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士觀樹錄 2-4, 소나무의 수난과 보호
나무와 함께 살아온 우리 조상들은 그 많은 나무 중에서도 소나무를 제외한 모든 나무를 그저 잡목(雜木)이라고 했다. 오로지 소나무만이 나무다운 나무, 최고의 나무라하여 소중히 다루어 왔다.
우리 역사에 나타난 최초 최대의 소나무 수난은 고려시대. 원(元)이 일본을 정벌할 때 전투선박 3000척을 고려에 요구한 때부터 이다. 원의 관섭을 받던 조정은 이때 변산반도. 나주, 장흥 등지의 소나무를 대규모로 벌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후 조선시대로 너머 와서는 한양으로 도성을 옮긴 결과 궁궐 건조. 궐내외의 각사 공공건물. 그리고 사대부, 민초들의 주택건설에 많은 목재, 소나무가 자연 필요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소나무보다 느티나무가 궁궐과 귀족 집, 사찰에 주로 많이 쓰이던 나무였다. 그 실증이 지금 남아있는 고려시대 건물로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안동 봉정사, 구례 화엄사. 합천 해인사의 주 건물들이 모두 느티나무로 지었지만 조선시대로 와서 주요 궁궐 사찰 건물이 소나무들로 바뀐다.
이는 느티나무 수요 부족과 성리학을 국가정신으로 하는 조선에서 소나무가 갖는 의미가 큰 몫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 헌법격인 경국대전에 <산림천택 여민공여(山林川澤 山林川澤與民共之)>원칙, 즉 ‘산림, 내와 늪은 백성과 공유 한다’는 원칙이 있어, 오해하면 무주공산(無主空山)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 주인이 바로 백성이라는 뜻으로, 함께 관리하고 이용한다는 말이다.
태조 이성계는 서울로 도읍을 옮긴 후 안산(案山)인 남산의 기를 돋우기 위해 소나무를 심기 시작했고, 이어서 태종 초 1411 장정 3000명을 동원하여 남산을 비롯한 그 인근에 소나무 100만 그루를 심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세종 연간에는 이들 소나무 보호책으로 한양도성 10리 언저리 안에는 오늘의 그린벨트같이 소나무 베기를 금하고 산지경작(山地耕作)과 집 짓은 일을 금한 소위 금송정책(禁松政策)을 펼쳤다.
그래도 소나무가 궁궐 조영에 더 많이 필요하고 인구증가, 도시의 팽창 등으로 산림이 황패해지고 산불이 잦아지자 도벌, 산불 방지를 위해 <송목양성병선수호조건(松木養盛兵船守護條件)>이란 일종의 포고문을 반포해 엄히 시행한다.
주요 내용은, 소나무 한 구루를 벤 자는 곤장 100대, 그 산 산지기는 80대, 산 관리자는 40대로 다스린다는 연대 처벌 방식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게다가 소나무 10그루 도벌 한 자는 곤장 100대 후에 전 가족 변경으로 추방. 산지기는 100대 후 군대에 배치. 그 지역 관리는 100대 후 향후 10년 동안 파직한다는 실로 무서운 처벌을 했었다.
조선 후기로 오면 나라의 전쟁과 재난, 즉 흉년, 대가뭄, 전염병, 대홍수 등 자연재해가 나면 왕이 스스로 국민과 함께 고통 분담 차원에서 솔선하여 세 가지를 금하는 소위 삼금(三禁)을 실시한다. 삼금에서 첫째 우금(牛禁), 즉 소를 잡거나 소고기를 파는 행위를 금하는 것으로 한 마리 소는 장정 열 몫의 일을 할 수 있어 노동력의 상실을 막고 소고기 먹는 귀족과 못 먹는 민초들 사이의 위화감을 없애자는 뜻에서이고, 주금(酒禁)은 금주령으로 부족한 양식을 낭비 않게 하고 또는 술로 인한 성리학 사회의 폐륜 불륜 등 사회질서 확립의 목적에서 실행했고. 마지막 송금(松禁)은 전쟁 시 병선, 대궐건조, 세곡선 건조 등등 국가적 목재 수요에 필요한 자재를 미리 확보한다는 뜻에서 금했다. 나라에서 주요 소나무 자생지에는 아예 소나무 베는 일을 금한다는 금송(禁松)과 그 곳 자체의 출입을 못하게 하는 봉산(封山)제도를 선포, 그 요소에다 금표(禁標 ) 봉표(封標)란 빗돌을 세워 경계하는 방식으로 철저히 보호했다. 이 표석들은 전국 200여 곳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고, 현재 울진 소광리, 원주 치악산 구룡사 입구 등 열 곳에 남아 실물을 볼 수 있다. 이런 소나무 보호 산을 의송지지(宜松之地)라 하여 특별관리 대상 지역으로 지정 했다. 그러고 금산. 봉산에 몰래 숨어들어 나무를 베거나, 짐승을 기르거나, 재(灰)를 함부로 버려 산불을 나게 하는 자는 곤장 80대로 다스린다는 서슬 퍼런 형률도 있었다.
또 더한 문제로 나라에서 필요한 목제를 사찰마다 또는 일반 서민 앞으로 할당하여 강제 공납을 받는 예가 있어 심한 민폐를 일으켜 원성을 사기도 했고, 왕실에서 때로는 특정한 절이나 기관에 금송패(禁松牌)라는 산림감시원 자격증 즉 소나무 감독권을 주기도 했으며, 국가가 정한 소나무 보호세칙인 송금절목(松禁節目)이나, 정약전의 송정사의(松政私議)등 개인적인 소나무 정책과 노의가 자주 나왔음 그만큼 소나무 보호에 주목했다는 증거이다.
소나무 목재(木材)의 공납 강제가 얼마나 심했던지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 공전(工典)에 시(詩) 승발송행(僧拔松行) 즉 “어린 소나무 뽑아버리는 스님”이란 글로 한탄하며 읊었다.
한편 우리 민초는 국가의 관리를 받는 소나무 정책 외에 지역적으로 현명하게 스스로의 땔감과 생활에 필요한 목재를 효율적으로 얻으려는 운동이 자생적으로 생겼으니, 그것이 바로 송계(松契) 즉 소나무와 시탄(柴炭 땔감)을 지속가능하게 얻기 위한 조직을 만들게 된다. 흔히 지방 명을 딴 무슨무슨 사산송계(四山松契)니 하여 지금도 그 명맥이 유지되어 오는 곳이 여럿이 있다.
조선 말기로 오면서 앞의 삼금정책(三禁政策)은 조정의 부정부패로 인해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됐고, 대한제국 그 짧은 기간, 러시아는 금광채굴권을 따낸 것을 명목으로 우리 좋은 소나무 목재까지 베어가게 된다. 아직도 설이 분분하지만 울릉도의 그 많고 큰 소나무는 우리가 잘 아는 영화배우 <왕과 나>에 나온 대머리 <율 부린너(Yul Brynner)>의 할아버지가 앞잡이라는 설이 있다. 증거는 <율 부린너>는 러시아 태생으로 미국으로 이민 간 사람인데 울릉도에 불법 벌목한 선원 총책 명단에 그 조상 이름이 있다는 게 그 증거란 주장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 오면, 우리의 질 좋은 소나무를 그들이 그냥 둘리 없다. 특히 전쟁이 막바지로 너머 갈 무렵 우리 소나무에 더 큰 피해를 입힌다. 소나무 목재 수탈은 말 할 것 없고, 일본이 석유에너지 보급라인(선)이 끊어지자 대체에너지로 개발한 소나무의 송진(松脂)을 채취해서 가공한 송진기름(松根油)을 전국에 강제 할당 공출로 매기고 수탈하는 식으로 조선 땅의 민초를 압박했다.
당시 그들이 내건 슬로건에는 <200그루 소나무에서 빼낸 송근유로 비행기 1대를 1시간 날게 할 수 있다> 이었다. 조선 땅 소나무들의 그 때 상흔은 지금도 역력히 정신대 할머니들처럼 존재한다. 가령 문경새재 골짜기. 울진 소광리, 삼척 준경묘 근처, 하동 솔밭 등지 소나무 노거수가 있는 그 곳에는 반드시 허리높이 둥치에 생선가시모양 아니면 군인 상병 계급장 같은 상처를 들어내는 나무가 있다. 소나무의 그 상처가 일제 송진 딴 아픈 상흔이다. 나는 그런 나무를 볼 때마다 나무도 소나무도 지도자 잘못만나면 저런 고통과 수난을 받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 때 일본이 소나무 육성을 위해 많은 철저한 노력을 했다고 반론도 하지만, 속으로는 백년 천년 묵은 잘 자란 큰 소나무를 수없이 베어가고, 겉으로 소나무 보호 명목으로 우리 백성이 추워 잔솔가지 몇 개 벤 것에 대해선 가혹한 처별을 내렸다.
나는 기억한다. 내 어린 날 동네 입구에 순사 혹은 양복쟁이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우리 고모와 엄마는 가슴 조이며 빨리 정지깐(부엌)으로 가서 청솔가지를 짚 부스러기로 덮어 감추는 것을 본적이 있다. 솔가지가 발각되면 규류 벌금 등 온갖 고초를 겪기 때문이다. 겨우 그들의 눈을 간신히 피하면 그제 사 휴- 안도의 숨을 길게 쉬는 것을 나는 봤다.
일제 때 그렇게 소나무 때문에 당한 고통 때문에 간혹 소나무에 한이 맺혀 해방공간에 무자비 할 정도로 소나무를 베는 복수에다 한풀이 한사람도 있었다는 말을 촌로들이 증언한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산림녹화, 우리 강산을 푸르게 ”를 외치며 나는, 우리는 삽 혹은 괭이 지게 지고 민둥산으로 나무 심으러 갔다. 몰런 부역이란 강제 노역이다. 식목일은 쉬는 날이 아니라 중요한 행사일. 우리는 그때 애국가를 부르고 나무를 심었다.
6.25 전쟁 때도 깊은 산, 동네이웃의 소나무가 많은 피해 본 것도 사실이다. 정전되고 서울이 폐허가 되어 재건할 건축자제로 소나무가 필요했다. 아주 옛날에는 영월 동강 등 강원도에서 북한강 물길을 따라 목재가 서울로 떠내려 보내왔다. 소위 떼돈 버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1040 연대에 중앙선 기차가 생기고 산속오지로 영동선 태백선이 이어진 뒤, 울진 영주 봉화등지 깊은 산속의 질 좋은 금강송이 봉화 춘양역으로 모였다가 그 나무들이 춘양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이 때 목재상들이 춘양 근방에 자란 나무도 아닌 저질의 소나무도 춘양목이라고 억지 쓰는 통에 <억지 춘향>이 아니라 <억지 춘양>이란 말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1980, 90년대 들어오면서 푸나무 땔감에 대신하여 편리한 석탄 석유가 나옴으로 산이 빠른 속도로 진짜 푸르게 된다. 그러나 이 때문에 소나무는 오히려 고난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유는 소나무는 우선 빛을 좋아하는 나무 양수 빛이 필요하고. 그리고 솔 씨는 그 씨가 땅에 직접 닿아야 싹이 트는 습성이 있는데 무성한 넓은 가랑잎 위에 떨어진 솔 씨가 싹을 트지 못하여 자연스런 후계목이 자랄 수 없게 된 것이다.
더 있다. 도시와 도로의 팽창으로 많은 산. 계곡의 수십 년, 수백 년을 살아온 소나무 들이 사라지게 되고, 게다가 송충이, 솔잎깍지벌레, 솔잎혹파리 등등의 병충해가 거의 주기적으로 이어졌다. 학교 다닐 때 송충잡이 노력봉사에 동원된 적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러다가 1980대 말. 소나무 에이즈라는 별명이 붙은 소나무 재선충 피해가 점점 전국을 위협했고, 도로 요목마다 <소나무 이동 감시초소>까지 만들어 확산 감염을 막으려는 활동이 결사적 이였으나 아직 끝나지 않는 싸움이 진행 중이다.
이들 병충보다 더 소나무에 무서운 적은 화마(火魔)이었다. 우리는 대망의 새 천년에 들어서서 강원도 속초. 강릉지방의 해마다 연이은 대 산불을 경험 했다. 그 주된 피해자는 아까운 소나무였다. 생각해보니 소나무를 헤치는 주범은 병충도 산불도 아닌 바로 우리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사람의 무관심과 정책적 관리 부족, 사람의 부주의로 생기는 재난, 즉 인재(人災)이란 말이다.
우리는 가끔 산림 전문가나 산림청 책임자들로부터 실로 가슴 떨릴 정도의 무서운 소리를 듣는다. “우리나라에 소나무는 앞으로 90-100년 이내에 사라질 것이다”라는 예언. 그 이유가 지구 온난화 현상과 산성비 병충 해 때문이라 한다.
소나무 없는 대한민국은 상상할 수도 없고 상상하기도 싫다. 소나무 없는 산. 소나무 없는 명승. 절경. 산수화, 소나무 없는 고향은 상상할 수 없다. 소나무는 대한민국의 아이콘 이다.
소나무가 없으면 그럼 애국가도 고쳐야하고-
지금부터라도 우리 모두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원인 제거에 작은 일이나마 힘을 보태야 한다. 우리의 표상, 우리의 기계를 굳건히 지켜나가도록 소나무를 위한 정성을 모으자.
<다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