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0일(주)
* 시작 기도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주님...
주님께서는 육체로 계실 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십자가를 지는 고통은 극한의 고통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육신의 고통 때문에 심한 통곡이나 눈물의 간구와 소원을 올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육신의 고통과 정신적 고통 곧 침뱉음과 뺨을 맞는 것 등에는 전혀 반응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면 창세전부터 단 한 번도 아버지와 분리되지 않았었는데 이제 아버지와의 분리됨이 바로 당신의 고통 중의 고통이었음을 압니다.
나는 처음부터 고아였기에 그 분리의 고통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 분리의 고통으로 인하여 통곡과 눈물의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고 아버지께서는 그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나도 아들의 생명을 얻어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살게 되었음을 믿습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소서.
나의 의로 행하려는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사오니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어린 아이와 같이 젖만 먹는 자가 아니라 장성하여 단단한 음식을 먹고 소화할 수 있는 주의 자녀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시 69:1-12
제목 :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켰습니다.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소산님에 맞춘 노래)
1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2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3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
4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
5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6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7 내가 주를 위하여 비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나의 얼굴에 덮였나이다.
8 내가 나의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나의 어머니의 자녀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었나이다.
9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10 내가 곡하고 금식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11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그들의 말거리가 되었나이다.
12 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비난하며 독주에 취한 무리가 나를 두고 노래하나이다.
* 나의 묵상
본시는 극심한 고난 가운데 처한 다윗이 괴로움과 슬픔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하나님께 구원을 부르짖는 시이다.
또한 시 22편과 같이 다윗 자신의 고난의 경험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부분적으로 예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메시야 예언시라고 할 수 있다.
본시의 저작배경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대개의 학자들이 다윗의 아들인 압살롬이나 아도니야의 반역을 저작 배경으로 추정하는데 그 중에서도 아도니야의 반역에 더 많은 무게를 둔다.
이 시의 표제에 ‘인도자를 따라 소산님에 맞춘 노래’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45편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오는 말로서 ‘소산님’은 백합화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45편이 싱그러운 향기를 뿜어내며 상아 궁전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꽃을 피우는 백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본시는 그 45편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따라서 45편은 왕으로서의 메시야의 영광스런 측면을 노래하고 있다면 본시는 메시야의 겟세마네에서의 극한 수난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1-4절은 고난의 깊은 수렁에 빠진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고통으로 인하여 절규하는 내용이다.
주님, 물들이 내 목까지 차올랐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세요.
내가 무저갱 같은 수렁에 빠져 들어갑니다.
거기에 파도가 나를 덮칩니다.
내가 도와달라고 부르짖다가 지쳐서 목도 마르고 아픕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느라 눈도 침침해졌습니다.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내 머리카락보다 많습니다.
무고하게 내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는 자가 나보다 강합니다.
하여 내가 빼앗지도 않은 것을 물어내라고 강요합니다.
5-12절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도리어 자기에게 고난이 되어 돌아왔음을 토로하는 내용이다.
주님, 주는 나의 어리석을 아시기에 주 앞에서 나의 죄를 숨길 수가 없습니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님께 소망을 둔 사람들이 나로 인하여 창피를 당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들이 나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내가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 없으나 나는 주님을 위하여 이 부끄러움을 견딥니다.
나는 내 형제들에게 낯선 사람이 되었고 한 피를 나눈 형제들에게도 외국인 취급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주의 집을 사랑하는 열정이 온통 나를 태우기 때문이며, 주를 향한 모욕이 내게도 쏟아지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내가 금식하며 슬퍼하였더니 오히려 사람들이 나를 비웃습니다.
나아가 내가 굵은 베옷을 입고 슬퍼하면 사람들은 나를 웃음거리로 삼습니다.
심지어 동네 어른들도 나를 향하여 빈정대며, 길거리의 술주정꾼들도 나를 빗대어 노래합니다.
8절에 내가 나의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나의 어머니의 자녀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었다는 말에서 내 형제와 내 어머니의 자녀는 일차적으로 다윗의 형제들로 대변되는 다윗 왕가 사람들을 의미한다.
하지만 보다 넓은 의미로는 한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말은 다윗이 그의 가족과 동족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9절을 보면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다’고 한다.
이 구절의 원문은 앞부분에 ‘왜냐하면’이라는 히브리어 접속사 ‘키’가 나온다.
이것은 9절이 8절의 원인이 되는 구절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즉 다윗의 형제들에게조차 배척을 당했던 것은 하나님의 집을 위하는 열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집이란 성전을 가리킨다.
이 때문에 학자들은 다윗이 형제들에게조차 배척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려는 다윗의 계획을 형제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사실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큰 경비와 노동력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해서 드린 예물만 보아도 성전 건축이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대상 29:1-9).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집’이란 단지 건물 성전만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성전으로 상징되는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일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위한 다윗의 열심이 ‘내 형제’로 묘사된 백성들에게 걸림이 되어 그들로 하여금 다윗을 배척하게 만들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주님의 제자들은 9절 말씀을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는 사건으로 인하여 나타날 결과에 대한 예언으로 보고 있다(요 2:17).
주님은 갈릴리를 중심으로 하는 본격적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기에 앞서 유대 지역에서 사역을 하셨다.
이 때 주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가셔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심으로 성전을 정화하셨다.
이는 성전의 이권과 결탁되어 있던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주님을 미워하게 만든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바로 이 때 주님의 제자들은 바로 오늘 본문의 9절 말씀이 주님에 대한 예언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후에 주님은 공생애 사역을 마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다시 한 번 성전을 정화하시는데 이는 주님이 유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붙잡혀 죽으심을 당하는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단 성전 정화 사건으로 인하여 유대인들만의 미움을 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시는 주님의 모든 일이 유대인들에게는 못마땅한 것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심지어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난 주님의 친형제들조차 자기의 형인 예수를 배척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예수님은 다윗의 예언대로 주의 집을 위한 열섬으로 인하여 삼킴을 받게 된 것이다.
그렇게 그는 곧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다.
실로 다윗이나 예수 그리스도는 모두 주의 집을 위하는 열심으로 인하여 수치와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하지만 주님은 물론 다윗도 수치나 고통을 두려워하여 주의 집을 위하는 열심히 식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수록 주님과 다윗의 주의 집을 위한 열심은 커져만 갔다.
나는 어떠한지 나 자신을 돌아본다.
나는 예수님은 고사하고 예수님을 예표하는 다윗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하는 자이다.
오히려 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며 선동한 군중에 가까운 자이다.
아니 내가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이다.
이런 나로 인하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던져버렸는데...
예수님은 그런 나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죄인이 되셔서 나무에 달리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율법과 계명을 어긴 자가 당하는 최후의 심판이다.
(신 21:23b)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라.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질 것을 창세전 언약에서부터 정하셨다.
(벧전 1:20, 쉬운성경)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리스도를 택하시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구원하시고자 보내주셨습니다.
따라서 나는 어떻게 해도 할 말이 없다.
입이 열 개라도 그저 두 손으로 입을 가릴 뿐이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요 죄의 장본인인데 무슨 할 말이 있으랴?
따라서 오늘도 나의 나 됨을 곱씹으며 그저 면목없음과 죄스러움 그리고 감사와 은혜로 긍휼하심을 얻기 위하여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 품으로 담대히 나아간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이 시간 주님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습니다.
부끄럽고 죄스러워서 입이 있으나 아무 것도 말 할 수 없나이다.
이런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데 어찌하여 이런 죄인을 당신의 목숨과 맞바꾸셨는지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봐도 불에 타 죽어야 할 자인데, 불에 그을린 나를 얼른 꺼내서 검게 그을린 부분을 후후 불어 털어내고 당신의 피 곧 보혈로 씻어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나는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그 생명으로 아들을 힘입어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것 삼으소서.
내 뜻이나 내 의를 드러내는 자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의와 그 영광을 드러내는 자로 서게 하소서.
나의 삶에도 주의 전을 위한 열심히 삼킴을 당하는 고난이 있으나 그로 인하여 포기하지 않게 하소서.
고난이 오면 올수록 더 주님과 연합하여 그 고난의 자리에서 생명으로 행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