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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로 보는 한국의 1인당 GDP 변천사
미래는 꿈꾸는 자의 몫이다
⊙ ‘하면 된다’와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이
경제성장의 자원이었다
⊙ 돈을 벌기 위해 하루 16시간 노동과 잔업, 야근을
기꺼이 감수했으며 눈물 겨운 공순이·공돌이
神話를 만들었다
가난은 자부심이다.
한국전쟁의 상흔을 이겨낸 자부심은 가난이었다.
6·25는 인류역사상 6번째로 참혹한 전쟁이었다.
옷을 뒤집어 털면 깨소금 같은 이가 쏟아지던 시절,
배고파 몸부림치던 절망을 이겨낸 힘이 바로 가난이었다.
가난 앞에선 누구도 책임과 무책임을 따져 묻지 않았다.
가난은 동포끼리 가해진
폭력과 패악과 모욕을 이겨내게 했다.
퇴행과 파탄의 역사 속에
신음했을 망정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가난 때문이었다.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그 힘이 ‘기적’을 만들었다.
원조물자가 들어오자 마다하지 않았다.
솔직하게, 살려달라 발버둥쳤다.
수치스럽게 생각하기 앞서 복구의 삽날을 먼저 들었다.
‘하면 된다’는 터무니없는 희망을 부르짖었다.
그 희망이 끊어진 한강다리를 이었고
비료·설탕공장을 새로 지었으며
세상에서 가장 빨리 고속도로를 놓았다.
돈을 벌기 위해 하루 16시간 노동과 잔업,
야근을 기꺼이 감수했으며
눈물 겨운 공순이·공돌이 神話(신화)를 만들었다.
어디 그뿐이랴. 사막의 해충과 싸우며
독일의 캄캄한 막장에서 검은 진폐와 맞서 싸웠다.
그리고 우리는 승리했다.
그 발판 위에 4만 달러의 꿈을 꾼다.
검정고무신 / 1950년 |
6・25 전사자 철모 / 1950년 |
폐허 위에서 ‘숟가락 몽댕이’ 하나로
다시 일어설 즈음,
한국의 공식적인 1인당 GDP 수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GDP 통계는 1970년부터 집계됐기 때문이다.
다만 1953년의 1인당 GNP는 67달러로 기록돼 있다.
세계에서 몇 번째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살기 위해 ‘일밖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외국의 원조물자로 연명하던 시절이었다.
1950년대 당시 수출품은 마른오징어, 한천, 김 등
식료품이 대부분이었고 중석과 흑연, 철광석 등
광산물이 중심이었다.
1955년 충주비료공장 起工(기공)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국내자본 2억7500만원에다
차관 3333만8000달러가 투입된
국내 최초의 현대식 화학비료 공장이었다.
이것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사업의 핵심인
석유화학공업 건설의 추진체가 된다.
1차 화폐개혁 / 1953년 |
전쟁고아를 위한 구호품 전달 / 1954년 |
충주비료공장 / 1955년 |
‘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발표된 것은 1962년 1월 13일.
故(고)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에 쓴
<국가와 혁명과 나>란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등 객차에서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
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
경제 후진성 극복과 국민경제의 자립성장을
이루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경제성장 구호가
‘고운 손으로 살 수 없다.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자’였다.
‘한강의 기적’은 그런 피와 땀에서 나왔다.
그해 2월 수출입국과 공업입국의 깃발 아래
울산공업센터가 문을 열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첫 삽이었다.
1968년까지 석유화학업종 관련 공장 13개가 들어섰다.
울산은 초기 박정희의 개발신화가 서려 있는 곳이다.
울산 공업센터 기공식 / 1962년 |
세계적인 碩學(석학) 새뮤얼 헌팅턴이 2001년 9월 펴낸
<문화가 중요하다(Culture matters)>의 서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1990년대 초, 나는 1960년대 당시
한국과 가나의 경제상황이 아주 비슷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서 깜짝 놀랐다.’
양국의 1인당 GNP 수준이 비슷했다.
1차 제품(농산품), 2차 제품(공산품),
서비스의 경제 점유 분포도 비슷했다.
당시 한국은 제대로 만들어 내는 2차 제품이
별로 없었고 상당한 경제 원조를 받고 있었다.
30년 뒤 한국은 세계 14위의 경제규모를 가진
산업강국으로 발전했다.
현재 가나의 1인당 GNP는 한국의 15분의 1 수준이다.
새뮤얼 헌팅턴은 ‘문화’가 결정적 요인이라고 진단했다.
‘한국인들의 검약, 투자, 근면, 교육, 조직, 기강,
克己(극기)정신 등이 하나의 가치로
시너지효과를 발휘했다’는 것이다.
金秀坤(김수곤) 前(전) KDI 부원장은
“호랑이와 사자가 싸우면
배고픈 동물이 이긴다”고 말했다.
1960년대 초 한국의 호랑이들은 너무나 굶주려
먹고사는 것을 해결할 수만 있다면
어떤 고통이라도 감내할 자세가 돼 있었다.
농촌에서 무작정 상경한 젊은이들은
노동 악조건과 밤샘 노동에 구애받지 않고 죽도록 일했다.
죽어 돌아온 派獨 광부
독일로 광부와 간호사를 보낸 것도
이즈음인 1960년대 초였다.
1963년 派獨(파독) 광부 500명 모집에
4만6000명이 몰려들었다.
상당수가 대학졸업자와 중퇴자들.
당시 남한 인구 2400만명,
정부공식 실업자 숫자만 250만명이 넘었다.
이들은 독일 탄광의 지하 1000m와 3000m 사이
막장에서 기꺼이 석탄가루를 마셨다.
파독광부 / 1963년 |
1966년 12월, 3년의 고용기간을 채우고
142명의 파독 광부 1진이 귀국했다.
거의 전원이 골절상 병력을 안고 돌아왔다.
개중에는 사망자도 있었고, 失明(실명)한 이도 있었다.
간호사 언니·누나들의 사정도 비슷했다.
1966~76년 독일로 건너간 한국 간호사가 1만30명,
광부들은 1963~78년까지 7800여 명이 건너갔다.
이들의 송금액은 연간 5000만 달러로,
한때 GNP의 2%대에 달했다.
그들의 희생이 한국경제의 저력이 됐다.
1970년이 밝았다. 당시 1인당 GDP는 254달러.
경제성장률은 8.8%였지만 경상수지는
-6억2250만 달러로 여전히 적자를 면치 못했다.
포철1기 공사 착공식 / 1970년 |
세계 최단시간 내 완성한 경부고속도로가
개통한 것도 1970년 7월이었다.
착공한 것이 1968년 2월 1일.
2년5개월 뒤 428km를 뚫은 것이다.
故(고) 鄭周永(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총칼이 없을 뿐 전쟁이었다.
나는 흑자를 포기, 명예를 선택했다”고 증언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 1970년 |
이듬해 1971년 새마을 운동이 시작됐다.
새마을 운동은
‘하면 된다’와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줬고
이것이 경제성장의 정신적 資産(자산)이 됐다.
새마을운동 / 1971 |
1973년 7월 3일 경북 포항에서 준공된 ‘포철 제1기’ 설비는
민족의 에너지에 불을 붙인 일대 사건이었다.
1970년 4월 첫 삽을 뜬 지 3년 만의 결실이었다.
朴泰俊(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성공 아니면 죽음뿐’이라는 각오로
一貫(일관) 제철소 건설의 첫 삽을 떴다”고 회고했다.
사막의 독거미와 해충과 싸우다
1974년은 중동 건설시장에 진출한 첫해로 기억된다.
사막 한가운데 캠프를 치고 모래 바람과 독거미,
전갈, 해충과 싸워가며 오일 달러를 벌어 들였다.
살기 위한 몸부림은 사막의 열기마저 뛰어넘었다.
삼환기업 崔鍾煥(최종환) 명예회장은
“중동 건설시장 개척은 ‘한강의 기적’을 이룬
1970~80년대 한국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중동 건설 노동자들 / 1974년 |
1977년은 1인당 GDP가 처음으로
1000달러를 돌파, 1034달러를 기록한 해다.
동시에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한 해이기도 하다.
1964년 수출 1억 달러를 넘은 뒤 13년 만이었다.
당시 상공부장관이던 崔珏圭(최각규) 장관은
“1980년을 목표로 전력투구했던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3년 앞당긴 쾌거였다”며
“개도국 경제개발 전략의 모델이 됐다”고 회상했다.
수출100억달러 달성 / 1977년 |
1인당 GDP가 2000달러를 넘은 것은 6년 뒤인 1983년.
그해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D램이 개발됐다.
반도체 산업이 날개를 달게 되면서 이후
전자산업과 IT산업이 한국경제를 이끌게 된다.
모래성분에 불과한 실리콘 덩어리가 한국인의 손으로,
인간의 지식과 감정을 담아내는 도구가 된 해였다.
64KD램 개발 / 1983년 |
1986년은 무역흑자의 元年(원년)으로 기록된다.
5차 5개년 경제개발 계획을 마무리 짓던 해였다.
1인당 GDP는 2643달러.
한국의 수출이 수입을 처음으로 넘어
49억940만 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金滿堤(김만제) 당시 경제부총리는
“경상수지 흑자와 물가안정이란 두 마리 토끼를
최초로 잡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흑자의 축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1990년 적자로 돌아선다.
그러나 1인당 GDP는 6147달러를 기록,
6000달러 고지를 넘어선다.
수출품목도 1980년 의류·철강판·신발에서,
1985년은 선박·의류·신발,
1990년 들어서는 반도체·신발·영상기기로 바뀌게 됐다.
반도체가 최대 수출품목으로 도약하게 된 것이다.
黃昌圭(황창규) 前(전)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사장은
“삼성전자가 수출하는 반도체 박스에는
삼성 로고가 없었다”며
“같은 무게의 금보다 5배 이상 비싸,
유통과정에서 도둑들의 표적이 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1995년 1인당 GDP 1만 달러 달성
1인당 GDP 1만 달러 달성은 1995년에야 가능했다.
1만1472달러.
홍콩은 1987년, 싱가포르는 1989년,
타이완(台灣)이 1992년에 1만 달러 고지를
넘은 것에 비해 다소 늦었지만
한국경제가 아시아의 4龍(용)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일본은 4만1823달러로 4만 달러 시대를 열었다.
당시 세계은행(IBRD)은 ‘아시아 경제 기적’의 모델로
한국과 타이완을 선정했다.
덧붙여 ‘지구촌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과
소득 재분배를 실현한 나라’로 평가했다.
1996년 1만2197달러를 거쳐 세계 29번째로
OECD에 가입, 축포를 쏘았다.
하지만 IMF라는 거대한 파도가 도사리고 있음을
예견하진 못했다.
IMF 노숙자 / 1997년 |
이듬해 1997년 IMF가 터졌다.
IMF 구제금융. 소설가 韓水山(한수산)은
“성장만이 우리의 것으로 알았던
황금시대의 끝은 너무나 황망했다”고 썼다.
大宇(대우)와 金宇中(김우중) 신화가 몰락했고
150만의 실업대란으로 실업자들이 거리로 쏟아졌다.
1998년 1인당 GDP가 7355달러로 곤두박질쳤다.
視界(시계)는 흐렸고 전망은 불투명했다.
사람들은 장롱 속 ‘금 반지’를 내놓았고
금융·기업·노사·공공 4大(대) 부문 개혁에
스스로를 내맡겼다.
금모으기 / 1998년 |
침몰하던 한국경제는
1998년 바닥을 치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1999년 9438달러를 거쳐 2000년 1만1349달러로
다시 1만 달러 고지를 奪還(탈환)한 것이다.
2000년은 IMF라는 혼란과 혼동의 파고를 넘긴
새천년이었다.
2000년은 중화학공업의 비중이
처음으로 80%를 넘어선 시기다.
자동차·조선·휴대폰·반도체와 같은
고부가가치, 첨단자본 제품,
가격보다는 품질, 디자인 및 브랜드 중심의
제품으로 빠르게 재편됐다.
수출품목 중 반도체·컴퓨터·자동차가
1~3위를 차지했다.
4강 월드컵 신화 / 2002년 |
2001년 1만655달러로 주춤하다가
韓日(한일)월드컵이 열렸던 2002년 1만2093달러,
2005년에는 1만7547달러,
2006년 1만9693달러를 기록했다.
2006년은 세계에서 11번째로
연간 수출 3000억 달러를 달성한 해였다.
100억 달러 수출(1977년) 이후 29년,
1000억 달러 수출(95년) 이후 11년,
2000억 달러 수출(2004년)을 기록한 지
2년 만의 성과였다.
부산항(수출 3000억 달러 달성) / 2006년 |
2만 달러 고지에서 4만 달러를 꿈꾸다
2007년 드디어 2만1655달러로
‘2만의 고지’를 점령했다.
이듬해 2008년 1인당 GDP 순위는
다소 주춤(1만9106달러)했지만
그해 수출 4000억 달러를 달성했다.
이대로라면 2011년(이르면 2010년)
5000억 달러도 어렵지 않아 보인다.
수출4000억 달러 달성 / 2008년 |
수출 5000억 달러를 달성한 국가는
미국·독일·중국·일본 4개국에 불과하다.
李熙範(이희범) 前(전) 한국무역협회장은
“일본이 수출 3000억 달러에서 5000억 달러로
가는 데 13년이 걸렸지만
한국은 절반으로 앞당길 수 있다”고 전망했다.
광양 컨테이너 부두 / 2009년 |
2010년 1월 ‘2만 달러 고지’에서
4만 달러의 神話(신화)를 꿈꾼다.
지금까지 달려온 길을 두 곱 이상 달려야 가능한
일이지만 미래는 꿈꾸는 자의 몫이라 했던가.
지난 60년의 한국경제 역사가
시련을 극복하는 신화가 아니던가.
전쟁의 상흔을 이겨낸 가난의 자부심이 아니던가.
하여 다시 ‘4만의 꿈’을 꾼다.
꿈을 이룰 大戰略(대전략)을 세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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