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에 부르는 노래
강 문 석
축약어가 난무하는 세상에 신조어까지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고 있어 정신이 혼미할 정도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를 ‘망팔’이라 한다니 거기에 딱 해당되는 사람이 모르고 있다간 낭패를 당할 것 같아 얼른 챙겼다. 그런데 망팔이란 나이는 바라본다는 망望이 사라진다는 망亡이 되더라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문단 말석에 겨우 이름을 올리고 있는 망팔인생에게 도착한 ‘나의 삶 나의 문학’이란 주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좀 무겁게 느껴진다. 이렇게 자신감 없는 소리가 나오는 걸 보면 아직도 문학에 대한 소양이 제대로 영글지 못했다는 걸 스스로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인생 황혼에 이른 사람에게 살아온 날들을 문학과 엮어서 반추해볼 수 있게 한 원고청탁자의 제의는 받아들이는 게 도리일 것 같다. 청탁자는 힘든 여건에도 멈추지 않고 문예지 발간에 쏟는 열정이 남다르다는 걸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인터넷카페와 블로그 덕분에 그 전에 비해서 글쓰기는 많이 수월해졌고 마음만 먹으면 지인들과 글을 나누어 읽기도 편리한 세상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풍광이 빼어난 명승지나 대도시에서 펼치는 축제현장을 찾아 자연과 사람을 카메라에 담은 후 나름대로의 감회를 써서 포토에세이를 만들어왔다.
중간에 서울 D대학에서 학습한 ‘여행가 과정’도 글을 쓰는데 도움을 주었고 젊은 날부터 카메라를 가까이했던 것도 작품을 만드는데 보탬이 되었다. 그런데도 글은 쓰면 쓸수록 점점 더 밋밋해진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진을 없애더라도 제대로 된 글로 읽는 이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싶었다. 양보다 질을 생각하면서 글쓰기에 매달리지만 마음대로 되질 않는다. 일찍이 글을 쓰는데도 왕도는 없다고 했다. 무조건 많이 읽고 많이 써보는 수밖에 없다는 것. 하지만 많이 읽고 많이 쓴다는 것도 말만큼 쉽지는 않았다.
직장을 떠나온 20여 년 전 글쓰기 공부를 시작했다. 부산의 두 국립대학 사회교육원에 등록하여 소설과 수필을 그리고 K신문사 문예창작교실에서 시 쓰는 법을 배웠다. 젊은 날부터 생각해왔던 기회가 닿는다면 문학을 제대로 공부해보자는 소망을 이룬 것 같았지만 거기까지였다. 무엇보다 나이가 들면서 줄어든 감수성이 문제였다. 그런데도 부산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받은 건 다소 의외였다. 소속 문학단체의 권유에 따라 멋도 모르고 기금을 신청했다가 생긴 일이다. 작품집은 70편 수필을 모아 7백 권을 찍었으니 그 책을 지인들에게 나누느라 진땀을 흘렸다.
책에 실린 대부분 글들은 이미 카톡을 통해서 배달된 것들이었고 종이에 인쇄된 책으로 묶었다는 차이만 있었다. 첫 수필집 발간 이후 4년 동안에 다시 두 권을 묶을 수 있는 분량의 글들이 쌓였다. 책을 만들기 위해선 교정도 필요하고 서문과 발문도 써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된 노릇인지 그마저도 의욕이 생기질 않는다. 솔직히 나에게 보내오는 문단 사람들의 수많은 책들도 난 제대로 읽지를 못한다. 표제작을 훑어보고 마음에 들어야 제대로 읽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독자치곤 보통 까다로운 독자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보니 내 책도 다른 사람들에게 제대로 읽히게 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삶도 문학도 돌아보면 참 아득히 먼 길이었다. 질곡의 세월을 용케도 견디며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마저 든다. 유년의 고향집이 떠오른다. 아버지를 앗아간 사변을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초등학교 입학하자 바로 터진 동란으로 보금자리였던 도시를 떠나야했고 피란에서 돌아와서는 외가가 있는 시골을 전전하다 서당까지 경험했다. 서당에선 동네 청년들이 모여 호롱불 밑에서 천자문을 배우고 있었다. 다시 돌아온 도시의 초등학교에서 글쓰기를 시작한 건 지금 생각해도 참 불가사의했다.
일주일에 한차례씩 펴내던 대구매일신문 ‘아동문화’란에 동시와 산문을 실었기 때문이다. 나의 이름이 든 글이 활자화되어 신문에 실리는 것이 신기했고 가난한 동심엔 적지 않은 위안이 되기도 했다. 중학에 입학하자 학교에선 날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변론부에 집어넣었다. 그러고 딱 한 번 지도교사가 써준 것 말고는 내 손으로 직접 웅변원고를 써야만 했다. 원고를 쓰기 위해선 신문이나 잡지를 뒤지고 정치인들의 유세장까지도 기웃거려야 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지만 중학생 주제에 제 아무리 끙끙거리면서 쓰더라도 원고 내용이야 얼마나 유치찬란했으랴.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지금도 나의 어쭙잖은 글마저 웅변원고를 쓰면서 몸에 달라붙은 비판의식이 부지불식간에 스며드는지 따스한 온기가 적다는 말을 듣는다. 학창과 사회를 통틀어 시로서 상을 받은 건 딱 한차례. 고향에서 시 문화원이 주관한 중고생 한글시백일장에서였다. 드높은 가을하늘 아래 공원 바닥 맨땅에 넓게 퍼질러 앉은 남녀학생들은 그 옛날 과거시험을 치루는 선비들처럼 시를 읊었고 문예반이 아닌 내가 차상을 차지하자 한동안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때는 전기기술자협회가 발행하는 회지에서도 문예작품란을 만들었다.
그 바람에 수필과 시를 그곳에 실을 수 있었고 글을 통해 오래 전 헤어진 사람들도 다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으니 감지덕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0년대 들어 직장에서 간행물을 펴내기 시작하자 거기에도 글을 썼다. 국운이 한창 상승하는 시기였기에 우리가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을 겁도 없이 주저리주저리 읊어댔다. 그런 인연으로 서른 무렵엔 본사 홍보실에서 오라는 연락까지 받았다. 그때 만약 홍보실 근무를 시작했더라면 문단에 일찍 이름을 올리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직업작가로 나서지 않는 한 그게 무슨 소용이 될까 싶었다. 그런데도 잠재적으로는 내가 걸어온 가시밭길 인생을 문학작품으로 남기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작품을 쓰기 위해선 미련 없이 직장을 벗어나야 하는데 그럴 용기까진 없었던 것이다. 문학기행으로 작가 박완서의 아치울마을 자택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마흔에 이르러 늦깎이로 등단했지만 치열하게 글쓰기에 매달려 우뚝하게 선 작가로 우리는 그를 기억하고 있다. 글 쓰는 시간을 빼고는 호미를 들고 산다는 전원주택 마당에서 문답식 문학토론도 가졌고 지하에 골방처럼 마련된 그의 작업실도 둘러볼 수 있었다.
그곳엔 자식과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쓸쓸한 노년의 삶이 있을 뿐 작가로서 눈부시게 누리는 행복감은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마지못해 살아가는 신산한 삶으로 비쳤다. 전란을 맞아 개성에서 서울로 피란하여 질곡의 삶을 살아낸 때문인지 그는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지나온 날들은 그에게 형극과도 같았다는 걸 짐작케 했다. 그날 우리 일행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부산행 차안에서 그와 친자매처럼 가까이 지내는 작가 박경리의 부음을 들었고 박완서 작가가 장례위원장을 맡았다는 소식은 저녁뉴스에서 접했다.
어제도 오늘도 인생길에서 만나 추억을 쌓으며 가까이했던 이들이 하나둘 자꾸 먼 길을 떠난다. 생자필멸이라 했으니 어찌 죽음을 피할 수 있겠는가. 한 분씩 떠날 때마다 어느 성직자 묘역에 붙었던 ‘오늘은 내게, 내일은 네게’라는 죽음에 대한 경구를 떠올리게 된다. 그동안 문학을 합네 하고 몇 편의 단편을 끄적거리긴 했지만 세상 끝나기 전 살아온 삶을 오롯이 담은 한 편의 장편소설을 세상에 내놓고 떠나고 싶다. 장편을 위해 하루하루 스스로에게 채찍을 드는 자신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