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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2년 3월 10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루카. 15,1-3.11ㄴ-32)
While he was still a long way off,
his father caught sight of him, and was filled with compassion.
He ran to his son, embraced him and kissed him.
말씀의 초대
미카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사고 하느님께 애원한다. 미카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죄를 뉘우치고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라고 있다(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죄인이 당신 품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죄에 빠져 죽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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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르미타시 박물관에는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돌아온 탕자’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습니다. 누더기 옷, 다 해진 신발과 상처 난 발바닥은 그가 집을 떠나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았는지 말해 줍니다. 그의 머리는 막 태어난 아이의 모습처럼 삭발인데, 이는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으로 다시 태어났음을 보여 줍니다. 동생을 안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있는 큰아들은 어둡게 처리되어 있습니다. 그 얼굴에는 시샘과 질투, 그리고 분노가 가득 차 있습니다. 아버지의 행동이 못마땅한 것입니다.
아들을 안고 있는 아버지의 두 손은 서로 다릅니다. 왼손은 크고 강인한 손 모양으로, 세상의 어떤 위험에서도 아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아버지의 손입니다. 오른손은 작고 부드러운 손 모양으로, 아버지가 다 품지 못한 사랑을 섬세하게 품어 주는 어머니의 손입니다. 아버지의 얼굴은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다가 늙어 버린 모습입니다. 그러나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는 안도감으로 자비롭고 평온하게 보입니다. 한쪽 눈은 집 나간 아들을 그동안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눈물로 짓물러 거의 실명 상태입니다. 그러나 눈가에는 분노가 아닌 사랑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집을 나간 뒤로 하루도 그 자식을 잊지 못하고 자식이 떠난 길을 끝없이 바라보았습니다. 집 나간 아들을 향한 그리움은 눈물이 되고, 날마다 흘린 눈물 때문에 눈은 짓물렀습니다. 저 멀리 길모퉁이를 돌아오는 몰골이 달라진 아들을 아버지는 바로 알아봅니다. 그리고 아들을 안고 기쁨에 겨워 춤을 춥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아버지의 마음은 바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과 잘못을 다 아시면서도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십니다. 죄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이시고,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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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작은아들은 이 말을 오랫동안 연습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성품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말없이 내어 줍니다. 작은아들도 놀랐지만, 큰아들이 더 놀랐을 것입니다.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섬겼지만’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지 않던 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작은아들은 재산을 손에 쥐자 서둘러 떠납니다. 인사 한마디도 없이, 혹시나 아버지 마음이 변할까 봐 연기처럼 사라진 것입니다. 아버지는 어찌하여 철없는 아들에게 거금을 쥐어 준 것일까요? 가져가면 분명 날려 버릴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는지요?
아버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유산이 있는 한, 그것에 마음을 빼앗겨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선뜻 주었던 것입니다. 재산보다 아들이 더 소중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판단처럼 아들은 재산을 다 날립니다. 거저 생긴 것이었기에 물 쓰듯 써 버렸습니다. 빈털터리가 되자 고생과 굶주림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비로소 그는 ‘인생의 눈’을 뜹니다. 그리하여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실패와 좌절은 곧바로 은총이 되었던 것입니다.
복음의 주제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 역시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지니셨음을 알리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실패 속에서도 일어서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뜻을 찾아봐야 합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언제나 넉넉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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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재산을 날릴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누어 줍니다. 유산을 넘보고 있는 한 ‘어떤 말’도 소용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예감은 적중합니다. 작은아들은 겁 없이 탕진해 버립니다. 고생 없이 들어온 재산이 오래갈 리 없었던 것이지요.
재물이 떠나자 사람들도 떠나갔습니다. 갈 곳도, 있을 곳도 없어졌습니다. 작은아들은 처량해집니다. 고독과 패배감이 온몸을 휘감습니다. 그는 비로소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을 깨닫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뛰놀던 집이 그리워집니다.
현명한 부모는 자녀들에게 고생을 가르칩니다. 결핍의 체험을 통해 겸손과 이해심을 체득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신비입니다. 삶과 인생을 ‘다시 보게’ 하는 길잡이입니다. 작은아들 역시 ‘모든 것을 잃었기에’ 자신의 본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기대했던 모습입니다. 그에게 실패는 분명 ‘은총’이었습니다.
노력 없이 생긴 재물에는 ‘하늘의 힘’이 없습니다. 당연히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런 재물은 사람을 우습게 봅니다. 재물도 눈과 귀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집에는 ‘재산’이 많습니다. 여건을 갖추면 언제든지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겪는 ‘고통’을 주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버지는 우리의 행복을 바라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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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쉰들러(1908-1974년)는 독일인 사업가로,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나치에 협력해 돈을 많이 벌었으나 그 재산으로 이른바 ‘쉰들러 리스트’를 작성하여 천이백여 명의 유다인들을 구해 낸 인물입니다. 그의 이러한 선행이 전설과도 같이 입으로 전해졌지만 그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뒤 그로 말미암아 생명을 구제받은 유다인들의 명단 원본이 발견되자, 오스카의 일생은 단번에 영웅적인 이야기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만든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는 주인공 오스카 쉰들러와 독일의 유다인 수용소 소장의 술좌석 대화 장면이 나옵니다. 오스카가 “선의 극치는 용서입니다.” 하고 수용소 소장에게 말하자, 그는 처음에는 이 말을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러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유다인들을 죽이는 일을 그만두고 용서를 실천해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용서를 통하여 선을 체험해 보고 싶었던 소장은 이내 다시 자신의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예전처럼 유다인들을 거리낌 없이 죽이고 맙니다.
수용소 소장이 용서를 끝까지 실천할 수 없었던 것은 용서에 대한 체험, 곧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자신이 받지 않은 것을 남에게 줄 수 없다.”는 라틴 말 속담처럼, 스스로 용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남을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방탕한 생활을 접고 돌아온 작은아들을 따뜻이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마음은, 아들이 나중에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는 아버지의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 송동림 신부-
언젠가 여름방학을 맞아 한동안 고향에 머물고 있을 때 몹시 무더운 날이 이어졌는데, 어느 순간 아버지께서 소매가 긴 옷을 입고 계신 것을 깨달았다. 성당을 가실 때, 읍내를 다녀오실 때, 이웃집을 다니실 때, 집에 계실 때도 어김없이 긴팔 옷을 입고 계셨다.
하루는 “왜 여름에 소매 긴 옷을 입으십니까 ? 덥지 않으십니까 ?” 하고 여쭙자 아버지께서는 어색해하며 머뭇거리다가 소매를 걷어 팔을 보여주셨다. 아버지의 양팔은 오랜 투병생활로 인한 주사바늘 자국과 함께 그 후유증으로 가슴 아플 정도로 혈흔과 흉터가 가득했다. 아버지는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신경 쓸까 봐 감췄고, 그 사실을 나는 그때야 알았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금, 이 세상에서 부모로 살고 있는 분들을 뵐 때 종종 그분들이 드러내지 못하고 묵묵히 안고 가시거나 홀로 삭히는 내면의 고통과 아픔을 느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과거와 달리 자녀들한테 외면당하거나 소외당하는 부모님들, 나아가 자녀들한테 언어나 신체적 폭력에 시달리는 부모님들이 더욱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 이야기를 듣는다. 작은아들이 아버지를 떠나 방탕하게 생활하다가 결국은 아버지 곁으로 돌아오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새 신발을 신겨주며, 살진 송아지를 잡아 즐거운 잔치를 벌인다. 큰아들처럼 화가 나서 외면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아버지는 작은아들을 받아들인다. 특별히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를 통해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절절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행여 몸은 교회에 있지만 마음이 떠나 있다면, 다시 아버지 하느님 품으로, 하느님의 집으로 돌아가자.
기억나세요?
-김효준신부-
가끔씩 신학생 시절에 썼던 일기를 꺼내봅니다. 서툴고 투박하고 유치해서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하고 순수합니다. 힘이 있고
열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모습’이었던 그 기억들은 지금의 나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우어줍니다. 잠시
잊고 있던 ‘예전의 내’가 흔들리며 갈피를 못 잡는 ‘지금의 나’를 채찍질하여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기억’에는 이런 힘이 있습니다. 미래를 향한 여정이
과거의 기억이라는 원동력으로 힘을 받아 나아갑니다. 기억 안에는 새출발을
위한 힘이 들어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작은아들은 굶어죽기 직전에
아버지를 ‘기억’합니다. 아버지께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것들이 사라졌지만,
아버지에 대한 이 기억만큼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기억은 아버지를
향해 돌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새출발을 위한 힘이 되었습니다. 기억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값진 선물입니다. 기억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 순간에 나를 구원해줄 수 있는 강력한 빛입니다.
그러니 그 기억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쪽박 근성
-김찬선신부-
작은 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난 것은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자기 것이 없어서 떠난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는 무엇이든지 풍성하지만
다 아버지 것이고 자기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작은 아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생각은 다릅니다.
큰 아들에게 한 말에서 아버지의 생각이 드러납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작은 아들과 큰 아들 모두,
모든 것이 다 아버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아버지 것이라는 생각은 맞습니다.
모든 것은 다 아버지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당신 것이 다 자식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비해 자식들은 아버지 것은 아버지 것이고
내 것이 따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로 살림을 차리려는 이 마음,
이 마음이 아버지 집의 그 풍요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다 쪽박을 찬 다음에야 그 풍요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누리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처지가 된 것,
그것 참으로 안타까운 얘기지만 그래도 다행입니다.
그리움 그것은 한 편으로는 상실의 아픔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소중한 갈망이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그것이 지천으로 많을 때는 그 귀중함을 모르고
전에 그것을 누리고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몰라 버리고 떠났는데,
잃고 나서야 그 귀중함을 알고
가난해진 다음에야 그것을 갈망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이 다 그런 것 같습니다.
잃고 난 뒤에 그 소중함을 압니다.
건강을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고,
아내를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고,
부모를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고.
이것이 인간의 구조인가 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가지고 있을 때는 소중한 줄을 모르고
꼭 잃고 나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될까요?
이것이 풍요를 살지 못하는 쪽박근성입니다.
우리가 진정 가난하고 겸손하다면 늘 현재적으로 풍요를 사는데
가난하고 겸손하지 못하기에 거만하게 그 풍요를 우습게봅니다.
그러다 쪽박을 차고 난 뒤에야 쪽박을 애지중지합니다.
얼마나 우습습니까?
전에는 쪽박이 무엇입니까?
은총과 사랑이 널려 있었을 때는 쪽박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쪽박이 소중하고
쪽박만큼의 풍요라도 감지덕지입니다.
오늘 작은 아들을 바라보며
주변의 너무나도 소중한 것들을 잃고 사는 것이 아닌지,
그 은총을 쪽박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되돌아봅니다.
아버지 마음
-전삼용신부-
레페브르는 주교로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에 반대하여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서품을 주었던 사제들도 교회에서는 파문되었었습니다.
저도 오스트리아에서 한 번 그들이 하는 미사에 참례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든 미사는 라틴어로 사제가 신자들을 등지고 미사를 드렸고 미사에 온 사람들도 수건으로 머리를 가리고 있었습니다. 성체성사 때는 앞으로 나가 무릎을 꿇으면 흰 천을 가슴 앞에 대고 성체 가루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며 입으로 성체를 영해 주었습니다. ‘공의회 이전에는 이렇게 미사를 드렸겠구나!’하면서 시대를 거슬러 미사를 드리고 온 느낌이었습니다.
공의회는 각 나라말로 미사를 드릴 것을 결정하였지만 그들이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하고 그 이전의 전통만 고집하기에 교회에서는 그들을 파문한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베네딕도 교황님께서는 그들의 파문을 철회하고 그들을 교회에 받아들이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미사를 거행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것에 관해 많은 주교들과 성직자들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교황님께서 공의회에서 주교단이 결정한 사항을 거부하는 단체를 받아들여서 주교단과 공의회의 권위를 실추시켰고 교회 안에 분열을 일으킨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도 교회 내에서 이런 반론들이 제기되니 이번에는 그것에 대해 교황님께서 모든 주교님들께 해명하는 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강경하게 비판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서로 잡아먹으려 하고 있습니다.”
사실 가만히 살펴보면 그들이 그렇게 공의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 것이 ‘파문’거리는 아니었습니다. 공의회에서 새로 결정된 교의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단지 그 공의회에서 결정한 것은 사목적인 사항들이었습니다. 그 사항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여 교의에 어긋나는 것은 아닙니다. 파문은 교회의 신앙에 어긋나는 신심행위를 했을 때에야 정당합니다.
그들도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고 교회의 믿을 교리도 모두 인정합니다. 단지 전례 형태만 다른 것입니다. 공의회 이전 전례를 고집한다고 하여 그들을 파문해야 한다면 그 전까지 그런 전례를 행해왔던 모든 사람들도 문제가 있는 것일 것입니다. 물론 지금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고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하지만 그렇게 쉽게 파문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현 교황님은 신학자시기 때문에 이것을 깊이 간파하시고 그들의 파문을 철회하신 것입니다.
말썽꾸러기 자녀도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오늘 복음엔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제목이 탕자의 비유라고 붙여졌지만 실제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탕자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아버지입니다. 그 다음 주인공이 작은 아들의 회개를 반기지 않는 큰 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은 큰 아들로 상징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법을 지키며 충실한 아들처럼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다시 돌아와 아버지께 안기는 것을 보면 화가 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보면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은 말썽꾸러기 아들이라도 당신 품으로 돌아오기만을 바라십니다.
교황님은 이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두 팔 벌리고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이고 그 모습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바리사이의 모습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어떤 모르는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있다고 말하고 그것을 금지시키려고 하자 예수님은 그를 그냥 내버려두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다가 돌아서서 당신을 욕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다만 한 명이라도 당신 품에 안기기를 원하십니다.
선교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밭에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는 먼저 굳은 땅을 갈아엎어야 하듯이 잘못된 것을 지적해 주어야합니다. 그러면 그런 말을 들은 사람은 그렇게 지적해 주는 사람을 거부하게 됩니다. 오늘 작은 아들이 뛰쳐나가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반항할 것을 알면서도 잘못을 지적해주는 아버지의 마음이 더 아프다는 것을 아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기다립니다. 갈려진 밭에 뿌려진 씨가 자라나 열매를 맺도록 기도하며 참고 기다릴 뿐입니다. 재촉하지도 않습니다. 무엇이나 다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다면 두 팔 벌려 새로 태어난 아들을 반깁니다.
열두 사도 중에 성경을 통하여 결혼을 했다고 알 수 있는 사람은 베드로밖에 없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결혼했던 베드로를 첫 번째 교황님으로 뽑으셨을까요? 바로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는 구체적인 아버지의 마음으로 교회를 이끌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우리도 바리사이처럼 모진 마음을 먹지 말고 아버지처럼 넓은 사랑의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도록 합시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 주십시오."
-양승국신부-
<부드런 주님의 음성>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가 가사 말이 너무 좋아 자주 흥얼대던 복음성가 한 곡이 생각났습니다. "탕자처럼."
"탕자처럼 방황 할 때도 애타게 기다리는
부드런 주님의 음성이 내 맘을 녹이셨네
오 주님 나 이제 갑니다 날 받아주소서
이제는 주님만 위하여 이 몸을 바치리다"
당신께로 발길을 돌릴 때마다 한번도 내치지 않으셨던 제 인생의 주님이셨습니다. 돌아갈 때마다 조용히 제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셨던 그분은 진정 자비의 주님이셨습니다.
그 주님은 제가 아무리 못할 짓을 했어도 용서해주셨던 주님, 제가 아무리 거스르는 짓을했어도 눈감아주셨던 주님, 제 죄를 용서하는 것, 제게 한결같이 자비를 베푸는 것이 특기이자 유일한 낙이신 주님이셨습니다.
이런 자비의 주님을 두고 너무도 자주 딴 짓을 하고, 너무도 딴 길을 갔었던 지난날을 다시 한번 뉘우칩니다. "오 주님 나 이제 갑니다 날 받아주소서"외치면서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작은 아들이 보였던 행동은 인간으로서 해서는 도저히 안될 행동, 어처구니없는 행동, 한마디로 싸가지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사회에서도 유산이란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 고려하는 것이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은 아직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몫의 유산을 챙겨 아버지를 떠나갑니다.
이 말은 이제 "당신은 당신, 나는 나"란 말과도 같습니다. 결국 남남이 되었다는 말, 부자간의 인연을 끊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더 이상 내 인생에 참견하지 말라"는 행동이었습니다.
작은 아들이 떠나간 후 남은 아버지가 느꼈던 심정은 어떤 심정이었겠습니까? "참담함"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짐"이었겠지요.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완전히 맛이 가버린 작은 아들은 수중에 땡전 한푼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야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자각합니다. 더 이상 먹을게 없어서 돼지가 먹는 짬밥으로 겨우겨우 연명하게 되는 데, 다행히도 그 상태에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아버지의 따뜻한 품을 기억합니다.
회개의 과정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잘못에 대한 철저한 반성도 중요합니다. 앞으로는 정말 정도(正道)를 걸어야겠다는 굳은 결심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한없이 자비로우신 아버지께로 우리의 얼굴을 돌리는 일"입니다.
진정 수치스럽고 면목 없는 일이겠지만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려야겠다고 결심하는 일이야말로 회개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회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해 얼굴을 돌리는 일이 아니라 태초부터 주의 깊게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그분을 향해 우리의 얼굴을 돌리는 일입니다.
그분의 자비로운 눈길에 우리의 시선을 맞추는 일입니다. 세상으로 향했던 우리의 얼굴, 악에로 기울었던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한번 아버지 쪽으로 돌리는 일이 바로 회개의 핵심입니다.
타인과 교제함에 있어 그들에게 상응한 태도로써 대한다면 그들을 보다 나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상대방을 실제보다 더욱 뛰어난 사람으로 대해 준다면 우리들은 타인을 보다 나은 인간이 되도록 인도해 주는 것이 된다.(필립 체스터필드)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양승국신부-
<괜찮다, 다 괜찮다>
날씨가 오락가락하지만 이제 또 다시 형제들과 어줍잖은 ‘아마추어 농사’를 슬슬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언젠가 하루 온종일 퇴비와 씨름한 적이 있었습니다. 냄새가 제대로인 퇴비를 한 트럭 실어왔습니다. 밭에 도착해서 골고루 뿌렸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형제들이 다들 코를 쥐고 뒤로 물러나더군요. 강력한 퇴비냄새가 온 몸에 배였던 것입니다.
오늘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은 더했겠지요. 그는 가지고 있던 돈을 다 탕진해버리고 살길이 막막해지자 돼지 치는 농장에 취직했습니다. 거기서 주로 했던 일은 어떤 일인지 아십니까? 그들이 생산해내는 막대한 배설물들을 계속해서 치우는 일이었습니다.
언젠가 마땅히 갈 곳 없다며 취직자리 알아봐달라는 ‘의지가 약한’ 그래서 늘 떠도는 한 형제를 돼지 치는 농장에 보내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월급도 그만하면 괜찮고 시골이라 돈 쓸 일도 없고, 금방 돈 모으겠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사흘 만에 전화가 왔습니다.
“신부님, 저 여기서 도저히 일 못하겠어요. 냄새 때문에 돌아버리겠어요.”
제발 조금만 더 견뎌보라는 말에 그 형제는 제게 ‘빽’ 소리를 질렀습니다.
“신부님이 여기 와서 단 한 시간만이라도 일해보고, 그런 말 하라구요!”
그때 저는 돼지농장하시는 분들의 고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살길이 없음을 알게 된 둘째 아들의 마침내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게 되고, 드디어 발길을 아버지 집으로 돌리게 됩니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둘째 아들의 몰골을 떠올려보십시오. 가관입니다. 제대로 씻기나 했겠습니까? 땀 냄새, 돼지 배설물 냄새, 별의 별 냄새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신발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맨발입니다. 머리카락은 산발에다 떡진 머리입니다. 옷은 갈아입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도 기억 못합니다. 거지 중의 상거지꼴이었습니다.
그를 보는 사람마다 다들 코를 움켜쥐고 멀찌감치 피해갔습니다. 그가 지나가고 나면 다들 투덜거렸습니다.
“저게 사람이냐, 짐승이냐?”
아버지 집 가까이 이르러서는 따가운 눈총들이 더 심했겠지요.
“야, 저게 누구냐? 그 싸가지 없는 둘째 아들 아냐? 꼴좋다! 천하의 불효자식 같으니라구! 빈대도 낯짝이 있지. 그러고도 지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구?”
다들 한 목소리로 둘째 아들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쌍욕을 해댔겠지요.
그러나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 유일하게 그러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왜 그랬냐고 따지지도 않습니다. 싸가지 없는 자식이라며 뒤통수를 치지도 않습니다. 그러고도 네가 인간이냐며 다그치지도 않습니다. 돈 얼마 남았냐며 호주머니를 뒤지지도 않습니다.
그저 말없이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품에 끌어 앉습니다. 한손으로는 내 이제 더 이상 너를 놓치지 않겠노라며 끌어안습니다. 다른 한 손으로는 괜찮다, 다 괜찮다, 너만 살아 돌아왔으면 다 괜찮다며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십니다.
자비하신 우리 하느님의 얼굴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기쁨이 되는 사람
-남상근 신부-
루카 복음 15장은 되찾은 기쁨을 연달아 전하고 있습니다. 길 잃은 양을
찾은 기쁨, 잃었던 은전을 찾은 기쁨, 아버지의 품을 떠났던 타락한 아들이
되돌아왔을 때의 기쁨. 비슷한 주제가 세 번이나 반복된다는 것은 강조하기
위해서이겠지요. 그만큼 되찾은 기쁨이 비길 데 없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양을 찾은 목자도, 은전을 찾아낸 여인도, 아들을 껴안게 된
아버지도 모두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벌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 모두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양이 불어난 것도 아니고,
은전에 이자가 붙은 것도 아니고, 아들이 금의환향한 것도 아닙니다.
그다지 기뻐할 일이 아닌 듯 싶습니다. 그러나 마치 없던 것을 새로 얻은
것처럼 기뻐 어쩔 줄 모르는 목자와 여인과 아버지의 심정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이라는 것이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메시지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으로 믿음이 길을 잃을 수 있습니다. 유혹에 빠져 허덕이면서
제 자리를 못 지킬 수도 있습니다. 갈등할 수도 있고, 타락할 수도 있고,
아버지의 품을 거추장스러워하면서 멀리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고
다시 돌아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내치지 않으실뿐더러 오히려 팔을 벌려
맞아주시며, 과거의 부정과 실패에 대해서는 결코 묻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돌아가면 아버지께 기쁨을 안겨드리는 꽤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
- 이정배 목사-
오늘 말씀의 바로 앞을 보면 잃었다 얻은 것의 기쁨을 표현하는 주옥같은 비유가 많이 있습니다.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되찾은 이야기, 은전 하나를 어둠 속에서 발견한 여인의 이야기 등이 그것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100과 10이라는 숫자입니다. 이것은 모두를 뜻하면서 전체를 지칭합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에서는 가족 구성원 전체를 의미할 수 있지요. 하느님은 모두의 구원을 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양 한 마리, 동전 한 닢이 없다면 그리고 아들 하나가 더불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구원의 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종교는 나와 남을 가르고 신자와 불신자, 구원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누고 가르는 일에 익숙합니다. 지난 연 말 성탄을 전후해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침략하여 몇백 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도 있었습니다. 본래 종교란 자기 아(我)를 죽이는 일에 철저해야 하는 법이지요. 자기 ‘我’는 손에 칼을 든 형상으로 남을 찌르고 상처 내며 고통을 자아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종교는 이율배반적으로 자기 ‘我’를 강화시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개신교와 가톨릭의 갈등이 여전한 것도 이런 실상이 반영된 것이겠지요.
이 점에서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기쁨을 노래한 성경말씀은 종교의 핵심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몫을 챙겨나간 너무도 영특한 아들이었습니다. 세파에 휘둘려 자신의 몸 하나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지치고 타락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비로소 아버지 품이 생각났지요. 얼마나 참혹했으면 아들로서가 아니라 종으로서 아버지 곁에 있고 싶었겠습니까?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늘상 기억했고 잘잘못을 묻지 않았으며 곁에 둔 아들보다 더 큰 사랑을 주었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집안의 아들’이 오히려 우리가 관심을 둬야 할 본문의 주인공입니다. 여기서 집안의 아들은 ‘유다인’을 뜻할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못마땅했겠지요. 그러나 하느님 집인 교회에 머물고 있는 우리 역시 어느덧 그 시절 유다인처럼 변해 버렸습니다. 아버지 마음을 읽고 이해하기 보다는 강화된 자신의 ‘我’로 경계 밖의 사람들을 배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 안의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잃었다 찾은 한 마리 양이 주는 기쁨이 크다고. 하지만 아흔 홉 마리 양, 집안 아들의 소중함이 덜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모두의 구원, 전체를 품어 안으시려는 것이 아버지 마음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때론 우리가 아버지 마음을 방해하는 존재가 되곤 합니다. 형의 질시와 시기가 오늘 교회 안에 있는 나의 모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아버지 집 사이에서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에 대해 얘기할 때나 특히 강론을 할 때
저는 어떤 두려움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 얘기 자체로 너무도 완벽한 가르침을 주고 있고
그 메시지가 너무도 선명할 뿐 아니라 너무도 감동적이기에
이 얘기에 무엇을 더 얹어 얘기하는 것은
오히려 군더더기요 훼손이 될 것 같은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를 반성하는 마음으로
큰 아들에 대해 묵상해보았습니다.
큰 아들은 동생에 대해 시샘을 합니다.
첫 째는 방탕하게 마음대로 살았던 동생에 대해 샘을 냅니다.
동생이 들어온 뒤에 투덜거리는 것을 보면
큰 아들도 아버지의 곁을 떠나고 싶었고
그 이유는 자기도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생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는데
자기는 아버지를 모시느라 종처럼 일만 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한 때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지금 밖에서 신나게 인생을 즐기는데
수도원에 일찍 들어온 저는 왠지 억울하고
수도원에 들어와 사는 것이 큰 손해를 본 것 같았습니다.
작은 아들처럼 하고 싶은 것 다 해보고
아오스딩 성인처럼 방탕한 생활과 종교의 편력도 다 해보고,
그러고 나서 아버지의 집이 좋다고 확신이 들 때
아버지의 집에 대한 갈망이 생길 때
수도원에 들어오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 때 세상을 기웃거렸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 곁에 있는 것이 종처럼 산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버지를 떠나 살아보지 못한 것을 억울하게 생각합니다.
큰 아들은 두 번째로 아버지의 사랑을 놓고 동생에게 샘을 냅니다.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은 자기한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준 적이 없는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동생한테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준다고 투덜대며
아버지의 사랑을 놓고 동생을 시샘합니다.
이런 큰 아들에게 아버지는 말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큰 아들의 불행은
아버지와 늘 함께 있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 되지 못하고
아버지 집의 풍요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버지 집에 있으면서 늘 밖을 동경하고
그렇다고 용기 있게 밖으로 뛰쳐나가지 못합니다.
그 어중간하고 우유부단함 때문에
그는 아버지와 세상, 그 어느 쪽도 확실히 선택하지 못하고
한 편으로는 아버지의 곁을 떠났던 동생을 샘내고
다른 한 편으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동생을 샘냅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양승국신부-
<늘 손해만 보시는 아버지>
돈보스코 성인의 3대 후계자인 필립보 리날디 신부님(1856-1931)의 전기(피에트로 리날디저, ‘사랑에 강요되어’, 돈보스코 미디어)를 읽고 있습니다.
단 하루라도 리날디 신부님과 살아본 사람들이라면 다들 한목소리로 이렇게 증언했더군요.
“정말이지 저는 단 한 번도 그분을 윗사람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저의 행복을 위해 온갖 수고를 마다않는 제 친아버지와도 같았습니다. 그분과 함께 했던 수도생활은 아기자기하고 화목한 가정생활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농부출신의 나이 많은 요한이라는 신학생이 자신의 지적 무능력을 한탄하며 리날디 신부님의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신부님, 죄송합니다만, 저는 결코 훌륭한 사제가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만 두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 신학생가 겪고 있던 고초뿐만 아니라, 그가 지니고 있던 많은 잠재력과 열정을 파악하고 있던 리날디 신부님은 그의 지친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며 이렇게 격려의 말을 건넸습니다.
“요한, 중앙 제대 위의 초들을 본적이 있는가? 어떤 것은 길고 어떤 것은 짧지. 하지만 모든 초가 주님께 봉사하기 위해 거기 서있는 것이라네. 사실 짧은 초가 긴 초보다 훨씬 유용할 때가 있다네. 동트기 전에 미사를 드릴 때, 긴 초들은 사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네. 반면에 짧은 초는 사제가 미사경본을 읽은 데 아주 큰 도움을 주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라네. 교회는 낮은 자리에서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할 ‘키 작은’ 사제들을 더 필요로 한다네. 자네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될 거야.”
리날디 신부님의 진한 부성애와 잔잔한 위로에 크게 감동을 받은 요한 신학생은 다시 책을 손에 들었습니다. 그는 후에 브라질 선교사로 파견되었습니다. 위기에 처한 인디언들의 사도이자 또 다른 따뜻한 아버지로 살다가 그곳에 뼈를 묻게 됩니다.
부성애,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 훈훈해지는 단어입니다. 사제라면 누구나 따뜻한 부성애를 지닌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을 것입니다. 공동체나 단체의 책임자들 역시 수하 사람들에게 부성애를 보여주고 싶을 것입니다. 가정의 아버지들 역시 아이들에게 부성애를 실천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지닌 분들, 오늘 복음을 늘 마음에 담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소개되고 있는 복음은 수많은 성서의 비유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비유입니다.
보통 이 비유를 사람들은 ‘탕자의 비유’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오랜 방황 끝에 아버지께로 돌아서는 작은아들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작은아들에 앞서 바라봐야할 대상이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입니다.
이 아버지는 철저하게도 수동형이십니다. 아들에게 늘 손해 보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때로 무능해보이고, 무기력해보이기까지 합니다. 마치도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과도 비슷합니다.
작은아들이 유산을 미리 챙겨가겠다는 요구를 했습니다.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정말 속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결과는 확연한 것이었기에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엄청 화가 났을 것입니다. 저 같았으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유산을 분배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를 뿌리치지 못하십니다. 작은아들이 원하는 대로 그냥 해주십니다.
완벽한 거지가 되고 나서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는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도 철저한 수동형이십니다. 결코 내치지 않으십니다. 왜 그랬냐고 따지지 않으십니다.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다그치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기쁜 얼굴로 작은아들을 환대하십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변덕스런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분이십니다. 늘 거기 그대로 서 계십니다. 우리가 떠나갈 때도 그냥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 흘리고 마냥 서계십니다. 우리가 다시 그분께로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 다른 데 가지 않으시고, 그 자리에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언제나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를 향해 팔을 벌리십니다. 죄구덩이 속에 살아온 우리를 내치지 않으시고 있는 힘을 다해서 포옹해주십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본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시 그분께로 돌아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하느님은 ‘어쩔 수 없는 내 사랑’이십니다.
서로 잡아먹으려 한다
-전삼용신부-
오늘 식사를 하는 중에 레페브르파(Lefebvre)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레페브르는 주교로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에 반대하여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던 분입니다. 그리고 그가 서품을 주었던 사제들도 교회에서는 파문 되었었습니다.
저도 한 번 오스트리아에서 그들이 하는 미사에 참례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든 미사는 라틴어로 사제가 신자들을 등지고 미사를 드렸고 미사에 온 사람들도 수건으로 머리를 가리고 있었습니다. 성체성사 때는 앞으로 나가 무릎을 꿇으면 흰 천을 가슴 앞에 대고 성체 가루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며 입으로 성체를 영해 주었습니다. ‘공의회 이전에는 이렇게 미사를 드렸겠구나!’하면서 시대를 거슬러 미사를 드리고 온 느낌이었습니다.
공의회는 각 나라말로 미사를 드릴 것을 결정하였지만 그들이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하고 그 이전의 전통만 고집하기에 교회에서는 그들을 파문한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베네딕도 교황님께서는 그들의 파문을 철회하고 그들을 교회에 받아들이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미사를 거행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것에 관해 많은 주교들과 성직자들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교황님께서 공의회에서 주교단이 결정한 사항을 거부하는 단체를 받아들여서 주교단과 공의회의 권위를 실추시켰고 교회 안에 분열을 일으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어느 면에서는 교황님께서 당신의 권위를 주교단과 공의회의 권위보다 더 높게 하고 그 이전 교황님이 결정했던 사항을 번복하시며 교황의 권위를 너무 남용하시는 것은 아닌지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하도 교회 내에서 이런 반론들이 제기되니 이번에는 그것에 대해 교황님께서 모든 주교님들께 그것을 해명하는 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강경하게 비판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서로 잡아먹으려 하고 있습니다.”
사실 가만히 살펴보면 그들이 그렇게 공의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 것이 ‘파문’거리는 아니었습니다. 파문은 교회의 신앙에 어긋나는 신심행위를 했을 때에야 정당합니다. 공의회에서 새로 결정된 교의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단지 그 공의회에서 결정한 것은 사목적인 사항들이었습니다. 그 사항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여 교의에 어긋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고 교회의 믿을 교리도 모두 인정합니다. 단지 전례 형태만 다른 것입니다. 공의회 이전 전례를 고집한다고 하여 그들을 파문해야 한다면 그 전까지 그런 전례를 행해왔던 모든 사람들도 문제가 있는 것일 것입니다. 물론 지금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고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하지만 그렇게 쉽게 파문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현 교황님은 신학자시기 때문에 이것을 깊이 간파하시고 그들의 파문을 철회하신 것입니다.
말썽꾸러기 자녀도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엔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탕자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아버지입니다. 그 다음 주인공이 작은 아들의 회개를 반기지 않는 큰 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은 큰 아들로 상징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파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법을 지키며 충실한 아들처럼 산다고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다시 돌아와 아버지께 안기는 것을 보면 화가 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보면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은 말썽꾸러기 아들이라도 당신 품으로 돌아오기만을 바라십니다.
교황님은 이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두 팔 벌리고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이고 그 모습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바리사이의 모습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이런 생각을 하며 저의 모습을 반성했습니다. 처음엔 저도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어떤 모르는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있다고 말하고 그것을 금지시키려고 하자 예수님은 그를 그냥 내버려두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다가 돌아서서 당신을 욕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다만 한 명이라도 당신 품에 안기기를 원하십니다. 성당 내에서도 넓은 부모의 포용력보다는 서로 잡아먹으려는 모습은 없는지 우리도 반성해 보아야겠습니다.
새벽을 열며
그저께 가정 방문 중 한 형제님과 컴퓨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즉, 요즘 컴퓨터 산업이 워낙 빨리 발전을 해서 따라가기가 힘들다는 이야기였지요. 그러면서 이 형제님께서 인터넷 고스톱을 예를 드시더군요. 얼마 전, 인터넷 고스톱에 접속하니까 자동으로 설치되는 프로그램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불과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새 버전이 나왔다면서 새로운 프로그램이 설치되는 것을 되면서 컴퓨터 계통이 얼마나 빨리 발전하는지를 알겠다는 말씀이었지요. 재미있는 예이고, 공감이 가는 예이기에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웃으면서 공감을 했지요.
사실 인터넷 고스톱에서 새롭게 바꿀 것이 뭐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고스톱 룰이 매번 바뀌는 것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자주 새로운 버전이 등장하고 새롭게 프로그램이 설치됩니다.
컴퓨터 계통만 이렇게 빠른 변화를 보이는 것이 아니지요. 어쩌면 이 세상 전체가 빠른 변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불과 10년 전, 20년 전과 비교했을 때, 이 세상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를…….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발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비해서 우리들은 잘 변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계속해서 미워하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우리들의 잘못들을 떠올려 보세요. 과거에 비해서 진전이 좀 있었을까요? 어쩌면 그러한 잘못들이 계속 누적되어 변화되지 못하고 더욱 더 완고한 마음만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고해성사를 볼 때면 어떻습니까? 매번 과거의 잘못과 죄가 반복되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이 부분은 저도 예외가 아니지요. 하나라도 줄여보려고 노력을 했지만, 고해성사를 볼 때면 여전히 똑같은 잘못과 죄를 반복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변화되지 못하는 우리들을 향해서 주님께서는 오늘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즉, 하느님 아버지께서 이렇게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 역시 자비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큰 아들의 모습만을 여전히 취하면서 내 이웃에 대한 미움과 단죄를 반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기의 재산을 탕진한 작은 아들을 따뜻한 품으로 안아주는 아버지의 모습에는 전혀 관심 없어 하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범하는 가장 큰 오류는 ‘나는 작은 아들이 아니다’라는 착각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늘 큰 아들의 모습만 취할 뿐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작은 아들의 입장이 되었을 때를 떠올려 보세요. 그때 하느님께서 큰 아들의 생각처럼 “여기가 어디라고 다시 찾아오고 그래? 당장 나가!”하면서 쫓아낸다면 어떨까요?
이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변화에 발맞추어야 하듯이,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용서와 사랑으로 나도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제1독서의 말씀처럼 주님께 기도해야겠습니다.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나요? 그 사람을 위해서 주님의 기도를 정성껏 바치세요.
빠다킹신부
구원의 보편성
-허찬란 신부-
작은아들이 유산으로 받은 재산을 흥청망청 쓰고 갈 곳을 찾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오히려 아버지는 버선발로 달려나가 맞이하고 살찐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입니다. 이 소리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던 형이 분개하여 집을 나갑니다.
이에 대해 철학적 인간학을 전공하신 한 신부님이 강론으로, 큰아들도
작은아들이 갔던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재미있는 상황을 물음표로 던지며
묵상거리를 주셨던 때가 떠오릅니다. 큰아들 역시도 세상이라는 곳에서 온갖
고생을 하고 죄를 짓고 다 탕진하여 작은아들이 걸어 들어왔던 그 집,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를 떠올릴 때 비로소 큰아들도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서 비난하고 욕을 하지만 사실 내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는 그 사람에 대해 전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각양 각색의 사람들 무리 속에서 인간 구원을 바라시는 주님의 사랑, 또한
인류를 보고 계시는 너그러우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도 죄를 많이 짓고 삽니다.
작은아들처럼 방탕한 죄, 큰아들처럼 하느님의 현존을 감사할 줄 모르는 죄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판관이신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보편성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사랑 지극하신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됩니다.
생명의 무게
-이동훈 신부-
◆「화엄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사나운 매를 피해 비둘기 한 마리가 부처님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매는 부처님께 비둘기를 살려주면 자신이 굶주리게 되는데, 이는 자연의 섭리를 어기는 것이라고 했다. 부처님은 옳다 하시고 비둘기 대신 자신의 허벅지살을 잘라주겠다고 하셨다. 그러자 매는 저울을 내보이며 비둘기의 무게와 같은 양의 살을 내어 달라 했다. 부처님이 허벅지살을 한 덩이 베어내어 저울에 올렸는데 비둘기 쪽이 더 무거워 약간 기울어졌다. 다시 다른 쪽 살을 베어내어 달아도 저울은 여전히 비둘기 쪽으로 기울어졌다. 부처님의 살이 비둘기보다 훨씬 많고 무거워 보이는데도 자꾸 저울이 비둘기 쪽으로 기울자 부처님은 아예 자신의 몸 전부를 그 저울 위에 얹었다. 그러자 저울이 수평을 이루었다. 이 저울은 고기의 근수를 재는 저울이 아니라 생명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었던 것이다. 하찮은 비둘기의 생명이라도 그 무게는 부처님 생명의 무게와 똑같기에 비둘기 한 마리를 살리기 위해선 부처님의 생명과 맞바꾸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한다. 바리사이들의 눈에 죄인들은 잘해 줄 가치가 없는 하찮은 존재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은전, 아들의 비유를 들어 그 하찮은 존재들의 무게에 대해 설명해 주신다. 한 마리 양의 무게와 아흔아홉 마리 양의 무게는 똑같은 생명의 무게를 지니며, 착한 아들이나 말썽꾸러기 아들이나 그 생명의 무게는 같다는 것이다.
반쯤 산 생명도 반쯤 죽은 생명도 없다. 죽거나 살거나, 주검이거나 생명이거나 한 것이지 그 중간이란 없다. 죄인과 의인의 생명 무게도 똑같다. 그래서 우리는 사형제도를 반대한다. 이라크인의 생명 무게와 미국인의 생명 무게도 똑같다. GNP도 문화수준도 종교도 생명의 무게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전쟁을 반대하는 것이다. 경제적 능력도 없고 정신연령도 낮은 장애인들을 보살피고 돌보는 이유도 우리 모두가 같은 무게를 지닌 생명이기 때문이다.
사순 제2주간 토요일
- 권경렬 신부-
내가 사과 세 알만한 꼬마였을 때
난 사나이가 되기 위해 큰 소리로 외치곤 했지.
‘난 알아, 난 알아, 난 다 알고 있다구!’
그것이 시작이었고, 그때가 바로 인생의 봄
하지만 열여덟 살이 되었들 때 난 또다시 말했지.
‘난 알아, 이번에는 진짜로 알아.’
그리고 오늘, 지난 일들을 회상하는 날들 중에
내가 수없이 걸어온 길들을 되돌아보네.
그 길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난 아직도 알지 못하네.
스물다섯 살 무렵 나는 모든 걸 알았었지.
사랑과 열정, 삶과 돈에 대해.
그중에서도 사랑에 대해서라면 모든 걸 다 해봤지.
생의 한 가운데서 난 또 다른 배움을 얻었지
내가 배운 것은 서너 마디로 말할 수 있다네
어느 날 누군가 당신을 사랑하고 날씨마저 좋다면
‘정말 날씨 한번 좋다’라고밖엔 더 잘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생의 가을녘에 들어선 내게 아직도 삶에서 경이로운 것은
그토록 많았던 슬픈 저녁들은 잊혀지지만
어느 행복했던 아침은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
젊은 시절 내내 ‘난 알아’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답을 찾으면 찾을수록 알게 되는 건 더 적었지.
지금 내 인생의 괘종시계가 60번을 울렸고
난 아직 창가에 서 있지.
밖을 내다보면서 난 자문해 보네.
그리고 이제야 난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
삶과 사랑, 돈과 친구들, 그리고 열정에 대해.
그것들이 가진 소리와 색에 대해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을.
이것이 바로 내가 알고 있는 것의 전부.
하지만 바로 그것을 난 또 알고 있지.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시멘트공과 점원, 신문판매 등 여러 가지 일을 전전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던 프랑스의 국민 배우 쟝 가방의 <이제 난 안다>라는 노래를 떠올리게 됩니다.
‘난 알아’ 사랑과 열정, 삶과 돈에 대해 ....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작은 아들도 집을 나설 때 세상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형이나 심지어 아버지보다도 -자신이 세상을 더 잘 헤엄치리라 믿었습니다. 당연히 아버지 집에서보다 더 행복한 삶이 앞으로 펼쳐지리라 확신하였을 것입이다. 결국 아무도 믿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믿었던 것입니다.
작은 아들은 떠나오던 날을 회상하며 비로소 알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것입니다.
삶과 사랑, 돈과 친구들, 그리고 열정에 대해. 그것들이 가진 소리와 색에 대해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을. 이것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의 전부라는 사실을...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을 믿었기에 작은 아들은 드디어 아버지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되돌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나락을 박차고 일어설 수 있는 자에게 언제나 새로운 삶은 열려있고, 아버지는 맨발로 달려나와 팔을 벌리고 서 계십니다. 비난을 무릅쓸 수 있는 용기,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용기를 통해 자신을 넘어서는 순간-이 순간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이고 구원의 순간입니다.
어떻게 그런 처지가 되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슬픔과 절망의 밤을 지낸 뒤 지치고 뼛속까지 멍든 밤을 지난 뒤 자리를 떨치고 일어날 수 있는가 알고 싶습니다.
그러나 알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그것이 바로 사순절 돌아옴의 시작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땅에서 하늘나라(天國) 누리기
-강영구신부-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하늘을 떠나 이 땅에 한 인간으로 태어나셨을 때, 이 땅에는 구원의 밝은 빛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강생降生으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죄 많고 부족한 인간들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동체자비행同體慈悲行을 실천하시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너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너와 함께 기쁨과 행복을 나누시려는 당신의 大慈悲心이 저희들에게는 구원입니다. 당신의 식탁에 초대받은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은 당신의 그 큰 사랑 때문에 자신들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큰 사랑은 거울처럼 그들의 모습을 밝게 비추어주어서 얼룩지고 때 묻은 겉모습 안에 감추어진, 맑고 밝고 아름다운 영혼을 보게 했습니다. 비록 사람들로부터 비난받고 따돌림 받는 처지이지만 하느님으로부터는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들은 새롭게 태어나서 하늘나라(天國)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조건 없이 당신의 식탁에 초대받은 그들은 이미 이 땅에서 하늘나라에 초대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저희들도 당신을 닮아서 형제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그들의 고통과 기쁨을 나의 것으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하늘나라(天國)는 멀리 구름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天國)는 너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삼아 함께 아파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나의 기쁨과 행복을 너와 함께 나누는 데 하늘나라(天國)가 있습니다. 너와 나를 구별하지 않고 동체자비행同體慈悲行을 실천하는 데 하늘나라(天國)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地獄은 너와 나를 구별하고 너의 상처와 고통을 나와 무관한 것으로 여겨 외면하는데서, 나의 기쁨과 행복을 혼자서 누리려는 데서 시작합니다.
예수님, 당신과 함께 오늘도 하늘나라(天國)를 만들고 누리는 하루가 되도록 축복하소서.(一明)
기다림
-박요한 신부 -
예수님은 세리나 창녀들과 같은 죄인들을 환영하면서 함께 음식을 드셨습니다. 당시에는 죄신이 취급되는 세리나 창녀하고는 교제를 하면 안되고 식사를 같이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는 죄인들에게는 회개하라는 의미가 있고 다른 사람들은 죄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금기를 깨고 이들을 환영하고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사들이 예수님께서 잘못된 행동을 하신다고 원망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이들을 환영하셨을까요? 이는 그들이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회개한 자를 따뜻하게 맞이하여 주십니다. 하느님은 회개한 자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회개한 자의 과거는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컴퓨터 파일은 지워진 파일을 복구할 수 있지만 하느님이 지우신 파일은 복구가 불가능합니다. 하느님은 살인과 간음을 한 다윗이 회개하였을 때 죄를 기억도 하지 않으시고 메시야의 조상으로 쓰셨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도망간 베드로가 회개하였을 때 그 죄를 기억도 하지 않으시고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쓰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은 그들의 회개한 모습보다 과거의 죄를 문제 삼았습니다. 이는 악마가 하는 짓입니다. 죄를 묻지 않음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오늘복음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다시 보여주십니다.....<이상, 두올묵상팀>
사랑은 기다림의 다른 이름입니다. 하느님의 다른 이름도 기다림입니다.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들이 오는 것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채시고 달려가 안아주는 아버지 마음입니다.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가듯이 저도 그렇게 가슴을 치며 통곡하다가 용서와 화해로 새로 태어나는 축복을 얻을 수 있을까요? 얼굴을 들어 하느님을 바라봅니다.
“주님, 당신은 사순절 내내 회개를 말씀하십니다. ‘자기 발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1고린 10,12) 교만한 저에게 어울리는 말입니다. 당신은 저를 끝까지 기다려 주신다는 것을 압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혹시 내 발로 서 있다고 착각하면서 잘난 척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봅니다. 나를 기다리는 당신의 눈길에서 멀리 벗어나 있지는 않은지….” ......
† 죽음에서 생명에 이르는 처절한 변화(생명에 대한 하느님의 기쁨) †
-박머르코 신부 -
루가복음 15장에는 세 편의 비유가 실려있다. 그것은 '잃었던 양의 비유', '잃었던 은전의 비유', 그리고 '잃었던 아들의 비유'이다. 잃었던 양의 비유는 마태오복음(18,12-14)에도 있으나 나머지 두 비유는 루가복음 고유의 특수사료에 속한다.
예수께서 세 편의 비유를 연이어 들을 들려주신 이유는 15장의 도입부분에 밝혀져 있듯이, 세리와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고,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 하며 못마땅해 하였기 때문이다.(1-2절) 세 편의 비유는 모두 잃었던 양, 은전, 아들을 다시 찾은 목자, 여인, 아버지의 기쁨으로 종결된다.
이는 곧 세리와 죄인들을 멀리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이들을 받아들이고 환영하며 잃은 것을 끝까지 찾아 나서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다시 찾으신 후 기뻐하시는 그분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오늘 복음에는 '잃었던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 비유'가 선포된다. 이는 루가 고유의 사료이면서도 너무나 잘 알려진 비유로서 때로는 '탕자의 비유'로, 때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비유'로 소개되기도 한다. 당시 죄인이라는 굴레를 뒤집어쓰고 살아야 했던 세리와 죄인들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끊임없이 예수께 모여든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그들을 예수께서는 환영하여 맞아들이고 기꺼이 말씀의 식탁에 앉혀 말씀의 음식을 나누어주시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자주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함께 식사하는 것을 비난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해명이다.
탕자와 그에 대한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비유는 세부묘사가 매우 생생하여 당시의 관습과 법적인 절차를 반영하고 있으며, 동시에 충격과 감동의 영적인 차원에로 청자(聽者)들을 초대한다. 비유는 크게 작은아들의 타락, 아버지와 탕자의 관계회복의 두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 탕자의 처절한 깨달음이, 그 마지막에 회복의 불가능을 시사하는 큰아들의 정의(正義)가 각각 그 고유의 역할을 행사하고 있다.
① 타락의 단계: 타락의 과정은 작은아들의 자기고집과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아버지로부터의 분리와 이탈에서 시작된다. 아버지로부터의 이탈은 방종(放縱)을 초래하고, 방종은 곧바로 육신의 욕심, 즉 방탕(放蕩)과 정욕(情慾)으로 치닫게 되고, 그 결과는 비천함과 굶주림이다. 이는 곧 영적인 빈곤으로 표현된다.(11b-17절)
② 깨달음의 단계: 영적인 빈곤을 깨닫게 되면 이제 회복과 복귀의 과정이 이루어진다. 회복과 복귀의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결심과 회개이다. 진정한 결심과 회개는 때때로 인간성 자체를 포기하는 처절한 자각에 그 뿌리를 둔다.(18-19절)
③ 복귀와 화해의 단계: 이제 복귀가 진행된다. 진정한 복귀는 육(肉)과 영(靈)의 차원에서의 변화를 의미하며, 이 변화는 처음부터 이탈된 장본인(아버지)에 의한 수용을 필요로 한다. 수용은 변화를 전제로 하여 화해와 화목을 조장하지만, 비유에서는 아버지가 보여준 인내의 기다림과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용서가 인상적이다.(20-24절)
④ 제3자의 입장: 이제 큰아들의 입장이 표명된다. 큰아들이 전체 사건과 아무런 관계없는 제3자는 아니지만, 타락과 회복의 과정에서 용서의 불가능함을 시사하는 정의(正義)를 대변한다.(25-32절)
어제는 우리가 마태오복음의 '악독한 포도원 소작인 비유'를 들었다. 여기서 마태오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가 소작인의 악행을 더 이상 두고볼 수 없어 끝장을 내야하는 정의(正義)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루가복음은 정의보다는 자비(慈悲)를 강조한다. 루가에게 있어서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마지막 대답은 정의라기보다는 자비이다. 즉, 심판이기보다는 용서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죄인에 비유된 탕자가 아버지의 용서를 회개함으로써 벌어들인 것은 아니다. 용서는 아버지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진다. 오늘 비유에서 보듯이 탕자인 작은아들(죄인)과 묵묵히 자기 본분을 다한 큰아들(의인)이 대조를 이루고 그 사이에 아버지가 서 있다.
아버지의 태도는 두 가지로 드러난다. 작은아들에게는 용서와 기쁨의 태도를 큰아들에게는 설득과 달램의 태도를 보인다. 큰아들이 작은아들의 잘못을 응징하려는 태도는 정의(正意)를 대변하는 것이며, 흔히 제3자인 우리들의 입장도 이와 같을 수 있다. 무릇 죄인이 우리도 다른 사람의 잘못은 응징하려든다는 말이다. 불의가 정의를 이길 수는 없다. 그러나 작은아들이 자기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있다(21절)는 점이 변수(變數)이다. 사실 이 변수에 관계없이 용서가 베풀어지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의 속성인 것이다. 아버지의 기쁨은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다"(32절)는 데 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난 생명에 대한 기쁨은 그 어떤 것도 불사(不辭)하는 하느님의 진정한 마음인 것이다. 혹자는 인과응보도 정당한 심판도 정의도 불사하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탓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 탕자의 입장이라면 그저 감사할 따름일 것이다. 그런데 감사할 줄 아는 탕자 또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처절한 자기 깨달음의 시간을 가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버지(루가 15,11-32)
-유광수 신부-
램브란트의 "탕자의 비유" 그림은 매우 유명하다. 그 그림을 보면 아버지가 돌아온 작은 아들을 껴안고 있는 모습이다. 늙은 아버지의 눈은 지긋이 잠겨 있고 아들을 껴안은 아버지의 한 쪽 손은 아버지의 손이요 다른 한쪽은 어머니의 손이다. 아버지 품에 안긴 작은 아들의 신발은 다 달아서 낡아 떨어졌고 발뒤꿈치는 굳은살이 박혔다. 옷은 남루한 옷차림에 아버지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우는 모습이다. 아버지는 우는 작은 아들의 등을 아버지의 손과 엄마의 손으로 어루만져 주며 감싸주고 있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져다가 다 낭비하며 방탕한 생활을 했던 아들을 나무라는 엄한 아버지의 모습도 그리고 돌아온 아들을 꾸짖는 모습도 없다. 오직 돌아온 아들을 반갑게 반기며 그 동안 아버지 곁을 떠나 고생했던 아들을 위로해주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처음과 똑같이 아들을 사랑해 주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조금도 변함 없이 한결같다. 늘 넉넉함과 포근함이 아버지의 품이고 언제나 반겨주고 안아주는 분이 아버지이시다. 작은 아들의 잘못을 보지 않으시고 오직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격해서 잔치를 벌이시는 아버지이시다.
아버지 앞에 작은 아들의 모습은 정말 가난하고 나약한 모습이다. 얼마나 많이 방탕한 생활을 하며 돌아다녔던지 신발이 다 달았고 맨발로 돌아왔을까? 아버지 집을 떠날 때 그처럼 당당하고 의기 충전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마치 젖떨어진 어린이처럼 아버지 앞에 무릎꿇고 아버지 품에 안기는 어린이의 모습이다.
이 그림의 중심은 방탕한 아들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의 낭비 생활 또는 그의 귀향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비유의 중심은 아버지이시다. 아버지 곁을 떠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리고 빈 털털이로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달려가서 입맞추고 안아주며 반가워하시는 아버지, 예전의 아들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이 중심이다. 바로 이 아버지가 하느님이시다.
아버지는 유산을 나누어 달라는 아들의 청을 즉각 거절하거나 적어도 바보 같은 짓을 하지 말도록 충고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재산을 나누어주고 작은 아들이 자기 가고 싶은 대로 가도록 놓아주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즉 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나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젊음의 충동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 그리고 멀리 있는 미지의 것에 대한 야망과 새로운 경험에 대한 욕망이었다.
시골에 있는 젊은이들이 답답하게 시골에 틀어 박혀있기 보다는 서울에 올라가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어하는 그런 충동이 바로 작은 아들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아버지는 알고 계셨는가보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말릴 수도 있었을 것이고 꾸짖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미리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신다. 왜 그러셨을까?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자유를 주셨다. 일단 자유를 주신 이상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를 보장해주신다. 자유를 위해 창조된 이상 인간이 제 마음대로 만사를 결정해 가도록 방임해 두신 것이다. 자유를 주고 나서 일일이 간섭을 한다면 그것은 자유를 주신 것이 아니다.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점점 더 깊은 구렁으로 빠져든다. 처음에 아들은 약간의 돈을 소비하는 사람이었고 실패를 몇 번 맛본 사람에 불과했다. 그러나 다음에는 주색에 빠져 흥청거리기 시작했고, 최악의 비참한 지경이 되어 돼지를 돌보다 굶어 죽게 될 신세가 되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돼지란 가장 더러운 동물로 취급하였다.
하느님은 인간이 자기가 선택한 길로 가는 것을 그대로 놓아두시며 그 행동의 결과로 밑바닥까지 떨어지도록 그냥 놔두신다. 인간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혼자 서 있을 수 있다고 확신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이 제 마음대로 결정하게 놔두신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만 위로 오르려 할 때 그의 의지와는 반대로 깊은 곳으로 거꾸로 떨어지는 절망을 경험하게 하신다. 이상한 것은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잘 될 때 하느님께 구원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하려드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결정대로 행해져 화를 당할 때 그 탓을 하느님께 돌리려 한다.
작은 아들은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때까지 깊은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비로소 자기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하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께 어떤 것도 요구할 수 없도록 모든 권리를 상실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아버지께 돌아 온 아들을 아버지는 사랑스럽게 받아주셨다.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먼저 방탕한 아들에게 달려가 그를 불쌍히 여겨 아들이 자기 죄를 고백하는 것을 채 끝내지도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아들이 돌아왔다 하여 잔치를 준비하게 했다.
하느님께서도 회개한 죄인을 이렇게 대해 주신다. 사람이 제정신을 차리고 반성하여 다시 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은총 덕분이다. 하느님께서 다시 받아들이신다는 것은 인간이 지은 죄를 모르시거나 잘했기 대문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 덕택일 뿐이다. 하느님께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온 죄인을 당신의 사랑으로 덮어 주시는 것, 과거의 모든 일을 잊으시고 죄로 생긴 빚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죄인을 전보다 더 잘 대해 주신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의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다.
아버지의 관대한 성품은 곧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해주는 것이다. 무한한 사랑, 사랑으로 돌아온 아들을 감싸 안아주시고 새 옷으로 갈아 입히시고 가락지를 껴주고 돌아온 아들을 축하해주기 위해 잔치를 벌이시고 음악으로 흥을 북돋아 주시는 것에 하느님의 사랑이 묻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