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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직보원(以直報怨)
바름으로 원수를 갚는다는 뜻으로, 원한을 가진 사람에게 도덕으로 대함 또는 원수를 정의로 대함을 일컫는 말이다.
以 : 써 이(人/3)
直 : 곧을 직(目/3)
報 : 갚을 보(土/9)
怨 : 원망할 원(心/5)
출전 : 논어(論語) 헌문(憲問) 第十四
이 성어는 논어(論語) 헌문(憲問) 편에 나오는 말이다.
或曰 : 以德報怨, 何如?
어떤 사람이 말했다. "은덕으로 원망을 갚으면(以德報怨) 어떻습니까?"
子曰 : 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
공자가 말했다. "그렇게 하면 무엇으로 은덕을 갚을 것인가? 공정함으로 원망을 갚고 은덕은 은덕으로 갚아야 한다."
공자의 도는 사람으로부터 멀지 않아서 지극한 사람의 감정을 따르고 공정한 사람의 도리를 따라 사람으로 하여금 행할 수 있게 할 뿐이다. 공자가 수준 높은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다. 아무리 높고 깊이가 있더라도 한두 사람만이 행할 수 있어서 모든 사람이 함께 행할 수 없다면 큰 도가 될 수 없다. 그래서 공자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유학(儒學)은 '은덕으로 원망을 갚는다(노자)'든지 '자신을 버려 호랑이에게 먹인다(불경)' 또는 '오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예수)'는 등의 교의(敎義)와는 다른 것이다.
▣ 이직보원(以直報怨)
논어(論語) 헌문(憲問)편에 출전한다.
어떤 사람이 여쭈었다. "덕으로 원한을 갚는 것은 어떻습니까?"
或曰 : 以德報怨, 何如.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덕은 무엇으로 갚을 것인가? 바름으로 원수를 갚고, 덕으로 덕을 갚아야 한다."
子曰 : 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
덕(德)을 주자(朱子)는 은혜(恩惠)라고 풀었다. 형병(邢昺)은 은혜의 덕이라고 본다. 은덕(恩德)의 의미겠다. 혹자(或者)가 말한 이덕보원(以德報怨)은 노자(老子) 63장에 "작은 것을 큰 것으로 여기고, 적은 것은 많은 것으로 여기며, 원한은 덕으로 갚는다(大小多少, 報怨以德)"고 되어 있다. 혹자의 말이 노자(老子)의 말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다.
양백준(楊伯峻)은 당시에 이런 말이 유행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주자는 혹왈(或曰)의 말은 의식적인 사심에서 나온 것으로, 원한과 은혜를 갚는 것이 모두 공평하지 못하다고 본다. 하이보덕(何以報德)는 원수를 덕으로 갚으면, 은혜는 장차 무엇으로 갚을 것인가라는 뜻이다.
直(직)을 주자는 "내가 원한을 가지게 한 사람에게 사랑함과 미워함, 버리고 취하기를 한결같이 공정하고 사사로움 없이 하는 것"이라고 풀었다.
정약용(丁若鏞)은 옹야(雍也)편의 "사람이 사는 것은 곧음이다. 곧지 않고도 사는 것은 요행히 (죽음, 화를) 면하는 것이다(子曰 : 人之生也直. 罔之生也, 幸而免)"에서 直(직)과 罔(그물 망)을 대칭해 본 것에 근거해 불망(不罔), 즉 속이고 기만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풀면서 "사람이 원한이 있는 사람을 속여서 보복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원수를 은혜로 갚아야 한다는 노자와 달리 공자는 원수는 사적인 원한이 아닌 공명정대함으로 대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다.
▣ 정직하게 되갚아 주어라
당신이 엄청나게 당했다. 그럴 만한 어떠한 이유도 없었다. 그냥 한 고을에서 같이 살았다는 게 죄라면 죄, 생각할수록 너무 억울할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당신보다 더 큰 힘을 지니고 있다. 되갚고자 해도 현실적으로 방도가 없었다.
분노는 삶을 통짜로 망가뜨리기 마련, 몸도 마음도 생활도 어그러졌다. 문득 현자를 찾으면 해법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마침 당신 고을엔 온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두 명의 현자가 살고 있었다. 짬을 내어 그들을 찾았다.
기대대로 그들은 답을 주었다. 그런데 그 답이 정반대였다. 하나는 원한을 은덕으로 되갚으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받은 만큼 정직하게 되돌려 주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문제 하나. 앞서 말한 현자는 공자와 노자였다. 자, 그렇다면 위의 답변 가운데 어느 것이 공자의 말이고 또 어느 것이 노자의 말일까?
공자는 주지하는 바대로 '어짊(仁)'의 대명사이고, 노자는 부드러움의 참된 힘을 역설하던 물을 닮은 현자였다. 왠지 두 사람의 입에서 받은 만큼 고스란히 되돌려주라는 말은 안 나올 성싶다. 그러나 당신이 받은 답변은 분명 두 사람에게서 각각 받은 권고였다.
그렇다면 공자는 어떤 권고를 했을까? 언뜻 은덕으로 되갚으라. 다시 말해 용서해 주라는 권고가 공자가 한 말일 듯싶다. 스승의 도를 개괄하자면 결국 '용서함' 뿐이라는 증자의 증언이 말해주듯이, 용서는 공자가 말한 어짊의 요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답은 '원한은 받은 만큼 그대로 되갚아 주어라(以直報怨)'이다. 한마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되갚으라고 한 셈이니, 용서를 강조하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기엔 자못 석연치 않다. 게다가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이가 성인의 반열에 오를 수는 없었을 터, 뭔가 그렇게 말한 까닭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공자의 시대에 복수는 지식인이라면 반드시 곱씹어야 할 문명의 화두였다. 지식인이라면 반드시 복수에 대한 자기 관점이 서있어야 했다는 뜻이다. 공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마침 어떤 이가 은덕으로 '원한을 갚는 것(以德報怨)은 어떠하냐?'며 물어왔다. 그러자 공자는 '그럼 은덕을 입으면 무엇으로 되갚아야 하냐?'고 되물었다. 그러고는 "원한은 받은 만큼 그대로 되갚아야 하고, 은덕에는 은덕으로 되갚아야 한다"고 단언했다.
다소 낯설 수도 있다. 은혜도 복수처럼 되갚아야 하는 것이라는 공자의 관점이. 그런데 공자만 복수와 보답을 연동시켜 사유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에선 먼 옛날부터 줄곧 원한과 은덕은 둘 다 되갚아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누가 피해를 입힐 때만 되갚은 게 아니라, 은혜를 베풀어도 꼭 되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여 은혜를 입었음에도 보답하지 않으면 십중팔구 뒤탈이 난다고 믿었다. 이는 황제조차 예외가 아니어서 '은혜를 갚지 않으면 위험에 빠지게 된다(회남자)'고 경고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은혜를 베푼 이에게도 덕으로 갚고, 원한을 맺게 한 이에게도 덕으로 갚는다면 과연 누가 은혜를 베풀겠는가? 내가 누군가에게 해를 끼쳤음에도 보복받기는커녕 오히려 그가 내게 덕을 베푼다면 그를 또다시 괴롭히지 않을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공자가 피해를 입은 만큼 되돌려주라고 권고한 까닭이 이해되는 대목이다. 안 그러면 피해를 더 입게 되고 결국 파멸, 그러니까 더 이상 손해 볼 게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논자들이 개인이든 사회이든 간에 복수가 진보의 동력이었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바로 이것이었다.
더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보복을 해야 했고 그러려면 힘을 키워야 했다. 복수가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자포자기일 수도 있지만, 추가적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강화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은덕으로 원한을 갚으라'는 노자의 권고는 머리론 이해돼도 현실적으론 무기력한 이상이라 비판받기도 했다.
신기한 일은 21세기 첨단 디지털 문명을 구가하는 한국엔 노자의 권고를 따르는 이들이 참으로 많다는 점이다. 부자를 만들어 주겠다는 감언이설에 열광했던 전력으로 보건대, 그들이 세속의 가치를 부정하며 자연을 닮고자 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노자의 권고를 우직하게 실천하고 있다.
헌법을 유린하고 양식을 조롱하는 이들이 자신의 정당한 권리와 이익을 침탈하고 또 해도 그들은 은덕을 베풀고 또 베푼다. 이치대로라면 응당 고양이였어야 할 이들이 기꺼이 쥐가 되더니, 그것으로도 모자라 고양이에게 동정을 베푸는 격이다.
본래 동정은, 관용이 그러하듯이 강자가 약자에 대해 품는 연민이다. 고양이이기에 쥐를 동정하고 용서할 수 있는 것이지, 쥐가 된 처지에서 고양이를 동정하고 용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노자의 말은 그래서 사회적 강자에 대한 권고일 때 유의미하다.
그렇다면 공자의 권고는 누구에게 유효할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고금의 역사가 밝히 말해주듯, 가만히 있으면 결국 잡아 먹히고 말 따름이라는 점이다.
▣ 공자의 직(直)
논어 헌문편 (憲問篇)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원한을 덕으로 갚는 것(以德報怨)'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공자는 "덕으로서 원한을 갚는다면, 덕은 무엇으로 갚겠느냐? 원한은 바른 것으로 갚고, 덕은 덕으로 갚아야 한다(以德報怨 何以報徳 以直報怨 以徳報德)"고 했다.
이야말로 현실에 입각한 균형감각이 잡힌 답변이다. 공자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스승이라는 점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때 공자가 '바른 것(直)으로 원한을 갚는다'고 표현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것인지는 분명히 밝히고 있지는 않다. 확실한 것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의 '원한은 원한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는 점뿐이다.
위 문답을 노자 제63장에 나오는 '성인(聖人)은 원한을 덕으로 갚는다(報怨以德)'는 말에 대한 공자의 견해를 듣기 위한 것이었다고는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보원이덕(報怨以德)이 보편적인 규범으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 그 여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덕행은 성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현실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보통사람들 사이에 행해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또 그런 행위를 선(善)이라고 모든 사람에게 권장한다면 오히려 사회의 기존 질서와 가치체계를 무너뜨릴 가능성마저 대두한다.
논어 안연편에서 "바른 것을 올려서 이것을 굽은 것 위에 놓으면, 굽은 것을 바르게 만들 수 있다(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고 공자는 말했다. 정직한 사람을 발탁하여 높은 자리에 앉히고 그 밑에 성정(性情)이 굽어 있는 사람을 놓아두면 그들까지 정직한 사람으로 바뀌게 된다고 본 것이다. 이때의 바른 것은 공중 앞에서 정직한 것이다.
한편 자로(子路) 편에서는 섭공(葉公)이 자기가 다스리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정직해서, 아버지가 남의 양을 훔친 것을 아들이 밝혀 죄를 받도록 한다고 자랑을 하자, 공자는 자기 고장에서는 그와는 달리 아비는 아들을 위해 감추어 주고, 아들은 아비를 위해 감추어 주는데, 그 가운데 바름(直)이 있다(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고 했다.
이 경우의 바름이란 공중 앞에서 정직하다는 것하고는 거리가 있다. 법치를 주장하는 법가의 정직함과 법보다 예를 더 존중하는 유가의 정직함이 서로 충돌한 경우로 해석된다.
직(直)에 대한 공자의 견해는 그 밖에도 몇 군데 더 나온다. 직(直)이란 글자의 회의(會意)를 보면 많은 눈이 보고 있어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상태, 즉 자기 스스로를 속일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천륜으로 맺어진 정에 이끌려 다른 사람 입장에서 보면 정직하지 못한 말을 한다고 해도 그 편이 오히려 더 자기를 속이지 않는 자연스럽고 바른 행위가 된다고 본 것이다.
법가의 대표적 저서 한비자 제49 오두(五蠹) 편은 이러한 이론 상의 혼란을 꼬집어 다음과 같은 이야기와 평을 싣고 있다.
초나라 사람으로 직궁(直躬)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의 아비가 양을 훔쳤다. 그는 이를 관가에 고발했다(楚人有直躬, 其父窃羊, 而謁之吏). 그러자 영윤(令尹)은 그 자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임금에게는 바른 일은 했지만 아비에게는 그릇된 짓을 했으니 잡아서 죄를 준 것이다(令尹曰殺之. 以為, 直於君, 而曲於父, 執而罪之). 이를 살펴볼 때 그 임금의 바른 신하는 그 아비의 포악한 자식이 된다(以是観之, 夫君之直臣父之暴子也).
법가의 입장에서 보면 공자가 주장한 직(直)은 무엇보다도 질서가 중요한 나라 의 정치에 혼란만 초래하는 곡설(曲說)이 된다. 그래서 법가의 설을 채택한 진(秦)이 천하를 통일하자 분서굉유를 자행한다. 그러나 한대(漢代)에 이르면 공자의 직(直)을 법치에 반영을 하여 '용은(容隱)'이란 제도를 도입한다.
직계 존, 비속의 경우 서로 죄를 숨겨 주어도 벌하지 않는 예외 규정을 둔 것이다. 우리가 바른 것을 추구할 때도 언제나 그것보다 더 근본이 되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 더 앞서는 대의(大義)는 없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 이직보원(以直報怨)과 이덕보원(以德報怨)의 차이
或曰; 以德報怨, 何如.
子曰; 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
-논어, 헌문 제36장
어떤 사람이 말했다. "은덕으로 원한을 갚으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렇게 하면 무엇으로 은덕을 갚을 것인가? 공정함으로 원망을 갚고 은덕으로 은덕을 갚아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부딪히게 되고 갈등을 겪게 되는 문제가 '어디까지 얼마나 도와주어야 하는가'와 '어디까지 어느 정도 도움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도가(道家)의 경우는 '원한도 덕으로 갚을 것'을 말하고 있으며, 이는 성경(聖經)도 그 비슷한 대답을 하고 있다. 하지만 공자는 여기서 원한은 바름으로 갚고, 덕은 덕으로 갚을 것을 말하고 있다. 왜 이러한 차이가 생긴 것일까?
김용옥의 주석에 따르면, 이는 공자와 유학이 가진 현실주의적인 입장 때문이다. 초월적인 세상을 이야기하고 현실 너머를 지향하는 도가나 성경의 입장과는 달리, 공자와 유학은 현실에 기반을 두고 현실을 이야기하려 하기 때문이다.
원한을 덕으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원한을 올바름으로 징벌한다는 개념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올바름'은 후대의 유가 사상과 법가 사상에 영향을 주었으리라. 이러한 '올바름'이 사회를 형성하는 질서일 것이고, 그러한 사회 질서를 바르게 세우는 것으로 현실 세계를 바르게 만들고, 그렇게 현실 세계를 성인들이 통치했던 이상적인 과거 세상처럼 바꾸는 것이 유학의 목표이자 공자의 꿈일 것이다.
은혜와 원한, 감사와 복수의 경계를 잘 모를 일이다.
은혜에서 원수가 나온다.
원수는 처음부터 만날 일이 없다. 만나면 은혜가 생기고, 그 은혜를 잊느냐 잊지 않느냐에 따라 덕과 원수가 생기는 법이다. 좋은 일 했으면 잊어버려라. 받으려고 좋은 일하고 마음 쓰면 나쁘게 된다. 감사를 알고 모르고가 인간과 동물의 구분이다. 감사할 줄 모르는 데서 좋은 바이러스가 전파되지 않는다.
무례하게 구는 사람도 은혜로 대하라고 말하지만 어려운 일이다. 그런 후덕(厚德)함을 진심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더구나 유의(有意)의 사심(私心)에서 그런다면 원망스러운 사람을 대하는 일도 은혜로운 사람을 대하는 일도 모두 공평하지 못하게 된다.
세상일과 진리공부는 궁극적으로는 사람공부다.
상대방의 인격과 지나친 점, 모자란 점, 잘난 점등을 정확하게 볼 수 있어야 진정으로 남도 돕고 자기 공부도 되겠다. '원망할 것은 곧게 갚으라'는 여기 문장은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에 있는 '원망할 것은 덕으로 갚으라' 한 내용과 상반(相反)되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 이면을 보면 꼭 그렇지 않다.
감싸주는 따뜻한 사랑과 매로 치는 차가운 사랑이 있듯이 용서할 때와 책망할 때를 잘 분별하는 자신의 지혜가 필요하겠다. 상대방의 사람 공부 정도와 그 사람과 함께 처하게 된 구체적인 상황, 조건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그와 나 모두의 깨달음과 인격완성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순간순간 결정이 이뤄져야 하겠다.
이덕보원(以德報怨)은 원망스러운 사람에게 은혜의 덕으로 갚는다는 말이다. 주자(朱子)는 이것이 노자(老子)의 방식이라고 했다. 개체성 윤리와 전체성 윤리가 어울려야 좋을 것이다. 감싸주고 용서하고 이해해주는 전체성의 마음가짐이 바탕에 깔려있는 상태에서, 상대방에게 곧게 찔러 주어야 할때는 찔러줄줄 아는 개체성 윤리의식이 필요하다.
타인에 대한 성의가 지나친 사람은 있는 성의를 때와 장소, 사람에 따라 적절히 조절하면서 공부가 될 것이고, 성의가 모자라는 사람은 타인을 더욱 의식하면서 성의를 키워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선한 사람은 선하지 못한 사람의 스승이고, 선하지 못한 사람은 선한 사람이 선하게 되는 바탕이다."(도덕경)
(참고)
유학이 과거 지향적이라는 점에서 철저하게 보수적이라는 시각이 있을 수 있다. 굳이 유학의 과거 지향적 관점에 대하여 옹호해 보자면, 유학이 추구한 목표가 실제로 존재하였다는 예시를 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과거의 이상적인 군주들과 그들의 통치를 열거하였고, 그렇게 과거 지향적으로 보이는 모습이 형성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점이 다가올 천년왕국을 이야기하는 성경이나, 인간의 모습을 벗어난 탈속의 경지를 말하는 도가, 윤회의 고리를 벗어나 부처가 되는 불교의 이야기와 다른 점일 것이다. 결국 이 구절에서 공자는, 당시의 도가적인(아마도 은둔자들로부터 비롯되었을) 이야기들에 대하여 현실주의적인 반박과 함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기준이 유학이 유교가 되면서도 그 모습이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무척 현실주의적인 이유다.
공자는 원망스러운 사람에 대해 정직의 태도로 대하라고 가르쳤다. 사랑하고 미워함과 취하고 버림을 지극히 공평하게 하는 것이 정직이다.
하이보덕(何以報德)은 만일 원망을 덕으로 갚는다면 덕은 무엇으로 갚느냐고 반문하는 말이다.
직(直)은 지공무사(至公無私)를 말한다.
이덕보덕(以德報德)은 은혜를 끼친 사람에게는 반드시 은덕으로 갚아야 한다는 말이다.
원수를 대하는 등급 네 가지
(1)원수를 통쾌하게 갚는 경우; 다시 보복을 받는다.
(2)잔머리를 굴려 겉으로는 돕고 높이지만 속으로는 밀쳐 내고 깎아 내는 경우; 남을 해치고 화를 일으키려는 마음이 농익어 세상에 재난을 입힌다.
(3)지인(至人); 원수가 없거나 원수가 있어도 보복을 하늘에 맡긴다. 이 사람은 편안하다.
(4)성인(聖人); 정성과 공정성으로 원수를 대하여 지인보다 한 등급 높다.
조리(條理)와 도덕(道德)이 지켜지는 일상세계에서는 원수를 무조건 은혜로 갚는 것이 아니라 공정하게 대하는 것이 옳다는 이야기다. 법질서는 은혜와 원수를 정도(正道)로 갚는 방편(方便)으로 향해야 한다.
공자의 도는 사람으로부터 멀지 않아서 지극한 사람의 감정을 따르고 공정한 사람의 도리를 따라 사람으로 하여금 행할 수 있게 할 뿐이다. 공자가 수준 높은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다. 아무리 높고 깊이가 있더라도 한두 사람만이 행할 수 있어서 모든 사람이 함께 행할 수 없다면 큰 도가 될 수가 없다.
그래서 공자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예수는 인이 지나쳐 은덕으로 원망을 갚으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이 때문에 그를 존경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행할 수 없다.
이것은 공자학파의 사상 중 중요한 부분이고, 이 때문에 유학은 '은덕으로 원망을 갚는다(노자)'든지 '자신을 버려 호랑이에게 먹인다(불경)', 또는 '원수를 사랑하라'거나 '오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대라(성경)'는 등의 교의(敎義)와는 다르다. 그것은 실용이성의 충분한 표현이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널리 사랑하며(실행하기가 어렵다), 인정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일체를 이로움과 해로움으로 준칙을 삼는다(예로 법가). 이성을 감정 가운데 삼투시키고, 감정은 이성을 원칙으로 삼는다. 여기에서 유가의 사회적 공중도덕(정의. 공평)과 종교적 개인도덕(세상과 개인 구제)이 합쳐진다.
▶️ 以(써 이)는 ❶회의문자이나 상형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람이 연장을 사용하여 밭을 갈 수 있다는 데서 ~로써, 까닭을 뜻한다. 상형문자일 경우는 쟁기의 모양을 본뜬 것이다. ❷회의문자로 以자는 '~로써'나 '~에 따라'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以자는 人(사람 인)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사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以자의 갑골문을 보면 마치 수저와 같은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을 두고 밭을 가는 도구이거나 또는 탯줄을 뜻하는 것으로 추측하고는 있지만, 아직 명확한 해석은 없다. 다만 무엇을 그렸던 것인지의 유래와는 관계없이 '~로써'나 '~에 따라', '~부터'라는 뜻으로만 쓰이고 있다. 그래서 以(이)는 ①~써, ~로, ~를 가지고, ~를 근거(根據)로 ②~에 따라, ~에 의해서, ~대로 ③~때문에, ~까닭에, ~로 인하여 ④~부터 ⑤~하여, ~함으로써, ~하기 위하여 ⑥~을 ~로 하다 ⑦~에게 ~을 주다 ⑧~라 여기다 ⑨말다 ⑩거느리다 ⑪닮다 ⑫이유(理由), 까닭 ⑬시간, 장소, 방향, 수량의 한계(限界)를 나타냄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일정한 때로부터 그 뒤를 이후(以後), 위치나 차례로 보아 어느 기준보다 위를 이상(以上), 오래 전이나 그 전을 이전(以前), 일정한 한도의 아래를 이하(以下), 그 뒤로나 그러한 뒤로를 이래(以來), 어떤 범위 밖을 이외(以外), 일정한 범위의 안을 이내(以內), 어떤 한계로부터의 남쪽을 이남(以南), 어떤 한계로부터 동쪽을 이동(以東), ~이어야 또는 ~이야를 이사(以沙), 그 동안이나 이전을 이왕(以往), 까닭으로 일이 생기게 된 원인이나 조건을 소이(所以), ~으로 또는 ~으로써를 을이(乙以), 어떠한 목적으로나 어찌할 소용으로를 조이(條以), ~할 양으로나 ~모양으로를 양이(樣以), 석가와 가섭이 마음으로 마음에 전한다는 뜻으로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심오한 뜻은 마음으로 깨닫는 수밖에 없다는 말 또는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말을 하지 않아도 의사가 전달됨을 이르는 말을 이심전심(以心傳心),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는 뜻으로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당해 내려는 어리석은 짓을 일컫는 말을 이란투석(以卵投石), 대롱을 통해 하늘을 봄이란 뜻으로 우물안 개구리를 일컫는 말을 이관규천(以管窺天), 귀중한 구슬로 새를 쏜다는 뜻으로 작은 것을 얻으려다 큰 것을 손해 보게 됨을 이르는 말을 이주탄작(以珠彈雀), 독으로써 독을 친다는 뜻으로 악을 누르는 데 다른 악을 이용함을 이르는 말을 이독공독(以毒攻毒), 열은 열로써 다스린다는 뜻으로 힘에는 힘으로 또는 강한 것에는 강한 것으로 상대함을 이르는 말을 이열치열(以熱治熱), 옛것을 오늘의 거울로 삼는다는 뜻으로 옛 성현의 말씀을 거울로 삼아 행동함을 이르는 말을 이고위감(以古爲鑑), 새우로 잉어를 낚는다는 뜻으로 적은 밑천을 들여 큰 이익을 얻음을 일컫는 말을 이하조리(以蝦釣鯉), 손가락을 가지고 바다의 깊이를 잰다는 뜻으로 양을 헤아릴 줄 모르는 어리석음을 이르는 말을 이지측해(以指測海),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는 뜻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데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이식위천(以食爲天), 사슴을 말이라고 우겨댄다는 뜻으로 윗사람을 기만하고 권세를 휘두름을 이르는 말을 이록위마(以鹿爲馬), 하나로써 백을 경계하게 한다는 뜻으로 한 명을 벌하여 백 명을 경계하게 함을 이르는 말을 이일경백(以一警百), 털만으로 말의 좋고 나쁨을 가린다는 뜻으로 겉만 알고 깊은 속은 모름을 이르는 말을 이모상마(以毛相馬), 남의 성공과 실패를 거울삼아 자신을 경계함을 이르는 말을 이인위감(以人爲鑑), 백성을 생각하기를 하늘같이 여긴다는 뜻으로 백성을 소중히 여겨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음을 일컫는 말을 이민위천(以民爲天), 피로써 피를 씻으면 더욱 더러워진다는 뜻으로 나쁜 일을 다스리려다 더욱 악을 범함을 이르는 말을 이혈세혈(以血洗血), 양으로 소와 바꾼다는 뜻으로 작은 것을 가지고 큰 것 대신으로 쓰는 일을 이르는 말을 이양역우(以羊易牛), 과거의 사례를 살펴봄으로써 미래를 미루어 짐작한다는 말을 이왕찰래(以往察來), 불로써 불을 구한다는 뜻으로 폐해를 구해 준다는 것이 도리어 폐해를 조장함을 이르는 말을 이화구화(以火救火) 등에 쓰인다.
▶️ 直(곧을 직, 값 치)은 ❶회의문자로 十(십)과 目(목)과 乚(숨을 은; 隱의 옛자)의 합자(合字)이다. 十(십)과 目(목)을 합(合)하여 열개(여러 개)의 눈(많은 사람)으로 숨어 있는(乚) 것을 바르게 볼 수 있다는 뜻을 합(合)하여 바르다, 곧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直자는 '곧다'나 '바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直자는 目(눈 목)자와 十(열 십)자, 乚(숨을 은)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直자의 갑골문을 보면 단순히 目(눈 목)자 위에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다. 이것은 눈이 기울어지지 않았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눈 위에 획을 하나 그려 넣었던 直자는 금문에서부터 눈을 감싼 형태의 획이 하나 더해져 '곧다'라는 뜻을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直자는 때로는 '가격'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가격이란 정확해야 하기에 '바르다'라는 의미가 반영된 것이다. 그래서 直(직, 치)은 (1)이직(理直)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곧다, 굳세다 ②바르다, 옳다③굽지 아니하다 ④기울지 아니하다 ⑤부정(不正)이 없다, 사(私)가 없다 ⑥펴다, 곧게 하다 ⑦꾸미지 아니하다 ⑧온순하다 ⑨억울함을 씻다 ⑩당하다, 대하다 ⑪대적하다 ⑫바루다, 고치다 ⑬모시다, 시중들다 ⑭곧, 즉시 ⑮바로 ⑯일부러 ⑰다만, 겨우 ⑱바른 도(道), 바른 행위(行爲) ⑲숙직(宿直)⑳세로 등의 뜻과 값 치의 경우는 ⓐ값, 물가(치) ⓑ품삯(치) ⓒ만나다, 당하다(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바를 정(正), 곧을 정(貞)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굽을 곡(曲)이다. 용례로는 중간에 매개나 거리 간격이 없이 바로 접함을 직접(直接), 두 점 사이를 가장 짧은 거리로 연결한 선을 직선(直線), 수평선과 수직선이 이루는 각을 직각(直角), 바로 눈에 보임을 직관(直觀), 바른 대로 알리거나 고해 바침을 직고(直告), 두 직선 또는 두 평면이 직각으로 만나는 일을 직교(直交), 다른 곳을 들르지 않고 곧장 목적지로 들어가거나 들어옴을 직입(直入), 일이 생기기 바로 전을 직전(直前), 바로 그 아래 곧장 그 밑을 직하(直下), 실정을 바른대로 말함을 직토(直吐), 있는 그대로 베껴 씀을 직사(直寫), 올바르고 착실함을 직실(直實), 원의 지름을 직경(直徑), 직접적로 예속됨을 직속(直屬), 거짓으로 꾸미거나 숨김이 없이 바르고 곧음을 솔직(率直),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성품이 바르고 곧음을 정직(正直), 몸 따위가 굳어서 뻣뻣하게 되는 것을 경직(硬直), 똑바로 드리운 모양을 수직(垂直), 옳고 그름이나 굽음과 곧음을 곡직(曲直), 어리석고 고지식함을 우직(愚直), 그 날 그 날의 당직을 일직(日直), 마음이 굳세고 곧음을 강직(剛直), 직궁이 아비를 고발하고 증인이 된다는 뜻으로 지나친 정직은 도리어 정직이 아님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직궁증부(直躬證父), 직궁의 신의라는 뜻으로 인정에 벗어난 신의를 이르는 말을 직궁지신(直躬之信), 곧게 바로 비치는 광선을 일컫는 말을 직사광선(直射光線), 직계에 속하는 가족을 일컫는 말을 직계가족(直系家族), 곧이 곧대로 재빨리 나아감을 일컫는 말을 직왕매진(直往邁進) 등에 쓰인다.
▶️ 報(갚을 보/알릴 보)는 ❶회의문자로 죄를 짓고(幸) 다스림을 받은(문자의 오른쪽 부분인 글자 복 사람을 복종시키는 모양, 다스리는 모양) 사람이라는 데서 갚다를 뜻한다. 죄받다, 대답하다, 갚다의 뜻을 나타낸다. ❷회의문자로 報자는 '갚다'나 '판가름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報자는 執(잡을 집)자와 又(또 우)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報자의 금문을 보면 수갑을 찬 죄수를 잡으려는 듯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글자의 형태로만 본다면 같은 시기에 그려진 執(잡을 집)자와 비슷하다. 다만 報자에는 又(또 우)자가 있으므로 수갑을 차고 있는 죄수를 붙잡아두고 있는 모습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죄수를 붙잡아둔 모습이 왜 '갚다'라는 뜻을 가지게 된 것일까? 報자에서 말하는 '갚다'라는 것은 사실 벌을 받아 죗값을 치르라는 뜻이다. 그래서 報(보)는 ①갚다 ②알리다 ③대답(對答)하다 ④여쭈다 ⑤치붙다 ⑥재판하다 ⑦판가름하다 ⑧공초(供招)받다(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다) ⑨간통(姦通)하다, 간음(姦淫)하다 ⑩나아가다, 급(急)히 가다 ⑪갚음 ⑫알림, 통지 ⑬신문, 신문지 ⑭처형,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갚을 상(償), 갚을 수(酬)이다. 용례로는 일반에게 알리는 새로운 소식을 보도(報道), 알리어 바치거나 베풀어 알림을 보고(報告), 근로의 대가로 주는 금전이나 물품을 보수(報酬), 입은 혜택이나 은혜를 갚음을 보답(報答), 원수를 갚음을 보복(報復), 은혜를 갚음을 보은(報恩), 공훈에 보답함을 보훈(報勳), 남에게 진 빚이나 받은 것을 갚음을 보상(報償), 착한 일은 착한 대로 악한 일은 악한 대로 선악이 대갚음됨을 보응(報應), 사정이나 정황의 보고를 정보(情報), 널리 알리는 것 또는 그 소식이나 보도를 홍보(弘報), 통지하여 보고함을 통보(通報), 상대방의 정보나 형편을 몰래 탐지하여 보고함을 첩보(諜報), 신문 기사에서 일컫는 그 신문 자체를 본보(本報), 앞으로의 일을 예상해서 미리 알림을 예보(豫報), 반가운 소식을 낭보(朗報), 경계하라고 미리 알림을 경보(警報), 정보를 제공함을 제보(提報), 빨리 알리는 것 또는 그 보도를 속보(速報), 확실하게 알림 또는 그러한 보도나 소식을 확보(確報), 여러 가지 일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사진을 찍어 발행한 책자를 화보(畫報),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 기사를 적어 벽이나 게시판에 붙이는 종이를 벽보(壁報), 그릇된 보도 또는 그릇 보도함을 오보(誤報), 근본에 보답하고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천지와 선조의 은혜에 보답함을 일컫는 말을 보본반시(報本反始), 남을 국사로 대우하면 자기도 또한 국사로서 대접을 받는다는 뜻으로 지기知己의 은혜에 감동함을 이르는 말을 보이국사(報以國士), 조상의 음덕을 추모함을 일컫는 말을 보본추원(報本追遠), 자신의 삶의 은인인 군사부君師父에 대해서 죽음으로써 보답함을 일컫는 말을 보생이사(報生以死), 원한 있는 자에게 은덕으로써 갚는다는 뜻으로 앙갚음하지 않는다는 말을 보원이덕(報怨以德), 서로 대갚음을 하는 자연의 이치를 일컫는 말을 보복지리(報復之理), 풀을 묶어서 은혜를 갚는다라는 뜻으로 죽어 혼이 되더라도 입은 은혜를 잊지 않고 갚음 또는 무슨 짓을 하여서든지 잊지 않고 은혜에 보답함을 일컫는 말을 결초보은(結草報恩), 원인과 결과는 서로 물고 물린다는 뜻으로 과거 또는 전생의 선악의 인연에 따라서 뒷날 길흉 화복의 갚음을 받게 됨을 이르는 말을 인과응보(因果應報), 원인과 결과가 서로 호응하여 그대로 갚음을 일컫는 말을 인과보응(因果報應), 자식이 부모가 길러준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반포보은(反哺報恩),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 좋은 일을 베풀면 반드시 그 일이 드러나서 갚음을 받음을 일컫는 말을 음덕양보(陰德陽報), 충성을 다하여 나라의 은혜를 갚음을 일컫는 말을 갈충보국(竭忠報國), 죽을 각오를 하고 나라의 은혜에 보답함을 일컫는 말을 결사보국(決死報國), 조상의 덕을 추모하여 제사를 지내고 자기의 태어난 근본을 잊지 않고 은혜를 갚음을 일컫는 말을 추원보본(追遠報本), 원수에게 덕으로써 보답함 또는 원수에게 은덕을 베푸는 일을 일컫는 말을 이덕보원(以德報怨), 원한을 가진 사람에게 도덕으로 대함 또는 원수를 정의로 대함을 일컫는 말을 이직보원(以直報怨), 한 번 밥을 얻어먹은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는 뜻으로 적은 은혜에 대한 보답을 일컫는 말을 일반지보(一飯之報),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보답함을 이르는 말을 지은보은(知恩報恩), 봉숭아에 대한 보답으로 오얏을 보낸다는 뜻으로 내가 은덕을 베풀면 남도 이를 본받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투도보리(投挑報李) 등에 쓰인다.
▶️ 怨(원망할 원, 쌓을 온)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마음심(心=忄; 마음, 심장)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夗(원)으로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怨자는 '원망하다'나 '미워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怨자는 夗(누워 뒹굴 원)자와 心(마음 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夗자는 달이 뜬 어두운 밤에 뒹구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누워 뒹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怨자는 이렇게 누워 뒹군다는 뜻을 가진 夗자에 心자를 결합해 너무도 분하고 원통하여 바닥을 뒹굴 정도(夗)의 심정(心)이라 뜻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怨(원, 온)은 (1)원한(怨恨) (2)원망(怨望) 등의 뜻으로 ①원망(怨望)하다 ②고깝게 여기다 ③책망(責望)하다 ④나무라다 ⑤미워하다 ⑥슬퍼하다 ⑦위배(違背)되다 ⑧어긋나다 ⑨헤어지다 ⑩풍자(諷刺)하다 ⑪원수(怨讐) ⑫원한(怨恨) ⑬원망(怨望) 그리고 ⓐ쌓다(온) ⓑ축적(蓄積)하다(온)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원망할 앙(怏), 한 한(恨), 근심할 담(憾),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은혜 은(恩), 은혜 혜(惠)이다. 용례로는 원통하고 한되는 생각을 원한(怨恨), 남이 한 일을 억울하게 또는 못마땅하게 여겨 탓함을 원망(怨望), 자기 또는 자기 나라에 해를 끼친 사람을 원수(怨讐), 원망하는 소리를 원성(怨聲), 자기에게 원한을 갖고 있는 사람을 원가(怨家), 남편이 없음을 원망하는 여자를 원녀(怨女), 원한을 품은 여자를 원부(怨婦), 원망하고 꾸짖음을 원구(怨咎), 무정한 것을 원망하면서도 오히려 사모함을 원모(怨慕), 원한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불화를 원구(怨溝), 원한을 품고 악한 짓을 저지름을 원특(怨慝), 원한을 품음을 구원(構怨), 남이 저에게 해를 주었을 때에 저도 그에게 해를 주는 일로 앙갚음을 보원(報怨), 노여움과 원한으로 노하여 원망함을 노원(怒怨), 원수를 맺거나 원한을 품음을 결원(結怨), 어떤 일로 말미암아 남의 원한을 삼을 매원(買怨), 털끝만큼 하찮은 원망이나 원한을 발원(髮怨), 깊이 원망함 또는 깊은 원망을 심원(深怨),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원망을 적원(積怨), 몹시 분하여 생기는 원망을 분원(忿怨), 자기에게 해를 끼치는 자나 자기에게 사랑을 베푸는 자를 평등하게 대한다는 말을 원친평등(怨親平等),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다는 뜻으로 원한이 깊어 잊을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원철골수(怨徹骨髓),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한다는 말을 원천우인(怨天尤人), 원한 있는 자에게 은덕으로써 갚는다는 뜻으로 앙갚음하지 않는다는 말을 보원이덕(報怨以德),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도에 지나치면 도리어 원망을 사게 됨을 이르는 말을 은심원생(恩甚怨生), 잘못을 뉘우쳐 다시는 그런 잘못이 없도록 함을 이르는 말을 자원자애(自怨自艾), 누구를 원망하고 탓할 수가 없다는 말을 수원숙우(誰怨孰尤), 원망이 쌓이고 쌓여 노염이 깊어짐을 이르는 말을 적원심노(積怨深怒), 원망을 사면서도 꿋꿋하게 일을 진행함을 이르는 말을 임원감위(任怨敢爲), 서로 술잔을 나누고 있는 사이에 묵은 원한을 잊어 버린다는 말을 배주해원(杯酒解怨),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사모하는 것 같기도 하다는 말을 여원여모(如怨如慕)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