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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창세 46,1-7.28-30
복 음 : 마태 10,16-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23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하느님 중심中心의 삶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참 행복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 있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저절로 샘솟는 찬미와 감사입니다.
참 자기 실현도 역설적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가능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이 하느님 선사하신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게 합니다.
누구나 선망하는 한결같은 여전한 삶도 하느님 중심의 삶에 있습니다.
제 가장 좋아하는 덕담의 인사도 '여전하시네요.' 입니다.
오랜만에 수도원을 찾는 이들의 반가움에 넘친 공통의 인사말입니다.
어제는 참 행복했던 날입니다.
아침, 저녁 두 차례 예기치 않게 사랑하는 많은 지인들에게 아름답고 신비로운 선물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주신 선물을 그대로 받아 전해 드렸습니다.
아침에는 수도원 들어가는 하늘 길 가로수들을 찍은 사진을
'새 아침의 기쁨'이란 제목으로 카톡으로 전 세계에 전송했고,
저녁에는 불암산 저녁노을을 찍은 사진을 '저녁선물'이란 제목과 더불어 전송했습니다.
수시간이 소요되었어도 아깝지 않았고 기쁨에 넘쳤습니다.
이야말로 하느님 주신 문명의 혜택입니다.
대부분 모두가 아름답고 신비로운 무사無私한 선물에, 하느님 체험에 감사했습니다.
멀리 나이로비에 선교사로 파견되신 아델라 수녀님과의 소통이 각별한 감동이었습니다.
이역만리 아프리카 남단의 나이로비와 실시간 나눔이 가능하다니 이 또한 하느님 베푸신 기적입니다.
'한국 새 아침의 기쁨!'이란 제하의 '하늘 길 가로수들' 사진 선물에,
나이로비 사무실에서 바라 본 정원 사진을 답송 했습니다.
“신부님, 제 사무실에서 바라 본 나이로비의 아침입니다.”
“거기도 하느님 계신 아름다운 아침이네요. 여기는 7월9일 오후 4시, 거기는 어느 시간인지요?”
“6시간 늦어서 지금 10시 4분입니다. 오늘은 흐린데 날씨 아주 쾌적하고 주변이 아름다워요.”
사진과 함께 주고받은 문자의 내용에 순간 떠오른 시입니다.
-사람이 있는 곳
어디나 하느님이 계시고
자연自然이 있는 곳
어디나 하느님이 계시다
시공時空을 초월超越하여
언제 어디에나 계신 하느님이시다-
오늘 창세기 1독서 아득한 옛날에 계셨던 똑같은 하느님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런 하느님을 깨달아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 역시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기쁨, 영원한 행복의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창세기 앞부분 다음 내용에 감동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밤의 환시 중에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 "야곱아, 야곱아!"하고 부르시자, "예, 여기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얼마나 하느님께서 야곱을 신뢰했는지 깨닫습니다.
"수철아, 수철아!"하고 불러주시는 하느님을 묵상해 봅니다.
죽음을 얼마 앞둔 노년에도 늘 깨어 제자리에 충실하며 여전한 삶, 한결같은 삶을 살았던 야곱임을 봅니다.
이어 '두려워하지 마라. 나도 늘 너와 함께 하겠다'라는 축복 말씀을 받았고,
오매불망 꿈에 그리던 사랑하던 아들 요셉과 해피엔딩 만남의 선물도 받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너의 얼굴을 보고 네가 살아 있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는 기꺼이 죽을 수 있겠구나."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이처럼 놀라운 축복에 언제나 여전한 한결같은 삶입니다.
하느님 중심을 벗어나 내 중심의 삶을 살기에 유혹도 많고 주변에 휘둘리는, 휘말리는 일도 많습니다.
두려움과 불안도, 걱정도 끊이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이리떼 득실거리는 세상에 당신 양들을 파견하며 주신 충고 말씀은 넷으로 요약됩니다.
1. 사람들을 조심하라.
2. 걱정하지 마라.
3. 끝까지 견뎌 구원 받아라.
4. 박해하거든 피하여라.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하느님으로부터 분별의 지혜와 참 좋은 믿음을 선사받아
이 네 과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물론 복음의 예수님과 사도들 및 모든 믿음의 선배들이 그 좋은 증거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 중심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영원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저희가 천상잔치의 은총으로 현세에서 도움도 받고 영원한 신비도 배워 알게 하소서."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언젠가 강의를 하다 말고 갑자기 아무 말도, 또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자리에 서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에 저만 바라보고 있었지요.
그런데 10초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 이곳저곳에서
“무슨 일이 있어?”라고 물으며 조심스럽게 웅성대기 시작합니다.
이제 10초의 시간이 더 지나 20초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자 그 웅성거림은 더욱 더 커졌습니다.
사실 이렇게 가만히 있는 제가 더욱 더 쑥스럽고 그래서 더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을 한 이유는 가만히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지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란 서로가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늘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는 존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데, 그 대신 쓸데없는 곳에 공을 들이며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텔레비전 보기, 스마트폰으로 시간 보내기, 컴퓨터 게임…….
이런 것 외에도 쓸데없는 행동들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미워하기, 싸우기,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등등…….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데, 정말로 해야 할 일이 아닌 다른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으니
더 큰 불안과 걱정을 안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으며, 이 일 자체가 정말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면 불안이나 걱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에 지금의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잘 알고 계시기에 세상에 보내면서도 불안하실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직접 뽑은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면서도 똑같이 가지셨던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이지요.
아무 생각 없이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순간의 만족만을 위해서 살아서도, 또한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들만을 따르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어떠한 고통과 시련에서도 주님 안에서 힘을 얻을 수 있는 슬기로움을,
그러면서 세상의 모든 것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을 수 있은 순박함을 간직하면서
주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의 속성 상 도저히 불가능한 일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 심지어 사람들이 주님을 따른다고 박해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함께 하시면서 어떤 말을 해야 할 지를 가르쳐줄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며 용기를 불러 일으켜 주십니다.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주님의 일을 하고 있는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세상의 일만을 그리고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려는 일을 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주님과의 관계는 더욱 더 멀어지게 되고 결국 걱정과 불안 속에서만 살게 될 것입니다.
대신 주님의 일을 하면 할수록 주님께서 주시는 커다란 위안과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
희생자를 만드는 만남이 아니라
생명을 성장시키는 만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속화는 신앙과 사랑으로 정화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언지를 알게 하시며
그것을 나누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는
성령의 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우리의 행위와 언어는
올바른 방향을 찾게 됩니다.
올바른 방향이란
먼저 걱정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걱정을 내려놓는 방법을
우리 믿음 안에서 다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걱정은 우리들에게
주님을 만나도록 신호를 보내줍니다.
참된 지혜는 주님께 있습니다.
지혜의 시작은 내려놓음의 시작입니다.
내려놓음은 우리들에게
참된 인내를 가르쳐줍니다.
주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생명의 시간들이
내려놓음을 통해 인내하는 인격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끝까지 견뎌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인간이기에 한계를 갖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사실 참다 보면 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쌓아두지 말고 풀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가족 간에도 마음이 갈라질 텐데 그 때에 참고 견디라고 하십니다.
서로의 뜻이 다르고 오해가 있을 때 참고 기다려 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인내가 필요한 때이고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처신할 때입니다.
강한 것은 부러지고 그래서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깁니다.
그러니 어떠한 처지에서도 더욱이 주님을 증거 하는 자리에서는 예수님께서 취하셨던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구애됨이 없이 예수님 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묻고 행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지금 당장은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이깁니다.
열왕기 하권 20장에 보면 히즈키야 왕이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이때 히즈키야 왕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울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히즈키야 왕이 마주한 벽은 인간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죽음의 벽입니다.
그러나 히즈키야 왕 자신의 한계상황을 하느님께 내어 놓고 울며 기도했을 때 그 벽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눈물을 보시고 세상에서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해 주셨습니다.
15년을 연장해 준 것이 대단한 의미가 있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에 회개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다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벽이 참으로 많습니다.
인간적인 한계상황의 벽이 산 너머 산입니다.
생로병사는 물론이고 고독, 미움과 분노, 죄가 한계상황으로 다가옵니다.
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견디는 것입니다.
특별히 일상 안에서 히즈키야 왕처럼 벽 앞에서 기도하며
주님 이름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면 반드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공격을 공격으로, 모욕을 모욕으로, 미움을 미움으로 되갚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혹 참을 수 없다면 잠시 동안 하느님께서는 ‘나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항상 참아주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따지지 않고 참아 주시는 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서 되겠는가?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베풀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래도 참을 수 없다면 사랑으로 하느님께 앙갚음하십시오.
참고 견뎌서 모두가 구원을 얻기를 바랍니다.
모함이나 수근 거리는 소리에 속상해 하지 말고, 뒤에서 딴 소리하는 사람 때문에
억울해 하며 상처 받지도 말고 오직 주님의 이름 때문에 견디시길 바랍니다.
잠잠하게 참고 견디면 의심 없이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 순간 다가오는 한계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극복하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영원세상의 준비 조건으로만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슬기로우면서도 순박하게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게 정말 배울 내용입니다.
헌데, 슬기로움 순박함까지도 돈 벌기위한 데에 최대한 사용하는 판.
순박하게 보이는 연기로 슬기롭게 속이고 사기들 치니까 말입니다.
슬기롭고 순박하게 살기가 이 시대에 참 힘드니 한숨이 절로 납니다.
신앙인은 사후에 사라질 것들을 위해서 이렇게 살지 않기로 한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사후 영원세상의 준비 조건으로만 이렇게 살기로 한 사람이지요.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오 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