은 감사하는 일입니다. 감사는 은혜 중의 가장 좋은 은혜입니다. 다음에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손해가 되어도 영광이 되는 일은 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자랑하는 일입니다. 교역자를 자랑하고 교회를 자랑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은혜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으로서 칭찬 받는 일군입니까
고후08장 16~24절 / 이삼규목사
지난 25일 오전 9시9분쯤 서울 영등포구 경부선 영등포역에서 열차운용팀장 김행균씨(42)는 오전 9시 서울역을 출발해 부산으로 가는 새마을호 제11호 열차가 영등포역에 정차하기 위해 진입하는 순간 하행선 플랫폼 중간 안전선 밖으로 나가 놀던 10살쯤의 어린이를 목격했습니다.
김씨는 곧장 달려가 이 어린이를 홈 안쪽으로 밀쳐냈습니다. 하지만 김씨는 이 순간 기우뚱하면서 몸의 중심을 잃고 선로로 떨어졌고 때마침 진입하던 열차를 피하지 못해 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김씨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왼쪽 다리 발목과 오른쪽 다리 발등 아랫부분을 절단당하는 중상을 입었으면서도 의식을 회복하자마자 “아이는 어떻게 됐나요?”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아이와 부모는 나타나지도 않았고 안부전화 한 통화도 없다고 합니다. 김행균씨의 살신성인의 모습을 보면서 삭막한 세상이지만 이런 귀한 사람도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정말로 칭찬의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세상의 직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도 이토록 자기의 몸을 던져 세인들로부터 칭찬을 듣는데 복음의 일군된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세 사람의 일군을 소개합니다. 이들은 한 마디로 말해서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일군들"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일군 즉 복음의 일군으로서 칭찬을 받고 계십니까? 복음으로서 칭찬받는 일군은?
1. 하나님께서 주신 섬김에 대한 간절함을 가진 일군입니다(16-17절).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소개하는 첫 번째 일군은 디도라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디도를 어떻게 소개합니까?
고후 8:23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1)나의 동무-디도를 '나의 동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디도와 바울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한가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동무'라는 뜻은 동료, 파트너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보통 어렸을 때부터 사귀는 친밀한 친구를 부를 때 '동무'라고 부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디도는 그런 친밀감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2)나의 동역자-'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디도는 바울과 함께 주님의 교회인 고린도교회를 위하여 수고하는 동역자였습니다.
3)교회의 사자-'사자'라는 본래 단어의 의미는 '사도'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각 교회의 지도자로서 특히 구제를 위한 연보를 관리하는 일군으로 임명되었음을 말씀합니다.
4)그리스도의 영광-이들의 빛나는 업적 때문에 주님께 영광이 돌아갔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귀하게 소개한 디도에게 있었던 특징이 무엇이었을 까요? 그것은 '간절함'입니다. 간절함이라는 말은 '스푸데'라고 하는데 이 말은 '스퓨도'(서두르다, 재촉하다)라는 말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간절함이라는 말은 어떤 일에 대한 열정을 의미합니다.
고후 8:16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후 8:17 저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바울은 디도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같은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가진 열정을 디도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어떤 열정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려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려는 구령의 열정이 있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려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열정이 디도에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열정을 주시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디도의 마음에 불붙는 뜨거운 열정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속에 있는 열정이 디도의 마음에도 있었는데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더욱 간절함이 디도에게 있었다고 말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이 칭찬 받는 일군이 되고 싶습니까? 디도가 가진 열정이 필요합니다. 열정을 가진 사람만이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뜨뜻미지근하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간절함 곧 열정이 필요합니다.
영국에 매리 존스라는 시골 처녀가 있었습니다. 매리는 남의 집 가정부 일을 하며 푼푼이 돈을 모았습니다. 그녀가 돈을 모은 것은 한 가지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제 평생 소원은 성경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어요”
마침내 매리는 성경을 살 만큼의 돈을 모았습니다. 그녀는 무려 40㎞를 달려가 성경을 구입했습니다. 매리에게 성경을 판 사람은 그녀의 순수한 신앙, 성경을 사랑하는 마음에 감동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영국의 기독교인들이 이 소식을 듣고 성경을 싼값에 구입할 수 있는 기관설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였습니다. 그 결과 영국성서공회가 설립됐습니다.
한 소녀의 작은 열정이 전세계에 성경을 보급하는 운동을 펴는 성서공회를 탄생시킨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위대한 일은 소수의 작은 열정에서 시작됩니다.
롬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비록 달란트가 부족하고 미숙하다고 하여도 열정을 가진 사람이 인정받는 일군이 될 수 있습니다. 한달탄트 받은 일군은 한 마디로 열정이 부족하였던 것입니다. 달란트는 사용할수록 늘어나게 됩니다. 여러분이 칭찬 받는 일군이 되기를 원합니까? 열정을 가지십시오. 큰 일을 하는 사람은 항상 열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2.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열망을 가진 일군입니다(18-21절).
고후 8:18 또 저와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고후 8:19 이뿐 아니라 저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우리의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구제헌금을 위해 디도 외에 두 사람을 더 보냈습니다. 18절에 소개되고 있는 '한 형제'가 누구인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사람이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은 일군이라는 점입니다. 특히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로부터 신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으로서 칭찬을 받는 자'라는 말을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복음을 전하는데 명성을 떨친 사람'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무명의 일군은 복음의 분야에서 수고가 두드러진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을 확장하는데 수고하고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은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은 사람입니다. 마게도냐 지방에는 여러 교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선교사역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들로부터 칭찬을 받은 일군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교회에서 칭찬 받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 교회가 칭찬을 하였다는 것은 그 이름만 대에도 금방 알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디도에게 바울이 가졌던 뜨거운 열정이 있었던 것처럼 이 무명의 일군에게도 바울사도가 가진 동일한 주의 영광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사람도 바울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열정이 있었던 것처럼 그런 동일한 열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바울에 의해 선택된 것이 아니라 여러 교회에 의해서 선택되었으며 이 선택 방법은 교회들에 의한 공식적인 투표에 의한 것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택함을 입어"라는 말은 동사 케이로토네오인데 이 말은 케이르( , 손)와 테이노( , 뻗치다)에서 유래하였는데 아테네인의 집회에서 통상적으로 행해졌던 바와 같이 '거수로 투표하다', 또는 '선거하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선택받은 사람이 공신력있는 인물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이 사람이 마게도냐의 교인들로부터 뽑힌 대표자일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것은 이미 마게도냐 교인들은 구제를 위한 모금이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그 모금된 돈을 디도와 함께 운반하고 보호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고후 8:20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고후 8:21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디도와 함께 하는 이 무명의 일군에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이었습니까? 거액의 연보를 관리하는 것입니다. 적은 액수가 아니고 거액이기 때문에 관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거액의 연보를 바르게 관리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사용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물질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그런 열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칭찬 받는 일군이 되기를 소원하십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열정을 가지십시오. 그렇게 될 때 성도들로부터 인정을 받습니다. 이 사람이 교회의 택함을 입었다는 것은 성도들이 그를 그토록 신뢰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칭찬받는 일군이 된 것입니다.
3.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정직함을 인정받는 일군입니다(22절).
고후 8:22 또 저희와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 우리가 여러 가지 일에 그 간절한 것을 여러 번 시험하였거니와 이제 저가 너희를 크게 믿은 고로 더욱 간절하니라
바울은 여기에 또 하나의 일군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사람도 그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아서 그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한 형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그가 드로비모 또는 두기고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확실치 않습니다.
이 사람은 여러 차례에 걸친 시험에서 증명될 만큼 열성을 가지고 있었고 더욱이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였기 때문에 이번 일에 동행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일군을 세우는데 있어서 무조건 세우지 않고 여러 가지 일로 시험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시험에 합격하여 신임할 수 있는 일군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은행이나 금융기관에 근무하는 사람은 부지런해야 합니다. 자기가 할 일을 뒤로 미루는 사람은 자격이 없습니다. 기억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 날 그 날 수입과 지출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는 기억이 희미해져서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그 날 처리해야 하는 것은 그날 처리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 회계를 보시는 분들을 저는 칭찬하고 싶습니다. 항상 결산이 끝나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산화가 이루어진 덕분도 있지만 과거에 전산처리를 하지 않을 때도 우리 회계를 맡은 장로님은 정확하게 처리를 하였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항상 재정관리가 투명해야 합니다. 언제 장부를 보아도 명확한 결산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열정이 없는 사람은 그 일을 뒤로 미룹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 기억이 희미해집니다. 그러면 대충 기록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맞지 않습니다. 그것을 맞추려면 밤을 꼬박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맞추어지면 다행이지만 그래도 맞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만일 이런 분이 교회 살림을 맡아서 관리한다면 문제가 많을 것입니다.
바울이 디도와 함께 보내는 일군은 여러 번 테스트를 거쳐서 인정을 받은 사람입니다. 특히 정직함에 인정을 받은 사람입니다.
재미 사업가인 백영중이라고 하는 분은, 현재 미국의 '강철왕'이라고 별명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그가 쓴 책이 "나는 정직과 성실로 미국을 정복했다"라고 하는 이름의 책이 있습니다. 원제목은 입니다. 참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패코스틱이라고 하는 큰 회사의 회장인데, 아이빔(I-beam)을 생산 판매해서 연 매출액이 2억 불을 넘는다고 합니다. 경량철골 관계에서는 시장 점유율이 60%를 차지하고 있는 큰 회사의 회장이 되었습니다. 이 백 회장은 북한 선천에서 태어났고, 홀홀 단신 혼자서 월남을 해 가지고 남한에서 살아보려고 하다가 잘 안 돼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미국에 건너가서 많은 고생을 하게 되었고 이제는 자수성가하여 강철회사 회장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주어서 좋은 분들을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좋은 기회를 주신 것을 늘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너무 고달프고 어려울 때, 식당에서 일을 할 때, 그 어려운 가운데서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북에서 쫓겨나 남에서 못 살고 미국에 왔는데, 이 이상 더 물러설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오직 성실과 정직을 삶의 모토로 삶고 살아왔습니다. 노 머니 노 잉글리시(No Money No English), 돈도 없고 영어도 못한 사람이지만 그런데 대 기업의 회장이 된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된 것은 그의 열정과 정직이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복음으로 칭찬 받는 일군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섬김에 대한 열정이 있는 일군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열망을 가진 일군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정직함을 인정받는 일군이 되어야 칭찬 받는 일군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복음으로서 칭찬 받는 귀한 일군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칭찬과 자랑
고후 8:16~24 / 조재호목사
자랑은 바르고 적절할 때 빛을 발하고 칭찬도 바르고 적절할 때 빛을 발합니다. 다른 사람을 객관적으로 자랑할 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칭찬이 따라 나오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자랑하고 칭찬하는 것을 들으며 샘이 나고 못마땅해서 입이 돌아가고 마음이 돌아가는 사람은 미숙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모범으로 들어 소개하고 칭찬할 때, 그것을 신앙적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며 ‘나도 저렇게 돼야지’ 생각하는 사람은 개방적인 사람이고 성품과 삶이 아름답게 발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무시하고 못마땅하게 여기고 귀와 마음을 막는 사람은 폐쇄적인 사람이고 성품과 삶이 아무리 좋은 것을 보고도 발전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는 개방적인 교회, 성품과 신앙과 삶이 긍정적으로 발전하는 사람들로 날마다 가득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1. 본문 말씀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세 사람을 소개하며 자랑하고 칭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 당시 유대에 있는 예루살렘교회는 모 교회나 다름없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며 ‘절대로 흩어지지 말라. 모여 기도하라. 성령의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셨고 이 말씀을 들은 11제자들을 포함한 120명의 성도는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마음을 같이 하여 온전히 기도에 힘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고 돌아가신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던 날, 모여서 기도하던 곳에 하늘이 열리고, 급한 바람과 불이 임하고 모든 사람이 성령 충만을 경험하고, 각종 방언으로 전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어머니(모) 교회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십자가 복음에 확신이 있는 교회, 부활의 능력을 체험한 교회, 성령 충만한 뜨거운 교회, 영적으로 뜨겁고 힘있는 교회였으나, 재정적으로는 연약한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재정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영적으로 뜨겁고 확신 있는 교회가 좋겠습니까? 아니면 재정적으로는 부유하지만 영적으로 식어가고 믿음의 확신도 활동도 미미한 교회가 좋겠습니까? 하나님은 어느 교회를 기뻐하시고 복음의 일군으로 값있게 사용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요한계시록 2장에서 서머나교회을 향하여 “내가 너의 환란과 궁핍함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3장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발가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제3세계 신생교회들, 아프리카 교회들, 중국의 가정교회 조선족교회들 재정적으로는 가난한 교회이지만 영적으로는 뜨거운 부자 교회들입니다
우리가 재정적으로 우월하다고 자만에 휩싸이고 잘못해서 안주하게 되면 곧 뒤쳐집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일하심과 성령의 역사는 시대를 따라 지역을 따라 옮기시는 것을 봅니다.
소아시아에 개척된 많은 교회들이 구제헌금을 해서 모교회인 가난한 예루살렘교회를 많이 도왔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구제헌금을 모아 받아오기 위해서 고린도교회로 세 사람의 귀한 일군을 보내는 것입니다.
2. 사도 바울은 이 세 사람에 대하여 그들의 믿음을 자랑하고 그들의 헌신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디도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디도는 3명 중 대표자입니다. 디도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으로 바울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전도자입니다.
먼저 바울은 디도를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간절한 마음을 디도에게도 주셨다’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에게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16)
간절함이란 무엇입니까? 원어의 폭넓은 뜻은 ‘열심 열성 노력 근면 부지런’ 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디도에게 있는 간절함, 열심 열정 노력 근면 등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디도에게 있는 간절함은 다른 사람의 강요나 설득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디도에게 있는 간절함은 훈련이나 임명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간절함이고 하나님의 일을 위한 것이고 교회를 위한 것이고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며 자원하는 마음이고 꾸준한 마음이고 열심 있는 마음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주신 간절함으로 해야 그것이 신앙적인 열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 간절히 기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눅22:44)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들을 때에 간절한 마음으로 듣고 날마다 그 마음으로 성경 읽었습니다. “베뢰아 사람은...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행17:11)
은혜를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에 임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주실 것이고 주님만을 위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교회 헌신 할 때, 남이 모르는 기쁨과 보람을 주실 것이며 나라를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맡겨진 일을 감당할 때,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 낼 것입니다.
우리 안에, 교회 안에 사라져 버리는 간절함을 하나님께서 다시금 성령의 은혜로 채워주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사람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제2의 인물입니다. 디도와 동행한 교회의 일군입니다. (18-19)
“또 저와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18)
두 번째 사람은 교회와 사도 바울의 신뢰를 받고 인정받고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교회의 택함을 받고 은혜의 일을 함께 하게 된 사람이고 복음으로서 칭찬을 받는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칭찬을 받을 만한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국가적으로 공로를 세워 온 국민이 칭찬을 하려면 나라에서 훈장을 줍니다. 월드컵 히딩크 감독과 태극전사들에게 훈장을 주어 칭찬했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칭찬해 주기 위해서 상장을 줍니다. “달리기 잘했다”(체육상), “남을 잘 웃겼다”(화목상), “늘 청소를 잘했다”(봉사상), “공부 잘했다”(우등상), “비행기 만들기 잘 해서 오래 날렸다” (과학상), “소풍가서 춤 멋있게 잘 췄다”(예술상) 등등
두 번째 일군은 주님이 맡기신 일로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잘) 섬기는 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롬14:18)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자기가)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고후10:18)
그는 모든 교회로부터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신뢰해주고 인정해 주는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듣는 일은 참으로 복되고 행복한 일입니다.
지방의 어느 시는 ‘찬찬찬 운동’을 벌여 하루에 3번 이상 남을 칭찬합니다. 겉치레가 아닌 인정과 칭찬은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우리가 둘째 손가락으로 상대방을 향하여 무섭게 지적하고 공격을 가할 때 나의 나머지 세 손가락을 자신을 가리키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을 비난할 때 자신의 똑 같은 잘못에 대하여는 눈을 감게 됩니다.
성도들 간에 복음의 일로 서로 인정하고 서로 칭찬하는 분위기와 문화로 만들어 가기를 기도합니다.
세 번째 사람도 역시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제3의 인물입니다. (22)
이 사람은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았더니 물질을 탐하지 않는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이고 이 일에 믿음직한 일군이라는 것입니다.
재물은 우리를 시험할 때가 많습니다. 혼자 정하고 혼자 허물어뜨릴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 헌신하다 보면 많은 시련과 시험이 옵니다. 그는 여러 가지 시험을 받았지만 잘 견디고 이긴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한 헌신자의 속마음의 진실은 시험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시험은 믿음을 단련합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의 결론을 24절에서 맺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의 신실한 일군들을 대할 때, 사랑으로 대하고 우리의 자랑과 칭찬이 사실임을 교회 앞에 드러내십시오’
다른 사람을 인정합시다! 다른 사람의 열심과 헌신을 칭찬합시다! 하늘로부터 오는 주님의 인정과 칭찬을 사모합시다!
보배로운 하나님의 사람
고후 8장 16~24절 / 지용수목사
바다의 고래도 쓰다듬어 주면 좋아합니다. 돌고래 쇼를 보면 조련사 아가씨가 고래에게 뽀뽀도 해주고 쓰다듬어 주기도 합니다. 미련한 소도 쓰다듬어 주면 좋아합니다. 개도, 말도 만져주고 쓰다듬어 주면 행복해 합니다. 고양이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고양이는 털의 결을 따라 쓰다듬어 주어야 좋아하지, 결을 거슬러 쓰다듬어 주면 오히려 화를 내고 계속 거스르면 발톱으로 할퀸답니다.
사람도 쓰다듬어 주면 좋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쓰다듬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와 축복을 받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스르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과 반대로 하시는 것 같습니다. 몸과 마음이 아프고, 부부 사이에 아픔이 있고, 자식 때문에 아프고, 하는 일이 되지 않아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일이 몇 달 또는 몇 년 이어지면 우리는 “하나님, 왜 이러시는 겁니까?”하며 화를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때 이렇게 말씀하신답니다.
“얘야,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네가 방향을 바꾸어라.”
하나님께서는 늘 은혜를 주십니다. 늘 복을 주십니다. 늘 지켜주십니다. 민수기 6장 24절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은혜와 복만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방향을 거꾸로 하여 누워 있으니, 불순종하고 불평하고 교만하니 괴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하고 감사하고 겸손한 방향으로 누워 있으면 주님께서 언제나 은혜로운 손길로 쓰다듬어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위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This is God's will for you in Christ Jesus.)』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안에서 너희를 위한’
‘너희를 위한(for you)’입니다. 감사하면 우리에게 복이 되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든지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가이드 포스트지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한 미국인 남자의 온 몸에 암세포가 퍼졌습니다. 수술도 할 수 없게 되었고 어떤 항암 치료도 효과가 없었습니다. 6개월 안에 죽을 것이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마음이 착잡했지만 어차피 죽을 것인데 조금 일찍 죽는 것뿐이니 마음을 크게 먹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천국에 가게 되니 감사할 일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아직 6개월이나 살 날이 남았으니 감사합니다.”하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내가 6개월 후에 죽게 되었다고 슬퍼하지 말아요. 그리고 나를 죽을 남편 취급하지 말아요. 나는 앞으로 180일이나 더 살 것이니 살아 있는 남편으로 생각하고 감사해요.”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아직도 제가 살 날이 150일이나 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직도 제가 살 날이 100일이나 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매일 기도했습니다. 6개월이 다 된 날 그는 “하나님, 이제 오늘 하루를 살고 천국에 갈 것이니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죽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날 그는 “하나님, 하루를 더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열흘을 더 살았습니다.
“하나님, 10일을 더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2년을 더 살았습니다.
“하나님, 2년을 더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 미국인이 아직도 살아 있답니다. 감사하고 즐거워하니 암의 뿌리가 뽑힌 것입니다.
황수관 박사님이 우리 교회에 오셔서, 몸에 암 세포가 있어도 즐거워하고 기뻐하면 암이 없어진다는 의학계의 보고가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감사가 우리에게 얼마나 복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감사거리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자식에게서나 감사할 거리, 감사할 제목을 찾아서 감사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사과나무는 언제나 사과를 맺듯이, 우리는 항상 감사만 하는 감사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는 우리는 감사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대구에 세 식구가 사는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정육점을 개점하려고 준비를 다한 후 대청소를 했습니다. 마지막 청소를 끝낸 후 아들이 손을 씻으려고 수돗물에 손을 넣는 순간 고기 절단기의 220V 전선이 땅에 떨어져 아들이 감전되어 붙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떼어내려고 아들을 붙잡았는데 아버지도 거기에 붙었습니다. 그러자 부인이 남편과 아들을 살리려고 남편을 잡아당기니 부인도 거기에 붙고 말았습니다. 결국 어머니와 아들은 죽고 아버지는 중태에 빠졌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불행한 일이 그 집을 덮쳤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예상치 못한 일이 옵니다. 교통사고로, 천재지변으로, 병으로 쓰러지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지금 일본은 지진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험한지 모릅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사명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조지 워싱턴 장군은 무시무시한 살육전이 전개되던 브레딕 전투에서도 살았습니다. 그 전투에 참전한 군인들이 거의 다 쓰러져 죽고, 그의 말도 총탄에 쓰러져 죽었는데, 그는 살았습니다. 나중에 옷을 벗으니 그의 옷에 총알 자국이 네 개나 있었습니다. 그의 옷에 총알이 네 개나 지나갔는데도 그의 몸은 멀쩡했던 것입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왜 나를 살려 주셨습니까? 왜, 무엇 때문에 나를 살려 주셨습니까?”
그는 하나님께 더 바짝 붙어 하나님을 섬기고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미국을 위해, 교회를 위해 일을 하여 마침내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불평할 이유도 시간도 없고, 감사할 일과 충성할 일만 있는 줄로 믿습니다.
비록 총탄이 쏟아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바로 전쟁입니다. 학교에서도 학생들은 누가 더 많이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가느냐, 대학에 들어가서도 누가 더 앞서서 취직하느냐, 또 취직해서도 거기에서 누가 앞서느냐 하는 경쟁이 치열합니다.
식당을 경영해도 경쟁이 치열합니다. 옆 식당이 잘되면 내 식당이 망할 수 있으니 경쟁이 한이 없습니다. 회사에서나 어디에서나 경쟁심에 한이 없습니다.
이렇게 생존경쟁이 극심한 때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감사한 일이고, 경제가 아주 어렵다고들 하는 이 때에도 굶지 않고 사는 것 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이상의 감사를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받은 복을 하나하나 세어 보며 감사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보다 더 좋은 감사가 무엇인지를 본문을 통해 알려주십니다.
나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감사의 이유가 되는 사람, 감사거리의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할렐루야!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기 전에 ‘추수감사절인데 이 말씀을 전해도 되나? 다른 말씀을 전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며 본문을 여러 번 읽었습니다.
여러 번 읽다 보니, ‘옳거니!’하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도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도와 또 다른 두 사람을 고린도에 보냈는데 그 두 사람 때문에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을 보고 제가 깨달았습니다.
‘디도는 자기만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감사거리를 주는 귀한 사람이구나. 디도 때문에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유럽 교회가 하나님께 감사하는구나. 그래, 나도, 우리 교우들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도 이렇게 되어야지.’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정한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도 감사에 불을 붙이는, 감사를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아들딸이 나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내 부모가 나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내 아내가 나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내 남편이 나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내 친구가 나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내 직장의 상사들이나 동료들이나 부하직원들이 나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를 접하는 모든 사람들이 나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할 때 내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디도와 함께 간 사람이 누구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아볼로인지, 바나바인지, 누가인지, 마가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유럽의 마게도냐 교회에서 아주 귀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알 수가 있습니다. 본문 23절에 보면, 그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사람들에게는 감사거리,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는 귀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사람에게는 감사거리,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는 귀한 그리스도인, 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디도와 그 두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마지못해 한 것이 아니라 자원해서 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17절에 『저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디도에게 “디도, 유럽의 헌금과 고린도 교회의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야 되는데 자네가 좀 수고하게.”라고 할 때, 디도가 “예, 그럼요. 제가 마땅히 가야지요.”하며 바울이 권하는 이상으로 적극적으로 그 일을 즐거워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직장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점심 시간이 아직 안 되었나?’ 점심을 먹은 다음에는 '퇴근 시간이 몇 시간이나 남았지? 이놈의 시간은 왜 이리 안 가나?' 하며 시계나 보는 사람이 회사에서 사랑을 받겠습니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일하는 그 사람이 사랑을 받고 승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찬양대원으로, 구역장으로, 교사로, 차량안내위원으로 봉사할 일을,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기대하는 이상으로 잘하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사람들에게는 감사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를 시작할 때, 저를 아끼고 사랑해 주시는 한 선배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목사님, 일에 시달리면 사람에게 시달리지 않아요. 그러나 일에 시달리지 않으면 사람에게 시달리게 됩니다. 일에 시달리는 것이 쉽지, 사람에게 시달리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목회자가 일에 시달릴 정도로 열심히 일하면 몸은 피곤할지 몰라도 사람에게 시달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오히려 기뻐하며 감사하니 오히려 사랑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일하지 않고 농땡이 치면 몸은 편할지 몰라도 사람들에게 시달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우리 직원들에게 일에는 시달려도 사람에게는 시달리지 말라고 말하곤 합니다.
저는 잠자는 시간과 운동하는 시간 외에는 저의 시간을 목회를 위해 다 쏟는다고 감히 하나님 앞에서 말할 수 있습니다. 어젯밤에도 혼자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번 주간에, 매우 바쁜데다가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서 금요일에는 새벽 3시에 일어났습니다. 또 어제는 우리 교회에 결혼식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밤 11시가 다 될 때까지 말씀 준비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제가 연구실에서 나가야 우리 직원이 교회 문을 닫고 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가려고 일어서니 보안장치의 경보기가 얼마나 큰 소리로 울어대는지 귀 고막이 나갈 것 같았습니다. 제가 연구실에 남아 있는 줄 모르고 우리 직원이 사무실의 보안장치가 작동하도록 설정해 놓고 나간 것입니다. 제가 가만히 앉아 있을 때는 괜찮았는데 제가 일어서니 보안장치가 경보음을 울린 것입니다. 겨우 카드를 찾아 작동을 중지시켰습니다. 그때 바로 보안 회사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무 일 없으니 걱정 말라고, 제가 잘못해서 소리가 났다며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집으로 갔습니다. 평소데는 제가 아무리 늦어도 아내가 안 자고 저를 기다리는데 어제는 무척 고단했는지 자고 있었습니다. 집에 사람이 있어도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으면 집에 들어갈 때 공허합니다. 그러나 어제 저는 ‘하나님께서 나의 이 모습을 기뻐하시겠지?’하며 위로를 받았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어디에서든 위로를 받고, 대접을 받습니다. 그리고 성공합니다.
그리고 디도와 그 두 사람은 교회에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본문 18절에 『이 사람은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복음으로 칭찬을 받는 자.”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복음을 부지런히 전했습니다. 디도와 다른 두 사람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로 소문난 보배로운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세계 여러 교회를 다녀보아도 부러운 교회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만큼 화목하고 좋은 교회, 이렇게 계속 성장하는 교회가 드뭅니다. 또 우리 교회는 밤 예배가 특별합니다. 이렇게 밤에 많이 모이는 교회가 드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말씀이 세계에 퍼져나갑니다. 이번에 제가 뉴욕에 가서 퀸즈 장로교회와 쌍벽을 이루는 퀸즈 한인교회의 집회를 인도하게 됩니다. 그 집회를 마치면 바로 미국 기독교 방송국에서 주최하는 특별 성회의 강사로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우리가 지방에 있으면서도 세계를 품고 일하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또 지난 주일에는 우리 교회가 200명이 넘는 보배로운 항존직분자를 세웠습니다.
모든 일이 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 장로님들이 더 감사합니다. 인격도 귀하고 삶도 귀하지만, 그보다 더 귀한 것은 우리 장로님들이 전도를 많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장로님들은 20명, 30명, 40명씩 전도합니다. 우리 모든 교우들이 장로님들처럼 전도하면 2010년이 아니라 2007,8년에 우리 교우가 10만 명이 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제가 다른 교회에 집회를 인도하러 가서 설교할 때 우리 장로님들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리고 나서 “장로님들의 매력은 전도하는 데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장로님들은 가만히 있고 교인들이 “아멘!”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면 상대방이 살게 되지만, 복음을 전하는 나도 기쁩니다. 복음을 전하고 나면 할 일을 다한 것처럼 기쁜 것입니다.
둘째, 그들은 복음에 합당하게 살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우리는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야 복음이 빛이 나고 전도할 때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빌립보서 1장 27절에도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저는 집회를 인도하러 가서 호텔에 묵을 때마다 이부자리를 잘 정돈하고 방을 깨끗하게 청소합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청소할 것이 없도록 치워놓습니다. 그리고 아주머니들을 만나면 정중히 인사합니다. 마지막 날에는 전도지와 함께 준비해 놓은 팁을 전합니다. 팁은 너무 많이 주어도 이상하니 많이는 주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주는 것보다는 많이 줍니다. 제 생활이 전도지 같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면서 생활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에 합당하게 살 때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디도와 그 두 사람은 복음에 합당하게 살고 복음을 전해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디도와 그 두 사람은 정직했습니다.
본문 20절에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거액의 헌금으로 인하여 훼방을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럽의 교회들과 고린도 교회가 헌금한 거액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하는 일이 조심스러웠습니다. 혹 헌금이 다른 곳으로 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을 전할 때 정직하다고 증거가 된 사람들을 택했습니다.
본문 20절에서 22절에 보면, 정직함의 시험에서 증거가 된 사람, ‘그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거액을 맡겨도 틀림없이 전달한다.’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택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될 사람은 정직해야 됩니다. 사람에게 감사거리가 될 사람은 정직해야 되는 것입니다.
정직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입니다.
저는 길에서 10원짜리를 주워도 제 호주머니에 넣기가 싫습니다. 제 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양치질을 한 후 소금으로 잇몸을 마사지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잘 때까지 하루에 다섯 번씩 하니 제가 어디에 가면 아내가 소금을 꼭 챙겨 줍니다. 그런데 한 번은 제주도의 한 호텔에 가서 보니 소금이 없었습니다. 소금을 사러 나갔는데 호텔이 외딴 곳에 떨어져 있어서인지 가게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냥 호텔로 돌아왔는데 호텔 목욕탕에 소금 한 통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한 줌 집어 갖고 제 방으로 가려고 하는데 양심에 아픔이 왔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주님, 소금을 파는 곳도 없고, 소금이 비싼 것도 아닌데 조금만 갖고 올라갈까요?’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호텔 직원을 찾아갔습니다.
“미안하지만 소금이 필요해서 그러니 5g만 줄 수 없나요?”
“갖고 가세요.”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소금을 종이에 싸 가지고 왔습니다. 만일 그때 제가 소금을 살짝 가지고 왔으면 소금 마사지 할 때마다 ‘그때 내가 호텔에서 소금을 훔쳤는데…….’ 하는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의 한 집사님은 식당에서 음식을 먹은 후 이쑤시개를 사용할 때 보니 이쑤시개가 아주 예쁘더랍니다. 그래서 두 개를 호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왔답니다. 그런데 새벽기도 때 이쑤시개 두 개가 자꾸 보이더랍니다. 그리고는 ‘식당에서 사용했으면 되었지, 왜 두 개나 네 호주머니에 넣어 왔니?’ 하는 음성이 들리는 것 같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그까짓 것 가지고 뭘 그러세요?’라고 했지만, ‘바늘 하나에도 정직해야지’ 하는 마음이 들어서 자꾸 이쑤시개 한 통을 사서 그 식당에 갖다 주었답니다.
그 집사님이 너무 지나쳤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정도로 정직해야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특별히 금전 문제로 양심에 가책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제 아내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아내를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는 무엇보다 정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30여 년간 아내와 함께 살면서 아내가 거짓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내가 사업을 할 때 급한 일이 생기면 큰 슈퍼마켓에서 돈을 빌려 쓰곤 했습니다. 아내가 슈퍼마켓에 가서 수백만 원을 빌려 달라고 하면, 그 마켓의 사장님이 “사모님, 금고 열어서 헤아려 가세요.”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700만 원을 헤아려서 “맞는지 세어보세요.”라고 하면 "확인은 무슨 확인요? 빨리 갖고 가세요.“라고 했습니다. 돈을 빌릴 때마다 그 사장님이 한 번도 확인해 보지 않고 아내의 말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것이 제 자랑입니다.
신뢰받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이 인정하는, 정직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은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시편 84편 11절에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92편 12절 이하에는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잠언 11장 28절에도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세 사람을 보냈습니까? 한 사람을 보내도 될 텐데, 왜 세 사람을 보냈습니까? 아무리 정직하고 신뢰받는 사람이라도 돈 문제는 한 사람에게만 맡기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다섯 사람이 돈을 관리합니다. 재정 부장이 있고, 장부를 관리하는 두 분, 또 현금을 관리하는 두 분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헌금한 것을 집계할 때도 재정부장이 다 감독합니다. 모두 정직한 분들이지만 감독을 하는 것입니다. 헌금을 가지고 올 때도 두 사람 이상이 가지고 오게 합니다. 그래야 훼방을 받지 않습니다. 아무리 정직한 사람이라도 헌금을 혼자 가지고 오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은행에 돈을 예금할 때나 은행에서 돈을 찾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돈이야 재정부장 혼자 가서 찾아도 되지만 큰돈은 반드시 세 사람이 함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 디도처럼 진실한 사람이라도 큰돈은 혼자 맡으면 안 됩니다. 훼방을 받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은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충격적인 사건이 서울의 한 교회에서 있었습니다.
7년 전쯤 제가 그 교회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었는데, 그 교회 목사님의 얼굴에 병색이 완연했습니다. 그 교회에서 교회당을 새로 지으려고 50억을 모아 놓았답니다. 7년 전에 50억이면 아주 큰돈입니다. 그 교회의 재정부장이 대기업의 자금관리 이사였는데, 하필 그때 그 재정부장 회사의 자금이 어려워져 회사가 부도나게 되었답니다. 사장이 이사에게 어디에서든 돈을 급히 구해오라고 하자 재정부장은 회사의 자금 사정이 좋아지면 갚으려고 목사님께 의논도 하지 않고 자기 이름으로 된 통장에서 50억 원을 빼내어 회사에 빌려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 그 회사가 부도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회사로부터 50억을 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재정부장이 아주 훌륭하고 신뢰받는 분, 교인들의 존경을 받는 분이었는데 분별을 잘못해서 교회에 50억을 손해 보인 것입니다. 재정부장의 재산은 다 해보아야 몇 억밖에 되지 않았답니다. 그러니 교회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목사님이 충격을 받고 쓰러지셨다가 3년만에 겨우 일어나셨습니다. 교인들도 얼마나 상처를 받았겠습니까?
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경대로 하지 않아서입니다.
적어도 1억 이상의 돈은 재정부장이 혼자 마음대로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금하러 갈 때도 다른 사람과 함께 가고, 찾을 때는 세 사람이 함께 가서 찾는 장치가 되어 있어야 시험에 들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아무리 신뢰받는 사람이라도 혼자 가면 안 됩니다. 훼방거리가 되면 안 됩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처럼 디도와 그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맡은 일을 적극적으로 즐겁게 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즐겁게 전하고, 복음에 합당하게 살았습니다. 또 정직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사람들에게는 감사거리, 감사를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만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깜짝 놀랄 말씀이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디도의 마음이 바울 마음처럼 간절하고 귀하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디도에게 그런 마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세 사람이 귀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력하고도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를 귀하게 써 주세요. 주님의 영광거리가 되게 해 주세요. 저 때문에 사람들이 주님께 감사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제가 감사거리가 되게 해 주세요. 하나님께서 제게 은혜를 주세요.”하고 기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명박 장로님을 굉장히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평사원으로 입사하여 30대에 현대 자동차의 사장이 되었고 국회의원으로 일하다가 지금은 서울 시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교회에서 차량 안내를 합니다. 교회 때문에 욕먹는 일이 있어도 “내가 교회 때문에 욕을 먹는다.”라는 말을 하지 않고 잘 감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을 귀한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분에게 “당신은 신화적인 존재다. 나이 30대에 어떻게 그런 거대한 회사의 책임자가 될 수 있느냐?”라고 했을 때 그분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내가 그렇게 된 것은 신화가 아닙니다. 나는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기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분이 그렇게 된 것은 어머니의 기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영국인들이 존경하는 정치인 토머스 크롬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어릴 때 유모의 손에서 자랐는데, 어느 날 유모가 한눈을 판 사이에 원숭이가 요람에 누워 있는 그를 안고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원숭이도 조폭 원숭이가 있나 봅니다. 제가 일본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목사님들과 함께 저수지 옆에 서 있는데, 원숭이 다섯 마리가 담장을 넘어오더니 한 가게에 들어가서 과자를 강탈해 갔습니다. 일본인 주인이 소리를 지르며 원숭이들을 부르니 원숭이들이 막 도망을 갔습니다. 원숭이들이 때때로 그 가게에 가서 물건을 훔쳐 가는 것 같았습니다. 영국의 원숭이도 아기 크롬웰을 안고 지붕 위로 올라가서 막 갖고 놀았습니다. 그러니 집안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하인들은 빨리 사닥다리를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가야 된다고, 이불을 펴서 아기를 받을 준비를 해야 된다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닥다리를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가면 원숭이는 더 높이 올라갈 것입니다.
그때 크롬웰의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뿐이야. 기도하는 것뿐이야. 우리 아기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다. 기도하자.”
“기도한다고 될 일입니까?”
“어허, 기도하자니까.”
그래서 모두가 무릎을 꿇고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아기를…….”
사람들이 야단하니 재미가 나서 아기를 데리고 놀던 원숭이는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보지도 않으니 재미가 없어졌는지, 아기를 내려놓고 다른 곳으로 갔답니다. 그래서 크롬웰이 살았다고 합니다.
크롬웰은 평생 “나는 할아버지의 기도 때문에 살았다.”라고 했습니다.
기도가 그를 만들어 준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하나님의 영광거리, 주님의 영광거리, 또 사람들의 감사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이 노력할지라도 우리가 기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말씀을 드립니다. 은을 닦고 닦으면 더 반짝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닦아도 금이 되지는 않습니다. 무쇠를 닦고 닦으면 번쩍번쩍해지만 아무리 닦아도 은이 되지는 않습니다. 금을 아무리 닦고 닦아도 한 달간 계속해서 닦아도 금으로서 빛이 나지, 다이아몬드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흙덩어리 같은 사람, 돌멩이 같은 사람라도 다듬으면 금 같은 사람이 됩니다. 거름터에 처박힌 돌덩어리 같은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믿고 새로워지면 다이아몬드 같은 사람이 됩니다.
조만식 장로님은 장로 중의 장로입니다. 장로님의 귀감입니다. 정치인의 귀감이요, 교육자의 별인 고당 조만식 선생도 처음부터 그렇게 귀한 분은 아니었습니다.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많이 했지만 술꾼이고 싸움꾼이고 도박꾼이었습니다. 그런데 장대현 교회의 한 청년이 조만식 청년을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너는 공부도 많이 했고 머리도 좋은데 왜 그렇게 사느냐? 지금 강대국들이 우리나라를 삼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일본은 우리를 속국으로 만들려고 갖은 수작을 다 부리는데 공부를 많이 한 너 같은 사람이 어찌 그렇게 사느냐?”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하면 되냐?”
“새사람이 되어야 해.”
“어떻게 하면 새사람이 되는데?”
“예수님을 믿어야 돼. 예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되어야 해.”
그래서 그는 술과 싸움과 도박을 다 끊어버리고 예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되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민족을 살린 애국자가 되었습니다. 술꾼이 민족의 별이 된 것입니다.
미국의 율리우스 그랜트 장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했지만 술꾼이었습니다. 술을 많이 마시다가 행실이 좋지 못한 군인이라고 쫓겨났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사를 지었는데 그것도 실패했습니다. 사업에도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가게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데 남북 전쟁이 터져 사병으로 입대했습니다. 군에서는 그의 경력을 보니 장교 출신이라 그를 장교로 임명했습니다. 그때 그는 회개하고 술을 끊고 힘을 다해 나라를 위해 싸웠습니다. 소령, 대령, 장군이 되고 마침내 미국의 제18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같은 돌이라도 하늘에 있으면 빛을 발하는 별이 되고, 땅으로 떨어지면 별똥이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사람이지만 얼마든지 귀하게 될 수도 있고 천하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이런은 영국의 유명한 시인입니다. 그는 부잣집의 아들이고 잘생겼고 공부도 많이 한 인텔리였지만 향락과 쾌락에 탐닉하다가 인간 쓰레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마지막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나는 말라빠진 낙엽, 나는 버러지, 나는 사람이 아니다. 내게는 슬픔과 비참함뿐이다.’
그리고 그는 죽었습니다.
모든 조건과 상황이 좋은 사람이라도 막 살면 별똥 같은 사람이 되고, 밑바닥에 있는 돌멩이 같은 사람이라도 노력하고 은혜를 받으면 별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보석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동행하는 삶
고후 8장 19절 / 강성찬목사(전주동부교회)
사람은 필연적으로 혼자서는 못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걸음을 같이하는 동행자와 함께 걸어가도록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남편은 아내와 더불어 아내는 남편과 더불어, 자식은 부모와 더불어 부모는 자식과 더불어, 제자는 선생과 더불어 선생은 제자와 더불어, 친구는 친구와 더불어 벗은 벗과 더불어, 양은 목자와 더불어 목자는 양과 더불어, 연인은 연인과 더불어 동행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도의 시성 타골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구냐"하는 물음에 대답하기를 "홀로 세상을 걸어가는 자"라 하였다 합니다.
홀로 이 세상을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좋지 않게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창조과정에서 돕는 배필과 더불어 이 세상을 걸어가도록 배려를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마 19:4-6)었습니다.
그런데 이 동행에는 선택과 인내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제자가 선생과 더불어 동행할 때 어떤 선생을 선택할 것이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또 벗과 더불어 동행할 때 어떤 벗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선택의 법칙에 의하여 선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내 것으로 삼고 그것을 얻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없이 영광을 취하려고 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고난이나 아픔, 또는 실패나 가난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않으면 열매가 있을 수 없고 모든 육적인 소욕을 죽이지 않으면 영적인 열매 또한 불가능합니다. 신령한 것으로 채움 받는 영감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셉은 그 꿈을 이루기까지 종살이와 옥살이를 필요로 했고,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기까지 40년의 광야 생활을 필요로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의 최고 영도자가 되기까지는 하나님의 사람, 모세와 항상 동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어부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천국의 열쇠를 쥐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천국의 주인공 예수님과 늘 동행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청년 디모데는 최연소자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었는가 하면, 그것은 사도 바울과 늘 동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사도, 경건한 어른, 진실한 일군 그리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일생을 동행한다는 것은 특별히 젊은이들에게 중요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동행자의 선택을 올바로 하고 끝까지 인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자신의 사역이 끝났음을 깨닫고 마지막을 앞두고 혼자 하나님을 대면하기 위해 엘리사를 떼어놓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엘리야를 끝까지 동행하기를 고집하며 따라갔습니다. 이는 아직 후계자 문제가 명확하게 결정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선지자들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집단생활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엘리야가 죽으면 다른 지도자를 세워야 하는데 이는 대부분 전임자에 의해 공인되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엘리야로부터 확실하게 후계자로 인정을 받기 위해 끝까지 따라간 것입니다. 길갈에서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고 합니다. 이는 엘리야가 엘리사를 자신에게서 떼어 놓으려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게 됩니다. 벧엘에서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하자 엘리사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고 여리고에 이르게 됩니다. 여리고에서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하니 엘리사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는지라 이에 두 사람이 요단가에 이르게 됩니다.
요단가에서 엘리야는 겉옷을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마른 땅위로 건너게 됩니다. 요단을 건넌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하니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 수레와 불 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이를 본 엘리사가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고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돌아와 요단 언덕에 서서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이르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그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맞은편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그를 보며 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 하고 가서 그에게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였습니다(왕하2:1-15).
엘리사는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라는 선택을 끝까지 지킴으로 마침내 스승 엘리야의 반복된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여행은 길갈에서 벧엘로 여리고로 요단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험한 여행에서 스승에 대한 엘리사의 선택과 인내와 충성심은 명백하게 증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훈련의 과정들을 통하여 결국 엘리사는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세상 사람이 사탄의 편에 서고 세상 것에 소망을 두고 살 때 자신은 하나님의 편에 서서 산다는 일 또한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능히 우리의 소망을 채우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일군으로 부적당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선택과 결단이 단호하고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각오가 확실한가에 달려 있는 줄 믿습니다.
또한 뜻을 같이하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모스서 선지자를 통하여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암 3:3)라고 하였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것은 마음의 일치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의 일치"는 깊은 신뢰에서만 온다는 것입니다.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잠 18:24)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잠 27:10)고 합니다.
그런데 신뢰 중에는 상대적인 신뢰와 전폭적인 신뢰가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신뢰라는 것은 저가 나를 믿어 주면 나도 저를 믿어 주겠다고 하는 식의 신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폭적인 신뢰는 것은 저가 나를 믿어 주지 않을지라도 나는 저를 믿어 주겠다는 신뢰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 새로 개척 전도를 한 리빙스톤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는 붙들고 선교하셨다고 합니다. 리빙스톤이 이 성경을 읽을 때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도 제일 진실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거짓말할 수 없어. 예수님은 글자 그대로 신사야. 세상의 다른 사람은 다 거짓말하되 예수님께서는 거짓말 할 수 없어. 그런 까닭에 나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겠다. 내가 아프리카에 가면 주님께서 나와 같이 계실 것이 분명하다.' 이 확신 가운데서 담대히 고국을 등지고 암흑의 대륙에 가서 일생을 거의 외로운 가운데서 고독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혼자 한 것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같이 했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동행했다는 것입니다. 격려했다는 것입니다. 힘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단 선택한 동행자에 대하여서는 깊은 신뢰와 이해와 끊이지 않는 사랑과 희망을 가지고 일생을 걸어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동행은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시 26:4)고 합니다. 지혜자는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 13:20)고 하시고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잠 22:24)라고 하였습니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 13:20)고 합니다. 세상 지혜 자와 동행함도 필요합니다.
모세는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여호와께서 주마하신 곳으로 우리가 행진하나니 우리와 동행하자 그리하면 선대하리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내리리라 하셨느니라 하자 호밥이 나는 가지 아니하고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가리라 합니다. 모세가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 칠지를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 우리와 동행하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대로 우리도 당신에게 행하리이다(민 10:29-32)라고 합니다. 광야 여행을 함에 있어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자, 한 사람을 이스라엘 행진의 길 안내자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바로 미디안 족속의 제사장 르우엘의 아들이요, 모세에게는 처남인 호밥 이었습니다. 호밥은 오랫동안의 광야 생활로 인해 광야 여러 곳의 지리와 그 곳의 형편을 소상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모세는 광야 여정 동안 도움을 받고자 호밥에게 길 안내를 요청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으로 인해 모세는 호밥을 설득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재능까지 선히 이용하시어 거룩한 일을 이뤄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계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욥 12:13)라고 합니다. 참된 지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지헤 자이신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인생들의 궁극적인 인도자 역시 우리 하나님이셔야만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시 23:1)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되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증거를 보이며 동행하여야 합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1-24)고 합니다. 이러한 에녹에 대해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 11:5)고 하니 하나님과 동행할 때 전폭적인 생활의 증거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동행하였던 것입니다.
미국 샌디에고에서 미 에프18전투기가 훈련을 마치고 귀환하던 중 사고를 일으켜 평화로운 주택가를 덮쳐 한국인 그리스도인 가정의 일 나간 그 집의 가장을 제외한 한 가족 전체, 아내와 두 딸 하영이 하은이 그리고 한국서 방문 중인 아내의 어머니가 함께 세상을 떠난 사건이 보도 되었다고 합니다. 왜 이런 사고가 하필이면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일어났는지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으나 이 사건이 수많은 미국인들에게 감동을 일으키게 되는 사건으로 귀결된 것은 그 다음 날 그 가장의 간증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 날 사고 현장에서 있었던 기자 회견장에서 가장인 윤 동윤(37세)씨는 이렇게 말 한 것으로 보도 되었다 합니다. "하나님이 뜻이 있어 아내와 딸들 그리고 장모님을 데려 가신 것을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과 제 가족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조종사도 최선을 다한 것이므로 그를 용서하고자 합니다." 장례 후에 교회에는 수백 통의 전화와 이 메일이 답지하고 있으며 묘지를 무료로 제공하겠다는 사람들, 무료로 법적 자문을 자원한 변호사, 정신과 치료를 제공하겠다는 의사, 헌금을 보내온 사람들, 장미꽃들이 답지하고 추모 웹 사이트가 만들어지고 윤 동윤씨의 간증에 대한 감동을 고백하는 사연들이 답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장례식에 참여한 한 기자는 "동윤씨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교회가, 이웃들이, 아니 온 국민들이 함께 아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일을 이루고 계십니다"라고 소감을 적었다고 합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에녹처럼 혹은 윤씨 가족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옮기우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라는 마지막 간증을 남기고 그 영원한 나라로 떠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진실로 우리 인생이 그분과의 영원한 동행이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이동원 목사 영원한 동행 설교)
에녹이 증거를 누구에게로부터 받았느냐 하면 하나님께로 부터도 받았고 또 이웃들에게도 받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에녹의 집이 어디 있느냐 하고 행인이 물으면 잘 몰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의 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다 아는 정도의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어찌된 까닭입니까? 에녹은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 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에녹은 므두셀라를 위시한 모든 자녀에게 충실한 아버지 노릇을 하며 하나님과 동행한 것입니다. 에녹은 그의 아버지 야렛에 대하여는 충실한 아들 노릇을 하며 동행한 것이었습니다. 또 에녹은 아내에 대하여도 충실한 남편 노릇을 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것입니다. 또 에녹은 밭에 나가면 충실한 농부로서 일을 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것입니다. 그 동행 속에서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고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고 하는 생활의 증거를 받았던 것입니다.
어떤 생활의 증거를 이웃 사람들에게서 얻어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란 생활 증거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자라는 생활 증거입니까? 또는 교회에 덕을 세우는 자란 생활 증거입니까, 아니면 교회에 해를 끼치는 자란 생활 증거입니까?
이웃에게 유익을 끼치는 자란 생활 증거입니까, 아니면 이웃에게 소란을 끼치는 자란 생활 증거입니까? 모쪼록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그리고 교회에 덕을 세우는 자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유익을 끼치는 자란 생활의 증거를 얻으면서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코스타리카의 알라후에라 시 외곽에 있는 구릉지대에 있는 커피농장에는 기름칠을 한 듯 반질거리는 검푸른 잎 새들이 아열대의 태양을 반사하였고 길을 따라 지은 작은 집들의 현관과 잔디밭에는 가지각색의 꽃과 관목이 가득했고, 화려한 붉은 꽃이 피는 굵은 덩굴이 담벽과 현관지붕을 큰 무늬로 뒤덮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 소박한 주택에 붙여서 지은 작은 목공소 한쪽이 열려 있어서 호기심에 안으로 들어갔더니 작업장은 아주 소박하게도 작았다 합니다. 침대 제작소였는데 뒤쪽에는 양쪽에 굵은 나무껍질이 붙은 채로 있는, 다듬어지지 않은 목재가 쌓여 있었다합니다. 그런 나무로부터 목수는 아름답고 멋진 침대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침대는 각기 튼튼하고도 멋진 예술작품으로 변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목수가 공방으로 들어왔을 때 그의 작업을 칭찬하며 여기 일하는 사람이 모두 몇 명입니까? 하고 묻자 둘이요라고 대답하더라합니다. 다른 사람이 있나 둘러보자 그는 웃으면서 손끝을 하늘로 가리키며 하나님과 내가 여기서 일하지요. 하나님은 나무를 만드시고, 나는 침대를 만들어요 라고 하더랍니다.
하나님의 일은 혼자 모든 일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형제들과 함께 해야 하며, 공동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디도가 자신들과 동행하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 형제를 보내었(고후 8:18-19)다고 합니다.
전도자는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9-12)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심에 자기와 함께 있게 하려고 하셨다고 하시기도 하십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막 3:13-19)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도해 주는 동역자도 필요하고, 물질로 돕는 자도 필요합니다. 이런 일 저런 일을 도와주며 동행하는 자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천하보다 귀한 영혼 사랑으로 전도하되 동행의 은혜를 감사하며 사명 감당하며 영광 돌리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