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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01 나는 나의 슬픔과 괴롬과 있는 대로의 지혜를 일점에 응집시켜 이 순간 그의 눈 속을 응시하지 않을 수 없다.
02 그가 이삼 미터의 거리까지 와서 멈추었을 때 나는 내 몸이 저절로 그 편으로 내달은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사실은 그와 반대로 젊은 느티나무 둥치를 붙든 것이었다.
빨간 풍선을 놓친 계집아이가 자지러지게 운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로 빠져들 듯이 풍선이 멀어 간다.
"계연이가 시방 떠난단다."
김동리 '역마살' 중
01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02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면은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01
02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이상 '날개' 중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애기의 잠덧이 있습니다.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인제야 저 숲 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까?
신석정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중
그리고 이튿날부터는 마치 육체의 운동장에서 정신이란 이름의 장난꾸러기가 들어왔다 나갔다 숨바꼭질하기를 수없이 되풀이하는 것 같은 고통의 시간의 연속이었다. 대소변을 일일이 받아내는 고역을 치러 가면서 할머니는 꼬박 한 주일을 더 버티었다. 안에 있는 아들 보다 밖에 있는 아들을 언제나 더 생각했던 할머니는 마지막날 밤에 다 타버린 촛불이 스러지듯 그렇게 눈을 감았다. 할머니의 긴 일생 가운데서, 어떻게 생각하면, 잠도 안 자고 먹지도 않고 그러고도 놀라운 기력으로 며칠 동안이나 식구들을 들볶아대면서 삼촌을 기다리던 그 짤막한 기간이 사실은 꺼지기 직전에 마지막 한 순간을 확 타오르는 촛불의 찬란함과 맞먹는, 할머니에게 가장 자랑스럽고 행복에 넘치던 시간이었었나보다. 임종의 자리에서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내 지난날을 모두 용서해 주었다. 나도 마음 속으로 할머니의 모든 걸 용서했다.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
윤흥길 '장마' 중
01 누이는 시내 어떤 실업가의 막내아들이라는 작달만한 키에 얼굴이 둥근, 누이의 한 반 동무의 오빠라는 청년과는 비슷도 안한 남자와 아무 불평 없이 혼약을 맺었다. 그리고 나서 얼마 안 되어 결혼하는 날, 누이는 가마 앞에서 의붓어머니의 팔을 붙잡고는 무던히나 슬프게 울었다. 아이는 골목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누이는 동네 아낙네들이 떼어 놓는 대로 가마에 오르기 전에 젖은 얼굴을 들었다. 자기를 찾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이는 그냥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누이가 시집 간 지 또 얼마 안 되는 어떤 날, 별나게 빨간 놀이 진 늦저녁 때 아이는 누이의 부고를 받았다. 아이는 언뜻 누이의 얼굴을 생각해 내려 하였으나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02 당나귀가 더 날뛸수록 아이의, 왜 쥑엔! 왜 쥑엔! 하는 지름 소리가 더 커 갔다. 그러다가 아이는 문득 골목 밖에서 누이의, 데런! 하는 부르짖음을 들은 거로 착각하면서, 부러 당나귀 등에서 떨어져 굴렀다. 이번에는 어느 쪽 다리도 삐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의 눈에는 그제야 눈물이 괴었다. 어느새 어두워지는 하늘에 별이 돋아났다가 눈물 고인 아이의 눈에 내려왔다. 아이는 지금 자기의 오른쪽 눈에 내려온 별이 돌아간 어머니라고 느끼면서, 그럼 왼쪽 눈에 내려온 별은 죽은 누이가 아니냐는 생각에 미치자 아무래도 누이는 어머니와 같은 아름다운 별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머리를 옆으로 저으며 눈을 감아 눈 속의 별을 내몰았다.
황순원 '별' 중
그 밖에도 나는 아주 많은 부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 장마 때 하천으로 떠내려오던 돼지의 슬픈 눈도, 노상 속치마바람이던 그애의 어머니도, 다방 레지로 취직되었던 그애 언니의 매끄러운 종아리도, 그 외의 더 많은 것들도 나는 말해줄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몇 년 전 나는 은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유년 시절에 관한 소설을 한 편 발표한 적이 있었다. 소설을 쓰는 일이 과거를 되살려 불러낼 수도 있다는 것과 쓰는 작업조차도 감미로울 수 있다는 깨달음을 안겨준 소설이었다. 마치 흑백사진의 선명한 명암대비처럼 유난히 삶과 죽음의 교차가 심했던 유년의 한때를 글자 하나하나로 낚아올려내던 그때의 작업만큼 탐닉했던 글쓰기는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육친의 철저한 보호 속에 갇혀 있다가 굶주림과 탐욕과 애증이 엇갈리는 세계로의 나아감, 자아의 뾰죽한 새 잎이 만나게 되는 혼돈의 세상을 엮어나가던 그 사이사이 나는 몇 번씩이나 눈시울을 붉히곤 했었다. 은자는 그때 이미 나보다 한발 앞서 세상 가운데에 발을 넣고 있었다. 유행가와 철길과 죽음이 그애의 등을 떠밀어서 은자는 자꾸만 세상 깊은 곳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애가 세상과 익숙한 것을 두고 나의 어머니는 ‘마귀새끼’라는 호칭까지 붙여줄 지경이었으니까. 흡사 유황불이 이글거리는 지옥의 아수라장처럼 무섭기만 했던 그 세상에서 나는 벌써 몇 십 년을 살고 있는가. 아니, 살아내고 있는가…….
02 그애는 제멋대로 나를 유명한 작가로 만들어놓았다. 그리곤 자가용이 없다는 내 말에 은자는 혀까지 끌끌 찼다. 짐작하건대 그애는 나의 경제적 지위를 다시 가늠해보기 시작했을 것이었다. 은자는 그만큼 확신을 가지고 자가용이 있느냐고 물었으니까. 어쩌면 그애는 스스로가 오너드라이버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은자는 내가 과거의 찐빵집 딸로만 자기를 기억하고 있는 것을 몹시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지금은 어떤 계층으로 솟구쳤는가를 설명하는 쉰 목소리는 무척 진지하였다. 만나기만 한다면야 그애의 달라진 현실을 확실히 알 수가 있을 것이었다. 만남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간곡하게 재회를 원하는 그녀의 현실을 나는 새삼 즐겁게 받아들였다. 언젠가의 첫 여고 동창회가 열렸던 때를 기억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서울 지역에 살고 있는 동창 명단 중에 불참자가 반 이상이었다. 물론 피치 못한 이유가 있어서 불참한 경우도 있겠지만 졸업 후의 첫 만남에 당당하게 나타날 만한 위치가 아니라는 자괴심이 대부분의 이유였을 것이다.
03 노래의 제목은 ‘한계령’이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었던 한계령과 지금 듣고 있는 한계령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노래를 듣기 위해 이곳에 왔다면 나는 정말 놀라운 노래를 듣고 있는 셈이었다. 무대 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를 부르는 저 여가수가 은자 아닌 다른 사람일지라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온몸으로 노래를 들었고 여가수는 한순간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발 밑으로, 땅 밑으로, 저 깊은 지하의 어딘가로 불꽃을 튕기는 전류가 자꾸 쏟아져내리는 것 같았다. 질퍽하게 취하여 흔들거리고 있는 테이블의 취객들을 나는 눈물어린 시선으로 어루만졌다. 그들에게도 잊어버려야 할 시간들이, 한줄기 바람처럼 살고 싶은 순간들이 있을 것이었다. 어디 큰오빠뿐이겠는가. 나는 다시 한번 목이 메었다.
04 좋은 나라로 찾아와. 잊지 마라. 좋은 나라. 은자는 거듭 다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카페 이름을 ‘좋은 나라’로 지은 것에 대해 나는 조금도 못마땅하지 않았다. 얼마나 좋은 이름인가. 다만 내가 그 좋은 나라를 찾아갈 수 있을는지, 아니 좋은 나라속에 들어가 만날 수 있게 될는지 그것이 불확실할 뿐이었다.
낡은 밤에 숨막히는 나도 흐르고 은하수에 빠진 푸른 별이 흐른다.
우리들은 모두
김춘수 '꽃' 중
박완서 '그여자네 집'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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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날개ㅠㅠ진촤 이상은 천재
운수좋은날 킹왕짱 ㅠㅠ 근데 스크랩이 안되네요 ㅠㅠ엉엉
22 내가 젤 좋아하는 소설 ㅠㅠㅠㅠㅠ
중간에 김동리의 역마살이 아니라 역마 아닌가요..?
역마인듯~
젊은 느티나무 쫘앙ㅜ.ㅜ 이 소설은 감수성 풍부한 어린 저를 흔들어놓았습죠
젊은 느티나무도 좋고 전 병신과머저리도 감명깊게읽음 정말 ㅠㅠ
이상 짱 ㅠ_ㅠ 기형도님도 짱 ㅠ_ㅠ 이런 게시물 너무 좋아요!
이상의 날개는 지금 읽으면 고등학교 시절 읽던 거와는 또 다르게 다가와요. 전 개인적으로 염상섭의 삼대를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나여. 국어 선생님께서 기말고사에 삼대에 대해 왕창 나오니까 책 꼭 읽으라고 했는데 저희반에서 저만 완독했었거든요. 물론 시험문제는 달랑 하나 나왔었지만, 시험공부시간 쪼개가면서 읽은 보람이 있었던 책이었어여.
젊은 느티나무..ㅠ_ㅠ 완전 가슴이 싸아한게...ㅠ_ㅠ
운수좋은 날 병신과 머저리 눈길 김약국의 딸들 난쏘공 그여자네집 ㅜㅜ 잊지못해
수난이대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젊은 느티나무가 천국의나무 원작이라던데... 아닌가?ㅋㅋㅋㅋ
젊은 느티나무 진짜 최고야 최고ㅠㅠㅠ 맨날 읽어도 맨날 좋아ㅠㅠㅠ 이거 있을 줄 알고 들어왔다긔
젊은 느티나무에서 그거가 젤 좋았어요. 그 편지 보고서 오빠가 화나서 뺨 때리고는 일부러 보라고 거기 둔건가? 하고 나가자마자 여주가 막 기뻐서 울잖아요. 그 마음 알아채고ㅠㅠㅠㅠㅠㅠ 난 그 부분이 왜케 달달하고 막.... 그리고 맨날 오빠가 무얼해? 하고 물어 본다고 하는 것도 너무 좋고 ㅠㅠㅠㅠ
ㅠㅠㅠㅠㅠㅠㅠㅠ 전 이상 날개 마지막만 보면 눈물이 그냥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정확한 뜻은 모르지만 그냥 눈물이 난다규 ㅠㅠㅠㅠㅠ 나도 날개를 펴고 날아보고싶긔 ㅠㅠㅠㅠ
님짱 ㅠㅠ 이런게시물 너무좋다긔...2탄도프리즈!!ㅠㅠ
스크랩허용좀 해주시면안될까요 ㅠㅠ 플래닛에 비공개로 퍼가겠슴다 ㅠㅠ
난 운수좋은날 결말만 보면 항상 울컥한다규...........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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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진짜 게시물 너무 좋아요..ㅠㅠ 진짜 눈물 나오긔..ㅠㅠ
난 학마을사람들 ㅋㅋ
그 여자네 집에서 꽈리 나오는 부분이 참 좋던데.. 아.... 몇년전에 본거라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ㅠㅠ
저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교과서에서봣뚬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젊은느티나무 킹왕짱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저만치서 고등 학생들이 배드민턴을 친다. 콕이 나비처럼 경쾌하게 날아와 라켓에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젊은 연인들의 찰나적인 키스의 파열음처럼 감각적으로 들린다. 나는 충동적으로 그의 이마의 주름진 곳에 그런 키스를 퍼부었다. 그가 낯선 게 견딜 수 없어서였다. 그가 아주 타인처럼 낯선 게 견딜 수 없어서였다. 나무들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우수수 바람이 온다. 아 이부분 너무 좋네요ㅜㅜ
스크랩 좀 풀어주세요~~ㅠㅠ 개인 블로그로 퍼가고 싶어요
이런게 한국어가 아니었다면 가능할까ㅜㅠㅠㅠㅠㅠ 진짜 읽는 내내 가슴이 두근두근...어떠한 감정적인 단어가 없는데도..
예전에 어떤 미국교수가 한글을 열심히 공부해서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고 한국에서 왜 노벨상이 안 나오는지 모르겠다고..너무너무 좋다고.... 영어의 번역에 한계가 있으니 참 안타깝다고. 그랬던 생각이 나네요. 이런 글 정말 너무 좋아요
그여자네집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한국어 이렇게 아름다운데..어떤 찍찍이는 영어에 아주 목숨을 걸지...휴 감수성풍부했던 사춘기시절에 읽었기에 더욱 애틋하고 지금 다시 읽으면 더욱 그 맛을 느끼게 되는듯. 학생시절 소설 시를 무 자르듯 분해하고 환원주의적 시각으로 오직 수능을 위해 보았던 문학작품을 진정한 하나의 문학으로 바라보았다면 그 시절 얼마나 더 감동적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