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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준비하여야
고후 9:1-5
1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2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준비하였다는 것을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의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분발하게 하였느니라
3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가 말한 것 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4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가 준비하지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5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고후 9:1-5 /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헌금] 하나님의 백성을 돕는 일에 대해서는 새삼스럽게 또 여러분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일에 여러분이 얼마나 열성을 보이고 있는가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래서 나는 여러분이 헌금을 보낼 준비를 일년 전부터 하고 있다는 것을 마게도냐에 있는 형제들에게 자랑까지 해왔습니다. 사실 여러분의 그러한 열성은 많은 사람들이 남을 돕는 일에 나서게 한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3) 이제 내가 이 사람들을 여러분에게 보내는 것은 그들에게 자랑한 대로 여러분이 헌금을 다 모아서 보낼 준비가 되었는지를 확인하고자 해서입니다. 그러니 나의 자랑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바랍니다. 4) 만일 마게도냐 사람들이 나와 함께 갔을 때, 아직 여러분이 헌금을 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나는 물론이지만 여러분의 부끄러움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5) 그래서 나는 이 형제들에게 당부해서 여러분이 약속한 그 선물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나보다 앞서 가게 한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마지못해 내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난 헌금을 해주기를 바랍니다.
성도의 헌신은 무엇이든지 남아서 필요 없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연약한 이들에 대한 존중과 사랑으로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섬김을 받는 이도 섬기는 이도 서로 정성을 다해 준비하고 감사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겸손히 권면하며 칭찬하고 격려하다(1-2) 연보를 권면하는 이유를 고린도의 성도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절실함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의 세세한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조심스럽습니다. 고린도의 성도들의 마음과 상황을 주의해서 살펴야만 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누군가를 돕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삶의 태도라 할지라도 서로를 대하는 태도는 언제나 감사와 존중하는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실한 것이고 그래야 감동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신앙의 원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린도의 성도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그들의 진심을 알고 있었기에 칭찬 또한 빠트리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디도의 일행이나 고린도의 성도들이 난처하거나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세심하게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진심이 느껴집니다.
준비된 연보 (3-5) 연보를 모으는 일도 전달하는 일도 모두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바울은 디도 한 사람을 깊이 신뢰하고 인정할지라도 다른 신실한 형제도 동행하게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그런 신뢰가 헛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단지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해야만 했습니다. 연보의 부족함을 크게 우려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만 예루살렘의 성도들의 상황이 긴급했습니다. 바울은 이미 고린도의 성도들이 약속한 연보가 있었기 때문에 미리 준비하여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섬기는 자의 자세는 이렇게 상대를 잘 살펴서 자신의 섬김이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준비하는 과정은 언제나 도고의 기도를 함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믿음의 손길을 통해서 전달되고 그렇게 연합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시 초대교회는 이렇게 세심하게 준비된 선한 일들을 통해서 많은 이방인에게 귀감이 되었고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적용: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형제와 자매들을 위해 기도로 준비하며 섬김을 함께 할 동역자와 아름다운 일들을 계획해 보시기 바랍니다.
2022년 방영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우영우(박은빈분) 변호사의 성장기를 다룬 드라마입니다. 드라마는 1회부터 삶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말해 줍니다. “이 사건은 재미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고래 퀴즈 같아요. 몸무게가 22톤인 암컷 향고래가 500kg에 달하는 대왕오징어를 먹고 6시간 뒤 1.3톤짜리 알을 낳았다면 이 암컷 향고래의 몸무게는 얼마일까요? (정명석: 모르겠어요.) 정답은 ‘고래는 알을 낳을 수 없다’입니다. 고래는 포유류라 알이 아닌 새끼를 낳으니까요. 무게에만 초점을 맞추면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핵심을 봐야 돼요.”
< 설 교 >
준비합시다
고후 9장 05절 / 강성찬목사
흔히 유비무환이라는 말들을 합니다. 항상 예비하고 살면 환난을 면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장마철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연 재해로 인하여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냅니다. 그때마다 대비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항상 있습니다. 성경에도 이러한 예는 많이 있습니다. 노아시대 때에 노아는 열심히 외쳤습니다. 타락한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사람들은 노아의 외침을 듣고도 무관심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준비를 안했던 것입니다. 준비안한 결과는 홍수심판으로 인한 멸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도 더 큰 유비무환은 없습니다.
준비하는 삶에 대한 여러 가르침이 있습니다.
보람 있는 내일은 오늘의 준비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보다 슬기로운 행동은 없습니다.
세르반테스는 "준비되었다는 것은 절반의 승리를 거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준비하는 시간은 일을 추진하는 시간보다 더 중요합니다. 준비를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에 따라서 일의 성과는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시인 오비디우스는 "돌아오는 시간을 기다리지 말라. 오늘 준비가 되지 못한 자는 내일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준비해야 할 시기를 놓치지 말고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땅 위에서 충분히 쉬고 있던 새가 한 번 날아오르면 거침없이 창공에 솟구치듯이, 충분히 준비하여 힘을 기른 사람만이 한 번 일을 시작하면 눈부신 활약을 펼칠 수 있습니다. 준비는 정확하고 충실해야 합니다.
보다 발전적인 미래를 위해서는 오늘의 충분한 준비가 필요한 법입니다. 내일을 위해 준비하는 사람은 더 높이 더 멀리 뛸 수 있는 자격과 자질을 갖추게 됩니다.
준비하는 사람은 매사에 진실하며 어떤 일에든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준비를 철저히 하는 사람만이 하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발전과 행복을 예약해 놓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김선일 씨의 죽음으로 온 세계가 놀라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아모스선지는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암4:12)고 합니다.
죽음은 노인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에는 순서가 없습니다. 죽음과 가까운 곳에 사는 노인들은 오히려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성격이 매우 급한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예고 없이 찾아와 사람을 당혹하게 만듭니다. 또 강력한 힘을 갖고 있어 아무도 죽음을 연기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그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신앙인들의 죽음이 평화스러운 것은 죽음을 `새로운 생명의 시작'으로 여기고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존 패튼 씨(1824-1907)는 식인종들이 사는 지역에서 처음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헌신은, 그가 선교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을 때에 안면이 있는 노인 한 분이 그에게 식인종에게 잡혀 먹힐까봐 염려가 된다고 말한 데 대한 그의 대답에서 명백하게 나타났습니다. 패튼씨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딕손 씨, 귀하께서는 연세가 많으셔서 곧 묘지에 묻히시게 되고 그 후에 벌레들에게 먹혀 버리시게 되겠지요. 제가 고백하건대 주 예수님을 섬기면서 살다 죽을 수만 있다면 식인종에게 먹혀 죽든지 벌레에게 먹히든지가 저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패튼 씨는 주님이 선택해 주시는 대로 어떤 방법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완전히 그리스도를 섬기는 결심이 되어 있어서 자기 어떻게 죽을 지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완전하고 조건 없이 주 예수께 몸을 맡기고 살든지 죽든지 자기 몸에서 주님이 존귀하게 됨을 바라는 바울 사도와 같은 열망을 나타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 1:21) (삶과 죽음에 대한 준비-둘로스 자료)
주님의 재림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다시 오시겠다고 제자들과 약속하셨는데, 그러나 제자들이 예상하지 못한 때에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4:44).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 날짜를 미리 정하는 사람들은 분명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오실 날을 계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제일 먼저 할 일은 그를 맞을 준비를 확실히 하는 것과 그가 오실 때에 그를 위한 사역에 충성하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45-46절).
이와 같은 가르침대로 살던 한 여인이 작은 시골 상점에서 물건을 사고 있었습니다. 몇몇 젊은이들이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다가 그녀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녀에게 농담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다시 온다고 믿는다면서요"하고 놀려댔습니다. 그녀는 "믿고말고요"라고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예수가 다시 온다고 정말로 믿어요?" 하고 그들이 묻자 "물론이지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그렇다면 빨리 집에 가서 준비해야지요. 예수님이 지금 오고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하자 그녀는 그들을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난 더 준비할 것이 없어요. 늘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주로 영접하고 매일 매일 주님의 뜻을 따라 살며 준비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곧 오십니다. 그날이 아침일지, 밤일지, 혹은 낮일지 나는 모르나 등불 켜고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오실지도 모릅니다. 내일일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시간 오신다고 할지라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매일의 삶도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잠자리에 들기 위해서도 준비한다고 합니다.
어떤 분이 여러 해 동안 HWLW라고 자신이 부르는 간단한 원리를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HWLW라는 것은 “그분의 (His) 말씀이 (Word) 하루의 마지막 (the Last) 말씀 (Word)”이란 말의 첫 자를 따서 만든 것입니다.
매일 밤, 불을 끄기 직전 성경 한 구절을 읽거나 아니면 외웠던 구절을 묵상한다합니다. 잠들기 전에 생각해 보는 마지막 말씀이 하나님 말씀이기를 원합니다.
저녁 뉴스도 아니고, 일기예보도 아니고, 심야 좌담회의 사회자의 말이나 유명한 사람이 한 말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하루를 마감하는 마지막 말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사 26:3)라는 말씀을 의식만이 아니라 무의식중에도 실천하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잠들기 전에 성경 한 구절을 읽거나 그날에 읽었던 구절을 묵상해 봅시다.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고 자신의 관계를 묵상하는 심령에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사람에게 주시는 “완전한 평강”이 임하고 필요한 하루 밤의 좋은 수면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예배에 대해서도 준비해야 합니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았다가 깊이 졸더니"(행20:9)라고 합니다. 교회의 집회에서 설교를 들으며 졸았던 사람은 아마도 유두고가 처음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많은 사람이 졸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단조로운 예배의 형태나 설교의 지루함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다른 요인들이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겨울에 바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따뜻한 온기로 인해 쉽게 졸음이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긴장이 풀리며 오는 졸음도 있습니다. 육체의 피곤이 원인일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토요일마다 정육점에서 17시간씩 일을 할 때에는 주일 아침 예배 시간에 졸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합니다. 토요일 저녁의 사회 활동들도 주일 아침에 졸게 만들 수 있습니다. 주일 아침에 하나님과 적극적으로 만날 수 있는 주요 방법 중의 하나는 그 전날에 올바른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위해서 더 잘 준비하려면 기도, 성경공부, 죄의 고백, 충분한 수면 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8살이 된 아이가 며칠 전부터 밤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침대 밑에다 실내화 한 짝을 던져놓곤 합니다. 이런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엄마가 넌지시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실내화 한 짝을 침대 밑에 놓는 거니?" 그때 아이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교회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잠자리에 들기 전 실내화 한 짝을 침대 밑에 놓으면 아침에 일어나 실내화를 찾으려고 침대 곁에서 무릎을 꿇게 되는데 그때 바로 잊지 말고 기도해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무릎 꿇고 기도하기 위해 그런 거예요."
헌금에 대해서도 준비해야 합니다.
갈보리선교교회(강문호 목사)에 출석하시는 주용삼 장로님 이야기를 실을 것을 보았습니다. 작년 6월 마지막 주일 아침, 목사님 손에 봉투를 하나 꼭 쥐어 주시면서 "목사님! 이 돈은 정말 값지게 모은 것이니 값지게 사용하여 주십시오"라고 말씀하더랍니다. 봉투를 열어 보니 100만원 수표 두 장이었습니다. "목사님. 새벽기도 올 때에는 이 길로 오고, 갈 때는 저 길로 가면서 길거리 신문지 박스 조각 휴지를 모았다가 팔아 저금하고 또 모으면 저금하여 6개월 간 모은 돈입니다. 누가 들으면 장로가 조잡하다고 할 터이니 창피합니다. 절대로 말하지 마십시오" 이 말이 끝나자 말자 "절대로 말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합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말하고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주 장로님은 지난 12월 말에도 그렇게 하여 300만원을 또 들려주었다 합니다. 장로님의 집과 교회의 거리는 걸어서 15분이라 합니다. 오늘도 새벽예배 오가며 종이를 줍고 계신다고 합니다.
드리는 가운데 보람을 느끼고 새로운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가난한 행상의 아들로 태어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에 한을 품고 무섭게 일했습니다. 야심찬 사업가로 변신한 그의 인생철학은 `나를 위해, 돈을 위해'였습니다. 청년은 미국석유업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세계적인 대부호로 성장했습니다. 사람들은 돈 때문에 그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 쉰셋. 몸과 마음은 심하게 망가져 있었습니다. 심한 노이로제와 소화 불량, 무력감과 악몽…. 의사는 죽음을 준비할 것을 선언했습니다. 불치병에 걸려 우울한 나날을 보냅니다. "나는 1년 뒤에 죽는다" 그는 날마다 의사가 한 말을 곱씹으며 우울한 날을 살아갔습니다. 어느 날 그는 큰 상심을 하게 됩니다. "돈이 뭔가. 이대로 죽어야 하는가. 사람들은 나를 뭐라 평할 것인가" 그러다 그는 순간 어머니의 신앙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다시 한번 신앙의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큰마음을 먹게 됩니다. "죽을 바에는 베풀고 죽자" 그는 가진 재산을 학교에, 자선단체에, 종교단체에, 사회단체에 기증했다. 그리고 생각과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그랬더니 마음의 병도 서서히 치료되어 갔다. 그리고 그 후 장수하여 98세를 살았습니다. 이 사람이 록펠러입니다. 사람은 욕심을 버리고 움켜쥔 손을 펴는 순간 진정한 자유스러움을 느끼게 되고 하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어머니의 신앙적 교훈의 영향력을 상각하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존 록펠러에게 십일조를 하는지 물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처음으로 일을 해서 번 돈이 1달러 50센트였습니다. 저는 일주일 동안 일하고 받은 돈을 집으로 가져가서 어머니에게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제 기억으로는 어머니에게 돈을 드리면서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돈을 앞치마로 감싸면서 제 눈을 바라보셨지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얘야, 네가 주님에게 십일조, 그러니까 15센트를 드린다면 아주 자랑스러울 게다.'’ 그는 말했습니다. “저는 난생 처음으로 번 돈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고, 그 후 지금까지 빠짐없이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서 이런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 1달러 50센트의 십분의 일을 드리지 않았더라면 제가 처음으로 백만 달러를 벌었을 때 십일조를 드릴 수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남긴 말을 인생 십계명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1.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섬겨라
2.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3. 아무도 원수를 만들지 말라
4. 예배 시간에는 항상 앞자리에 앉아라
5. 오른 쪽 주머니는 항상 11조 주머니로 드려라
6. 주일 예배는 본 교회에서 드려라
7. 아침에는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라
8. 남을 도울 수 있으면 힘껏 도우라
9. 아침에는 꼭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라
10.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하라
신앙의 눈을 뜬 대부호는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로 인생관을 바꾸었습니다. 거액을 기쁨으로 드려 시카고대학을 설립했습니다. 리버사이드 교회도 세웠습니다. 여생을 `교육'과 `선교'와 `사랑실천'에 쏟았습니다.
록펠러는 평생 동안 7억 5천만불을 남을 위해서 썼다 합니다. 이 돈은 예수님 때로부터 지금까지 2천년동안 1분당 35센트(약 250원)을 나눠준 것이며 모세 때로부터 지금까지 3,500년 동안 매일 40만원씩을 도와준 셈이 된다는 계산을 합니다.
그러나 그의 진가는 후손에 의하여 더욱 빛나고 있다 합니다. 우선 그의 사업을 이어받은 록펠러 2세는 브라운 대학을 졸업한 수재로서 아버지의 사업을 더욱 빛내고 자기들 기업 이미지를 아름답게 가꾼 사람이라 합니다.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창업에 못지않게 수성 또한 어렵다고 하나 그는 그 어려운 수성을 멋지게 성공시켰다 합니다.
그 다음 세대를 봅니다. 록펠러의 손자들은 하나같이 아이비 리그를 졸업한 수재들이라 합니다. 이들은 세상에 나와 은행장, 뉴욕주 지사, 자선 사업가, 아칸사스주 지사, 미 연방정부의 재무장관, 대통령 특별보좌관, 부통령 등을 역임하면서 더 더욱 그들 가문을 빛내 주고 있다 합니다. 록펠러 가문에 이런 영광을 가져다 준 비결은 각자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가풍에 있다 합니다. 그들은 이 가풍을 영속시키기 위하여 지금도 자녀들이 만 7세만 되면, 누구나 자기 잡비는 스스로 벌어 쓰도록 조처하고 있다 합니다. 이러한 가풍도 복된 후손들이 되게 했습니다만 신앙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시 37:25)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시 37:26)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줄 믿습니다.
바울사도는 마게도냐 교회의 관대한 풍성한 연보와 그리스도께서 희생적으로 자신의 몸을 주심(고린도후서 8:1-5,9)을 예로 들어서 호소하며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예비하였다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고후9:2)고 하며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고후9:5)고 합니다. 그리고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눅6:38)라고 하십니다.
지헤자는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잠 11:24)고 하면서 많이 심는 자가 받을 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절기에 대한 교훈에서도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 월의 정한 때에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 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출 23:15)고 하며 나귀의 첫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할지며 빈 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 (출 34:20)고 합니다.
장마에 대한 준비 하나님 만날 준비 재림의 준비와 함께 하루생활도 준비하며 예배에 대해 준비하며 맥추절을 준비하며 주시는 복을 받는 모두가 됩시다.
축복의 다른 이름
고후 9장 1~8절 / 임현수목사
조선시대 말엽에 서구열강이 한국과 수교를 맺고 한국 땅을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때 많은 광산 탐사가들이 한국에 와서 금, 은, 동, 철광을 탐사했고 경제적 침탈이 거세지면서 광산 채굴권이 외국 사람들에게 많이 넘어 갔습니다. 그때 어느 곳에 가든지 금이 나올 곳에는 팻말을 박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금이나 은 같은 광물을 캐내어 모아 둔 상자 따위를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만지면 외국 사람들이 놀란 듯이 "노 터치(no touch)"라고 외쳤고, 그 팻말에 영어로 ‘no touch (노터치)’라고 써 놓았는데 당시 영어를 잘 몰랐던 한국 사람이 그것을 ‘노다지’ 라고 부르게 되면서 … 그 말이 유행이 되어서 오늘날 이 장사는 노다지다. 이 사업은 노다지다.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큰 노다지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 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축복 이라는 다른 이름이 바로 <유로기안> 입니다. 고후 8:2절이나 9:5절에 나오는 <연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유로기안> 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본래 <축복>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본래의 뜻에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알아서 연보를 잘하는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고 억지로 마지 못해 하는 사람은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헌금은 축복의 씨앗입니다.
고후 9: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다시 말해서 헌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거두기 위해서 심는 씨앗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에게 헌금을 심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거두게 하십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하여 자연의 법칙을 예로 들었습니다.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이는 법칙입니다. 이는 자명한 이치이기 때문에, 따로 설명하거나 증명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이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농부는 씨를 심습니다. 바로 이 법칙이 있기 때문에, 농부는 자기가 심는 씨를 낭비한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은 속이지 않습니다. 먼저 씨를 심으면, 뒤에 곡식을 거둡니다. 역으로 말하면, 나중에 거두기 위해서는 앞서 심어야 합니다. 또한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둡니다. 따라서 많이 거두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이 심어야 합니다.
많이 심었던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평생을 거두며 살았습니다.
대상29:28 저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다가 죽으매 그 아들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하여 하나님에게 성심껏 많은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셔서,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크게 부강했습니다.
대하 31:10 사독의 족속 대제사장 아사랴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백성이 예물을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 시작함으로부터 우리가 만족하게 먹었으나 남은 것이 많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에게 복을 주셨음이라 그 남은 것이 이렇게 많이 쌓였나이다
여기에도 같은 사례가 나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 결과 그들 모두가 족하게 먹고도 남은 것이 많이 쌓였습니다. 그들은 많이 심어서 많이 거두었던 것입니다.
(왕상 17:15)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왕상 17:16)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사르밧의 과부가 자기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으로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공궤했습니다. 사르밧의 과부는 자기가 가진 것 전부를 바쳤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을 심은 셈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여인의 집에 있는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않았습니다. 병의 기름도 없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사르밧의 과부도 많이 심어서 많이 거두었던 것이었습니다.
헌금만이 아닙니다. 전도의 원리도 똑 같습니다. 많이 뿌리는 자가 많이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55장 10절, 11절에 말씀하십니다.
(사 55:10)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비가 내리면 땅을 적시어 싹이 터서 꽃이 피게 되고 또한 오곡백과가 무르익게 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받으면 말씀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예배에 자꾸 오게 만드십니다.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둡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로 8절에도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알프레드 애들러 박사는 그에게 많은 우울증 환자와 정신질환에 걸린 사람이 찾아와 고통을 호소할 때에 “두 주간만 당신이 매일매일 어떻게 하면 남을 기쁘게 해줄 수 있을까를 궁리해서 그걸 실천하십시오”라고 처방을 내려주었습니다. 박사의 명성에 기대를 하고 왔던 환자들은 대부분 이 싱거운 처방에 실망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애들러 박사를 믿고 그의 처방대로 따른 사람들은 당장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가서 두 주간 동안 어떻게 가족과 이웃들에게 선과 사랑을 베풀까를 연구하고 그에 따라 베풀고 실천했습니다. 사랑과 기쁨을 심자 치료와 행복을 거두었던 것입니다.
심고 거두는 법칙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십일조입니다.
제임스 윌비는 미국에서 매우 큰 보험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입니다. 성공 비결을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해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수년 전에 나는 사무엘상 2장 30절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라는 말씀에 의지해서 주님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로 하나님께서 나를 놀랍게 축복해 주셨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미국의 재벌인 멘소레담 사장 하이디의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옛날에는 별로 다른 약이 없고 추운 겨울에 손이 트면 제일 좋은 약이 멘소레담이었습니다.
그래서 멘소레담 이만한 것 하나 얻으면 온 형제들이 그것을 아껴 가면서 손에 발랐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멘소레담을 시작한 사람이 미국의 하이드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미국의 실업가 하이드는 10의 9를 드린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한때 만달러의 빚을지고, 아홉 자녀의 생계를 걱정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드는 철 저하게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사람들은 “남의 빚부터 갚아야 할 것 아닌가?”하고 비난했지만, 그는 “부채상환이 아니라 도적질 상환이 먼저입니다. 하나님께 진 빚을 먼저 갚아야 합니다”라고 대답하면서 신앙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이드는 곤경에서 벗어나 ‘멘소레담’회사를 창립했고 대성공을 거두어 세계적인 거부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자인 록펠러 역시 철저한 십일조 생활로 유명합니다. 40명이 매달 회사에 들어 오는 수입의 십일조 계산을 해야만 알 수 있을 정도로 번창하게 돈이 많이 들어 온 것입니다.
또한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돕는 구제는 우리의 삶에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텃밭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9절에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바탕이 있어야 내가 하나님께 축복을 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주저하지 아니하시고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축복은 모두 다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구원도 언약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입니다. 언약을 믿고 우리 영생을 얻을 것을 기대하고 일생을 맡기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축복도 언약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 언약을 받고서 십일조를 드리고 구제를 하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환경적인 재난에서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말라기 3장 11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메뚜기가 와서 소산을 다 먹어 버리면 농사는 헛농사가 됩니다. 재앙을 없애 주겠다는 것입니다. (자동차 사고/ 가게에 도둑/ 보험료 인상/ 병원)
우리가 하나님과 십일조 언약을 맺으면 하나님이 어려울 때 우리가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언약을 기억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 는 것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는 기초가 탄탄 해야 되는 것 입니다. 내가 십일조를 드리고 구제에 인색지 않고 살았으면 이것이 내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는 탄탄한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말라기 3장 12절에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고 말씀한 것처럼 모든 사람이 우리를 보고 감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축복의 씨를 많이 심으시기 바랍니다.
2. 헌금은 자원해서 드릴 때 축복이 됩니다.
1) 우리의 가진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믿을 때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릴수 있습니다. 학 2: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우리의 가진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고전 4: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대상 29:14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욥의 유명한 고백도 얼마나 진리 입니까?
욥 1: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우리가 헌금을 내면서 힘들어 하고, 때로는 무슨 생색을 내는 것 같이 하고, 어떤 사람은 세금 내듯이 억지로 내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소유권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2) 헌금이 축복이라는 것을 믿을 때 자원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헌금이라는 제도와 의무를 주신 것은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연보를 축복이라는 말과 같이 쓰게 된 것입니다.
땅에다 씨를 심어도 백배이상의 결실을 거둘수 있다면 하늘에다 심으면 오죽이나 많이 거두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하늘에다 보물을 쌓아놓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지혜로운 투자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에는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 축복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상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자원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 만큼 이점에 있어서 정확한 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에 대해서는 어김없이 갚아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약속입니다.
주님은 누누히 강조하시기를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 7:11절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여러분, 자식이 부모를 생각해서 좋은 옷을 한벌 사준다면 부모님의 마음은 옷 열벌이라도 자식에게 사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여유만 있다면 말입니다.
막 10:29~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여기 주님이 약속하신 100배라는 것을 문자적으로 믿으면 백배의 축복을 받을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식언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4) 헌금이 바로 쓰여지면 자원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성도들이 헌금에 대해서 소극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기가 정성드려 바친 헌금이 잘못 쓰여 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헌금이 쓰여지는 용도와 우선순위의 기준도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의 생각을 기준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적인 우선순위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습니다.
오늘날 미국이 세계적인 강대국이고 부유한 국가가 된 것은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부자들은 철저히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고 심고 거두는 법칙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재산을 드려서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에 구차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세계적인 부가 미국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나누어 주기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나누지 않으면 축복의 샘이 마르게 되는 것입니다.
워렌 버핏은 미국의 투자전문회사의 회장 겸 최고 경영자로, 빌 게이츠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부자로 꼽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얼마 전 자신의 총 재산 440 억 달러(약 44조 원) 가운데 85%인 370억 달러(약 35조 원)을 기부하기로 발표했습니다. 이는 미국의 역대 기부금 가운데 가장 많은 액수입니다. 버핏 회장은 ‘세계적 거부’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평소 중고차를 타고 다닙니다. 그가 사는 집은 1958년에 3만 1000달러, 약 3000만 원을 주고 산 것입니다. 주식 투자로부터 거부가 된 이후에도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면 자식을 망칠 수 있다”고 하며 부의 사회 환원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부시 행정부가 상속세 폐지안을 발표했을 때 반대했습니다. 상속세는 무겁게 물어야 된다 고 그는 주장을 했습니다.
버핏은 거액의 기부금 가운데 90%는 자신이나 가족의 이름으로 된 재단이 아니라 현재 기부금을 가장 잘 운용하는 빌 게이츠 재단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평소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이처럼 거액을 기부할 수 있게 된 것 입니다. 현재 그는 ‘존경할 만한 경제인 1순위’로 꼽히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세계 최고의 부자 두 사람은 빌게이츠와 워렌 버핏입니다. 록펠러, 애플의 스티브 잡스…모두 유대인 기독교인 입니다. 미국 억만장자의 40%가 유대인이고 이들에게 십일조 정신은 기본 입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 반열에 있는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와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 회장이 사상 최대 자선기금 운동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미국 억만장자들을 대상으로 ‘기부 서약’이라는 이름의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데 이들은 <포브스>가 매년 선정하는 미국 부자 리스트에 오른 인사들 400여명이 그 대상이며, 만약에 미국 억만장자들이 게이츠 등의 기부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기금이 6000억 달러(726조 5400억원)에 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참고로 2010년 국가예산 총 291조8천억원)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나눠주기 위해서 주는 것이기 때문에 나누지 않으면 축복의 샘은 말라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노다지를 주셨습니다.
그 노다지광은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고 이웃을 구제하는 것이 우리의 노다지인 것입니다.
3. 헌금은 풍요로운 삶을 가져다 줍니다.
풍요함을 맛보기 위하여서는 올바른 물질관과 또한 청지기 의식을 가져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역과 불우한 사람들을 위하여 쓰라고 우리에게 재물을 맡기셨습니다. 투자 회사에서 보면 남의 자금을 맡아서 관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돈이 아닌 남의 돈을 갖고 불려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맡은 금액의 돈을 맡으면 맡을수록 수수료가 많아집니다. 우리가 청지기가 되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의 자금을 관리하는 fund manager로 자신을 생각하여야합니다. 이 재물을 잘 관리하여 하나님의 신뢰를 얻으면 하나님께서 더 많은 재물을 맡기시고 이렇게 할 때에 자신도 풍요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뢰하는 청지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풍요함을 맛보려면 자신의 살림을 무제한으로 늘려서는 안 됩니다. 어떤 분은 수입이 늘어나면서 씀씀이도 늘여서 항상 부족 가운데에 살고 하나님의 청지기 노릇을 잘못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써야할 액수를 정하고 나머지를 주와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여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천국에 상을 쌓아놓게 됩니다(마6:20). 어떤 분은 은행을 믿지 못해서 현찰을 매트 밑에 숨겨 두었다가 집에 불이나서 다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재물을 천국에 쌓아 놓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각각”이라는 말은 “각자가”라는 뜻입니다. 헌금은 각자가 개별적으로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모두가 똑같은 금액을 정해서 일률적으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헌금은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드릴 헌금을 미리 마음에 정하며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헌금에 우리의 정성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헌금을 할 때 인색한 마음으로 적게 심지 말고, 많이 심어서 많은 축복을 거두시기 바랍니다.
요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마 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베다니의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의 옥합을 아낌없이 깨뜨렸습니다. 성경은 마리아의 헌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옥합 안에 들어있는 향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비싼 향유였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을 드리지 못하겠습니까? 그러기에 마리아는 이것저것 따지면서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감사를 드리며 최고의 사랑을 표했습니다. 베다니 마리아가 행한 일은 그의 이름과 함께 세세토록 기념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가룟 유다는 어떠했습니까?
요 12:4~5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마 26:24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가룟 유다는 타산적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드리는 일에 인색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리해서 그는 베다니 마리아의 행동에 대해서 독을 내뿜는 말을 했습니다. 결국 가룟 유다는 불행한 사람,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에게 드리는 헌금을 인색함으로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에게 인색하게 드리면서, 어찌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바랄 수가 있겠습니까? 이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색하게 내는 자를 사랑치 아니하십니다.
억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색함이 내적 요인이라면, 여기서 말하는 억지로 함은 외적 요인입니다. 주변에서 쳐다보는 눈들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드리는 것은 억지로 함입니다. 이만하면 체면치레는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헌금을 드리는 것도 억지로 함입니다.
행 5:1~2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행 5: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자기들의 땅을 팔아서 하나님에게 바쳤습니다.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자기들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억지로 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속인 죄로, 축복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큰 벌을 받았습니다.
출 25: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이와 같이 하나님은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것을 받으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에게 즐겨 내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사람에게 주님은 풍요를 허락 하십니다.
고후 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본문 8절에는 “모든”이라는 단어가 네 번 사용되었습니다. (항상 5번)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그만큼 풍성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동안 물질의 복을 받지 못하셨습니까? 그 결과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고, 늘 쪼들리면서 살아오셨습니까? 이유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즐겨 드리지 못했거나,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가 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가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물질로 하나님을 공경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더욱 착한 일에 힘쓰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은 더더욱 우리에게 물질의 복을 크게 내리실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헌금의 원리를 살펴보았습니다 1. 헌금은 축복의 씨앗입니다. 고후9: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2. 헌금은 자원해서 드릴 때 축복이 됩니다. 3.헌금은 풍요로운 삶을 가져다 줍니다.
교회안에서 헌금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정말 한 푼도 드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부담을 전혀 갖지 않아도 됩니다. 바로 그리스도을 아직 만나지 못한 분들입니다. 기독교에 관하여 복음에 관하여 알기를 원하여 교회에 나오지만 아직 구원받지 못하였거나 확신이 없는 분들은 헌금에 대한 부담을 조금도 갖지 마시고 교회에 오십시오.
눈치보지 마시고 체면때문에 억지로 하지도 마시고 제발 그냥 나오십시오. 이런 분들은 헌금을 안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괜히 헌금하다가 마음이 상하여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아 확신이 있는 분들, 그리고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분들은 헌금을 성경의 원리대로 하려고 힘쓰십시오. 여러분이 만약 하나님의 자녀가 된 확신이 있음에도 헌금을 드리기를 인색해 하면 사단은 그 마음을 이용하여 받은 은혜를 훔쳐갈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신앙의 성숙은 중단될 것입니다. 많은 좋은 것들을 거둘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성경의 원리대로 스스로 자신의 형편대로 마음에 정하고 그 결정을 끝까지 밀고 나가십시오.
인색한 마음이나 마지못해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하는 마음,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십시오.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믿음과 형편에 따라 많이 드리고자 최선을 다하십시오. 주일마다 빈손으로 나오지 말고 주일헌금을 준비하여 나오십시오. 소득이 있는 분들은 믿음으로 십일조를 규칙적으로 드리십시오. 그 외에 은혜와 축복을 경험하였을 때 감사헌금을 드리고 무엇보다 선교에 관심을 갖고 모든 분들이 선교헌금에도 동참하십시오. 정전 기둥헌금, 일백번제 헌금 등 한국교회에 헌금의 종류가 많은 것을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만큼 하나님께 풍성히 드리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고후 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물질 감사의 복
고후09장 1~7절 / 이필재목사
11월은 감사의 달입니다. 많은 절기 중에서 다른 시기보다 더 많이 물질로 감사하는 달입니다. 가을의 추수를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으로 보통 다음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킵니다. 지금 우리들이 드리는 추수 감사 주일은 두 가지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구약의 추수감사절로 유대인들의 추수기를 기준해서 지켰습니다. 유대 나라의 추수는 우리나라와 같은 쌀농사를 한 것이 아니라 보리농사를 했기 때문에 맥추절이라 해서 그 추수기가 그들의 추수감사절이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6절에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미국에서 시작된 청교도 추수감사절 예배가 역사적 배경입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기독교 국가이면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사건이 정치적으로 일어났습니다. 헨리 왕가의 비리를 교회가 들추어내니까 그로 인해 정부와 교회 간의 마찰이 박해 운동으로 번져 수많은 성직자가 순교를 당했는데, 영국의 메리 여왕은 ‘피의 메리’라고 부를 만큼 순교 사건이 아주 커졌습니다. 청교도들과 정부의 마찰이 가장 심각해 결국 국외 탈출을 시도하게 되어 미국 땅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로운 땅에서 시작한 신앙생활과 농업을 추수감사절 예배로 지켰습니다. 모든 교회가 이 아름다운 전통을 문화화한 것이 오늘의 추수감사절이 되었습니다. 이런 감사의 달인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물질 감사의 설교를 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하는데, 교인들이 가장 부담스럽게 듣는 말씀이 물질 관계 설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은 이 설교를 제일 반갑고 은혜롭게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먼저 오늘 말씀의 배경 설명이 필요합니다. 기독교의 어머니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이것을 모교회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이 교회에서 30년을 담임 목사로 목회하였습니다. 또 예수님의 열한 사도들도 이 예루살렘 교회를 기초로 하여 사도적 직무를 잘 완수하였습니다. 바울 선생은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서 아시아와 유럽 일대를 전도하여 교회를 세웠는데, 고린도 교회도 그 중 하나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다른 교회보다 비교적 재정적으로 넉넉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도시가 세계에서도 이름난 상업 도시였고 교육도시인데다 부유층 사람들이 많이 살고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이라서 물질의 교류가 풍성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예루살렘은 몇 년이나 계속해서 극심한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조차 구하기 힘든 상황이 생겼을 때, 바울 선생은 자신이 세운 이방 세계의 모든 교회들에게 부탁하여 예루살렘 모교회를 재정적으로 돕자는 운동을 벌리자는 것이 오늘 말씀의 편지 내용입니다. 고린도 교회도 헌금을 해서 모교회를 도와주는 운동을 하자는 내용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지금 말할 수 없이 고난 가운데 있는 예루살렘 어머니 교회를 위해 헌금을 해 물질적 도움을 주자는 것인데, 이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는 방법이나 마음에 대해 몇 가지 조심스러운 교훈적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교회에서 생활하는 기독교 물질관의 기초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의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시편이 말했습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여호와의 것이요.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시편 89:11)” 그러니까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비록 내가 노력해서 내 손에 들려진 물질이라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나는 관리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청지기라고 부릅니다. 관리를 잘하는 자에게는 더 많은 관리를 맡기겠다고 성경이 약속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게으른 종은 있는 것마저도 빼앗겼다고 그랬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물질관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 관리를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이것을 생각해 볼 때 신학적으로 정의하는 몇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신학에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계약 관계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지켜야 될 상대적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넉넉히 먹고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인간에게 제공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하실 때의 온갖 종류의 물질 창조 이름이 나열돼 있습니다. 그 뜻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기는 육축과 모든 채소와 나무 모두 다 나열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창조의 목적이 모두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무엇 때문에 창조하셨는가? 맨 마지막에 사람에게 주기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의무를 완벽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인류가 얼마든지 오래 살아도 충분한 식량과 사용할 물건을 절대로 모자라지 않게 완벽하게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무 완성입니다.
우리가 50년 전 일을 생각해 봅시다. 그때에는 세계 어느 나라나 똑같이 무슨 생각을 했느냐 하면, 한정된 땅에서 한정된 생산이 있을 뿐인데 인구는 계속 늘어 가니 나중에는 이 팽창한 인구로 인해 모두가 굶어 죽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습니다. 그래서 온 세계가 선택한 국책 사업이 산아제한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 거리의 포스터는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이었습니다. 셋 낳는 사람은 원시인같이 취급했습니다. 제가 총각 시절에 새문안 교회 야간 신학을 다닐 때였습니다. 광화문 사거리에 큰 버스를 놓고 지나가는 남자들을 잡았습니다. 저도 산아제한 한다면서 간호사들에게 몇 번 끌려 들어갔습니다. “어휴, 장가도 안 갔습니다.” 국책 사업으로 이런 일을 했습니다. 그때가 불과 몇 십 년 전이었는데 지금 어떤 결론이 나왔습니까? 전 세계가 다 아기를 안 낳게 되었습니다. 요즘의 결론은 인구가 많을수록 경제 발전이 가속화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아기를 안 낳아서 큰일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요즘 서울의 큰 교회들이 무슨 운동하는지 아십니까? “아기 세 명 이상 안 낳은 사람은 집사 안주기 운동” 이렇게 발표를 했다고 합니다. 지금보다 인구가 10배가 많아져도 먹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이 완벽하게 해주셨습니다. “너희들더러 그런 걱정 하라고 했냐?”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의 의무이다. 넉넉히 먹고 살 것이다. 인구가 얼마든지 많아도 괜찮다. 너희가 관리를 잘 못해서 굶어 죽는 것이지 자원은 넉넉하다.”
그러면 이 계약에서 인간의 의무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넉넉한 조건을 인간에게 주시고 주신 것 중에서 반드시 일부를 하나님께 도로 가져오라고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모두 오늘 교회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안식일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세상에 살 때 시간 사용의 책임을 우리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내게 결정 권한이 있습니다. 여행을 간다고 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하십니까? 골프를 친다고 그런 건 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영화 구경을 가든지 노래방에서 노래를 하던지 그것은 우리가 결정하라고 하십니다. 내 맘대로 다 씁니다. 누가 못하게 합니까? 하나님이 그런 것을 못하게 하신 적이 있습니까? “평생 네 맘대로 네가 필요 한대로 다 하라! 그런데 하나는 네 맘대로 하면 안 된다.” 이것이 안식일입니다. “그것은 도로 가져와라.” 이것이 계약이요 의무입니다. 십일조를 봅시다. 내 실력껏 돈을 벌어서 내 마음이 결정하는 것을 맘대로 다 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못하게 하십니까? 좋은 자동차를 산다고 “너 그런 고급차 사지 마라!” 하나님이 그러십니까? 보석 산다고 사지 말라고 하십니까? 내가 결정하는 겁니다. 맛있는 요리를 날마다 먹어도 “야! 너무 먹지 마라!” 그러십니까? “네가 알아서 해라.” 좋은 옷을 사 입는 것도 참견하지 않으십니다.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참견을 하십니다. “십일조 내꺼야. 그건 도로 가져와.” 다 주시고 하나는 도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다 주었는데 그 중에 하나인 내 것마저 너희가 도적질 하느냐?” 이것을 하지 않을 때는 도적의 개념이 됩니다. 이것이 계약입니다.
요즈음 우리들의 생활이 참 편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구약 시대는 정신 바짝 차리지 아니하면 큰일 났습니다. 어찌나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많은지 기억하기 조차 힘듭니다. “곡식의 첫 열매는 하나님의 것이니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라.” 그러면 곡식이 하나 둘 입니까? 그 종류가 많은 모든 곡식의 첫 열매를 일일이 구별했으니 얼마나 힘이 듭니까? “짐승의 첫 새끼는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께 드리라.” 유대인들은 조상 적부터 주 생산업이 목축업입니다. 유목민의 전통 직업입니다. 그 많은 종류의 짐승들이 낳은 첫 새끼를 구별하려니 일일이 표시를 해야 됩니다. 더구나 매우 충실한 것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수입의 첫 소득도 하나님의 것으로 규정했습니다. 심지어는 처음 난 아들도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일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렇게 물질을 하나님께 많이 드리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물질 축복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즉, 복 받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은 100퍼센트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짐승 새끼 가져다 어디에 쓰시겠습니까? 헌금하면 하나님이 그 돈을 어디에 사용하시겠습니까? 아무것도 필요 없으십니다. 다만 인간을 복되게 하기 위한 방법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물질 설교가 반가운 사람은 믿음이 큰 사람입니다. 감리교를 창설한 요한 웨슬레는 “주님을 향해 주머니가 열리지 않은 사람을 믿음 있다고 하지 말라.”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최고의 복을 가르치는데 그 소리를 귀찮게 듣거나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믿음의 문제이지, 부자와 가난한 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대다수의 세상 사람들이 굶주려서 건강을 해치는 문화가 아닙니다. 너무 기름진 것을 많이 먹어서 건강에 부작용이 오는 문화에서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였던 2,000년 전 유대 나라는 정반대였습니다. 정말 굶어 죽었습니다. 그 굶주린 백성들 앞에서 예수님은 어떤 설교를 하셨습니까?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지 말라.” “아직 배고픈데요?” “그것보다 먼저 할 일이 있다.” “그게 뭡니까?”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인생의 우선 선택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셨습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먼저 해보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보십시오. 전 세계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는 나라는 먹고 사는 문제를 다 해결했습니다. GNP 20,000달러가 다 넘어섰습니다. 스칸디나비아 4개국 나라 국기가 전부 색깔만 다르지 십자가입니다. 세계에서 GNP가 모두 30,000달러가 넘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없애 버린 나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굶어 죽는다고 아우성입니다. 20세기에 그것을 우리가 눈으로 보지 않습니까? 복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시키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바울은 헌금 요청을 하면서 몇 가지 부탁을 합니다. 먼저, 미리미리 준비하라는 말을 했습니다. 당장 먹을 것도 없는데 헌금을 어떻게 미리 준비하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먹을 것 많은 사람이 준비를 더 훌륭하게 하느냐?’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이지 소유의 문제가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추수감사절 시작이 언제부터인가? 그 백성이 먹을 것이 가장 없던 출애굽 시절부터입니다. 광야에서 집도 없고 나라도 없고 먹을 것도 가장 빈약하던 사막 모래벌판 시작되었습니다. 거기서 무슨 추수가 있다고 감사절이 필요합니까? “그래도 맥추절을 지키라!” 또한 더 나아가서 청교도의 추수감사절은 그들의 역사에 최고 어려웠던 새로운 땅 정착 초기였다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기 위해 밭을 개척하고 인디안들에게 옥수수 씨를 얻어다가 구차한 수확을 얻었을 때 먹을 것이 생긴 그 감사를 추수감사절로 지켰기 때문에 그 고귀한 신앙의 정신이 오늘 세계화된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 있는 사람도 물질에 대한 감사를 하나님께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이지 부자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은 성경의 진리가 아닙니다.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헌금은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헌금하는 시간이 제일 즐거워야 합니다. 한번 1년 52주일의 내역을 내보세요. 저는 늘 그렇게 했습니다. ‘내가 헌금을 얼마 냈나?’ 매주일 적어 가면서 12월 31일 결산할 때 일 년에 하나님이 나에게 물질을 얼마큼 주셨는데 내가 얼마큼 드렸는가? 이것을 기록해보세요. 헌금하는 시간이 제일 즐거워야 합니다. ‘금년에도 내가 이만큼 하나님께 헌금을 드렸다. 헌금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즐거워서 나를 축복하십니다.
현대인들은 현명해서 자신의 노후나 자녀들의 장래에 대해 물질적 계획을 철저히 합니다. 선진국일수록 더 잘합니다. 20대에 일을 시작하면서 65세 이후의 받을 연금을 시작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도 계획성 있게 잘 하십시오. 그런데 문제는 제일 중요한 계획은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의 계획!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여기 이 말씀이 “하늘에다가 버리라”가 아니고 “쌓아 두라”고 했습니다. 저축입니다. 내가 하늘나라에 저축한 것은 하나님이 엄청난 이자를 붙여서 내 인생에 필요할 때 또는 내가 죽은 후 나의 자녀들에게 필요할 때 하나님이 꺼내 주십니다. 쌓아 두는 것입니다. 예수 믿은 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 십일조 생활을 철저히 못하고 사니 그것이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아직 못하신 분들 오늘 결정하십시오. 돈 많이 벌면 하겠다는 사람은 돈 많이 벌 때는 액수가 많아져서 더 못합니다. 십일조는 가난할 때 더 쉽게 결정할 수 있습니다. 아주 분명한 것 있습니다. 이북에서 피난 나온 교인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는 헌금이 풍성합니다. 우리 갈보리 교회는 영락 교회 출신들이 많으시죠? 전쟁을 겪은 후에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교회를 건축했습니다. 피난민들이 모여서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분들은 이북에서 그렇게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이 하루아침에 아무 소용없어지는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줄 알았다면 하늘에다 쌓아 둘 것을…. 그거 다 놔두고 삼팔선 넘어왔으니 그게 다 누구 것이 돼? 공산당 간부들만 좋아졌잖아? 이게 뭐야?’ 한경직 목사님의 추수 감사 주일 설교 중에 제가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저런 성자 같은 어른은 물질 설교 안하시나 보다.’ 그랬는데 추수 감사 주일에 한경직 목사님께서 뭐라고 설교하셨느냐 하면 “여러분이 오늘 아침에 추수 감사 헌금 얼마 내겠다고 작정하고 오신 금액의 배를 드리십시오.” 맞습니다. 그렇게 해야 됩니다. 세상의 것은 끝없이 좀먹고, 동록이 해하고, 도적이 구멍을 꿇는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내 손에 들려져 있는 것들이 영원히 내 것이 된다는 보장을 무엇으로 합니까? 내일 아침에는 다 날아가 버릴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목사들이 ‘JC Bank’라는 말을 씁니다. ‘Jesus Christ Bank’라는 말로 예수의 은행이 이자율이 가장 높다는 것이니 여기에 저축, 여기에 헌금하라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에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라고 했습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보상의 원리”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결단이 물질 문제입니다. 이것도 못하고 믿음 좋다고 하지 말라. 그래도 중류급 이상의 괜찮은 생활을 날마다 하면서 일 년의 헌금 통계를 열어보면 ‘내가 이렇게 구차하게 헌금을 했나? 이러면서도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에 참여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반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1977년 2월에 미국에 있었습니다. 신문에 큰 기사가 하나가 났는데, 인디애나폴리스에 혼자 살던 마조리 잭슨이란 할머니가 집에서 죽었습니다. 경찰들이 와서 시체 처리를 하러 들어갔는데 작업을 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왜? 집안이 온통 돈입니다. 할머니가 가지고 있던 침대를 보니까 침대 밑에 돈이 가득하게 깔려 있어요. 화장대 서랍, 옷장, 화장실, 집안 전체가 돈으로 가득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돈이 제일 많이 들어 있는 곳은 쓰레기통이었습니다. 전부 수집해보니 500만 달러가 넘었습니다. 1977년도 500만 달러는 지금 5,000만 달러만큼이나 가치가 있던 시절입니다. 이 사건을 놓고 신문에 뭐라고 기사 제목이 났는지 아십니까? “평생 쓰레기를 만든 할머니”였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주머니를 열고 손을 펴 보세요. 그 열린 주머니와 편 손에 하나님이 복을 내리십니다. 하늘에 쌓아 두세요. 손해 안 납니다. 세상은 언제나 불안합니다. 하나님에게 인색하지 마세요. 즐거운 마음으로 하시고 헌금 설교를 좋아하시고 은혜 받으세요. 즐거운 결단으로 하세요.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11월 감사의 달에 또,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오늘 말씀이 여러분 가정, 그리고 자녀들에게 영원한 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이 마음을 쓰시면 다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관리를 잘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 영혼을 살펴서 물질 감사하는, 이 11월에 마음을 새롭게 하고 결단을 해서 물질 감사에 부끄러움이 없는 내 신앙 경력을 만들어 가는 지혜로운 청지기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향기로운 헌금
고후09장 1~15절 / 지용수목사
우리 사람에게는 두 개의 사닥다리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올라가는 사닥다리, 다른 하나는 내려가는 사닥다리라고 합니다. 올라가는 사닥다리는 말 그대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타면 인격과 삶의 질이 올라가고 문화가 올라가는 것입니다. 또 축복이 올라가고 행복이 올라가서 갈수록 더 좋은 생활을 하게 만드는, 발전하는 것입니다. 내려가는 사닥다리는 자꾸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타면 행복과 기쁨이 내려가고 믿음도 내려갑니다. 그래서 모든 삶이 형편없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은 두 개의 사닥다리 중 한쪽을 타고 올라가기도 하고 다른 한쪽을 타고 내려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모두 올라가는 사닥다리를 타고 있습니다. 내려가게 하는 사닥다리는 마귀가 주는 것이지만, 올라가게 하는 사닥다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닥다리입니다.
「주를 앙모하는 자 올라가 올라가」
주님을 앙모하면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앙모하면 우리 인격이 얼마나 올라가는지, 우리 삶이 얼마나 좋아지는지 모릅니다. 우리 인격을 우리 자신이 알지 않습니까? 불완전한 우리가 완전해지고, 형편없는 우리가 주님을 닮아 거룩해집니다. 싸우고 다투던 집이 행복해지고 모든 것이 좋아지는 것이 성도의 생활인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배 때문입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의 잘못을 뉘우칩니다. 회개합니다. 용서를 받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비전을 갖게 됩니다. 특별히 말씀이 우리를 가꾸어 가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10절, 11절에 말씀하십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할렐루야!
누가복음 1장 37절에는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비가 내리면 땅을 적시어 싹이 터서 꽃이 피게 되고 또한 오곡백과가 무르익게 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받으면 말씀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예배에 자꾸 오게 만드십니다. 주일 낮과 주일 밤, 삼일 예배에 오라고 하십니다.
「오라 오라 내게 오라 내게 오라 내게 오라
오라 오라 내게 오라 쉬게 하리라」
여기, 교회에 참 쉼이 있습니다. 참 축복이 있습니다. 참 생수가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주의 전에서의 한 날이 더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교회로 오게 하셔서 말씀을 듣게 하십니다. 말씀을 들으면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일 낮에 말씀드린 대로 무쇠 같은 사람이 은 같은 사람이 됩니다. 은 같은 사람이 금같이 되고 금 같은 사람이 다이아몬드 같은 사람이 됩니다. 자꾸만 업그레이드 되는 것입니다.
업그레이드 되는 곳이 다른 곳에는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 집에서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말씀이 그렇게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자꾸 말씀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도 그것을 압니다. 말씀을 받으면 성장하고 귀해지고 자꾸 올라가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쨌든 말씀을 받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집회를 하면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손님을 보내고, 회사의 일도 많아지게 합니다. 또 짜증나는 일을 만들어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집회에 참석하는 것보다 공부하는 것이 더 귀하고, 일이 더 귀하고,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귀하다고 하여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핑계거리를 주어서 주일 낮에도 주일 밤에도 교회에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마귀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 분별해야 합니다. 전화하는 사람, 집에 오는 손님이 마귀가 보낸 사람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잘 분별해서 손님이 오면, 그 손님을 모시고 교회에 오든지 손님을 보내고 와야 되는 것입니다. 손님에게 맞추어서는 안 됩니다. 손님이 내 인생을 책임져 줄 수 있습니까? 인생의 크고 낮음, 살고 죽음, 흥하고 망함은 손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역대상 29장 말씀대로 하나님께 있습니다.
저는 친구들에게도 매정합니다. 제가 쓰러질 정도로 너무 피곤하면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만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먼 곳에서 선교사님이 와도 ‘이러다 내가 쓰러지겠다.’ 싶으면 만나지 않습니다. 그분이 섭섭해 해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병들어 쓰러지면 주님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쉴 때 쉬고 일할 때 일해서 하나님을 위해 깃발을 날려야 하는 것입니다.
아내는 제게 참으로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 아내라도 하나님의 일을 막으면 거절합니다. 저는 아내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람에게 맞추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맞추어야 합니다.
사람의 인기를 얻으려고 본 교회를 두고 이 교회에 가서 예배하고, 저 교회에 가서 예배하는 국회의원, 도지사, 시장들이 있는데, 그들은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는 것입니까?
창세기 12장 7절, 8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여호와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아야지, 자기 인기와 사업, 미래를 위해 이 교회 저 교회에 다니는 것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를 위한 운동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끝까지 승리하지 못합니다.
내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내가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내 집이 되고 안 되는 것이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내 병원이 되고 안 되는 것이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내 식당이 되고 안 되는 것이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내 자녀가 되고 안 되는 것이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합니다. 록펠러처럼 주일에는 반드시 본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내가 섬기는 교회에 내 몸이 와서 예배를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낮에도, 밤에도, 삼일에도, 새벽에도 열심히 참석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말씀을 받으면 자꾸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밤에 나오신 분은 지금도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올라가는 사닥다리를 타고 자꾸 올라가면 축복이 넘치고 희락이 넘칩니다. 결국 우리는 천국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일생 올라가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20년이 되어도 집사가 못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연한이 찬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된 자가 늦되고 늦된 자가 먼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양이 차야 되는 것입니다. 10년간 예수님을 믿었어도 주일 낮에만 나오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은 지 2년밖에 되지 않지만 주일 낮 예배와 주일 밤 예배, 삼일 예배, 새벽 기도회에 나오는 사람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 밤, 삼일, 새벽에 다 나오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은 지 2년밖에 되지 않았어도 집사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권사님이 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은 지 20년이 되었어도 주일 낮에만 다니는 사람은 은혜의 양이 부족하여 집사님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은혜 받아야 할 때 은혜를 받지 않으면 다른 것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불평하게 되고, 옥토가 악토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아야 할 때 은혜를 받아야 그 심령이 옥토가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 되면 범사가 잘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안 되면 모든 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생명을 걸고 교회에 나와 말씀을 받아 계속해서 올라갑시다. 그래서 하나님을 감동시켜 드리는 우리 양곡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헌금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헌금 생활이 자꾸 올라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점점 더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헌금을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감동하십니다.
1141년, 독일의 와인스버그 성을 울프 공작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프레드릭 공작과 콘라드 왕이 연합해서 와인스버그 성을 공격해 왔습니다. 와인스버그 성이 완전히 에워싸여 숨통이 막히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와인스버그 성의 사람들이 굶어죽게 되자 살기 위해 항복을 하는데 한 가지 조건을 달았습니다.
“우리는 항복합니다. 이 성을 당신들에게 내주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만 허락해 주세요. 이 성의 여자들이 두 팔로 갖고 갈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갖고 갈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그러면 우리가 항복하겠습니다.”
콘라드 왕과 프레드릭 공작이 말합니다.
“남자가 가져가면 많이 가져가겠지만 여자가 뭐 그리 많이 가져 가겠나? 여자가 가져가는 것은 한 아름씩 가져가도 무엇이든 허락할 테니 그렇게 해라.”
그래서 와인스버그 성민들이 그 성을 내어주게 되었습니다. 콘라드 왕과 프레드릭 공작은 그 성의 여자들이 무엇을 가지고 가나 보았습니다. 여자들이 옷이나 가져 갈 것이라 생각했던 그들 앞에 깜짝 놀랄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여자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한아름씩 갖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 자기 남편들이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몸이 큰 남편을 둔 여자들은 목숨 걸고 자기 남편을 안고 나왔습니다.
콘라드 왕은 아내를 사랑하는 좋은 남편이었습니다. 자기 남편을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여자들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가 그 여자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부인들이여, 남편을 그만 땅에 내려 놓으시오. 나도 한 여자의 남편이오. 내가 여러분을 보고 감동을 받았소. 이 성에 자유를 주겠소. 남편과 돌아가서 잘 사시오.”
여인들의 감동적인 행위 때문에 와인스버그 성민들이 빼앗긴 그 성을 회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감동을 받으면 그 어떤 사람도 가만있지 않습니다.
장개석 총통이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의 일입니다. 그의 학교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화장실을 검사했는데, 그때 제일 더러운 화장실이 중국인 화장실이었습니다. 그 사실에 마음 아팠던 장개석 학생은 중국의 명예를 위해 모두가 잠든 밤에 혼자 몰래 나와 화장실 청소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장선생님이 밤늦게 학교를 돌아보다가 불이 꺼지지 않은 방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기숙사의 불이 하나 둘 꺼지더니 마침내 모든 방의 불이 다 꺼졌는데, 유독 한 방만은 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저 방의 아이는 특별히 공부를 열심히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방에서 한 학생이 나오더니 총총 걸음으로 화장실로 가서 화장실 청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학생!”
“예, 교장선생님”
“아니, 이 밤에 웬 청소인가?”
“저는 중국인 신입생인데, 와서 보니 저희 중국인 화장실이 가장 더러웠습니다. 그래서 저희 나라의 명예를 걸고 제가 매일 밤 청소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졸업할 때까지 계속할 것입니다.”
교장선생님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장개석입니다.”
교장선생님이 수첩에 장개석이라는 이름을 적었습니다. 그리고 특별 장학금을 주고 그에게 앞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에 장개석 총통이 심은 기념 나무가 있는데, 제가 그 나무를 보면서 “장개석, 화장실 청소하다가 성공한 사람!”이라고 혼자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감동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을 읽다가도 입도 맞추고 하나님 앞에 예쁜 짓을 자꾸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보고 감동하시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생 하나님께 축복을 받고 살지만, 또 일생 바치며 삽니다. 예배를 드리고 시간과 몸을 바치며 헌금과 십일조를 바치며 삽니다. 어차피 바치는 헌금이라면 일생 하나님께서 감동을 받으시도록 바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향기로워 하시는 헌금을 할 수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감동을 받으시는 향기로운 헌금은 어떤 것일까요? 정말 그윽한 향기가 나서 하나님께서 ‘야!’ 감탄하시는 헌금은 어떤 헌금일까요?
오늘 본문에 가르치십니다.
‘미리 준비하고 예비하여 드리는 헌금이라’ 고 본문 2절에서 5절에 말씀하십니다. 고린도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을 하려고 일년 전부터 준비했습니다. 바울은 마게도냐에 가서 아가야의 그 행위를 자랑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마게도냐 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인 것처럼 고린도 교회는 아가야 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어려움을 당한 형제를 위해 일년 전부터 준비했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마게도냐의 많은 사람들이 듣고 격동하며 분발했습니다.
“아, 고린도 교회는 그렇게 하는구나. 우리도 힘을 다 쏟자.” 하며 거액을 헌금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헌금을 참 잘 준비했다. 내가 세 사람을 보낼 테니 준비되는 대로 증거가 잘 나타나게 하라.”
저는 호텔에서 자고 나올 때 주는 팁도 준비해서 줍니다. 제 지갑에 있는 돈 중에서 가장 새 돈을 골라 베개 밑에 넣어 놓습니다. 청소부 아주머니에게 주는 것도 준비해서 줍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드릴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냥 마음 편하게 드리는 예물은 향기롭지 않습니다.
주일 헌금을 하려고 호주머니를 뒤지니 만 원짜리가 나옵니다. ‘왜 만 원짜리가 나와?’ 하며 다시 호주머니를 뒤지니 오천 원짜리가 나옵니다. ‘왜 또 네가 나와?’라고 하는데 헌금함이 앞에 와 있습니다. 엉겁결에 다시 호주머니를 뒤지니 또 만 원짜리가 나와 할 수 없이 만 원을 헌금함에 넣습니다.
‘천 원만 하려고 했는데, 아까운 구천 원…….’
이런 사람이 혹 있을 수 있습니다.
‘천 원 동생, 만 원 형님’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천 원 동생과 만 원 형님이 만났습니다.
“형님, 뭐가 그리 바쁘십니까? 참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아우야. 요즘 몹시 바쁘다.”
“뭐가 그리 바쁘세요?”
“호텔에 가야지, 식당에 가야지, 미장원에 가야지, 백화점에 가야지. 바쁘다 바빠.”
“형님은 좋겠수다. 나는 밤낮 다니는 데가 교회뿐입니다.”
이 이야기는, 주일 헌금은 천 원짜리가 가장 많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교회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우리 교회에 거지들이 구걸하러 오는데 천 원을 주면 가지 않습니다. 삼천 원을 주어도 적다고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천 원을 드리고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 편안해, 편안해’하면 하나님께서 감동을 받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이라면 그런 헌금에 감동을 받겠습니까?
마음에 정하여 귀한 돈, 예쁜 돈을 준비해서 드릴 때 하나님께서 감동을 받으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대접하는 자가 복이 있는데, 저는 이곳 저곳 다니면서 대접을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회가 나는 대로 대접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받은 많은 대접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접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믿음 생활을 하시다가 서울로 이사를 가신 한 집사님이 계십니다. 그 집사님이 다니시는 교회에 제가 집회를 인도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집사님이 그 사실을 미리 아시고 일 년 전부터 준비를 하셨답니다. 그 집사님의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 년짜리 적금을 넣었답니다. 제가 그 교회에 갔을 때 집사님이 적금 찾은 돈으로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 교회의 당회원, 목회자들도 다 모셨습니다. 그리고 제 자리는 특별석으로 준비했습니다. 그 일을 저는 잊지 못하겠습니다. 부족한 목사를 대접하기 위해서도 일 년이나 준비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대접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추수 감사절 헌금, 성탄절 헌금, 주일 헌금 등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금은 언제나 준비해서 드리는, 향기로운 예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천국에 갈 때까지 남은 생애 동안에 하나님께서 ‘야!’ 하며 감동하시는 예물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향기로운 헌금은 즐거움으로 드리는 예물입니다.
본문 7절에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합시다.
“즐겁게 드리는 예물”
즐겁게 드리는 예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4장 1절 이하에 보면, 가인의 예배와 아벨의 예배가 나옵니다. 아벨은 양치는 사람이고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입니다. 영화를 보면, 가인이 추수를 하다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단을 쌓는데 곡식 한 단을 얹었다가 아까운 마음이 들어 반 단은 도로 갖다 놓고 반 단만 가지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가인의 눈과 코로 옵니다. 가인이 피해 다니면 연기가 그를 따라 다니며 괴롭힙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벨은 짐승 중에서 제일 포동포동하게 살찌고 윤기가 나는 양, 최고의 양을 택하여 하나님께 즐겁게 바칩니다. 그 연기가 하늘을 향하여 올라갑니다. 그러니 아벨이 좋아서 어쩔 줄 모릅니다. 같이 예배를 드리는데 아벨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가인은 마음이 상합니다.
예배에 실패하면 마음이 상합니다. 예배에 실패하면 기분이 상합니다.
예배에 성공하면 기쁨이 넘칩니다.
여러분은 예배의 성공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배에 성공하는 자는 사업도 성공하고 가정도 성공합니다.
여러분, 성공자는 예물을 즐겁게 드려야 합니다. 어차피 드릴 예물을 움츠리지 말고 기쁨으로 드립시다.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왔으니 “주님, 받으소서.”하며 즐겁게 드립시다.
저는 오늘 오후에 신비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컴퓨터 앞에서 이 말씀을 준비하는데,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주여! 큰일났습니다. 시간을 붙잡아 주세요. 시간을 붙잡아 주세요.’하고 기도했더니 6시부터 7시까지 한 시간이 세 시간처럼 여겨졌습니다. 제가 세 시간 동안 칠 타자를 한 시간만에 다 쳤습니다. 타자를 치면서 자꾸 시계를 보았는데, 아직도 30분, 아직도 20분, 또 시계를 보아도 15분이 남아 있었습니다. 정말 신비로웠습니다.
그리고 역대상 29장을 읽을 때도 말씀이 한눈에 좌악 들어왔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주셔서 참 기쁩니다.
역대상 29장에 보면, 다윗이 족장들과 회중의 우두머리들과 모든 신복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아들을 택하셔서 성전을 짓게 하셨지만, 내 아들은 아직 어리고 연약하도다. 그래서 내가 힘을 다하여 내 금과 은과 보석을 하나님을 위해 바쳤노라. 나처럼 하나님을 위해 즐겁게 바칠 사람이 누구뇨?”
다윗 왕의 말에 모든 지파의 족장들과 신복들과 백성이 그들의 금, 은, 보석을 다 가지고 와서 즐겁게 바칩니다. 그러니 다윗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역대상 29장 9절에 『백성이 자기의 즐거이 드림으로 기뻐하였으니 곧 저희가 성심으로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며 다윗 왕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백성이 기쁨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보고 다윗이 감동을 받아 기뻐서 어쩔 줄 모른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도 그 헌금을 얼마나 기쁨으로 받으셨겠습니까? 그러니 그 나라도 왕성해졌습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또 절기마다 헌금을 드리면서 “이렇게 기쁨으로 드릴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감동을 받으시겠습니까?
언제나 즐겁게 드리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넉넉한 헌금, 풍성한 헌금, 힘을 다해 바치는 헌금이 향기로운 헌금입니다.
본문 13절에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21장 1절에서 4절에도 향기로운 헌금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헌금 궤 앞에서 헌금 넣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먼저 부자들이 헌금합니다. 주님께서 감동을 받지 못하십니다. 그런데 가난한 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 궤에 넣는 것을 보시고는 감동을 받으십니다.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서 부담 없이 했지만 이 여인은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시편 139편 1절 이하에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드리는지, 어떻게 드리는지를 하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 아시는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가 헌금한 그 돈은 콩나물을 사고 밀가루도 사다가 밥을 해먹어야 할 돈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파하면서도 다 바쳤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감동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 후 그 부인이 아주 큰 복을 받아 잘 되고 잘 된 줄로 저는 믿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오만 원을 헌금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부자가 오만 원을 했다면 그것은 헌금을 한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오만 원이 큰돈이지만 부자에게는 오백만 원도 큰돈이 아닌 것입니다.
저는 추수감사절이나 부활절 같은 때는 한 달 사례비를 거의 다 드립니다. 그래도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어려워 사례비를 사십만 원 받을 때는 추수감사절에 오만 원을 드리는 것도 아주 힘들었습니다. 사십만 원을 받아 집세까지 내고 살 때는 추수감사 헌금 오만 원을 드리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제가 한 달 사례비를 다 드리는 것보다 그때 오만 원 드린 것이 하나님께 더 많은 것을 드린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편을 다 아시니 그 형편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건축헌금을 한다고 합시다. 전세 사는 교우가 천만 원을 헌금한다면 그것은 목숨을 건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집을 네댓 채나 갖고 있는 사람이 천만 원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힘을 다해 풍성하게 드리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감동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감동을 받으시는 예물을 드리려면 진리의 복음에 복종하고 순종하는 생활이 겸해야 됩니다.
본문 13절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의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라고 말씀하십니다.
헌금도 넉넉하게 드려야 되지만 생활이 복음에 합당해야 됩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할렐루야!
따라 합시다.
“헌금을 드리기 전에 내 몸을 드리자.”
주일날 집에서 TV를 보며 예배하고, 헌금은 온라인으로 보내는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집에서 예배하고 헌금을 교회에 보내는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내 몸이 교회에 와서 제물이 되어 바쳐져야 하는 것입니다. 내 몸이 주께로 나와 예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생활이 제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생활이 헌금과 함께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말씀이 6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심는 대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즉 헌금할 때 믿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께서는 더 크게 주신다.’라는 믿음을 갖고 드려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헌금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을 받으려고 헌금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복을 받기 위해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금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이렇게 바치면 망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복을 받는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헌금입니다. 할렐루야!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이면서도 하나님께서 이삭을 살려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처럼 ‘내가 하나님께 바치면 내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을 주신다.’하는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And without faith it is impossible to please God,)”
몇 억, 몇 십억, 몇 백억을 바치든지 우리가 믿음으로 바치면 주님께서 더 큰 것으로 우리에게 주십니다. 할렐루야!
이런 믿음을 겸한 예물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을 겸한 예물이라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감동하시는, 향기로운 헌금이 되는 것입니다.
헌금에 인색해서 망하지, 향기로운 헌금을 해서 망한 사람은 없습니다.
저희 큰아들이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을 때 집사님 몇 분이 “성아, 축하한다.”하시며 이만 원, 삼만 원씩 봉투에 넣어주시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척 보니 십사오만 원 정도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월요일, 어떤 분이 저를 만나러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점심을 대접해야 하는데 집에 아내가 없었습니다. 지갑을 열어보니 돈이 한 푼도 없었습니다. 그때 집사님들이 아들에게 주신 돈이 생각났습니다.
“성아, 아빠 좀 보자.”
“아빠, 왜 그러세요?”
“돈 좀 빌려다오.”
“없어요.”
“야, 아빠가 알고 있어. 십오만 원쯤 되겠던데.”
“아, 그 돈요. 어제 감사헌금 했어요.”
“그것을 다?”
“예, 다요.”
세상에! 그렇게 철없이 있는 대로 다 헌금하면 어떻게 합니까? 십오만 원이 들어왔으면 만 오천 원은 십일조하고, 이삼만 원 정도는 감사헌금하고, 십만 원은 두었다가 자기가 써야지, 수입이 십오만 원인데 십오만 원을 다 헌금하면 무엇을 먹고 살겠습니까? 그때 제 형편이 좋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저렇게 철없는 자식이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목사 아버지가 아들에게 헌금을 많이 했다고 나무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다시 걱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손님이 오시면 어떻게 하지? 점심 대접을 해 드려야 하는데…….’
그때 딩동딩동 하는 초인종 소리가 났습니다. 문을 여니 우리 교회에서 가장 부자 집사님의 부인이 서 계셨습니다.
“성아, 축하한다. 이것 네가 알아서 써라. 나는 바빠서 간다.” 하시며 봉투를 내미셨습니다.
아들이 봉투를 열어 보았습니다. 제가 비상한 관심을 갖고 보았더니 돈이 아니라 수표였습니다. 그때 제가 회개했습니다.
‘아! 바보처럼 헌금해도 사는 길이 있구나.’
하나님은 거지가 아니십니다. 거지는 먹고는 그냥 갑니다. 하나님은 사기꾼이 아니십니다. 사기꾼은 사기 치고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사기 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받으시면 더 많이 주십니다. 더 풍성히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대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천 배, 만 배 다 주십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어차피 우리는 도박을 하는 것입니다. 파스칼의 말대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한 판의 도박을 벌인 것과 같습니다.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믿고, 보이지도 않는 천국을 믿고 그 천국에 간다며 지금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믿음에 우리의 인생을 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헌금에 인색하고 헌금 드릴 때마다 아까워하면 피곤해서 살겠습니까? 어차피 드릴 헌금, 본문대로 잘 드리면 하나님께서 감동 받으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축복을 받고 또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은혜를 받습니다. 록펠러나 워나 메이커처럼 될 것입니다.
워나 메이커는 교회를 특별히 섬기고 사랑했습니다. 교회도 지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과 교회를 잘 섬기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중국 여행을 가서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한 농부가 쟁기로 밭을 갈고 있는데 소가 쟁기를 끄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쟁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이상한 광경에 차를 세우고 물었습니다. 그는 부자라 통역관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여보세요, 당신은 왜 소가 되었습니까?”
“아! 우리 교회를 짓는 데 소를 바쳤습니다. 그래서 소가 없으니 제가 소가 되어 밭을 갈고 있습니다.”
워나 메이커는 피가 멈추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넉넉한 가운데 교회를 짓고 그것으로 만족해 했는데, 저 사람은 교회를 짓는데 소까지 바치고 저런 고통을 겪는구나.’
그는 울며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록펠러 다음으로 교회를 많이 세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세우고 그가 망했습니까? 백화점 왕이 되고 장관이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명예로워졌습니다. 할렐루야!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린 여인이 있습니다. 그 여인이 자기를 위해 사용했어도 향유가 다 없어졌을 것이고, 자기 신랑에게 부어 주었어도 다 없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나 자기 신랑을 위해 사용했다면 이름도 빛도 없이 사라진 향유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 부어드리니 천국에 가서도 기념이 되고 영원히 기념이 되는 향기로운 예물이 되었습니다.
어차피 없어질 것, 나를 위해, 향락을 위해 사용하면 그냥 없어지지만 주님을 위해 사용하면 영원히 기념이 되는 향기로운 예물이 되고, 자자손손 복을 받습니다.
결국 주님을 위한 것이 내게 복이 됩니다. 또한 내 자자손손에게, 내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 복을 주신 하나님께 복 되게 바쳐서 복을 누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헌신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헌금하는 신앙
고후09장 1~15절 / 오창우목사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하나님께 1년을 감사하는 날입니다.
추수 감사 주일은 두 가지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구약의 추수감사절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에서 시작된 청교도 추수감사절 예배입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행사는 우리의 추석과 같이 국민의 축제입니다. 미국 등 서구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11월 3째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켰는데 요즘은 각 교회들이 토착화 등의 이유로 다른 날을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을 앞두고 <헌금에 대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헌금>은 추수감사절 절기를 지키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아냐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입니다. 이들은 자기 재산의 절반을 바치는 큰 헌금을 하고도 하나님으로부터 죽임을 당했습니다.
헌금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크기보다 어떻게 헌금을 해야 하는가? 라는 방법론에 있습니다. 교인들이 가장 부담스럽게 듣는 말씀이 헌금설교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사실은 이 설교를 제일 반갑고 은혜롭게 들어야 합니다.
요약지를 같이 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찾아가는 성경읽기입니다.
3문단으로 나누어 같이 읽겠습니다.
첫째 문단은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입니다.
1-6절입니다.
“(1)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2)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준비하였다는 것을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의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분발하게 하였느니라 (3)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가 말한 것 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4)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가 준비하지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5)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6)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준비를 하라고 하십니다.
모든 일에는 미리 마련하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공부를 하는 학생도 예습을 하면 공부를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장님도 미리 계획을 세우면 그 회사는 발전할 수 있습니다.
절에 나가는 불자들도 절에 가기 전에는 몸도 옷도 깨끗이 마음도 깨끗이 준비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더 준비를 잘해야 합니다. 문제는 준비하라는 것이 단순히 돈을 많이 준비하라는 것인가? 입니다.
본문 1절에서 6절 사이에서는 준비라는 말이 5번이나 나옵니다.
① 2절에, “일 년 전부터 준비하였다는 것을 자랑하였는데”
② 3절에, “내가 말한 것 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③ 4절에, “너희가 준비하지 아니한 것을 보면”
④ 5절 중반에,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⑤ 5절 마지막에,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이처럼 <일 년 전부터 준비>,<내가 말한 것 같이 준비>, <너희가 준비>, <미리 준비>, <이렇게 준비> 라고 <준비>에 대하여 강조하면서... 6절에 마지막부분에 가서는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준비하라-심는 대로 거둔다> 는 무슨 뜻입니까?
농사를 짓는 분들이 흔히 하는 말 가운데 하나는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땅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까 씨앗을 땅에 심는 것입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는 법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부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씨앗을 뿌리는 농부가 왜 눈물을 흘립니까?
우리나라는 70년대까지 주식인 쌀을 자급자족하지를 못했습니다. 가을에 추수한 것으로 온 국민이 다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지방에서는 이런 현상이 극심해서 음력 4월, 5월쯤, 묵은 곡식은 거의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 농가 생활이 가장 어려운 춘궁기 때를 가리켜 보릿고개라고 했는데 이 때 밥 굶어 죽은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그 옛날 이스라엘백성들은 양식이 부족한 때에는 곡식을 마음대로 먹지 못하고 굶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배고픈 것을 참고 씨앗으로 밭에 뿌렸기 때문에 씨앗을 뿌리는 자가 눈물을 흘렸다고 하고 거둘 때는 기쁨으로 거두게 된다고 했습니다.
헌금을 하는 것도 어려움 속에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 입장에서는 보릿고개를 못지않은 어려움 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예물을 준비하라! 고 하시고는 하나님은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준비하라는 것은 단순히 돈을 준비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예물을 준비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는 “주님을 향해 주머니가 열리지 않은 사람을 믿음 있다고 하지 말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최고의 복을 가르치는데 그 소리를 귀찮게 듣거나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믿음의 문제이지, 부자와 가난한 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대다수의 세상 사람들이 굶주려서 건강을 해치는 문화가 아닙니다. 너무 기름진 것을 많이 먹어서 건강에 부작용이 오는 문화에서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였던 2,000년 전 유대 나라는 정반대였습니다. 정말 굶어 죽었습니다. 그 굶주린 백성들 앞에서 예수님은 어떤 설교를 하셨습니까?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지 말라.”
“아직 배고픈데요?”
“그것보다 먼저 할 일이 있다.”
“그게 뭡니까?”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인생의 우선 선택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셨습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먼저 해보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50년 전 일을 생각해 봅시다.
그때에는 세계 어느 나라나 똑같이 무슨 생각을 했느냐 하면, 한정된 땅에서 한정된 생산이 있을 뿐인데 인구는 계속 늘어 가니 나중에는 이 팽창한 인구로 인해 모두가 굶어 죽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습니다. 그래서 온 세계가 선택한 국책 사업이 산아제한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 거리의 포스터는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이었습니다. 셋 낳는 사람은 원시인같이 취급했습니다. 제가 총각 시절에 명동입구에 살았는데 명동거리에 큰 버스를 놓고 지나가는 남자들을 잡았습니다. 저도 산아제한 한다면서 간호사들에게 몇 번 끌려 들어갔습니다. 그 때 저는 이 말을 하고야 풀려 날 수 있었습니다. “어휴, 장가도 안 갔습니다.” 국책 사업으로 이런 일을 했습니다.
그때가 불과 몇 십 년 전이었는데 지금 어떤 결론이 나왔습니까?
전 세계가 다 아기를 안 낳게 되었습니다.
요즘의 결론은 인구가 많을수록 경제 발전이 가속화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아기를 안 낳아서 큰일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요즘 서울의 큰 교회들이 무슨 운동하는지 아십니까?
“아기 세 명 이상 안 낳은 사람은 집사 안주기 운동” 이렇게 발표를 했다고 합니다. 지금보다 인구가 10배가 많아져도 먹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이 완벽하게 해주셨습니다. “너희들더러 그런 걱정 하라고 했냐?”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의 의무이다. 넉넉히 먹고 살 것이다. 인구가 얼마든지 많아도 괜찮다. 너희가 관리를 잘 못해서 굶어 죽는 것이지 자원은 넉넉하다.”
보십시오. 전 세계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는 나라는 먹고 사는 문제를 다 해결했습니다. GNP 20,000달러가 다 넘어섰습니다. 스칸디나비아 4개국 나라 국기가 전부 색깔만 다르지 십자가입니다. 세계에서 GNP가 모두 30,000달러가 넘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없애 버린 나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굶어 죽는다고 아우성입니다. 20세기에 그것을 우리가 눈으로 보지 않습니까?
복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시키시는 것입니다.
당장 먹을 것도 없는데 헌금을 어떻게 미리 준비하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먹을 것 많은 사람이 준비를 더 훌륭하게 하느냐?’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이지 소유의 문제가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추수감사절 시작이 언제부터인가? 그 백성이 먹을 것이 가장 없던 출애굽 시절부터입니다. 광야에서 집도 없고 나라도 없고 먹을 것도 가장 빈약하던 사막 모래벌판 시작되었습니다. 거기서 무슨 추수가 있다고 감사절이 필요합니까? “그래도 추수감사절을 지키라!”
또한 더 나아가서 청교도의 추수감사절은 그들의 역사에 최고 어려웠던 새로운 땅 정착 초기였다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기 위해 밭을 개척하고 인디안들 에게 옥수수 씨를 얻어다가 구차한 수확을 얻었을 때 먹을 것이 생긴 그 감사를 추수감사절로 지켰기 때문에 그 고귀한 신앙의 정신이 오늘 세계화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조금 더 자세히 보세요. 5-6절에 쓰여 진 숫자를 찾아 관주를 대입해서 보게 되면 5절에 연보를 복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1)연보(복)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1)연보(복)답고 2)억지가(또는 탐심이) 아니니라”
6절에는 많이 라는 말은 복으로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3)많이(복으로)심는 자는 3)많이 (복으로)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요즈음 우리들의 생활이 참 편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구약 시대는 정신 바짝 차리지 아니하면 큰일 났습니다.
어찌나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많은지 기억하기조차 힘듭니다.
“곡식의 첫 열매는 하나님의 것이니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라.” 그러면 곡식이 하나 둘 입니까? 그 종류가 많은 모든 곡식의 첫 열매를 일일이 구별했으니 얼마나 힘이 듭니까? “짐승의 첫 새끼는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께 드리라.” 유대인들은 조상 적부터 주 생산업이 목축업입니다. 유목민의 전통 직업입니다. 그 많은 종류의 짐승들이 낳은 첫 새끼를 구별하려니 일일이 표시를 해야 됩니다. 더구나 매우 충실한 것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수입의 첫 소득도 하나님의 것으로 규정했습니다.
심지어는 처음 난 아들도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일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렇게 물질을 하나님께 많이 드리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물질 축복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즉, 복 받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은 100퍼센트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짐승 새끼 가져다 어디에 쓰시겠습니까?
헌금하면 하나님이 그 돈을 어디에 사용하시겠습니까? 아무것도 필요 없으십니다.
다만 인간을 복되게 하기 위한 방법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목사가 헌금설교, 십일조 설교하는 것은 참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었지요. 하나님 이런 설교 안하면 안 됩니까? 하나님이 제게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종아! 너 정말 너희 교인들을 사랑하니! 예. 너희 교인들이 부자로 살기를 원하니 가난하게 살기를 원하니? 부자로 살기를 원하지요. 종아, 너 이 민족이 정말 부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느냐? 네. 너 정말 나의 종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말씀을 진지하게 신실하게 바르게 가르치고 선포하고 바르게 살아가기를 원하느냐? 네. 그렇다고 하면 헌금 설교를 잘 해야 하느니라. 종아, 담대 하라 강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너희 교우들과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37가지 비유 가운데 무려 17가지가 재물에 대한 비유입니다. 우리 예수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말씀하셨지요. 우리말 성경에 재물이라 되어있습니다만 원문에서는 맘몬, 돈 귀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돈은 단순한 재물이 아닙니다. 그 속에 인격이 있고 영적인 의미가 있다 그런 얘기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돈을 어디에 쓰느냐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을 알 수 있고 인격을 알 수 있고 삶의 자세를 알 수 있다는 얘기지요. 언제나 옷 사고 맵시 내는 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옷에 마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입 벌리면 먹는 얘기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먹는데 돈을 많이 투자합니다. 그 사람은 먹는데 마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십일조는 성도의 신앙고백입니다. 십일조는 물질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이 하나님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로운 교회가 되기 위해서 축복 받는 가정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전 세계 교회는 1년에 한 번씩 오늘 같은 감사 주일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준비는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축복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 있는 사람도 하나님께 <믿음으로 예물>을 드릴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이지 부자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은 성경의 진리가 아닙니다.
헌금 설교가 반가운 사람은 믿음이 큰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준비하는 것>이 헌금하는 신앙의 중요한 자세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헌금을 드리는 신앙의 첫 번째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드리는 예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교회에서 생활하는 기독교 물질관의 기초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의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시편이 말했습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여호와의 것이요.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시편 89:11)”
그러니까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비록 내가 노력해서 내 손에 들려진 물질이라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나는 관리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청지기라고 부릅니다. 관리를 잘하는 자에게는 더 많은 관리를 맡기겠다고 성경이 약속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게으른 종은 있는 것마저도 빼앗겼다고 그랬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물질관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 관리를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이것을 생각해 볼 때 신학적으로 정의하는 몇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신학에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계약 관계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지켜야 될 상대적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넉넉히 먹고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인간에게 제공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하실 때의 온갖 종류의 물질 창조 이름이 나열돼 있습니다. 그 뜻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기는 육축과 모든 채소와 나무 모두 다 나열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창조의 목적이 모두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무엇 때문에 창조하셨는가? 맨 마지막에 사람에게 주기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의무를 완벽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인류가 얼마든지 오래 살아도 충분한 식량과 사용할 물건을 절대로 모자라지 않게 완벽하게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무 완성입니다.
그러면 이 계약에서 인간의 의무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넉넉한 조건을 인간에게 주시고 주신 것 중에서 반드시 일부를 하나님께 도로 가져오라고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모두 오늘 교회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안식일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세상에 살 때 시간 사용의 책임을 우리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내게 결정 권한이 있습니다.
여행을 간다고 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하십니까?
골프를 친다고 그런 건 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영화 구경을 가든지 노래방에서 노래를 하던지 그것은 우리가 결정하라고 하십니다.
내 맘대로 다 씁니다. 누가 못하게 합니까?
하나님이 그런 것을 못하게 하신 적이 있습니까?
“평생 네 맘대로 네가 필요 한대로 다 하라! 그런데 하나는 네 맘대로 하면 안 된다.” 이것이 안식일입니다. “그것은 도로 가져와라.” 이것이 계약이요 의무입니다.
십일조를 봅시다. 내 실력 껏 돈을 벌어서 내 마음이 결정하는 것을 맘대로 다 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못하게 하십니까? 좋은 자동차를 산다고 “너 그런 고급차 사지 마라!” 하나님이 그러십니까? 보석 산다고 사지 말라고 하십니까? 내가 결정하는 겁니다. 맛있는 요리를 날마다 먹어도 “야! 너무 먹지 마라!” 그러십니까? “네가 알아서 해라.” 좋은 옷을 사 입는 것도 참견하지 않으십니다.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참견을 하십니다. “십일조 내꺼야. 그건 도로 가져와.” 다 주시고 하나는 도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다 주었는데 그 중에 하나인 내 것마저 너희가 도적질 하느냐?” 이것을 하지 않을 때는 도적의 개념이 됩니다. 이것이 계약입니다.
2. 각각 마음에 정한대로...
7-11절 “(7)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8)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9)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0)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11)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그의 감사의 비결을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해 보면,
그 첫째는, 선택해 주신 은혜 때문입니다.
바울은 처음에 예수를 믿는 자들을 잡아 감옥에 가두고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울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바울로 이름을 바꾸고 하나님의 사도로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던 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메섹이라는 곳에 예수 믿는 사람이 많이 모여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대제사장의 체포 영장을 발부받아 체포조를 구성하여 말을 타고 갔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찬란한 빛이 그를 비추며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바울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그가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강한 빛으로 인하여...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자그마치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기도하고 있는데,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주의 제자에게... 주께서 환상 중에 말씀하십니다.
"아나니아야 너는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그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하기를 "주님,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고쳐줘야 합니까?" 하고 말하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행9:15).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택하여 주셨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일생동안... 감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을 택하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은 오늘 우리도 택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43:1절 말씀에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그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수 많은 사람들 중에 특별히 지명하여 "너는 내것이라!"고 불러 주시고 택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나를 택해 주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바울의 감사는 구원해 주신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6:17∼18절 말씀에 보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이 사울에게 말씀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그랬습니다.
바울의 감사는 바로....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구원해 주시고.... 또한 그로인하여 모든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여 이를 믿는 자마다 구원케 하신다는 사실을... 바울은 가는 곳마다 증거했습니다. 그때에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며 구원을 받았습니다(행13:47).
이러한 일들을 바라볼 때마다.... 바울은 감사가 넘쳤습니다.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10절에 보면 바울은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성도들에게도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빌립보서 3:1절에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그랬습니다.
빌립보서 4:4절에서도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그랬습니다.
감사가 있는 사람은 자연적으로 그의 심령에 기쁨이 넘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권속들도.... 나를 구원해 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바울의 감사는 사도로 불러주신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디모데전서 1:12∼1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은... 내가 주님을 알기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는데... 도리어 긍휼하심을 입었고... 더욱이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훼방하던 자가 어떻게 사도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주의 은혜로 인하여 사도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했습니다(고전15:9).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바울의 마음은 그저 감사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사도의 직분을 주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바울은 심히 감사하였고, 이를 큰 영광으로 알았습니다(롬11:13). 당시에 사도의 권위는 예수님을 대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도의 말씀은 곧 예수님의 말씀이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그 서두에서 반드시.... 자신이 사도인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로마서 1:1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그랬습니다.고린도전서 1:1절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 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절에서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 이라고 했고,
갈라디아. 에베소서, 골로새서, 디모데전 후서, 디도서... 바울의 서신서에는 한결같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감사할 사람이 감사를 하지 않았을 때 1)하나님은 대단히 섭섭해 하십니다. 눅 17:17-1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돌아온 자가 없느냐?”고 하셨습니다. 열 문둥이를 불쌍히 여기시어 다 깨끗이 고쳐 주셨는데도, 아홉은 제 갈 길로 가버리고 한 사람만 예수님께 와서 감사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섭섭해 하셨습니다.
2)감사를 해야 할 사람이 끝내 감사를 외면하면, 하나님께서도 등을 돌리십니다.
롬 1:21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고 하였는데, 롬 1:24에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감사를 하면서 살아야 할 인간이 끝내 감사를 외면하므로, 마음의 정욕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셨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관심에서 벗어나는 것은 저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사를 잊고 사는 사람에게는 준엄한 경고를 하셨습니다. 시 50:22에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는 놀라운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감사하는 자가 받는 복이 어떠한 것들일까요?
1)감사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있습니다.
시 50:23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옥중에 갇혔으나, 감옥에서도 감사 찬송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구원하셨습니다.
2)감사하는 자에게 부족함이 없는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대하 31:10에 “사독의 족속 대제사장 아사랴가 대답하여 가로되, 백성이 예물을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 시작함으로 우리가 족하게 먹었으나 남은 것이 많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 백성에게 복을 주셨음이라. 그 남은 것이 이렇게 많이 쌓였나이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항상 감사했습니다. 그러한 다윗은 믿음으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3)감사하는 자에게 평강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부정적인 사람 불평과 원망의 사람, 즉 감사가 없는 사람에게는 불안과 초조와 짜증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가 넘치는 사람은 마음에 강 같은 평화가 샘솟듯 하게 해주십니다. 골 3:15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4)감사하는 사람에게 풍성함을 주십니다.
고후 9:10에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에게 작게 모자라게 주시지 않고, 많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감사의 그릇이 작으면 복도 작게 주시고, 감사의 그릇이 크면 복도 크게 주십니다.
3.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12-15절 “(12)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느니라 (13)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14)또 그들이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15)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B. 묵상으로 받는 하나님의 계명
헌금하는 신앙, 즉 헌금을 드리는 3가지 자세는?
첫째, 하나님께 <믿음으로 드리는 예물>이 되게 하라
둘째, 하나님께 <감사로 드리는 예물>이 되게 하라
셋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물>이 되게 하라
1977년 2월, 미국신문에 큰 기사가 하나가 났는데, 인디애나폴리스에 혼자 살던 마조리 잭슨이란 할머니가 집에서 죽었습니다. 경찰들이 와서 시체 처리를 하러 들어갔는데 작업을 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왜? 집안이 온통 돈입니다.
할머니가 가지고 있던 침대를 보니까 침대 밑에 돈이 가득하게 깔려 있어요.
화장대 서랍, 옷장, 화장실, 집안 전체가 돈으로 가득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돈이 제일 많이 들어 있는 곳은 쓰레기통이었습니다.
전부 수집 해보니 500만 달러가 넘었습니다.
1977년도 500만 달러는 지금 5,000만 달러만큼이나 가치가 있던 시절입니다.
이 사건을 놓고 신문에 뭐라고 기사 제목이 났는지 아십니까?
“평생 쓰레기를 만든 할머니”였습니다.
사람은 내일 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언제 어떤 일이 생길 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루하루가 중요합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기회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에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라고 했습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보상의 원리”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결단이 물질 문제입니다.
이것도 못하고 믿음 좋다고 하지 말라. 그래도 중류급 이상의 괜찮은 생활을 날마다 하면서 일 년의 헌금 통계를 열어보면 ‘내가 이렇게 구차하게 헌금을 했나? 이러면서도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에 참여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반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두 개의 사닥다리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올라가는 사닥다리, 다른 하나는 내려가는 사닥다리라고 합니다.
올라가는 사닥다리는 말 그대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타면 인격과 삶의 질이 올라가고 문화가 올라가는 것입니다. 또 축복이 올라가고 행복이 올라가서 갈수록 더 좋은 생활을 하게 만드는, 발전하는 것입니다.
내려가는 사닥다리는 자꾸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타면 행복과 기쁨이 내려가고 믿음도 내려갑니다. 그래서 모든 삶이 형편없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은 두 개의 사닥다리 중 한쪽을 타고 올라가기도 하고 다른 한쪽을 타고 내려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모두 올라가는 사닥다리를 타고 있습니다. 내려가게 하는 사닥다리는 마귀가 주는 것이지만, 올라가게 하는 사닥다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닥다리입니다.
「주를 앙모하는 자 올라가 올라가」 주님을 앙모하면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앙모하면 우리 인격이 얼마나 올라가는지, 우리 삶이 얼마나 좋아지는지 모릅니다. 우리 인격을 우리 자신이 알지 않습니까? 불완전한 우리가 완전해지고, 형편없는 우리가 주님을 닮아 거룩해집니다. 싸우고 다투던 집이 행복해지고 모든 것이 좋아지는 것이 성도의 생활인 것입니다.
C.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기도
“추수감사주일에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으로 복을 심어 복을 거두는 복을 받게 하소서!”
돈과 신앙의 회복
고후 9:1-15 / 임현수목사
오늘은 돈과 신앙의 관계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신앙의 회복을 위해서 우선 되어야 할 것 가운데 돈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진정 회개 하지 않은 사람이고, 주머니가 변하지 않고 사람이 변하는 법이 없습니다.
"돈"은 돌다의 명사형입니다. 즉 돈은 돌아다니므로서 소유의 가치가 이동했음을 객관적 으로 평가해 주는 거래 수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돈은 영원히 머무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가치를 다 사용하면 다시 가치를 제공한 다른 사람에게로 이동합니다. 이런 돈의 순간성과 허무성을 깨달을수록 경건해 질 수가 있습니다.
지혜의 사람인 솔로몬은 잠언 23:5에서 "네가 어찌하여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 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달고 독수리 처럼 날아가리라"고 했습니다. 돈은 날개 를 달고 날아가면 그것을 붙잡을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가변성을 가지고 있는 것에 소망을 두게 되면 마음도 생활도 신앙도 항상 흔들리고 변하게 되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상 29: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이것이 다윗의 믿음이었습니다. 모든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 시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믿음이었고 죠지 뮬러의 믿음이었 습니다. 바른 물질관은 어떤 경우에서도 물질을 의지하지 않고 물질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보다 물질을 주시는 하나님 을 사랑하고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에게 흔히 듣는 얘기 가운데 나도 돈만 벌면 행복 할 수 있고, 가족들에게도 존경 받고, 하나님께 헌금도 많이 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좋은 일도 많이 할 것 이라고 큰 소리 치는 얘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돈을 벌면 많은 경우 정 반대의 현상이 생기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과 멀어지고 이웃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자신의 삶은 염려와 근심으로 점철됩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돈은 그냥 돈이 아니라 그 배후에 맘몬이 있기 때문입니 다. 다시 말하면 돈에는 영적인 파워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돈에는 영적인 파워가 있기 때문에 사람이 돈의 종이 되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복이 되어야 할 돈이 화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돈을 사랑 하면 죽습니다. 실제로 죽은 사람이 성경에도 많습니다. 아간의 죽음도, 유다의 죽음도, 아나니아 삽비라의 죽음도, 그리고 게하시의 문둥병도 발람의 멸망도 모두 돈을 사랑하다가 당한 참혹한 봉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 38개 가운데 16개가 재물에 관한 비유입니다. 예수님 설교 중에 믿음 215절/ 구원 218절/ 돈과 재정에 관한 구절 2,489절 정도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경제학을 가르치는 선생은 아니었으나 경제문제에 관해 다른 어느 사회 문제보다도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비교적 단순한 사회구조를 가진 당시에도 예수님께서 재물의 영적 위험성을 크게 강조하셨다면, 지극히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이에 대해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사실 성경을 정직하게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모르는 부자들을 불쌍하게 생각 하셨습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세상 부자들을 보면 측은 하게 느껴집니다. 이것은 마치 신체장애자들을 보며 느끼는 감정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불구자들이기 때문 입니 다. 부자들은 돈 밖에는 모르니까 좀 무식해 보입니다. 그리고 돈 밖에는 안보이니까 영적으로 장님과 같습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다고 기도도 안하니까 가장 교만한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돈 버느라고 정신도 없고 시간도 없는 사람들 입니다. 세상에 돌아 다닐 곳이 너무 많고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으니까 교회 생활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도 신앙을 추구하는 마음도 없으므로 거의 관능적인 동물 수준으로 살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을 갖기가 너무 힘들고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세상유혹과 재리의 유혹에 다 힘을 다 빼앗겨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 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마 19:24)
그러나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돈을 도구로만 사용한다면 돈이 있다는 것이 참 좋을 수도 있습니다. 돈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도 있고, 돈으로 주일학교를 후원 할 수도 있고, 돈으로 선교 가는 분들을 지원 할 수도 있고, 돈으로 어려운 사람들과 식사 한 후 밥값을 낼 수도 있고, 돈이 있으면 어르신들 도 즐겁게 해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돈 버는 법보다 돈 쓰는 법에 대해서 더 많이 교훈하고 있습니다.
1. 돈이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자라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여야 합니다. 지적인 성경 공부도 필요하지만 삶에서 하나님을 체험하여야 믿음이 자랍니다. 그런데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기적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헌금 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교회 건축을 하면서 그런 체험을 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건축 헌금을 약정할 여유가 없었는데 약정을 하고 나니까 예상치 않게 재물이 생겼 다는 간증도 있고, 집을 담보로 내 주었던 분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고, 힘겹게 선교 헌금을 작정 했더니 뜻 하지 않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는 간증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채워주시는 능력을 체험하는 좋은 예가 십일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께 십일조를 바쳤을 때에 바친 것 이상으로 창고가 넘치도록 채워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말 3:10). 이러한 채워주시는 능력을 체험하면서 우리의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저는 십일조를 율법적으로 하면 안 된다고 생각 합니다. 십일조 보다 십일조 정신인 감사의 마음과 고백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십일조 신앙이 철저한 사람은 믿음이 강 합니다. 십일조 비판하는 대다수 의 분들은 삶 자체가 부정적인 분들입니다. 자기 헌신은 없어요. 왜 그럴까요? 체험적인 신앙을 가졌기 때문 입니다….
무엇보다 본문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쓸 때 풍성하게 채워주신다고 증거합니 다. 오늘 본문을 보면 고린도 교인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헌금을 약정 하고서도 이행하지 를 않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케도니아 교인들에게 고린도 교인들을 자랑을 하였는데 헛된 자랑이 되게 생겼습니다. 이렇게 하면 고린도 교인들이 망신을 하기 때문에 사람을 미리 보내어 헌금을 재촉하고 있습니다(1-5절). 사도 바울은 헌금을 하기를 권면하는 이유를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헌금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넘치게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일본 쓰나미 현장 구호 헌금…요즘 교회 개척)
(9절) 기록된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예수를 잘 믿으면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부자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한 것을 주신다고 했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주신다고 약속을 하신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욕심으로 구하면 안 주신다는 구절은 있습니다(약 4:3).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는 넘치는 풍요함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재물을 모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을 위하여 쓰는 사람에게 넘치는 풍요함을 약속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썼을 때에 풍성히 채워주시는가?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관심이 많으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도 곡식을 추수할 때에 남겨진 곡식이 있어도 되돌아가서 추수하지 말고 과일을 추수할 때에도 남겨진 과일이 있을 때에 다시 가서 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신 24:19-21).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경제 능력이 없는 과부나 고아, 외국인들을 위하여서입니다. 하나님께서 경제 능력이 없는 사람을 어떻게 돕겠습니까? 경제 능력이 있는 사람을 통하여 도우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고아와 과부가 추수하고 남은 곡식이나 과일을 주워서 연명을 할 수 있도록 한다면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불쌍하게 생각하셔서 땅 주인에게 풍요함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사업에서 얻어지는 이익을 선교사를 위하여 사용하는 기업인들도 마찬가지입니 다. 선교사를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께서 사업을 번창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풍요함을 누리기 원하면 확실한 재물관을 가져야합니다. 확실한 재물관이란 재물을 쌓아놓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섬기도록 하기 위하여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섬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재주도 주시고 탤런트를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예를 들어서 가르치는 재주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재주를 가진 사람이 교육학을 전공하고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남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재주와 자격을 남을 가르치는데 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돈을 버는 재주를 주시고 재물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남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으면 교사 자격증을 갖고 있으면서도 남 가르치기를 거부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돈은 사역의 도구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풍요함을 맛보기 위하여서는 올바른 물질관과 또한 청지기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역과 불우한 사람들을 위하여 쓰라고 우리에게 재물을 맡기셨습니다.
투자 회사에서 보면 남의 자금을 맡아서 관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돈이 아닌 남의 돈을 갖고 불려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맡은 금액의 돈을 맡으면 맡을수록 수수료가 많아집니다. 우리가 청지기가 되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의 자금을 관리하는 fund manager로 자신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이 재물을 잘 관리하여 하나님의 신뢰를 얻으면 하나님께서 더 많은 재물을 맡기시고 이렇게 할 때에 자신도 풍요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뢰하는 청지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풍요함을 맛보려면 자신의 살림을 무제한 으로 늘려서는 안 됩니다. 어떤 분은 수입이 늘어나면서 씀씀이도 늘여서 항상 부족 가운데에 살고 하나님의 청지기 노릇을 잘못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도 내가 더 벌면 북한 선교에 헌신하겠다… 무교회 지역에 교회 개척하는데 헌신하겠다… 지킴을 위해 쓰겠다…등등 생각을 하시지만 만약에 그렇게 말하면서 사업에 성공하게 되면 더 큰 집을 사고, 더 좋은 차를 사고, 더 크게 사업에 투자하고, 자기의 분수를 넘어 욕심을 부리고 자족함을 배우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가 없는 것 입니다. (미국의 큰 부자 형제 …무리한 사업확장 하면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다가 엄청난 실패와 고통을 겪는 분들…)
하나님 앞에서 확실한 결심이 없으면 수입이 많아지면 씀씀이가 늘어서 주와 이웃을 위해서 재물을 사용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풍요함을 허락하지를 않으시고 청지기 일을 잘 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선택하여서 풍요함을 허락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써야 할 액수를 정하고 나머지를 주와 이웃을 위하여 사용 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천국에 상을 쌓아놓게 됩니다(마6:20). 세상에 돈을 쌓아 놓으면 간수하는 방법이 마땅치 않습니다. 주식에 투자하면 주식 값이 떨어질 때에 손해를 봅니다. 부동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하면 망하기 딱 좋습니다.
어떤 분은 은행을 믿지 못해서 현찰를 매트 밑에 숨겨 두었다가 집에 불이 나서 다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망가진 냉장고에 남편 몰래 큰 돈을 숨겨 놓고 휴가 다녀오니까 남편이 청소한다고 헌 냉장고를 쓰레기로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재물을 천국에 쌓아 놓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이 간증이 되지 않으면 그 신앙은 많은 경우 이론적 신앙일 뿐 입니다.
2. 돈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돈은 의로운 사람이 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가난한 사람에게 뿌려주는 사람의 의는 영원하다고 했고 하나님은 자신이 쓸 것과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쓸 것을 마련해주어서 의의 열매를 증가시켜 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9-10절) 기록된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너희의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라…
목장 식구들이 목자를 존경하고 순종하는 경우를 보면 재물 사용과도 관계가 깊습니다. 목자들의 영적인 권위가 평범한데서 나올 수 있습니다. 가게가 바빠서 점심을 못 먹는 사람에게 목자가 점심을 사다 주기도 하고,, 여행 떠날 때에 음료수나 음식을 준비해 주기도 하고, 결혼 기념일인데 경제적인 여유가 없으면 좋은 식당에 가서 축하하라고 돈을 쥐어주기도 합니다. (아이들 작은 선물, 나이아가라 관광, 바베큐 파티, 책 선물, 좋은 영화 티켓 등)
재물을 주님의 뜻을 좇아 주와 이웃을 위하여 사용할 때에 하나님께서 영적인 권위를 부여하십니다. 재물에 영적인 파워가 있는데 이 파워가 우리를 종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쓸 때에 영적인 파워를 공급하는 것 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재물을 의롭게 사용하면 착한 사람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착한 마음을 갖고 태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착하게 태어나지 못했어도 착한 사람이 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재물을 사용하여서 이웃을 돕는 것입니다.
왜 재물로 남을 도울 때에 착한 사람이 되어 가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남을 돕는 삶을 살 때에 이웃에 대한 관심이 생깁니다. 불우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이 생깁니다. 남의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는 적극성이 생깁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착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 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런 구체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재물을 흩어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 착한 사람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것도 재물이 가진 영적 파워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영적 파워가 우리를 재물의 종이 되게도 하지만 잘 사용하면 우리를 선한 사람으로 바꿔주는 것 같습니다.
재물을 통하여서 영적인 권위가 생기고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서는 우선 경제 적인 여유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반대로 재물을 흩어주는 삶을 살 때에 경제적인 여유가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삶을 살 때에 풍요함을 주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청지기의 삶을 살아서 영적인 권위를 얻고 착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3. 돈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돈을 잘 쓰기 위하여서는 재물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에게 영광 돌립니까? 노래와 찬양과 고백으로 영광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우리가 예수 믿고 변했다는 말을 세상 사람들이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에게 찬양이 돌아갑니다.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래서 우리 교회는 하나님에게 영광 돌리는 교회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예수 믿고 삶이 극적으로 변해서 토론토에 사는 안 믿는 사람들로부터 신기하다는 말을 듣는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남이 안 하는 일을 하고 주위 사람들이 감탄을 할 때마다 하나님에게 영광이 돌려집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헌금을 권유하면서 재물을 사용하여서 하나님 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권유하고 있습니다.
(11-13절).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 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느니라.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는 재물을 이와 같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습니 다. “큰빛교회 교인들은 식당 매너가 좋고 팁이 후합니다!” 이런 말이 던져질 때마다 하나님에게 영광이 됩니다.
가게를 하는 분이 종업원에게 임금을 다른 곳보다 후하게 주고 사랑으로 돌보아 주어서 “우리 가게 아저씨 아줌마는 교회 다니는 분이라 우리에게 참 잘 해 주어요.” 이렇게 말할 때마다 하나님에게 영광이 돌아갑니다. 어떤 사람이 경제 적으로 궁핍하여서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있을 때에 우리가 그 필요를 채워주어 그 사람이 기도 응답하신 하나님에게 감사할 때마다 하나님에게 영광이 돌아갑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에는 “그렇게 하기 위하여서는 돈 여유가 있어야지요?”하고 말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남 줄 것은 없어도 도둑맞을 것은 있다.” 는 옛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있어서 남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갖고 있는 것을 갖고 나보다 못한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재물을 쓰기로 할 때에 하나님께서 풍성히 채우시기 때문에 엄격하게 말하면 자기 것을 갖고 우리가 돕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을 갖고 돕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청지기로써 하나님의 것을 분배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 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떨어지는 콩고물로 인하여 자신에게 이득이 되고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행 20: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 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감사할 수 있는 것도 복입니다. 그러나 주신 것을 갖고 주님께 바치고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은 더 큰 복입니다. 그런 의미 에서 여러분들은 큰 복을 받으신 분들입니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충성스럽게 바치셨습니다.
우리교회 헌금의 90%가 십일조가 되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게 될 것 입니다. 또 선교사들을 위하여 많은 헌금을 하시면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선교사가 오셔서 선교 간증을 할 때마다 예상을 훨씬 웃도는 선교 헌금을 해 주셨을 때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또 목장 전도 대상자를 위하여 집을 공개하고 음식을 대접하고 일터로 음식을 사서 갖다 주기도 하고. 또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헌금하셨습니다.
한인회관을 위해서, 노인회관을 위해서, 무숙자들을 위해서, 청년 선교운동을 위해서, 북한의 고아들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아무도 모르게 경제적으로 어려운 많은 교우들을 많은 분들이 도왔습니다.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상이 클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미국과 캐나다에서 전국적으로 벌이는 stand up to cancer 운동을 보면서 순수한 인간애를 느꼈습니다. 그래도 저렇게 착한 마음들이 있으 니 아직도 이 땅이 복을 받고 있다고 생각 되었습니다. 유명한 가수들과 배우들 과 운동선수 가운데 톱 스타들 수백명이 총동원되어 진심어린 눈물을 흘리며 최선을 다해 암에 걸린 사람들을 위로하며 암퇴치를 위한 연구팀들을 후원하는 콘써트를 보며 진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능과 영향력의 선한 청지기로 살고 있는 것 입니다. 그 재능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있는 것 입니다.
션과 정혜영 부부 804명의 부모 역할… 나누어 주니 풍성하게 주십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 입니다…. 왕같은 제사장
카나다의 제도 자체가 복 받게 만들어진 것이 많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미혼모와 아이들과 노인들에 대한 복지가 너무 잘 되어 있습니다. 드림과 나눔이 복입니다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헌금이 기뻤습니다. 다윗은 평생 성전 을 건축하고 싶어 했습니다. 왕이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은 잘됐다 하지 않고 성전 건축 자재들을 다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이 성전 재건이었습니다. 그 때도 에스라 1장 6절을 보면 예물을 기쁘게 드렸다고 했습니다…광야에서 성막을 지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헌물을 너무 많이 가져 와서 더 가져오지 말라고 막았을 정도였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 한 여인이 향유 옥합을 발에 부을 때,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왜 그리하셨을까요? 성경은 이 일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눅 7:47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자녀를 위하여 쓰는 돈은 아깝지 않습니다. 형편이 어려워도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마련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면 그렇습니다. 자녀를 향한 마음과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헌금이 부담스러운 이유는 헌금에 대하여 안 좋은 경험 때문이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서도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받은 사람에게 예배 중에 가장 기쁜 시간이 헌금하는 순서입니다. 7절「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안에서 헌금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을 아직 만나지 못한 분들입니다. 기독교에 관하여 복음에 관하여 알기를 원하여 교회에 나오지만 아직 구원받지 못하였거나 확신이 없는 분들은 헌금에 대한 부담을 조금도 갖지 마시고 교회에 오십시오. 이런 분들은 헌금을 안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괜히 헌금하다가 마음이 상하여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아 확신이 있는 분들, 그리고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분들은 헌금을 성경의 원리대로 하려고 힘쓰십시오. 각각 마음에 정한대로, 인색한 마음이나 마지못해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하는 마음,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십시오. 주일마다 빈손으로 나오지 말고 주일헌금을 준비하여 나오십시오. 소득이 있는 분들은 믿음으로 십일조를 규칙적으로 드리십시오. 그러면 주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복된 일이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고후 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준비된 헌물
고후 9장 1~5절 / 윤영택목사
엊그제 금요일 웨일즈 스완지에서 검도 체육관을 열어 지역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사역하고 있는 안세혁 선교사님으로부터 이메일로 감사편지가 왔습니다. 얼마전 우리 여전도회에서 안 선교사님의 선교사역을 위해 약간의 선교헌금을 보내드렸는데 귀한 헌금을 감사하게 받았으며 그동안 체육관을 수리하고 부족했던 검도장 장비 구입에 잘 사용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 자매님들이 모은 회비로 여전도회와 교회의 필요를 위해 사용하면서 일부분 비축된 금액을 선교헌금으로 보내 아름다운 나눔을 실천하였으니 참 감사합니다. 이번 토요일에 열리는 남전도회 주관 선교기금 마련 바자회도 교우 여러분의 귀한 섬김을 통해 좋은 열매를 거두리라 믿습니다.
지난 주일,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당부했던 바울의 연보와 관련하여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헌금의 정신이 무엇인가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연보 또는 헌금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여 자원함으로 드리는 마음이며, 그 은혜를 나누는 마음은 물질을 나눔이라는 행동을 통해 실제로 보여진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드려진 물질이 하나님 나라의 선한 사업을 위해 쓰여질 때 이웃의 부족함을 보충하여 모두에게 균형을 이루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즐거움으로 나누는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실뿐 아니라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심고 거둘 수 있도록 씨앗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나누는 사람과 위로를 받는 사람이 함께 경험하는 기쁨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매일 아침 만나를 거두어 일용할 양식을 삼았던 것처럼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는 하늘 아버지십니다. 하나님께 대한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날마다 좋은 것으로 주심을 믿고 살아갑시다.
오늘은 고린도후서 9장에 나오는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헌물을 드리는 준비된 마음과 자세에 대해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에게 보내질 연보를 준비하는 고린도의 성도들을 칭찬하며 다시 한 번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을 보면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하기 바랍니다’ 라는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고린도전서 16장2절에 “매 주일 첫 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했습니다.
바울은 이 다음에 고린도를 방문하면 신실한 일군을 추천 받아 교우들이 모은 물질을 그들 편에 예루살렘으로 보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내용은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으니 그사이 바울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고린도의 성도들은 벌써 1년 전부터 이 선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칭찬하던 중이었습니다. 이렇게 일찍부터 준비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열심은 갈라디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과 도전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만일 바울이 갈라디아의 성도들과 함께 고린도에 갔을 때 바울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했던 것과는 달리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고린도의 성도들은 물론 바울과 또 함께 간 사람들이 피차 부끄러움을 당할까 염려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직한 사람 디도와 또 다른 형제들을 먼저 고린도로 보내어 바울의 편지를 전달하고 또 연보를 미리 준비하도록 격려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 5절을 다시 읽어봅니다.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으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이렇게 준비하라는 것이 무슨 말일까요? 바울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매 주일 첫날에 연보를 드려 저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매 주일 첫날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였던 주일예배를 말합니다. 일주일 동안 열심히 일하여 얻은 수입의 얼마를 떼어 주일에 모일 때마다 헌금하여 예루살렘에 보낼 연보를 저축하게 했습니다.
언젠가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하게 되면 그동안 저축해 놓은 물질이 있기 때문에 한 번에 거액의 헌금을 모금해야 할 부담도 덜어질 뿐 아니라 갑작스런 헌금을 드리는 일로 교인 중에 누구라도 마음에 시험 들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헌금을 할 때마다 그 물질을 받게 될 예루살렘 형제들을 생각하며 마음으로 교제하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준비하는 연보가 참 연보답고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에서 참과 억지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헌금을 하지만 어떤 헌금은 참 헌금답고 어떤 헌금은 억지가 될 수 있습니다. 미리 준비한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교우 여러분은 이 말씀에 얼마나 주의깊게 반응하며 또 실천하고 있습니까? 지난 주일에 헌금봉투에 대해 말씀드렸던 것처럼 우리 교회는 물론 모든 교회들이 헌금봉투를 사용합니다. 봉투를 사용하는 것은 미리 준비하자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어떤 분은 헌금을 드릴 때 지폐를 사용하고 어떤 이는 동전을 드리기도 합니다. 깨끗한 지폐가 있는가 하면 많이 사용하여 낡아진 지폐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동전 소리가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릴까 신경이 쓰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나의 마음이 중요하지 얼마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나 자신이 불편합니다.
혹시라도 고액권을 드리는 사람과 동전을 드리는 사람의 인간적인 마음이 드러난다면 좋은 헌금이 아닙니다. 아주 오래 전에 한국에 있을 때 어떤 분이 지갑에서 고액권을 꺼내어 보란듯이 헌금 주머니에 넣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예수님이 성전의 헌금궤 앞에 앉아 헌금하는 사람들을 지켜보셨던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부자들은 헌금궤에 쩔렁쩔렁 소리를 내며 많은 돈을 떨어뜨리고 들어갔습니다. 자랑스럽게 날 보란듯이 헌금했다 그말입니다. 그걸 꼭 사람들에게 드러내야 합니까? 그래서 헌금하는 돈이 눈에 보이는 것이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라 봉투를 사용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봉투를 사용하는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 미리 준비하는 마음이 담겼기 때문입니다. 헌금시간이 되어 갑자기 지갑을 꺼내거나 호주머니를 뒤적이다 손에 잡히는 것을 즉흥적으로 드리는 헌금보다는 예배 전에 미리 준비한 헌금이 참 헌금답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억지로 하지 않는 헌금이 됩니다. 교회 오기 전에 미리 준비하여 봉투에 담아온다면 준비하는 마음이 훨씬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헌금봉투는 예배당 들어오실 때 받아 사용해도 좋지만 가능하면 집에 가져갔다가 교회 오기 전에 준비된 헌금을 담아오시는 것이 훨씬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가진 것 중에 가장 깨끗한 돈으로 골라두었다 헌금으로 드리기도 합니다. 은행에서 빠빳한 신권을 바꾸어 드리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다리미로 한장씩 다려 깨끗하게 펴서 헌금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드리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너무 번거로운 일이라 생각됩니까? 똑같은 돈이지만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드리는 나의 감사와 신앙고백이 담겨있기에 헌금을 아무렇게나 다루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미리 준비한 헌금봉투를 사용하는 것이 좋은 습관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을 구별하여 두었다가 드렸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레위기 22장을 보면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 짐승들은 흠이 없는 정결한 소와 양이나 염소였습니다. 흠이 없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눈이 먼 것이나 상한 것,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이나 종기 있는 것, 괴혈병이 있는 것이나 비루 먹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드릴 짐승의 첫 새끼를 따로 구분하였고, 가진 것 중에 가장 건강하고 흠이 없는 짐승을 제물로 구별하여 두었다가 성전에 올라갈 때 가지고 갔습니다. 여기에 미리 준비하는 마음이 담겼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질 짐승을 보면서 자기의 죄를 생각하였고 그 짐승이 피 흘려 죽음으로 나를 대신하여 희생당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며 헌물의 참된 정신입니다.
구약 말라기서를 보면 헛된 제물을 드리던 백성들과 제사장들을 향한 하나님의 엄한 책망이 나옵니다. 책망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고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멸시했다는 말일까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이 제단에 더러운 떡을 드렸고 눈 멀고 병들고 절룩거리는 짐승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어제 드렸던 떡, 아니 몇일 전에 드렸다가 물린 곰팡이 나고 쉰 떡을 다시 제단에 올리며 ‘날마다 드리는 이 제사가 참 귀찮구나’코웃음치고 남의 것을 도적질한 물건과 병든 것을 가져다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러고도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 너희가 내 단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1:10)
말라기 선지자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의 의미와 정신을 깡그리 잊어버렸고 고의로 무시했으며 제사는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드리는 형식적인 행사였을 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그 이름을 멸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언제 어떻게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했습니까?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였습니까? 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때 하나님 말씀하시기를, “너희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 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3:9, 10) 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십일조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말라기 선지자 시대에 타락하고 교만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능멸하면서도 도리어 큰 소리를 치던 사람들에게 주신 경고와 함께 깨끗한 헌물을 드리는 사람에 대한 복의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못된 짓 다하고 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사람이 십일조와 감사의 헌물을 아무리 많이 드려도 그것이 하나님께 아무런 기쁨이 되지 않고 도리어 영광을 가리우는 종교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 배경을 생략하고 무조건 십일조를 열심히 드리면 복을 쌓을 곳이 없이 주신다는 말씀만 강조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본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하나님께 헌물을 드리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귀찮지만 할 수 없이 드렸고 성한 것을 드리기 아까워 병들고 상한 짐승으로 드렸습니다. 품꾼의 삯을 주지 않고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만들어 모은 부정한 돈, 도적질한 돈으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정직한 마음과 순전한 마음으로 온전한 헌물을 드리지 않으면서 도리어 방자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고도 큰소리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이제부터라도 정직한 헌물을 드려보라, 하나님의 것과 사람의 것을 구별할 줄 아는 정직한 마음으로 헌물을 드려보라 그러면 너희가 복을 받지 않겠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어느 부분에 강조점을 두고 읽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지켜야 할 당연한 의무를 강조하시는데, 사람들은 더 큰 복에 관심을 둡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드리는 헌물의 정신은 은혜에 대한 감사고백과 그 은혜를 실제로 나눔에 있습니다. 복을 많이 주시고 덜 주시며 주시거나 거두어 가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은혜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감사를 돌릴 뿐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신 말씀처럼 각자 자기 마음에 정한 대로 즐거이 드리면 곧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헌금이 되었습니다. 생활에 여유가 있으면 넉넉하게 드릴 수 있고, 형편이 어려우면 형편에 맞는 헌금을 드리면 됩니다. 그래야 인색함이나 억지가 되지 않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던 제물 중에는 소나 양처럼 큰 제물도 있지만 그런 것을 드릴 힘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드리게 하였고 그것도 감당할 힘이 없는 사람을 위하여 고운 가루를 가져다 드리게 하셨습니다(레5장). 소와 양을 드릴 수 없는 가난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개인의 형편을 따라 누구나 하나님께 헌신하게 하시는 배려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가르치신 헌물입니다.
제사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제사를 싫어하셨습니다. 제사 드리는 사람이 타락하면 그 제물도 부정한 것이 되었습니다. 제사의 목적과 방법이 부정하면 그 제물도 부정했습니다. 헌금의 목적과 방법이 부정하면 역시 그 물질도 부정한 것이요 하나님의 선한 사업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사용되는가 또한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보시고 마음에 있는 것으로 받으십니다. 작은 것으로도 부하게 사용하시는 분이시며 가난한 자의 깨끗한 헌물을 선한 일에 크게 사용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 드리기 전에 미리 준비한 헌금이 하나님께 즐거운 드림이 됩니다.
지금도 잘 하고 있지만 아직 준비하지 못하고 드리는 분들이 있었다면 다음 주일부터 시작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주일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에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준비하는 것처럼, 예배자로서의 마음가짐이 훨씬 단정해지고 감사의 고백도 보다 구체적이 될 겁니다. 몸과 마음과 물질과 시간을 드려 하나님께 감사하는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으로 충만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빕니다.
돈 잘 쓰는 법
고후09장 / 최영기목사
돈을 벌면 행복하고 이웃에게 존경을 받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돈을 벌면 정 반대의 현상이 생기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과 멀어지고 이웃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자신의 삶은 염려와 근심으로 점철됩니다. 왜냐하면 돈에는 영적인 파워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돈에는 영적인 파워가 있기 때문에 사람이 돈의 종이 되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복이 되어야할 돈이 화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돈을 도구로만 사용한다면 돈이 있다는 것이 참 좋을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 한국에 가서도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전에 한국에서 가난하게 살 대학교 때에는 어디에 가더라도 걷던지 버스를 타야했는데 이제는 경제적인 여유가 있으니까 택시를 탈 수가 있습니다. 이번전주에 갔을 때에 세미나를 주최하는 교회 목회자님들과 청국장을 먹으로 갔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몰려 가다보니 목회자뿐만이 아니라 사모님도 계시고 방문 중인 선교사도 계시도 저에게 차편을 제공한 평신도도 있었습니다. 내가 밥값을 내겠습니다 자원할만한 여유가 있는 분이 없어서 네가 저녁 값을 냈습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쓰라고 준 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밥값을 내면서 기쁘기도 하고 돈이 있다는 것이 참 좋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점에 가보면 돈을 버는 법에 관한 책은 많지만 돈을 쓰는 법에 관한 책은 거의 없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하여 어떻게 하면 돈을 잘 쓸 수 있는지를 상고하겠습니다.
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도구로 사용 한다
돈을 잘 쓰기 위하여서는 돈을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도구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자라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여야합니다. 지적인 성경 공부도 필요하지만 삶에서 하나님을 체험하여야 믿음이 자랍니다. 그런데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기적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헌금입니다. 건축 헌금 약정을 통하여 벌써 그런 체험을 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건축 헌금을 약정할 여유가 없었는데 약정을 하고 나니까 예상치 않게 봉급 인상을 받았고 인상액을 따져보니까 약정 액수와 같더라는 분이 있습니다. 건축 헌금을 얼마를 약정하기로 액수를 마음에 정했는데 서형순 전도사님의 설교를 듣고 약정액을 올렸더니 예상치도 않은 곳에서 인상액에 해당하는 액수의 수표를 보내왔더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채워주시는 능력을 체험하는 좋은 예가 십일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께 십일조를 바쳤을 때에 바친 것 이상으로 창고가 넘치도록 채워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말 3:10). 이러한 채워주시는 능력을 체험하면서 우리의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1.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쓸 때 풍성하게 채워주신다
오늘 본문을 보면 고린도 교인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헌금을 약정하고서도 이행하지를 않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케도니아 교인들에게 고린도 교인들을 자랑을 하였는데 허 자랑이 되게 생겼습니다. 이렇게 하면 고린도 교인들이 망신을 하기 때문에 사람을 미리 보내어 헌금을 재촉하고 있습니다(1-5절). 사도 바울 바울은 헌금을 하기를 권면하는 이유를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헌금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넘치게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9절).
예수를 잘 믿으면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부자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한 것을 주신다고 했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주신다고 약속을 하신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욕심으로 구하면 안 주신다는 구절은 있습니다(약 4:3).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는 넘치는 풍요함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재물을 모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을 위하여 쓰는 사람에게 넘치는 풍요함을 약속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썼을 때에 풍성히 채워주시는가?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관심이 많으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도 곡식을 추수할 때에 남겨진 곡식이 있어도 되돌아가서 추수하지 말고 과일을 추수할 때에도 남겨진 과일이 있을 때에 다시 가서 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신 24:19-20). 경제 능력이 없는 과부나 고아, 외국인들을 위하여서입니다. 하나님께서 경제 능력이 없는 사람을 어떻게 돕겠습니까? 경제 능력이 있는 사람을 통하여 도우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고아와 과부가 추수하고 남은 곡식이나 과일을 주워서 연명을 할 수 있도록 한다면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불쌍하게 생각하셔서 땅 주인에게 풍요함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사업에서 얻어지는 이익을 선교사를 위하여 사용하는 기업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사를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께서 사업을 번창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2. 확실한 물질관과 청지기 의식을 갖는다
그러므로 풍요함을 누리기 원하면 확실한 재물관을 가져야합니다. 확실한 재물관이란 재물을 쌓아놓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섬기도록 하기 위하여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섬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재주도 주시고 탤런트를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예를 들어서 가르치는 재주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재주를 가진 사람이 교육학을 전공하고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남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재주와 자격을 남을 가르치는데 써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돈을 버는 재주를 주시고 재물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남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으면 교사 자격증을 갖고 있으면서도 남 가르치기를 거부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돈은 사역의 도구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풍요함을 맛보기 위하여서는 올바른 물질관과 또한 청지기 의식을 가져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역과 불우한 사람들을 위하여 쓰라고 우리에게 재물을 맡기셨습니다. 투자 회사에서 보면 남의 자금을 맡아서 관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돈이 아닌 남의 돈을 갖고 불려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맡은 금액의 돈을 맡으면 맡을수록 수수료가 많아집니다. 우리가 청지기가 되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의 자금을 관리하는 fund manager로 자신을 생각하여야합니다. 이 재물을 잘 관리하여 하나님의 신뢰를 얻으면 하나님께서 더 많은 재물을 맡기시고 이렇게 할 때에 자신도 퐁요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뢰하는 청지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풍요함을 맛보려면 자신의 살림을 무제한으로 늘려서는 안 됩니다. 어떤 분은 수입이 늘어나면서 씀씀이도 늘여서 항상 부족 가운데에 살고 하나님의 청지기 노릇을 잘못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 교회 어떤 성도는 하나님께서 사업을 성공시켜주시면 번 돈을 가정 교회 전파를 위하여 사용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집은 어느 정도 이상 큰 것은 안사고 차는 어느 정도 수준의 것을 사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아주 현명한 약속입니다. 이런 결심이 없으면 수입이 많아지면 씀씀이가 늘어서 주와 이웃을 위해서 재물을 사용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풍요함을 허락하지를 않으시고 청지기 일을 잘 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선택하여서 풍요함을 허락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써야할 액수를 정하고 나머지를 주와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여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천국에 상을 쌓아놓게 됩니다(마6:20). 세상에 돈을 쌓아 놓으면 간수하는 방법이 마땅치 않습니다. 주식에 투자하면 주식 값이 떨어질 때에 손해를 봅니다. 부동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은 은행을 믿지 못해서 현차를 매트 밑에 숨겨 두었다가 집에 불이나서 다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재물을 천국에 쌓아 놓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Ⅱ. 의로운 사람이 되는 도구로 사용한다
돈을 잘 쓰기 위하여서는 다음에 의로운 사람이 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가난한 사람에게 뿌려주는 사람의 의는 영원하다고 했고 하나님은 자신이 쓸 것과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쓸 것을 마련해주어서 의의 열매를 증가시켜 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9-10절).
어떤 목장을 보면 목장 식구가 목자보다 여러 면에서 뛰어납니다. 나이가 위기도 하고 학력이 높기도 하고 사회적인 지위가 높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장 식구들이 목자를 존경하고 순종합니다. 영적인 권위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보면 대부분이 재물로 목장 식구를 섬기는 사람들임을 발견합니다. 가게가 바빠서 점심을 못 먹는 사람에게 점심을 사다주기도 하고,, 여행 떠날 때에 음료수가 음식을 준비해 주기도 하고, 결혼 기념일인데 경제적인 여유가 없으면 좋은 식당에 가서 축하하라고 돈을 쥐어주기도 합니다. 재물로 도와주니까 목장 식구들이 돕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꼭 그런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재물을 주님의 뜻을 좇아 주와 이웃을 위하여 사용할 때에 하나님께서 영적인 권위를 부여하시는 것 같습니다. 재물에 영적인 파워가 있는데 이 파워가 우리를 종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쓸대에 영적인 파워를 공급하는 것 같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재물을 의롭게 사용하면 착한 사람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착한 마음을 갖고 태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착하게 태어나지 못했어도 착한 사람이 되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재물을 사용하여서 이웃을 돕는 것입니다. 왜 재물로 남을 도울 때에 착한 사람이 되어 가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남을 돕는 삶을 살 때에 이웃에 대한 관심이 생깁니다. 불우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이 생깁니다. 남의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는 적극성이 생깁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착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런 구체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재물을 흩어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 착한 사람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것도 재물이 가진 영적 파워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영적 파워가 우리를 재물의 종이 되게도 하지만 잘 사용하면 우리를 선한 사람으로 바꿔주는 것 같습니다.
재물을 통하여서 영적인 권위가 생기고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서는 우선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야하지 않겠느냐고 물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재물을 흩어주는 삶을 살 때에 경제적인 여유가 생깁니다. 하나님에서 이러한 삶을 살 때에 풍요함을 주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청지기의 삶을 살아서 영적인 권위를 얻고 착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Ⅲ.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도구로 사용한다
돈을 잘 쓰기 위하여서는 재물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도구로 사용하야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에게 영광 돌립니까? 노래와 찬양과 고백으로 영광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우리가 예수 믿고 변했다는 말을 세상 사람들이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에게 찬양이 돌아갑니다(마 5:16). 그래서 우리 교회는 하나님에게 영광 돌리는 교회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믿고 삶이 극적으로 변해서 휴스턴에 사는 안 믿는 사람들로부터 신기하다는 말을 듣는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남이 안하는 일을 하고 주위 사람들이 감탄을 할 때마다 하나님에게 영광이 돌려집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헌금을 권유하면서 재물을 사용하여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권유하고 있습니다(11-13절).
우리는 재물을 이와 같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식당에서 일하는 어떤 웨이트레스가 말했습니다. “서울 침례교회 교인들은 식당 매너가 좋고 팁이 후합니다!” 이런 말이 던져딜 때마다 하나님에게 영광이 됩니다. 가게를 하는 분이 종업원에게 임금을 다른 곳보다 후하게 주고 사랑으로 돌보아 주어서 “우리 가게 아저씨 아줌마는 교회 다니는 분이라 우리에게 참 잘 해 주어요.” 이렇게 말할 때마다 하나님에게 영광이 돌아갑니다. 어떤 사람이 경제적으로 궁핍하여서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있을 때에 우리가 그 필요를 채워주어 그 사람이 기도 응답하신 하나님에게 감사할 때마다 하나님에게 영광이 돌아갑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에는 “그렇게 하기 위하여서는 돈 여유가 있어야지요?”하고 말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희 조모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남 줄 것은 없어도 도둑맞을 것은 있다.” 맞습니다. 우리가 있어서 남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갖고 있는 것을 갖고 나보다 못한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재물을 쓰기로 할 때에 하나님께서 풍성히 채우시기 때문에 엄격하게 말하면 자기 것을 갖고 우리가 돕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을 갖고 돕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청지기로써 하나님의 것을 분배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 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떨어지는 콩고물로 인하여 자신에게 이득이 되고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추수 감사절은 하나님에게 받은 것을 감사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행 20:35).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감사할 수 있는 것도 복입니다. 그러나 주신 것을 갖고 주님께 바치고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은 더 큰 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은 큰 복을 받으신 분들입니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충성스럽게 바치셨습니다. (주일 헌금의 85-90%가 십일조입니다.) 또 선교사들을 위하여 많은 헌금을 하셨습니다. 우리 재정의 약 30%가 선교 헌금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중의 가장 많은 부분이 목장을 통한 선교사 후원 헌금입니다. 수요일 집회 참석 숫자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가 오셔서 선교 간증을 할 때마다 제 예상을 훨씬 웃도는 선교 헌금을 해주셨습니다. 또 목장 전도 대상자를 위하여 많은 금전을 쓰셨습니다. 집을 공개하고 음식을 대접하고 일터로 음식을 사서 갖다 주기도 하고. 또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헌금하셨습니다. 휴스턴 도심에서 무숙자를 위한 교회를 운영하는 James 목사님을 위하여 동전을 모아 보냈습니다. 히스패닉 미션을 위하여 음식, 의류를 공급해주고 예배를 돕기도 하였습니다. 교회 차원이기는 하지만 청소년 센터 개원을 도왔고 노인회, 복지회 등을 위하여 시간과 재물을 바쳤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무도 모르게 경제적으로 어려운 많은 교우들을 많은 분들이 도왔습니다.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상이 클 것입니다.
여러분들 돈을 참 잘 쓰셨습니다. 감사절을 당하여 하나님이 주신 복만이 아니고 주신 재물을 주님과 이웃을 쓰고자 하는 마음과 능력을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내년 1년도 청지기로써의 삶을 다시 다짐합니다. 그리고 감사절을 당하여 하나님에게 받은 축복은 많은데 받은 축복을 남과 나누어가지 못했고 청지기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느끼는 분들은 새해부터 성실한 청지기가 되어서 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이로 인하여 자신이 진정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며 하나님에게 영광이 돌려지는 삶을 살기를 결심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