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흉노(匈奴)를 멸망시킨 한나라
흉노(匈奴)는 상고시대에서 오호십육국시대에 존속했던 유목민 집단 및 이들이 세운 국가의 이름이다.
동아시아사 최초의 유목 제국이다. 이 시절 끊임없이 중화권 국가와 치고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첫 등장은 기원전 4세기 말 전국시대부터이고, 이후 한(漢)대에 이르러서는 북아시아 최강의 유목 국가로 성장했다. 건조한 초원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기원전 3세기 무렵, 현재의 중국 북부, 몽골 고원에서부터 러시아 남쪽에까지 달하는 방대한 제국을 건설했고, 전성기에는 시베리아 남부, 만주 서부, 그리고 현재 중국의 내몽골, 간쑤성, 토하리스탄까지 영향력이 미쳤다.
사마천의 사서 ❮사기(史記)❯에는 하나라의 후손으로 서주를 밀어버린 훈육과 험윤이 이들의 조상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 전국시대 이전의 북방 이민족들은 제대로 된 유목민이 아니었다고 한다.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성과로 보면, 이후의 유목민족들처럼 제대로 된 유목문화는 기원전 10세기에 우크라이나 초원에서 시작되어, 기원전 8∼7세기가 되어야 비로소 중국 북방에 유입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즘엔 춘추시대 후기에서 전국시대 초기 사이에 등장하는 호(胡)라는 이름의 족속이 중화권 사람들이 최초로 조우한 유목민이라고 보는 학설이 힘을 얻었다. 고고학 연구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고대에도 몽골 고원에 사람이 살긴 했지만, 적어도 기원전 8∼7세기까지는 이곳에 살던 민족들이 소를 키워서 먹고 살던 목축민이나 수렵채집민(狩獵採集民)이었다고 한다.
전한 초기엔 한나라를 군사적으로 압박하면서 한고조 유방을 사로잡을 뻔한 기염도 토했으나, 이후 화친으로 돌아섰고, 전한의 형님에 해당하는 위치에서 정기적으로 전한이 재화를 바치는 것에 만족했다. 한무제 시절엔 한과의 데스매치 끝에 결국 막북으로 밀려나 다섯 명의 선우가 난립하는 혼란기를 거쳐 두 차례 국가가 분열되는 등 중원에서의 패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후 후한시대에 흉노가 분열한 남흉노 등은 후한의 제후격으로 떨어지기도 했고, 오호십육국시대에 서진(西晉)을 멸망시키고 화북지방에 한조, 북하 등 유목왕조를 세우기도 하지만 이때부터 중국 내부에 들어오면서 문화적으로는 중화권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다가 선비족에게 된통 얻어맞고 점점 세력이 약화되더니 끝내 흉노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이렇게 수백 년 이상 중화제국과 충돌한 관계로 지금도 ‘북방민족’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유목민족 중 하나로, 중국 문화에도 흉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다. 천고마비(天高馬肥), 만리장성(萬里長城), 왕소군(王昭君) 등이 대표적이다.
흉노가 중국 역사서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4세기 말의 전국시대이다. 흉노는 가끔 진나라에 대항하는 각국의 연합에 참가하여 진나라를 공격했지만 매번 참패로 끝났다. 그후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기원전 215년에 몽염을 보내 오르도스 지역의 흉노를 축출하고, 만리장성을 쌓았다.
기원전 209년 묵돌 선우가 아버지 두만 선우를 죽이고 선우위에 올랐다. 묵돌은 만주를 공격해 동호를 멸망시켰고, 서쪽으로는 천산 산맥의 월지를 공격해 중앙아시아로 밀어냈다. 흉노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여러 부족들도 흉노에 복속되었다.
한편 중원에서는 유방이 초한전쟁을 수습하고 전한을 세웠다. 기원전 200년 흉노가 한나라의 변경을 공격하자, 유방이 친정하여 흉노군과 맞서 싸웠으나 백등산 포위전에서 처참하게 당하고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기원전 177년 흉노의 우현왕이 한나라의 변경을 약탈했다. 이에 한 문제가 우현왕을 치게 했으나 당시 실크로드 정책에 집중하고 있었던 목돌 선우는 흉노의 책임을 인정하고 물러났다. 이후 우현왕은 서역을 공격해 월지국을 측출하고 서역의 26개국을 복속시켰다. 이로 인해 실크로드는 흉노의 손에 넘어갔다.
한나라는 백등산 포위전 이후 흉노에 굴복하여 반기를 들지 못했으나 한 무제가 즉위한 이후 정세는 완전히 반전되었다. 무제는 기원전 129년 위청과 곽거병을 파견해 서역을 정벌하고 한서 4군을 세웠다. 이렇게 서역이 한군에게 넘어가자 가뜩이나 한나라가 더는 조공을 바치지 않아 악화됐던 경제적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한나라와의 전쟁으로 흉노는 막대한 피해를 입어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또한 기원전 60년 후계자 싸움이 일어나 분열되었고 이후 호한야 선우가 한나라의 지원을 받아 흉노를 통일했다. 당연히 한나라의 입김이 거셌기에 흉노는 한나라와 화친을 맺게 되었다. 아무리 서역을 잃었다고 해도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던 흉노가 갑자기 약화된 이유로 당시 몽골 고원이 한랭화된 것을 이유로 보기도 한다.
전한이 멸망하고 신나라가 세워졌을 때 흉노는 신나라를 침공하기도 했다. 이후 신나라가 멸망하고 후한이 세워졌을 때 흉노는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남흉노는 오르도스와 산시성에 살며 정착민이 되어 후한에 사실상 복속되었고, 북흉노는 몽골 고원에 남았다.
서기 89년 후한은 북흉노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남흉노는 이후 중국의 변경이 되었다. 이후 삼국시대에 남흉노 선우는 유명무실해지고 흉노는 조조와 그가 세운 위나라에 의해 5부로 재편되어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 삼국시대 말기에 이르면 남흉노의 대다수는 남하하여 한족과 동화되었다.
이후 서진 말 팔왕의 난으로 중원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흉노족이자 남흉노 선우의 후손인 유연이 한나라(전조)를 건국하고 서진을 무너뜨려 5호16국시대를 열었다. 이 전조와 후조가 멸망한 뒤에는 407년에 산시성 주변에 흉노 국가인 북하가 세워지기도 했지만 이 역시 431년에 탁발선비족의 북위에게 멸망하면서 흉노는 역사 속에서 완전히 소멸하게 되었다.
북아시아의 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했다고 한다. 말, 염소, 양, 당나귀 등을 주로 길렀고, 개중에는 낙타 같은 진귀한 가축도 있었다. 군주 이하 모든 백성들이 고기를 주식으로 했으며,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다고 한다.
농사는 짓지 않았으며 일정한 주거지가 없었다. 평화 시에는 목축, 수렵으로 생계를 이었고, 전쟁이 일어나면 부족 전원이 전투에 임해 약탈에 나섰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정주민들에게서만 나오는 물산을 얻기 위해서 그저 교역이나 약탈로 얻는 것을 넘어서, 정주민, 주로 한나라 사람 그 자체를 대량으로 약탈해 자신의 영향권 하에 두고 정주 생활을 하게 하면서 흉노에게 봉사하게 했다. 이것 역시 중국 측 기록에 나오며, 흉노 유적들에서 보이는 정주 흔적은 이렇게 흉노에 끌려와 하층민이 된 한족 정주민들의 유산으로 주로 해석한다. 현대 러시아 학자들이 발굴한 러시아 흉노 유적지에 농사, 축산업을 해온 것으로 보이며 일정한 주거지와 철기, 청동을 생산한 대장간 흔적 등이 있다.
이는 흉노 후대의 유목민족에게서도 자주 나타나는 형태로, 피지배계층이 농업과 공업을 하고, 지배계층은 목축과 수렵을 하는 체계를 수립한 경우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가령 몽골은 청나라 시대에 지금의 내몽골 지역에서 몽골인 지주들이 나름 비옥한 토지들을 골라서 한족 출신의 소작농들에게 소작을 맡기고, 지주 본인은 전통적인 목축업에 종사했다. 그리고 더 이전 금나라에서는 맹안ㆍ모극제라 하여 한족과 발해 유민들에게는 대규모 농경 생활을 하게하고, 지배층인 여진족에게는 반농반목 생활을 유지할 것을 장려하기도 했다. 또, 고구려 역시도 그 자신들이 반농반목을 하는 등 순수한 유목민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농업을 주로 하던 주변의 정주민들인 동예, 옥저 등을 정벌하여 조공을 받거나, 후한 등의 여러 중국 왕조와의 전쟁을 통해 잡아온 한족 농민들을 농지에 투입시키는 식으로, 하층민들에게 농사를 시켰다. 이는 유목민들 자신이 농사에 익숙하지 않아서, 농업을 통해 얻은 곡식에서 주로 섭취할 수 있는 탄수화물을 얻고자 택한 방법이었다. 본래는 이를 위해 정주민들을 수시로 침공해서 조공을 바치게 하거나, 아예 대대적인 약탈을 하던 식이었는데, 이를 정주민들을 직접 자기들 땅에 정착시켜서 농사셔틀로 부리는 온건한 방법으로 바꾼 것이다.
흉노의 귀족들은 난제(攣鞮), 수복(須卜), 구림(丘林), 혁련(赫連), 호연(呼延) 등 성씨를 사용했다고 한다.
흉노 사회에서는 건장한 자가 존중되었고, 노약자는 비교적 천대받았다. 예컨대, 식사를 할 때에도 맛좋은 살코기는 장정들이 먼저 먹었고, 노인들은 남은 것을 먹었다고 한다. ❮사기(史記)❯ ❮흉노 열전❯ 부분에서 나오는 중항열과 한나라 사신의 대화에서 이를 알 수 있는데, 한나라 사신은 흉노가 노인을 천대한다면서 왜 장정들이 맛있는 걸 먼저 먹고 남은 걸 노인에게 주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에 중항열은 흉노는 전투를 자주 하는데 늙고 병든 사람이 싸울 수가 없어 젊고 힘센 장정들이 잘 먹어야 잘 싸울 수 있고 나아가 노인들을 지켜줄 수 있지 않느냐고 답했다.
아버지나 다른 식구가 먼저 죽을 경우, 그의 부인과 첩을 취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당연히 생모는 제외된다. 이는 대부분 유목민에게서 나타나는 제도이다. 과거 고구려도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라 하여 형이 죽으면 그 부인을 동생이 데리고 사는 풍습이 있었다. 토지를 소유하는 정주민족은 가장이 죽더라도 남은 유가족이 생활할 수 있지만, 유목민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딸렸던 식구들의 부양을 책임지워 노동력 감소를 방지하려는 사회적 의무이고 게르만을 포함한 대부분 유목민족들에게서 나타난다. 역시 유목민족 느낌이 강했던 진(秦)나라에서도, 상앙의 변법이 있기 전까지 부자(父子), 형제가 처첩을 공유했다고 한다. 나중에 상앙이 자기가 잘났다고 믿거나 스스로에게 반하여 푹 빠져 있는 일에 드립할 때 언급된다. 유동성이 강한 현재의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에서도 형제의 처첩 공유는 흔했다.
군주가 죽으면 측근 신하나 애첩이 ‘순장’당했는데 많을 경우 수백에서 수천을 넘기도 했다고 한다. 이외에 금과 의복 등을 부장품으로 넣었으며 무덤에 봉분을 쌓지는 않았고, 상복도 입지 않았다. 장례 땐 망자를 애도하기 위해 얼굴에 칼로 상처를 내어 죽은 자의 이마에 피를 흘리는‘이면’이라는 풍습이 있었고, 머리카락 일부를 베어 묻는 '전발' 풍습도 있었다. 이 풍습은 순장을 억제하여 노동력 감소를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시가 아닐 때 칼을 한 자 이상 뽑은 자는 사형에 처했고, 도둑질한 자는 재산을 몰수했다고 한다.
남아있는 기록이 중국의 고서뿐이어서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분야긴 하다. 실제 발굴된 흉노의 유적은 중국 측 기록과 다른 점도 있었다. 중국 전통 악기인 얼후가 이 흉노에서 기원하였다. 본래 흉노의 악기였던 호치르가 8세기 때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얼후란 이름이 붙여졌다.
활을 잘 다루었는데 어린이들도 양을 타고 다니면서 작은 짐승들을 사냥할 수 있었다고 한다. 활을 당길 만한 힘을 가진 남성 전원이 기병으로 활약하였다. 접전 시에는 칼과 짧은 창을 사용했다고 한다. 기원전 2세기 중엽 한나라 경제 시절, 한 군관이 수십 기를 거느리고 사냥을 나갔다가 흉노 궁기병 단 3기를 만나 병사를 모두 잃고 본인도 중상을 입은 일이 있었다.
싸움에 있어서 후퇴를 불명예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싸움이 유리하면 전진하고, 불리하다 싶으면 사정없이 도망쳤다고 한다.
적을 참수하거나 포로를 잡으면 상으로 술 한 잔을 받았다. 노획품이나 포로는 그대로 당사자의 소유가 되었다. 전사자의 시신을 거두어 돌아온 자는 그의 재산을 모두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눈앞의 이익을 위해 맹렬히 싸웠고 패색이 짙어지면 맹렬히 도망쳤다.
전쟁을 하거나 큰일을 일으킬 때 달의 모습을 보고 점을 치는 풍습이 있었다. 달이 차고 빛나면 좋은 징조이고 흐릿하면 나쁜 징조였다고 한다. 실제로 달이 흐릿해지는 경우 중 달무리가 지는 경우엔 다음 날 비가 올 확률이 높으므로 흉노에 있어 궂은 날씨가 전투나 야외활동에 방해가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럴 듯한 부분이다.
일설에는 흉노가 중앙아시아 초원을 누비던 스키타이인 들로부터 기마술을 전수받았고, 흉노의 동검인 경로(徑路) 역시 스키타이 칼에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기마술 부분은 크게 설득력이 없는 것이 기마술은 모든 인류에게서 나타나는 공통된 문화적 소양이기 때문이다. 말이 없던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탈주한 말을 길들여 타고 다녔던 북미 원주민들을 생각하면 쉽다.
흉노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사료에만 있기 때문에, 현재 중국어로 음역된 일부 지명이나 이름들을 제외하고는 흉노어의 재구성은 거의 불가능하다.
2020년 몽골의 흉노 궁궐에서 한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다. 기원전 3세기∼2세기 흉노 상류층은 한자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기와에 “天子 單于”라 새겨져 있기 때문에 중국 사료에서 흉노의 수장을 일컫는 말인 “單于(선우)”는 흉노인의 자체적 표기법을 차용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흉노인들도 한나라와 마찬가지로 자기 군주를 ‘천자’라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었다.
가끔 웹에서 흉노가 자체적 문자가 있었다는 언급이 돌 곤 하는데 확실한 근거는 없다. 동아일보에서 “탐가”라는 고유 문자를 사용했다는 기사를 낸 적이 있는데, ‘탐가’는 언어를 표기하는 문자가 아니라 왕족을 상징하는 문양이므로 근거 없는 해석이다. 현재까지 흉노 유적에서도 한자와 별개의 문자 체계는 발견되지 않았다.
흉노어의 계통은 현재로서는 파악할 수 없다. 전통적으로 튀르크어족이나 몽골어족에 속했을 가능성이 가장 유력하다고 여겼으나, 이는 어떠한 확실한 근거를 토대로 한 가설이 아니라 당나라 이후 몽골 지역은 줄곧 튀르크나 몽골 계통 민족이 거주했으므로 흉노 시대에도 그랬을 것이라는 추측일 따름이었다. 최근 들어 예니세이어족 설이 대두하고 있으나, 해당 어족에 대한 연구가 워낙 빈약하기에 여전히 흉노어의 정체는 오리무중이다.
흉노족의 우두머리를 선우(單于, 단우가 아니다)라 부르며, 선우 밑에 좌현왕, 우현왕, 좌록리왕, 우록리왕, 좌대장, 우대장, 좌대도위, 우대도위, 좌대당호, 우대당호, 좌골도후, 우골도후를 두었다. 이들은 크게는 1만 기, 작게는 병사 수천 기를 거느렸으며 그들을 둘러싸고 군단장 24명이 있었는데 이들을 ‘만기’라고 불렀다. 군단장들은 천인대장, 백인대장, 십인대장, 비소왕, 상, 봉, 도위, 당호, 저거 등의 관리를 두었다.
태자는 좌현왕이라 했고, 이를 좌도기왕이라고도 불렀는데, 흉노 말로 ‘도기’가 고대 중국어로 ‘현’에 대응했기 때문이다.
각 부족들은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그 안에서 이동하며 살았다. 좌ㆍ우현왕과 좌ㆍ우록리왕의 영역이 가장 컸다. 매년 정월과 5월에 군단장들이 선우정에 모여서 회합을 가지고 제사를 지냈다. 가을에는 대집회를 열었는데 이때 백성과 가축의 수효를 점검했다.
흉노는 한나라나 진나라 시대보다 훨씬 이전인 전국시대부터 이미 흥기하여 철기 시대에 진입했다. 중국에서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인 기원전 5세기부터 철을 생산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서아시아로부터 전해왔는지 또는 중국이 자체적으로 제철기술을 발전시켰는지 논란이 많다.
철은 서남아시아 아나톨리아 지방의 옛 국가 히타이트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곳에서 기원전 3000년 무렵부터 철기를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서역의 앞선 철기 문명을 일찍 접한 흉노가 당시의 중국보다 일찍 철기 문명을 가질 수 있었고, 철제 무기를 이용해서 군사력 역시 강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실크로드 교역의 독점권을 가졌기 때문에, 앞선 서역의 문물을 중국에 전달할 수 있었다. 흉노의 무덤에서는 다량의 철촉, 철검, 철제 마구 등이 출토된다.
철기 문화는 흉노의 생산력을 크게 증대시켰다. ❮한서(漢書)❯를 비롯한 중국 사서에서는 흉노와 한나라 간에 교역이 활발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교역은 서로 교환할 물건이 확보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또한 흉노는 실크로드를 실질적으로 통제하여 무역권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이는 흉노에 큰 경제적 이익을 주었다. 서역에는 화려한 물품이 많다는 장건의 보고를 읽은 한 무제는 이를 탐내기도 했다.
전한 초기 흉노의 위협에 직면해 이를 막아내기 힘들었던 한나라는 흉노와 화친하여 무역하는 방법을 택했다. 흉노에 패배한 직후였으므로 한나라에 불리한 조건의 화친이었지만 흉노에 정기적으로 바쳐야 하는 물자는 중국의 거대한 생산성으로 극복 가능한 정도였다. 그렇게 화친과 교역으로 흉노를 달래는 사이 문제와 경제는 이른바 문경지치를 이뤘고, 내실을 쌓은 이후 무제가 다시금 흉노 정벌에 나서 승리하면서 흉노는 서역 지배권을 빼앗기고 쇠퇴하게 된다. 물론 대흉노전에 국력을 너무 쏟아 부은 나머지 한나라도 이후 점차 쇠퇴해간 게 함정이지만, 흉노만큼 쇠퇴하진 않았다.
문화상으로 흉노는 한족의 중원문화에 필적할 만큼 빠르고 넓게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문화권을 상징하는 몇 가지 상징적인 유물이나 표징으로는 동복(청동솥), 동물문 장식의 금속공예 유물들이 대표적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고분 출토품을 통한 연구가 활발한 편이며 흉노와 한(漢)의 교류나 관계망의 형성에 대한 연구도 많다.
흉노 또한 중국의 유물을 받아들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동경(銅鏡)으로, 당시 동북아시아 사회에서 한나라 문화의 위치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그밖에도 한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음과 동시에 사여(私與)되었던 각종 인장(印章)과 중국식의 마차 구성품들 또한 동경 등과 함께 조사되기도 하여 당시 한나라의 외부 민족에 대한 통제 방식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주요한 유물로는 스키타이식 W형 화살촉, 아케메네스식 양인단검(兩刃短劍)ㆍ칼ㆍ도끼ㆍ찰갑ㆍ고삐ㆍ마면(馬面)ㆍ방울ㆍ각종 마차용구ㆍ대구(帶鉤)ㆍ원경(圓鏡, 둥근 거울), 스키타이식 솥 등이 있다. 이러한 유물들을 통해 북몽골 고원에 위치해있던 철륵이나 남러시아의 스키타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유물의 특징은 스키타이계 동물 문양을 수용한 점인데, 각종 장식물에 예외 없이 동물 문양이 있다. 이러한 흉노의 스키타이계 청동기 문화는 전국시대부터 위진남북조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화북지역에 파급됨은 물론, 동쪽으로는 만주와 고구려를 비롯한 한반도와 멀리 일본까지 영향을 미쳤다.
또한 흉노에 의한 동서교류는 또한 호한문화(胡漢文化)의 창출에서 나타나고 있다. 흉노 문화는 스키타이계에 속하는 오르도스 문화와 주변 문화, 특히 한(漢)문화와 융합된 이른바 ‘호한문화’다. 이것은 오르도스 청동기 문화와 맥을 같이 하는 연속선상의 계승문화, 혹은 발전문화로서 한나라 문화적 요소가 뚜렷한 것이 특징인데, 대표적 유적지인 노인울라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로 증명된다.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 사이 것으로 추정하는 노인울라 유적지는 울란바토르 북쪽에서 약 100 km정도 떨어진 산중에 있는데, 1924년 소련 지리학회가 파견해 울란바토르에 체재 중이던 소련ㆍ몽골ㆍ티베트 탐험대가 고분들을 속속 발굴했다. 총 212기의 고분은 모두 수츠주크테(Sutszukte)를 비롯한 세 골짜기 경사면에 위치하는데, 외관상으로는 남러시아, 남시베리아의 쿠르간 형식과 점재한 소형 성토식분 형식, 그리고 작은 웅덩이식 묘 등 3가지 형태다.
구조는 중국(전국시대와 진ㆍ한시대)과 한반도(낙랑고분)의 분묘와 유사한 절두방추형(截頭方錐形)이다. 즉 구조의 주체인 기실(基室)은 지하 광내(壙內)에 목재로 만들고, 그 위에 봉토를 씌우고 지하의 곽실(槨室)로 이어지는 갱도를 앞에서 파들어가는 형식이다.
그러나 중국이나 한국의 고총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지하분도, 주로 남측 위에 좁고 긴 봉토를 씌우는 전방구(前方丘)가 주구(主丘)와 이어 붙어 있는 것과 봉토의 기초나 측면 및 표면을 조약돌로 다진 점이다. 그밖에 곽실 내부 장식에서도 다른 점이 엿보이는바, 한국의 경우 기실 내를 벽화로 장식하지만 여기서는 벽화 대신 여러 가지 문양의 자수 모직품이나 비단천으로 기둥이나 대들보를 장식한다.
요컨대 알타이 지방 특유의 스키타이 쿠르간 형식에 한나라 시대의 목실분(木室墳) 형태를 융합시킨 일종의 혼합형으로 흉노와 한나라 간의 교류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스키타이나 서아시아 및 소아시아 예술에서 자주 보이는 동물투쟁 문양이 확인되며 노인울라 6호분에서 출토된 걸개 모직 카펫에는 티베트나 중앙아시아에서 번식하는 야크가 뿔사자와 싸우는 장면을 수 놓았다.
또 다른 문양으로는 페르시아계의 대칭문양(對稱文樣)을 찾아볼 수 있다. 역시 6호분에서 출토된 은으로 된 원형식판에는 중앙에 야크를 놓고 좌우에 나무를 대칭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끝으로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고대 예술품에서 특징적으로 발견되는 기하학 문양도 일부 유물에서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6호분에서 출토된 호피(虎皮) 문양의 카펫인데, 여기에는 방형, 피라미드형, 冂자형, 工자형 등 9가지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수놓았다.
흉노와 관련된 자료는 생각보다 많지만 국내에 그렇게 넓게 알려지지 않은 편이고 흉노의 유물들의 여러 요소들이 꽤 동북지역,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친 것에 대해서 간과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흉노족 신라왕족설과 같은 게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직접적인 것은 아니고 모티브적인 차원에서의 영향을 생각보다 많이 받았다. 일단 흉노 자체가 고조선과 동맹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흉노는 한나라와 더불어 기승용 마구(馬具)를 보편적으로 사용했었으며 이로 인해서 기원전 1세기∼기원후 3세기경의 동북아시아는 크게 중원계 마구와 흉노계 마구로 나뉘기도 한다.
대표적인 유적들은 대부분 고분 자료들이며 도르릭 나르스, 보르한 톨고이, 골모드, 노용올, 모린 톨고이 등이 유명한 고분이다. 이 가운데서 도르릭 나르스와 모린 톨고이 고분군은 국립중앙박물관이 공동 발굴한 유적이다.
동물문 장식이 많은 만큼 실제로 무덤에서도 동물과 관련된 아이템들이 많은 편이다. 한국에서야 통상 일부 품목에서만 골각기가 확인되지만 흉노는 활부터 시작하여 화살촉이나 각종 장식 등으로 활용한 다양한 골각기를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예 무덤의 시신 안치 공간의 머리맡에 동물의 두개골을 고스란히 묻기도 하는 등 동물과 함께 생활하는 ‘유목민족’스러운 부장품을 매납(埋納)하였다.
인종적으로 어떤 존재를 흉노라고 불렀는지는 지금도 분명하진 않다. 흉노란 집단이 없어진 지금에 와선 모든 게 추측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일단은 튀르크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많이 나오는데, 현대 들어 흉노 고분에서 발굴된 흉노 관련 자수화 같은 것을 보면 튀르크계 외모에 가깝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몽골계 주장도 나오지만, ❮몽고비사❯로 주장하던 몽골의 선조인 몽올실위(蒙兀室韋)는 몽골 초원 동쪽에 존재하긴 했지만 돌궐보단 훨씬 늦게 나타났고, 돌궐은 몽골보다 몇 세기 먼저 간, 가한(khan)이라는 단어를 쓴 걸 보아 튀르크계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존재한다. 이외에 퉁구스 또는 예니세이어계 민족 등 다양한 추측들이 있다.
그 외 일부 고분에서 발견된 유골 가운데는 인도유럽계 인종과 유사하다고 추정되는 인골들도 출토되었고, 몽골계일 가능성도 여전히 제기되는 상황. 다만 동양적 특징이 보이는 장두 인종인 튀르크계가 그런 식으로 보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 때문에 터키와 몽골은 흉노의 역사를 놓고 여전히 줄다리기 중이지만 자료가 거의 남지 않은 현재로선 그저 미궁일 뿐이다.
한편, 절충론 비슷하게 중앙아시아의 다양한 유목민족의 집단 연합체가 흉노였다는 말도 나온다. 사마천은 ❮흉노 열전❯에서 묵특에 의한 건국 초기의 일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그 특징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십진법을 따른 군사, 정치, 사회 조직을 관통하고 있다.
남쪽으로 좌, 중, 우로 된 3대 분할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군주를 중앙에 둔 좌ㆍ우 양익체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영민, 분지를 가진 만기 24명이 모인 연합 권력체이다. 여기에 보충 설명을 가하고 있는 이성의 비소왕들도 그들이 인솔하는 제족 집단을 포함하여 흉노 국가는 다원, 다종족의 국가였다고 추측한다.
흉노를 민족명이면서 국가명으로 보면 설명 가능하다. 즉 흉노란 여러 유목민족의 여러 집단 중에서도 지배민족의 명칭이고 이것이 동시에 흉노가 이끌던 국가의 이름으로도 쓰였다고 추측한다. 즉 흉노족 자신들이 이끌던 국가명에 자신의 종족명을 붙임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리고 이런 성향은 흉노 이후의 유목민족들도 중국으로 침투하여 한화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대로 답습했다. 후대의 유연, 돌궐, 위구르 등도 모두 이런 케이스에 해당한다. 이런 사례는 유럽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서로마 제국 멸망 후 일시 유럽을 통일한 프랑크 왕국도 프랑크족이 건설했지만 실제론 프랑크족이 주류 민족이 아니라 지배층만을 이루었고, 다수 피지배층은 다른 게르만족이나 갈리아인 그라고 로마인들이었다. 그리고 흉노 국가 자체는 망했어도 흉노란 민족 자체는 살아남아 5호 16국시대에 다시 자신들만의 국가를 만든 것으로 보면 된다. 다만 이 당시의 흉노족은 많이 한화가 되었거니와 건국한 곳이 중국 땅이어서 한(漢), 조(趙), 하(夏) 같은 중국 왕조명을 썼던 것이다.
흉노를 국가명과 민족명으로 구별하면 흉노족이 선비족 등의 다른 민족들과 세력다툼을 벌인 것이나 민족 단위로 분쟁이 끊이지 않은 오호십육국시대에 혁련발발(赫連勃勃, 381년∼425년)이 ‘북하(北夏)’ 같은 흉노족 국가를 세운 것 등을 설명하기 쉽다.
물론 확실한 자료가 남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추측이지만, 다른 유목민족의 예를 보아도 흉노를 단일민족으로 보기는 힘들며 여러 유목민족의 집단 연합체일가능성이 제일 높다.
2018년 5월 ❮네이처(Nature)❯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다섯 구의 흉노인 유골의 유전자를 검사한 결과, 추출된 4개의 Y-DNA 하플로그룹은 R1, R1b, O3a 및 O3a3b2이며, 추출된 5개의 mtDNA는 D4b2b4, N9a2a, G3a3, D4a6, D4b2b2이라고 한다. 이를 통해 흉노는 서유라시아계와 동아시아/시베리아계 혈통이 섞여있으며, 이웃한 오손, 강거, 샤카보다 동아시아계 혈통이 더 많이 섞였음을 알 수 있다.
로마제국 동쪽에서 등장해 유럽을 휩쓸었던 아틸라의 훈족(Hun族)을 이 흉노와 같은 종족으로 보는 시각이 옛날부터 꾸준히 있었다.
흉노의 흉(匈)은 ‘훈(Hun)’을 중국어의 음차로 부른 명칭이라는 설도 있고, 훈족은 남흉노와 한나라 연합군과의 세력 다툼에서 밀린 북흉노가 중앙아시아 유목민에게 동화되면서 그 집단이 유럽으로 일직선으로 전진한 거라고 추정하는 설도 있지만 이건 가설의 단계. 아직까지도 시원하게 반박되거나 증명되지 않았다.
현재에는 적어도 훈과 흉노는 동일한 어휘이고, 몽골 고원 일대에서 기원한 인적 집단이 서방으로 확산되었다는 설은 많은 지지를 받는다.
양자의 이름이 동일하다는 것은 입증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313년, 소그드 상인은 간수 회랑에서 사마르칸트로 보내는 편지에서, 중국의 남흉노 집단을 ‘훈(Xwn)’이라 부르고 있으며, 이 이름은 유럽의 ‘훈(Hun)’과 관련이 있다. 이것이 ‘흉노(χiʷongʿnuo)’와 연관이 있을까?
이 연관성에 대해 중국어 음운학자들은 큰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고, 흉노가 중앙아시아에 출연한 이후 언제나 이와 같이 불렸기에 다른 기원이 있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고대 소그드의 편지 이외에도, 둔황의 월지인인 축법호(Dharmarakṣa)는 280년에 ❮점비일체지덕경(漸備一切智德經) Tathāgataguhya-sūtra❯을 산스크리트어에서 중국어로 번역하면서, 흉노를 ‘후나(Hūṇa)’로 옮겼으며(산스크리트어 판본은 현존하지 않으나, 티베트어 번역에서도 마찬가지로 ‘Hu-na’라 적혀 있다), 308년 번역한 ❮보요경❯❮普曜經(Lalitavistara)❯에서도 똑같이 옮겼다.
2018년, 에스케 빌러슬레프 덴마크 코펜하겐대 지리유전학센터 교수팀이 약 4,500∼1,500년 전 사이의 중기 구석기∼신석기시대 인류 137명의 유골로부터 게놈을 추출, 해독해 ❮네이처❯에 발표했는데, 물론 향후 연구가 더 이뤄져야 하는 부분은 있겠지만, 이 연구만 보자면 일단 훈족과 흉노족이 적어도 유전적으론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기사엔 흉노족이 중국이라고 되어있는데, 당연히 중국, 특히 한족계와 혈연적 연관성은 떨어진다. 그냥 유럽 훈족마냥 그 지역에서 인상적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인 듯. 물론 애초부터 흉노라는 말 자체가 여러 유목민족들의 연합체 성격이 강하다.
❮산해경(山海經)❯에 따르면 흉노는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이계의 자손이었다고 하나,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 게다가 ❮산해경❯이라는 책 자체가 판타지 소설에 가까워서 신뢰할 수 있는 내용이 못 된다. 사마천은 ❮산해경❯에 대해 ‘감히 말할 수 없는 기서’라면서 판단을 유보했지만, 정작 그런 사마천도 ❮사기(史記)❯에서 흉노의 선조는 하후씨(夏后氏)의 후예(苗裔)라고 적어놓았다. 이는 상술한 바처럼 중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비롯된 갖다 붙이기라는 견해가 강하다. 한국의 김병준 교수는 특이한 설을 제시했는데, 흉노가 원래는 중국에 살던 민족 중 하나였으나 점차 북방으로 이주하면서 정주문화를 버리고 유목문화로 갈아탔고 ❮사기(史記)❯의 기록은 그런 정황을 신화적으로 풀어낸 것이라는 것이다.
중국사에 흉노가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인 ❮설원(說苑)❯에 따르면 기원전 312년 누번의 영토에 거주하는 흉노가 급습해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다만 이 정보의 신빙성에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리고 그 뒤로는 전국칠웅(全國七雄) 중에서도 북방의 조(趙)나라를 꾸준히 괴롭히다가, 그만 이목의 기만책에 낚여서 처절하게 묵사발로 만들어버린 기록이 있다. 이때 자그마치 10만명이 죽고 선우는 목숨만 건져 달아났다고 하니, 이목도 이목이지만 10만 명이나 모여 있던 흉노도 대단하다. 물론 중국사서의 특성상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다. 어쨌든 이 한 판으로 흉노의 조직은 거의 와해된 셈이다.
하지만 그러고도 남은 무리들은 서쪽 오르도스 지방에 모여 살면서 진(秦)나라의 우환이 되었는데,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의 명을 받은 몽염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를 공격해 밀어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황하 밖으로 오르도스를 빙 둘러서 만리장성을 쌓아버렸다. 오르도스 확보와 만리장성 축조는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키고 자원을 소모하여 결국 진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졌지만, 흉노의 약화라는 목적만은 달성할 수 있었다.
시황제 아래에선 찍소리도 못 하고 지내던 흉노였지만 진말의 농민봉기에 이은 초한전쟁으로 중국의 국력이 약해지면서 다시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이룬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묵돌선우(冒頓單于).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건 유방이 전한을 세우고 나서부터이다.
한고제 유방은 기세 좋게 토벌에 나섰지만 그야말로 굴욕적인 패배를 했다. 흉노는 유방의 조심성을 역으로 이용하여 유방의 보병을 유인한 뒤 기병 포위전략을 써서 유방을 떡발랐다. 진평의 계략으로 겨우 풀려났지만 결국 패배는 패배. 전한은 흉노에게 한나라 여인을 선우의 아내로 바치고, 그 외 각종 물자와 인력을 보낸다는 조건으로 굴욕적인 화약을 맺게 된다. 그나마 북송은 거란의 요나라와 형제의 맹약을 맺을 때 송나라 쪽이 형 역할을 맡아 체면이라도 차렸는데, 이 화약의 경우엔 한나라 쪽이 동생이었다.
나중엔 여후에게 묵돌 선우가 그대가 과부가 되었다고 들었소. 나도 외로우니 우리 서로 부족한 것을 결합해 나와 혼인하는 게 어떻겠소. 같은 식의 무례한 편지를 보내도 진나라 말기부터의 전쟁과 항우가 벌인 수많은 학살 때문에 인구수든 생산량이든 뚝 떨어져서 장수들도 말이 없어 소를 타고 다니는 상황이었기에 토벌도 할 수 없었다.
그 뒤로 평소엔 평화유지비를 받아먹고 먹을 거 떨어지면 국경을 두들겨대다가 복수의 칼날을 갈던 한무제에게 된통 걸려서 너 죽고 나 죽자로 싸우게 되었는데, 수십 년간 지든 이기든 10만 명 이상씩 계속 초원으로 원정군을 보내는 쇼미더머니(show me the money) 소모전에 밀려 결국 선우정이 막북으로 쫓겨가게 된다. 그래도 세력은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기에 마지막 한나라의 총공세를 기적적으로 막아내 민족 자체는 지켜낼 수 있었지만 세력은 쪼개지고 황하 상류 서쪽의 4군 무위(武威)ㆍ장액(張掖)ㆍ주천(酒泉)ㆍ돈황(敦煌)을 잃으면서 서역과 실크로드 무역로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해 경제적으로 궁핍해졌다.
이후 한나라를 약탈하는 게 잘 되지 않으니 대신 오손을 공격했다가 한 선제가 오손과 손잡고 무제 사후 오랜만에 20만 대군으로 쳐들어오니, 흉노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달아나다가 수만 명씩 죽어나가는 참혹한 시절을 보내게 된다. 나중에는 흉노가 이 꼬라지가 된 걸 본 정령(丁令), 오손(烏孫), 오환(烏丸) 등 흉노에 복속되어 있던 민족들이 전부 들고 일어났다. 이때 흉노는 진압하지 못하고 그들에게까지 거꾸로 두들겨 맞는 동네북이 되었고, 자연재해까지 겹쳐 한나라가 흉노에 기병을 보내 흉노인을 약탈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적어도 두만 때부터 흉노는 장자 세습의 원칙을 이어갔으나, 한 무제와의 대전 중에 군신선우(軍臣單于, ?∼기원전 127년)가 죽자 급했는지 병약한 장자 어단 대신 군신선우의 동생 이지사를 선우(伊穉斜 單于, ?∼기원전 114년)로 세웠고, 이후 이지사의 후손들이 일찍 죽어나가 장자 세습의 원칙을 더 견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선우위를 놓고 내부에서 궁정 암투가 극심해지며 선우의 정통성도 점차 결여되었고, 결국 한 무제의 손자인 선제 때에 이르자 후계 구도가 막장으로 치달아 한때는 선우를 일컫는 자가 다섯 명이나 되는 혼란상에 빠져들었다. 그중 호한야가 겨우 대충 아우르나 싶더니 그전까지는 조용하던 형 질지가 갑자기 들고 일어나서 호한야를 두들겨 내쫓았다.
궁지에 몰린 호한야는 한나라에게 칭신(稱臣)하고, 질지(郅支) 역시 한나라와 잘 지내려고는 했지만 서로 대등한 관계를 원했기 때문에 한나라는 호한야의 편을 들었다. 고립된 질지는 서쪽으로 활로를 찾으니 호한야의 세력은 동흉노, 질지의 세력은 서흉노가 되었다. 서흉노는 강거로 가서 서역의 패권을 잡으려고 시도했지만 한군의 토벌로 멸망하였다.
후한대에 이르러서 다시 선우위 계승 문제로 남흉노와 북흉노로 갈라졌다. 북흉노는 그후 여러 번 국경을 침범하다가 후한 명제∼화제 때 반초의 서역 정벌과 화제 때 두헌(竇憲)의 북방 정벌 이후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반초의 아들 반용(班勇)의 서역 정벌 때 다시 털린 후 151년 이오(伊吾)를 공격하다 실패한 것을 마지막으로 신장 일대에서 완전히 그 세력을 잃는다. 그 후 4세기 엄채국(奄蔡國)를 함락했다는 기록만이 남아 있다.
이후 후한은 남흉노에 대한 회유정책을 펴 남흉노는 사실상 후한에게 복속된 상태가 되었으며 결국 후한이 남흉노인들을 관내로 집단 이주시켜 군사적 용병으로 써먹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흉노의 명목상 선우 직위는 계속 유지되어왔는데 건안 16년(216) 조조가 흉노 부락을 좌, 우, 남, 북, 중의 5부로 분할하고, 각 부 중에서 수(帥)를 선발해 통솔시키며 수 아래 한인의 사마(司馬)를 두어 감시하고, 5부 전체는 사흉노중랑장(匈奴中郞將)이 감시하게 했다. 중랑장은 태원(太原)에 주둔했는데 병주자사(幷州刺史)를 겸했고, 남선우는 아무런 실권도 없었으므로 흉노 전체가 노예 상태가 된 것이었다. 삼국시대에는 조위-서진의 지배를 받았으며 흉노는 정치적으로 자립성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경제생활에서도 하층민으로 전락하여 한인들의 멸시를 받았다.
이후 흉노가 다시 흥기한 것은 서진의 팔왕의 난, 영가의 난으로 인한 혼란 때문으로 결국 진나라를 멸망시키기에 이르렀으며 5호 16국시대에 한(漢), 전조(前趙), 북량(北凉), 북하(北夏) 등의 국가를 세우기도 했다. 이후 탁발선비족이 중심이 된 북위가 흉노계 호한체제 국가들을 멸망시키면서 흉노의 명맥은 완전히 사라졌다. 독고부 등 몇몇 후세 인물들이 흉노의 후손이라는 기록만이 남았을 뿐이다.
관롱집단(關隴集團)의 대명사로 유명한 수 문제 양견의 부인 독고씨는 흉노의 후예였다.
좌현왕 이하의 장군들은 예맥, 고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고 한다. 고조선 왕이 내린 작호 중 하나인 ‘비왕(裨王)’은 흉노족의 ‘비소왕(裨小王)’에서 따온 말로 추정된다. 아마도 고조선이 흉노와 연계하여 전한에 대항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조선 멸망 때 흉노의 왼쪽 팔을 잘라냈다고 기록된 것에서 고조선과 흉노의 관계를 알아 볼 수 있다.
신라 마립간 시대의 무덤인 돌무지덧널무덤이 흉노 지역의 쿠르간 무덤과 형태가 유사해 관련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원래 무덤양식은 잘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이 있었다. 또 이와 별도로 신라 중대 이후 몇몇 신라인들이 묘비에 자신을 흉노 귀화인인 김일제(金日䃅)의 후손이라고 자칭하기도 했다는데, 이를 입증할 만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하지만 이 때문인지 인터넷에선 일부 네티즌들이 경상도를 깔 때 쓰는 말로도 쓰인다. 유래는 흉노족 신라왕족설인데, 신라인들이 스스로를 흉노 출신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나,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의 신라의 유래는 이와는 다르며, 또한 흉노와 연관되어 있다는 고고학적 확실한 증거는 나오지 않는 상태이다. 따라서 정해진 학설이 없는 만큼 신중을 요한다.
05. 한서(漢書)를 쓴 반고(班固)
반고(班固, 건무 8년(32년)∼영원 4년(92년))는 1세기경의 중국 후한의 역사가이다. 자는 맹견(孟堅)이다. 부풍(扶風) 안릉(安陵, 지금의 섬서 성 함양) 사람으로 한 무제 때의 월기교위(越骑校尉)를 지낸 반황(班况)의 증손자이다.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후한 이전 전한의 유사를 두루 채집하여 ❮후전(後傳)❯ 수십 편을 짓는 등 훌륭한 역사가로 이름 높던 아버지 반표(班彪)로부터 독서와 학문을 배웠다. 아홉 살에 문장에 능했고 16세의 나이로 수도 낙양의 태학(太學)에 들어 여러 서적을 두루 섭렵하였다고 한다.
건무 30년(54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반고는 태학에서 돌아와 삼년상을 치렀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서(漢書)❯ 1백 편의 저술을 계속했지만, 이 때문에 사사로이 나라의 역사를 짓는다(私修國史)는 고발을 당해 체포되어 구금당한다. 동생 반초(班超)가 나서서 황제에게 반고가 ❮한서❯를 짓는 목적은 한 왕조의 공덕을 찬양하고 후세 사람들에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하여 교훈을 남기고자 함이지 조정을 비방하거나 할 뜻은 없음을 변론했다. 훗날 반고의 무고함이 밝혀지자 명제(明帝)는 반고의 집에 금과 전을 지급하고 역사책을 계속 저술하도록 허락했다. 어느 날 명제가 반고에게 “경(卿)의 동생은 편안한가?”라고 물었을 때 반고는 “관리가 되어 책을 베껴다 늙으신 어머니를 공양하고 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명제는 반고의 재능을 높이 사서 그를 난대령사(蘭台令史)로 삼고, 조를 받들어 진종(陳宗), 윤민(尹敏), 맹이(孟異) 등과 함께 ❮세조본기❯(世祖本紀) 및 여러 전기(傳記)를 짓게 했다. 반고는 후에 낭(郎)으로 옮겨지고, 전교비서(典校秘書)로서 다시 공신(功臣), 평림(平林), 신시(新市), 공손술(公孙述) 등의 열전을 짓게 되었다. 당시 반고와 같은 난대령사를 맡고 있던 부의(傅毅)도 반고와 함께 나란히 문장으로서 이름을 떨쳤는데, 반고는 반초에게 보낸 글에서 “무중(武仲)은 속문(屬文)에 능해서 난대령사가 되었는데 그 붓이 종이에 한 번 닿으면 쉬는 법이 없다.”고 평한다. 반고 또한 조칙을 받들어 그 아버지가 해왔던 저술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장제(章帝)는 반고를 현무사마(玄武司馬)로 임명했다. 건초(建初) 4년(79년) 장제는 전한 선제(宣帝)의 석거각(石渠閣)의 고사를 본받아 여러 왕(王)과 조박(趙博), 이육(李育) 등의 유생들을 백호관(白虎觀)에 불러모아 오경(五經)의 다르고 같음을 강론하게 했는데, 이 대대적인 유학(儒學) 세미나의 토론 내용을 반고가 기록하여 지은 것이 바로 ❮백호통의(白虎通義)❯였다. 건초 7년(82년)에 반고는 ❮한서❯의 내용 대부분을 완성했다.
화제(和帝) 영원(永元) 원년(89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반고는 관직을 사임하고 집에 있었는데, 마침 두헌(竇憲)이 병사를 거느리고 흉노를 치게 되자 반고도 두헌의 군에 종군하여 중호군(中護軍)으로서 중랑장(中郎將)의 임무를 수행했다. 흉노를 크게 쳐부순 뒤 늑석연연산(勒石燕然山)에 그 공적을 새기는 명문을 짓고 쓴 것이 바로 반고였다. 반고는 또한 ❮두장군북정송(竇將軍北征頌)❯을 지어 두정이 북쪽으로 흉노를 정벌한 사실을 크게 찬양하였다.
그러나 예전에 반고의 집안 노비에게 술에 취해 모욕을 당한 일로 앙심을 품은 낙양령(洛陽令) 충경(种競)이, 영원 4년에 두헌이 실세하여 자살에 이른 뒤 두헌의 측근으로서 관직에서 면관되었던 반고를 잡아다 태형을 쳤고, 반고는 옥사했다. 나이 61세. 이때 ❮한서❯의 표(表)8과 천문지(天文志)는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채였다. 화제는 그 여동생 반소(班昭)에게 명하여 황실 도서관인 동관(東觀)의 장서각(藏書閣)에 소장되어 있던 자료를 갖고 반고가 하던 일을 마무리 지어 완수하도록 했지만, 반소 역시 일을 마치지 못한 채 사망한다. 황제는 반고와 같은 군에 살던 마속(馬續)이 그의 문하 사람이었고 고금의 일에 두루 밝다 하여 그에게 ❮한서❯의 반고가 완성하지 못한 부분을 완성하도록 명했다고 한다.
결국 한서(漢書)는 반표로부터 아들 반고, 그리고 딸인 반소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족이 참여하여 집필된 것이다. 유일하게 반초는 언급되지 않는데, 반초는 평생 서역을 지키며, 흉노족과 서역을 개척하는 데 일생을 바쳤기 때문이다. 본기(本紀) 12편에 표(表) 8편, 지(志) 10편, 열전(列傳) 70편으로 되어 있던 원래의 ❮한서❯ 체제는 훗날 다시 120권으로 나뉘어, ❮사기(史記)❯의 체제와는 달리 세가(世家)는 모두 빠지게 되었다.
또한 반고는 한의 주된 시문학 양식이자 산문시의 일종인 부(賦)를 지었는데 일부가 후세에 출판되었다.
한서(漢書)는 흠정 24사 중 두 번째 역사서. 한 고조 유방이 전한을 창건한 기원전 206년부터 왕망의 신나라가 망한 23년까지의 역사를 담고 있다. 신나라가 망한 후부터 후한이 망한 대까지의 기록은 ❮후한서❯에 있다. 후한서와 구별하기 위해 ‘전한서’라고도 부른다. 제기(帝紀) 12권, 표(表) 8권, 지(志) 10권, 열전 70권으로 전 100권의 분량이다. 이후 역대 중국 왕조의 정사는 한서의 체제를 따른다.
반고는 ❮사기❯를 쓴 사마천을 존경했는데, ❮사기❯는 전한이 망하기 전에 만들어서 전한의 모든 역사를 담지 못했다. 저술은 반표(白虎通義)가 시작했는데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큰아들 반고가 뒤를 이어 저술했다. 그러나 표(表) 부분과 ❮천문지(天文志)❯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는데, 반고가 당시 실각한 황실 외척 두헌과 한패로 몰려 옥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동생 반소반소(班昭, 45년?∼117년?)가 뒤를 이어 저술하여 결국 ❮한서❯를 완성했다. 여동생 반소가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빠를 이어 역사책을 서술한 것은, 한나라 당시 여성의 사회참여가 높았기 때문이 아니라, 과거 사관은 가문 안에서 세습했기 때문에 그녀가 당시의 적임자였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로, 사마천은 아버지 사마담의 사기를 이어서 집필했다.
반소는 아버지를 닮아 학식이 넓었는데, 조세숙(曹世叔)에게 14세 때 시집갔다가 과부가 된 후에 화제가 궁중으로 불러들여 황후, 후궁 등 궁궐의 부녀자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후한서❯ ❮열녀전❯에 보면, ‘반소의 오라버니 반고가 ❮한서❯를 집필했지만 표와 ❮천문지❯는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기에 화제가 반소에게 명하여 동관(東觀) 장서각(藏書閣)에서 완성하게 하였다’는 언급이 남아 있다. 이때 반소는 표 부분을, 마속(馬續)은 ❮천문지(天文志)❯를 썼다.
이렇게 ❮한서❯는 반씨 일가 아버지, 아들, 딸 3인의 노력과 마속의 협력으로 완성하였으니, 4명의 손을 거쳐 40여 년을 들여 완성한 역작이다. ❮사기❯, ❮후한서❯, ❮정사 삼국지❯와 함께 전사서(前史書)이자 개인이 편찬한 역사서인 사찬서로 유명하다. 반표의 작은 아들이자 반소의 작은 오빠는 서역을 개척한 반초(班超, 32년∼102년)로, 그는 서역에서 평생을 보냈기에 ❮한서❯ 편찬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서사적인 면모가 강한 사기에 비해 역사를 체계적으로 서술하는데 중점을 둬서 겹치는 부분인 고제기(사기의 고조 본기)를 비교해 봐도 연도와 달을 명확히 표기하고 사건의 선후순서를 잘 정리하였다. 때문에 한서의 고제기는 초한시대를 살피는 데 가장 기본적인 토대로 삼기에 매우 유용하다.
한서는 사실 사기의 성과를 토대로 하여 성립하였다. 예를 들어 한서는 사기에 없었던 혜제기(惠帝記)를 추가하고 당시 사회의 중요한 제도와 법령들을 소개하고 있다. 또 사기의 위장군 표기 열전에서 장건의 사적을 추출해 내어 독립된 전으로 구성하였다. 가의(賈誼)의 치안책(治安策), 조착(晁錯)의 언병사소(言兵事疏) 같은 중요한 상주문을 포함시켰다. 이런 비교적 완전한 조서(詔書)나 주의(奏議)의 인용은 사기와 비교되는 한서의 중요한 장점 중 하나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반고는 지(志)와 표(表)의 찬술중에 그의 광박(廣博)한 학식을 드러냈는데 한서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진한시대의 관제에 대한 서술로 비록 세세하게 하나하나의 설명이 다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굉장히 요점을 파악하게 핵심을 잘 서술했다고 평가 받는다.
이외에도 형법지(刑法志), 지리지(地理志), 오행지(五行志), 예문지(藝文志), 식화지(食貨志)는 당시의 제도와 지리의 연혁, 기상현상, 생물 등을 알아보고자 할 때 굉장히 중요한 참고자료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사기의 서술 범위인 한 무제 이후의 사실 역시 반표(班彪)의 사기후전(史記後傳) 외에 유향(劉向), 유흠(劉歆), 양웅(揚雄), 풍상(馮商) 등의 저술을 참고로 삼았다.
특히 한서는 비교적 객관적인 서술을 하여 왕망전(王莽傳)의 경우 서한 시대와 이어진 신왕조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참고자료가 된다. 동관한기나 후한서 같은 책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유수를 미화하고 왕망을 폄훼하는 듯한 서술이 있는데 한서의 경우 최대한 객관적인 측면으로 사실에 접근하고자 한 노력이 엿보인다. 한서가 이런 방식으로 서술된 것은 응당 그 저자인 반고가 중국 전통적인 유학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당시 중국 봉건사회의 예교(禮敎)사상 때문에 한 무제 시대의 사마천만큼 대담하게 역사가의 직필정신을 드러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역사가로서의 자각심은 있었던 지라 서한시대의 다양한 부패한 정황을 그대로 서술하지는 못하고 또 덮어버리지도 못하는 심리적인 모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회를 비판할 때에 자기의 말을 그대로 싣는 것이 아닌 사마천이 기존에 썼던 사기를 인용하되 일부를 보충하는 방법으로 사회의 심리적 구속과 역사가로서의 사명감에 균형을 유지했던 것이다.
열전의 제목을 정할 때 각 인물의 존칭이나 관직명을 쓴 사기와는 달리 각 인물의 본명을 명시하여 사기에 비해 누구의 열전인지 명확하게 파악하기 쉽게 편성했고 이후의 정사들도 모두 이 체계를 따랐다. 열전의 순서를 창업자와 경쟁한 군웅들의 일대기를 먼저 넣고 그 다음에 개국공신의 일대기를 넣는 식으로 정사의 열전 순서를 체계화했다.
표(表) 마지막 부분에 고금인표(古今人表)가 있는데, 이는 오제시기부터 반고 생전까지 살았던 인물들의 공과 덕을 평가하여 9등급(上上 - 上中 - 上下 - 中上 - 中中 - 中下 - 下上 - 下中 - 下下)으로 나누어 배열한 것이다. 이 중 최고 등급인 상상(혹은 성인聖人)에는 삼황오제 등 14인이 실려 있고 상하 혹은 지인(智人)에는 창힐, 포숙이 실려 있으며, 중상과 중중에 묵자, 한비자, 손무와 같은 제자백가가, 중하에 진시황, 항우가, 그리고 최저 등급인 하하 혹은 우인(愚人)에는 나라를 망하게 한 군주들이 실려 있다.
중요한 역사서지만 인지도가 같은 한나라를 다루는 ❮사기❯에 한참 밀린다. 2015년 기준 20여 년 전에 완역본이 처음 나왔던 ❮사기❯에 비해, ❮한서❯는 이제야 완역을 위한 작업에 착수한 참이고, ❮사기❯ 열전이 전문가, 비전문가 막론하고 번역해서 시장에 쏟아져 나와 있는 반면에 ❮한서❯는 그중 일부인 ❮지리지(地理志)❯, ❮구혁지(溝洫志)❯, 열전만 일부만 번역된 상태이다. 사실 이는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는 게, 사기는 단순 한나라 역사만이 아닌 한나라 이전의 세대까지도 폭넓게 기록했고, 기전체라는 문체까지 새로 만들어냈고, 심지어 한서조차도 사기의 내용을 인용한 부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