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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고후 10:1-11
1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2 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3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7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9 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 같이 생각하지 않게 함이라
10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11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일이 같은 것임을 알지라
고후 10:1-11 / [바울의 자기 권위에 대한 소신] 여러분에게 드릴 부탁이 있습니다. 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겸손하게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아직도 여러분 가운데 `바울은 멀리 떨어져서 편지를 쓸 때는 아주 담대한 것 같지만 가까이 와서는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겁쟁이야!'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 그래서 하는 부탁이지만, 부디 내가 여러분에게 갈 때 엄하게 큰소리를 내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그렇더라도 나는 내 행동이나 말이 단순히 보통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단호하게 대할 작정입니다. 3) 내가 보통사람처럼 약한 인간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싸움에 이기기 위해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4) 나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무기가 아닌 하나님의 강력한 무기를 사용하여 악마의 요새를 무너뜨리고 5)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교만한 사상과 사람들의 눈에서 하나님을 가리우는 온갖 장벽을 부수어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불순종하는 자들을 사로잡아 하나님께 되돌아가게 하고 그들의 마음을 돌려 그리스도께 온전히 순종하게 할 것입니다. 6) 나는 이 무기를 써서 맨 먼저 여러분을 온전히 그리스도께 순종시킨 다음 나머지 모든 불순종하는 자들을 처벌하는 데 사용할 것입니다. 7) 문제는 여러분이 겉만 보고서 나를 연약하고 무력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데에 있습니다. 누구든 내게 그리스도의 능력과 권위를 보여 달라고 요구해 보십시오.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습니다. 8) 주께서 내게 권위를 주신 것은 여러분을 도우라고 주신 것이지 상처를 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소 이 권위를 자랑하고 내세운다 해도 잘못될 것이 없습니다. 9) 그러니 내가 편지로 여러분을 꾸짖는 것을 단순한 호통쯤으로 쉽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10) `바울의 편지는 무시해 버려. 큰소리는 치지만 그건 으름장일 뿐이야. 여기 온 다음에 만나보면 알겠지만 그렇게 별볼일 없고 형편없는 설교자도 없을걸'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1) 이런 사람들은 이번에 내가 가서 편지에 쓴 그대로 엄하게 다스릴 것입니다.
본문은 고린도 교회 안에 대적자들이 잠입하여 초래한 위기를 사도 바울이 대처하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진지하게 간청하며 개인적인 변호를 합니다.
간절한 부탁(1-6) 어떤 사람들은 바울에 대하여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하다며, 실제로 만나면 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떠나 있으면서 편지로 자기 의견을 밝힐 때는 하고 싶은 말을 다한다고 비꼬았습니다. 바울은 대적자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무엇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이런 왜곡되고 악의에 찬 비난이 나오게 되었는지 차분하게 설명합니다. 이 과정에서 성도의 삶에 대한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가 드러납니다.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사도권에 관하여 가르침을 줄 때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온유하고 관용하는 어조를 본받아서 말하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성도의 기본적인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반면에 “육신을 따라 행”한다는 말처럼 자기 욕심과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이 자기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에 새로운 비유를 덧붙여 설명합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말입니다. 모순되어 보이나 성도의 삶이 가진 신비를 품은 말입니다. 성도의 삶은 이러한 삶을 이루는 ‘싸우는 것’으로 바울은 규정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살아내야 하는 삶을 전쟁에까지 비유하면서 ‘포위전쟁’으로 성을 함락시키는 과정처럼 소개합니다. 여기서 성도의 무기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도의 권위(7-11) 바울은 자신을 비난하는 것에 대응하면서 사도의 권위를 설명합니다. 대적자들은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진실한 종이 아니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바울이 보낸 편지와 그의 외모와 언변까지 지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적극적으로 변호하면서 자신이 그리스도께 속했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자랑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대적과 자신을 분명하게 비교하여 판단하라고 합니다. 바울의 의도는 대적자들을 그리스도께 속한 것으로 인정한다면 마땅히 자신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주신 사도의 권위는 교회를 세우는 역할입니다. 모두가 동역하는 모든 직분은 계급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적용: 누구나 비난을 대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화살이 되어 마음에 깊이 박히기 때문입니다. 대응의 방법은 일일이 대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덴젤 워싱턴은 의심할 여지없이 오늘날 가장 존경 받는 배우 중에 한 명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성직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린 나이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라면서 하나님에 대한 회의에 찬 질문을 하기 시작했고 곧 신앙을 잃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하나님을 떠났던 그는 다시 주님께 돌아왔고 이후로는 기독교 신앙을 알리며 복음을 자랑스러워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CBN NEWS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잘못을 많이 했지만 하나님은 그런 나를 잘 아시는 분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 설 교 >
하나님이 쓰시는 리더
고후 10장 / 최영기목사
오늘 설교의 제목은 ‘하나님이 쓰시는 리더’입니다. 어떤 분은 제목을 읽으면서 자신과 상관이 없는 설교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자신은 리더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리더입니다. 사회나 직장에서 높은 직위를 차지하고 싶은 사람만이 리더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결혼해서 아내가 있다면 아내를 리드할 리더입니다. 자녀를 가진 어머니라면 자녀를 리드할 리더입니다. 어린이 주일 학교를 가르치면 리더입니다. 직장에서 자신보다 늦게 입사한 사원이 하나라도 있으면 리더입니다. 가게에 종업원이 하나라도 있으면 리더입니다. 초등학교 이상의 학교를 졸업해서 후배가 하나라도 있으면 리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리더가 되느냐 안 되냐가 선택이 아니라 좋은 리더냐 나쁜 리더냐가 선택입니다. 리더는 한 마디로 영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영향력을 사용하여서 공동체의 목표를 달성하면 좋은 리더입니다. 영향력을 사용하여서 부패와 파괴를 가져오면 나쁜 리더입니다.
사도 바울은 진정한 리더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 분의 리더십에 의하여 복음이 세계 각처에 퍼지는 기초가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이러한 영향력이 사도 바울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쓰임 받았기 때문에 이처럼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쓴 편지를 통하여서 하나님이 쓰시는 리더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Ⅰ. 유순하다
주님이 쓰시는 리더는 유순합니다. 사도 바울을 깔보일 정도로 유순해 보였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1, 10절). 이런 태도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리더십과 많이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남에게 영향력을 미치려면 가능하면 깔보이지 않고 위압감을 주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순하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1. 온유하다
온유는 예수님이 자신을 묘사한 성품 중의 하나입니다(마 11:9). 또 구약에서 가장 큰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모세도 그의 성격을 특징짓는 것이 온유였습니다(민 12:3). 신약에서 예수님, 구약에서 생명의 삶 강의 시간에 말했지만 온유란 부드럽다는 의미도 있지만 가장 큰 의미는 자신이 파워가 있으면서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온유라고 말합니다. 온유의 가장 큰 예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든지 십자가에서 뛰어내리던지 아니면 천사들을 불러서 괴롭히는 자들을 멸망시킬 수가 있었지만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참고 고난을 받으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참된 온유의 모습입니다.
온유가 가진 파워를 쓰지 않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쓰시는 리더가 되기 위하여서는 일단 영향력을 가져야합니다. 그래서 저는 학생들은 기회만 되면 최고 학위를 취득하기를 원하고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은 최고 지위까지 승급이 되기를 원하고 사업 능력이 있는 사람은 큰 기업을 이루기를 원하고 학계에 있는 사람은 큰 학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그 영향력을 주와 이웃을 위해 사용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권하지는 않습니다. 지난 주에 돈이 파워가 있다고 했는데 지위나 권력도 파워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겠다고 하지만 축적하는 과정 가운데에 순수를 잃어버리고 파워를 보유한 후에는 믿지 않는 사람과 똑 같이 행동하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청지기 의식만 있다면 영향력을 가져야합니다. 이런 영향력을 주와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고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을 때에 하나님이 쓰시는 온유한 사람이 됩니다.
온유가 성품이라기보다 태도라면 배우고 개발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온유할 수가 있습니까? 요구하는 대신에 부탁하는 습관을 들이시기 바랍니다. 명령하는 대신에 설득하는 습관을 들이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요청 대신에 부탁, 명령 대신에 설득을 연습하여서 하나님이 쓰시는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하겠습니다
2. 관대하다
유순하다는 것은 또한 관대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대하다는 것은 상대방의 의견을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관대한 사람을 하나님은 쓰십니다. 한국 인터넷 신문을 보면 한 기사가 뜨면 많은 사람들이 댓글을 올리는데 표현이 거의 다가 폭력적입니다. 모두가 다 흑백 논리입니다. 나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만이 옳고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은 다 무식한 사람에 매국노에 정신병자입니다. 이런 흑백 논리를 가진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주변에서 불평이나 쏟아놓는 사람이나 되지 결코 리더는 못 됩니다. 리더는 관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쓰시는 리더가 되기 위하여서는 흑백 논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상대방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의견을 가능하면 수용하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서는 동의를 하지는 않더라도 상대방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를 이해하려고 해야합니다. 동의를 하지 않더라도 상대방 의견에 일리가 있음을 볼 수 있어야합니다. “나는 그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도데체 이해가 안 돼!”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말도 안되는 말을 하지?” 이런 표현을 자신이 사용하고 있으면 자신이 흑백논리에 젖어있음을 알아야합니다.
흑백 논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서는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의견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할 뿐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의견에 의하여 자신의 의견을 수정하고 때로는 자신의 의견을 상대방의 의견으로 대치하는 연습도 해야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관대한 사람으로 변해갈 것입니다.
Ⅱ. 필요할 때 도전한다
하나님이 쓰시는 리더가 되려면 필요할 때에는 도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우습게 보일 정도로 유순했지만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면 강하게 도전하였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상처를 입을 정도로 강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기 때문에 뒷수습을 위하여 고린도 후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또 사도 바울은 자신의 강한 태도를 1, 2, 6절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에 도전합니까? 공동체에 균열이 가려할 때입니다. 어떤 리더는 사람과 부딪치는 것을 싫어하여서 공동체를 깨는 사람이 있어도 방치하는데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리더가 되지 못합니다. 저는 남하고 부딪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그러나 리더이기 때문에 싫지만 의견이 다른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도전을 합니다. 물론 잘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즉시즉시 도전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정말 공동체에 파괴가 오는지 관망하기도 하고 상대방이 회개하기를 기다려주기도 해야겠지만 복음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것이 분명하고 공동체에 파괴가 오는 것이 분명한 데도 여러 가지 두려움 때문에 방관하거나 방치하는데 그래서는 하나님이 쓰시는 리더가 되지 못합니다. 도전해야할 때에는 도전해야합니다.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서에서 잘못하고 있는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 바로 잡아주라고 권하고 있습니다(갈 6:1).
Ⅲ. 권위를 사용한다
하나님이 쓰시는 리더는 권위를 잘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특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권위를 주셨습니다. 일일이 구절을 찾지는 않겠지만 성경에 보면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했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 했고, 종들은 상전에게 순종하라 했고, 교인들은 지도자들에게 순종하라 했고, 백성들은 정부에 순종하라 한 것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왜 순종해야합니까? 하나님이 권위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절에서 권세에 순종하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로마 황제를 의미합니다(롬 13:1). 로마 황제가 그렇게 착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다스릴 권세를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 부모, 교회 지도자들은 권위를 가진 사람입니다. 이 권위는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부여한 것입니다. 필요할 때에 이 권위를 사용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유순한 사람이라 권위를 사용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에는 사도로써의 권위를 행사하였습니다(8절).
리더가 자신에게 부여된 권위를 사용하지 않을 때에 비극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얼마 전 The Band of Brothers라는 TV 시리즈를 DVD로 만든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 전에 설교 중에 소개한 적이 있을 텐데 미 육군 공수부대 소속 어떤 중대원들의 참전 실화입니다. 여기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놀만디 작전에 성공하여 유럽을 공략하여 가면서 한 도시를 점령하고 있는 독일군들의 기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 한 장교가 등장을 하는데 이 장교가 공포에 질려서 명령을 내리지 않고 부대원들보고 마음대로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휘권을 갖고 있는 사람이 지휘권을 행사하지 않으니까 부대원들이 우왕좌왕하다가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마침내 주인공이 지휘권을 인계 받아서 이를 행사하여서 뒷수습을 하는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권위를 사용하지 않을 때 생기는 파괴적 결과의 좋은 예입니다. 그러므로 권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권위를 행사하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했으니까 부모는 자녀에게 권위를 행사합니다. 어떤 자녀들은 부모에게 반항하고 어떤 어린 자녀들은 어머니를 때리기까지 합니다. 그래도 가만 두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부모로써의 권위를 포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부모가 자녀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자녀들이 당장에는 불평을 하지만 나중에 고마워하고 존경하는 것은 이러한 부모의 권위를 행사하고 잘한 것은 잘했다 칭찬하고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꾸짖는 부모입니다.
어떤 부모는 자녀들의 친구가 되려고 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데 그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부모는 부모입니다. 친구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됩니다. 부모 특히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친구에게나 할 수 있는 자신이 모든 갈등과 집안의 어려움을 나누기도 하는데 이것은 자녀들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입니다. 지나친 부담을 지워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권위를 부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권위를 행사해야 합니다. 포기하면 안 됩니다. 목자라는 직책도 하나님이 주신 직책이라면 권위가 따릅니다. 이러한 권위를 사용해야 합니다. 목장 식구들 나이가 자신보다 높다고 눈치만 보며 잘못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가만히 있는 수가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됩니다. 개인적인 일에서는 연세를 존중해 주어야하지만 사역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주신 권위가 있으니까 이 권위를 사용해야합니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사랑으로 지적하고 원칙에 벗어나는 일을 하면 온유하게 그러나 엄하게 바로 잡아야합니다. 권위를 가진 사람이 권위를 사용하지 않으면 공동체에 파괴가 옵니다.
제가 서울 침례교회에 1993년도에 부임하였는데 그해에 멕시코 선교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때 팀장이 유재홍 집사님이었는데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제가 목사지만 선교지에선 집사님이 팀장이니까 제가 해야할 일이 있으면 저를 시키십시오.” 하나님이 팀장으로 세웠으니까 내가 목사라는 사실에 위축되지 말고 유집사님이 팀장으로써의 권위를 행사하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Ⅳ. 남의 영역을 존중한다
하나님이 쓰시는 리더는 남의 영역을 존중합니다. 사도 바울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에 의하여 개척된 교회입니다. 이곳에 와서 사람들을 선동하여 사도 바울에게 대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빗대어 사도 바울은 13-15절에서 자신은 하나님이 주신 한계 즉 영역 내에서 사역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리더들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허락하신 영역이 어디인지를 압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남의 영역도 존중해 줍니다.
교회에서 많은 문제가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기 때문에 생기는 수가 많습니다. 문제가 많은 교회에서 보면 장로님들이 목사님의 사역 영역을 침범을 합니다. 목사를 통하여 자신의 목회 꿈을 피워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집사님들이 장로님들의 사역 영역을 침범합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영역을 잘 지켜야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집사회의에서도 스태프 회의에서도 안건을 갖고 토의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사역부장이나 전문 사역부문에서 일하는 사람의 의견에 가장 큰 무게를 둡니다. 그것이 그의 사역의 영역이기 때문에 존중해주는 것입니다.
문제가 많은 교회나 단체에서 보면 자신의 영역에 속한 일은 소홀히 하면서 다른 사람의 영역에는 간섭을 하려 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저에게 가끔가다가 심방이나 상담을 요청하여 오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러할 때에 언제든지 “목자와 먼저 의논하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섭섭해 하는 것은 알지만 목자들의 사역 영역을 존중해주기 위함입니다하나님이 쓰시는 리더는 자신의 영역을 압니다. 허락하신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여 충성을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주신 영역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그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합니다. 우리는 다 이렇게 하여서 하나님이 마음 놓고 쓰시는 리더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도의 비판과 자랑
고후10장 1~ 절 / 이필재목사
우리가 고린도후서를 계속 보고 있는데 이 고린도후서를 목사들이 읽을 때는 다소 낙심이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바울이 계속 뭐를 변명하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왜 그런가? 반대파들이 생겼습니다. 반대파들이 바울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아주 험악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들 때문에 바울이 심적 고통을 많이 당했습니다. 거기에 대한 바울 자신의 이야기가 고린도후서에 계속 나오는데 10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자기의 사도직을 변호하는 그런 말씀으로, 10장 1절에서 끝까지 그것 때문에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성경 중에 아마 10장 위에 제목이 있는 성경이 있으실 겁니다. 제가 있는 성경에는 “바울이 자기의 사도직을 변호하다.”라는 제목입니다. 그런데 10장만 그런 게 아니라 계속해서 그랬잖아요? 계속해서 우리가 고린도후서를 수요일마다 본 내용으로 보면 바울이 이렇게까지 많은 말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그러면서 자기를 변호해야 될 일이 있었다면 이 비판의 정도가 아주 심각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 이렇게까지 나오고 “사이비” 이렇게 험악한 말도 했습니다. 그러면 목사들이 이 글을 볼 때 좀 낙심되는 부분이 생기는 것은 “그러면 나는 어떡하란 말이냐?” 이러는 것입니다. 바울과 같은 예수님 다음의 성자도 반대파가 생겨서 이렇게 고생을 많이 하고 성경에 기록으로 남을 만큼 자기를 변호하느라고 변호사 역할을 이렇게 열심히 했다면 그 바울 근처에도 못가는 우리 목회자들은 말할 것도 없잖아요? ‘사도의 직이 어렵긴 어렵구나.’ 목회자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노회장이라는 직분을 가지고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하는 1년 동안에 얼마나 골치가 아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장’자리를 참 싫어합니다. 그런데 저에게 ‘장’이 항상 옵니다. 안한다고 발뺌을 해도 할 사람이 없다는 소리로 항상 뒤집어씌웁니다. 어느 교회에 분쟁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러면 노회장이라는 사람은 반드시 조정 역할에 참여해야 합니다. 설교 준비하기도 바쁜데 우리 교회 문제도 아닌 다른 교회에서 분쟁이 난 복잡한 이야기를 양쪽 사람에게 다 들어서 조정 역할을 하는데 조정 역할이 됩니까?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한국 교회는 분쟁이 생겼을 때 원만하게 해결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분쟁은 결국 분리다.” 99퍼센트는 아마 분리로 해결이 되는 거 같습니다. 다만 어떻게 분리하느냐에 구체적 논의! 재산권 문제라든가 이런 것이지 다시 마음이 좋아져서 합쳐지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제가 경험한 것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분쟁이 났다고 하면 분리만이 해결 방법으로 늘 처리가 되었는데 이것은 우리 한국 사람들이 특별히 가지고 있는 너무 강한 민족성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양쪽의 이야기를 다 듣게 되는데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담임 목사 반대파에서 9가지 이유를 노회장한테 제시한 적이 있습니다. “노회장님! 이 이유가 정당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얼마나 이상한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그 목사 찬성파에서는 “우리는 바로 그 9가지 이유 때문에 목사님을 찬성하는 겁니다.” 이러니 이게 뭡니까? 결국 관점, 가치관의 차이 때문이지 결코 파렴치한 일이 생겨서 그런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아주 곤란해 진 것입니다.
자, 우리 10장에서 바울이 지금 거북스러운 표현으로 여러 가지 해명적 설명을 아주 길게 1절에서 18절까지 자기 변호하느라고 많은 일을 했는데 첫째 이유가 뭐냐 하면 반대파에서는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직계 제자 12명이 사도이지 바울은 12제자가 아니고 그 근처에도 안 가본 사람이고 오히려 깡패, 예수 믿는 사람을 다 때려잡았던 사람인데 어떻게 자기를 사도라는 명칭을 쓰느냐? 파렴치하다. 창피하지도 않느냐? 사도를 다 잡아 죽이던 사람이 내가 사도라고 나서니 이게 말이 되느냐?” 그래서 이렇게 반대하는 겁니다. “예수 믿으라고 전도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도라는 말은 쓰지 말라.” 이래서 바울 반대파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참 이상하지요? 그러면 어떻고 안 그러면 어떻습니까?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데요. 그래서 이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찬반이 생겨서 여기서 문제가 계속 터져나갔습니다. “사도라고 거짓말 하지 말라. 사도는 12사도로 베드로, 안드레 이런 사람들이 사도이지 자기는 군사들 데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때려잡으러 다녔던 사람이 자기가 무슨 사도라고 그러는 거냐? 예수님이 당신에게 언제 사도라고 임명하셨냐? 12사도만이 사도이다.” 이렇게 교인들이 반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찬성파 이야기는 똑같은 문제인데 “바울이 진짜 사도이다. 왜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이 직접 부르셨다. 초능력 사건을 경험한 사도가 진짜 사도이다. 그래서 다메섹 길가에서 하나님이 천사를 시켜서 예수님이 직접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하나님이 직접 소명을 주신 그게 직접 사도이지 베드로, 안드레는 고기 잡다가 예수님이 불러서 나중에 사도가 되었지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직접 하나의 계시를 통해서 불러내신 이 사람이 진짜 사도이지 무슨 소리냐?” 이 차이입니다. 같은 사건을 놓고 보는 시각의 차이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뿐만이 아니고 지도자는 항상 찬반의 평가를 받는 자리입니다. 이것은 어떤 지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똑같습니다. 우리가 “이명박 대통령” 하면 “아, 잘하십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최고로 못하십니다.” 말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든지 상관없습니다. 다음에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든 똑같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습니다. 지금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 방영한다고 해서 찬반이 있잖아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 제일 권위 있게 증거를 댈 수 있는 사람이 제가 텍사스에서 목회할 때 장로 장립을 저한테 받은 사람인데 이 사람은 하버드에서 이승만 연구를 했습니다. 그래서 가끔 TV에 나옵니다. 연세대학교 석좌교수로 있습니다. 저와 같이 휴스턴에 교회 세우고 30대 시절에 그 사람은 하버드 출신으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 말하려면 그 사람이 꼭 나옵니다. 그 사람이 지금 증거를 주어서 지금 KBS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데 하지 말라, 하라 찬반이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을 보는 사람은 “이승만 없이 대한민국은 없었다.” 이렇게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파에서는 “나라 망친 사람이다.” 4·19 데모한 사람들은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사건을 놓고, 같은 사람을 놓고, 같이 봤는데 차이는 항상 양쪽으로 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교회의 목회자들도 바울과 같이 항상 찬반이 있습니다. 이것은 목회자들이라면 누구든지 각오해야 합니다. 찬성 측과 반대 측은 항상 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 은퇴하신 다음에 미국에 오셔서 세미나 해달라고 부른 사람이 저입니다. “이제는 은퇴하셨으니까 우리 후배들에게 영원히 남을만한 목사님의 경험, 평신도들에게 도저히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해주시는 것이 목사님이 우리들에게 주실 수 있는 선물입니다.” “하겠다.” 그래서 오셨습니다. 한 장로교회 빌려서 “한국 목사들 누구든지 참석해라. 그런데 조건은 목사만 오라. 다른 사람은 오지 마라. 이것은 목회자에게만 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래서 했습니다. 제가 노회장을 해서 주최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한경직 목사님이 우리들에게 해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후배들이 나를 볼 때는 한경직 목사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저런 목사는 얼마나 좋을까?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고난당한 이야기를 해주겠다. 얼마나 나를 행한 반대파가 많았는지 모른다.” 그분이 내가 당한 것을 말할 테니 손들어보라고 하시는 겁니다. “내 죄를 1번에서 36번까지 적어 와서 내민 사람이 있다. 목사님! 이런 죄를 다 짓지 않았습니까? 여기 그런 사람 있다면 손들어보아라.” 그런데 한명도 안 드는 겁니다. 그런 일은 없었던 겁니다. 저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그랬더니 목사님이 뭐라고 대답하시느냐 하면 “내 죄가 36가지만 되겠습니까? 거기에 0을 몇 개 더 붙여야 되는데…. 말도 안 됩니다. 나는 죄가 더 많습니다. 더 연구해서 더 많이 가져오십시오.” 그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신학교 다닐 때 교장선생님이 새문안교회 강신명 목사님이셨는데 제가 그때 학생회장이었습니다. 이렇게 ‘장’이 항상 온다니까요. 그런 관계로 교장 선생님과 친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때는 중앙정보부에서 데모하느냐, 안하느냐 그것을 얼마나 감시하러 다녔는지 모릅니다. 낯선 사람이 와서 딱 앉아있으면 그것은 중앙정보부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이 교회와 단체, 학생을 주시했잖아요?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아주 멋진 사람이 항상 학생회가 아닌 것 같은데 교실에 와서 앉아서 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중앙정보부원이었습니다. 가짜 학생으로 가짜 서류를 가지고 감시원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공부하다가 성령을 받아버렸습니다. 전교생 앞에서 회개를 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누군지 이상하죠? 나는 중앙정보부원이었습니다. 여러분 감시해서 때려잡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때려잡는 게 학생회거든요. 저한테 와서 “이 회장! 무슨 운동할까봐 때려잡으려고 왔던 사람이요.” 그런데 회개하고 사표 내버리고 신학 공부해서 지금 아주 훌륭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보원들 많이 보내줄수록 좋습니다. 그런 때니까 교장 선생님이 신경을 아주 예민하게 쓰시잖아요? “학생회장! 교장실로 와라!” 그렇게 지시도 많이 하셨지만 사랑도 많이 받았습니다. 졸업식 날 교장선생님이 장로교회의 유명한 목사님이 10여명이 오셔서 여러 가지를 하시잖아요? 그 바쁜 졸업식 날 교장 선생님이 나를 찾으셨습니다. “야! 이필재 회장 어디 있냐?” 저도 교회에서 집사님들이 오셔서 환영해주고 꽃다발 주고 그러시잖아요? 뭐 먹으러 가자고 그러시는데 “이 회장! 교장 선생님이 찾으셔!” 그 바쁜 날 찾으셔서 ‘왜 그러시나?’ 생각하고 교장 선생님 사무실로 들어갔더니 봉투를 하나 주시는 거예요. 돈이에요. “내가 너를 언제 만날지 모르겠다. 그동안 수고 많이 했다. 이거 얼마 안 되지만 진학하는데 등록금에 보태라.” 저를 많이 생각해 주셔서 지금도 잊히지가 않아요. 그런데 강신명 목사님이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이 목회자 잠깐 그만 두고 여기 숭실대학교 총장을 하셨잖아요? “이 목사! 나와 한국 가자. 내가 숭실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미션스쿨의 총장이 되었는데 교목실장으로 가서 같이 좀 일하자.” 찾으러 오신 거예요. 그만큼 저를 배려하고 사랑하신 거예요. “내가 목회 하다가 말고 교목실장으로 가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거절했지만 그 강신명 목사님이 우리나라에서는 한경직, 강신명 그런 순서로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런데 우리에게 들려주신 것은 여러분에게 말 못할 정도로 아주 험악해서 “내가 목사 그만두려고 했었다. 이렇게 하느니 차라리 평신도 하는 게 훨씬 더 영광이고 하나님께 더 낫겠다.” 이런 말씀을 얼마나 하셨는지 모릅니다. 이런 큰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 많습니다. 지금도 보십시오. 우리나라의 세계적인 목사님도 고소, 고발, 신문에 많이 나오잖아요? 반대파는 항상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도 반대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잘못한 게 뭐가 있습니까? 병고쳐주고 복음 전하시고 잘못하신 게 하나도 없잖아요? 그런데도 반대파가 결국은 죽음의 자리로 예수님을 끌고 갔잖아요? 오죽했으면 예루살렘 초대교회를 30년 담임목사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감독이 야고보서에 “너희는 감독이 되지 말라. 선생이 되지 말라.” 이 말씀을 왜 남겼겠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이 세상을 제일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누구냐? 소시민입니다. 그래서 그 숫자가 제일 많은 겁니다.
그러면 바울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무엇이 있었기에 바울이 반대파들에게 심한 말을 들은 것인가? 그 첫째가 사도직이지 않습니까? “깡패 두목이 사도라고? 사도가 얼마나 거룩한 이름인데? 베드로, 안드레가 사도이지 자기는 날마다 때려잡고 사람들을 잡아 죽이고 스데반을 죽일 때 제일 날뛰었으면서….” 성경에 보면 스데반이 죽을 때 사울이라는 이름 한 사람 밖에 안 나오잖아요? 제일 열심을 냈기 때문에 성경에 나온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제는 내가 사도라고 하다니! 말도 안 된다.” 이러고 비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금 설명하는 것이 7절입니다. 7절을 우리 다 같이 읽어봅시다. 시작하겠습니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이 외모가 뭡니까? 바울은 12사도가 아니잖아요? 이게 외모입니다. 12사도는 외모가 좋습니다. 왜 좋으냐? “예수님이 직접 선택한 사도이다.” 얼마나 외모가 좋습니까? 아주 화려한 외모입니다. “나는 예수님이 직접 내 이름을 고유 명사를 불러서 사도를 시켜준 예수님의 12사도 중의 한 사람이다.” 이 이력서가 사실 큽니다. 그래서 베드로 성당이 생겼잖아요? 그래서 베드로가 1대 교황이 되었잖아요? 외모가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아니잖아요? 그 외모가 없는 겁니다. 그 12사도의 간판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비판을 받고 있는 겁니다. “외모만 보는도다.” 했는데 사람들은 외모만 보고 결정을 하거든요? 그래서 지금 이런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실제적 바울의 신체적 조건의 외모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바울은 참 고민도 많이 했고 실제로 사람들에게 받는 인정에 마이너스를 많이 가져왔습니다. 바울은 몇 가지 자신이 말한 약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체적 조건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옳다고 풀핏 주석에 나와 있는 말을 제가 소개하겠습니다. 그 주석에 이렇게 썼습니다. “바울의 얼굴 모양이나 신체적 조건은 얼핏 보면 참 못생긴 사람인데 자세히 보면 더 못생긴 사람이다.” 이게 뭡니까? 바울이 실제로 그렇습니다. 구체적으로 바울 연구회에서 말한 것에서는 이렇습니다. “그의 키가 1cm만 적었어도 난쟁이과에 속했다.” 요즘에 저는 큰 희망이 하나 생겼습니다. 저도 키가 작거든요? 키가 10cm만 컸어도 내가 아주 멋있는 사람이 될 뻔 했는데 168cm입니다. 그런데 러시아의 푸틴이 168cm입니다. 또 대통령이 된대요. 나폴레옹은 158cm랍니다. 그래서 ‘아! 키 작은 사람은 영웅이 많구나.’ 그랬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너무 작아서 1cm만 적어도 난쟁이과에 속하는 사람이고 그 다음에 머리통이 아주 큰데 짱구 머리랍니다. 그래서 마치 옆에서 바울을 보면 두 사람처럼 보였답니다. 그러니 얼마나 외모적인 약점이지요. 약간 정상이 아닌 듯 한 머리통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코는 들창코로 위로 치켜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마가 툭 튀어나와서 찡그리면 이마와 코가 붙는답니다. 눈은 너무 작아서 떴는지 감았는지 분간이 잘 안가고 그 눈에 안질이 너무 심해서 늘 진물이 흘러서 불안해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눈물 닦기에 바빴답니다. 사람이 눈을 똑바로 뜨고 시선을 마주치고 눈동자가 마주쳐야 반짝반짝 빛나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찔끔찔끔하면서 “그런가보다, 어쩐가보다.” 하면 그게 무슨 말이나 됩니까? 그러니까 외모는 볼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다가 그 사막기후는 피부가 깨끗지 못해서 보는 이가 늘 불편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세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게 바울의 외모입니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그러면서 변명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사회학적인 통계를 누가 낸 것을 신문에서 본 것입니다. 미남, 미녀가 있잖아요? 그런데 사실상 드물답니다. 여러분도 아마 인정하실지 모릅니다. 비율로 따지면 약 1천명이 모이면 그 중에 추천할 만한 사람 한 사람 내지 두 사람이 나온답니다. 그러니까 “미남으로 고른다.” 하면 남자들 천명 모여야 그 중에서 얼굴이나 신체적 조건이 정말 이 사람은 미남과에 속한다는 그런 사람이 하나 정도 나올까 말까 하는 비율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미스 코리아, 미스 유니버스 그렇게 경쟁이 심하잖아요? 그렇게 사실상 힘듭니다. 그래서 인정을 받을 만한 외모를 지닌 자는 1,000대 1의 비율입니다. 얼굴과 신체적 조건 다 갖추어진 사람을 그런 비율로 찾을 수가 있답니다. 지금 저는 여러분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알만 합니다. “맞아! 1,000대 1이야. 그런데 그게 나야!” 아마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매주일 감사 헌금을 내셔야 합니다. 왜냐 하면 내가 1,000대 1인데? 그러니까 자기만족도 중요합니다. ‘나는 1,000대 1의 미녀야! 1,000대 1의 미남이야.’ 생각하면서 감사헌금을 내면 그대로 인정이 됩니다. 요즘의 문화를 보십시오. 성형외과는 날로 날로 인기 의료 분야입니다. 이제는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서 성형수술을 잘한다고 의료강국으로 외국 사람들까지 한국에 와서 다 성형수술을 합니다. 그 다음에 옛날에는 남자들은 외모에 그렇게 신경을 안 썼는데 요즘에는 남자들도 외모에 신경을 어떻게 쓰는지 이제는 신문에 났으니까 이름을 발표해도 됩니다. 홍준표 대표도 눈썹을 어떻게 했다고 신문에 났습니다. 거기에 얼마나 신경을 많이 쓰는지 모릅니다. 또 요즘에는 초콜릿 복근을 만들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합니까? 남자들이 그렇게 신경 쓰는 것을 처음 봤습니다. 온통 거기에 피나는 노력을 하고 너무 지나치게 노력을 해서 죽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만큼 비중이 크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상 그것은 우리가 인정을 합니다. 이렇게 훌륭한 얼굴이나 외모를 가진 사람은 사회생활하기가 좀 편하잖아요? 괜히 잘 봐주려고 하고 친절하잖아요? 또, 사람들에게 날마다 예쁘다고 칭찬 듣는 것도 보통 삶의 행복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비중을 많이 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무리 봐도 질서가 없습니다. 붙을 것이 제대로 붙어있지 않단 말입니다.
그 다음에 또 약점이 있습니다. 10절입니다. 10절을 한번 다 같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시작하시겠습니다.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말도 잘 못했습니다. 말을 그냥 달변같이 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어느 좌석에 갔어도 준비 안하고도 아주 잘하고 재치 있게 유머를 써가면서 합니다. 그런데 이 바울은 말도 잘 못했습니다. 자신이 이 바울서신에서 여러 번 인정했습니다. “나는 말을 잘 못한다.” 그러니 이것도 외모잖아요? 말을 시원시원하게 잘해야 민중 지도자가 되는데 몸을 대하면 시원치 않음이 외모적으로 풍기기 때문에 실망했다는 것입니다. “사도라는 사람이 저 모양으로 생겨서 말도 들어보면 저러냐?” 그런데 그의 글은 무게가 있으나 외모를 대하면 너무나 실망했다는 겁니다. 여기 남대문 교회 출신이 있으십니까? 서울역 앞에 있는 남대문 교회에 다니신 분 손들어 보십시오. 배명준 목사님 계실 때 계셨습니까? 남대문 교회 배명준 목사님은 제 은사이십니다. 인물 좋습니다. 목사의 풍채로써는 너무나 은혜스럽고 보기만 해도 풍성해 보이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들 총각 때 가르치시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자기가 총각 목사님이 되셨답니다. 어느 시골 교회에 부흥회 초청을 받아서 가시는데 겨울이었답니다. 눈이 오고 너무 추워서 그래도 부흥회를 가려면 양복을 입고 가셔야 되잖아요? 그런데 꾸겨질까봐 보따리에 싸서 들러 메었답니다. 그리고 허름한 작업복을 입었는데 어떻게 입다보니까 옛날 중공군들이 입었던 누빈 작업복을 허름하게 입게 되셨답니다. 그리고 털모자를 벙거지로 뒤집어쓰고 부흥회를 가는 겁니다. 시골 버스를 타고 정류장에 내렸는데 눈은 내리는데 자기를 마중 나올 사람이 안 보이는 겁니다. 저기 어떤 사람이 서 있는데 그 사람이 사람을 찾는 거 같아서 ‘저 사람이 날 기다리는 사람인가 보다.’ 그런데 이 사람은 행색이 너무 중공군 같으니까 ‘부흥 강사로 오시는데 저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먼저 가서 “누구를 기다리십니까?” “배명준 목사님 기다립니다.” “제가 배명준 목사입니다.” 그랬더니 깜짝 놀라더니 그냥 얼굴에 실망하는 빛이 영력하게 나더니 “어디서 이런 중공군이 와서 무슨 부흥회를 한다고!” 그러더니 짐을 받을 생각도 안하고 같이 어디로 갈 생각도 안하고 그냥 혼자서 가더랍니다. ‘이것을 따라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런데 어떡합니까? 약속하고 왔으니 하나님이 보내주신 건데요. 그래서 따라갔답니다. 그리고 어느 집사님 댁에 들어갔는데 집사님, 권사님들이 그 사람에게 물을 거 아닙니까? “강사 목사님 모시고 왔나요?” 그랬더니 배 목사님이 방 안에 앉아있는데 들으라는 소리 같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강사인지 강산인지 꼭 삼태기에 담아다 버렸으면 좋을만한 사람 하나 왔수다.” 그러니 ‘내가 부흥회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외모만 보고 일부러 들으라고 너무 실망을 해서 ‘왜 저런 사람이 부흥 강사로 와 가지고….’ 이랬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성질내고 갈 수는 없잖아요? ‘준비하자. 내가 멸시와 수모를 당했다.’ 그래서 그 벙거지를 벗고 중공군 옷을 벗고 물 좀 달라고 해서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하고 머리를 잘 빗고 양복을 꺼내서 입고 넥타이를 매고 나오니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강사님 어디 갔수?” 그러니까 “접니다.” “아니, 언제 오셨습니까?” “아니, 아까 버스에서 같이 왔잖아요?” 아주 미남 총각 목사님이 된 겁니다. 그래서 가서 집회도 얼마나 은혜스럽게 잘 했는지 모른답니다. 그랬더니 그 마중 나왔던 사람이 마음이 변해가지고 “내 여동생이 참 예쁜데 결혼하세요.” 그래서 그 사람이 얼마나 결혼하라고 강요하는지 자기가 할 수 없이 결혼을 했다고! 그런데 그 사람이 제가 목회하는 교회에 나왔습니다. 내가 그래서 그 사실을 잘 압니다. 그랬느냐고 물어봤더니 그랬다는 겁니다. 그런 일이 있습니다. 사람이 외모 때문에 본질을 잊어버리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바울이 그런 불이익을 당하고 나서 하도 화가 나서 이렇게 변명을 늘어놓는 거 아닙니까? 몸으로 대하면 약해 보였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좋게 보려고 노력해도 봐줄 것이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말도 시원찮다고 하니” 바울이 인정하는 겁니다. 모세도 말 못한다고 했잖아요? 너무나 이것이 약점이었습니다. 누가 평가하기 전에 자신들이 인정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불평하는 말! 안한다고, 안한다고 그랬는데 끝까지 하라고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모세가 생각했잖아요? ‘아!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면 내 이 짧은 혀를 다 펴주어서 시원한 말을 하겠지?’ 라고 했는데 아무 변화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호와께서 나를 부르신 이 후에도 그러하니 나를 선택해 주셨으면 다르게 권위를 주셨어야지 똑같이 이것을 하라고 하십니까?” 그렇게 하나님께 불평하잖아요? 유대인의 농담을 제가 말씀드렸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캐나다’로 가라고 하셨는데 ‘다’자 발음을 못해서 ‘가나안’으로 갔다고요. 5·16혁명 직후 박정희 대통령이 군대 갔다 오지 아니한 모든 사람을 공직에서 물러나게 했습니다. 시골의 이장까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시골의 이장은 거의 환갑 넘은 어른들이 하셨거든요? 그 사람들은 옛날 일제하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기 때문에 군대를 안 갔다 온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랬더니 군대 안 갔다 온 사람은 하지 말라고 하니까 싹 다 바꾸니까 결국 군대 갔다 온 20대 초반의 총각이 별안간 이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저와 나이는 4살 차이이지만 친구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얼마나 사람들 앞에 나서면 부끄러움을 타는지 동네 사람들 모아놓고 회의를 하는데도 통역관이 필요합니다. 영 말을 못하고 끙끙 댑니다. “저 사람이 화장실 가고 싶은가? 왜 저렇게 끙끙 대?” 말이 안 되는 걸 어떡합니까? 언변이 없는걸요.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이것도 못해서 “그럼 회의는…. 저거 하겠습니다.” 저거 하는 게 뭡니까? 그런 사람이 있는 걸 어떡합니까? 그런데 모범 이장으로 표창 받았습니다. 하도 성실하게 잘해서요.
그러면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13절입니다. 13절을 다 같이 읽어봐요. 시작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뭡니까?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눠주신 한계를 인정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용모, 재능, 머리, 성별, 성격, 성씨, 국적을 여러분이 선택했습니까? 여자 되고 싶어서 여자 되신 분 손 들어 보십시오. 내 의사가 하나도 개입되지 않고 그냥 주어진 상태 그것이 나입니다. 여러분! 이름도 여러분이 지었습니까? 김 씨가 되고 싶어서 김 씨 되신 분 계십니까? 한국 사람이 되고 싶어서 한국에 태어난 사람 있습니까? 용모, 얼굴 모양! “이렇게 해주세요.” 하고 내가 만들었습니까? 아무것도 내가 한 것이 없습니다. 그냥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한계성에 의해서 그냥 주어진 것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외모! 내가 뭘 했다고!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이건데!”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한계를 따라 생각해야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런 것입니다. 자기 수고로 외모가 미남이 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잖아요? “그러면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다.” 힘자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힘세게 자기를 만들었나요? 자랑할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17절 말씀을 다 같이 보겠습니다. 시작하겠습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오직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감사로 자랑을 삼으라는 것입니다. 내 주변을 이루고 있는 많은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한계를 정해준 것이니까 주어진 것에서 감사하십시오. 저는 선교지에 많이 가잖아요? 제가 선교사들에게 뭐라고 말하는지 아세요? “이필재 목사는 선교사가 되고 싶은 생각을 그렇게 많이 했으나 선교는 많이 하고 있지만 선교사는 아닙니다. 왜 아닌가? 하나님이 나의 한계를 ‘너는 선교사가 아니야. 선교사를 돕는 사람이야.’ 내 한계를 거기다 하나님이 정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필요가 있어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한계가 거기니까 하나님이 한계로 모든 것을 그어주셨기 때문에 자랑할 게 없다는 겁니다.” 대형교회 목사라고 합시다. 다른 사람은 그만두고 갈보리교회에 이렇게 수요일에 교인이 많이 나오니까 이필재 목사를 생각해 봅시다. 저를 하나님이 연평도에 보냈다고 합시다. 대형교회가 되겠습니까? 사람 자체가 없는데요. 교회 성장 세미나의 제1 원인이 위치입니다. 어디에다 교회를 세웠느냐 입니다. 그러니까 아파트 밀집지역, 강남 이런 곳에 교회를 세운 사람이 크게 되지요? “그런 게 자랑 할 것이 있느냐? 사회적인 여건에 의해서 교인이 많이 모인 것이지 네가 한번 섬에 가 보아라. 무슨 대형교회가 되느냐?” 안됩니다. 그러니까 지난주에도 제가 설교했잖아요? 진짜 훌륭한 사람들은 외모적인 게 아닙니다. 내면적인 것, 하나님만이 인정하실 수 있는 내면적인, 그런 사람들이 보이지도 않게 진짜 훌륭한 사람입니다. 분당에 있는 제 친구들 조상이 물려준 땅 덕분에 부자가 되었습니다.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국가 시책에 의해서 도시화가 되는 바람에 운이 좋았지, 그리고 조상이 물려준 것이지 자기 실력으로 돈을 번 것입니까?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자랑할 사람은 주님을 생각하면서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이것은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여러분! 받은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로 자랑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으로 싸우는 백성
고후 10장 1~6절 / 이수영목사
고린도후서 10장부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자기를 겨냥한 여러 가지 비난에 응수합니다. 그를 비난한 자들은 본래 고린도 교회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고 중간에 들어온 자들인데 그들 때문에 바울과 고린도 교회의 관계가 악화되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인이 된 유대인들로서 바울의 권위에 도전하며 사도들로 자처하는 선교사들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의 바울에 대한 비난은 주로 그의 외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권위도 없고 말도 잘 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이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이 그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고후10:10) 바울의 대적자들은 특히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충동하여 바울에게 그가 사도임을 증명해보이라는 요구를 하게 했습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사도로서의 증거는 기적이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 같은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사악한 자들로 보았으며 고린도 교회에 더 이상의 악영향을 끼치는 것을 차단해야겠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도전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대응의 첫 부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대응은 자기 자신의 명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기보다 고린도 교회를 어리석은 자들과 거짓 복음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먼저 1-2절을 봅니다: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사도 바울은 여기서 그가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을 대할 때는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대하기를 원한다는 그의 기본적인 바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자기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는 그러나 담대히 대하겠다는 즉 거리낌 없이 질타하겠다는 단호함을 보입니다. 그러니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그를 비방하며 대적하는 자들에게 현혹되어 그들과 함께 자신으로부터 질타의 대상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경고도 함께 보내고 있습니다.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한 것이 그 말입니다.
우리는 본문 2절에서 이미 사도 바울에게 던져진 한 가지 비방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육신에 따라 행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기준에 의해 산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적 동기에서 행동하고 경솔하며 일관성이 없고 그래서 신뢰할 수 없는 자라는 비판(고후1:17 참조)과 상관있는 말일 수 있습니다. “육신에 따라 행한다”는 것은 또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았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다음 절인 7절에서 사도 바울은 쓰기를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합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했음을 믿어줄 것을 강하게 요구한 것은 그가 “육신에 따라 행한다”는 비난을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았다”는 비난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라는 비난에 대한 사도 바울의 응수는 곧바로 본문 3-5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3절에서 그는 먼저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일단 자기가 “육신으로 행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비방하는 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뜻으로 “육신으로 행한다”고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된 인간의 기준을 따라 산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갖는 육신적 한계 안에서 인간의 삶을 살고 있다는 뜻에서 한 말입니다. 자기 안에 초자연적인 힘을 소유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자기가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존재임을 말한 것입니다. 그가 신체적 연약함과 육체의 가시를 안고 살고 있다는 뜻으로 “육신으로 행한다”고 쓴 것입니다.
일단 자기 자신의 육체의 연약함을 인정한 사도 바울은 곧 이어 공격적인 응수로 돌아섭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한 것입니다. “육신에 따라 싸운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인간적인 수단을 의지하여 싸운다는 것입니다. 승리하기 위하여는 수치스러운 수단도 동원하여 싸운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라.” 한 것은 이기기 위하여 속임수나 교활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방법으로 싸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기만을 가지고 싸운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싸우는 방법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싸우는 것이라고 하지만 싸움 자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실제 군대간의 전투장면과 전투의 전개방법을 생생하게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투라는 것이 대항하는 적진을 무너뜨리고 적군들을 포로로 잡으며 항복을 받아내는 것임을 사도 바울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본문 4-5절에서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한 데서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린다”는 한 말이나 “모든 생각을 사로잡는다”는 말이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한다는 말은 모두 전투에서의 승리와 연관되어 쓰이는 말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비방하는 대적들과의 싸움의 본질이 무엇이며 어떻게 싸워야 할지를 그가 이해한 군대의 전투를 비유 삼아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를 대적하는 그 어떤 적들도 다 무너뜨릴 수 있고 그가 전하는 복음을 대적하는 그 어떤 세상의 사상도 다 정복할 수 있으며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는 확신에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전투는 맨손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기가 있어야 합니다. 적보다 우수한 무기를 가져야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며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할 수 있는 무기라고 확신한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은 본문 4절에서 말합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사도 바울은 그의 대적들이 “육신에 속한 것”을 무기 삼아 그에게 도전해오고 싸움을 거는 데 반해 자기의 무기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대적들이 사용하던 “육신에 속한” 무기는 어떤 것입니까? 예를 들면 수사학이나 웅변술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현란한 화술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그것을 통해 사람들로부터 돈을 벌곤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들을 의지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은 늘 자연스럽고 평이하며 직선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값없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고후11:7). 사도 바울이 “우리의 싸우는 무기”라고 한 것은 무엇을 가리켜 한 말이겠습니까?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였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였을 것입니다. 자기와 함께하시고 지키시며 능력 주시는 성령의 역사였을 것입니다. 그가 주를 믿는 믿음 안에서 가진 하나님나라의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자기를 사도로 세우시고 온 천하에 다니며 전하라고 사명을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시기를 비는 기도의 힘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그의 개인적인 대적들뿐 아니라 교회와 복음과 하나님나라의 대적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사도 바울이 취한 무기였던 것입니다. 오직 그것들만을 가지고 싸우기로 한 그의 다짐이 바로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 하나님의 능력이라.”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의 복음을 위한 위대한 전사였습니다. 그는 뛰어난 전사이기도 했지만 그는 또한 무장을 바로 했습니다. 그가 싸울 싸움을 위하여 갖추어야 할 무장이 어떤 것인지를 바로 알았습니다. 그가 취한 무기들이야말로 그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릴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는 세상의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킬 수 있는 무기였습니다. 그런 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승리가 확실한 것입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싸우는 백성을 이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맞서며 그 앞에서 스스로를 자랑하고 그보다 더 높게 스스로를 높이는 세상의 그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진리를 간파하고 외친 것입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높아진 것”이라고 한 것은 바울을 적대하는 자들의 거짓 지혜와 교묘한 논리일 것입니다. 거짓 지혜는 십자가의 지혜를 부인하는 모든 세상의 지혜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지혜와 논리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이길 수 없음을 사도 바울은 이미 고전1:18-2:13에서 천명한 바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사도 바울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군사들입니다. 우리에게도 싸워야 할 싸움이 있습니다. 반기독교 세력들이 창궐하며 이단들이 범람하는 오늘날 우리의 싸움은 더 절박하며 치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싸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무장을 하여야 합니다. 무장은 바르게 해야 하고 완벽하게 해야 합니다. 마귀의 계략이 날로 교묘해지고 그의 공격이 날로 더욱 악랄해지기 때문에 우리의 무장도 날로 더욱 튼튼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엡6:10-18에서 쓴 것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하나님의 군사 된 우리가 분명히 마음에 새기고 힘써 지켜야 할 신앙의 좌우명입니다: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이 하나님이 주시는 전신갑주 즉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영적 전쟁, 오늘의 믿음의 싸움을 싸워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복음의 참된 능력
고후 10:1-11 / 이삼규목사
중국의 노자는 스승인 상창에게서 도를 배웠습니다. 어느 날 상창이 늙어서 죽게 될 것을 안 노자는 스승을 찾아가서 “사부님, 제게 마지막 가르침을 주십시오.”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자 상창은 얼마 동안 노자의 얼굴을 보더니 입을 열고는 “내 이가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노자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다시 상창은 “내 혀가 있느냐?” 라고 물었고 노자는 “사부님, 혀는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상창은 “자, 이제 알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노자는 “예, 알겠습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라며 큰 절을 하고 물러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노자는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일까요? 이 세상에서 치아처럼 굳고 날카로운 것을 깨지고 빠져 나가고 없어집니다. 정치권력, 무력, 돈 등 강하고 날카로워서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것을 결국 다 없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혀처럼 부드러운 것은 오래간다는 것입니다. 노자는 여기에서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더 강하다는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나이가 드시면 대부분의 치아는 약해지고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혀는 여전히 그대로 있습니다. 이것을 비유로 들어 부드럽고 온유한 것이 더 강할 수 있음을 이 이야기는 말해주는 것입니다. 세계 역사를 살펴보십시오. 철권통치를 하였던 많은 독재자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그들의 말로가 비참하게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의 참된 능력은 외적으로 화려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능력은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복종하며 그분처럼 사는 것을 통해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의 참된 능력”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통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복음의 참된 능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것과 비교해 내세울만한, 우월하고 탁월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성경은 복음의 능력에 대해서 어떻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까?
1. 그리스도처럼 행하게 합니다.
고후 10:1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고후 10:2 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다시 방문하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현재 편지를 쓰고 있는 자신의 심경이 어떠한지를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성도들을 직접 대면할 때는 유순하고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담대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유순하고”라는 말은 “타페이노스”라는 말인데 그 뜻은 ‘겸비한, 미천한’이라는 뜻입니다. “담대한”이라는 말은 “쌀로”라고 하는데‘대담하게 행동하다, 용기가 충만하다, 자신감이 충만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은 바울의 이러한 온유한 태도를 겁이 많고 소심한 모습이라고 비난한 것입니다. 실제로 헬라 문화에서 보면, 바울의 그와 같은 유순하고 온유한 태도는 사도의 훌륭한 자질로 평가받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육신에 거하는 자, 즉 자신의 유익을 따라 사역하는 자로 비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자신을 변증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말을 인용해 그 비난이 옳지 않다는 것을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후 10:2 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적대자들에게는 담대하게 대면하였지만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는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겠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적대자들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 면전에서는 온유한 척하면서 고린도 교회를 떠나고 나면 태도가 변해 거만하게 큰 소리를 치는 사람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이는 어떤 면에서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평소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대할 때는 어머니와 같이 부드럽게 대하였습니다.
살전 2: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그러나 잘못된 길로 가는 교회 성도들이나 이단이나 거짓 교사들을 질책할 때는 매우 강경한 태도로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고전 4: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바울의 대적들은 이러한 바울의 목회적 태도를 꼬투리 잡아 그를 비방하며 고린도 교회를 혼란하게 하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세상적인 방식에 대해 똑 같은 방식으로 응수하거나 대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왜 자신에게 의심을 품고 있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대하길 원하였습니까? 복음의 능력은 외적인 어떠함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적 열매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거짓 사도들은 온유한 태도를 보이는 바울을 소심하고 용기 없는 자라고 비방하였습니다.하지만 성경은 이와 같은 성품을 그리스도의 인격, 즉 성령의 열매라고 말씀합니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복음의 능력은 우리가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해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죄를 사랑하는 본성적 기질을 거슬러 그리스도의 성품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을 제공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참된 능력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행하십니까?
그리스도를 닮아 온유와 겸손과 사랑 같은 그분의 인격을 따라 행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인 것입니다.
경건의 능력은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그리스도의 인격을 본받아 그분처럼 살아가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아닌 다른 어떤 외적인 것, 즉 설득력 있는 화려한 말투나 종교적인 체험을 통해서 자신을 높이거나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망령된 자에게서 돌이키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2.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싸우는 무기에 대해, 하나님을 대적해 높아진 인간의 교만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주님께로 복종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고후 10: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고후 10: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고후 10:6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이 말씀은 마치 전쟁을 연상하게 하는데, 특히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공격하는 군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은유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용하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원어대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무엇을 말합니까?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복음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거짓 사도들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어떠한 능력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려 했습니다.하지만 바울사도는 자신이 싸우는 무기는 겉으로 드러나는 수려한 외모나 유창한 언변과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해 높아진 모든 이론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수려한 외모나 화려한 수사학과 같은 것을 사도의 자질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참된 능력은 그런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연약한 질그릇과 같은 우리 안에 복음의 보물을 두시고 이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사람에게 있지 아니함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십니다.
복음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는 부패한 마음을 변화시키며,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해 높아진 모든 교만한 이론과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복음의 참된 능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그 능력을 어디서 찾고 계십니까? 혹시 자신 안에 있는 재능과 은사에서 발견하려는 분은 안 계십니까? 만약 자신에게서 복음의 능력을 발견하려고 한다면 분명 낙심과 좌절과 실패를 맛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어떠한 선함이나 능력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보십시오. 국무총리 지명자가 젊었을 때는 청빈 검사로 소문났던 사람인데 대법관 퇴임 후에 변호사를 개업하여 일 년 동안 16억 원을 벌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분의 대쪽 이미지만 믿고 총리로 지명했는데 청문회 문턱도 밟아보지 못하고 스스로 사퇴하고 말았지 않습니까?
오직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복음의 능력을 넣어 두신 하나님을 신뢰할 때, 그 복음의 심히 큰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믿습니까? 우리가 잘나서 직분 받고 일꾼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넣어 두신 복음 때문인 줄 믿습니다.
3. 교회를 견고히 세우게 합니다.
고후 10:7 너희는 외모만 보는 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고후 10: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바울은 외모적으로만 판단해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의심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책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의 권위가 주님께로부터 주어졌으며, 그 목적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주님은 교회를 위해서 권위자를 세우십니다. 즉 직분자를 세우신다는 말입니다. 직분자를 세우시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교회를 세우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람은 참된 일꾼이 아닙니다.
엡 4: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엡 4: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오늘 우리 교회는 직분 자를 세우기 위해서 후보자를 발표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직분을 원하십니까? 혹시 자기를 자랑하고 내세우기 위함입니까? 그래서 저는 후보자 자원서를 받을 때 마지막 문제로 무엇 때문에 권사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은 후보자 자신들이 잘 아실 것입니다. 직분자는 봉사하라고 세우는 것입니다. 그 봉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직분 맡고 대접 받으려는 마음이 있다면 아예 지금 사퇴하십시오. 우리 주님은 그런 직분자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어떤 교회의 장로님이 꿈에 하나님을 만나셨답니다. 하나님께서 장로님에게 큰 종이 한 장과 펜을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는데요. “○○○ 장로야, 네가 오늘까지 나를 위해 한 일이 무엇인지 이 종이에 써보아라.” “하나님, 제가 부족하지만, 큰아들은 사장으로, 둘째 아들은 회장으로, 셋째 아들도 사장으로, 넷째도 회사의 전무로, 다섯째는 의사로, 여섯째는 대학교수로, 아이들을 모두 번듯하게 길렀습니다.”라고 했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래,그것도 귀한 일이지만 그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하는 일이다. 나를 위해 한 일을 써보아라.”
“주일 예배를 드리고 주일 밤에도 빠지지 않고 예배를 드렸고 십일조도 거르지 않고 드렸고…….” 한참 했더니 하나님께서 “얘야, 그건 새신자도 하는 거다. 새신자도 하는 것을 해놓고 장로가 무슨 자랑이라고 그것을 쓰느냐? 나를 위해 네가 특별히 한 일을 써보아라.”
장로님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하나님을 위해 특별히 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아무것도 쓸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섭섭하구나. 나는 너를 위해 내 아들도 주었고, 내 영인 성령도 주었고, 내가 오늘까지 너와 함께 하며 축복해 주었고, 네가 천국에 오면 살 집도 준비해 놓았는데 너는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구나.”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여러분! 장로님이 하신 이야기 가운데 예배참석, 십일조 생활 등이 새신자도 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제가 권사님 되실 분들에게 이런 것을 강조하였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기초입니다.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건물을 짓는다 할지라도 사상누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기초부터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전하는 자의 말과 행위가 일치할 때 드러나게 됩니다.
고전 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언행일치의 삶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즉 우리의 말과 행동이 일치함으로 경건의 능력을 보일 때 복음의 능력 또한 더욱 밝히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후 10:11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일이 같은 것임을 알지라
사랑하시는 여러분! 자신의 직분에 따르는 권위를 인식하고 계십니까? 그것을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가르치는 것을 통해 지체와 공동체를 온전히 세우기 위해 그 권위를 사용합니까? 아니면 자신을 드러내며 자랑하고 높이기 위해서 사용하십니까? 만일 주님의 말씀으로 지체를 양육하고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권위를 사용하기보다 오히려 자기를 높이고 자랑하기 위해 권위를 사용하고 있다면 반드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벧전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복음의 참된 능력이 여러분을 통해서 나타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견고한 진을 무너뜨려라
고후 10:1-6 / 노경모목사
아주 오래 전에 상영되었던 '나바론 요새'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데요, 나바론이란 섬의 깎아지른 절벽에 배치되어 있는 거대한 두 대의 대포는 그곳을 항해하는 연합군의 선박을 무자비하게 침몰시켰습니다.
이 거포는 외부에서는 도저히 파괴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해변의 암벽을 깎아서 만든 천연 요새 속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아무리 강력한 공중 폭격을 감행해도 끄떡없었습니다. 마침내 연합군은 특공대를 조직하여 거포가 배치되어 있는 내부에 침투하여 거포를 폭파시킵니다.
사람 속에도, 외부에서는 도저히 파괴시키지 못하는 암벽 같은 천연 요새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견고한 진’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남쪽, 유대사막 동쪽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 절벽에 자리 잡은 고대의 왕궁이자 요새인 ‘마사다’, AD 73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당시 끝까지 로마군에 항거하던 유대인 저항군이 로마군의 공격에 패배가 임박하자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전원 자살한 것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이곳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유명하지요. 로마의 폴라비우스 실바 장군은 이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서 이 높이와 같은 성채를 쌓아 올린 다음에 공격을 합니다. 그 만큼 마사다는 견고한 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정복해야 했던 여리고성도 만만치가 않은 견고한 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소문을 듣고 여리고 성문은 굳게 닫혔습니다. 여리고성의 두께는 내벽이 4미터, 외벽은 2미터였습니다. 2중으로 된 성벽입니다. 높이는 10미터 정도라고 합니다. 아래는 돌로 쌓아올리고 위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다고 합니다. 전쟁의 경험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여리고성은 난공불락의 견고한 진임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견고한 진은 보통의 힘과 보통의 군사력으로는 점령하기가 어렵습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쓸 당시에도 견고한 진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사도성 즉 바울이 사도이다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공격하는 거짓선지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바울을 공격해서 바울을 사도성을 훼손시켜 바울이 전한 복음을 흠집내고, 복음이 전해지지 못하게 하는 일을 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 성도들 하여금 하나님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도록 만들고 나아가서는 마귀의 지배 아래로 끌고 가려고 하는 마귀의 아성인 ‘견고한 진(성, 진지, 요새)’들이 있습니다.
사단 마귀는 오늘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공격합니다. 미혹하고 유혹해서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무서운 덫과 함정을 우리 앞에 놓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싸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지금 세상에 마귀가 어디 있나? 마귀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전쟁, 영적인 싸움을 우리가 싸워야 한다는 말에 부정적인 시각으로 인정하지를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마귀를 다 멸했는데, 무슨 마귀가 있고, 마귀와 영적인 싸움을 싸워야 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과연 마귀는 없나요? 영적인 싸움은 이제 완전히 없어졌나요?
물론 예수님이 마귀를 멸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영생을 얻고 천국 가는 승리를 얻었음은 확실하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천국 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마귀와 싸움이 없을 수 없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 라는 성경 말씀은 마귀가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며 성도를 공격하고 유혹하고 미혹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계시록 12장 12절에서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인 싸움을 싸워서 마귀의 견고한 진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가나안 땅, 약속의 기업을 차지한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의 주신의 약속의 기업들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지 못할 때, 우리가 약속의 기업들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마귀에게 우리의 소중한 것들을 빼앗길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안과 밖에 견고한 진이 있는데, 먼저 우리들 속에 있는 견고한 진을 살펴봅시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 육신 가운데 살았던 삶을 통해 들어온 견고한 진들입니다. 또 하나는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을 따라 살기보다 육신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 안에는 사탄이 역사하기 좋은 발판(처소)인 견고한 진이 생기게 됩니다. 이러한 견고한 진들을 그냥 버려두면 계속해서 사탄의 유혹과 공격에 쉽게 넘어지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기가 어렵게 됩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견고한 진’이란, 우리의 방패와 요새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견고한 진, 즉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인간의 모든 이론과 생각’입니다. 4, 5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견고한 진이란 하나님을 아는 진리가 담긴 복음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방식이나 철학적인 체계를 말합니다. 인간의 이러한 지식은 마치 견고한 성읍이나 요새같이 단단하여 잘 무너지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견고한 진은 마귀의 좋은 서식처가 됩니다. 견고한 진 자체가 마귀는 아니지만 견고한 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지식이나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마귀가 발판을 삼아서 은신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좋은 처소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이 견고한 진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다 죽고 정리되었어야 할 과거의 옛 자아가 아직 까지 살아 있다면 이것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어뗳게 말하고 있습니까? 베드로전서 4장 3절,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과거에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때에 행했던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우상숭배를 아직까지 갖고 있느냐? 갖고 있으면 이것들을 무너뜨리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이 우리 속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고, 아직도 육신을 따라 행한다면 그것도 바로 우리가 무너뜨려야 할 견고한 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너뜨려야 할 육신의 일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갈라디아서 5장 19절-21절,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이런 견고한 진들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무너뜨리지 못하면 우리의 것들을 차츰 차츰 빼앗기게 되고, 우리가 약속의 기업을 받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마귀의 종노릇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우리들의 외부에서 우리들을 공격하고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을 막는 외부의 견고한 진들이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바울은 본문 4절, 5절, 6절에서 ‘모든 이론’,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몇 가지로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이단입니다.
바울 당시의 거짓선지자들 처럼, 사람들을 미혹하고, 복음을 부정합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이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단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1. 성경의 특정 구절을 자기들에 대한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2. 재림의 시간과 장소를 예언합니다.
3. 특정인, 인간을 구원자 메시아라고 말합니다.
4. 자기들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두려움을 심어줍니다.
5. 특정구절 가운데 특정 부분만 인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6. 하나같이 기존 개신교가 잘못되었다고 비방합니다.
7. 이단들은 서로 비슷한 부분이 참 많습니다.
8.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합니다.
9. 성경을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 성경의 역사성, 사실성, 기적성을 믿지 않습니다.
10, 거짓 예언을 쏟아냅니다,
둘째, 우상숭배입니다.
굿, 점치고, 사주 팔자 보고, 토정비결, 관상보고, 타로카드로 점치고 운세보고, 여러분 이런 것들이 하나님이 싫어하는 우상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도 우상입니다.
셋째, 불법입니다.
불법을 행하고 불법을 도모하고 불법과 타협하고 하나님의 법과 정의를 훼손시키고 남에게 억울함을 줍니다. 요즈음 사회를 보면 모든 것이 불법인 것 같습니다. 불법이 다 통용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4장 12절에서 마태복음 24장 12절에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견고한 진들을 어떻게 무너뜨릴 수가 있습니까?
인간적인 어떤 무기로도 이 견고한 진들을 무너뜨릴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본문 4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무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4절을 읽습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그렇다면 ‘하나님의 능력’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말씀의 능력’ ‘십자가의 능력’ ‘예수그리스도 이름의 능력’, ‘성령의 능력’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40일 금식하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 말씀으로 마귀의 물리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 말씀처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할 때 마귀와 귀신이 도망하고 질병이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어두움의 세력을 깨뜨리고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 즉 말씀의 능력, 십자가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이음의 능력, 성령의 능력으로 내 속과 밖에 있는 견고한 진들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우리의 안팎에 포진하고 있고 우리를 공격하는 ‘견고한 진들’을 무너뜨리는 자들과 무너뜨리지 않는 자들은 큰 차이가 나게 됩니다.
우리 모두 이번 결실의 계절을 맞이해서 견고한 진들을 무너뜨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주시는 기업과 열매들과 응답을 모두 취하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간의 교만을 깨뜨리는 능력
고린도후서 10:1-18 / 김형익목사
이제 우리는 고린도후서의 후반부 마지막 4장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1. 문맥 이해: 10~13장은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을 향한 바울 사도의 마지막 권면과 도전
바울 사도가 이 마지막 부분에서 주로 의식하고 있는 대상은 아직도 바울 사도 자신에 대하여 회의적이거나 비판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때문에 바울 사도의 어조도 좀 강하고 담대한 어조로 나타납니다. 그는 심지어 선전포고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바울 사도가 자신이 고린도 교회로부터 받은 상처에 대한 복수나 개인적 감정의 표현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바울 사도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해서든지 고린도교회의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한 영혼이라도 더 얻고자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가 이제 이 편지를 쓰고 나서 곧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게 될텐데, 그 때에는 자신이 이 모든 문제들을 확실하게 다루게 될 것이고 여전히 회개치 않는 자들을 향하여 용서하지 아니하고 죄를 정할 것을 알고 있기에(고후 10:6; 13:1~2), 여기에 최후의 권면이자 도전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바울 사도에 대한 또 하나의 비난(1~2, 9~11): “바울은 앞에서는 말못하고 뒤에서 편지로는 으름장을 놓는 사람이다.”
다시 한 번 바울 사도를 대적하는 자들이 가진 주장 가운데 하나를 여기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은 앞에서는 말을 못하고 뒤에서 편지로는 으름장을 놓는 사람이다”라는 비난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울 사도는 두번째 방문에서 그를 대적하는 사람들의 면전에서 하는 비난과 인신공격을 당하고는 쓰디쓴 마음을 가지고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눈물로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에서는 바울 사도가 써서 보내놓고도 너무 심하게 쓴 것 같아서 후회를 해야할만큼 강한 어조로 쓴 것이었습니다(2:4; 7:8). 그러니 아직도 대적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볼 때, 바울 사도는 앞에서는 그냥 물러서더니 뒤에 가서 편지로는 다른 태도로 돌변하는 이중적인 사람이라는 비난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들에게 주는 이 최후의 권면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운을 뗍니다.
10:1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이것은 그들의 비난을 의식하고서 쓰는 말입니다. 사실 그들의 비난을 바울 사도가 뒤에서 분명하게 언급하는데 그것이 10절입니다.
10:10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어쩌면 이것은 바울 사도의 외모가 가진 약점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1세기에서 2세기 쯤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바울과 테클라 행전>에 보면, 바울 사도의 외모에 대한 상세한 언급이 있는데 바울 서신들에 나타나는 분위기로 보아 받아들일 만한 묘사입니다. 그 묘사는 이렇습니다: ‘중키에 머리카락은 별로 없고 다리는 약간 절뚝거리는 안짱다리이며 눈은 컸으며 그의 눈썹은 양쪽이 서로 붙어있고 코는 꽤 높았다.’
이 정도라면 외모적인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특별히 고린도교회와 같이 세상적 관점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었다면 아마도 그들은 바울 자신을 그다지 자랑스럽게 여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편지는 달랐습니다. 그의 어조는 힘이 있었고 사도로서의 권위를 충분히 전달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비난이 나왔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말이 시원치 않다’는 비난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설교를 지칭하는 것일텐데, 아마도 고린도교회에서 처음부터 많은 영향을 미쳤을 아볼로에 비하면 설교의 웅변적 기술이 떨어졌을 것입니다. 아볼로는 ‘학문이 능한 자’라고 소개가 되는데 이 말은 ‘말이 유창한’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행 9:24).
행 18: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그러므로 고린도교회의 대적하는 자들은 그들이 대면하여 본 바울 사도의 외모와 연약함이란 관점에서 바울의 편지와 모든 것을 판단하고자 했습니다. 말하자면 편지도 사실은 으름장에 불과한 것이지, 나중에 바울이 오더라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식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 사도가 1절에서 쓰는 말을 읽어야 합니다. 그는 그들의 비난을 긍정합니다. 하지만 그 비난은 오히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그들을 대하였다는 증거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에 대한 오해와 인신공격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2절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을 향하여 ‘육체대로 행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제 고린도를 방문하여 만나게 될 때, 그들의 비난대로 ‘담대히’ 대하지 않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어쩌면 바울 사도는 “너희가 나를 ‘세상 사람들이나 똑같은 방식으로’ 행한다고 말하고 있다면, 그래, 내가 무엇이 세상 방식대로 하는 것인지, 무엇이 육체대로 하는 것인지 본때를 보여주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래, 너희 말대로 나는 다시 너희를 방문할 때에도 내가 너희를 대하여 ‘담대히’ 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그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이 고린도후서를 통해서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담대히 대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을 심판하겠다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를 증명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모두가 배워야만 하는 태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기준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을 배워서 행하려고 한다면 바울 사도와 같은 오해를 많이 사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그래, 그럼 나도 세상의 방식으로 대하지, 뭐!’하는 식으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렇게 자신의 태도를 그들과 같은 방식?육체의 방식?으로 바꾸어 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지,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 에서 누가 여러분에게 행한대로 갚아주는 것이,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닮고 그리스도를 따라서 행하는 원칙에 우선하지 않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많이 겪으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닮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행하려고 함으로 인하여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다면 그것은 ‘행복한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마 5:11~12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그러면서도 바울 사도는 사도로서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나 바울은’이라고 말합니다(1절). 헬라어에서 이처럼 ‘나’라는 주어를 명기하는 것은 강조하는 용법입니다. 동사의 변화형태 속에 주어가 들어있기 때문에 이렇게 할 필요가 없지만, 이렇게 하는 것은 사도가 사도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강조하여 말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편지를 읽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표현하고 있는 셈입니다.
3. 바울 사도의 선전 포고(3~6): 우리의 무기는,
바울 사도는 이제 ‘싸움’을 시작하노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있는 변화입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까지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해 왔습니다. 그의 논지와 어조는 다분히 방어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이상 방어적이지 않습니다. 이제 그는 공세를 취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대적자들이 말하는대로 바울 사도는 ‘육체에 있어 행하는 자’이긴 하지만 ‘육체대로’ 싸우는 자는 결코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천사가 아닙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방식?육체?을 따라서 살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입니까? 그는 이제 고린도 사람들을 향하여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 안에 있는 모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을 향하여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육체적 사고를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는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영적 전쟁입니다. 여기 ‘싸운다’는 표현(3절)은 실제로 군인들이 전쟁을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바울 사도가 치루는 전쟁의 무기는 영적 무기입니다. 이제 바울 사도는 그 무기로 어떻게 무엇을 향하여 싸울 것인지 밝혀줍니다.
A.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괴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것이 첫째입니다. 바울 사도의 병기는 ‘견고한 진을 파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 사도가 파괴하려고 하는 원수의 진영은 ‘복음의 진보를 가로막는 자들의 자기자랑에 의해서 세워진 자기 신뢰와 자기 높임의 방어진’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대적자들은 자기들의 메시지를 강화하기 위해 가지고 있는 중심적 주장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의 영적 무기?하나님의 능력?를 가지고 그들의 주장의 근거를 파괴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사사로이 그들의 주장 하나 하나를 일일이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주장, 그들의 메시지의 근거를 파괴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고린도후서의 나머지 네 장(10~13장)에서 보게 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B.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을 깨뜨리고 죄성에 물든 사고 패턴과 하나님께 반역하여 자기 삶을 사는 정신 구조를 파괴한다.
둘째로 바울 사도가 파괴할 것은 ‘모든 이론과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놓아진 것’입니다(5a). 진영이 무너진 후에 공격 목표는 ‘높게 세워진’ 탑일 것입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의 대적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방식이며, 죄성에 물든 사고 패턴과 하나님께 반역하여 자기 삶을 살아가는 정신 구조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대적자들은 자기들의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결코 바울 사도를 용납할 수 없고 곧 복음과 그리스도를 용납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사고 패턴은 죄성에 물든 것이어서 세상적 방식으로는 똑똑한 것 같아 보이고 지혜로운 것 같아도 결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가진 정신 구조는 하나님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로써 바울 사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하면서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사고 구조, 하나님 없는 이론, 하나님 없는 세상 방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런 사고로 가득 차 있고 이런 방식으로만 생각을 계속 해간다면 결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가 그들에게 결코 영향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런 것들로 자기의 속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너무나 옳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틀려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참됨을 가늠하는 것도 그들의 이성적 판단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들을 다 파괴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사람들이 참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은 절대로 그들이 가진 명석한 판단력이나 지혜 때문이 아닙니다! 복음이 그들 영혼의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교만의 탑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비로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런 교만의 탑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그들은 언제라도 고린도교회의 바울 사도를 대적하는 자들과 같은 위치로 돌아가게 될 사람들인 것입니다.
C. 인간 존재의 지적 사고의 중심인 정신(mind)을 그리스도의 포로로 사로잡아간다.
세번째로 바울 사도는 고대 전쟁에서 진영이 무너지고, 탑이 무너졌을 때, 적진의 군사들을 사로잡아 포로로 잡아가는 것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라는 말에서 ‘생각’이 가리키는 것은 인간 존재의 지성의 중심으로서 ‘정신’(mind)입니다. 보다 전문적인 말로 하면 이것은 세계관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대적자들의 정신 곧 세계관이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하여 포로로 사로잡히기까지 바울 사도는 싸울 것입니다.
이제 6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 싸움을 통하여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될 자들이 다 복종하게 되면, 고린도를 방문하여 남은 자들?여전히 바울 사도와 복음을 반대하고 거짓 사도들의 편에 서 있는 자들?을 벌하려고 준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10: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이어서 7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이 문장은 번역이 여러 가지로 가능합니다. 여기 개역성경과 같이 직설법으로 가능하고, 또 의문문이나 명령문으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만일 KJV처럼 의문문으로 번역하면, Do ye look on things after the outward appearance?(너희는 모든 것을 외모로만 보느냐?)가 됩니다. 그리고 RSV나 ESV처럼 명령문으로 번역하면, Look at what is before your eyes(네 눈 앞에 있는 것을 보아라)가 됩니다. 최근의 연구를 통해서 점차 명령문으로 보는 견해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번역하면 뜻이 완전히 변하게 됩니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가 아니라 ‘너희 눈 앞에 있는 명백한 실상을 좀 보아라’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믿는다면 그들은 바울 사도 자신도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사실을 믿을 것입니다. 그들이 참 신자라면 그들은 결국 바울 자신이 참 사도라는 것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뒤집어서 보면, 그들이 끝내 바울 자신의 사도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 판단으로써 자신들이 참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4. 바울 사도의 싸움
우리는 바울 사도의 싸움의 본질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보다 구체적으로 그 싸움의 성격에 대하여 10장의 후반부 특별히 12~18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A. 싸움의 핵심은 복음이며, 복음은 모든 교만과 자랑을 깨뜨린다(12).
바울 사도가 이 싸움에서 다루고자 하는 구체적인 증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랑의 문제였습니다. 세상적인 자랑, 인간적인 자랑을 고린도 교회의 대적자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10:12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여기서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이것은 복수 형태입니다. 그러므로 정확하게는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화자찬하는 자들입니다. 11:5에서 말하는 ‘지극히 큰 사도들(super-apostles)’을 일컫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들의 특징을 너무나 정확하게 바울 사도가 지적합니다. 그들은 ‘자기를 칭찬하는 자들’입니다. 바로 자랑의 문제를 꺼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뿌리깊은 죄성인 교만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교만함과 자랑을 깨뜨리는 것이 바로 복음으로써 바울 사도가 하려고 하는 일입니다. 무엇이 과연 우리의 뿌리깊은 죄성인 교만을, 그리고 자기자랑의 뿌리를 다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 외에는 이 교만과 자랑을 뿌리뽑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싸우고 있는 싸움의 핵심은 바로 복음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복음이 여러분의 교만과 자랑의 문제를 건드리고, 그것에 도전하며 마침내 그것을 깨뜨리는 일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거짓 복음입니다. 복음은 여러분의 자만과 교만을 건드립니다. 복음은 여러분의 자랑을 거슬립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 뿌리를 제거하기에 이를 것입니다.
i. 어리석은 자랑(12):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기준이다.
거짓 사도들은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신을 자화자찬하는 내용을 보면 그들이 가진 기준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됨은 누군가와 비교함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12절에서 그들은 ‘지혜가 없도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제일 똑똑하고 잘난 줄 알지만 실로 어리석은 자들이란 말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를 증명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은 자기 우월감이나 열등감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말 것입니다. 둘 다 복음으로 파괴되어야 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B. 싸움의 목적은 고린도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8).
바울 사도가 이 싸움을 하는 목적은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거나 오해를 풀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숭고한 목적은 바로 고린도교회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께 복종하기를 그는 원하기 때문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10: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에게 주신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세우기 위한 권위라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린도 성도들을 다시 세우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자기의 사도직을 아무리 심하게 자랑한다고 할지라도(거짓 사도들이 자기를 자랑하듯이) 결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사도직을 주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5. 자랑이 합당할 때(13~17)
바울 사도가 본문에서 문제삼고 있으며 복음으로써 깨뜨리겠다고 말하는 것은 자랑 그 자체가 아님을 주목하십시오. 왜냐하면 합당한 자랑이 있으며, 바울 사도 자신도 그렇게 자랑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바울 사도가 문제삼는 자랑, 곧 고린도교회의 대적자들과 거짓 사도들이 가진 자랑인데,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비교함으로써 얻어지는 자기 자랑들이었습니다.
A. 하나님이 주신 기준으로 자랑하라(13~16)
바울 사도는 여기서 자기의 자랑을 그들과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자랑합니다(13절). 여기서 ‘분량’이란 단어와 ‘한계’라는 단어를 통해서 바울 사도가 정확하게 의미하려고 한 것이 무엇인가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마는, 그것이 지리적 경계를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가능한 해석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미 베드로를 비롯하여 다른 사도들과 그들의 부르심의 대상에 있어서 선을 그은 적이 있습니다. 갈 2:9입니다.
갈 2:9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이 결과로 인하여 그는 이방인들의 지역인 고린도에 와서 복음을 전했고(행 18) 거기서 열매를 얻어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에게 정해주신 기준의 한도 내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기준의 한도 내에서 자랑합니다. 그 기준의 한도 내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이루신 일들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거짓 사도들처럼 다른 사람과 비교함으로써 주어지는 자랑이 결코 아닙니다. 거짓 사도들은 계속 자신들을 참 사도인 바울과 비교했습니다. 무아경과 같은 체험으로써, 영적 능력으로써, 설교의 웅변적 솜씨로써, 자신들이 받는 사례비의 크기로써….비교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사도라면 자신들은 더욱 더 사도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거짓 사도들은 바울 사도가 건축해 놓은 터 위에서, 다른 사람의 영역에서 자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10:15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량 밖의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더 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바라노라
그들은 바울 사도가 건축해놓은 고린도 교회에서 사역하면서도 자기들의 사역 때문에 이 교회의 생명력이 유지된다고 자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남의 영광을 훔친 자랑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다만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함으로써, 자신의 사역의 한계?이방인의 사도로서?안에서 그 영향력이 점점 더 커져가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만일 고린도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참 믿음 안에서 자라간다면, 그들은 바울 사도의 이방인 전도의 사역을 힘껏 지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바울 사도의 바램은 고린도를 선교의 베이스로 삼아 로마와 스페인으로 복음을 전하러 가고자 하는 것임도 밝혀줍니다(16절).
10:16 이는 남의 한계 안에 예비한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경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바울 사도의 자랑의 기준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한계 내에서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누군가와 비교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영역과 한계 안에서 자랑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은사와 부르심과 사역 안에서 자랑하십시오. 다른 사람과 여러분을 비교함으로써, 또는 다른 사람이 이루어놓은 기초 위에서 자랑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여러분이 얼마나 신실하게 열심으로 살아왔는지로 말하십시오.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B. 주 안에서 자랑하라(17) ?렘 9:23~24
드디어 바울 사도는 적극적으로 합당한 자랑의 원칙을 17절에서 말합니다. 그것은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약성경에 능한 바울 사도는 예레미야 9:23~24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렘 9:23~24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 삶에서 성취하신 것 안에서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기인하는 것이므로 아무도 자기 영적 상태나 힘 또는 은사가 자기 자신의 지혜와 능력에서 온 것처럼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여기서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나 힘있는 자 그리고 부자는 그들이 남이 가지지 않은 지혜와 남이 가지지 않은 힘, 그리고 남이 가지지 않은 부를 가졌기 때문에 비판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지혜와 힘과 부가 그들 자신의 능력으로부터 온 것 처럼 행세할 때 비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랑해야 하는 것은 지혜와 힘과 부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자랑할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은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은혜로 그렇게 알고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의 합당한 자랑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랑을 그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합당한 자랑이라는 것입니다.
슬프게도 고린도교회의 거짓 사도들과 바울 사도를 대적하는 자들이 자랑하는 것들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부적절할 뿐 아니라 악한 것들 뿐이었습니다. 이것들은 다 복음으로써 깨뜨려져야만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들을 다 깨뜨리겠노라고, 그것들을 깨뜨리는 전쟁을 하겠노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6. 하나님이 자랑하는 사람이 되라(18).
결국,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마지막 심판날에 옳다고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옳다고 인정받는 자는 오로지 주께서 칭찬하는 자입니다. 이 지혜를 얻으십시오. 주께서 칭찬하는 자, 주께서 자랑하는 자가 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욥을 마귀 앞에서 자랑하셨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하나님이 자랑하는, 하나님이 칭찬하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이 자랑하고 칭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다른 교회와 비교해서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처럼 헛되고, 그것처럼 복음에 반하는 태도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자기들이 속한 교회를 자랑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말합시다. 그분의 긍휼을 자랑합시다. 죠이선교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을 자랑하십시다. 그리고 죠이선교교회를 하나님이 칭찬하는 교회로 세워가십시다.
7. 교훈/적용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우리가 정리하면서 두 가지를 기억했으면 합니다.
A. 능력은 사람의 비범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능력은 사람의 비범함?다른 사람과 비교하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싸우는 병기(무기)는 하나님의 말씀,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참된 복음은 우리의 교만을 꺾습니다. 우리의 자랑을 뿌리뽑아 내고야 맙니다. 참된 복음의 진리는 죄성에 물든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기분을 상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울 사도가 말씀한 바와 같이 ‘세우려 함’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끝까지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교회가 되고 복음의 진리 안에서 행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사는 동안 그리고 특별히 죠이선교교회를 섬기는 동안 끊임없이 계속해서 복음의 진리를 전함으로써 바울 사도가 싸우는 동일한 싸움을 싸울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은 긍휼과 은혜가 우리 안의 모든 교만과 자랑을 깨뜨리시고 참된 하나님의 사람들로 세워가시는 모습을 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능력은 비범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B. 신앙(성숙)의 증거는 자랑의 기준이 변하는 것이다. 교만이 깨지는 것이다.
두번째로 신앙이 성숙하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아니 그 전에 신앙이 있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자랑의 기준이 변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여러분에게는 여러분 안에 자랑할 것이 남아 있습니까? 신앙이 없는 만큼 내 안에 자랑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들어오면 그런 자랑을 몰아냅니다. 신앙이 가득해지면 질수록 자랑이 설 자리는 없어집니다. 억지로 겸손한 척을 하라고 성경은 어디서도 말하지 않습니다. 참 신앙은 자랑의 기준과 그 내용을 바꾸고야 말기 때문입니다. 교만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까지 가야 합니다. 우리의 예수믿는 것은 여기까지 가서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을 포함한 전존재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여 포로로 사로잡혀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전존재를 생각할 때 아직도 그리스도에게 복종되지 못하는 정신의 영역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죄성에 물든 세상적 기준과 사고 방식 그리고 하나님 없는 정신 구조를 여전히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정말 그리스도의 온전한 포로가 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음의 진리로써 우리 안의 모든 교만과 자랑을 깨뜨려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온전히 그리스도에게 복종케하는 역사를 주시기를 구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강력한 무기
고후 10장 2~7절 / 김태환목사
1940년,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영국은 나치의 공습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당시 영국의 공군력은 독일의 공군력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만큼 열세(劣勢)였습니다.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200대 이상의 나치 폭격기들이 이미 영국을 향해서 날아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단지 26중대의 비행 중대만이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두 대의 비행기를 발진(發進)시켰습니다. 그런데, 전황판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영국을 향하던 나치 비행기들이 방향을 바꾸어서 되돌아 가는 것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전황판에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185대의 나치 비행기들이 격추되었고, 겨우 몇 대만 간신히 격추를 면했습니다. 영국 비행기가 이긴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추락한 전투기의 나치 조종사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영국군 수사관들이 나치 조종사들에게 물었습니다. "단지 두 대의 전투기가 우리 측에서 발진했는데 후퇴한 이유가 뭡니까?" "두 대라구요? 두 대가 아니라 수 백 대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영국군 수사관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실제로 나치 비행기를 대항하기 위해서 발진했던 영국 비행기는 단지 두 대의 낡은 비행기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영국 비행기들이 출격했다니,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나치 비행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매일 저녁 빅벤(Big Ben) 시계가 9시를 알리는 종을 치면 당신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무기를 사용합니다. 우리는 어떤 무기로도 당신들의 무기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의 말이 옳았습니다. 영국 국회의사당(Westminster Palace) 시계탑에 있는 빅벤 시계가 9시를 알리면 강력한 무기가 작동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시각이 되면 영국 국민들은 일손을 멈추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침묵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기도가 이렇게 강력한 무기(武器, weapons)인 것을 믿습니까? 웬만한 그리스도인들은 에베소서 6장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무장(the spiritual armament)에 대하여 잘 압니다. 머리에 구원의 투구를 쓰고, 가슴에는 의(義)의 흉배(breastplate)를 붙이고, 허리에는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한 손에는 믿음의 방패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성령의 칼, 곧 말씀의 칼을 들고, 발에는 평화의 복음의 신발을 신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잘 아는 사람도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을 잘 모릅니다. “성령 안에서 늘 기도하고 필요한 모든 것을 위해 간구하십시오. 언제나 준비된 마음으로 좌절하지 말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Pray in the Spirit at all times and on every occasion. Stay alert and be persistent in your prayers for all believers everywhere).” (에베소서 6:18) 이 말씀이 개역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기도 없는 영적무장은 무용지물이라는 것입니다. 때를 가리지 않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기도야말로 진정한 영적무장이라는 것입니다. 영국의 종교개혁자 죤 낙스(John Knox)가 이렇게 말했다지요?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온 민족보다 강하고, 무릎 위에 놓인 나라는 무기 아래 있는 나라보다 강하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강력한 무기를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막상 전투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군인을 누가 두려워하겠습니까? 지금도 하는지 모르지만 몇 년 전에 Fear Factor」라고 하는 TV 프로가 인기였습니다. 관 속에 사람을 눕혀 놓고 발쪽에는 지렁이를 쏟아 붓고, 머리에는 바퀴벌레는 쏟아 붓고, 가슴 쪽에는 긴 뱀을 쏟아 붓고는 손으로 뱀 중에 흰 뱀 열 마리를 골라서 통 속에 넣는 것입니다. 시간을 재면서 누가 빨리 잡아 넣느냐 하는 것입니다. 머리며, 얼굴을 타고 다니는 바퀴벌레도 징그럽고, 또 발 쪽에 옴지락 거리는 지렁이도 징그럽지만, 뱀은 손으로 잡기가 무섭습니다. 그런데 출연자들은 뱀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물지 않는 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뱀이 무서운 것은 뱀의 이빨에 독이 있기 때문에 뱀에게 물릴까봐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물지 않는 뱀이라면 무서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강력한 영적 싸움의 무기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바울은 “우리의 무기는 세상의 무기가 아니라, 강한 요새라도 파괴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모든 이론들을 파괴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항하는 온갖 교만한 생각들을 물리쳐, 모든 생각들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라고 말합니다. NLT 성경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e use God’s mighty weapons, not worldly weapons, to knock down the strongholds of human reasoning and to destroy false arguments.” 세상의 무기는 정교한 이론으로 무장한 사상입니다. 바울은 선교 현장에서 이렇게 세상 무기로 무장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어리석은 이론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가 아테네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 당시 최고의 철학으로 무장한 소피스트들(sophists)이었습니다. 이들은 현인(賢人)들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궤변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한번 궤변을 늘어 놓으면 아무도 당할 재간이 없었습니다. 이런 궤변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대면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어떤 이론이나 사상보다 더 강력한 하나님의 무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무기 앞에서 어떤 강력한 이론도 무너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사용했던 그 하나님의 무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다시 이 말을 바꾸어서, 오늘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하나님의 무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찬송은 어떻습니까? 찬송이 하나님의 강력한 무기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야고보서 5:13에 “여러분 가운데 고난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다면 찬송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찬송과 기도가 성도들의 강력한 무기임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NLT 성경에는 이 말씀이 더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Are any of you suffering hardships? You should pray. Are any of you happy? You should sing praises.”
꿈에 그리던 마케도니아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케도니아 첫 성이라고 할 수 있는 빌립보에서 바울은 귀신들린 여자 하나를 만납니다. 그 여자는 점을 쳐서 주인에게 돈을 벌어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바울 일행을 계속해서 따라 다니면서 “이 사람들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이다. 이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고 계시다”라고 외쳤습니다. 여자가 며칠이고 계속 이렇게 하자, 참다못한 바울은 돌아서서 그 귀신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령한다. 그 여자에게서 나오너라!”라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귀신이 그 여자에게서 나왔습니다. 그 여자는 제 정신이 들었지만, 더 이상 점을 칠 수가 없었습니다. 화가난 주인은 바울을 고발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빌립보 선교가 막 시작 되었을 무렵에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빌립보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지, 바울이 감옥에 갇히는 바람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잠이 든 한 밤 중에 바울과 실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강력한 하나님의 무기를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찬송을 불렀습니다. 아까 읽은 야고보서 말씀에는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은 기도하고, 즐거운 사람은 찬송하라고 했는데, 그 순서를 바꾸어도 됩니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이 찬송하고, 즐거운 사람이 기도해도 됩니다. 찬송의 무기는 손과 발에 채웠던 수갑을 열었고, 감옥의 문을 열었습니다. 감옥의 자물쇠가 열린 것입니다. 찬송에 무슨 힘이 그렇게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찬송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는 찬송은 엄밀한 의미에서 찬송이 아닙니다. 찬송이라는 말 속에 “the act of expressing approval or admiration” “the offering of grateful homage in words or song, as an act of worship”이란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인정하고,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찬송을 많이 부르세요. 곡조에만 마음을 쓰지 말고, 가사에 더 마음을 써서 찬송을 부르세요.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을 높여 드리세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계획하시고 시행하고 계시는 일들을 인정해 드리세요.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Do your best, pray and God will do the rest.”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기도의 무기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기도의 무기가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2차 세계 대전 때, 영국 사람들이 국회 의사당의 Big Ben 시계가 저녁 9시를 알릴 때 일제히 침묵의 기도를 드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침묵의 기도에 무슨 힘이 있습니까? 독일의 나치들은 그 침묵의 기도를 “우리가 알 수 없는 무기”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이 상황 속에 개입해 들어 오시기를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이 상황을 바꾸어 놓을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무기를 사용하십시오. 바울은 “성령 안에서 늘 기도하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필요한 모든 것을 위해 간구하십시오. 언제나 준비된 마음으로 좌절하지 말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에베소서 6:18)”라고 했습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Pray in the Spirit)”는 말씀이 열쇠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기도가 잘못된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 다 이기적이기 때문에 기도의 내용도 이기적일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말은 성령께서 나의 이기적인 기도를 걸러내시라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것을 걸러내시고, 그렇지 않는 것은 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또 나의 이기적인 기도를 아예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로 바꾸어 달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회개를 전제로 하는 기도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세계를 정복하려고 하는 음모를 가진 나치 정권이, 수많은 사람들을 살상하는 광신적인 정권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면,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 주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구하는 것들이 무엇이냐 하는 리서치(research) 결과가 나왔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구하는 것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구하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구하는 것들 중에 제일 많이 나온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돈), 건강, 명예, 가정의 평안, 자녀들의 성공 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성공에 대한 생각도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똑 같았습니다. 여전히 그리스도인들도 물질적인 축복을 성공으로 생각하고, 높은 지위를 얻는 것을 성공으로 생각하고, 많은 지식을 획득하는 것을 성공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기도의 무기를 이렇게 사용하는 것은 평화적으로 사용해야할 무기를 살상무기로 잘못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누가 썼는지 작자 미상(未詳)의 기도문이 회자하고 있습니다. “나는 강건함을 구했지만, 주님은 시련을 통해 나를 강하게 만드셨습니다. 나는 지혜를 구했지만, 주님은 나에게 문제를 주셔서 그것을 해결하도록 하셨습니다. 나는 번영을 구했지만, 주님은 나에게 일하는데 필요한 힘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나는 용기를 구했지만, 주님은 어려움을 주셔서 그것을 이기도록 하셨습니다. 나는 사랑을 구했지만, 주님은 문제있는 사람들을 보내시어 그들을 돕도록 하셨습니다. 나는 호의를 구했지만, 주님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도 얻지 못했지만, 나는 내가 필요로하는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바울의 고백을 다시 들어 보십시오. “우리의 무기는 세상의 무기가 아니라, 강한 요새라도 파괴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모든 이론들을 파괴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항하는 온갖 교만한 생각들을 물리쳐, 모든 생각들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무기를 사용하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교만의 장벽들(proud obstacles), 거짓된 주장들(false arguments), 인간의 이성으로 쌓은 요새들(strongholds of human reasoning)을 허물기 위해서입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강력한 무기가 아니면 결코 허물어지지 않습니다. 왜 그것들을 허물어야 합니까? “to bring every thought into captivity to the obedience of Christ” 입니다. 모든 사람의 생각을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의 전쟁에서 이겨라
고후10장 1~7절 / 민경설목사
지금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전쟁으로 많은 인명 손실과 재산 피해를 초래했습니다. 더구나 죄없는 어린이 생명의 손실은 더욱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대규모의 국가 간의 전쟁, 개인 간의 크고 작은 범죄 사건들을 보면 그 원인은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마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음을 지키고 마음을 다스리라고 합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 인간의 마음은 늘 전쟁터이고 싸움터입니다. 저명한 기독학자인 C. S 루이스는 말하길 “우리 마음은 하나님과 사탄이 서로 지배하려고 하는 전쟁터이다.”라고 했고, 벡스터라고 하는 영성지도자는 말하기를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만 들어오시고 사탄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라.’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들어오시도록 지켜야 합니다. 사탄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켜야 합니다. 마음의 전쟁에서 이기면 축복이 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전쟁이라 할 때 어떤 전쟁인가를 잘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단순히 착한 마음을 가지려고 하는 노력이 아니라, 흑암의 영적 세력인 사탄(마귀)가 내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전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가룟 유다는 마음의 전쟁에서 실패하여 파멸한 것입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13:2)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아주 엄숙하고 단호하게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의 전쟁에서 승리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의 강한 징계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려는 것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고후10:2) 우리 마음의 전쟁의 배면에는 흑암의 영적 세력인 사탄이 역사하지만 그들이 역사하는 무대는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세속적인 마음입니다. 이를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2:15-16) 그러면 마음의 전쟁에서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 번째, 육을 기준으로 하지 말고 영을 기준으로 살아야 합니다.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또한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려는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고후10:1-2) 보이지 않는 것을 귀중한 줄로 알 때 마음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는 육을 기준으로 하지 말고 영을 기준으로 해야 승리합니다. 삼손은 육을 기준으로 하여 들릴라를 쳐다보다가 실패하게 되었고, 그러나 같은 상황에서 요셉은 영을 기준으로 하여 승리하였습니다.
두 번째, 내 속에 불신앙에서 가진 경험이나 선입관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후10:3-4) 많은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들어도 자기 기준에서 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경험, 철학, 선입관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내 안에 장벽을 무너뜨려야 이루어집니다. 성령의 체험이 있으면 견고한 진이 무너집니다. 기도를 하면 내 마음 속의 견고한 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 내어놓을 때 견고한 진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으면서 믿음이 생깁니다. 성경에서는 잘 믿으면 복 받는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마음의 장벽을 무너뜨려서 마음의 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세 번째,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아 예수께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고후10:5-7) 우리의 생각은 사로잡지 못하면 우주를 떠다닙니다. 생각은 날개 없이 떠다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보다 높아진 생각을 사로잡아서 예수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기적을 체험하는 길은 바로 순종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순종을 못하게 하는 요소가 있는데, 그 요소는 생각입니다. 즉 순종을 못하는 것은 내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을 사로잡아야 순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자는 의지도 구원받았기에 생각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생각을 사로잡지 못하나 구원받은 자는 생각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은 순종한 사람들만 그 기적의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해야 할 때입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무시하더라도 하나님께 생각을 복종시켜 순종해야 합니다. 마음의 전쟁에서 이겨 승리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클래스가 다른 사람들
박봉수목사 / 고후 10:1-11
손흥민 선수는 한국축구의 자랑이요, 보물과 같은 선수입니다. 손 선수와 함께 뛰어본 국가대표 선수들이 한 결 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손흥민은 클래스가 다른 선수입니다.” 자기들은 우리나라 최고 클래스의 선수들이지만, 손 선수는 세계 최고 클래스의 선수 즉 월드클래스의 선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손 선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흥민이는 절대 월드클래스가 아닙니다.” 그리고 손 선수 자신도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월드클래스가 되려고 노력하는 선수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사람들이 손흥민 선수는 축구 기량만이 아니라, 그 인격도 클래스가 다른 진정한 월드클래스라고 칭찬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각 분야에 이렇게 클래스가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과는 재능이나 기량의 클래스가 다르고, 삶이나 인격의 클래스가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의 분야에서도 그렇습니다. 클래스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클래스가 다르고, 삶의 클래스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고전 11:1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바울은 자기가 평생을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힘써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년에 정말 예수를 많이 닮게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들과는 클래스가 다른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우리도 자기처럼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자기처럼 클래스가 다른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을수록 예수를 닮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믿음과 삶의 클래스가 다른 사람들이 되어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바울의 클래스가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주님을 보듯, 이 세상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믿음과 삶의 클래스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격
본문 1절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당시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입니다. 고린도에 18개월이나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고, 풍성한 복음의 열매가 맺혀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다른 선교사역을 위해서 고린도를 떠났습니다.
그 이후에 몇몇 복음전도자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왔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사역을 하게 됐는데, 유감스럽게도 바울을 공격합니다.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전한 복음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고린도교인들 가운데 동조자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갈등과 다툼이 생겼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 이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당장 갈 수는 없고 해서, 편지를 쓰게 됐습니다.
다시 1절을 보면,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이라고 자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직접 자신을 소개하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닙니다.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받아서 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이렇게 말하는 나 바울은” 이런 식의 말입니다.
여기서 “대면하면 유순하고”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함께 있을 때는 아무 말도 못하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비속한 말로 풀어보면 “비겁하게 같이 있을 때는 찍소리도 못하다가”라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이란 말은 또 무슨 뜻일까요? 멀리 있을 때는 용감한 척, 이런 저런 말을 한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앞서 보낸 편지에서 강하게 책망한 것을 보고 한 말일 것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기가 18개월이나 머물며 혼신을 다해서 복음을 전했고, 그래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교인들 대부분 바울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됐고, 교회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제자이고, 바울에게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자기를 욕합니다. 그리고 거짓 복음을 전합니다. 교인들이 그 말을 듣고 동조합니다. 그들에게 미혹당해서 바울을 욕하고, 바울이 전한 복음을 부정합니다.
바울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그렇게 사랑했고 최선을 다해 섬겼던 사람에게 비난을 받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아비가 자식에게 비난을 당하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생명을 걸고 전한 복음이 부정당하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화가 났을 것입니다.
우리말에 “피가 거꾸로 솟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은 젊은이들 사이에 이것을 줄여서 ‘피꺼솟’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피가 머리에 모인다는 뜻인데, 너무 화가 나서 흥분한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아마도 바울도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듣고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화를 내거나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온유하게 대했고,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클래스가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화를 내야 할 상황인데 화를 가라앉혔고, 비난을 해야 할 상황인데 자제했습니다.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도 온유 즉 부드러운 모습을 잃지 않았고, 관용 즉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인격의 다른 클래스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1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바울은 자기가 보이고 있는 이 온유와 관용이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원래 이런 온유와 관용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힘쓰는 중에 이런 온유와 관용을 보일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눅 23:34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로마 군병들이 모욕하고 조롱하고, 채찍으로 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에 대해 화내시거나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온유하게 대하셨고, 용서를 빌며 관용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이런 주님의 모습을 묵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큰 위로와 용기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주님처럼 해야겠다고 결단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도저히 끓어오르는 분노를 어찌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바울처럼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면서도 온유와 관용을 잃지 않으셨던 주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처럼 온유한 모습으로 관용을 베풀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라는 말씀을 되뇌이면서 말입니다.
생각
본문 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그리고 또 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외모만 보는 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바울과 그 대적들 사이에 생각하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선 바울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관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들은 고린도교회 내의 파벌싸움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현재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떠난 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바울을 따르는 추종세력이 교회 내의 주도권을 잡고 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하면 자기들이 세력을 키우고, 교회 내의 주도권을 잡을까 하는 생각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공격하고, 또 바울이 전한 복음에도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에 비해서 바울이 생각하는 관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바울은 교회 내의 주도권 싸움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오직 고린도교회가 그리스도가 주도권을 가지신 공동체가 되는 것, 그리고 고린도교인들과 자신이 그리스도의 뜻에 복종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대적들이 이런 공격이 다 육신에 속한 일일 뿐이고, 외모만 보고 하는 일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주도권이 손상을 입을까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또 클래스가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 6:33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이 세상 나라에서 살아가는 동안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지금 이 말씀을 따라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내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대적들이 자기를 공격하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몰아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세상 나라의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내가 이기느냐 아니면 네가 이기느냐의 싸움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그리스도가 이기는 길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세상 나라의 논리, 세상 나라의 삶의 방식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논리와 삶의 방식에 매몰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나라의 논리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생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친구 목사님에게서 한 교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젊은 부부가 아이를 출산하여 양육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이가 지적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이 부부는 세상적으로 볼 때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조건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부부가 모두 좋은 집안 출신에 일류대학을 나오고 해외유학까지 다녀왔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습니다. 당연히 아이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처음 이 부부가 너무 충격을 받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힘들어했습니다. 아이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아이를 주실 수 있느냐고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봉사도 다 내려놓고 교회마저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이 목사님이 간절히 기도하며 권면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었습니다. 이 부부가 말씀을 묵상하다 큰 깨달음을 얻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세상에 보낼 계획을 가지고 계셨고, 어느 가정에 보낼까 살피시다가 자기 가정을 택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자기들을 미쁘시게 여기시고 이 아이를 맡기셨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이 깨달음으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 아이가 수치가 아니고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아이가 복이면서 사명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사랑하고 축복하며 아이를 양육하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생각을 바꾸면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더 행복해 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생각의 차이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 생각의 차이가 클래스가 다른 삶을 살게 해 줍니다.
행동
본문 8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바울은 주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권세를 파괴하고 무너뜨리는데 쓰지 않고, 세우고 살리는데 써왔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바울은 자기는 주께서 주신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권세가 무엇일까요?
고전 9:1-2를 보면 바울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으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바울이 앞서 보낸 편지에서 고린도교인들에게 했던 말입니다. 자기가 사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사도라는 실질적 증거는 바로 고린도교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사도의 권세를 주셨기 때문에 고린도에서 많은 전도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고,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바울이 사도냐 아니냐 시비를 걸 수는 있어도, 고린도교인들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교인들은 바울이 사도라는 구체적인 증거를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주께서 주신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권세로 고린도교회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고린도교회가 거짓 복음에 오염되고, 주도권 싸움에 사분오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 권세를 가지고 비록 잘못됐어도 고치고 회복시켜서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권세를 주님의 교회를 새롭게 하고 다시 세우는데 쓰겠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또 하나 클래스가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요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셨을 때 베데스다 연못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거기 38년 된 병자가 누워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셔서 그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유대인들이 그 날이 안식일이라고 시비를 겁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도 율법을 어기는 일이요, 들것을 들고 걸어가는 것도 율법을 어기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고쳐주신 예수님도 정죄하고, 고침 받고 들것을 들고 걸었던 이 병이 나은 사람도 정죄하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기들이 가진 권세로 율법을 지키려고만 했지, 사람을 돕고 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권세로 사람을 고치고 세우는 일을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권세로 사람을 세우고 고치고 살리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사람을 세우고 살리는 일에 써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권력, 재물, 지식, 그리고 힘으로 사람을 돕고 세우고 살리려 해야 합니다. 행여 그것으로 우리 자신을 자랑하는데 써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거나 죽이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무엇을 하느냐가 클래스 차이를 보여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클래스가 다른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주님을 본받으려 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으려 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격의 클래스가 다르게 될 것입니다. 주님처럼 생각하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의 클래스가 다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하신 일을 하려 해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의 클래스가 다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더욱 주님을 본받아 세상 사람들과 다른 클래스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마귀의 견고한 진을 파괴하라
고후 10:3-6 / 김창환목사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 10:3-6),
'견고한 진'이란 전투 부대의 공격이나 방어를 위한 준비로 구축해 놓은지역을 말한다. 마귀의 견고한 진을 반드시 파괴해야 한다. '마귀의 견고한 진'이란 하나님을 대적하는 부정적인 적군의 요새를 뜻한다. 사도 바울은 이 부정적인 견고한 진을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서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을 아는 진리의 성경 말씀 이외의 인간의 모든 지식이 바로 견고한 성이나 군대의 요새처럼 무너뜨리기 힘든 견고한 진이라는 것이다. - [나바론]
1. 육체대로 사는 것(동성애)
육체적인 욕망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의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하나님은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다(창 1:1). 특히 사람을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을 땐 심히 기뻐하셨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6-27).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첫 번째 표적으로 가나안 혼인잔치를 축복하셨다(요 2:1-11). 창조 질서의 완성은 남자와 여자와의 결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의 창조의 질서를 깨트리고 말았다. 성을 오용하고 남용하였다. 오늘의 이르러서는 성을 임의로 바꾸려는 시도를 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거역하는 일들이 무수히 일어나고 있다. 근래에 퀴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퀴어란 용어는 ‘낯설고 이상하다’는 뜻이다. LGBT나 QIA(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퀘스처닝, 인터섹스, 어섹슈얼)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롬 1:26-27).
2. 세상의 모든 이론(고정 관념, 특정한 이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3).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약 3:15).
3.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마귀의 생각)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 생각을 넣었더니"(요 13:2).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려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 16:23).
4. 높아지는 것(영적 교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는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결론. 시대마다 설치한 마귀의 견교한 진들을 반드시 파괴해야 한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 10:3-6), 마귀의 궤계를 따르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생각부터 바꾸라
고후10장 3~6절 / 채규현목사
제가 전에 있는 교회에서 제 아내의 동창들이 모여서 찬양집회를 했습니다. 제 아내가 성악과를 나왔기 때문에 성악과 친구들, 동기들이 전부 모여서 찬양집회를 했습니다. 독창도 하기도 하고, 중창도 하기도 하고, 전부 모여서 찬양집회를 했었는데, 그 중에 한 분이 나와서 간증을 했습니다. 이분들이 전업주부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이 음대 교수거나 아니면 음악 선생님이었습니다. 근데 그 중 음악대학교 교수를 하시는 한 분이 간증을 했습니다. 근데 이 분이 자궁암에 걸렸어요. 그래서 병원에서 판정은 난소 제거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난소 제거 수술을 하려고 보니까 인제 문제에 봉착한 것입니다. 이 분이 듣기에 난소 제거 수술을 하면 여성 호르몬이 안 나온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근데 여성 호르몬이 안 나오면 목소리가 바뀐답니다. 근데 성악가가 목소리가 바뀌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건 완전히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망설이게 되었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습니다. 근데 나중에 다시 알아보니까 이 생각이 그렇게 만든다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면 ‘이제 내가 난소를 제거했으니까 여성호르몬이 안 나올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정말로 여성호르몬이 안 나온답니다. 근데 그런 생각이 없이 그냥 살면 여성 호르몬이 나온답니다. 근데 그때 제가 느낀 것이 사람의 생각의 힘이 대단히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생각한 만큼 되는 일이 많고, 심지어는 사람이 생각한 만큼 몸이 움직여지고, 몸의 호르몬 체계가 바뀔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psychosomatic하다고 합니다. 정신과 육체가 결합되어서 함께 작용한다는 말인데, 그런 육체적인 문제 말고라도, 우리의 인생길에서 보면 사람이 생각한 만큼 된다는 것입니다.
잠언 23장에 보면,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위인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지저분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면, 그의 삶의 방향도 지저분해지고, 그리고 결국 그 위인도 지저분한 인간이 됩니다. 마음속에 고결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면, 그의 삶의 방향도 고결한 방향으로 갈 것이고, 심지어는 그 사람의 위인도 고결한 위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의 힘이 그렇게 크다는 것이죠. 우리 생각에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서 우리 삶의 방향도, 우리 삶의 질도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생각 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나비가 처음부터 나비는 아니거든요. 나비가 어려서는 무엇입니까? 그냥 송충이 같은 벌레 입니다. caterpillar라고 하죠. 그런 벌레이고, 땅에서 기어 다닙니다. 그러다 나무위에 올라가서 실로 자기 몸을 감고, 고치를 이룹니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집니다! 알에서 구멍이 뚫리고 점점 구멍이 넓어진 다음에, 그 안에서는 더 이상 애벌레가 아닌 ‘나비’가 나옵니다. 그래서 자유롭게 비상을 합니다. 물론 나비는 본능대로 움직입니다. 본능대로 땅을 기어 다니는 그 순간에도, 나비인 것입니다. 그 본능 속에. 그래서 나비이기 때문에 나비가 가야 될 길을 갑니다. 나무에 올라가고, 고치를 만들고, 마침내 나비가 되어서 창공을 납니다. 나비는 본능으로 그렇게 하지만, 사람은 어떻습니까? 만약에 나비에게 본능이 없어져서 그냥 벌레대로 그렇게 산다면 계속해서 땅을 기어 다니지 하늘을 날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나비의 본능의 힘과 비슷한 것이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이 어디까지 미쳐있느냐에 따라서 그만큼 그 사람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계속해서 이 세상에서만 집착해서 살 수도 있고, 아니면 창공을 나는 자유함을 누리는 삶을 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나비로 말하면 물론 본능 속에 있지만은, 처음 애벌레일 때부터, 땅을 기어 다니는 그 때부터, 나비라는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나비라는 본능이 그 속에 잠재되어 있듯이, 우리 사람들도 특히 예수님 믿는 사람은 그 속에 ‘나는 하늘의 백성이다’ 라는 것이 그 생각 속에 가득 차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 우리가 흙을 밟고 살지만, 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면 우리의 삶은 점점 마치 나비가 나무에 올라가고, 고치를 틀고, 나비가 되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비상하는 삶을 살기위한 방향으로 우리가 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생각의 높이에 따라서 그 정도의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의 높이는 어떻습니까? 어느 정도까지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까?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 생각에 따라서 그 사람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 생각만큼 그 사람이 발전하고, 목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도 결국 악착같이 갖고자 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생각들입니다. 에베소서 6장에 보면 “종말로 주 안에서 내가 그 힘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라고 했습니다. 마귀의 궤계가 어디서 일어나느냐.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 속에서 , 우리의 영적인 삶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런 우리의 생각을 잡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고린도후서에서 계속 보면,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우리 복음이 전파되다가 뭔가 가리운 것이 있다면 그 사람들이 바로 ‘망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 이 세상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 중에 이 세상신이, 마귀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 믿는 사람들이 왜 안 믿느냐. 그들의 마음을 사단이 혼미케 해서 무엇이 바르고 무엇이 바르지 않은지 ,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를 판단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주 지혜롭고 명석한 사람들의 데려와 보십시오. 그 사람들이 인생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 우리가 버려도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까?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영원한 것을 팽개쳐두고 이 세상에서 자꾸 썩어지고 없어질 것을 택해서 그것을 향해 나아갑니다. 복음을 증거해도 받아들일 능력이 없습니다. 이미 마음이 혼미케 되어서 정신없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들은 영적인 장님이요, 영적인 귀머거리요, 영적인 식물인간들 입니다. 자기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이미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임하기 전에는 깨어날 수 없는 영적 식물인간들 입니다. 완전히 마음이 혼미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에게 임할 때, 그들은 영의 눈을 뜨고 깨어나게 됩니다. 생각이 깨어나게 됩니다. 예수님 믿게 될 때, 전혀 이 세상이 달리 보입니다. 제가 처음에 예수님을 믿을 때, 저도 그와 같은 똑같은 경험을 했어요. 예수님 믿고 나서 보니까, ‘아니, 내가 이제까지 전부라고 알고 살던 그 삶, 그 삶이 전체 이 삶의 극히 일부분이었다’ 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단지 인생 길면 100년인, 그 안의 삶만을 알았었는데, 영원한 삶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우리의 눈과 귀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데만 전부 인 줄 알았는데, 또 다른 영적인 세계, 더 크고 놀라운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그 때 새롭게 알았습니다. 눈을 떴다는 이야기죠. 드디어 빛이 어두움을 비춰서 내가 이제까지 어두움 속에서 살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고, 빛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서 우리가 새로운 빛을 받았는데, 예수님 믿은 후에도, 빛이 임한 후에도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의 생각을 잡아서 자기의 노예로 만들려고 합니다. 불행한 사실은, 믿지 않는 사람이 혼미케 되고, 영적 식물인간이 된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어떻게 믿는 사람들이 , 예수님을 믿고 빛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마음이 혼미케 되었냐는 겁니다. 그래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지 못하고,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우리 인생에서 진정으로 값진 것과 버려도 될 것을 왜 구별하지 못하느냐는 겁니다. 오늘 말씀 중에 무엇이 있습니까? 5절에 보니까 “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이론, 상식을 다 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는 것일 대적하는 높아진 것들, 모든 교만하게 만드는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냐. 교만해 져서 그렇습니다. 하나님 뜻보다는 내가 더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맘대로 일을 처리하려고 합니다. 자기의 뜻대로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뜻은 싫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생각 속에서 일어납니다. 생각이 이미 사단에게 사로잡히면 우리가 아무리 이렇게 하려고 마음먹었다고 해도 그게 안 됩니다. 바로 그 생각이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혀야만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그리하여서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음 주신대로 정말 높은 이상으로 , 하나님이 주신 목표대로 바뀌어야만 합니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로 복종하게 해야만 해야 한다.” 원래는 여러분의 마음이 사단의 놀이터였습니다. 사단이 마음대로 마음껏 뒤흔들던 곳입니다. 예수님 믿으면서부터 그 생각의 습관들이 잘 바뀌지를 않아요. 그래서 사단이 내게 주는 대로, 옛날에 하던 습관대로 그냥 생각하려고 합니다. 생각의 습관이 무엇입니까? 마치 나비 애벌레가 땅에 살면서 계속해서 습관적으로 땅에 있을 것 아닙니까? 나비라는 생각이 그 본능 속에 없었다면 나무에 기어 올라가지도 않고, 고치를 만들지도 않죠. 변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로 쓰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건 상식에 맞지 않는데’, ‘ 확실한 답을 찾기 전까지는 다음에 합시다.’ ‘이건 실제적이 아닌데요.’ ‘이건 위험부담이 너무 큰데요.’ ‘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데요.’ ‘ 너무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맙시다.’, ‘우리는 못 합니다’ ‘틀림없이 잘못될 것입니다’ ‘ 그냥 있는 그대로 삽시다’ 변화를 거부하는 대부분의 생각이 사단이 주는 생각입니다. 습관대로 살려고 하는 것, 이제까지 살던 대로 살려고 하는 것, 그냥 그대로 앞으로도 계속 쭉 살기를 원하는 것. 이것이 대부분이 사단이 주는 생각입니다. 변화를 싫어하는 삶. 그냥 남들이 가는 길에 같이 가기를 원해요. 남들이 휩쓰는 대로 휩쓸리기를 원해요. 거기서 따로 떨어져서 내게 있는 변화된 생각의 방향대로 가기를 싫어합니다. 그것이 생각이 습관입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대로 살아가면 별 문제가 없을 텐데’.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에 대한 겁이 대단히 많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근데 여러분이 실패를 두려워하는 한 여러분의 삶의 변화도 없고 발전도 없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시는 최선의 삶을 향한 전진도 없습니다. 우리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갈 때에, 당연히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잘 모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제게 기대하기를 목사님은 해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은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근데 많은 경우에 저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사실 잘 모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띤 그 길 위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한 가지 아는 것은, 그렇게 가야 저 언덕에 있는 푸른 초장으로 간다는 사실만은 압니다. 지금 당장 여기에서 돌에 부딪혀서 넘어질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이 방향으로 가야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자유의 땅, 축복의 땅으로 가는 것임은 압니다. 그것을 알 뿐이에요. 그렇게 가다보면, 물론 실패할 때도 있죠. 실패가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실수하고 잘못되면 어떻게 합니까? 그냥 같이 웃는 것입니다. “허허, 또 역시 우리가 부족해서 실수했구나, 실패했구나.” 하고 웃는 겁니다. 제가 우리 교회 부임한 지 1년 2개월이 되었는데,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축복하셨습니다. 여러모로 축복하셨습니다. 많은 변화가 있고, 대부분 그 변화는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한 일이 다 잘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때는 그렇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고 아쉬움이 있습니다. 여러분들과 좀 더 가깝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적도 있고, 그 당시에 이 방향보다는 저 방향으로 했으면 좋았겠다고 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제게 그렇게 느끼는 것 같아요. ‘우리 목사님은 아주 치밀하고, 절대로 실수를 안 하는 사람이다.’ 라고 대개, 아니 대개가 아닌 그렇게 많이 느끼는 것 같아요. 근데 이미 제 가까이에서 함께 일한 장로님들이나, 여러분들이 느끼실 때 이미 눈치를 챘을 겁니다. 제가 얼마나 허점이 많은 사람인지 말입니다. 잘 잊어버리기도 하고, 실수도 많고, 허점도 대단히 많습니다. 실수도 많이 합니다. 물론 잘못도 많이 합니다. 근데 한 가지 믿는 게 있습니다. 그것이 별거 아닙니다. 저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이 하는 실수도 일단 방향이 정해져서 하나님이 원하는 길로 가려고 할 때, 넘어지고 쓰러지고 실수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실수나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길로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비하신 그 축복의 길로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교역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수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시도하라. 실패하면 왜 실패했는지에 대해 공부하자.” 오늘 아침에도 1부 예배 때 하마터면 우리 샤론 성가대의 이름이 몇 번 씩 바뀔 뻔 했습니다. 아침에 찬양대에 가서 기도를 하는데, 열심히 기도하고 나서는 어느 분이 “목사님 우리 할렐루야 아니에요 !”라고 말하시더군요. 있지도 않는 할렐루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나온 겁니다. 그래서 웃었죠. 그리고서는 내려왔는데 또 기도하시는 장로님께서 ‘시온 찬양대 축복해주시고’ 라고 기도를 했어요. 그래서 샤론 찬양대에게 “아무래도 오늘 개명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근데 그런 실수가 있어야 사람이 웃지요. 아주 큰 피해가 없다면 그런 실수가 있을 때 우리가 웃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같이 웃을 수 있는 여유도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실수가 우리에게 없다면 발전도 역시 없습니다. 저는 답답한 것이, 많은 공부하는 학생들이 스스로 자기 생각으로 자기의 발전할 기회를 막는 것을 봅니다. 공부 잘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90점을 맞으면 자기 머리를 쥐어박고, 가슴을 치면서 한탄을 합니다. 통곡을 합니다. 90점을 맞았다고! 그의 목표는 100점입니다. 근데 공부 못하는 학생은 80점 맞고 즐거워합니다. 이것이 차이입니다. 그래서 저는 학생들에게 어찌하던지 한 번이라도 공부를 잘 하는 대열 속에 한 번 껴보라고 말합니다. 여하튼 단기간이라도 열심히 해서 공부를 잘하는 대열에 끼어보라고 이야기합니다. 한 번 끼어보면, ‘아, 나도 저 그룹에 들어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의 높이가 정해지니까 그 다음에는 그 곳을 향해서 노력하고 결국에는 그 그룹에 끼게 되는 것입니다. 근데 공부 못하는 학생들은 스스로 70점만 맞아도 만족하고, ‘나는 오늘 잘했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학생은 영원히 70그룹으로만 가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의 높이만큼 여러분이 됩니다. 그래서 어찌하던지 저는 그런 학생들에게 한 과목에 집중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한 과목에 집중해서 한 번 일종의 ‘통달’을 하고, 즉 마스터를 하고 나면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러면 다른 과목도 그렇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할 수 있습니다. 생각의 높이를 먼저 높여야 합니다. 저도 그렇게 공부를 잘 하지도 못했고, 좋아하는 학생도 아니었습니다. 다행히 어느 순간에 어느 선생님 한 분이 저를 격려해주고 힘을 주시고 경쟁을 시켜주셨습니다. 공부는 하기 싫은데 경쟁에 지기는 싫더라고요. 그래서 어찌어찌 끌려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근데 한 과목을 하고 나니까 다른 과목도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다른 과목들도 그런 식으로 공부했습니다. 생각의 높이를 높여야 합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갖다오고 유학을 생각하는데, 사실 그 때 유학 갈 여건이 되지를 않았습니다. 사실 유학을 오랫동안 준비한 것도 아니었고, 유학을 갈 생각도 없었고, 재정적으로도 유학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잘 몰랐습니다. 근데 ‘이 길을 가야만 내가 인생에서 어느 정도의 수준과 높이에서 살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 길로 가려고 노력을 했는데 결국 그 뒤에 어찌어찌해서 유학을 가게 됐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특히 예수님 믿은 후부터는 생각의 높이를 높이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떨 때는요, 내가 그 생각의 높이를 정할 때 스스로 내 자신에 대해서 비웃기도 했어요. ‘야, 그게 가당키나 한 얘기냐. 네가 어떻게 거기까지 될 수 있느냐.’ 이런 생각들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근데 그 가당치도 않은 목표에 대해서 목표를 세우고 다른 사람에게 고백을 했습니다. ‘난 이렇게 되길 원한다.’ 심지어는 목회자들도 그래요. ‘생각의 높이만큼 됩디다. 자기의 비전의 크기만큼 됩디다.’ 그 비전이 있으면 우리 청년들에게도 저는 이야기하고 싶어요. 여러분의 인생의, 삶의 목표는 어디까지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삶의 목표는 어디까지냐고요. 그 높이가 어디냐에 따라서 그 다음의 여러분의 인생은 결정이 되게 되어있습니다. 한 개인도 그렇지만,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가정, 정말 어제저녁에 다섯 식구가 모여서 서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내일이면 또 뿔뿔이 흩어지지만, 그래서 더 아쉽게 모여서 그동안에 한 2년 동안에 우리가정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근데 재작년에 제가 안식년을 가졌었는데, 안식년 후에 미국에 아이들도 남아있고 이렇게 헤어지면서 서로 각각의 기도제목을 우리가 스티커에 썼습니다. 써서 각자의 성경책에 붙여놓고 우리 이걸 위해서 기도하자 했습니다. 어제 함께 모여서 기도제목을 생각할 때 100%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100%. 하나님께 정말 감사했습니다. 우리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저는 분명히 믿기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고의 삶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근데 그 최고의 삶, 최선의 삶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비하신 대로 내 생각을 그곳에 놓고 거기에 목표를 잡고 그것을 위해서 달려갈 때 비로소 우리는 가장 자유로운 비상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똑같아요. 하나님이 주신 여러분의 삶속에 비전이 뭡니까. 여러분 가정의 비전이 뭡니까. 또 우리 교회의 비전이 뭡니까. 교회에도 제일 필요한 게 뭐냐면 우리 교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생각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의 생각이 새로워져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 있는 교회로 만들자.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그런 교회로 만들자.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예배도 변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우리의 모든 교육기관이 변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각 기관과 조직과 모든 면에서 또 구역과 교구와 모든 면에서 다 그런 면이 초점에 맞춰져서 변화하기를 노력한다면 우리교회는 정말 어느 교회보다도 가장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아름다운 교회, 사랑이 충만한 교회로 점점 됩니다. 근데 그 가는 과정에서 실수하고 실패하는 일 무수히 많을 겁니다. 왜냐하면 가지 않았던 길이니까. 습관대로 사는 길이 아니니까 실패하고 잘못 된 일 많이 있을 겁니다. 근데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이겁니다. 두려워해선 안 됩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는 현실 믿지 맙시다. 우리 눈으로 보이는 것 우리 귀에 들리는 것 우리의 경험을 믿어선 안 됩니다. 오직 우리가 믿은 것은 뭐냐.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주신 비전이 무엇인가 그것만 믿읍시다. 그것만 믿고 그 길을 위해서 우리가 함RP 간다면 마침내 우리는 1년 뒤 5년 뒤 10년 뒤 정말 하나님의 영광이 넘치는 교회로, 지금보다 훨씬 더 그런 교회로 바뀔 것입니다. 그 길을 우리가 소망합시다. 그리고 그 길을 함께 갈 때 실패나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자 이겁니다. 저도 지금 생각해보면요 제가 처음에 와서 교회를 잘 몰라서 실수한 것, 뭐 그것보다도 예배 순서도 잘 몰라서 실수한 것이 몇 번 있었습니다. 다 일어났는데 앉으라고 하기도 하고. 제가 얼마나 창피했는지 아십니까. 그래도 괜찮아요. 그런 것 별거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의 생각의 높이가 어디까지냐 그게 문제입니다. 그 만큼 우리는 변할 수 있으니까 여러분들 개인도 마찬가지고, 가정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교회들이 닮기 원하는 교회 중 하나가 미국 LA에 있는 새들백 교회입니다. 제가 이삼년에 한 번씩 어떨 땐 매년에 한 번씩 그 새들백 교회를 한 번씩 갑니다. 다른 교회도 가보지만 그 교회를 가서 보면 매년 달라져요. 매년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그 교회가 덩그러니 본당 하나만 있었어요. 본당 하나만 있고 모든 교육관은요 건물이 없고 텐트가 있었습니다. 꼭 인디안 텐트처럼 텐트식으로 만든 것이 교육관이었어요. 근데 몇 년 전에 가보니까 멋지게 교육관을 지었습니다. 기가 막힌 시설을 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거의 해마다 조직이 바뀌어요. 새로운 조직들이 생깁니다. 금년에도 우리가 함께 세미나에 참석해서 보니까 또 완전히 새로운 조직 하고 있어요. 그렇게 바뀌는데 거기에 있는 목사님이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로 계속해서 새롭게 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도 한 것 중에 90%는 실패했다. 그러나 그 실패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교회는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도 그런 면에서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실패하십시다. 우리 실패하자고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자고요. 그러나 그 실패를 딛고 다시 변화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시도한다면 우리도 그 어떠한 교회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이 넘치는 아름다운 교회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로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온 성도에게 두 가지를 제안합니다. 첫째로 우리의 생각의 높이는 어디까지 갈 수 있냐면요,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대로 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먼저 여러분의 생각 속에 성경이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각 속에 성경의 말씀으로 여러분의 생각이 변화됩니다. 여러분의 생각 속의 성경이 없으면 여러분의 생각은 사단의 놀이터입니다. 여러분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 , 여러분이 합당한 이치라고 생각하는 것, 전부 사단의 생각입니다. 오로지성경의 생각으로만 여러분의 마음이 가득 차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읽으십시오, 성경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성경 말씀을 외우십시오, 성경 말씀대로 행하도록 노력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먼저 필요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생각의 높이를 끌어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성경 말씀을 여러분의 삶속에 구체화시켜서 비전을 세우십시오. 내 삶의 비전. 우리 가정의 비전. 얼마 전에 제가 연락 받았습니다. 저를 전도한 가정이 있습니다. 우리 가정을 전도한 가정. 장로님 가정인데 서울의 큰 회사 사장님이었습니다. 경영대학원에서 만났으니까요. 근데 이번에 스스로 사장직을 그만뒀어요. 그만두고 지금 선교사 훈련 받고 있습니다. 그 전부터 저한테 누누이 이야기했거든요. 나이가 되면 나는 그 이후의 인생은 선교사를 하겠다.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는데 이번에 드디어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길을 가시는데 ‘정말 사람은 생각한 만큼 되는구나’하는 것을 저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비전은 무엇입니까? 그냥 머릿속으로 눈을 굴리면서 생각하지 말고 성경부터 보십시오. 성경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가고 그 들어간 성경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그 은혜 안에서 최고로 높이 잡아요. 생각이 스스로 여러분의 삶을 가두게 하지 마시고, 가장 높이 목표를 책정하시고, 그 길을 위해서 가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생각지 않던 놀라운 데까지 여러분은 도달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지난 1년 2개월 동안, 이렇게까지 빠르고 많이 변화하리라고 저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전혀 생각 못했어요.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리리라고 생각했는데, 제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생각이 더 크신 것 같아요. 근데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러한 변화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방향, 제가 모르는 방향으로 우리 교회가 더욱 나아갈 것입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향한 뜻이 무엇인지만을 보고 가는 것입니다. 금년 연초만 해도 우리가 금남로 성전을 다시 사용하리라는 생각은 제 머릿속에 없었습니다. 사실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왜 빨리 안 팔리나?’ 라는 생각만 했죠. 근데 점점 더 크게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을 넓혀 주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고 그 뜻만 생각하면. 저는 우리 교회가 기성교회 중에서도 정말 미래의 새로운 비전을 위해서 완벽하게 변화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앞으로 우리 젊은이들이 우리 교회의 비전과 함께 발맞추어서 모두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그러한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다른 교회들이 우리 교회를 보고 함께 배우고 함께 변화되는, 그러한 변화가 있어 선도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비전을 일단 갖는다면 절대로 현재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변화하기 위해서 몸부림 칠 것입니다. 저도 누구에게나 있듯이 습관대로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지금 상태에서 변화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이 정도에서 그냥 살기를 원하는 마음들이 저도 있고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과감히 깨뜨려야 합니다. 깨뜨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냐? 비전을 갖는 것입니다. 비전이 강하게 우리 마음에 각인되어 있어야 변화합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실수하는 것 같이 넘어가자 이겁니다. 누군가가 실수하면 실수한다고 그 사람을 흔들지 말고 그 사람을 위로해주고, 같이 웃어주십시오. 만약에 오늘 제가 샤론 찬양대를 할렐루야라고 했다고 “목사님 그게 뭡니까?”라며 지적해대면 오늘 하루 일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완전히 뒤집어 졌겠죠. 그러나 함께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으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저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교역자들도 있고, 우리 각 기관과 모임의 책임자들이 있을 겁니다. 그들 모두 연약한 인간들이에요.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합니다. 그럴 때에 같이 웃읍시다. 같이 웃고 , 같이 격려하고, 같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 툭툭 털고 일어나서 같이 또 가는 겁니다. 이것이 온 교회에 문화가 되기를 원합니다. 같이 세워주고 부족하면 매워주고, 같이 넘어졌다 일어나고, 그렇지만 끊임없이 비전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교회. 이런 교회가 되면 정말 우리 교회는 , 물론 지금도 너무 좋은 교회이지만, 더 좋은 교회,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교회, 모든 주변의 사람과 교회에 아름다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이러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 함께 마음을 모으고, 함께 갑시다. 이러한 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희의 복종을 온전케 하라
고후10장 3~6절 / 권오서목사
들어가는 말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사람은 딜레마(Dilemma)에 빠져 죽음의 병에 이르게 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결혼하여라. 너는 그것을 후회할 것이다. 결혼하지 말라. 너는 그것도 후회할 것이다. 결혼하거나 결혼하지 않거나 간에 너는 후회할 것이다. 바보 같은 세상을 웃어 주라. 너는 그것을 후회할 것이다. 바보 같은 세상을 탄식하여라. 너는 그것도 후회할 것이다. 바보 같은 세상을 웃어 주거나 탄식하거나 간에 너는 그것을 후회할 것이다. 처녀의 하는 말을 믿으라. 너는 그것을 후회할 것이다. 처녀의 하는 말을 믿지 말라. 너는 그것도 후회할 것이다. 처녀의 하는 말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간에 너는 후회할 것이다. 목매어 죽으라. 너는 그것을 후회할 것이다. 목매어 죽지 말라. 너는 그것도 후회할 것이다. 목매어 죽거나 목매어 죽지 않거나 간에 너는 후회할 것이다.”(예화노트, 검색어 : 후회)
이것을 해야 하는지, 저것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둘 다 하지 말아야 하는지 하는 이와 같은 딜레마의 문제는 인생전반에 걸쳐 깔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와 같은 딜레마를 안고 있고, 이로 인해 후회하고 불안해하며 때로는 깊은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겪고 있는 영적전쟁의 단면입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고후5:17)입니다. 우리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이미 죄와 율법의 문제에서 해방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사탄은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우리의 옛사람을 이용하여 그의 마지막 궤계를 계속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유혹했던 것처럼 사탄은 십자가에 못 박힌 우리 옛 사람을 통해 우리를 실패하게 하려고 끈질기게 시도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딜레마를 극복하고 새로운 피조물로써의 거듭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영적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본 론
1. 우리를 유혹하는 마귀의 통로, 즉 방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3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라고 말씀하면서, 4절에서는 “우리의 싸우는 병기가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5절에서 그 병기가 무엇을 무찌르는지를 말씀합니다. 5절 말씀을 다 함께 보겠습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여기서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라고 말씀하는데, 이는 마귀가 우리를 유혹할 때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는지, 어떠한 통로를 사용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생각입니다. 마귀는 생각을 통해서 우리를 유혹합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에는 마귀가 가룟 유다로 하여금 예수님을 팔도록 유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때 어떻게 유혹합니까? 요한복음 13장 2절 말씀입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그렇습니다. 이미 팔려는 생각을 주입해놓았습니다. 생각이라는 것이 마귀가 역사하는 통로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잠언 23장 7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무슨 뜻입니까? 내가 무엇을 생각하며 사느냐에 따라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를 보세요. 그는 돈에 대해서 민감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향유 옥합을 깨 예수님의 발아래 부은 여인을 보고 “왜 이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지 않느냐?”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성경은 그가 정말 가난한 사람을 돕고자 해서가 아니라 돈을 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돈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모든 것이 돈으로만 보입니다. 사람을 만나도 이해관계를 따지고 돈의 관계에서만 봅니다.
교회 일이라는 것도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돈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재정적인 뒷받침이 되어야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가 인도에서 가난한 아이들을 먹여 살리는 일을 할 때, 어느 날 거물급 인사가 찾아와 기부금을 전달해 왔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 돈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마더 테레사 수녀만큼은 받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받아야 하고, 또 그 돈을 받음으로써 더 많은 아이들을 보살필 수 있다고 하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았습니다. 옆에서 그를 돕는 다른 신부가 하도 부추겨 기부자와 함께 사진까지 찍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이 기부금이 부정한 돈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큰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영화 “마더 테레사” 중에서)
여러분, 돈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돈이 어떠한 돈이냐가 더 중요합니다. 믿음과 헌신이 담겨진 돈인지 아닌지가 중요합니다. 어떠한 생각,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돈이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마귀는 우리의 생각 속에 세상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안목의 정욕을 넣어줌으로 우리를 자신의 종으로 사로잡습니다.
다윗은 왕이 된 후 마음이 많이 해이 해졌습니다. 전쟁에도 신하들만 보내고 자기는 왕궁에 남았습니다. 그가 침상에서 일어나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목욕하고 있는 한 여인을 내려다보고서 잘못된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부정한 것에 내어주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간음이라는 큰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계획적인 살인까지 저질렀습니다.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던 다윗도 생각을 잘못된 것에 내어줌으로 완악한 생각이 그를 지배하고 말았습니다. 완악한 생각이 한 영혼을 지배하면 판단력을 잃습니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임을 알고도 그것에 노예처럼 끌려가고 맙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쁘다는 것을 몰라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반복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거짓말을 통해서 약간의 이익이라도 내게 오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순간의 위기를 모면할 수도 있고, 불의한 재물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거짓말하는 것이 나쁘게 생각되지만, 반복해서 거짓말을 하다보면 익숙해지고 그로 인해 찾아오는 이익이 더 많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생각을 통해서 우리를 유혹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여, 생각을 잘 다스리시기를 바랍니다.
2. 과거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단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할 때 자주 사용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과거를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과거의 실수나 실패, 빗나간 계획, 이루지 못한 목표에 집착하도록 해서 우리로 하여금 늘 침울하고 기분 나빠진 상태가 되게 합니다. 그러니 앞을 향해 전진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광야는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테스트해보는 실험대와도 같았습니다. 숱한 어려움 속에서 그들은 참된 믿음을 간직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철저히 훈련시켰습니다. 마실 물이 없게 하셨고, 먹을 것이 부족해서 걱정하게끔 하기도 하셨습니다. 때로는 이민족과 생명을 건 전쟁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테스트가 있을 때마다 과거를 회상했습니다. “애굽 땅에 있었더라면. 차라리 노예로 있을 것을.” 그들은 앞을 가로막는 일이 벌어질 때마다 이와 같이 푸념 섞인 말을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흘러간 시간을 되돌릴 수 있습니까? 푸념 섞인 말을 한 들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까? 과거의 실수나 실패, 빗나간 계획, 이루지 못한 목표에 집착한다고 해서 지금 나의 모습이 달라집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찰스 앨런(Charles Allen)이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의 경험담인데 우리에게 참 많은 교훈을 줍니다. 이 목사님이 아내와 함께 뉴멕시코 황무지에서 차를 몰고 가다 지갑을 잃어버렸습니다. 차 안에 떨어뜨린 줄 알고 바닥과 시트 아래 여기저기를 뒤졌습니다. 심지어 수트케이스와 전날 입은 옷까지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앨런 목사님은 뙤약볕 아래 서서 도대체 지갑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하고 있었습니다. 너무 오래 이런 상황이 지속되다보니까, 앨런 목사님의 아내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보, 돈이 없어졌으면 없어진 거예요. 그렇다고 이 사막에서 하루 종일 서 있을 건가요? 아니면 현실을 받아들이고 여행을 계속할 건가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후회하며 그 자리에 머무르면서 여행을 망치겠습니까? 아니면 여행을 계속하겠습니까? 앨런 목사님과 사모님은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갔습니다. 나중에 앨런 목사님은 실망스러운 일이 일어나거나 계획이 틀어질 때마다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고 합니다. “한탄하며 이곳 사막에 마냥 서 있을 것인가, 아니면 사막을 벗어나 인생의 여정을 계속할 것인가?”(가이드 포스트, 2006. 7월호. 15)
많은 사람들이 과거가 우리의 미래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과거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과거가 아닌 바로 오늘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씀드려서, 오늘 이 순간 이후부터 어떻게 사느냐가 우리의 미래를 좌우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연초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마음을 먹습니다. 새벽제단도 쌓고, 성경도 꼬박꼬박 읽습니다. 그런데 차츰차츰 시간이 흘러가면서 흐지부지 됩니다. 새벽제단을 쌓는 날 수는 점점 짧아지고, 성경은 점점 읽기 싫어집니다. 그래서 그런지 성경은 매번 읽는 데만 읽습니다. 구약에서 시작하면 창세기, 출애굽기만 읽고, 신약에서 시작하면 복음서와 사도행전 정도까지만 읽다가 그만 둡니다. 또 다시 새해가 밝아 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공부 못하는 학생들에게 볼 수 있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시험이 끝나면 ‘그래 이제부터 열심히 공부해야지!’하고는 공부를 시작합니다. 기초가 부족하니까 기초를 닦아야 한다고 맨 앞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조금 어려워지면 약간씩 게을러지기 시작하면서 하루 이틀 미루기 시작합니다. 그 후에 시험을 보면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반복합니다. 맨 날 쉬운 부분만 살펴봅니다.
이런 걸 보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 필요할까요? 그렇습니다. 후회하면서 늘 같은 자리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그어놓은 한계선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면 뒤로 물러섭니다. ‘나는 이 정도 밖에 할 수 없어!’라고 말합니다. 한 발만 더 내딛으면 넘어설 수 있는 것을, 그것을 뛰어 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섭니다. 성도 여러분, 한계선을 뛰어넘어야 성장이 있습니다. 성숙이 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기 때문에 오늘도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단이 주는 생각입니다. 사도바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2)” 계속해서 앞을 향해 나아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진보를 보이겠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후회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후회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보지 말고 오늘 이 순간부터 새롭게 펼쳐질 미래를 기대하며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말씀에 복종해야 합니다.
4절 말씀에서 “강력”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말씀은 사단이 세워놓은 견고한 진을 부서뜨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복종할 때 우리를 지배하려는 사단의 모든 세력을 파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할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0절은 “(너희가)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새 사람을 입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된 사람입니다. 쉽게 말해서, 머릿속에 든 것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세상 학문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경험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관습과 전통에 따라 나름대로 판단근거를 삼을 잣대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이 새로운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찼습니다.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던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지난 번 유럽에 갔을 때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 갔었습니다. 그때 눈에 들어온 세 단어가 들어왔습니다. 청빈, 순결, 순명입니다. 이 중에서 ‘순명’이라는 단어 때문에 참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단어에는 참으로 의미있는 이야기가 얽혀 있습니다. 수도원장이 수도사에게 말합니다. “이 무를 가지고 가서 거꾸로 심어라.” 수도사는 “네”하고 대답하고는 수도원장의 말대로 무를 가지고 가서 거꾸로 심습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는 사람들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합니다. “아니, 무를 거꾸로 심으란다고 해서 심습니까? 무를 거꾸로 심으면 자랍니까? 그렇게 어리석어서 어떻게 합니까?” 그때 수도사가 말합니다. “거꾸로 심어서 자라고 안자라는 것은 시키신 원장님이 담당할 몫이고 나는 시키는 대로 심을 뿐입니다. 그것이 내가 해야 할 몫입니다.”
이것이 바로 순명입니다. 순명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보여야 할 자세입니다. 순명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할 때 영적전쟁에서 이깁니다. 성도 여러분, 납득이 되는 것만 순종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합리적인 것만 좋아하지는 않습니까? 제가 여쭙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 가운데 하나님의 명령이 합리적일 때에만 순종한 사람치고 성공한 사람을 보셨습니까? 70이 넘은 아브람에게 고향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납득이 됩니까? 살인죄를 지은 모세에게 바로 왕 앞으로 나아가라는 명령이 이해가 되십니까?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지고 수많은 군중을 먹이라는 명령이 이해가 됩니까? 문둥병에 걸린 나아만 장군에게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엘리사의 명령을 여러분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으시겠습니까? 저는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한 가지 확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거나 납득이 갈만한 명령에 순종할 때 주어지는 축복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놋뱀을 보고 살았습니다. 놋뱀이 무슨 능력이 있습니까? 그런데 놋뱀을 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니까 살았어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느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십자가가 통로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자, 은혜의 통로입니다. 확실한 은총의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에만 복종하세요. 말씀에 복종할 때 사단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정 리
사단은 우리의 생각을 파고듭니다. 그곳에 악한 마음을 집어넣고 그것에 의해 지배받도록 합니다. 생각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잠시잠간의 유익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과거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의 실수나 실패, 빗나간 계획이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 집착하지 마세요. 후회한들 지금 나의 모습이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미래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 성장하고 성숙합니다. 무엇보다 말씀에 복종하세요. 하나님 앞에 우리가 보일 삶의 자세는 순명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내가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순종하고 따를 뿐입니다. 복종을 온전히 이룸으로써 영적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더 큰 상급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싸움
고후10장 3~6절 / 지용수목사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신비로운지 모릅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우리는 그 세계를 생각할 때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절로 찬양하게 됩니다.
푸른 하늘, 출렁이는 바다, 꽃피고 새 우는 산천!
그런데 출렁이는 바다가 보기에는 평화롭만 그 바다 속에는 크고 강한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삼키려 하고 작고 약한 물고기는 살아남으려고 피해 다니고, 전쟁이 끝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산도 보기에는 고요한 것 같지만 거기에서도 수많은 동물들과 곤충들이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생존경쟁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에서나 학교에서나 어디에서나 생존경쟁이 있으며 우리 몸 안에서도 끊임없이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몸 안의 항체와 흰피톨이 세균에 대항하여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무는 가만히 있고자 해도 바람이 부니 흔들리는 것처럼 우리는 평화롭게 살고 싶어도 우리를 공격하는 자가 있으니 싸움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아무리 편안하게 살려 해도 만일 일본이 공격해 온다면, 중국이나 북한이 쳐들어온다면 전쟁을 치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전쟁들은 세상 사람들도 다 알지만,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전쟁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전쟁입니다. 세상 사람은 그것에 대해서 아주 무식합니다. 전혀 모릅니다. 그래서 모두 마귀의 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녀인 우리에게는 영적인 전투를 알게 하시고 또 승리할 수 있는 말씀을 주심으로 우리는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중에는 영적인 전투를 힘겹게 하는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이 영적인 전투가 의롭고 경건한 사람에게는 없습니까? 죄 짓고 약한 사람에게만 있습니까? 아닙니다. 의로운 사람, 경건한 사람일수록 영적인 전투는 더 많은 것입니다.
요셉도 공격을 당했습니다. 요셉은 자기 형들에게 공격을 당했는데, 그의 형들이 그를 죽이려 하다가 팔아버렸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요셉을 공격하기 위해 사탄들이 그 형들을 사용한 것입니다. 또 주인인 보디발 장군의 부인을 통하여 요셉을 꺾으려 했습니다. 요셉이 금같이 빛나는 큰 인물이 되면 하나님께서 크게 영광을 받으시고 많은 청년들이 요셉 때문에 은혜를 받을 것을 마귀는 알았습니다. 종의 신분인지라 거절하기 어려운 요셉의 처지를 이용해 장군의 부인을 통하여 음란의 유혹으로 공격을 했습니다.
모세도 공격을 받았으며 지금도 많은 위인들이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사탄은 언제나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아니하든 영적인 전투는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알고 영적 전투를 잘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 전투에 지면 아주 초라하게 됩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사탄이 뱀을 통하여 이브에게 접근합니다.
“이브, 이브. 하나님께서 정말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아니, 동산의 실과는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어.”
“아니, 그렇지 않다. 먹어도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줄 알고 하나님께서 막은 것이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브는 색채가 화려하고 고운 뱀의 말만 듣고 뱀 뒤에서 조종하는 마귀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그 선악과를 따 먹고 그만 낙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또 자기만 따 먹고 자기만 망하면 괜찮은데 신랑에게도 주고 ‘여보, darling, honey’ 하면서 먹게 합니다.
남자들만 따라 합시다.
“아내를 조심하자.”
새벽기도를 드리려 가려는 남자도 아내가 “여보!”하고 붙잡으면 못 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귀하게 살려 해도 아내가 막으면 못합니다. 때때로 마귀는 아내를 통해서도 여러분을 약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자기 아내를, 아내로만 보지 말고 영적으로 분별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금하신 선악과임을 알고 있는 그는 그것을 아무리 아내가 애교를 떨며 주더라도 먹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주는 것인데 뭐. 내 아낸데 뭐. 나를 망하게 하겠어?’라고 생각하며 받아먹어서 그만 함께 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존귀한 아들딸이, 하나님 앞에서 껑충껑충 뛰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던 그 아담 이브가 부끄러워 숨고, 부끄러움을 가린 채 한평생 거친 땅에서 험하게 살게 된 것입니다. 또 그들만 그렇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자자손손 그 죄가 흘러서 오늘 우리까지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마귀한테 공격받아 이기지 못하면 얼마나 초라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삼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이성에 약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약점이 있습니다. 권투를 해 보면, 어떤 사람은 턱이 약하고, 어떤 사람은 허리가 약합니다. 그 약한 부분만 계속해서 끈질기게 치고 공격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저는 턱은 강해서 몇 백대를 맞아도 버팁니다. 그러나 저에게도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권투를 7년 동안이나 했는데, 지금도 저 혼자 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내랑 등산을 가서 아내가 어려움을 당하는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돈에 약하고, 어떤 사람은 명예에 약합니다. 그런데 삼손은 여자에 약했습니다. 그러니 마귀는 여자, 그것도 잘 생기고 매혹적인 여자 들릴라를 통해 삼손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들릴라는 삼손의 힘의 근원을 알아내려고 집요하게 유혹했습니다. 삼손이 그 여자만 보면 안 되고 뒤에서 조종하는 사탄을 봐야 했는데, 영적으로 분별을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삼손은 들릴라에게 빠져, 그 사랑을 잃을까 봐 자기의 비밀을 말했다가 머리카락이 잘리고 눈까지 뽑힌 후 끌려가서 감옥에 갇혀 맷돌을 돌리는 초라한 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따라 합시다.
“영적으로 분별하자.”
사탄과 싸워 이기는 첫째 비결은 영적으로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분별하셨습니다. 40일을 금식하신 예수님에게 사탄이 나타나서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위한 말인 것 같습니다. 배고픈데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돌로 떡을 만드실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 바로 마귀임을 아셨기 때문에 마귀를 물리치신 것입니다.
마귀가 흉측한 모습으로 나타나면 우리도 금방 분별하는데 마귀는 광명의 천사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4절에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15절에도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귀가 교회를 헐려고 할 때, 십일조도 하고 주일도 지키고 전도도 하는 그럴듯한 사람을 쓰지, 아주 되지도 않은 사람은 쓰지도 않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아, 그 사람 병원원장이고, 장로고 십일조도 삼백만 원씩 하고, 그 사람의 친구들도 대학총장이고 검사고 다 괜찮은 사람들이야.’라고 하는 사람을 마귀가 딱 잡아 쓴다는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그럴듯한 사람, 괜찮아 보이는 사람도 조심하자.”
우리는 영적으로 분별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척척 아십니다.
마태복음 16장 13절에서 1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선생님,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합니다.”
“그래.”
다이아몬드를 돌로 보니 얼마나 섭섭합니까?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 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이것을 알게 한 것은 혈육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네게 알게 하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그에게 천국 열쇠를 준다는 칭찬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6장 21절 이하에 보면 베드로가 바로 마귀의 시험에 듭니다. 칭찬을 받은 그를 마귀가 씁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말씀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주여! 그럴 수 없어요. 주께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돼요.” 하고 간곡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 말을 얼핏 생각하면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말 같습니다. 남편이 새벽기도하려 할 때 “여보, 당신 피곤한데 가면 병 나. 가지 마.” 하는 것은 진정 남편을 위한 말 같지만, 그러나 그 여자를 쓰는 것은 사탄인 것입니다. 기도하러 가는 남자를 막는 것은 사탄이지 성령님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구나.”하고 꾸짖으십니다. 금방 칭찬해 준 제자를 이제는 무섭게 책망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베드로 뒤에 있는 사탄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 그 누구의 말이라도 그대로 다 받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국에 사는 한 여자는 옷을 살 때 남편에게 허락을 꼭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값진 물건을 살 때는 남편과 의논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하루는 백화점에서 그만 너무 비싼 옷을 샀습니다. 그리고는 남편에게 싫은 소리를 들을까 봐 애교를 부리며 말했습니다.
“여보, 이 옷 봐. 너무 예쁘지? 사실 당신과 의논한 후 사려고 했는데 마귀가 앞에서 유혹하면서 ‘와! 멋지다. 이건 당신의 옷이다. 당신을 위해 만든 옷이다. 빨리 사라. 빨리 사라’라고 해서 내가 샀지요.”
그러자 남편이 말했습니다.
“왜 예수님처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지 않았소?”
“했지요. 했지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니 ‘뒤에서 봐도 역시 예쁘다.’라고 해서 할 수 없이 샀어요.”
지금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면 안 되고 “사탄아, 구만리 밖으로 물러가라!”라고 해야 될 때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만 보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 뒤에 있는 사탄을 보신 것입니다.
나와 30년 친구라 할지라도 주일날에 어디 가자고 하면 가서는 안 됩니다. 예배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이름으로 하나님 안에서 같이 운동하고 배구나 족구나 축구를 하는 것은 괜찮지만, 주일날 오락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일날 불러내어 밤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탄이지 성령님이 아닙니다. 성령의 사람이 밤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딴 곳으로 가자고 하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예배하게 하시고 기도하게 만드십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예배를 드릴수록, 기도를 할수록 강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할렐루야!
어쩔 수 없습니다. 집사고 권사고 장로라도 하루에 1시간도 기도하지 않고 하루종일 성경 몇 장도 읽지 않으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늘 깨어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붙어 살아야 강하게 됩니다. 우리의 능력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의 말이든 아내나 아들의 말이든 어느 누구의 말이든지 분별해야 됩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분별하고, 특히 악한 영들이 우리 주위에 역사하기 때문에 언제나 잘 분별해서 마귀가 오라는 곳은 가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오라 하시는 곳에만 가야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마귀와 싸워서 이기는 두 번째 비결은 하나님 말씀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순종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고라에게 오라고 했을 때, 고라는 “안 간다. 왜 가? 네가 무언데 오라 가라 해?”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는 것이 마귀입니다. 마귀도 처음에는 천사였지만 하나님을 대적하여 마귀가 된 것입니다. 마귀의 특성은 교만입니다. 하나님보다 높아지려고 하기 때문에 어디서나 교만을 떱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에는 이런 식으로 바울을 비난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는 그럴 듯하지만 바울을 만나보면 별 볼일 없는 사람이야. 육체로 살고 비겁한 사람이고 자기 말대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술수를 쓰는 아주 비열한 목회자야. 자기가 뭐 장가 안 가고 하나님 섬긴다니 무슨 말이야. 장가를 안 간 건가? 못 간 거지. 그 얼굴에 누가 결혼을 하겠어?”
바울은 그 사람들만 본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뒤에 있는 마귀를, 사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그러므로 모든 이론을 파하며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 것이라.”라고 말했습니다. 할렐루야!
설교를 들으면서 ‘목사님 말이야, 뭐 알기나 하고 말해? 내가 누군데……’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아무리 굉장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씀을 전하는 제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저를 쓰실 때 그 앞에서 겸손히 말씀 받는 자, 순종 하는 자가 성령의 사람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굉장한 사람이라도 성령을 받으면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은혜를 받으니 시골 목사님 앞에 나와서 “주의 종에게 선물을 받으소서. 주의 종에게 예물을 받으소서.”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강단보다 높으면 성령의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의 설교를 이러쿵저러쿵 비판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것은 악한 영이지, 성령의 영이 아닌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고넬료처럼 베드로 앞에서도 하나님 앞에 있듯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
마귀는 순종하지 못하게 합니다. 목사에게 순종하지 않게 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게 합니다. 그래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으라 하며 불순종하게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면 마귀는 물러갈 줄 믿습니다.
제가 제 아이들과 아내를 사랑하지만 그들이 ‘예.’ 할 때 좋지, ‘싫어요.’ 하면 좋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는 ‘예.’만 있지, ‘싫어요.’는 없어야 됩니다. 할렐루야!
부부간에 왜 갈등이 있습니까?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대로 순종해서 자기 아내를 사랑하면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또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복종하라는 말씀대로 ‘예, 그렇게 하지요’ 하면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남편이 ‘여보! 물 좀 줘요.’ 하는데 ‘당신이 갖다 먹어. 나도 피곤해.’라고 하니 집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다방에 앉아서 ‘아가씨, 물 좀 주세요.’ 하면 ‘예, 사장님.’하고 갖다 주지, ‘당신이 갖다 먹어.’ 하는 종업원은 없습니다. 아내가 다방 종업원보다 못하니 어떻게 마음을 주겠습니까?
가정에 시험이 들어 이혼하게 되는 것은 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마귀가 틈을 탄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7절에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귀에게 한 발짝도 틈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분별하고, 그리고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성령이 남편과 아내를 붙잡으면 정말 화목한 부부가 됩니다. 아버지 학교, 어머니 학교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필요하기도 하겠지만, 하나님이 답입니다. 말씀이 답입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사니 일생 잉꼬부부로 살았습니다. 성경 안에 답이 다 있습니다. 할렐루야!
정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부모에게도 순종하고 또 부모는 자녀에게 상처주지 않도록 잘 하는 것이 마귀가 틈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부부는 부모보다 더 가깝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 앞에서 발가벗고 놀지만 나이가 들면 그렇게 못합니다. 그런데 부부끼리는 발가벗고 춤을 춘다 해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부부는 잘 살아야 됩니다.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20대 부부는 포개서 잔답니다. 옆에 누워 있는 것도 아까워서랍니다. 그런데 30대에 접어들면 손잡고 자고, 40대는 손 놓고 떨어져 자다가 50대에 들면 서로 돌아누워 자고 60대가 되면 남편은 이 방, 아내는 저 방에서 잔답니다. 그러다 70대가 되면 한 사람은 방에서 자고 한 사람은 산에서 잔답니다. 사랑의 불이 자꾸 꺼져서 그렇게 된답니다. 부부는 싸워도, 80, 90이 되어도 한 방을 써야 하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부부는 한 몸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하나가 되는 길은 말씀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무리 미워도 남편 말씀에 복종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해 주십니다. 아내가 사랑할 모습이 없어도 하나님 말씀대로 아내를 사랑하면 결국 아내가 귀해지고 그 부부는 승리하게 됩니다.
아내가 있는 남자인 내 앞에 매력 있는 여자가 나타나 자꾸 접근하면 그것은 마귀가 나를 넘어뜨리려고 쓰는 들릴라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남편이 있는 아내인데 어떤 매력 있는 남자가 살살 접근하거든 그 남자의 매력을 보지 말고 ‘마귀가 나를 헐려고 저 사람을 쓰는구나.’하고 분별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영어 공부하라고 아내를 모 대학교에 보냈습니다. 하루는 제가 10분 정도 늦게 갔더니 어떤 미국 남자가 아내에게 접근해서 ‘시간이 있느냐?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자.’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아내가 있는 남자에게 접근하는 여자도 마귀의 도구고, 또 남편이 있는 여자에게 접근하는 남자도 도둑이요 마귀의 도구이니 절대로 그냥 두면 안 됩니다. 영적으로 분별하고 말씀에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날마다 마귀를 묶어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7절에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교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새벽이나 낮이나 밤이나 개인 기도를 할 때나 대표 기도를 할 때나 마귀를 묶는 것입니다. 마귀를 묶는 것이 얼마나 잘 하는 일인지 모릅니다.
지금 이곳에 만약 귀신 들린 사람이 있다면 제가 귀신에 대해서 말씀을 전할 때 머리가 아파서 견디지 못하고 기분이 아주 나쁠 것입니다. 교회에서 귀신에 대해서 아무도 말하지 않으면 귀신이 자리를 잡습니다.
“더러운 귀신아, 물러가라! 귀신아, 물러가라!”라고 하면 귀신이 두려워서 있지 못하고 떠나갑니다.
도둑이 왔다가도 제가 “도둑아, 물러가라!”라고 하면 ‘어! 어떻게 알았지?’하고 갔다가, 수요일 밤이나 주일 밤에 다시 와도 그 때도 제가 “도둑아, 물러가라!”라고 하면 ‘어! 또 정보가 샜구나. 여기는 내 일터가 아니다.’ 하고 가서 다시는 오지 못합니다.
저는 매일 잘 때마다 우리 장로님들로부터 모든 교우들, 부교역자들, 직원들, 군에 있는 아들들, 유학 중에 있는 자녀들, 출장 중인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마지막에 ‘하나님이여, 오늘도 악한 마귀, 사탄, 귀신, 도둑, 강도가 우리 교우들에게 틈 못 타도록 지켜주십시오.’하고 기도합니다. 여러분은 피곤해서 그냥 잘지 몰라도 저는 늘 기도합니다. 그렇다고 ‘오늘 밤에 목사님이 기도하시니 대문을 열어놓고 자자.’라고 하면 안 됩니다.
유다서 1장 21절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자기를 지켜야 됩니다. 저는 말씀에 순종하여 언제나 제 자신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나가면 됩니다. 자기를 지키는 것 중 하나가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마귀가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건드리지도 못하게 “사탄아, 물러가라! 마귀야, 물러가라!” 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편안하고 화목한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우리가 시간 시간 마귀를 묶으니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마귀가 틈타지 못하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한지 모릅니다.
앞으로 여러분과 제 일생에, 우리 교회 안에, 우리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마귀가 들어와 장난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마귀를 늘 대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탄과 싸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리 사탄이 나를 공격하고 귀신이 나를 공격해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내가 이긴다는 믿음입니다.
따라 합시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다윗은 골리앗이 공격하고 사울 왕이 공격해도 넘어지지 않고 섭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7장 47절에 다윗이 말합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
영적 전투도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를 아무리 공격해도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십니다.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세를 바로가 공격하고 고라와 250명 마귀의 도구들이 공격해도 결국 모세가 승리했습니다. 고라와 250명 족장들이 모세를 공격할 때 모세가 괴로워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로 다 태우시고 모세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요셉의 형들과 보디발 장군의 부인이 요셉을 공격했으니 그들은 요셉이 총리가 되었을 때 요셉 앞에서 벌벌 떨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요셉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다니엘도 두 총리와 많은 도지사들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다니엘은 살고 그 적들은 사자의 밥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는 이김을 주십니다.
사무엘하 8장 6절에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사무엘하 8장 14절에도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바로 “노순일 장로가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김관수 장로가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김정익 집사가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지용수 목사가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양곡교회 교인들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니라.”라는 말씀입니다.
따라 합시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기게 하신다.”
이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승리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무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방패인 것입니다. 사탄이 아무리 공격해도 결국 우리는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떨면 안 됩니다. 승리는 우리 것입니다.
사탄과의 전쟁은 살아 있는 동안 계속되겠지만, 우리는 항상 이기는 것입니다. 이기고 또 이기는 것입니다. 천국에 갈 때까지 이기다가 천국으로 이사 갈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아무리 강한 마귀의 요새라도 우리가 분별하고, 말씀으로 나가고, 하나님의 힘으로 나가면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
고후10장 3~7절 / 성홍모목사
최근에 읽은 책 중에 “조용한 믿음의 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메리카 풋볼을 좋아하십니까? 풋볼이라고 하면 미식축구라고 해야 알기 쉽습니다. 우리나라는 축구가 널리 보급되었고, 축구를 좋아하지만, 미국인들은 풋볼을 더 좋아합니다. 우리의 축구는 골대 안으로 공을 차 넣으면 1점을 얻는데, 풋볼은 터치다운 하면 6점, 트라이 포 포인트라고 하여 터치다운하면 2점, Kick 하면 1점, 필드골이면 3점, 자살골이라고 하여 세이프티 하면 수비팀에게 2점을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합산하면 40점 50점도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미국 풋볼경기는 아메리칸 컨퍼런스와 내셔널컨퍼런스로 나누어서 경기를 합니다. 두 리그에서 우승 준우승한 팀들이 내셔날풋볼리그라고 하여 결선경기를 하게 됩니다. 작년 2007년에 풋불의 왕중왕을 가리는 NFL 슈퍼볼에서 우승한 팀이 아메리칸리그에서 우승하고 올라온 ‘인디애나폴리스 콜츠’라는 팀이었습니다. 이 팀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토니 던지’라는 감독이 이끌고 있습니다. 토니 던지가 내셔날 풋볼리그에서 우승하면서 펴낸 책이 “조용한 믿음의 힘”이란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작년 미국에서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이요,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최우수도서가 되었습니다. 토니 던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대학의 교수들로 신앙이 정말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는 디트로이트 성경대학에서 강의하신 목사님이셨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야구도 잘하고, 농구도 잘하고, 풋볼도 잘하였습니다. 미국의 많은 선수들이 음주와 흡연, 마약에 빠져 있는데, 토니 던지는 신앙으로 분명히 선을 긋고, 음주, 흡연, 마약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대학에 풋볼선수로 활약하다가 프로팀에서 궈터백으로 활약하다가 비교적 젊은 청년의 때에 코치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는 탬파베이 버커니어스 팀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좋은 성적을 내었고, 인디애나폴리스 콜츠 팀을 이끌고, 2007년도에 우승트로피인 영예의 롬바르디 트로피를 받았습니다. 그는 경기 전에도 언제나 선수들과 함께 기도하였고, 경기가 끝난 후에도 어김없이 기도하면서 풋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신념으로 일관하였습니다.
그는 선수들과 스텝을 이끌고 함께 성경을 읽고,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헌신적인 가장으로, 우리나라의 아버지학교와 유사한 ‘All Pro Dad’의 가정 사역자로 봉사하였습니다. 미국사회에서 정말 존경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역할모델의 한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크리스천 리더십을 온전히 발휘하면서, 항상 하나님을 그의 삶의 최우선순위에 놓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리고 “평범한 일을 탁월하게” 처리하였습니다. 그는 풋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다짐한 사람입니다. 그는 유능한 코치로, 그리고 탁월한 감독이 되었는데, 특별히 구약성경 느헤미야서를 공부하면서 느헤미야의 리더십을 그대로 적용하면서 살아간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쓰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분명 우리와 함께 하셨다. 나는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였고, 그 분께서 내 삶을 온전히 인도하시도록 내려놓았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나는 우상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라고 합니다. 저는 그의 말 중에 “나는 우상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는 말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지도력을 발휘하고, 알아주는 사람이 되면 시민들의 우상이 되기를 바랄 터인데, 그는 우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는 약한 사람으로 자신의 약함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내어놓고, 언제나 강함 되시는 주님을 의지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드릴 수 있어야겠습니다. 분명한 목표를 세운 사람들, 가야하는 길을 찾은 사람들, 나만이 걸어가야 하는 길을 가는 사람이라면, 그는 주변에 서 있는 것을 바라볼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서성거릴 시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주시고, 하나님이 나를 사용해주신다는 것으로 감사하고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사실 우리의 자아라는 것은 작은 우주 - 소우주와 같습니다. 우리는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곧 창조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나만의 세계가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나만의 세계가 내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는 온 우주 안에 있는 작은 우주와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받은 하나님의 피조물의 꽃이요, 하나님의 작품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모든 생각의 출발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나의 생각이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출발되어야 합니다.
릭 워렌 목사님이 “목적이 이끄는 삶” 제1과에서 주장하는 것을 보면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릭워렌 목사님의 말을 그대로 옮겨보면 “우리는 그 분의 목적에 의해서, 그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에도 많은 사람들은 나 중심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나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나는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의 목표는 무엇인가?’, ‘나의 꿈’, ‘나의 야망’ 그는 무엇을 해도 나로부터 출발하고, 나에게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을 성공하고 싶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을 정말 알차게 살아가고 싶습니까? 삶의 목적에 도달하기 원한다면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셨으며, 나의 모든 것, 나 생각의 한계, 나의 역량의 한계, 나의 형편,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고, 지금까지 하나님이 나를 붙잡고 계시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내가 나를 잘 아는 것 같지만, 나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하여 지음 받은 존재인 것만 알아도 그는 지금보다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중심의 무게를 나에게서 하나님으로 옮겨놓아야 합니다. 내가 나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우리 주님이 살아가시도록 나의 모든 결정권을 주님에게 위임하는 것입니다. “주님,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나의 영역 밖에 있습니다.”라고 나의 무능함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육신이 있어 우리를 지탱해주고 있지만, 육신에 속한 것만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루 세 때 먹어야 하지만, 인생은 먹는 것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육신을 가지고 있기에 육신에 속한 일들이 아주 많습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곧 나 중심적인 사고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위하여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일생이란 하나님이 당신의 목적을 위하여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이지, 우리의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하나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나는 나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나를 지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생각을 가져야겠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삶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삶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을 때에 영적인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을 보면 “우리가 육신대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당신을 대적하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였습니다. 육신을 따라 싸우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감정대로 대하지 않겠다는 말이요, 자기중심적인 동기나 자신의 능력으로 살아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원동력은 오직 어떠한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축이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우리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고, 주님에게 주인의 자리를 양도하고, 주님의 결정에 순종하는데, 아예 복종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백기현 교수의 간증영상을 보았습니다. 전에 우리 교회에 와서 부흥회하신 문성모목사님이 당신의 친구인 국립 공주대학교의 교수이며, 작곡가로 유명하신 분을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백교수는 1951년 생으로 충남공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 음대 성악과와 서울대학원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비인국립음대 성악과를 졸업하였습니다. 국립공주대학 음악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성곡 오페라단장으로, 그가 정말 유명한 것은 창작오페라 이순신을 작곡하여 세계 여러 나라에 연주회를 가진 것입니다. 그는 국무총리 상을 수상하였고, 충청남도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화관문화훈장을 받은 분입니다.
기현이가 2살 때에 어머니가 잠시 집을 비우면서 친척집 아이에게 어린 기현이를 맡겼답니다. 이제 2살된 어린 아이를 8살된 아이의 등에 업혀주면서 데리고 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아이가 마루에 있는 상 위에 올라갔다가 기우뚱 넘어지면서 상에서 떨어지고, 마루를 구르고 마당에 나가 떨어졌습니다. 그 때에 2살된 기현이 죽지는 않았지만, 척추를 다치고 곱사등이 되어 앞가슴이 나오고, 뒤에 곱사등이 되었고, 키도 자라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55년이 지났습니다. 지난 2005년 2. 4일 55살이 되었는데, 한 부흥회에 참석하면서 은혜를 받던 중에 하나님이 그의 귀에 대고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등을 핀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그의 몸을 붙드시고, 몸을 비트시고, 어루만져주셨습니다.
그날 감격 속에 집에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은 5일 동안 그를 방에 잡아두시고는 온 몸을 구석구석 만져주시고, 백교수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많은 말씀을 들려주시면서 고쳐주셨답니다. 그래서 그는 정상인이 되어 반듯한 모습으로 간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감격 속에 간증하시는지, 가슴이 미어지는 어떤 전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의 간증 동영상을 보면서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고, 활동하고,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55년 동안 고통 속에 두셨다가 이제야 고쳐주시면서 그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심부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어떠한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능력입니다. 악한 사탄의 진영이 견고하고 난공불락이라고 하여도 하나님이 명령하시면서 다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 주님 예수의 이름 앞에 아무런 힘도 써보지 못하고 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 앞에 사탄은 숨을 찾아 도망치기에 바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어떠한 궤변, 어떠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이론도 무너뜨립니다. 여기 모든 이론을 무너뜨린다고 하였는데, 새번역에서는 이론이란 말 대신에 궤변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궤변이라고 하는데,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늘어놓는 궤변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계획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가로막는 이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이론은 궤변이라고 하셨습니다.
19세기 유럽은 진화론의 열풍에 휩싸였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이 없이도 인간존재에 대하여 설명하겠다고 하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진화론을 가지고 인간존재를 설명하겠다고 하는 이들이 가장 어리석은 자요, 과학자로 인정하지도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 우리 하나님의 영광 앞에 인간의 지식이라는 것은 한 장의 휴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교만을 무너뜨리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을 알아가야 하는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것은 인간의 교만입니다. 그런 인간의 교만을 무너뜨리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의 지식이나 상식을 가지고 살아가지 말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견고한 진영도 파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내 힘만 의지하면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 우리 주님에게 복종하여야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사로잡는다는 것은 포로로 잡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의 생각을 가지고 성공한 것이 있습니까? 겨우 땅에서만 헤매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계획, 우리의 미래, 우리의 건강, 우리의 사업,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겨야겠습니다.
우리는 모두다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습니다. 주일이 되면 우리는 어김없이 교회에 나옵니다. 다 앉으시는 자리도 정해져 있습니다. 2층에 앉으시는 성도는 항상 2층에 앉으십니다. 앞자리에 나와 앉아야 하시는 분들은 언제나 앞자리에 앉으십니다. 우리는 똑같은 얼굴, 똑같은 찬송가, 똑같은 성경책을 들고 매주일에 함께 모여듭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인 것을 서로 인정해주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기 좋고, 오라는데도 많고, 갈 데도 많은데, 주일이면 어김없이 하나님 앞에 모여오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았으면, 지금 여기에 참으로 고역스러운 자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으로 평안한 자리입니다.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요, 아버지의 집이요, 우리가 거할 우리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목사는 항상 가운을 입고, 머리도 단정하게 빗고, 성가대원들 아주 오랫동안 같은 사람들을 보아왔습니다. 우리는 형제요 우리는 자랑스러운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요, 이곳은 성령이 운행하는 하나님의 집인 것입니다.
지난 주간 제주도에 가면서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어린 아이를 데리고 가는 한 부인이 아이와 자리가 떨어져서 자리를 바꾸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아내가 그런 고충을 알고는 나보고 자리를 양보하여 통로를 건너가고 그 아이를 집사람 옆에 앉게 하였습니다. 그래서는 저는 그 아이가 앉았던 자리로 건너갔습니다. 제 옆에 후배 목사님이 앉아 있었는데, 당신은 이번 제주도에 가는 것이 25년 만에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25년 전에 한국의 우수한 회사의 중역으로 있으면 외국에서 오신 손님을 모시고 제주도를 구경시키러 왔는데, 수요일이 되었는데, 그 외국 손님은 밖에 나가지 않고 호텔에서 쉬겠다고 하여, 그 목사님 내외분은 가까운 교회에 가서 수요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 목사님이 세 사람에게 특송할 수 있는 기회는 준다고 하시는데, 그 부부도 제주도에 와서 예배에 참석하면서 감사한 마음에 특송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부인이 먼저 나가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다음에 한 청년이 나가는데 정말 잘 부르지 못하고 음정박자도 맞지 않게 부르는데, 목사님이 뗑하고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분이 일어나서 나가려고 하니, 오늘 우리 교회에 처음 오신 교인이 나와서 부르라고 하여 이 부부가 나가 찬송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 “집사님은 지금 이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하는지, 새로운 사업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당신에게 하나님의 종이 되라고 하십니다.” 목사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날 특송하고 들어가서 예배 후에 그 목사님을 만나서 “아니 왜 목사되라고 말씀하셨느냐”고 따지려고 하니, “나는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한 것뿐이라”고 하시면서 도망가듯이 사택으로 들어가셨답니다. 그래서 그 교회 집사님에게 물었답니다. “아니, 목사님이 그런 식으로 말해도 되느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집사님이 작년에도 그런 일이 한번 있었는데, 그 청년은 다음해에 와서 신학교에 들어갔다고 간증하였다고 했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다 잊고 회사 생활에 전념하면서 살다가 한 10년 후에 정말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기도하다가 담임목사님에게 상담하였더니, 자기가 믿을만한 권사님이 한 분 계시는데 가서 기도하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은 가지 않고 아내를 보냈답니다. 아내가 의정부를 지나가서 한 기도원에서 아주 늙으신 권사님을 만나서 기도하러왔다고 하였습니다. 권사님이 남편의 이름을 묻더랍니다. 그래서 남편의 이름을 또박또박 말하였답니다. 그런데 그 권사님이 하시는 말씀, “하나님은 10년 전에 당신의 종이 되라고 알려주었는데 10년이나 방황하면서 불순종하였느냐”고 하면서 “하나님이 이제는 좀 당신의 남편을 때려서라도 일을 시키려고 하였는데, 찾아왔다”고 했답니다. 목사님은 아내로부터 그 말을 전해 듣고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전율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그해 3개월 공부하고 장신대를 시험을 치는데, 자기는 다른 것은 다 잘해도 성경 때문에 불합격할 것으로 보았답니다. 그런데 그해 장신대 성경문제 역대 이래 가장 쉬워서 전체가 80점 이상을 다 맞으므로 성경은 제쳐놓고 영어만 가지고 합격여부를 따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이 영어는 자신이 있어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는데 그 해는 당신을 목사로 만드시려고 성경문제를 쉽게 내었다고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지금 25년 만에 제주도에 가면서 그 때의 일을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어린 아이에게 자리를 양보하면서 하나님은 저에게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저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부르신 자리에서 충성하라는 말씀으로 듣게 되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어떠한 강력한 진도 무너뜨리는 능력이십니다. 어떤 교만도 파하십니다. 어떤 이론도 무너뜨립니다. 우리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우리 주님에게 복종하여야겠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주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승리하시고, 주님의 사람들이라는 확신을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고후10장 7~18절 / 김호일목사
우리 다같이 기도드리겠습니다. 정성껏 준비한 시온찬양대의 찬양을 주님께서 들으신 줄로 믿습니다. 입술을 벌려 찬양을 하는 시온찬양대의 지휘자와 반주자, 대장, 온 대원들에게 하늘의 좋은 것, 땅에 기름지고 좋은 것으로 가득히 채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번 한 주간도 비로 말미암아 슬픔을 당한 가정, 재산의 피해와 어려움을 당한 분들이 계십니다. 이 시간도 그들을 기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홀로 영광 받으시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주실 줄로 믿사옵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고린도후서 10장은 고린도에 있는 바울의 대적자들이 사도바울에 대하여 인신공격을 하는 내용입니다. 본문 7절에서 18절까지는 이런 인신공격에 대한 바울의 답변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바울의 답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삶은 외모를 보고 남을 판단하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본문 7절을 보세요. “너희는 외모만 보는 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의 외모를 보고를 흠을 잡았습니다. 바울의 외모는 시원치 않았습니다. 이 세기에 기록된 바울과 대클라 행전을 보게 되면 사도바울은 키가 작았습니다. 왜소한 체형에다가 다리는 안짱다리였고 눈썹은 마주 붙어 있었고 매부리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외모는 아니었습니다.
또 본문 10절을 보세요.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바울을 비난하는 내용입니다. 말이 시원치 않다. 즉 어눌하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말을 잘할 것 같지요? 말을 잘 못했습니다. 말이 시원치 않았습니다. 그뿐만 아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갈라디아서 4장 13절-14절을 보게 되면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거시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사도바울은 고질적이고 만성적인 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대적들은 바울의 이러한 것들을 악선전에 재료로 사용을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외모를 가지고 판단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무엇을 보신다고 하셨지요?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무엘상 16장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에게 명령하시기를 베들레헴에 있는 이새의 집에 찾아 가서 이새의 아들들 중에 하나를 왕으로 세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명령대로 이새의 집을 찾아가 이새의 아들들을 하나하나 불러 들어오게 했습니다. 이새의 장남 엘리압이 들어왔습니다. 사무엘이 보니 엘리압은 대단한 인물입니다. 키가 컸습니다. 아주 용모가 준수했습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을 자가 바로 여기에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무엘상 16장 7절에 보세요.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막내아들인 다윗을 택하시고 사무엘로 하여금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겉꼴 안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겉꼴」은 ‘겉모습’입니다. 「안꼴」은 우리의 ‘속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겉꼴이 아무리 좋아도 안꼴이 사람이 아니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볼 때 외모를 보고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겸비해야 합니다.
7절 하반 절을 보세요.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요?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아니했다는 그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다 겸손해집니다. 사람이 거듭나게 되면 모든 사람이 다 존귀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나만을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니라 바로 ‘저 형제와 자매를 위해서 피를 흘리셨구나.’ 예수님의 피를 흘리신 저분을 볼 때 우리는 존귀하게 보아야 합니다. 은혜 받으면 다른 사람이 존귀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잘 못 받게 되면 반대현상이 일어납니다. 7절의 말씀대로 “나는 그리스도인에게 속한 사람이지만 당신은 그리스도인에게 속하지 않았다.” 나는 구원을 받았지만 당신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라고 함부로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이비 이단일수록 그렇습니다. 사이비 이단을 보세요. 자기들만이 예수를 잘 믿고 자기들만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자기방어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됩니다. 신앙생활에는 언제나 겸비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안에 속해 있는 것처럼 저 믿음의 형제들도 다 그리스도안에 속한 사람들이라!』
형제를 존귀하게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옆 사람에게 인사해보세요. “형제는 존귀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 모두는 다 존귀하신 분들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들을 위하여 피 흘릴 만큼 여러분들은 다 귀하고 존귀한 분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파괴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세우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본문 8절을 보세요. “주께서 주신 권세는 파하려고 주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주신 것이니” 라고 말을 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주께서 주신 권세’라고 하는 말은 사도의 직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을 시키면 목사의 직분, 장로의 직분, 안수집사의 직분, 권사의 직분, 남녀 서리집사의 직분, 교회에서 맡은 직분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직분들은 주께서 주신 거룩한 직분들입니다. 바울은 이 직분을 가지고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너희를 파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세워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파하다’는 말은 ‘파괴하다’라는 말입니다. 이 직분을 가지고 파괴하려고하는 것이 아니라 세우려고 하는 것이니 이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께 받은 직분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합니까? 파괴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건설적으로 세우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파괴는 쉽지만 세우는 일은 어렵습니다. 파괴적인 행동, 파괴적인 말은 나쁜 일입니다. 말에는 견인력이 있습니다. 말에는 행동을 유발하는 힘이 있지요. 우리나라 속담에 “말이 씨가 된다”라는 말을 기억하시지요. 말이 씨가 됩니다. 민수기 14장 2절에 보세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조그만 한 어려운 일을 당해도 그들은 입버릇처럼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차라기 광야에서 이 고생을 하지 않고 애굽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파괴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말이 씨가 되어서 모세와 아론,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20세 이상 된 모든 백성들이 그들이 말한 대로 광야에서 다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파괴적인 말을 조심을 해야 합니다. ‘못살겠다. 차라기 죽고 싶다. 미치겠다.’ 미치는 것은 귀신들리는 것입니다. 파괴적인 말, 신세타령, 팔자타령 파괴적인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미국사람들의 인사를 보세요. 아침에 만나면 “Good morning!” 얼마나 멋진 인사입니까? 비가 와도 “Good morning”입니다. 비가 쏟아져서 수재를 만나도 아침에 만나면 “Good morning”하고 인사를 합니다. 부모가 죽은 슬픈 아침에도 “Good morning”입니다. 불쾌지수가 하늘을 찌르는 아침에도 “Good morning”하고 인사를 합니다. 스스로 병들어 죽어가는 아침에도 “Good morning”입니다. 그 말이 그들의 정신을 온종일 감싸고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에 비해 우리나라 인사는 어떻습니까? 보릿고개를 겪은 민족이니 “아침 드셨어요? 진지 잡수셨어요?” 옛날부터 강대국의 침략과 일본의 식민지아래, 6․25사변과 혁명으로 안녕하지 못했기 때문에 만나는 사람마다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바꾸면 어떨까요? 믿는 우리들은 “할렐루야!” “샬롬”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인사를 바꿔봤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남녀가 열렬히 사랑한 결과 드디어 결혼에 골인을 했습니다. 그런데 1년 후에 그들은 아무 이유 없이 이혼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세가정 가운데 한가정이 이혼을 하고 있습니다. 이 가정이 이혼을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봤더니 남편이 직장에 갔다 오면 날마다 기타를 쳤는데 이별 곡을 연주했다고 합니다. 이별 곡을 매일 부르고 일년이 지나고 나니까 그들의 머릿속에는 이별이라는 각인이 찍혀있었습니다. 아무런 부작용 없이 서로 이혼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에는 각인력과 견인력과 성취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말은 씨가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말을 할 때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소망적이고 미래적인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귀한 직분을 주신 것은 파괴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세우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덕을 세우는 말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늘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칠줄로 믿습니다.” “앞으로 교회가 더 뜨거워질 줄로 믿습니다.” 좋은 말만 하세요. 좋은 말을 하시게 되면 그렇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경우에도 좌절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이미 보았지만 10절에 보세요. “그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이 시원하지 않다 하니” 사도바울의 외모뿐만 아니라 말이 시원치 않았지요? 바울이 서신에는 분명히 중하고 힘이 있었습니다. 빌레몬서까지 합쳐 13서신과 히브리서까지 합친 14서신을 바울이 기록을 했습니다. 그 편지를 보면 얼마나 힘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까? 그러나 실제로 인물을 대하고 보니 말이 시원치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4장 8절에서 18절을 보게 되면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설교를 할때 놀라운 이적들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말이 시원치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을 증거 할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능력에 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바울에게 약점이 있었다고 하면 저와 여러분에게 얼마나 많은 약점이 있겠습니까?
디엘 무디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나왔습니다. 초등학교 중퇴를 했습니다. 무식하면서도 세계적인 부흥사로 쓰임을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존 밀턴을 아시지요? 소경이면서도 실낙원을 써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습니다. 베토벤은 말년에 귀머거리이면서도 세계적인 악성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약점 때문에 하나님께 더욱 매달리게 되고 결사적인 기도를 통해서 새 역사기 일어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고린도전서 1장 21절, 29절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은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슬기로운 자들은 부끄럽게 하시고 하나님은 약한 자를 택하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하나님은 없는 자들을 택하사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래야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은 육체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만을 자랑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역사하는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무슨 약점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에게 무슨 부끄러운 일이 있습니까? 절대로 좌절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약점! 여러분들의 부끄러운 것을 들어서 더 강하게 사용해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은 절대로 어떤 경우를 당해도 좌절해서는 안됩니다. 절대로 낙심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내 약점을 들어 더 강하게 해 주심을 믿으면서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중심으로 살아야합니다.
본문12절에 보세요.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자기를 칭찬하는 자는 이단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 12절 하반절에 보게 되면 결국 이단자들은 지혜가 없도다. 미련하다고 했습니다. 이단자들은 자기를 자랑합니다. 여기서 자랑하는 자들은 이단자들을 말합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미련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이 부잣집에는 오리가 수 만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주인은 미련하기 때문에 자기 집에 오리가 몇 마리가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고작 셈을 하는 방법이 두 마리씩 짝을 지어보는 것입니다. 짝을 딱 맞춰 보아서 맞으면 그냥 맞나보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오리 한 마리가 모라랍니다. 한 마리가 짝이 안 맞습니다. ‘종이 오리를 잡아먹었구나.’ 사실 종이 오리를 잡아 먹었습니다. 주인은 종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네가 오리는 먹었지?” “안 먹었습니다.” “짝이 안 맞는데” 오리 지키는 종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종이 한 마리 잡아먹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내일 당장 한 마리를 갖다 놓겠다고 주인과 약속을 했습니다. 종이 생각을 해보니 자기의 꾀가 약했습니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까 주인이 오리를 셈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니 남은 한 마리도 잡아먹으면 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한 마리를 잡아먹었습니다. 종은 오리고기를 배불리 먹고 편하게 잠을 잤습니다.
그 다음날 종이 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말씀대로 오리 한마리를 갖다 놓았습니다.” “오 그래. 세어보자!” 셈이 딱 맞았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과연 벌이라고 하는 것이 효과가 있군. 어제 종을 때렸던 매가 오리를 채워놓는 것을 보니...” 그러면서 기뻐했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어리석음을 모릅니다. 도리어 자기가 똑똑한 줄만 압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단자들은 자기들 스스로 칭찬하는 이단자들은 스스로 자랑하며 스스로 지혜있는 것처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크게 두 가지 기준 가운데서 살고 있지요? 언제나 자기 기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삶의 기준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상대하기가 아주 곤란합니다. 이단자일수록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 중심적입니다. 삶의 기준은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사람은 남을 판단 할 때는 한없이 너그럽지만 자신을 판단 할 때는 매우 엄합니다. 우리의 삶이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그래야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오늘 바울을 통해서 외모를 보고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겸비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파괴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세우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어떤 경우에도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