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 9:6-15
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9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0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11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12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느니라
13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14 또 그들이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15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 9:6-15 / 그러나 명심할 것은 만일 여러분이 적게 준다면 여러분도 조금밖에 받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씨앗을 적게 뿌린 사람은 적게 거두지만 많이 뿌린 사람은 많이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7) 얼마를 바쳐야 할 것인가는 각자가 스스로 결정할 일이므로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ㄴ) 하나님께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바치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ㄴ. 잠11:24-25) 8)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필요한 것은 무엇이나 주시고 또 풍성하게 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필요한 것을 다 채울 수 있고 풍성하게 되며 그 남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줄 수 있는 것입니다. 9)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ㄷ) `하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주신다.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ㄷ. 70인역 시112:9) 10) 농부에게 심을 씨앗을 주시고 먹을 곡식을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도 심을 씨앗을 주시고 그것을 무르익게 하셔서 풍성히 추수한 열매로 더욱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게 하십니다. 11)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많이 주신 덕분에 여러분도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의 선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가져다 줄 때 그들은 감사하여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12) 그러므로 여러분의 선물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그 한가지로 그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감사가 넘쳐 흐르게 하는 좋은 결과를 낳게 해줍니다. 13) 여러분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되게 믿을뿐 아니라, 자기들과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낌없이 선물을 보내준 사실을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14) 그리고 여러분을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깨닫고 여러분을 위해서 진정으로 기도드릴 것입니다. 15) 말로 다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라는 잠언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며 반드시 은혜로 갚아주십니다.
연보의 유익과 기쁨 (6-12) 연보를 씨를 뿌리고 거두는 일에 비유한 것은 씨를 뿌리는 것이 우리의 일이지만 열매가 맺히고 거두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나눔과 섬김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은혜로 갚으신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에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기쁨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하나 됨이란, 어려움을 당하는 당사자만의 것이 아니며 기쁨 또한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각각의 다른 지체를 위해 연합하고 헌신하되 기쁨으로 돕는 것이 당연합니다. 마게도냐 교회로부터 고린도 교회까지 예루살렘의 교회를 돕기 위해 모아지는 연보보다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를 모두가 귀하게 여기고 안타까운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힘을 모은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지역의 교회도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서로에게 관심이 있으며 할 수 있는 데로 우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습을 기뻐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더 크게 영광 받으시는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도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행의 동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이며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신다는 데에 있습니다.
진실한 믿음과 복종 (13-15) 순종이란 우리의 뜻을 꺾는 것이지 우리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꺾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꺾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보여주신 순종의 모범입니다. 예수의 구원의 은혜는 온 인류를 위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비롯한 마게도냐 교회들은 다수의 이방인이 포함된 공동체였습니다. 이들의 진실한 믿음과 순종의 연보는 교회가 민족과 인종을 초월한 형제애를 품게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진실한 믿음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순종은 반드시 기쁨의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진실한 믿음과 순종으로 맺어진 열매는 그 무엇보다 가치 있는 것입니다.
적용 :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해서 경험했던 선한 열매가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그리고 새로운 믿음의 결단을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세계랭킹 1위 골프 황제 자리에 등극한 미국 프로골퍼 스코티 셰플러(27)는 2024년 4월 14일 제88회 마스터스 골프 토너먼트 최종라운드에서 2022년에 이어 두 번째 그린재킷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승 소감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계획하심을 믿는다고 고백하며“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이번 대회를 통해 최선을 다해 경쟁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원하셔서 나를 이 자리로 부르셨다고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골프라는 달란트를 선물로 받았고 이 달란트를 오롯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사용하고 싶습니다. 경기를 이기든 지든 상관없습니다. 내 정체성은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안전하기 때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 설 교 >
넘치게 하시는 하나님
고후09장 6~8절 / 박상훈목사(승동교회)
“넘치게 하시는 하나님.” “넘치게 하시는 하나님.” 이러한 제목으로 잠시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고후9;8 전반부에 있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능히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넘치게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하나님은 능히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넘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또한 이 시간 하나님은 능히 모든 평강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아울러 이 시간 하나님은 능히 모든 축복도 우리에게 넘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것처럼, 우리에게 하나님의 평강이 넘치는 것처럼,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감사도 우리에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넘치는 감사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를 바랍니다.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지난 일 년 동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넘치는 은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넘치는 축복을 생각하며, 우리도 하나님께 넘치는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신16:16∼17 말씀입니다. 절기를 지킬 때는 빈손으로 하나님을 뵈옵지 말고, 각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빈손으로 하나님을 뵈옵지 말고 힘써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매 주일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추수감사주일은 하나님이 정하신 특별한 절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난 일 년 동안 하나님이 베푸신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생각하며, 우리 각자가 넘치는 감사를 하나님께 특별하게 드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은혜와 모든 축복도 넘치게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많이 심어야 많이 거둡니다.
고후9: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여기에 자연의 법칙이 나옵니다.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이는 하나님이 세우신 자연의 법칙입니다. 따라서 이는 자명한 이치이기 때문에, 우리가 따로 설명하거나 증명해야 할 필요가 전연 없습니다.
자연은 속이지 않습니다. 먼저 심어야, 뒤에 거둡니다. 역으로 나중에 거두려면, 먼저 심어야 합니다. 또한 많이 심어야, 많이 거둡니다. 역으로 많이 거두려면, 많이 심어야 합니다. 바로 이 자연의 법칙이 있기 때문에, 농부는 부지런히 씨를 뿌립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절인 고후9:5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연보 곧 헌금에 대한 권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은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억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참 헌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뒤에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세우신 자연의 법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오늘 본문은 이런 뜻입니다. “너희가 하나님께 헌금을 드릴 때는 이것을 기억하라.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을 자연의 법칙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심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예물입니다. 또한 여기서 거두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축복입니다.
감사의 예물에도 자연의 법칙은 그대로 적용됩니다. 감사를 적게 심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적게 거둡니다. 반대로 예물을 많이 심으면,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거둡니다. 이렇듯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예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축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 나오는 고후8:1∼4 말씀입니다. 먼저 1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마게도냐 교회들은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그리고 베뢰아 교회를 가리킵니다.
2절입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그 곳의 성도들은 많은 박해 속에 극심한 가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풍성한 헌금을 넘치도록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3절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힘에 지나도록 감사를 드렸습니다. 아울러 그들은 자원해서 감사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드리기를 진정으로 기뻐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4절입니다.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그들은 강요에 의해서 감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할 기회를 자기들에게 달라고 간절하게 요청까지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게도냐 교회들은 감사가 바로 은혜의 씨앗이요,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없는 형편에서도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 드리기를 열망했던 것입니다.
잠3:9∼10 말씀입니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감사의 예물로 하나님을 공경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풍성하며 풍요롭게 하실 것입니다.
눅6:38 말씀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하면 하나님은 은혜도, 또한 축복도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우리에게 안겨 주실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하나님께 많은 감사를 드리면, 우리는 더 많은 은혜와 축복을 하나님께로부터 넘치도록 받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지만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감사를 많이 심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거둡시다. 감사를 넘치게 심어서, 하나님의 축복을 넘치게 거둡시다. 그러면 이번에는 많이 심어서, 많이 거둔 실제적 사례들을 성경에서 몇 군데만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대상29:9 말씀입니다. “백성들은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기뻐하였으니 곧 그들이 성심으로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다윗 왕도 심히 기뻐하니라.” 다윗 왕 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하여 많은 예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들은 자원하여 드렸습니다. 누구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성심껏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드리는 일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들을 복 주셔서, 다윗 시대에는 이스라엘 나라가 크게 부강하며 평안했습니다.
대하31:10 말씀입니다. “사독의 족속 대제사장 아사랴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백성이 예물을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 시작함으로부터 우리가 만족하게 먹었으나 남은 것이 많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에게 복을 주셨음이라 그 남은 것이 이렇게 많이 쌓였나이다.”
유다 왕 히스기야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기쁨으로 바쳤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 주셨습니다. 그 결과 그들 모두가 만족하게 먹고도 남은 것이 많이 쌓였습니다. 많이 심어서, 많이 거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왕상17:15∼16 말씀입니다.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사르밧의 과부가 그에게 남은 마지막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으로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공궤했습니다. 말하자면 사르밧의 과부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심은 셈이었습니다. 그러자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그의 집에 있는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했습니다. 병의 기름도 없어지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이 통의 가루도, 또한 병의 기름도 계속해서 채워주셨던 것입니다. 사르밧의 과부도 많이 심어서 많이 거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제는 우리의 믿음이며, 우리의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시다. 많이 심어서 많이 거둡시다. 우리 모두 넘치는 감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와 축복을 넘치게 받기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고후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물론 사랑하지 않아도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주지 않으면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면 주게 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독생자를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즐겨 감사도 드리고, 물질도 드리고, 몸도 드리고, 시간도 드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즐겨 은혜도 주시고, 평강도 주시고, 형통함도 주시고, 복도 주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사랑하십니까? 요3:16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멸망치 않고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진하게 받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요13:1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시간적으로도 끝까지, 질적 양적으로도 최고와 최대의 사랑을 베푸십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특별하게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 즐겨 내는 자입니다. 성경에서 어떤 행동의 결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말씀은 본문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천지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요, 모든 부와 귀가 다 하나님께로 말미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넘치게 받을 수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사랑은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즐겨 드립시다. 그리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넘치도록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즐겨 드리는 것은 어떻게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까? 오늘 본문은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드려야 합니다. 먼저 감사의 예물은 각각 드리는 것입니다. 무슨 모임의 회비처럼, 모두가 똑같은 금액을 정해서 일률적으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베푸신 은혜에 따라서, 개인적으로 힘써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감사의 예물은 미리 그 마음에 정해서 드려야 합니다. 아무런 준비가 없이 와서는, 부리나케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남들이 다 하니까, 그제야 봉투에 약속하는 금액을 적어서 빈 봉투를 하나님께 드리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에게 드리는 감사의 예물은 각자가 그 마음에 미리 준비하며 정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에 정성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울러 그래야 드리는 자의 마음에 진정어린 감사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둘째, 인색함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때는 인색함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인색하게 드리면서, 어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넘치도록 받기를 바라겠습니까? 이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베다니의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 소중한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그가 행한 일은 지금까지도 아름답게 기념됩니다. 반면에 가룟 유다는 그것이 예수님께 드려지는 것에 대하여 인색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릴 때는 인색함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감사의 예물을 많이 심어서, 많은 은혜와 축복을 거두기 바랍니다.
셋째, 억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색함이 마음의 문제라면, 억지로 함은 태도의 문제입니다. 주변에서 보는 눈이 있으니까, 마지못해 드리는 것은 억지로 함입니다. 이만큼 드리면 체면치레는 되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도 역시 억지로 함입니다.
바나바가 자기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그는 즐겨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그들의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그들은 억지로 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마음을 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즐겨 하나님께 드린 바나바를 사랑하시고 그를 귀하게 쓰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억지로 하나님께 드린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벌하셨습니다.
사랑한 성도 여러분! 고후8:12 말씀을 읽어봅니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즐겨 내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드리면, 하나님은 과부가 드린 두 렙돈도 기쁘게 받으십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릴 때, 미리 정성껏 잘 준비해서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드립시다. 인색함으로 드리지 맙시다. 억지로 하지도 맙시다. 즐겨 드립시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넘치게 누리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로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십니다.
고후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은혜를.” “모든 일에.” “모든 것이.” “모든 착한 일을.” “모든”이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항상”이라는 단어도 한 번 사용되었습니다. “항상”은 “모든” 때입니다. 결국 한 절 말씀에 “모든”이라는 단어가 무려 다섯 번이나 사용된 셈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그만큼 넘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능히 자신의 말씀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전능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즐겨 내는 자에게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넘치게 받기를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즐겨 감사의 예물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고전2:5 말씀입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사람의 지혜는 쓰는 만큼, 자기에게 있던 것이 줄어든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즐겨 내는 자는 더 넘칩니다. 하나님이 계속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감사의 예물을 넘치게 드리는 사람은 이 사실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고, 그에게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내리시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8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들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한량없습니다. 그런데도 넉넉한 삶을 살지 못하고, 늘 쪼들리면서 살아오셨습니까? 이유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즐겨 드리지 못했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가 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에게 즐겨 드립시다. 아울러 우리 모두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가 됩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으로 착한 일을 넘치게 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립시다. 그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넘치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잠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넘치게 받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로, 많이 심어야 많이 거둡니다. 많은 감사가 많은 은혜와 축복을 거둡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미리 정성껏 준비해서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드려야 합니다. 또한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맙시다. 기쁘게 드립시다.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로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지 맙시다.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가 되어,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합시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에게 넘칠 것입니다.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지난 일 년 동안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축복을 깊이 생각해봅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감사합시다.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을 감사합시다. 입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을 감사합시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을 감사합시다. 발로 걸을 수 있는 것을 감사합시다. 의자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을 감사합시다.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을 감사합시다. 이렇듯 곰곰이 생각하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며, 하나님께 감사할 일들뿐입니다.
넘치는 감사를 심어,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거둡시다. 하나님께 즐겨 감사의 예물을 드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읍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축복 속에,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
조용기목사 / 고후 9:6~10
<서론>
“심은 대로 거둔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우리 한국에 널리 알려진 속담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입니다.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정신적인 세계도 동일합니다. 사랑으로 심어 놓으면 미움으로 거두지 않습니다. 언제고 그 사랑으로 다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미움을 심어 놓으면 미움으로 심으면 미움으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좋은 씨앗을 심으려고 노력을 많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 등으로 심어 놓으면 언젠가 그것으로 우리 삶에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본론>
1. 친절과 사랑으로 심으면
우리 생활에 우리는 할 수만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친절과 사랑으로 심으려고 노력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조건 없는 친절과 사랑을 베풀어 놓으면 당장은 거두지 않더라도 세월이 지나고 난 다음에는 그 사랑을 내가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에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내가 대접을 해놓으면 대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전혀 대접은 하지 않고 대접 받기만 원하면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5절로 17절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함께 즐거워해주고 함께 울어주고 도움을 베풀어 주면 그것이 반드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 우주의 법칙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에 가면 부메랑이라는 무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나무로써 휘어지게 만드는 것인데 새들이 앉아 있으면 탁 던지면 휙 날라서 새를 때려 놓고 난 다음 그것은 도로 돌아와요. 던지면 도로 돌아온다. 우리 삶에 우리가 남에게 베푸는 것이 부메랑이 되어서 우리에게 꼭 돌아오는 것입니다.
주한 미국 대사를 지낸 제임스 레이니 교수는 미국 에모리대학교의 켄들러 신학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에 건강을 위해서 걸어서 학교에 출근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전거를 타고 출근을 하는데 공원 옆을 지나서 학교를 가는데 공원 벤치에 아침부터 노신사 한 사람이 혼자서 턱 앉아서 맥이 빠졌습니다. 그래서 아, 외로운 노인이구나. 빵도 가져다가 나눠먹고 과자도 나눠먹고 커피도 커피기계에 두잔 뽑아서 한잔씩 나눠 마시고 그래서 한 2년 동안 굉장히 가까운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학교에 출근하려고 그 옆을 지나는데 벤치에 그 노인이 없어요. 그 이튿날도 없어서 물어보니까 세상을 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소문해서 장례식 날에 병원에 찾아가서 걸상에 앉아 있으니까 한 사람이 심각한 얼굴을 가지고 봉투를 하나 들고 왔더랍니다. 그래서 이 봉투가 무슨 봉투입니까? 당신이 학교에 출근했다가 퇴근할 때 벤치에 혼자 앉아있던 노인을 위해서 친구가 되어주고 사랑을 베풀어 주셔서 이분이 죽을 때 유서를 여기에 써서 넣었으니까 뭐가 있는지 모르니까 읽어 보시라고... 그래서 레이니 교수는 장례식장에서 그 유서를 뜯어서 읽다가 자빠질 뻔 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 코카콜라 회장이에요. 은퇴를 하고 별 할 일이 없어서 거기에 와서 앉아 있는 것을 자식에게 버림받고 돈 없어서 거지가 되어 앉아 있는지 알고서 친구가 되어준 것입니다. 똑같은 일을 내가 우리 선교사에게 들었어요. 캘리포니아에서 애플회사 옆 조그마한 공원 벤치에 노인이 햇빛을 받고 앉아 있기에 우리 선교사가 전도해야 되겠다고... 가서 나는 한국 사람이라고 소개를 하고 큰 회사 옆에 있으니 마음에 부럽지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예수 없으면 소용없으니까 실상 이 회사의 사장과 회장은 예수 안 믿으면 가장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잘 달래고 해서 나중에 명함을 주는데 보니까 애플회사 회장이에요. 회장을 두고서 전도를 했는데 그 회장도 세상을 떴어요. 그런데 이 제임스 레이니 교수는 코카콜라 회장인 줄 모르고 친구가 되어 주었는데 그 편지에 뭐라고 했느냐면 “당신은 2년여 동안 내 집 앞을 지나면서 나의 말벗이 되어 준 친구였소. 나의 친구 레이니! 고마웠소. 내가 당신에게” 나 같아도 넘어졌을 것입니다. 얼마 유산을 주었느냐면 25억 달러 유산을 줬어요. 그리고 코카콜라 주식 5%를 보태어 주면서 25억 달러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쓰시고 5%의 주식은 당신이 좋은 사업에 쓰세요. 25억 달러니까 우리 한국 돈으로 한 2조원쯤 되나요? 돈무덤에 파묻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 보십시오. 여러분이 친절을 베푸는 그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은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이니 교수는 이 돈을 학교에 다 고스란히 바쳤습니다. 그 많은 돈을 받은 에모리대학교는 놀라운 성장을 거듭해서 미국 남부의 아주 의뜸가는 종합대학이 되었고 그로 말이암아 레이니 교수는 16년 동안 그 대학에서 총장으로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 팔자 시간 문제야. 내가 이 말을 듣고 난 다음에 나도 여의도공원에 나가서 한번 걸어 다녀볼까? 그런 생각이 납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로 9절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좋은 것만 돌아오고 안 좋은 것은 안 돌아올 것이다. 노웨이. 좋은 것도 돌아오고 나쁜 것도 돌아오는 것입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누가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어머니가 딸내미에게 해주는 것과 같아요. 나는 이것을 보았기 때문에 우리 어머님가 누님이 친정에 왔다가 시집으로 돌아갈 때 그때는 양식이 부족할 때니까 쌀이나 보리를 이런 포대기에 넣어서 주는데 내가 보니까 꼭 어머니가 넣어 흔들어서 눌러서 그러면서 나보고는 아버지에게 말하면 가만 안 둔다. 나중에 아무것도 못 받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절대 말하지 마라. 나 안한다. 말 안할게. 그런데 우리 아버님이 천당 가셨으니까 지금은 말합니다. 내가 그때 어릴 때 야~ 친정에 오면 친정 어머니가 저렇게 해주는구나. 제가 깜짝 놀랜 것은 성경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해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따뜻한 사랑, 자상스런 사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까?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내 아버지 하나님, 이렇게 좋은 하나님인 줄 몰랐습니다.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과 멜기세덱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점이 많습니다.
아브라함은 여러분 갈디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갔는데 얼마나 하나님이 축복을 해주셨는지 한 집에 사병을 3백명이 넘는 사병을 삼시 세 때 밥 먹이고 옷 입히고 거느리고 있었다니 하나님이 보통 축복을 주시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고향도 아닌 객지에 와서 3백명이 넘는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카는 소돔과 고모라 타락한 도성으로 내려가서 살다가 전쟁이 일어나서 그돌라오멜 왕국의 연합군에게 소돔 고모라 성이 무너져서 전부다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브라함이 자기 군대를 동원해서 그돌라오멜 왕과 그 연합군을 공격해서 이겼습니다. 왜 이겼느냐. 빽이 있기 때문에 이긴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안 보이는 빽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북한이 우리 한국에 손을 안 건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인상적인 것은 어느 곳에 가도 교회가 있다. 오른 쪽에 봐도 십자가가 있고 왼쪽에 봐도 십자가 있고 시내 들어가서 봐도 십자가가 있고 동리를 지나가도 십자가 있고 이 세상에 이렇게 십자가 많은 나라는 처음 보았다. 그만큼 우리 한국의 교회가 잘 한다 못 한다 해도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력을 절대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빽이 많은데 잘못 건드렸다가는 큰일 나지요.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이지만 하나님은 폭풍우, 폭우와 같아서 뒷바람이 불어서 성도들과 함께 나가면 안 날라갈 것이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불과 3백 명의 군대밖에 없었지만 그돌라오멜, 발음도 하기 힘들어요. 이름도 참 어려워서... 그돌라오멜, 외국 사람 이름 외우기 참 힘들어요. 나도 이번에 본교회 주임 목사 이름이 알토스인데 다시 외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알토스~ 아~ 알밤이다. 그만 보면 알밤, 알토스.. 그러다가 설교할 때 우리 목사님, 알밤 목사님 그렇게 말이 나와서 놀랬습니다. 부목사는 또한 바가보에요. 바가보가 외워지지 않아요. 그래서 발음을 했는데 이름을 외우기가 참 힘들어요. 그러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예의에 맞는 것입니다. 이분 세상 떳지만 내가 이름 불러줘야되겠어요. 그돌라오멜 왕과 그 군대에게 소돔과 고모라 두 군대가 이기지 못한 것을 318명을 데리고 간 아브라함이 이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쳐 물리치고 조카를 구출해 내고 잡혀가는 포로들을 다 잡아서 돌아오니까 소돔과 고모라 왕이 영접을 하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창 14:18~20)
이 살렘왕 멜기세덱은 태어난 곳도 없고 죽는 날도 없고 어머니 이름도 모르고 아버지도 모르고 좌우간 그 지역에 어떻게 되었든지 하나님이 세운 제사장으로써의 임금이 되어서 있었습니다. 우리 도저히 몰라요. 다른 목사님에게 찾아가 봐도 다른 목사도 몰라요. 성경에 살렘왕은 그 자리에 그냥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름이 살렘은 평강의 왕이고 살렘왕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내세운 제사장이 되었는데 이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와서 전쟁에서 돌아오니까 성찬을 했어요. 포도주와 떡을 주고서 하나님 이름으로 축복을 해주니까 아브라함이 자기가 전쟁에 이겨서 따서 가져온 재물의 십일조를 하나도 남김없이 이 사람에게 다 준 것입니다. 환영하러 나온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는데 히브리서 7장 1절로 3절에 신약성경에 다시 살렘 왕 멜기세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제일 처음에 이 말을 읽고 난 다음에 성경을 적을 때 실수를 하지 않았느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태어난 곳도 없고 그러나 이 신비한 사람이 중동에서 산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세워서 제사장으로 삼았는데 문제는 이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주고 이 사람에게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다 바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해서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 주권 하에 있고 하나님 것 중에 십분의 일은 하나님이 요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이 형의 재산을 사기를 쳐서 자기 것으로 다 만들고 난 다음에 형이 죽이려고 하니까 하란 외할아버지 집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가다가 중도에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하나님이 자기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고 그는 하나님께 서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야훼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창 28:20~22) 하나님과 직접 대화를 하고 싶고 가까워지기를 원하면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는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므로 하나님이 여간 인격적으로 못 나도 사랑해주고 대화를 해주는 것입니다.
말라기 3장 10절에 “만군의 야훼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했는데 십일조만은 시험해 봐라. 내가 거짓말하는지 참 말하는지 알고 싶으면 한번 시험해봐라. 그러면 네가 알 것이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마태복음 6장 20절로 21절에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십일조와 헌금을 저금해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저금한 것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3. 십일조가 가져온 축복
십일조가 가져온 축복은 대단한 것입니다.
저는 예수를 믿고 난 다음 지금까지 십일조를 하나님께 꼭 드렸습니다. 십일조만 드린 것이 아니라 사실 말하면 십의 오조, 십의 십조까지 드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해 주셔서 이 많은 일들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로 9절에 보면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잠언 3장 9절로 10절에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야훼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하나님을 물질로 섬기면 하나님이 물질로 부메랑, 돌아오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돌아올 때는 그냥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담아서 흔들어서 눌러서 넘치게 해서 옛다 가져가라! 그러므로 여러분 마음에 그런 꿈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이 제시한 그릇에 넘치도록 하신다는 것을 보고 그것을 믿고 하나님 내게 복주신다고 말하면 너 본 대로 될지어다.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네 말한 대로 될지어다. 제 말 한귀로 듣고 한 귀로 잊어버리면 안돼요. 꼭 실천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얼마나 한국을 모르는지 내가 가보니까 지구상 그런 나라 처음 봤어요. 다른 나라 차는 있어도 한국의 현대, 기아차 한 대도 없어요. 그 많은 삼성 핸드폰도 가진 사람이 없어요. 그리고 날 보고 묻는 것이 우리나라는 성도들이 개인소득 3천불인데 한국은 얼마쯤 됩니까? 한 천불쯤됩니까? 그래서 제가 그냥 웃고 말았습니다. 왜냐, 3만불이 된다고 하면 말한 사람 미안할까 싶어서... 우리는 그래도 소득이 3천불이다. 그러면서 저에게 그 나라에 그들이 입는 셔츠, 내복 같은 것을 사서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 나에게 주더라구요. 그래서 그것을 고이 포개서 올 때 침대에다가 얹어놓고 소재할 때 내버리지 말고 잘 쓰십시오. 그리고 주고 왔습니다. 내가 어디가든지 그런 셔츠나 옷이나 많이 생길거에요. 돌려줄테니까. 그들이 하나님께 물건을 드렸었으면 그렇게 가난하지 않았을텐데 공산주의 치하에서 하나님을 누가 인정합니까? 그러므로 가난하게 살아요. 여러분, 우리나라가 이처럼 급속도로 발전하고 향상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나라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교회들이 하나님께 십일조와 헌금을 드려서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돌려준 것은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통해서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 주위에 볼 수 있습니다.
참존화장품 대표 김광석 장로님의 간증을 보면 성경 말라기 3장 10절의 말씀을 읽고 십의 이조를 드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사업이 여의치 않던 때여서 쉽지 않은 결단이었지만 믿음으로 십의 이조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그 달의 매출액을 평소보다 8배나 많게 하셨다고 간증을 했었습니다. 일이 안되면 안 될 때 더 많이 십일조를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대의그룹 회장 채의숭 장로님은 첫 월급을 타서 십의 삼조를 내고, 교회 봉사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분인데 세계 36개국에 96개의 교회를 세웠고, ‘사업성공과 축복받는 가정의 비결이 십일조와 감사 헌금에 있다’고 그는 그의 자서전에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외국 사람들만 십일조 내면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보면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가뭄이 심한데 사람들이 많이 굵어 죽는데 한 여인이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사르밧에 사는 이 여인은 남편을 잃고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가뭄으로 먹을 것이 없어서 마지막 한움큼의 밀가루로 떡을 만들어서 아들과 함께 먹고 인생을 끝내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엘리야야!” “예!” “가뭄에 먹을 것이 없고 처참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내가 배는 굶지 않게 만들어 줄테니 사르밧으로 가라. 가면 한 과부를 시켜서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게 하겠다”. 그래서 엘리야가 사르밧에 와서 있으니까 한 과부가 허리가 다 굽어지고 뼈만 남은 여인이 나무를 줍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리 좀 와보라고.. 그 나무를 왜 줍고 있느냐. 가뭄에 다 죽어 이제는 우리는 한움큼 밀가루 밖에 없으니 마지막 밀가루 과자를 만들어서 내 아들과 내가 나눠먹고 죽으려고 합니다. 그래? 뭐 죽고 사는 것이야 네가 알아서 하겠지만 빵을 만들어서 빵의 제일 처음 반쪽은 내게 가지고 오너라. 여러분 참 몰인정한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자기는 그래도 잘 먹어서 퉁퉁한 사람이 뼈만 남은 과부를 보고 떡을 만들어서 반은 내게 가지고 오너라! 그런데 이 과부가 신앙이 있었어요. 엘리야인 것을 알고 난 다음에 그가 떡을 만들어서 반 가지고 왔습니다. 보통 여자 같으면 내가 먹고 죽을 지경인데 왜 당신같이 건장한 사람을 위해서 반을 가져와요? 웃기는 소리하지 말고 가세요. 그렇게 할 것인데 안 그러고 그 반을 쪼개서 엘리야에게 주었습니다. 엘리야가 그 반을 먹고 있는데 그것 쳐다보고 얼마나 침을 삼켰겠습니까? 그리고 다 먹고 난 다음에 말하기를 “이 가뭄이 지날 때까지 떡가루가 넘쳐날 것이고 기름병에 기름이 넘쳐날 것이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라는 말씀대로 그 과부와 아들이 가뭄이 지날 때까지 밀가루 통에 가면 다 먹고 나면 생기고 다 먹고 나면 생기고 기름병에 다 부어 놓으면 그만큼 있고 다 먹으면 그만큼 있어요. 그러니 여러분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고 십일조 생활을 하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요. 구약시대 하나님만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우리에게 더 가까운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과부의 생활만 돌봐주고 우리의 생활은 안 돌봐주냐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꼭 여러분과 같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는 것은 믿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감사로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를 반드시 채워주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장 33절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께 사랑으로 헌신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30배, 60배, 100배로 보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믿음을 꼭 시험해 보십니다. 여러분의 그 믿음에 합격을 하면 반드시 주님께서 응답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믿음의 시험을 당할 때 꼭 합격하도록 하십시오. 어떻게 합격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긍정적인 생각을 하느냐 안 하느냐를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나는 못해. 나는 안돼.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죽었어. 하나님이 버렸어. 그렇게 하면 처음부터 낙제인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나는 하나님이 계시니 끄덕 없다. 예수님이 보혈을 흘려서 나를 사랑해 주시니 끄덕 없다. 성령이 계시니 두려워할 것 없다. 하나님이 계시므로 나는 모든 것에 넉넉히 이길 수 있다. 신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긍정적이고 내일은 오늘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좋아진다. 나는 나빠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계시므로 더 좋아진 생활을 한다. 긍정적인 희망을 가지고 꿈을 가지고 그 다음에 믿음을 튼튼히 가지십시오. 믿음은 바로 실력인 것입니다. 낙심하여 바로 뒤로 가지 않도록 믿음으로 받침대를 딱하고 믿고 그리고 입으로 시인하십시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다. 하나님 빽이 나와 함께 계신다. 입으로 시인하십시오. 그리고 시험에 합격하면 여러분은 반드시 하나님이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낙심을 하면 부끄러운 일이고 하나님도 기뻐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보고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함이라. 우리에게 지금 당장 직면한 것은 선교헌금인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아프리카나 중동이나 남미나 그 먼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외롭게 악전고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도만 하지 말고 선교헌금을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서 바쳐드리면 내가 너희 그릇에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줄테니까 선교헌금을 꼭 드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교헌금은 많고 적고 간에 하나님이 깊이 관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꼭 작정을 해서 드리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축복의 노다지를 찾아라
고후 9:6-9 / 김용국목사
조선시대 말엽에 서구 열강들이 수교를 맺고 조선 땅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많은 탐사가들이 한국에 와서 금, 은, 동, 철광을 탐사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곳에 가든지 금이 나올만한 곳에는 팻말을 세워 놓았습니다. 그 팻말에는 영어로 ‘no touch(노터치)’라고 썼는데 ‘손대지 마세요.’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영어를 잘 몰랐던 조선 사람들이 ‘no touch’라고 팻말을 세워 놓은 곳에서는 금이 나오고 은이 나온다고 해서 ‘노다지’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말이 유행이 되어서 오늘날에도 뭔가 풍성하게 되는 곳을 가리켜서 “노다지” 라고 말을 합니다. 특히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확실한 노다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말씀’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을 성공하게 해주고 축복을 누리게 해주고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통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그런 믿음이 있느냐 하는 것이고 우리가 말씀에 잘 순종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이 넉넉하여져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심고 거두는 자연의 법칙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노다지 중에 하나가 바로 ‘심고 거두는 법칙’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법칙을 잘 이해하면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우리도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자기계발과 성공학의 대가인 지그 지글러가 쓴 「세계의 지혜」라는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는 왕이 지혜로운 신하들을 불러놓고 “세상의 지혜들을 정리해서 가지고 와라.”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신하들이 세상의 지혜들을 다 모아서 12권의 책으로 만들어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자 왕은 “분량이 너무 많으니 좀 더 줄여서 가지고 와라.”라고 했습니다. 신하들이 고심 끝에 12권의 책을 1권으로 줄였습니다. 그러자 왕이 그것도 많다고 해서 줄이고 줄인 것이 한장 분량의 내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왕은 “그것도 많으니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한 문장으로 줄여라.”라고 했습니다. 결국 신하들이 12권 분량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줄이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그 말은 바로 ‘세상에 공짜는 없다.’ 라는 말이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자연의 이치도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 사랑을 심으면 사랑을 거두게 되고, 증오를 심으면 증오를 거두게 됩니다. 칭찬을 심으면 칭찬을 거두게 되고, 불평을 심으면 불평을 거두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의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에서 무엇을 어떻게 심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라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진리 그대로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도 보시면 "사람이 심은 대로 거둔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런 보편적인 진리를 직접 경험을 통해서 깨닫고 그러한 속담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어쨋든 우리는 뭐든지 심어야 됩니다. 그래야 거두게 됩니다. 심지 않고 거두는 법은 절대로 없습니다. 자연은 우리를 결코 속이지 않습니다. 반드시 심어야 나중에 거두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에 농부가 부지런히 씨를 뿌립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인생은 굉장히 공평하고 정의롭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이치이기 때문에 우리가 따로 설명하거나 증명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얻게 되는 모든 것들은 다 우리가 뿌리고 심은 것에 대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8장 22절에 보시면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다윗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겨우 청소년의 나이에 거인 골리앗 장군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심었는가를 한 번 연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참 친구들과 뛰어놀 나이에 다윗은 많은 것들을 경험했습니다.
다윗은 위대한 시인이 되어 시편 150편 중에 절반 이상이 다윗이 쓴 시의 내용들입니다. 다윗은 양을 치면서 즉 자연을 바라보면서 많은 시들을 썼습니다. 당시에 야구경기는 없었지만 다윗의 돌팔매질은 언제나 스트라이크였습니다. 젊었을 때 자신을 잘 계발한 결과로 말미암아 다윗이 골리앗 장군을 때려눕히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를 안겨주었습니다.
우리도 젊었을 때부터 땅을 열심히 파서 더 넓고 깊은 토대를 쌓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더 열심히 씨를 뿌리고 심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슈바이처 박사님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분의 인생의 절반은 훈련을 받는 데에 즉, 뿌리고 심는 데에 힘쓰겠다고 결심하고 젊어서부터 노력을 많이 한 결과 훌륭한 신학자요, 의사요, 철학자요, 작가요,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그 분은 신학박사가 된 후에도 의과대학에 들어가서 의학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 땅으로 가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했습니까? 슈바이쳐 박사님은 "인생의 절반은 심어야 된다. 땅을 파는데 힘써야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은 계속해서 심어야 합니다.
어떤 아버지가 두 아들을 데리고 살았는데 두 아들이 다 공짜만 바라면서 일을 하지 않는 게으름뱅이였습니다. 아버지가 죽으면서 두 아들에게 “황금을 땅 속에 묻어 놓았으니 땅을 파서 캐내거라.”라고 유언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두 아들은 열심히 땅을 팠습니다. 하지만 어디에도 황금은 없었습니다. 두 아들은 열심히 파놓은 땅이 아까워서 거기에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런데 추수할 때가 되자 곡식이 누렇게 익어서 황금물결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두 아들은 열심히 땀을 흘려서 얻은 열매가 바로 황금이다.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서 두 형제가 아주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뭐가 되었든지 심어야 나중에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
이것은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심으면 사랑을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7-8절에도 보시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알프레드 애들러 박사님은 우울증에 시달리는 많은 환자들이 자신에게 찾아와서 고통을 호소할 때에 이런 처방전을 내려주었다고 합니다. “두 주간만 당신이 매일매일 어떻게 하면 남을 기쁘게 해줄 수 있을까를 궁리해보고 그것을 꼭 실천해 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박사님의 명성에 큰 기대를 걸고 찾아왔던 대부분의 환자들이 싱거운 처방에 실망을 하고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애들러 박사님을 믿고 처방해준 대로 실천한 사람들은 당장 효과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들이 가서 두 주간 동안 어떻게 가족과 이웃들에게 선을 베풀어주고 사랑을 나누어줄까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그대로 실천했더니 치료와 행복을 동시에 누리게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심고 거두는 법칙은 영적으로도 똑같습니다. 미움을 심어 놓고 사랑을 거둘 수는 없습니다. 뭐든지 내가 심은 대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적게 심었으면 적게 거두고 많이 심었으면 많이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많이 심었어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절대로 거둘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반드시 함께 해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심어 놓아도 홍수가 한 번 쓸어가 버리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천재지변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편 65편 9절에 보시면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심을 때에 그것을 자라나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믿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씨앗이 자라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까? 고전 3:6에 보시면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노력을 해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을 지키는 사람이 아무리 잘 지켜도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지키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 라고 시편기자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지켜주시는 분이심을 확실하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힘으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을 베풀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또 하나, 심고 거두는 영적인 법칙이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허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비단 농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식 농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우는 일에서부터 사업은 물론이고 생활전반에 걸쳐서 하나님이 도와주실 때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지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노력들이 다 허사로 끝나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 38절에도 보시면 “네가 많은 종자를 들에 뿌릴지라도 메뚜기가 먹으므로 거둘 것이 적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해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주시면 닫을 자가 없고 하나님이 문을 닫으시면 열 자가 없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높여주시는 사람과 그 나라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심고 거두는 법칙이 바로 자연의 법칙인 동시에, 영적인 법칙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 6절에서 9절까지에 보시면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9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심고 거두는 법칙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 바로 물질입니다. 특히 헌금생활은 우리가 하나님께 심는 것입니다. 원래는 다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 가운데 아홉개는 우리에게 주시고 그중에 한개만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색한 마음이나 억지로 하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이 더 많은 것들을... 더 좋은 것들을 거두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 극대화되는 사람이 있고 단점이 극대화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장점이 극대화되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거나 지역사회에 큰 복이 됩니다. 반대로 단점이 극대화되는 사람들은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모릅니다. 상처를 많이 안겨주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랫 동안 심어 온 것입니다. 계속 반복해서 심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아름답고 덕스러운 사람이 될 것인지, 아니면 추하고 불편한 사람이 될 것인지는 지금 바로 결정해야 됩니다.
지금 제대로 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항상 좋은 것들을 많이 심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심을 때에는 심는 자세도 좋아야 합니다. 오늘 7절 말씀을 보십시오.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는 것은 절대로 좋은 자세가 아닙니다. 똑같은 일을 해도 즐거운 마음으로 하면 그것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왜 즐겁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미래를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런 소망도, 계획도, 목적도 없이 심을 때에는 즐거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괴롭거나 귀찮아지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는 아이들이 공부에 대한 목표가 없으면 하기가 싫어서 힘들어하고 귀찮아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인색하게 심으면 조금만 거두게 된다. 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억지로 마지못해서 심으면 재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심을 때에는 항상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까 못 받을까는 드리는 자세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기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라면 항상 바른 자세로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임스 윌비는 미국에서 매우 큰 보험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입니다. 성공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비결은 아주 간단합니다. 수년 전에 나는 사무엘상 2장 30절 말씀인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라는 말씀에 의지해서 하나님과 계약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하나님께서 저를 놀랍게 축복해 주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실업가인 하이드는 십일조가 아니라 10의 9조를 드린 사람으로 아주 유명합니다. 그는 한때 많은 빚을 지고서, 아홉 자녀들의 생계를 걱정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드는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을 철저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남의 빚부터 갚아야 할 것 아니냐?”라고 비난했지만, 그는 “하나님께 진 빚을 먼저 갚아야 합니다.”라고 대답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에는 모든 어려움에서 벗어나 ‘멘소레담’ 회사를 창립하였고 크게 성공하여 세계적인 갑부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자 록펠러 역시도 철저한 십일조 생활로 유명합니다. 생전에 그는 “어린 시절 나의 첫 번째 월급은 1달러 50센트였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했더니 하나님께서 복을 부어 주시는데, 나중에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부어 주셔서 지금은 십일조를 계산하는 직원만 40명을 두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그는 “십일조를 바치는 사람은 가난하게 사는 법이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는가?”라고 강조했습니다.
사람도 약속을 하면 지키려고 애를 쓰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해 놓고 거짓말을 하실 리가 절대로 없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정말로 그러한가? 하나님을 꼭 시험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인 우찌무라 간조는 “십일조야말로 거래적인 면에서도 우리가 더 유리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를 요구하시고 열 개를 주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9절 말씀에도 보시면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칭찬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 될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고넬료가 구제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루는 천사가 찾아와서 ‘고넬로야 네 구제함이 하나님께 기억이 되었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고 이웃을 구제하면 그것은 우리의 재산목록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하늘 나라의 계좌에 반드시 기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의 바탕이 확실해져야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도 보시면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물론 사랑하지 않아도 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주지 않으면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면 주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특별하게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신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런 약속들을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말라기 3장 10절에도 보시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든 재난으로부터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고 언제나 함께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말라기 3장 11절에서도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농사가 헛되게 되지 않도록 모든 자연재해들을 막아주시겠다고 하는 뜻입니다. 우리를 항상 돌보아주시겠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는 탄탄한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말라기 3장 12절에도 보시면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이 다 우리를 보고 저절로 감탄하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심고 거두는 법칙을 스스로의 삶에 적용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백화점의 왕이라 불리우는 존 워너메이커는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고 벽돌 공장에서 직공으로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열심히 출석했습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설교를 마치고 “우리 교회가 낡아서 다시 건축을 해야 하니 모두가 정성껏 헌금을 해달라.”라고 광고를 했습니다. 워너메이커는 ‘나도 교회를 위해서 뭔가를 하고 싶은 데 돈이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돈 대신 벽돌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벽돌공장 주인에게 가서 허락을 받은 후에 수레에 벽돌을 가득 싣고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은 어린 워너메이커의 마음에 감동해서 축복기도를 해주었습니다. 훗날 워너메이커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100만 달러를 들여서 교회를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헌당식에서 “어린 시절 가난할 때 정성껏 하나님께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축복을 베풀어주셨습니다.”라고 간증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심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8절과 9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9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은 함께 나누라고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나누지 않으면 축복의 샘물이 말라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확실한 축복의 노다지를 허락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고 이웃을 구제하는 일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에게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심으면 심은 것보다 더 많이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누가 농사를 지으려고 하겠습니까? 농부들은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열심히 씨를 뿌리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씨를 뿌리면 거기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심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부어주신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요? 8절에 보시면 "...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주셔서 착한 일을 더 많이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시면 목적이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많이 가진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지식이 있어야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몸이 건강한 사람이 몸이 연약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키가 큰 사람이 선반 위에 있는 물건을 쉽게 내려줄 수 있습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평화를 누리는 사람이 평화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언제나 풍성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많이 심어서 많이 거두고, 좋은 것을 심어서 좋은 것을 거두는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런 심고 거두는 원리를 따라 살아갈 때에, 저와 여러분이 더 많은 것을 거두게 됨으로써 우리의 삶에 모자람이 없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나에게 있는 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심어야 합니다. 좋은 것들을 많이 심어야 합니다. 열심히 뿌리고 가꾸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나갈 뿐만 아니라 우리 가정에도 평화가 임하며 우리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흘러가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고받고 심고 거두고
고후09장 6~9절 / 조용기목사
<서론>
오늘 저는 '주고받고 심고 거두고'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지으신 이유는 하나님께 함께 사는 자녀를 많이 갖기를 원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들도 결혼하면 자녀들을 많이 낳아서 가족이 많기를 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역시 만물을 지으셨지만 하나님과 대화하고 함께 우주를 다스리고 함께 살 자녀들을 갖기를 소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충만케 하라고 축복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을 반역한 첫 인류 조상 때문에 하나님은 깊은 고통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인류를 다시 구원하시기 위하여 계획을 세우셔서 그 결과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주신 것은 많은 자녀를 새로 얻기 위한 것입니다. 거듭나게 해서 새로 얻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이 되신 것은 많은 밀알의 열매를 맺기 위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주고받는 것과 심고 거두는 법칙이 시작된 것입니다.
<본론>
1. 주고받고 심고 거두고
첫째로, 주고받고 심고 거두는 것을 우리는 잘 살펴봐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누가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류 가운데 세운 영원한 법칙인 것입니다. 주어야 받지 주지 않고 받는 것은 강도요, 도적이요, 포악한 행동인 것입니다. 주면 자연적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즐겁게 주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후히 되어서 그냥 각박하게 되에 담아서 착 깎아서 주는 것이 아니라 후히 되어서 또 더 들어가라고 누르고 또 더 들어가라고 흔들어서 거기에 또 넘치게 해서 철철 넘치게 해서 가슴에 안겨 준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성경 읽을 때마다 우리 시대에 며느리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사이 며느리는 집에서 큰소리하고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절절 매지만 옛날 며느리는 집에서 고생 많이 했습니다. 고추 당추 맵다 말라 시집살이 더 맵더라고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누이 눈치 아래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모처럼 친정에 한번 다녀오면 눈물이 얼굴을 가립니다. 친정에서 좀 편안히 있다가 돌아갈 때는 어머니가 어찌하든지 친정 식구들에게 잘 보이게 하려고 쌀이나 보리나 밀이나 뭐 이런 곡물들을 그저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가지고서 넘치도록 해서 보따리에 싸서 가슴에 안겨 주면서 "야, 가져가거라! 가져가거라! 가져가서 시어머니, 시아버지 잘 모시고 고생스럽지만 꾹 참으라. 네가 참으면 나중에 좋은날이 온다." 그래서 도로 친정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보내는 그 모습이 분명히 마음속에 영상이 되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주면 반드시 돌려줄 것이요,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 주므로 절대로 섭섭하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8장 22절에 노아의 홍수 이후 노아의 자녀들에게 하나님 말씀하기를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덥고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계속한 것과 똑같이 심음과 거둠은 변함이 없는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뭐 안 심은데 거둘 수 있지 않느냐. 그런 엉터리 같은 소리 하지 마십시오. 밤낮이 있고 춘하추동 사시절이 있는 것이 바로 심음과 거둠이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춘하추동이 사라지고 밤낮이 사라지면 심음과 거둠도 사라질지 모르지만 그것이 있는 이상은 심고 거두는 법칙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옥토에 뿌린 씨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 23절에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좋은 땅에다가 씨를 심으면 30배, 60배, 100배로 거둔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엄청나지 않습니까? 한 알의 밀알을 심었는데 그 밀알이 30배가 되고 60배가 되고 100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축복의 근원은 심는데 있지 심지 않고 축복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톰 버틀러 보던은 「CEO의 책꽂이」라는 책에서 20세기의 몇몇 거부들의 성공 비결을 설명했는데, 이들은 먼저 철저한 십일조와 베푸는 삶을 살았습니다.
록펠러는 십일조를 하는 이유에 대해 "하나님이 내게 돈을 주셨으니 내가 십일조 하지요." 그렇게 간단히 말했습니다. 그런 그가 그렇게 말했는가 하면 폰더는 신명기 8장 18절을 인용했습니다. "네 하나님 야훼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하나님이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으므로 하나님이 주신 재물 중에 10분의 1을 받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고 말한 것입니다.
제임스 윌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성공 비결은 아주 간단합니다. 수년 전에 나는 사무엘상 2장 30절에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라는 말씀에 의지해서 십일조를 드려서 하나님을 존중하기 시작하자 하나님이 축복을 주셨다."고 한 것입니다.
미국의 실업가 하이드는 10의 9조를 드린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한 때 만 달러의 빚을 지고 아홉 자녀의 생계를 걱정해야 했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무엇보다 먼저 철저하게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이후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쏟아 부어 준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주고받고 심고 거두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 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J. C. 페니는 미국의 부호로 이름이 난 후 증권 시장의 파동으로 재산을 잃고 병까지 얻어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병원에서 늘 고통과 불안에 떨고 있던 페니에게 어느 날 병원 예배실로부터 찬송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잠시 후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에게 새로운 인생의 계기가 일어났습니다. 페니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찬송과 성경 말씀과 기도 소리를 들으면서 기적처럼 캄캄한 굴속에 서서히 햇빛이 비치더니 나중에는 온 굴 속이 밝아져 마치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진 것 같은 느낌을 체험했다." 말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새 출발을 결심하면서 그는 "너희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을 그의 사업과 생활의 표어로 정했었습니다. 재기한 후 그는 무엇보다 먼저 많은 헌금을 바쳐 플로리다에 은퇴 목사를 위해 주택 백 동을 건축해 헌납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많은 것을 많은 사람에게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며 감사하는 생활 속에 넘치는 복이 있음을 알았다."고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백화점 왕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먼저 줄 때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우리에게 안겨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고받는 법칙, 심고 거두는 법칙은 해와 달과 별들이 있는 이상 밤과 낮이 있는 이상,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는 이상 변하지 않고 우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법칙과 말씀을 따라서 살아야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새해에 벽두부터 심고 거두고 주고받는 법칙을 우리 생활 속에 꼭 사용하게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신앙생활에도 적용되는 법칙
둘째로, 신앙생활에도 적용되는 법칙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겨자씨 한 알을 심어 큰 나무가 된다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31절로 32절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겨자씨가 얼마나 작은지 여러분 아시지요? 중동에서 겨자씨 하나를 가지고 온 선교사님이 그 겨자씨를 병에 담아서 제게 보냈습니다. 제가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랬 습니다. 겨자씨가 먼지와 같은 것을 보고 놀랬습니다. 서대문에서 아침 새벽기도를 마치고 성도들에게 겨자씨 구경을 시키겠다고 줄을 세워서 겨자씨를 보여 주었는데 전등불 밑에서 잘 안보이니까 가까이 보고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런데 나이 많으신 할머니 한분이 와서 안보이거든. 눈이 어두운데 또 전등불 밑에 겨자씨가 너무 작으니까 "안보여요."하는데 입 바람에 날라 가 버렸습니다. 날라 간 겨자씨를 제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뒤에 줄선 사람이 할머니를 보고 원망을 합니다. 그때 성령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아, 겨자씨가 얼마나 작은 것 알았지? 그러나 네 믿음이 저 겨자씨 한 알만 있어도 이 산들에 명하여 저 바다에 던지라고 해도 된다. 믿음이 크고 적은 것을 탓하지 말라. 믿음을 사용할 줄 알아야 된다.' 이런 교훈을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천국의 법칙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겨자씨만한 것이라도 심어야 돼요. 안 심으면 아무것도 돌려줄 것이 없습니다. 겨자씨라도 심어야 이것이 자라서 하나님 나라 법칙은 큰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씨앗을 심고 크게 거둘 것을 기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농부가 밭에 아무 씨앗도 심지 않고 논뚜렁에 앉아서 밤새도록 철야기도하면서 "곡식을 많이 추수하게 해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심어라! 그러면 심은 것을 복 주어 30배, 60배, 100배로 축복해 주겠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로 8절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실제적으로 씨앗을 심는 것과 함께 우리의 행동도 씨앗인 것입니다. 우리가 부정과 불의와 불결과 나쁜 행실로 심어 놓고 난 다음 입 닦아 버리고 아무도 못 봤으니 내 행동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우리 행동을 씨앗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도 안 보는데 심어 놓아도 그것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안 보는데서 밭을 갈고 씨를 뿌려도 그 씨는 싹이 나고 열매를 맺고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밭에 씨를 심어도 그 씨는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행동에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 자랑을 따라 심어 놓으면 반드시 환난과 고통과 괴로움으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원망할 것이 없습니다. 내가 심어 놓은 것 내가 책임지고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해 주고, 사랑해 주시지만 용서와 사랑과 거두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은 하나님께서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다시 재기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는 것이지만 심은 것은 거둬야 되는 것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의 행동도 우리가 미워하고 분노하고 질투하고 사람을 못살게 굴고 잘못 심어 놓으면 그것이 내게서 떠나가고 난 다음에 내게 안돌아 올 것 같아도 나중에 반드시 돌아옵니다. 큰 나무가 되어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나중에 큰 환난과 고통과 괴로움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행하든지 우리가 하나님을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지 아무도 못 봤으니 뭐 내가 걱정할 것 무엇이냐고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 우습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칙이 우주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심은대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로 심어 놓으면 그것이 30배, 60배, 100배가 되어서 거두게 되고 그것이 내대에 못 거두면 내 자손 대라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믿음의 씨앗을 심고 크게 거둘 것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연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심는 자는 잘 심으면 큰 축복을 받습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로 9절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 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시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귀, 영화, 공명이 있다고 해도 영혼을 잃어버리면 아무런 행복도 기쁨도 없는 것입니다. 또 아무리 영혼이 잘되더라도 사업이 망해서 거지가 되어서 남에게 구걸하고 다니면 축복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어도 돈 100만 불을 가지고도 암이 걸려서 드러누워 죽게 되면 행복도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참 행복과 기쁨은 삼중축복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전인구원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전인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심고 거두는 법칙을 사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는 것입니다. 심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면 하나님이 축복을 허락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우연히 인간의 노력으로 축복을 받는 줄 생각하지만 인간의 노력으로 축복받는 것은 얼마가지 아니하여 바람에 날라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여러분, 의가 영원히 있다. 하나님이 영원히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난한 사람에게 흩어 준 것은 영원히 기억한다. 내가 날 위해서 우리 가족 위해서 먹고 마시고 잘 입고 잘사는 것은 하나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내가 남을 위해서 선을 베풀고 나누어 주면 그 행위는 영원히 기억되어 하나님이 자자손손이 갚아 주시고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게 심고 적게 거두고 많이 심고 많이 거둔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적게 심어 놓고 난 다음 더 많이 거두기를 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적게 심으면 수확도 적고 많이 심으면 많이 수확을 거둘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심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사람들 말하기를 "나는 심을 것이 별로 없습니다. 나는 가난하고 내 자신이 빈손 들었으니 무엇으로 심습니까?" 그럽니다. 심을 마음이 있어 기도하면 심을 씨를 주시고 먹을 양식을 주시고 심게 도와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8절에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심은 자에게 도우시는 하나님이 고린도후서 9장 10절로 11절에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보십시오. 심는 자에게 심을 수 있는 씨를 주시고 따라서 먹을 양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심을 마음이 없어서 그렇지 심을 마음이 있으면 심을 씨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을 동안에 필요한 양식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메이 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을 향해 가던 청교도들은 오랜 항해로 먹을 것이 떨어져 죽어가는 사람이 생기는 어려움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랑하는 자식이 굶어 죽어 가는데도 종자만은 먹이지 않았습니다. 배속에 종자씨앗을 많이 싣고 갔습니다. 많은 사람이 굶어 죽어도 종자씨앗은 손을 대지 않았었습니다. 왜냐하면 종자는 신대륙에 도착해서 뿌려야 하는 씨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만큼은 소중히 지켜야 하는 생명의 종자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다고 종자씨앗까지 먹어 버리면 나중에 진짜로 굶어 죽습니다. 우리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리는 종자씨앗인 것입니다. 내일을 위해서 종자씨앗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 종자씨앗 조차 먹어 버리면서 내일이 암담하고 캄캄한 것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러워도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종자씨앗은 그대로 간수해야 다음 사람들이 종자씨앗을 심어서 먹고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십일조와 헌물을 '떼어먹었다'고 말씀하시 않았습니다. 우리는 십일조 떼어 먹었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도적질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떼어먹는 것과 도적질하는 것은 틀립니다. 떼어 먹는것은 내게 속한 것을 내가 떼어먹지만 도적질한 것은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 도적질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물질을 다 가지고 계시고 더구나 그중에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종자씨앗으로 주신 것인데 하나님의 것을 우리가 도적질하면 저주는 받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떼어 먹는 것 아닙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도둑놈이 하나님 보고 "복을 주시옵소서. 복을 주시옵소서." 그런다고 하나님이 도둑놈 말을 듣고 복을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도둑놈의 기도는 안들어 주실 것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꼭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야 되는 것입니다.
3. 삶의 문제를 당했을 때
셋째로, 태산 같은 삶의 문제를 당했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새해를 살아가면서 개인 문제, 가정문제, 생활문제, 자녀문제, 사업문제 가지가지 문제들이 우리 앞을 막습니다. 이 문제들을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이여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아무리 고함쳐도 하나님이 응답 안 해 주시면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지 않습니까? 태산을 옮기는 방법을 주님께서 말씀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당황하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벙어리 되고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왔는데 제자들이 이 귀신 되고 벙어리 된 아들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와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오니 사람들이 제자들을 몰아세우고 있고 제자들이 당황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장 그 아들을 데려다가 귀신을 쫓아내고 고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왜 우리는 못 쫓아냈습니까?" 주님께서는 "너는 믿음이 적은 연고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었으면 이 산들에 명하여 저 바다에 던지라고 해도 될 것이요 못 할 것이 없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살아있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산은 죽었지 않습니까? 죽은 산은 움직이지 못하고 자라지 못하고 그대로 있는 것이지만 겨자씨는 아무리 작아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적은 겨자씨를 심어 놓으면 줄기가 나고 잎이 나고 큰 나물이 되어서 새들이 와서 둥지를 틀 정도로 큰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겨자씨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께 인생문제를 가지고 고민하지 말고 믿음으로 씨앗을 심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겨자씨는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속으로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네 믿음을 보여 다오. 네 믿음을 보여 다오." 믿음이 겨자씨만큼 적을지라도 보이는 믿음을 하나님은 원하시지 형이상학적으로 안 보이는 마음속에 숨은 믿음은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실 때 항상 저의 믿음을 보시고 축복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2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했는데 한 알의 밀알이라도 심어야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겨자씨 같은 믿음이라도 행동으로 옮겨 심어놓고 기도해야 태산이 옮겨가는 것입니다. 그냥 태산만 보고 "물러가라. 물러가라. 하나님이여 이 태산이 물러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면 안 물러가는 것입니다. 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에 죽은 믿음 가지고 아무리 고함을 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태산이 물러가기 전에 겨자씨만한 믿음을 심어야 되는 것입니다. 심고 난 다음에 믿습니다는 적거나 크거나 진짜 믿음인 것입니다. 심지 않고 말하는 것은 헛된 믿음이요, 탐욕스러운 믿음이요, 거짓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심고 거둔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도 인생을 구원하실 때 그냥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권세로 죄인들을 구원한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으로 보내셔서 한 알의 밀알로 땅에 심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려 죽으셔서 무덤에 들어가 심고 난 다음에 거기에서 도로 부활하셔서 오늘날 세상에 수십억 수백억을 구원하시는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심고 거두는 법칙을 우리가 알고 믿음의 씨앗을 심고 기적을 기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냥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막연하게 하나님이 기적을 주시옵소서 하지 마십시오. 겨자씨만한 것이라도 심고 난 다음에 기적을 달라고 기도해야 살아있는 믿음이 되어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심지 않고 기적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너무나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서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믿었으면 실천해야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믿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죽은 믿음은 아무 역사도 못해요. 태산은 죽은 것이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아요. 겨자씨는 살아있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겨자씨 믿음이란 살아있는 믿음 즉, 심는 믿음 즉, 드리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라기 3장 10절에 "만군의 야훼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나님께서 십일조라는 씨앗을 심어 놓고 시험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고 시험을 해보라. 하나님이 기어코 하늘 문을 여시고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않는가 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내 주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다른 면에는 시험치 말라고 했지만 십일조만은 시험해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황공스러운 말씀인 것입니다. 한번 나를 시험해 보라. 내가 거짓말 하는지 참말 하는지.. 그러므로 우리는 십일조 씨앗을 심으면 산 믿음을 심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꿈과 믿음을 가지고 심어야 되는 것입니다. 심을 때 그냥 억지로 심는 것이 아닙니다. 씨앗을 심을 때 마음에 큰 나무가 될 것을 꿈꾸고 태산이 옮겨갈 것을 마음에 꿈꾸고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꿈과 믿음을 가지고 심으십시오. 인생이란 꿈과 믿음이 있어야 내일이 있는 것입니다. 씨앗을 심을 때 그냥 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씨앗을 심으면 큰 나무가 되고 태산이 옮겨간다는 꿈을 꾸고 믿음을 가지고 즐겁게 심어야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에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마게도니아 교인들이 감옥에 갇힌 바울에게 선교비를 보냈습니다. 바울이 그 선교비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때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조그마한 헌금을 보냈는데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모든 것을 채우시는 은혜를 마게도니아 교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을 겨자씨 믿음으로 찾을 때는 상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가 믿고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겨자씨 씨앗을 심고 난 다음 꿈과 믿음으로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십시오.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기도해야지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도하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7절로 8절에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0)
저는 언젠가 국민일보 겨자씨에서 이런 간증을 본 적이 있습니다. 서울에 한 사업가가 있었는데 사업을 하던 중에 부도가 났습니다. 그때 손에 남은 돈은 5백 만원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돈으로 필리핀의 파나이 섬에 교회를 지어 하나님께 바치기로 작정하고 남은 마지막 돈을 선뜻 내놓았습니다. 마침 교회 지을 돈이 없어서 나무 밑에서 예배를 드리던 필리핀 사람들이 그 돈으로 교회를 건축하여 교회 이름을 '부도난 교회'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왜냐하면 부도난 사람이 돈을 주었다. 왜 그 이름을 붙였느냐 하면 한국의 사업가를 잊지 않고 언제나 기도하기 위해서 교회 이름만 보면 부도난 사업가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부도가 났던 그 사업가의 사업이 다시 일어나 오늘 번창한 기업으로 변화 되었다는 기사를 읽어본 적이 있는 것입니다. 태산 같은 삶의 문제를 당했을 때 믿음의 씨앗을 먼저 심으면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심고 거두는 법칙인 것입니다.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해답도 있는 것입니다. 그 해답은 꿈과 믿음을 가지고 믿음의 씨앗을 심을 때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것입니다. 태산은 겨자씨만한 믿음 앞에서 물러갑니다. 태산이 움직이기 위해서 큰 반석이 때려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겨자씨만한 믿음, 살아있는 믿음을 심고 하나님께 꿈과 믿음을 가지고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도하고 기도하면 역사가 일어나 태산이 옮겨가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막연하게 믿습니다를 외칩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기대보다는 불확실성만 가득합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하면서 마음속에는 "안 믿어요. 안 믿어요."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왜, 행함이 없는 믿음이기 때문에 공을 벽에 던지면 돌아오듯이 헛된 믿습니다 소리는 메아리쳐 돌아오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믿음은 주고받고 심고 거두는 법칙을 적용할 때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심고 난 다음 기도하면 적어도 의지할 때는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내가 심었으니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합니다. 심었으니 이 씨앗이 반드시 자랄 줄 믿습니다. 내가 심은대로 나무가 자라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줄 믿습니다. 심어놔야 의지할 때가 있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질 수 있지 심지 않고 믿습니다는 허공을 치고 메아리치는 것이요, 헛된 공간을 울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새해를 살 때는 주고받고 심고 거두는 법칙을 반드시 적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지 않는데 돌려주지 아니하고 심지 않은데 거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법칙을 새 년 벽두에 알고서 사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독일의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와 기독교의 관계를 연구하여「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썼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가 가는 곳마다 경제가 살아난다." "기독교 국가가 모든 국가 위에 머리가 된다.", "예수를 잘 믿는 가정이 그렇지 않은 가정 위에 머리가 된다." 이러한 이유를 막스 베버는 성경 안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막스 베버는 유명한 경제학자입니다. 그는 하는 말이 기독교가 들어가는 나라마다 경제가 흥하고 기독교를 잘 믿는 가정마다 흥한다. 왜, 심고 거두는 법칙을 사용하고 주고받는 법칙을 기독교에는 사용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세상은 전부 내 중심으로 삽니다. 내게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하고 삽니다. 그러므로 심지 않는 경제를 가지므로 자라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죽어 사는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고 주고받고 심고 거두는 법칙을 사용하기 때문에 나라의 경제도 개인의 경제도 자라고 머리가 되고 꼬리 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않고 남에게 꾸어 줄지라도 꾸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경제학자인 영국의 알프레드 마샬은 인류의 오랜 역사를 통해 생존과 발전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두 요인은 '종교와 경제'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건강하고 사람을 살리는 사역을 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 경제도 건강하게 되어 자연히 국가 경제가 성장하여 그 나라와 민족이 순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 교회는 어떻습니까? 욕심이 너무 앞서서 남을 주지 않고 남을 생각하지 않고 남을 돕지 않습니다. 교회 가면 귀족화 되어서 우리끼리 모여서 예배드리고 우리 끼리 모여서 찬송 드리고 우리 끼리 모여서 부흥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살이는 말할 것 무엇입니까? 자기들끼리 믿고 저들끼리 부흥회하고 저들끼리 야단이다. 저들끼리 잔치하는데 우리와 무슨 상관있느냐. 그래서 세상이 오늘 교회와 성도들을 손가락질 하는 것입니다. 우리끼리 하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하고 함께 은혜를 받고 함께 힘을 모아서 밖으로 나와 병들고 죽어가고 소외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축복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종교학자가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살리는 사역을 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 경제도 건강하게 되어 자연이 국가 경제가 성장하여 그 나라와 민족이 순탄하게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OECD 국가 중 상위에 속하는 미국, 스위스, 덴마크, 스웨덴, 독일 등은 대부분이 기독교 국가임은 이를 잘 증명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높이는 개인과 민족은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심고 거두는 법칙은 자연적인 법칙이요, 영적인 법칙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에서 건짐을 받고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탐욕으로 주시옵소서만 하고 하나님께 드리고 받고 심고 거두는 법칙을 사용 안한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금년 새해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손잡아 건져 주시고 여러분을 오른손으로 높여 주시기 위해서는 주고받는 법칙을 사용하고 심고 거두는 법칙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비로소 여러분의 기도를 통하여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하나님이 축복을 여러분에게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감사의 제목
고후 9:6~15 / 이수영목사
본문 끝 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합니다. 여기서의 바울의 감사는 단지 자기 자신이 받은 은혜에 대한 개인적인 감사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했습니다. 그가 여기서 감사의 제목으로 삼은 그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 즉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고 사람의 말로는 이루 다 형용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바울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온 세상에 전파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복음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복음 안에서 무너지고 사라지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 대단히 상징적인 실례로서 예루살렘교회는 이방인교회에 영적인 도움을 주고 이방인교회는 예루살렘교회에 물질적 도움을 주며 서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역사입니다. 이 모든 놀라운 역사를 목도하고 체험하며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감사를 드리게 된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봅니다. 갈2:8-10에 보면 사도 바울의 이러한 언급이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여기서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의 기둥 같은 지도자들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기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들이란 예루살렘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왜 가난했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하루에 새로 믿게 되는 신도의 수가 수천 명에 이를 만큼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했지만(행2:41, 47, 4:4, 6:7), 다른 한편으로 돌보아야 할 과부들의 수가 사도들이 감당할 수 없도록 급증하는 현상 등으로 재정적인 여건이 악화되었으리라 봅니다. 아마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유대교 권력층의 박해도 예루살렘교회의 경제적 어려움에 한 몫을 했을 것이며, 게다가 유대지방에 들었던 엄청난 흉년으로 인해서 그 형편은 더 악화되었을 것입니다. 행11:27-30은 그 사정을 우리에게 엿보게 합니다: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여기서 우리는 경제적으로 곤궁에 처한 예루살렘교회를 도와달라는 사도들의 호소가 있었고 이에 사도 바울은 흔쾌히 그리고 열심히 응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해 사도 바울이 어떻게 힘을 썼는지를 보여주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기록에서 바울이 자기의 영향력이 미칠 수 있는 각 지방의 교회에 예루살렘교회를 도울 것을 요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고전16:1-2를 보면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여기서 “성도를 위하는 연보”란 다름 아닌 예루살렘의 성도를 위하는 연보를 말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교회에 연보를 하는 방법까지도 구체적으로 일러주고 있음을 우리는 봅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에 앞서서 갈라디아 지방에 있는 교회들에게도 이미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연보를 명령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아데네와 고린도가 있는 그리스 남부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뿐 아니라 빌립보와 데살로니가가 있는 북부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에게도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연보를 권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은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연보의 모금상황에 관해 상당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먼저 고후8:1-5를 봅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마게도냐의 교회들이 어떻게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헌금을 했는지를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으로 풍성하게 연보를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간절히 자원하여 힘닿는 대로 했을 뿐 아니라 그 이상을 했고 그가 기대한 것보다도 많이 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마게도냐 지방 교회들의 사랑과 열심을 소개한 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고후8:7-14를 봅니다: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일에 관하여 나의 뜻을 알리노니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말과 지식으로만 풍성하지 않고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도 풍성한 진실한 믿음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예루살렘교회를 돕는 일을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보다 일 년이나 먼저 시작하고도 오히려 그들보다 성과가 미흡한데 이제는 힘을 내어 그 일을 완성하라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풍족하게 도울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을 돕는 것은 결코 손해 보는 일이 아니고 오히려 그들 자신에게 유익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가 물질적으로 예루살렘교회의 부족함을 채워주면 예루살렘교회는 영적으로 고린도교회의 부족함을 채워줄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로마서에서는 예루살렘교회를 돕는 일이 유익할 뿐 아니라 마땅하다고 사도 바울은 쓰고 있습니다. 롬15:25-27을 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예루살렘교회를 돕는 일에 있어서 고린도교회의 분발을 촉구하는 사도 바울의 말은 9장에서도 계속됩니다. 그 1절부터 봅니다: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성도를 섬기는 일”은 물론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을 경제적으로 돕는 일입니다. 그 일의 필요성에 대하여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바로 앞의 2-5절입니다: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준비하였다는 것을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의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분발하게 하였느니라.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가 말한 것 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가 준비하지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질책과 호소를 겸해서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를 돕는 일을 고린도교회를 위시해서 아가야 지방에서는 일 년 전부터 준비했다고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에게 자랑을 했기에 그들이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분발해서 거액의 헌금을 이미 모았는데 막상 부유한 고린도교회는 헛소문만 낸 꼴이 되어서는 고린도교회뿐 아니라 바울 자신도 신뢰를 잃고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터이니 빨리 약속한 연보를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연보하는 자세를 가르칩니다. 그 요점은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는 것입니다. 연보는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크게 사랑을 베풀기를 원하면 원할수록 하나님께서는 그만큼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는 말로 다 할 수 없이 큰 것인데 그 큰 은혜를 받은 우리 또한 힘껏 큰 감사로 응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7절에서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 자신은 우리에게 그의 아들조차 기꺼이 내놓으셨습니다. 아들을 내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못 주실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롬8:32에서는 또 이렇게 썼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그것이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입니다. 그것이 말할 수 없는 감사의 제목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범사에 감사해야 할 이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고기를 사가지고 집에 돌아가는데 갑자기 개 한 마리가 달려들어 그 고기를 물어 낚아채갔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말하기를 “하나님, 고기는 잃었어도 입맛은 잃지 않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했답니다.
“주는 것은 잃는 것이 아니라 씨를 뿌리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후8:9를 다시 인용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당신의 모든 부요함을 버리시고 스스로 가난해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자기가 가진 부요함으로 남을 또한 부요하게 하는 일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이 예루살렘교회를 돕는 일을 하면서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다”(고후8:5)고 했습니다. 물질적으로든 영적으로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우리 자신을 일차적으로 주님께 드리는 일입니다. 또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행위가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형제와 이웃을 돕는 일을 통해서입니다.
본문 6절에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10절에서는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라” 했습니다. 사랑의 씨앗을 많이 뿌리고 널리 심기를 기뻐하는 이들에게는 원하는 만큼 더 많은 의와 평강과 희락의 열매를 거두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크면 클수록 더 큰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항상 모든 일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기회가 그만큼 더 많다는 것입니다. 특히 남을 도우며 섬길 수 있는 기회를 감사하게 여길 줄 아는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며 그런 마음의 소유자들에게 더욱 더 감사가 넘치는 행복한 삶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가까운 목사님에게서 엊그제 들은 최근에 있었던 실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어느 부부가 나이가 많이 들자 세 아들에게 재산을 분배해주고는 시설 좋은 실버타운에 들어가 살았답니다. 그러다가 아내가 세상을 떠났답니다. 그러자 혼자 남은 남편이 맏아들부부를 불러 앉히고는 혼자서 실버타운에 살기 싫으니 같이 살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런데 그 아들부부가 아무 말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둘째 아들부부를 불러서 같은 제안을 했답니다. 그런데 그 둘째 아들부부도 아무 대답을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으로 셋째 아들부부를 불러 그들의 의향을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그 막내아들부부가 하나 같이 하는 말이 형님들이 계신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저희와 사시겠다는 말씀이시냐 하면서 막내인 자기들에게 아버님 모실 기회를 주시니 너무나 기쁘고 감사하다며 그 아버지를 모셨답니다. 그 아버지께서는 막내아들네와 불과 서너 달 사시고 돌아가셨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에게는 자식들이 몰랐던 어마어마한 재산이 있었고 그 아버지는 그 전부를 막내아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시고 세상을 떠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돕고 섬기며 살기를 기뻐하고, 돕고 섬길 수 있음을 감사할 줄 아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은혜와 복을 더하실 줄로 믿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행복한 삶을 누리는 우리가 됩시다. 우리 모두 행복한 삶 때문에 감사할 뿐 아니라 감사함으로 더 행복한 삶을 누리는 주의 백성 되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라
고후09장 6~15절 / 박기완목사
사도 바울의 서신을 보면 감사로 충만한 것을 보게 됩니다.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성도들에게도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권면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엡5:20)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의 생활을 보면 그의 생활 자체가 감사의 생활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감격이 사무쳐 있었고.. 그래서 그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환경이나 여건을 살펴보면 그렇게 감사할만한 조건들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4∼27절을 보면, 바울의 일생을 기록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습니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습니다.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였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다고 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도 핍박을 받았고, 이방 사람에게도 핍박을 받았습니다. 다메섹에서도, 에베소에서도, 고린도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핍박을 받았습니다.
로마에 가서는 대부분 감옥에 있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의 일생은 거의 핍박과 환난과 곤고의 생활이었는데도.... 그는 그런 가운데서도 감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대체로 감사에는 세 가지의 감사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인색한 감사'입니다. 받은 은혜가 크고 축복은 크게 받았는데 감사는 적은 것을 말합니다. 인색한 감사... 이런 감사는 일차원적인 감사입니다. 초보적인 감사... 어린아이의 감사입니다.
두 번째는 '때문에 하는 감사'입니다. 무엇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감사하고, 받았기 때문에 감사하고, 성공했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구원하심에 감사 드리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감사 드리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될 줄 믿고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바울에게는 치명적인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육신을 괴롭히는 가시를 없애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말씀하셨습니다(고후12:9).
하나님이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심은... 교만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육신의 질병을 그냥 안고 지냈습니다. 건강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바울은 일생 동안을 독신으로 지냈습니다. 종일 일하고도 집으로 들어와 편안히 쉴만한 가정도 없이 평생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가끔... 집을 떠나서 몇일동안 여행을 다녀올 때가 있죠... 맛있는 음식도 사먹고 좋은 호텔에서 잠도 자고... 좋은 것을 많이 구경도 합니다.
그러나 내 집, 내 가정만큼 편안하지는 못합니다.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런 말을 하죠.. "뭐니 뭐니해도 우리 집이 최고지!" 그럽니다.
그런데 바울은 일평생을 결혼도 안하고 가정도 없이 살았으니... 편히 쉴곳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늘 감사와 기쁨으로 살았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감사가 나올 수 있는 겁니까?...
그의 감사는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가 처한 환경이나, 그의 건강이나, 그의 가정이나, 그의 재산이나, 그의 성공에서 왔던 것이 아닙니다. 그의 감사 생활은 그의 심령 깊은 곳에서 우러나왔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사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늘을 두루마리삼고 바다를 먹물삼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없는.... 그런 감사가 있었습니다.
많은 감사의 사실이 있지만.... 그의 감사의 비결을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해 보면,
그 첫째는, 선택해 주신 은혜 때문입니다.
바울은 처음에 예수를 믿는 자들을 잡아 감옥에 가두고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울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바울로 이름을 바꾸고 하나님의 사도로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던 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메섹이라는 곳에 예수 믿는 사람이 많이 모여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대제사장의 체포 영장을 발부받아 체포조를 구성하여 말을 타고 갔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찬란한 빛이 그를 비추며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바울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그가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강한 빛으로 인하여...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자그마치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기도하고 있는데,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주의 제자에게... 주께서 환상 중에 말씀하십니다.
"아나니아야 너는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그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하기를 "주님,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고쳐줘야 합니까?" 하고 말하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행 9:15).
우리 한번 따라해 보겠습니다.
"너는 내가 택한 그릇이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택하여 주신 그릇인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택하여 주셨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일생동안... 감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을 택하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은 오늘 우리도 택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43:1절 말씀에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그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수 많은 사람들 중에 특별히 지명하여 "너는 내것이라!"고 불러 주시고 택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나를 택해 주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바울의 감사는 구원해 주신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6:17∼18절 말씀에 보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이 사울에게 말씀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그랬습니다.
바울의 감사는 바로....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구원해 주시고.... 또한 그로인하여 모든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여 이를 믿는 자마다 구원케 하신다는 사실을... 바울은 가는 곳마다 증거했습니다.
그때에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며 구원을 받았습니다(행13:47).
이러한 일들을 바라볼 때마다.... 바울은 감사가 넘쳤습니다.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10절에 보면 바울은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성도들에게도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빌립보서 3:1절에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그랬습니다.
빌립보서 4:4절에서도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그랬습니다.
감사가 있는 사람은 자연적으로 그의 심령에 기쁨이 넘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권속들도.... 나를 구원해 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바울의 감사는 사도로 불러주신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디모데전서 1:12∼1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은... 내가 주님을 알기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는데... 도리어 긍휼하심을 입었고... 더욱이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훼방하던 자가 어떻게 사도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주의 은혜로 인하여 사도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요, 사도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했습니다(고전15:9).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바울의 마음은 그저 감사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사도의 직분을 주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바울은 심히 감사하였고, 이를 큰 영광으로 알았습니다(롬11:13).
당시에 사도의 권위는 예수님을 대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도의 말씀은 곧 예수님의 말씀이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그 서두에서 반드시.... 자신이 사도인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로마서 1:1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그랬습니다.
고린도전서 1:1절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 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절에서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 이라고 했고,
갈라디아 1:1절에서도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그랬습니다.
에베소서, 골로새서, 디모데전 후서, 디도서... 바울의 서신서에는 한결같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에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전서 1:1절에 보면 베드로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그랬습니다.
베드로후서 1:1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하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을 사도로 부르시고 베드로를 사도로 부르신 것처럼....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직분자로 부르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주신 직분은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사하고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선택해 주셨다는 사실 때문에...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 때문에... 사도로 세워주셨다는 사실 때문에....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어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죄인 중에 괴수요, 핍박자요 훼방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은총을 받은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15:10). 그러므로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받은 이 은혜의 사실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수 많은 사람들 가운데 택하여 주셨고, 구원해 주셨고, 성도로 세워주셨습니다. 각양의 직분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앞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하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구약에서 신약성경까지.... 우리에게 감사할 것을 명령하신 말씀이 수없이 많이 기록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시편 136편을 보면 1∼9절까지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10∼20절까지는 애굽에서 구원해주신 것을 감사하고, 홍해에서 구원하고 광야에서 구원하고, 모든 어려운 일에.... 전쟁이나 환난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21절부터는 이 땅에서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비천한 데서 일으키시고, 너를 도와주시고.... 식물을 주신... 이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감사하라!" 는 명령어로 되어 있습니다.
시편 105편에 보면 그냥 감사하지 말고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동원해서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온 식구가 내게 나아와.... 다 같이 기뻐하고 감사의 사실을 말하며... 내게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개인이나 가정이 복을 받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나라가 복을 받습니다.
학자들이 남미와 북미 지역을 조사해 봤더니.... 남미는 북미보다 훨씬 좋은 자연환경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세계 최강이지만 남미는 여전히 질병과 기아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북미는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개척한 ‘감사의 땅’이지만 남미는 일확천금을 노린 사람들이 개척한 ‘탐욕의 땅’이기 때문이다" 그랬습니다.
1620년 12월26일 영국을 출발한 1백46명의 청교도들이 미국 플리머스 해변에 도착했습니다. 청교도들은 1백80t의 메이플라워호에 몸을 실은 채... 신앙의 자유를 찾아 자그마치 117일 동안 항해해 왔던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었던지 여행 중에 두 사람이 죽었고, 한 명의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청교도들은 이듬해에 자신들을 괴롭힌 인디언들을 초청해서 감사의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바로 첫 번째 추수감사절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민족이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에 방글라데시를 보세요.... 대부분이 모슬렘 교도들이고 그 다음이 힌두교도들인데 이 나라는 감사를 잘 모르는 나라입니다.
그들의 말중에는 아예 감사라는 뜻에 합당한 단어도 없고 누가 무엇을 주고 동정을 해도 "당신이 나를 구제함으로써 당신이 알라 신에게 복을 받게 되니까 오히려 당신은 나에게 고맙다고 해야된다" 그런 사고 방식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의 생각이나 감사의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민족들 보세요. 감사가 넘치는 나라들은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받아서 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감사하는 민족입니다.
모든 절기들이 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감사절입니다.
이스라엘에 초실절이라는 절기가 있는데 곡식을 거두어 첫 단을 묶어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초실절이라고 그럽니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건져 주심을 감사하며 지키는 절기이고, 초막절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애굽에서 지나온 그 모든 은혜를 감사하면서 누룩 없는 떡을 먹고 쓴 나물을 먹으면서 지킵니다.
맥추절, 오순절, 칠칠절에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또 보리를 거둘때에는 맥추절이라고 하면서 감사하고, 유월절 지나서 오십일 째 되는 오순절에도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곡식을 다 거둔 뒤에는 수장절이라고 해서 또 감사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추수감사절입니다.
우리나라도 절기는 있지만 그것을 기념만 하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모든 절기들이 전부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인류 역사에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민족이 복을 받고, 잘 살고, 세계를 지배합니다. 우상에게 감사하는 민족들은 지지리 못살고 병들고.... 어려움과 고통속에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축복은 하나님이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잘 되는 복을 받습니다.
가족도 잘 되고 국가도 잘 되고 그 사회와 가정 위에 하나님이 복을 내려 주십니다.
골로새서 1:3절 말씀에 보면 바울은 기도할 때마다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성도는 기도할 때에도 먼저 감사로 기도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2:7절에서는 감사하되 넘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감사의 조건이 많습니까?.. 모두가 다 감사의 조건이 됩니다.
골로새서 3:15∼17절에서는 찬송도 감사로 찬송하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예수 이름으로 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고독과 파멸은 바로.... 감사를 잃어버린 데서 오는 것입니다.
눈높이를 아래로 두어야 하는데 위만 바라보니까 불평과 불만이 나오는 것입니다.
무(無)에서 출발한다면 모두가 감사합니다. 옷 한 벌, 밥 한끼가 감사합니다.
병원에 가 보면 내가 건강한 것이 기적 같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병의 종류도 많은지.... 수백, 수천가지 질병중에서 몇가지 걸리지도 아니하고.... 이렇게 건강한 것만 해도....놀라운 감사의 조건입니다.
소경에 비하면 눈을 가진 사실이.... 고등고시에 합격한 것보다도 감사할 일입니다. 살아 있는 한 가지만으로도 밤새도록 찬송하고 감사해야 옳습니다.
내가 건강관리를 잘해서가 아닙니다. 무슨 운동을 잘해서도 아니고, 보약을 잘 먹어서도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이 불러가시면 가야돼요.... 하나님이 건강을 주시니까 건강한 겁니다.
사람의 심장을 한번 보세요... 하루에 자그마치 10만3689번을 뛴다고 합니다.
몸속의 혈액은 놀랍게도 하루에 1억6800만 마일을 달립니다. 그리고 하루에 무려 2만 3,040번의 숨을 쉽니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달리기를 잘해서 하루에 1억6800만 마일을 달리겠습니까?... 내가 수고를 안해도.... 심장이 그렇게 잘 뛰어주고.... 가만히 있어도 혈액이 그 먼 거리를 달려갑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에 약간의 차질만 와도 나의 생명에는 금방 이상이 오는 것인데..... 그것이 돌아가도록 생명을 주시고 지탱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솔맨이라고 하는 화가가 있었습니다. 결혼하고 얼마 안된 젊은 나이에 그만 중병에 걸렸습니다. 의사가 말해줍니다. "당신의 병은 임파선 결핵입니다. 앞으로 3개월밖에 살지 못할 것입니다!"
아내는 지금 임신중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니 아내에게도 미안하거니와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생각할 때에도 죄스럽습니다. 몹시 괴로워하고 있을 때...., 사랑하는 아내가 그를 위로합니다.
"여보! 3개월밖에 못산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3개월을 허락해주셨다고 생각하고 감사하십시다. 아무도 원망하지 맙시다. 3개월이 어딥니까? 천금같은 그 기간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 갑시다!"
그러면서 3개월이나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두 사람은 기뻐하고 감사하며 열심히 일합니다. 솔맨은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기쁨과 감사로 살다보니까, 그의 병은 씻은 듯이 다 나았습니다. 그가 그린 그림이 바로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세계적인 유명한 그림이 되어서.... 아마 여러분의 가정에도 이 분이 그린 그림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감사했더니.... 언제 나은지도 모르게 병이 다 나은 것입니다. 감사의 위대한 힘입니다.
다음 주일은 모든 교회가 추수감사주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은 "농사를 지은 것이 없는데 무슨 추수 감사절이냐?"고 그러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농사를 짓는 사람이든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든... 인간의 삶은 심고 거두는 농사의 원리를 따라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직장이나 사업 터에서 일년 동안 열심히 농사를 지었습니다. 부지런히 아침부터 저녁까지.... 씨를 뿌리고 가꾼 결과 추수의 때를 맞이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추수는....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의 모든 삶에 함께 하셨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에 감사하게 되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정말로 많은 추수를 하였는가 하면, 어떤 분은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총 안에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차원 높은 감사는 '무엇 때문에' 드리는 감사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리는 감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그저 단순하게 "고맙습니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감사는 사의를 표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감사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제물을 가지고 와서 예배하는 행위, 그분을 높이고 찬양을 드리는 것이 감사입니다.
감사의 절기를 맞아..... 더욱 넘치는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복된 권속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씨와 열매를 더하심에 감사
고후09장 10~11절 / 강성찬목사(전주동부교회)
바울이 성도를 농사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농사꾼인 성도에게 심을 종자와 먹는 양식을 구분해서 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자라도록 역사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고전 3:6-7)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또한 풍성하게 열매 맺게 하십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막4:28)고 합니다.
(마 13: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제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드릴 것과 자신의 것을 구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리시듯 사람의 필요에 따라 은혜를 주십니다. 특별히 성도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영생을 허락하셨고, 그 소용에 따라 물질도 허락하셨습니다. 성도는 그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감사할 줄 아는 자만이 자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족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심는 자는 열매를 기대하고 심습니다.
(약 5: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심기운 것이 땅에 떨어져 이제는 이삭 곧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의의 열매를 풍성하게 하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10절).
모라비안 선교사 조지 스미스의 생애는 우리에게 중대한 교훈을 남겨줍니다. 그의 전 생애는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고자 하는 목표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삶의 중심에는 언제나 아프리카 대륙에서 존귀하게 되는 그리스도의 환상이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스미스는 준비의 세월을 지내고 아프리카 행 선박에 올랐습니다. 그의 꿈과 소명과 비전이 실현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프리카에 상륙하여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추방될 때까지 늙은 여인 한 사람을 회개시킨 것이 그의 아프리카 선교의 열매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조지 스미스 선교사는 죽을 때까지 아프리카를 향하여 무릎을 끓고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수십 년의 선교준비와 몇 달 동안의 선교, 그리고 늙은 여인 한 사람의 열매, 그리고 젊어서 죽어간 스미스 선교사. 허무한 인생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년 후에 스미스 선교사가 심어놓은 씨앗이 싹이 나고 자라서 13,000명의 그리스도인들을 그곳에 열매를 맺게 했습니다.
사실 심는 자는 '나'이기 전에 주님이십니다. 그분께서 '나'속에 사랑을 심으시고, 용서의 새사람을 심으시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시며,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광야의 식탁2, 오성춘)
농사꾼은 소출 가운데 제일 좋은 것으로 종자로 따로 갈무리하고 또한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게 하신 이에게 감사의 제물로 드립니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 농사꾼인 성도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좋은 씨앗이 되고 감사의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또 아침마다 그것과 함께 드릴 소제를 갖추되 곧 밀가루 육분의 일 에바와 기름 삼분의 일 힌을 섞을 것이니 이는 영원한 규례로 삼아 항상 나 여호와께 드릴 소제라(겔 46:14)고 합니다.
우리도 산 제물로 드려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고 합니다.
곡물은 거제로 요제로 소제로 상번제로 드렸습니다.
거제는 제물(예물)을 높이 들어 드리는 제사입니다.
(민 15:21) 너희의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떡을 대대에 여호와께 거제로 드릴지니라
요제는 흔들어 드리는 제사입니다.
(레 23:10-11)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출 29:23-24) 또 여호와 앞에 있는 무교병 광주리에서 떡 한 개와 기름 바른 과자 한 개와 전병 한 개를 가져다가 그 전부를 아론의 손과 그의 아들들의 손에 주고 그것을 흔들어 여호와 앞에 요제를 삼을지며
소제는 알곡이나 고운 가루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알곡은 절구에 넣어져 찧어 지든지 멧돌에 넣어져 갈리든지 제분기에 들어가 갈아져야 합니다. 고운 가루가 되기 위해서는 껍데기가 벗어져야 하고 부서지고 깨어져야 합니다. 고운 가루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깨어져야 합니다. 열매가 부서지고 가루가 되는 것은 생명을 바치기까지 영육간에 당하는 그리스도의 고통을 묘사합니다. 고운 가루가 되기 위하여는 깨어지는 아픔과 변화를 겪어야 합니다. 자존심, 혈기, 교만의 덩어리가 깨어져야 합니다. 깨어짐의 과정을 우리는 연단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심령은 부드러운 가루처럼 곱게 깨어진 심령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인격을 고운 가루에 비유할 수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신자 모두는 구약과 신약의 말씀 맷돌에 깨어지고 부스러져 곱게 갈아져야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맷돌을 가지고 가루를 갈고(사 47:2)라고 합니다.
고운 가루는 정교한 채를 통과하여야 합니다. 정미로운 순종의 노력의 상징입니다. 고운 가루는 채로 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노력을 하나님께 바친데 대한 예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노력을 하나님께 바칠 때 그것이 고운 가루가 됩니다. 하나님의 체를 통과해야 합니다. 100%의 순종의 노력을 요구합니다. 아브라함의 순종, 욥의 고난, 야곱의 얍복 나루가 이를 에표한다 할 것입니다.
소제는 이삭을 볶아드리기도 합니다. 너는 첫 이삭의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거든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네 소제를 삼되(레 2:14)라고 합니다.
소제는 함께 드립니다. 곧 연합이 되어야 합니다. 기름과 유향과 함께 하여야 합니다.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그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 2:1-2)고 합니다.
기름을 부음은 헌신의 증표로 우리에게 성령의 기름 부음을 예표합니다. 제 아무리 고운 가루라 할지라도 기름이 들어가지 아니하면 제물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봉사하고 헌신하고 천국가고 싶어도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벧전 4:11)고 합니다.
기름을 섞는 것은 또한 타지 않고 잘 익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한 신앙의 면들을 성령으로 잘 익혀야 함의 예표라 하겠습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함을 예표합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고 합니다.
사역을 위해 임재하시는 성령에 대한 예언입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사 61:1)라고 합니다.
소제물위에 기름을 붓는 의미는 성령의 임재 혹은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고 합니다.
어떠한 곳에 성령이 내주하시며 역사하는가요? 애통하며 회개하며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 맡기는 심령 안에서 입니다. 성령께서 운행하시기에 방해됨이 없는 상태는 자신이 온전하게 고운 가루처럼 부서져서 온유한 상태가 될 때입니다. 바른 예배는 성령 안에서 진리로 드리는 예배임을 말씀하십니다.
유향을 놓았습니다. 성막에서 쓰여지는 유향은 여러 가지입니다. 재료와 제조방법도 다양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해석할 때 대체로 향을 기도로 해석합니다.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8)고 합니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계 8:3)고 합니다.
성막에는 향단이 지성소 바로 앞에 놓여 있습니다. 지성소란 하나님께서 죄의 용서를 선포하시는 곳, 은혜를 베푸시며 그의 자녀들을 만나 주시는 장소입니다. 성막 안에 놓여있는 향단에서 드려지는 향은 곧바로 지성소로 들어가게 됩니다. 번제 단에서 드려지는 향이나 향단에서 드려지든 향은 모두 성도의 기도를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확대하여 말한다면 성도의 기도가 하나님께 곧바로 상달하는 특권이 있다는 의미라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가장 가깝게 교제하는 방편이 기도입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 4:7)고 합니다.
예배자 자신이 기도의 제물이 되어져서 하나님께 드려질 때 기뻐 받으시며 상달되는 예배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이 담긴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1540년 루터의 친한 벗인 프래데릭 미코니우스가 중병에 빠졌습니다. 어느 날 저녁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극진히 사랑하는 루터에게 작별의 편지를 썼습니다. 루터는 그 편지를 받고 즉시 "나는 교회를 개혁하는 일에 있어서 아직도 자네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네가 살 것을 명령한다. 주님은 내가 사는 동안 자네의 죽음을 듣게 하지 않으시고 자네를 나보다 더 오래 살게 하실 것이다. 나는 이것을 위해 기도한다. 이것은 나의 뜻이다. 이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빈다. 왜냐하면 나는 다만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만을 구하기 때문이다." 라는 같은 회답을 써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미 말할 기능도 없던 그가 편지를 받고 회복을 했으며 실제로 루터보다 두 달을 더 살았다 합니다. 응답은 하나님께서 들으셨기 때문에 오는 결과입니다.
소제에 향을 넣는 한 의미인 기도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심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온전하게 자신을 드려 향기로운 소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도를 즐거이 들어주시며 응답하여 주십니다. 거듭난 인생이 성령 안에서 기도의 내용이 한 덩어리 되어야 함에 대한 교훈이 기도 합니다.
그런데 누룩이나 꿀을 넣어서는 안 됩니다.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레 2:11)고 합니다. 부패한 것이 함게 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소금을 쳐야합니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레 2:13)고 합니다. 소금이 가진 특성은 불변성 방부성 풍미성이 있습니다.
철판에 부쳐야 합니다. 철판에 부친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지 말고 기름을 섞어 조각으로 나누고 그 위에 기름을 부을지니 이는 소제니라(레 2:5-6)합니다. 고난을 이겨 내야 함을 위미합니다.
냄비에 삶아야 합니다. 네가 냄비의 것으로 소제를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와 기름을 섞어 만들지니라(레 2:7)고 합니다. 냄비의 것을 개역 성경은 솥에 삶은 것이라 합니다.
고루 익혀야 합니다. 에브라임이 여러 민족 가운데에 혼합되니 그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호 7:8)합니다.
불살라야 합니다.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그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레 2:2) 그 소제물 중에서 기념할 것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레 2:9) 제사장은 찧은 곡식과 기름을 모든 유향과 함께 기념물로 불사를지니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레 2:16)고 합니다.
소제는 무교병이나 무교전병으로 드립니다. 네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을 드릴 것이요(레 2:4)라고 합니다.
상번제는 항상 드리는 제사입니다.
또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에 빻아 낸 기름 사분의 일 힌을 섞어서 소제로 드릴 것이니 이는 시내 산에서 정한 상번제로서 여호와께 드리는 향기로운 화제(민 28:5-6)라 합니다.
진설병 열둘을 구워 두 줄로 안식일 마다 진설해야 합니다. 너는 고운 가루를 가져다가 떡 열두 개를 굽되 각 덩이를 십 분의 이 에바로 하여 여호와 앞 순결한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진설하고 너는 또 정결한 유향을 그 각 줄 위에 두어 기념물로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 것이며 안식일마다 이 떡을 여호와 앞에 항상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레 24:5-8)고 합니다.
진설병과 항상 드리는 소제와 항상 드리는 번제와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에 쓸 것과 성물과 이스라엘을 위하는 속죄제와 우리 하나님의 전의 모든 일을 위하여 쓰게 하였(느10:33)습니다.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히 9:1-2)라고 합니다.
진설병은 레헴 파님으로 임재의 빵 얼굴 앞의 떡(김희보) 얼굴의 떡 차려놓은 떡(현대인을 위한 성경) 제사떡 (공동번역)으로 여호와 앞에 드려 졌다는 면에서 헌신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봅니다.
진설병은 대속을 위한 주님의 헌신(고전 11:23-24) 그리스도의 구속에 기초한 성도의 헌신과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된다는 것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고 합니다.
여기서 진설병을 생명의 양식의 예표로 이해하게 됩니다.
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출 25:30)고 합니다. 진설병을 화려한 상위에 차려놓은 것이나 여호와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데 필요한 도구들에 대한 설명 가운데서 상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떡 상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임재 하는 것의 상징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진설병은 주가 공급해 주시고 또 축복해 주신 음식을 그가 사용하실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임재 해 계신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떡은 주가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가운데 항상 진열해 두어야만 했습니다. 진설병을 올려놓는 상은 여호와께서 가까이에 계신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또 하나의 상징입니다. 화려한 용기들을 상위에 차려놓고, 정기적으로 그 위에 놓는 음식을 새롭게 갈아 놓은 사실 때문에 상은 여호와께서 여기에 계신다.
그리고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서 여기에 계신다는 사실을 증거 합니다. 이는 음식의 공급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음식의 상징입니다. 식탁은 또한 교제의 장소입니다. 식탁을 중심으로 온 가족이 모여 음식을 나누면서 교제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모든 백성들의 삶을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을 상징한 듯합니다. 열두 개의 구운 떡을 진설 해 놓은 데서 그 사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씨앗은 심기어져 썩어져야 더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이는 자기희생, 자기 부인을 교훈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자기희생, 자기 죽음을 통해서만 주님의 진리와 사랑을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습니다. 눈물 없이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없는 것처럼, 자기희생 없이는 복음이 전파되지 못합니다.
중앙아프리카에서 선교하던 죠지 아틀레이 라고 하는 젊은 선교사는 원주민의 창과 몽둥이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영국제 윈체스터 연발총의 방아쇠를 끝까지 당기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가 총을 쏘았다면 자신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젊은 선교사는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사람을 향해 총을 쏘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합니다. 만일 그가 그들을 죽인다면 그 마을에서는 영원히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을 죽이는 자가 전하는 예수를 누가 믿겠다고 하겠습니까? 그로 인해 그는 끝까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고. 총을 든 채로 개처럼 끌려 다니며 사지가 찢기며 비참하게 죽어갔던 것입니다. 그가 죽은 후 총알이 열 발이나 들어 있는 총이 발견되었고, 이 사실을 안 원주민들은 늦게나마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땅에 떨어져 심기어진 씨의 교훈은 겸손의 깊은 진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씨앗과 풍성한 열매의 교훈의 진수는 씨앗이 땅에 떨어져 심기어져 죽어 더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듯이 자신의 희생의 죽음을 통해서만이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사명을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처럼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도리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 2:9),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합니다.
우리를 씨앗으로 열매로 감사의 제물로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영광 돌리며 사명 감당하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감사는 무한한 재생 가능 자원입니다
고후 9:15 / 김영헌목사
지난 한 해 동안도 우리에게 한량없는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이해서 감사제를 드리는 교우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교회 절기 가운데 가장 큰 절기가 부활절, 성탄절, 그리고 추수감사절, 맥추감사절입니다. 그중에서도 추수감사절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큽니다. 유대교에도 3대절기가 유월절, 초막절, 오순절인데 그중에서 초막절(추수감사절)과 오순절(맥추감사절)이 모두 감사제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교회에서 지키는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신대륙으로 이주했던 청교도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기독교의 뿌리인 유대교에도 추수감사절은 초막절, 또는 장막절이라 해서 가장 성대하게 지켜지는 절기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구상에 있는 모든 나라나 족속들이 그들의 문화권에서 추수감사절과 비슷한 감사제 전통을 갖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추석, 한가위가 바로 우리 문화권에서 생성된 추수감사절과 같은 명절입니다. 축제의 방식은 서로 달라도 감사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제사성격은 엇비슷합니다. 인생의 맛과 멋이 감사하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기에 모든 민족이 감사제 성격의 명절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은 건망증이라는 것을 갖고 있습니다. 기억했다가 쉽게 잊어버리는 증상입니다. 나이가 먹을수록 건망증이 심해집니다. 지난주에는 연수서지방 부흥성회를 인도했습니다. 26개 교회가 모여 연합성회를 가졌습니다. 교역자들의 협조가 잘 되어서 집회 참여율이 높았습니다. 강단 위까지 쪼그리고 앉아 말씀을 듣는 은혜가 풍성한 성회였습니다. 마지막 날 밤 예배시간을 맞춰 호텔방에서 나와 차를 타고 가는데 안경을 방에 놓고 오는 것 같았습니다.
다시 호텔로 가자고 요청했습니다. 차를 돌리던 목사님이 “지금 쓰고 계신 안경은 잘 안 맞습니까?”라고 묻지 않겠습니까? 만져보니 안경을 쓰고도 건망증이 생겨 안 쓴 줄 안 것입니다. 열쇠를 들고도 열쇠 어디 있느냐고 찾는 것은 건망증이지만, 열쇠를 들고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모르는 것은 ‘치매증상’이랍니다. 건망증이 어떤 면에서는 매우 유익한 증상이지만 한 가지는 건망증에 올려놓아서는 안되겠습니다. 감사하는 생활입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길에서 감사는 언제나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무한한 재생산 자원(indescribable-renewable resource)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ABC 방송의 유명한 앵커로서 “나이트라인”(Nightline)을 진행하는 테드 카펠(Ted Coppel)은 10대 때 영국으로부터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입니다. 본래 Coppels 가문은 독일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세계 2차 대전이 시작될 때 영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들은 독일에서 식량배급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기근과 절망이 독일로 하여금 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게 하였었습니다.
테드가 영국으로 이주한 후 몇 년이 지났을 때입니다. 어린 테드 카펠은 라디오에서 광고 노래를 들었습니다. 과식으로 인한 통증을 치료할 수 있는 제산제(Antacid) 광고 노래였습니다. 그는 먹질 못해서 고생하는데 어떤 부류들은 너무 많이 먹어서 병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테드는 울부짖었답니다. 가난의 서러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그는 지금 부요한 미국에서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은 상상도 못했답니다.
미국 사람들은 너무 많이 먹고, 너무 많이 마셔서 문제입니다. 테드는 풍성한 미국 안에 살면서도 늘 고향사람들이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음식을 얻기 위해 매일같이 다투며 산다는 사실을 잊어본 적이 없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이 가져서 문제가 생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지구상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안에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습니까?
때때로 우리는 너무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감사하지 못한 채 불평, 불만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예전에 고생할 때, 없어서 굶주릴 때, 가진 것이 없어서 용기를 잃고 절망하고 있었을 때를 너무 쉽게 잊어버리므로 감사를 못합니다. 감사가 없으니 늘 불만이 쌓입니다. 불만이 쌓이니 내게 있는 것을 나눌 줄도 모릅니다. 늘 인색함으로 메마른 삶을 사는 불행한 인생들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감사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 인정이 넘치며, 사는 맛을 내게 합니다. 그래서 감사를 재생이 가능한 자원(renewable resource)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9:6이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점은 이러합니다. 적게 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 다.”(표준새번역)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씨를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둔다는 말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무엇 때문에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어떤 씨를 심기에 이 비유를 말하고 있습니까?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앞 뒤 문장을 연결해 보면 고린도교회에 부탁하는 특별헌금을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또 ‘헌금행위’만을 지칭하기 보다는 착한 행실, 선한 일들을 포괄적으로 의미할 것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돕는다든지, 삶의 환경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손길 등이 포함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들을 깊이 들여다보면 두 가지 신앙적 가르침이 있습니다.
첫째는 감사가 모든 축복의 근원이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바울이 고후9장에서 고린도교인들에게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특별연보를 부탁하면서 받은 축복을 감사하며 이웃과 나눔은 하나님의 또 다른 큰 축복을 받는다는 소중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감사(thanksgiving)와 풍성함(generosity)은 서로에게 양식을 공급하는 상호 공생 관계를 갖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gratitude and generosity feed on each other). 감사를 많이 하면 할수록 그의 삶이 더욱 풍성해 진다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 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고후 9:10)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고후 9:11)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특별헌금을 고린도 교회에 요청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행위이기 때문에 억지로 하거나 인색함으로 할 것이 아니라 넉넉하게, 정성스럽게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색한 헌금, 억지로 하는 헌금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넉넉하게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헌금을 해서 가난한 성도들을 도우면 그들도 또한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성도들로 성숙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섬기는 행위들이 감사의 행위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행위입니다.
감사는 생각 속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말로 표현되어져야 하고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생각과 말과 행위의 삼위일체로 감사는 완성을 이룹니다. 감사는 말로 표현해야 상대방이 느낄 수 있습니다. 행위로 나타나야 감사의 진실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다른 사람들과 축복을 나눌 때 완성되어진다.”(Thanksgiving reaches completion when we share our blessings with others)는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말과 행동으로 감사가 넘치는 사람은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무엇을 풍성하게 하십니까? 두 가지를 포함합니다. 넉넉하고 후한 인격과 물질적 축복을 포함합니다.
참으로 신비한 일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매우 긍정적이고 여유가 있습니다. 매사에 너그럽고 후합니다. 결코 인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매사에 인색합니다. 부정적입니다. 따지기를 좋아합니다. 인간관계가 메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남을 이해합니다. 부부지간에도 서로 작은 일에 큰 감사를 하는 부부가 행복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감사가 넘칠 때 행복합니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아주 작은 친절에도 “Thank you!”라는 말을 반드시 하도록 어렸을 때부터 교육합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감사합니다”를 연습하게 합니다. 습관화하기 위해서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인격적 예우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절기는 우리의 풍성한 축복을 기쁨으로 축하하는 기회요, 추수감사의 정신은 우리 안에 긍정적이고 풍성한 마음을 창조하는 시기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긍정적 생각과 말에 초점을 맞출 때 우리 안에 감사한 생각이 넘치게 마련입니다. 감사의 생각이 넘치면 말과 행동이 긍정적이고 감사함이 넘칩니다.
둘째는 감사(gratitude)는 반드시 표현되어지고 행위로 나타낼 때 열매를 맺는다는 가르침입니다. 바울은 헌금도 하나의 감사행위라고 규정합니다. 감사는 억지로 하거나 인색함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쁜 마음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린다 무어(Linda Moore)라는 사람의 간증입니다. 린다의 부엌 냉장고 문에는 소(Cow)의 그림과 두 마리의 염소그림이 붙어 있습니다. 조금은 생소한 장면입니다. 흔히 냉장고에는 잡동사니들이 붙어있습니다. 광고물들이나 아이들의 사진들이 붙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린다네 냉장고문에는 소와 염소들의 그림이 붙어 있는데 이름이 ‘카메라 폰’과 ‘세가 제너시르Ⅰ’(Sega Genesis Ⅰ)과 ‘세가 제네시스Ⅱ’(Sega GenesisⅡ)라고 붙여져 있습니다. 여기 ‘세가 제네시스’는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컴퓨터 비디오 게임기랍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여진 소와 염소들의 그림이 붙어 있을까요?
어느 날 린다 무어가 TV를 보고 있는데 저개발국가의 어린이들을 돕자는 광고가 방영되었습니다. 20달러만 있으면 한 아이의 한 달 양식이 되니 그 아이들을 돕자는 광고였습니다. 어머니 린다는 그녀의 두 아들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보다 업그레이드되어 속도가 빠른 컴퓨터 인터넷 서비스를 받기 위해 20불을 사용할 예정이었습니다. 두 아들과 함께 의견을 나눈 후 비밀투표를 했습니다. 만장일치로 그 20불을 빈민국 어린아이의 한 달 양식비로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그 이후 린다는 아이들에게 남을 돕는 정신을 가르치는 방법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무엇을 구매하려고 할 때마다 그것을 아껴서 빈민국 아이들에게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그녀는 빈민국 아이들을 항구적으로 도울 수 있는 길을 알아보았습니다. 빈민국 농촌 아이들에게 소와 염소 등 가축을 사주면 우유, 계란, 고기 등을 얻을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아이들과 의논해서 카메라 폰을 사는 것 대신에 돈을 보내어 소를 사게 했고 세가 제너시스 비디오 게임기를 사는 것 대신에 두 마리의 염소를 사서 키울 수 있도록 돈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아이들은 그 돈을 벌기 위해 광고물들을 돌린다든지, 청소를 한다든지, 웨이터를 한다든지 온간 허드렛일을 아르바이트로 하면서 삶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감사는 다른 사람들과 축복을 나눌 때 완성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쁨은 전염성이 강해서 다른 사람들도 기뻐할 수 있게 해줍니다.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서 우리의 축복을 다른 사람과 나누게 될 때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감사와 기쁨을 창조해 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가르치는 내용이요, 우리에게도 가르침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넘치게 감사하는 사람은 성령께서 우리가 더 풍성한 축복을 받도록 빌며 기도해 주신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해서 우리의 삶을 넉넉하고 풍성한 삶으로 축복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간증이 있습니다.
아만다(Amanda)라는 소녀는 보랏빛 새 자전거를 사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방학 때도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저축 했습니다. 매일 밤 아만다는 하나님께 “보라빛 새 자전거를 사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아만다는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부터 칠레에서 사역하는 선교사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아들이 오지에서 간염(hepatitis)에 걸려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학교 선생님은 그 아이를 격려하고 용기를 갖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편지와 선물을 보내자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투표를 해서 그 아이에게 예쁜 자전거를 사서 보내자고 합의를 했습니다. 아만다는 보랏빛 새 자전거를 사야겠다는 꿈이 깨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보다 선교사의 아들이 더 자전거를 필요로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모은 돈을 선생님에게 드렸습니다. 칠레 선교사의 아들이 병을 이기고 낫게 해 달라는 기도도 함께 전했습니다.
얼마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만다는 한 학급에서 공부하는 필립(phillip)이라는 청년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만다의 부모와 필립의 부모는 고급식당에서 약혼식을 갖기 위해 모였습니다. 저녁을 먹으면서 필립의 부모는 칠레에서 선교사 사역을 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선교사로 있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때는 그들 가족이 모두 병에 걸려 있었을 때라고 회상했습니다.
칠레에 있는 동안 필립이 간염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있는 주일학교 아이들이 그에게 새 자전거를 사서 보냈을 때 너무 기뻐했고 결국 필립은 그 병을 이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아만다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 하고 탄성을 올렸습니다. 자전거를 사기 위해 모은 돈을 오지에서 병에 걸린 선교사 아들을 위해 희생한 것이 결국 그녀의 미래의 남편의 생명을 구하고 복을 받게 하는데 쓰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감사가 말과 행동으로 나타날 때 그 결과는 엄청난 축복으로 온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하나님은 놀라운 시스템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기쁨은 은총을, 감사는 풍성함을, 그리고 나눔은 엄청난 보상을 받는다는 하나님의 축복의 시스템을 우리에게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이 시스템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요, 믿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언제나 자신있게 외칩니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