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풍시인 연암박지원 2
주영숙 지음 -작품으로 읽는 연암박지원 2권 (산문, 시편/2월 말 출간예정)-
고려 말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방석)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에 드러눕게 되었다. 정몽주(1337~1392)를 비롯한 고려 왕조 수호 측에서는 이성계를 밀어낼 좋은 기회로 삼고자 했는데, 이방원(태조 이성계의 5남. 태종. 1367~1422)이 이를 눈치 채고는 정몽주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방원은 상황을 살필 겸 문병 온(정인지 외 지음, 이윤석 옮김 용비어천가①, 솔, 1998, 128~140) 정몽주에게 고려왕조를 저버리고 이성계를 따를 것인지의 여부를 따지기 위해 「하여가」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정몽주의 답가가 「단심가」인데, 이 둘은 알다시피 자수중심의 평시조이다.
(초)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此亦何如 彼亦何如)
(중) 만수산 드렁츩이 얽어진들 긔 어떠리 (城隍堂後垣 頹落亦何如)
(종)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
「하여가」(청구영언 17)
(초)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중)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종)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與)
「단심가」(청구영언 40)
그리고 적어도 2년 앞서 변안렬(1334~1390 : 고려 공민왕 때의 문 ‧ 무관. 최영과 같이 제주를 정벌, 우왕 때 왜구를 크게 물리치고 돌아와 이성계의 부장으로 운봉에서 왜적을 크게 쳐 부셨고, 위화도로부터 돌아온 후엔 단양군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고, 안동의 왜구를 몰아낸 후 원주 부원군에 봉군. 공양왕 초에 삼사사三司使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김저(최영의 조카)가 이성계를 죽이라는 부탁을 받고 돌아와서 판서 곽충보와 모의하여 거사할 것을 결의하였고, 충보의 배신으로 이성계에게 발각, 소위 ‘김저의 옥사’가 일어났다. 그래서 변안렬은 이림 ‧ 우현보 ‧ 이색 등과 함께 유배되었고, 이들 중 변안렬은 바로 그 유배지에서 사형되었다)이 노래했다는 「불굴가」는 중장이 길어진 사설시조로써, 다음과 같다.
(초) 내 가슴에 구멍을 뚫어 골짜기처럼 해놓고 穴吾之胸洞如斗
(중) 기나긴 새끼줄을 꿰어 넣고 貫以藁素長又長
앞뒤로 잡아당겼다 밀어붙였다 갈아댈까 걱정이지만 前牽後引磨且憂
네 맘대로 하여도 나는 군말 않겠다 任汝之爲吾不辭
(종) 그러나 내 임을 빼앗겠다면 有欲奪吾主
나는 절대로 따르지 못한다 此事吾不從
김천택이 엮고 최남선이 옮긴 청구영언(전규태 편, 한국고전문학전집⑧ 시조집, 수문서관, 1883, 150~151쪽)과 규장각 본 가곡원류(앞의 책, 380쪽)에 개제된 익명의 노래는 다음과 같다.
가슴에 궁글 둥시러케 고
왼기를 눈길게 너슷너슷 뷔여 아 그 궁게 그 너코 두놈이 두긋 마조자바 이리로 훌근 져리로 훌젹 훌근훌젹 저긔 나남즉대되 그는 아모로나 견듸려니와
니나 님 외오살라면 그 그리 못리라
— (청구833/가곡605)
‘내 가슴’이 아니라 ‘가슴에 구멍을……’로 시작되는 이 노래에 가장 근사치의 해석을 적용하여 현대글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초) 가슴에 구멍을 둥실하게 뚫고
(중) 왼새끼(외가닥 새끼)를 눈길게 어슷비슷 비벼 꼬아 그 구멍에 그 새끼줄 넣고 두 놈이 두 끝을 마주잡아 이리로 훌근 저리로 훌젹 훌근훌젹 할 때에는 나남적대거나 말거나 그는 아무쪼록 견디려니와
(종) 행여나 임과 외따로 살라하면 그는 그리 못하리라.
산해경에 등장하는, 지체 높은 사람의 그 가슴구멍에 막대기가 끼워져서 역시 가슴에 구멍이 뚫린 두 하인이 앞뒤에서 가마인양 매고 가는 그림이 연상되는 노랫말이다. 산해경 ‘해외남경’에는 “관흉국이 질국 동쪽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가슴에 구멍이 나 있다.”라고 되어있는가 하면, 주치중의 이역지에는 “천흉국은 성해聖海의 동쪽에 있는데 가슴에 구멍이 있어서 존귀한 이는 옷을 벗고 비천한 것들로 하여금 대나무로 가슴을 꿰어 들고 다니게 한다.”라고 되어있다(정재서 역주 산해경, 민음사, 2010년판, 231쪽). 또한 이아 ‘육만’에 대한 이순의 주석에는 “육만은 천축, 해수, 초요, 기종, 천흉, 담이, 구지, 방척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종족 중에서 천흉족은 가슴에 구멍이 나 있고, 귀인들은 그 구멍에 긴 장대를 꿰어 가지고 두 사람이 떠메게 하여 다닌다고 되어있다.
이는 사설시조 소재를 동양고전 산해경, 즉 ‘관흉국’이나 ‘천흉국’사람의 캐릭터를 빌려오기는 할지언정 그 가사가 음란하거나 외설스럽다고 규정지음은 편견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불굴가」에서는 그따위 비루한 시어는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죽음을 초월하여 사랑을 지키려는 숭고한 정신만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은이가 숭고한 사랑만을 강조했다면 그 정서의 균형이나 조화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 수도 있다. 여기서 ‘가슴에 구멍을 뚫음’으로써 곧바로 죽음을 연상시키는 무거워진 분위기를 누그러뜨릴 장치가 필요했고, 그것을 조성하는 장치가 “훌근 훌젹 훌근훌젹”과 같은 의성어들이다. 시조에서 품위를 지닌 말들을 시어로 써야 함은 전통적 시어법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사설시조 작시법에서는 이러한 원칙이 대체로 무시되었다. 이런 의성어를 대담하게 사용함으로써 ‘평시조’에서의 절제된 언어와 구속적인 윤리의 질곡에 갇혔던 인간의 심성을 풀어놓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익명성을 지닌 노랫가락이며 사설시조였다.
그건 그렇고, 앞에서 확인하다시피 변안렬의 한문시에는 ‘나’라는 의미의 ‘오吾’가 초장에 한 번, 중장에 한 번, 종장에 두 번이나 들어가 있는데 반해, 「청구영언」 ․ 「가곡원류」에 각각 비슷하게 게재된 한글표기 사설시조에는 ‘나’라는 말이 단 한 부분도 없다. 또 한편 변안렬 한문시에는 ‘기나긴 새끼줄’이고 한글표기에서는 ‘어슷비슷하게 꼰 외가닥 새끼줄’로써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명백한 사설시조로 나타나는 한글표기의 “왼새끼(왼기)”는 한편 종교적 의례와 관련을 지니는데, 매 가닥을 왼쪽으로 비벼 오른쪽으로 꼬아나간 외가닥 새끼로서 신성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금줄이다. “눈이 길게 나타나도록 어슷비슷 비벼 꼬아(눈길게 너슷너슷 뷔여 아)” 만든 왼새끼를 둥그렇게 뚫어놓은 가슴구멍에 꿰어 양쪽에서 잡아당긴다는 거다. 관흉국이나 천흉국 사람들에겐 오히려 영광스럽고 성스러운 행사이겠다. 하지만 애당초 없던 구멍을 일부러 뚫고 거기에다 새끼줄을 넣어 들락날락시키다니, 이야말로 고통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천흉국에선 존귀한 이는 옷을 벗고 비천한 것들로 하여금 대나무로 가슴을 꿰어 들고 다니게 한다.’라고 한 문헌의 어원을 따져 살펴보면 이는 ‘죽음을 동반한 고통의 현장을 보여줌으로써 세속적 자아를 존귀하게 정화시키는 의식’이기도 하다. 이로써 한문시 「불굴가」는 한글판 사설시조 표기와 뭉뚱그려 다시 풀이해야 확실한 의미를 지닌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이는 ‘내 가슴팍에 구멍을 뚫어 거기에 새끼줄을 넣고 앞에서 당겼다 뒤에서 당겼다 들락거리게 하여도 그건 참을 수 있지만 고려를 향한 내 성스러운 지조만은 절대로 굽히지 않겠다.’는 결사적인 의지의 표명이다. 이 「불굴가」는 고려왕조를 지탱하려는 신념과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항거의 자세로 죽음을 달게 받아들였다는 점이 「단심가」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기도 하다.
정몽주는 시조 「단심가」를 읊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딸려 보낸 조영규의 철퇴를 맞고 피를 흘리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이방원과 정몽주가 「하여가」와 「단심가」를 부르고 생사여탈을 한 시기는 변안렬 사망(1390) 2년 뒤의 일이기도 하여 세 편의 시를 한데 묶어서 이야기함은 잘못이다. 게다가 「불굴가」는 다른 두 노래와 달리 사설시조이다. 그래서 「불굴가」가 대중들에게는 좀 더 친근하였겠고, 그에 따라 많이 불렸으리라 본다. 뿐만 아니라 일찌감치 기록된 이 한문시와 조선조 후기 가집 소재의 국문 노래가 비교적 맞아떨어지는 현상만 보아도 이 노래가 이미 오래전(산해경이 우리나라에서 읽히기 시작한 시기)부터 대중들 사이에 활발히 가창되어 왔음이 드러나기도 한다.
묻노라 그 누가 이 절을 지었는고? 나라 사정 좌지우지할 재물을 축냈구나.
옛날 옛적에 ‘천흉’의 중이 바다를 건너와 살았다는데 그 조각상은 새까매서 까마귀 같고 비쩍 말라서 할망구 같았다네. 경을 새기던 처음 일을 남김없이 말했다는데
참으로 황당 괴이하여 어림잡기 어려워라
— 연암집4권 ‘영대정잡영’ 「해인사」 부분
위의 인용에서와 같이 옛날 옛적에 ‘천흉족’ 중이 합천에 와서 살았고 새까만 까마귀 같고 비쩍 마른 할망구 같은 조각상까지 있다는 이 이야기를 미루어 짐작하더라도 ‘가슴에 둥그런 구멍 뚫린 사람’ 소재의 이 노래는 그래서 작자와 창작 및 기록 연대가 ‘옛날 하고도 옛적 천흉족 중이 합천에 와서 경을 새기던 처음 일을 남김없이 말했다’는 연암의 말대로 참으로 황당 괴이하여 어림잡기 어렵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이쯤이면 ‘사설시조’에 저토록 까마득한 역사성을 부여해도 그다지 무리는 아니겠다.
어쨌든 이 노래는 “조선 개국을 앞둔 이방원이 고려 말의 중신들을 회유하기 위해 부른 「하여가」에 응수하여 무관 변안렬이 부른 「불굴가」”이긴 하지만, “「단심가」와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지어진 건 아니다.” 그러므로 ‘사설시조 이야기’를 펼쳐 보이면서 「불굴가」가 마치 청구영언에 ‘변안렬’ 작품이라 표기되어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함(유심, 2012. 1/2.)은 잘못이다.
포은 정몽주가 「단심가」를 읊은 뒤에 선죽교에서 방원의 문객에게 격살된 1392년은 훈민정음이 창제(1443년)되기 51년 전으로서, 한글이 만들어지기 반세기 전이었다. 더구나 「불굴가」 ‧ 「하여가」 ‧ 「단심가」를 수록한 청구영언은 훈민정음 창제 285년만이고 연암이 태어나기 9년 전인 1728년에야 편찬되었다. 또한 이 책이 햇빛을 보는 시점은 청구영언이 편찬된 지 284년만이기도 하다.
앞에서 읽은 바대로, 정형시 시조는 우리 민족의 호흡법을 십분 참조하여 창조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그렇지만, 일정한 방식의 가락을 동반한 소리는 있었으나 소리(말)에 맞는 글은 없었다. 단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것만으로는 우리 정형시가 제대로 정립될 수가 없었고, 말에 맞는 글이 없었어도 한자는 있었고, 그래서 시조는 한자 ․ 한시로 표기될 수밖에 없었다. 바로 변안렬의 「불굴가」처럼, 연암의 시 또한 그냥 한문시가 아니라 ‘우리 호흡방식’에 기초한 음률의 시, 시조였다고 아니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더군다나 시 제목 중에서 발견되는 ‘절구 한 수를 읊다’는 바로, 연암 자신의 시가 갈데없는 시조임을 확연히 짚어주고 있지 않은가.
(초) 머리 하얀 서생이 황경엘 들어가니 書生頭白入皇京
(중) 옷차림도 자연스레 하나의 늙은 병사 服着依然一老兵
말을 타고 또다시 열하로 가고 있으니 又向熱河騎馬去
(종) 참으로 공명에 나아가는 가난한 선비로세 眞如貧士就功名
— 연암집4권 ‘영대정잡영’ 「절구 한 수를 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