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배’들의 전성시대
2013.09.25
최근 텔레비전 화면에서 할배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한류 스타도, 젊음을 자랑하는 얼짱 배우도 아닌 원로 연기자들이 ‘꽃보다 할배’라는 해외 배낭여행 프로그램을 통해 모처럼 대박을 터뜨린 것입니다.여행에 동행한 출연자들 네 분의 평균 연령이 자그마치 일흔여섯이라는 점에서도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게 됩니다. 이들이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서 길은 잘 찾아다니는지, 음식 타박은 하지 않는지, 일정을 놓고 서로 다투지는 않는지 지켜보게 되는 것이지요.내용도 리얼리티 프로그램답게 출연자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꾸밈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관광지 구경을 하다가도 축 늘어진 표정으로 허기진 내색을 드러내는가 하면 걷기가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기도 합니다. 서울로 집안 식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제때 받지 않으면 걱정하는 표정도 역력히 드러납니다. 여기에 여행지의 오붓한 분위기까지 곁들여지면서 프로그램의 재미를 한층 높여주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파리의 에펠탑과 스위스의 전원 풍경이 펼쳐지며 대만에서는 타이베이의 흥겨운 야시장도 등장합니다. 그야말로 느긋한 힐링 여행입니다.그런 점에서는 다른 채널에서 방영되는 ‘엄마가 있는 풍경 마마도’라는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60대 중반에서부터 70대 후반까지의 여자 연기자 네 분이 얘기를 이끌어가는데, 시청률이 꽤 높은 편입니다. 이들도 평균 연령을 따지자면 일흔이나 됩니다. 연기 경력만 해도 평균 50년에 이른다니 말입니다.이들이 함께 여행을 하면서 아내이자 어머니이면서 또한 여배우로서 털어놓는 솔직한 고백들이 은근한 감동을 자아내는 것입니다. ‘꽃보다 할배’의 무대가 외국이라면 ‘마마도’의 무대는 국내라는 점이 약간 다를 뿐이겠지요.그러고 보면, 이 프로그램들이 처음 방영된 지 불과 두어달 만에 할아버지, 할머니 연기자들이 어느새 텔레비전 화면을 점령하고 있는 셈입니다. ‘점령했다’는 표현이 약간 과장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시청률로 따진다면 인기 드라마나 각종 예능 및 오디션 프로그램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이런 추세가 언제까지 갈지는 쉽게 장담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더 이어질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동안 텔레비전에서 홀대받던 원로 연기자 위주의 프로그램이 제 대접을 받게 된 것이겠지요.이런 프로그램들 덕분에 일상이 팍팍한 우리 노인 사회에 새로운 활기가 생겨나고 있는 것은 뜻밖의 소득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배우들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처럼 사회적으로도 노인들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그동안은 노인들에 대해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미 평균 수명이 여든살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보통은 직장에서 퇴직하면서부터 벌써 퇴물 취급을 받기 일쑤입니다. 젊은 시절 모아둔 것 없어 앞가림은 못하면서도 공연히 고집만 내세워 자식들에게 부담만 안겨 준다는 식이지요.그렇다고 한꺼번에 분위기가 바뀔 수는 없는 일입니다. 현실적으로도 노후 생활이 변변찮은 데다 허리가 꾸부정하니 거동은 불편한 것이 대체적인 모습입니다. 과거의 경험을 살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는 눈에 띄지 않습니다. 일을 하겠다고 나서면 젊은이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오히려 눈총을 받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이런 사정이니만큼 보통 노인들로서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할배들처럼 배낭을 짊어지고 해외여행에 나선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기껏 노인정이나 마을회관에서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정도겠지요.그렇다고 해서 노인 문제를 젖혀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년의 할배 연기자들이 다시 텔레비전 화면을 주름잡고 있듯이 노인들이 다시 활동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돼야 합니다.과거와는 달리 노인들에 대한 정책과 인식이 많이 바뀌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입니다. 물론 국가적으로 노인연금 정책이 흔들리는 바람에 주무 장관의 사퇴설이 나돌고 공약 후퇴에 대한 대통령의 입장 표명이 거론되는 것이 눈앞의 상황이기는 하지만 애초부터 의욕이 너무 앞서나간 것이었다고도 여겨집니다. 다른 방식으로 지원이 이뤄질 것이라 기대해 봅니다.그러나 정책적인 뒷받침도 중요하지만 노인들 스스로 활력소를 찾으려는 노력이 더 소중합니다. 앞서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을 ‘할배’라고 표현한 자체가 늙수그레한 노인네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뿌리치려고 한 것은 아닐까요. 마음 만큼은 한창 시절 그대로의 ‘젊은 오빠’들이니까요. ‘마마도’ 프로그램에서도 ‘할머니’가 아닌 ‘엄마’를 강조하고 있습니다.실제로도 나이가 일흔이나 되어야 겨우 노인축에 끼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꾸준히 운동을 하며 몸을 가꾼 덕분에 웬만한 젊은이들보다 훨씬 건강과 의욕을 보여주는 어르신들도 적지 않습니다.이제 텔레비전 화면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활동에서도 진정으로 노인들의 전성시대가 펼쳐지기를 기대합니다. 젊었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기를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정책적으로 노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각자가 젊었을 때부터 노년기에 대비하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더욱이 지긋이 연세가 들어서도 품격을 유지함으로써 주변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할배, 할매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뜨거운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필자소개
허영섭
언론인, 칼럼니스트. 저서로 ‘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 ‘대만 어디에 있는가’, ‘한국과 대만, 잠시 멀어진 이웃’(e-book)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