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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
고후 10:12-18
12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13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4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5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
16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17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18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고후 10:12-18 / 저만 잘났다고 떠들어대는 그런 사람들처럼 지금 내가 내 선전을 늘어놓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자를 가지고 자기를 재고 한 치도 안되는 생각들을 서로 견주어 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들입니까! 13) 우리는 갖고 있지도 않은 권위를 자랑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세우신 계획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이 계획 속에는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분을 위해 일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14) 그러니 설령 우리가 여러분에게 권위를 주장한다 해도 그것이 지나친 일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맨처음에 여러분에게 가서 전한 사람이 우리가 아닙니까? 15)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이룩해 놓은 업적을 우리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허락된 범위내에서라도 열심히 일하여 여러분의 믿음이 성장하고 여러분 속에 우리가 일한 것이 커가기를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16) 그러면 우리는 여러분이 사는 고장을 떠나 아직 아무도 가서 일하지 않은 곳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할 수 있어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는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17) 그러므로 성경에도 ㄱ)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주께서 하신 일을 자랑하고 자기 자신의 일을 자랑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ㄱ. 렘9:23-24) 18) 누구든지 자기를 자랑하거나 업적을 내세우는 사람은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주께서 인정하시는 사람만이 참으로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랑이 심하다고 자신을 비난한 내용에 대하여 의연히 대처합니다.
지혜롭지 못한 자랑(12) 자신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자랑하면 비난 받기 쉽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하면서 자랑을 포기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한다면 그 어떤 것도 자기 혼자서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랑은 자신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어서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자기가 드러나려면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낮추어야 합니다. 이들은 항상 자기가 기준이 되어 자기의 표준으로 자랑합니다. 어리석은 처사입니다. 지혜가 있다면 주님의 기준에 맞추어 그 사람을 비교해 봐야 합니다. 그러면 누구에게나 공평하며, 또한 누구도 자기를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13-18) 우리에게는 분량이나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각자에 맞게 나누어 주셨기에 그 안에서 감사하고 자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자기 평가 기준을 엄격하게 가지고 있지 않으면 쉽게 교만해지고 자기 자랑에 빠질 수 있습니다. 평가 기준을 무엇으로 삼느냐에 따라서 경쟁심이 드러날 수도 있고, 허망한 과욕을 꿈꾸기도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분량과 한계를 잘 지켰습니다. 반면에 자기 평가가 엄격한 사람은 남에 대하여서도 동일한 잣대를 냉혹하게 들이대기 쉽습니다.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는 그 사람의 전후 사정을 자세히 알 수 없기에 반드시 배려와 이해가 필요합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을 평가한 비판의 화살은 언제 자신에게 되돌아올지 모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주안에서 자랑하라는 말 자체가 믿음으로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믿음 안에서 목적을 바르게 가지고 하는 것이라면 주님께도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칭찬 받으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알면 겸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음 안에서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적용: 주님을 닮아가는 모습이 당신 안에서 보이십니까? 더욱 겸손과 낮아짐으로 주님을 닮아가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용서하기 어려운 상황이나 상대를 대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용서할 힘이 내게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의 약함을 인정할 때 주님이 역사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내 감정을 다스려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은 약해서 쉽게 동요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성령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해 지면 우리는 복음 전파 뿐 아니라 세상을 이길 힘도 능히 얻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 설 교 >
사명자의 기준과 목적과 태도
고후 10:12-18 / 이삼규목사
지난 주일에 사명자가 기억해야 할 것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 칭찬받는 사람이 되라. 둘째, 항상 조심하는 사람이 되라, 셋째, 사랑하며 함께 감당하는 사람이 되라.
오늘은 사명자의 기준과 목적과 태도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준으로, 어떤 목적으로 사명을 감당하고 계십니까?
1. 주님의 기준을 따라 사명을 감당합시다.
바울 사도는 거짓 사도들의 지혜 없음을 책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스스로 높여 자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떠하였습니까?
고후 10:13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여기에서 ‘분수 이상의 자랑’이라고 하였는데 ‘분수’라는 말은 ‘아메트로스’라고 하는 말인데‘헤아릴 수 없는, 무절제한, 과도한’ 등등의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자랑하다’(카우카오마이)는 ‘자랑하다, 뽐내다, 영광 돌리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의 행동은 ‘과도하게 뽐내는 것’이지만 자신과 일행은 그들처럼 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바울은 자신과 일행은 자랑을 해도 하나님이 정해주신 적정 범위 안에서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자신이 가진 어떤 조건이나 자질이 아니라 복음을 가지고 고린도에 갔기 때문입니다.
거짓 사도들은 자신의 기준으로 스스로 평가하며 자기기만에 빠지는 어리석음을 범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성도들도 자기 자신의 지식과 은사와 사역의 열매를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모든 것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전 4: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까? 한 가지도 없습니다. 성도는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오직 주님이 나눠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고린도 교회에 복음을 전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기준을 따라 사역하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이 정하신 복음의 기준을 따라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자신의 뜻대로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성부 하나님이 뜻하시고 보이신 그것을 행하셨습니다.
요 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또한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뜻과 기준을 분명하게 보여 주심으로 우리가 그대로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마치 운동 경기에서 운동선수가 규칙대로 경기해서 마지막 승리의 면류관을 쓰는 것처럼 말입니다.
딤후 2: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불수레>라는 영화는 1920년대 세계적으로 알려진 육상선수의 전기를 영화한 것으로 그 영화의 마지막에 이러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위대한 지도자나 사상가는 아니었지만 신앙의 원칙을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인생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고 산 사람입니다."
신앙의 원칙,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으로서 주일에 올림픽 결승전을 하게 되자 결승전 진출을 포기할 정도 이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그를 중국선교에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기준으로 자신의 신앙을 평가하고 계십니까? 날마다 무엇으로 인해 만족하며 기뻐하십니까? 혹시 신앙을 평가하는 기준을 성경 지식, 종교적 열정, 헌신, 은사, 재능과 같은 것에 두고 그것으로 자신을 살피며 스스로 만족하지는 않습니까?
만약 자신의 직분과 사역으로 인해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면 다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누구든지 그분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바로 그분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막 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하고 복음의 열매로 인해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2. 복음의 열매가 풍성해지길 소망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분수 이상으로 자랑하는 거짓 사도들을 엄하게 책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이 주님의 은혜로 수고하며 이뤄 놓은 선교적 열매를 마치 그들이 한 것처럼 스스로 자랑하며 떠들어 댔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그들과 달리, 바울은 자신이 이뤄 놓은 사역의 열매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은혜로 더 풍성한 열매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가운데 맺히고 그 지역을 넘어 주님의 복음이 더 넓게 전파되기를 열망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명자의 궁극적인 바람은 공동체 안에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가 더욱 풍성해지길 바라야 합니다(살전 1:3).
바울은 다른 사람이 수고한 것을 가지고 자기가 수고한 것처럼 주제넘게 자랑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다른 사람이 수고한 일에 관여해서 자기의 수고를 더했다 할지라도, 그들의 수고는 그들의 수고이고, 자기의 수고는 자기의 수고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만족에 빠진 거짓 사도들과 달리 무엇을 소망하였을까요?
지금까지 성취한 열매들을 보며 자기만족에 빠져서는 안 되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푯대를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 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빌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과거를 회상하고 자신이 지금까지 성취한 것을 계수하고 자기만족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자신이 얼마나 주님의 은혜를 경험했는지, 얼마나 주님을 위해 헌신했는지, 얼마나 열매가 맺혔는지를 헤아리며 마치 모든 것을 자신이 다 이룬 것처럼 스스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온전히 이뤘다고 착각하는 대신에 주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위에서 부르신 상을 위해 끝까지 달려 나가야 합니다.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주님 앞에 서기까지 복음의 증인으로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사명을 감당할 때,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며 그것을 통해 소망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혹시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모을 수 있는가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또는 자신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려는 것은 아닙니까? 또한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게 해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는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오직 자신을 대신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겠다고 결심하는 바울의 고백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고후 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3.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바울은 스스로 자랑하는 거짓 사도들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예레미야 9:24절을 인용해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즉 바울은 스스로의 지혜와 능력을 자랑하는 교만한 거짓 사도들을 책망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옳다 인정하고 칭찬하는 그들과는 달랐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권위가 주님께로부터 왔으며, 자신이 주님이 인정하시고 칭찬하시는 사도라는 것을 확증하면서 자신의 사도권을 변증하였습니다.
자랑과 교만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긍정적인 자아상을 갖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존재와 의견을 표현하는 것은 자랑입니다. 반면, 교만은 우월적 자아상을 갖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며 자기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화자찬, 다른 사람의 영역까지 침범하는 자기 존재 과시를 거부했습니다.
아름다운 자랑은 먼저 다른 사람이 인정해 주고 높여 주는 것을 겸손히 받아들이며 동시에 그들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선적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먼저 옳고 그름의 기준이신 주님께 칭찬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의 자랑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인정하시는 범위 안에서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그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귀결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바울은 스스로를 옳다 인정하는 거짓 사도들과는 달리 자신의 권위의 기원을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요?
거짓 사도들은 자신들의 기준으로 스스로를 평가하며 인정받을 만한 가라고 착각했습니다.인간적인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해 인정받는 것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왜냐하면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께서는 마음을 감찰하시기 때문입니다.
잠 21: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
그래서 성도는 자신의 기준이 아니라 주님의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주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 성령 안에서 힘을 다해 수고해야 합니다.
골 1: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즉 우리를 병사로 모집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그분이 남기신 자취의 본을 따라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게티스버그 전투 때 마이드 장군에게 공격명령을 내리면서 짧은 편지 한 통을 보냈습니다.
“존경하는 마이드장군! 이 공격작전이 성공한다면 그것은 모두 당신의 공로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 작전이 실패한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내게 있습니다. 만약 작전이 실패한다면 장군께서는 이 모든 실패의 원인이 링컨 대통령의 명령이었다고 말하십시오. 그리고 이 편지를 모두에게 공개하십시오!”
여러분은 공동체 안에서 누구의 칭찬과 인정을 바라며 사명을 감당하고 계십니까? 혹시 자기만족에 빠져 있거나 타인의 인정을 바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성령 안에서 주님이 주신 믿음과 사랑으로 섬기기보다, 인간적인 지혜와 자력으로 애쓰게 됩니다. 그래서 공동체를 섬기고 세우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지체들에게 상처를 주고 넘어뜨리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만일 그렇다면 베드로 사도가 들려준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인간을 내세우며 자기를 칭찬하는 자는 주께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주께 인정받는 사람은 주께서 칭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한 후에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이처럼 종은 모든 영광을 그 주인에게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르신 좋은 군사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분의 뜻을 따라, 그리고 그분의 나라를 위해 믿음과 충성과 인내로 끝까지 분투하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의 변명
고후10장 13~18절 / 지용수목사
마태복음 5장 14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산의 빛이 아니고 세상의 빛입니다. 동네의 빛입니다.
산기슭에 있는 동네도 밤에는 뿌연 불빛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산 위에 있는 동네는 낮에도 드러나고 밤에도 드러납니다.
미국 같은 곳에서는 두 시간 이상을 운전해도 동네 하나를 만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언젠가 제 아내와 둘이 어디를 가는데 두 시간 반이 넘도록 운전을 하고 가도 동네 하나, 자동차 하나 못 만났습니다. 밤 12시가 다 되어 가니 으스스한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때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갔습니다. 운전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모르지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다 동네 하나를 만나니 주님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습니다. 밤에는 불빛 때문에 동네가 더 환하게 드러납니다.
따라 합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산 위의 동네처럼, 드러나 빛을 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5장 15절에 보면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옛날에는 말 통을 사용했는데, 등불을 밝혀 놓고 그것을 말 통으로 덮어버리면 등불을 밝혀 놓은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래 전에 이 말씀에 관한 설교를 할 때 제가 말 통을 구하지 못해 플라스틱 통을 갖고 나왔더니 새 신자 한 분이 1부 예배에 오셨다가 딱해 보였는지 자기 친구 집에 있는 말 통을 빌려왔습니다. 그래서 2부와 3부 예배 때에는 그것을 가지고 설교를 했는데, 그 말 통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참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새 신자가 그것을 친구 집에 갖다 주려면 예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해서 설교를 세 번 다 들었는데 그 날 믿음이 강해져 굳세게 섰다고 합니다. 그분이 지금 우리 교회의 큰 일꾼이 되었습니다. 말 통 때문에 그분이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 통 안에 있는 등불이 되면 안 됩니다. 등경 위의 등불이 되어서 세상을 비추어야 되는 것입니다.
중세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마을이나 도시를 떠나 산 속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 때가 영성이 좋았다고 하는데,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너희는 산 속의 등불이니’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따라 합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세상에서, 마을에서 예수님을 믿고 살아야 됩니다. 할렐루야!
아브라함도 결혼하고 아들딸을 낳으면서 믿음생활을 잘 했고, 노아도 결혼하고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믿음생활을 잘 했습니다. 모세도 결혼하여 아들딸을 낳으면서 하나님을 잘 섬겼고, 하나님의 친구였던 다윗도 영성이 대단했지만 결혼하여 아들딸을 낳으면서 믿음생활을 했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산 속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는 것은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잠시 산 속에 들어가서 영성을 회복하는 것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에서 얼마든지 은혜를 받고 얼마든지 능력 있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산에 들어가 특별히 기도하면 영성이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대로 살아야 합니다. 산 속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는 것을 부러워하면 안 됩니다. 생활 속에서 빛을 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중세시대에 안토니오라는 사람이 뜻이 있어서 자기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자기는 산 속의 토굴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나님 가까이에서 살려고 애썼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안토니오야, 네가 그렇게 애써도 아무 쓸데없다. 너 혼자 여기에서 아무리 죄 짓지 않고 산들 무슨 의미가 있느냐? 너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구두를 고치는 노인보다 못하다.”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노인을 찾아갔더니, 그 노인이 아주 부지런히 구두를 고치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어떻게 믿어서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분이 되셨습니까?”
“나? 뭐 특별한 게 없어요. 우리 집이 가난하니 나는 날마다 구두를 고치며 살지요. 그리고 우리 식구들끼리 가정 예배를 드리고, 또 우리 아이들에게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을 가르치며 사는 것이 전부이지요.”
예수님을 믿으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구두를 고치며 세상에서 사는 것이 영성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산 속에, 굴 속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영성이 아닙니다. 잠시 들어가 기도하는 것은 도움이 되겠지만, 계속해서 그런 삶을 사는 것은 영성이 아닙니다. 거룩하게 살려고 장가도 안 가고 시집도 안 가는 것, 그것은 영성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영성 같으면 하나님께서 아담만 만들고 이브는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장가가고 시집가서 아이들을 낳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건하게 사는 것, 그것이 참 살아있는 믿음생활이고 세상의 등불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등경 위의 등불입니다.
등경 위의 등불은 표시가 납니다. 우리는 세상이 어둡다고 한탄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등불이 되어야 됩니다. ‘이 세상이 왜 이렇게 어둡냐?’라고 하지 말고 스스로 빛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끔 “이 나라에 기독교인이 이렇게 많은데 아직도 사회가 이렇게 어둡다. 이것은 교인의 책임이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부터 어두운 세상의 빛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예언입니다. 갈수록 악한 자는 더 악해지고 의로운 자는 더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의롭게 살고, 거룩하게 살아도 이 세상에는 마귀도 있기 때문에 죄와 방탕함이 계속해서 그 쪽으로 발전해 가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은 짐승보다도 더 악하게 살지만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점점 더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빛이 되어서 세상을 환하게 비추어야 됩니다.
그러면 빛이 되는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에 『너희 빛을 세상에 비추어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살아가면서 착한 일을 하지 않으면 빛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나는 사람에게 마음과 물질과 힘을 다해 자꾸 선을 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할 때 그것이 빛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등불이신 한경직 목사님은 사례비를 받아서 사모님께 전해 준 일이 별로 없었답니다. 6.25 직후 그 때는 우리나라가 한참 어려운 때라 사람들이 힘들게 살았습니다. 특히 피난 오신 분들이 먹을 것도 없이 힘들게 사는 것을 보고, 집집마다 심방을 가시면 예배를 드리고 축복 기도를 한 다음 아무도 몰래 방석 밑에 봉투를 넣어 놓고 나오셨습니다. 그 어려운 때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감동을 받고 “우리 목사님! 우리 목사님!” 했습니다. 그런데 사모님께서는 드실 것이 없어 굶기도 하셨답니다. 나중에 장로님들이 그 사실을 알고 사례비를 목사님께 드리지 않고 사모님께 직접 드렸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그렇게 선하게 빛을 발하며 사시니, 등불처럼 사시니 사람들이 그 빛 가운데 왔다가 참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는데,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요한복음 1장 9절에서 13절에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빛이 되는 삶을 살면 우리 때문에 결국 사람들이 참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라고 요한복음 8장 12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작은 등불이 되어 살면, 사람들이 어두운 세상에서 우리를 보고 따라왔다가 참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저도 이 세상을 비추는 빛의 사명, 등경 위의 등불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것을 압니다. 우리가 영화롭고 귀하게 살고, 선을 행하며 빛을 뿌리고 살면, 이 세상이 밝아지고 어둠의 쇠사슬과 마귀에 매인 사람들이 하나하나 빛으로 나아와서 구원을 받을 줄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는 우리의 등불을 깨려고 얼마나 애쓰는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큰 등불입니다. 기독교 역사 안에 뚜렷이 빛나는 큰 등불입니다. 그 바울 때문에 수많은 교회가 서고,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으니 악한 마귀가 이 바울의 등불을 끄려고 거짓 선생들을 고린도 교회에 보내어 허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편지는 강하고 힘이 있고 감동적이지만, 그를 직접 만나보면 그는 약하고 말도 시원치 않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이다. 바울은 영을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육체대로 행하는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바울의 등불을 끄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교회 목회자의 지도력이 흔들리고 목회자의 위상이 떨어지면 교회가 안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존경을 받으며 큰 빛을 발하는 등불로 우뚝 설 때 고린도 교회가 계속 되는 것이지, 바울이 멸시받고 조롱받고 손가락질 받는 자리로 내려가면 바울만 불행한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믿음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교회에서 존경을 받으면 교회가 되기 때문에 마귀는 어쨌든 목사님을 헐려고 별짓을 다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속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4절에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낮에 말씀드린 대로, 바울은 몸이 아주 왜소하고 머리카락도 없고 안짱다리에 눈에는 눈곱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강단에 서면 볼품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설교하다 넘어지기도 했는데, 간질병이 있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도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처럼, 예수님처럼 영접했기 때문에 갈라디아 교회가 귀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하는 시간에 성령의 불이 내렸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크게 존경하고 그 앞에 엎드리니 설교 시간에 성령의 불이 내린 줄로 믿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 무릎을 꿇은 것처럼 이 땅의 모든 성도님들이 목사님 앞에 무릎을 꿇는 마음이 있으면 안 될 교회가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은혜를 받지 못할 사람이 없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이 은혜를 받는 것은 겸손한 고넬료의 가슴으로 말씀을 받기 때문이고, 예배를 드려도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마음이 강단보다 더 높아졌기 때문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라가 되려면 대통령이 존경스러워야 되고, 공부가 되려면 선생님이 존경스러워야 되고, 병 치료를 받으려면 의사가 존경스러워야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목사님이 존경스러워야 교회가 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알기 때문에 본문 고린도후서 10장 15절에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바라노라』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겸손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만삭되어 나오지 못한 자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주의 종이 위대하게 보여야 교회가 되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편지를 쓰면서 ‘내가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원하노라.’라고 합니다.
저는 한국과 세계의 모든 목사님들 가운데 제가 가장 부족한 목사라고 생각하면서 날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이 지용수를 긍휼히 여기소서.”하고 기도합니다. 그런가 하면 동시에 제가 우리 양곡교회에서 천사처럼, 예수님처럼 대접받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저를 예수님처럼, 천사처럼 여겨야 여러분이 은혜를 받고 우리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자기 교회 목사님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교회, 목사님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교회 중에서 되는 교회가 있는가 보십시오. 교인들이 목사님을 존경하고, 목사님이 큰 등불처럼 서 있을 때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목사님이 섬기시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천사처럼, 예수님처럼 여겨지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10장 40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좀 잘 산다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닌다고, 좋은 집에서 산다고, 5만 명의 사원을 거느리는 회사의 회장이라고 가난한 목사를 얕잡아 볼까 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주의 종을 생각하는 것이 주님을 생각하는 것임을 기억하고 주의 종들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만일 우리 교회에서 ‘지용수 목사님’ 하지 않고 ‘지용수 목사’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은혜 받지 못합니다. 이 땅의 모든 목사님, 전도사님, 장로님이 다 귀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집사님 누구에게도 ‘집사’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집사님’이라고 합니다. 서로가 세워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마귀는 거짓 선지자들을 통해서 바울을 헙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외모가 번듯하고 헬라 철학과 웅변술을 연구해서 말을 그럴 듯하게 하니 고린도 교인들이 혼돈되어 ‘바울보다 저들이 하나님의 참 일꾼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밀려나고 가만히 들어온 선생들이 교회에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거짓 선생들은 바울이 힘들여 세운 교회를 자기들이 세운 것처럼 자랑하고 바울을 밀어냈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바울은 자신이 밀려나고 약해지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자신이 그렇게 되면 고린도 교회가 흔들려 무너지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단호하게 변명하는 것입니다.
“나의 편지는 강하고 힘이 있어도 나는 별 것 아니라고? 너희는 알라. 편지를 쓰는 그 사람이 만나서 말하는 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라.”
본문뿐 아니라 11장에는 바울의 말이 더 강하게 나갑니다. 고린도후서 11장 5절에 보면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1절에도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저들은 한계를 떠나서 내가 개척하여 세운 고린도 교회를 자기들이 세운 것처럼 남의 수고를 가지고 자기 자랑을 하지만, 나는 한계를 떠나서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자다. 저들은 자기들끼리 자기를 칭찬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바울이 더 뒤에 가서는, 거짓 사단들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아주 강하게 말하면서, 거짓 선생들은 광명한 천사의 탈을 쓴 사단의 앞잡이인 것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12장에 보면, 그들을 신랄하게 공격하면서 바울 자신이 왜 귀한 사도인가를 변명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를 읽은 사람들이 ‘아, 우리가 큰일 날 뻔했구나. 저 사기꾼들에게 넘어갈 뻔했구나.’라고 깨닫고 거짓 선생들을 밀어내어 신앙이 바로 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변명을 해야 될 때는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변명을 하지 않아서 자신만 어렵게 되는 경우에는 변명하지 않고 인내해도 되지만, 하나님의 교회가 손해를 보게 되는 경우에는 변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변명해야 할 것은 해야 함을 우리가 바울에게서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어느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기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한 미망인이 한참 예배를 드리고 있는 교회에 들어와서 말했습니다.
“성도님들이여, 저 단 위에서 거룩한 옷을 입고 저렇게 설교하니 저분이 거룩하게 보이지만, 실제 생활은 그렇지 않습니다. 날마다 저분이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갔습니다. 그래서 내가 잉태하여 이 아기를 낳았습니다. 이 아기가 바로 저 성직자의 아이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히는 일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시간에 어떤 사람이 아기를 데리고 와서 “여러분, 양곡교회 목사님이 저렇게 흰 가운을 입고 설교하고 있으니 거룩하게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와 비밀 관계가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마귀는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사탄아, 물러가라!”하고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희생정신이 커서 ‘저 여자가 저렇게 할 때는 무슨 사연이 있었겠지!’라고 생각하고 그 여자를 존중하여 아기를 받아서 안았습니다. 성직자의 옷을 벗고 말없이 그 아이를 길렀습니다. 이십 년이 지난 다음에 그 여자가 돌아와서 그 성직자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교회가 부흥되니 우상을 섬기는 마을 사람들이 큰돈을 갖고 와서 제가 낳은 아기를 성직자의 아기라고 거짓말하고 이사를 가면 그 돈을 다 제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돈에 눈이 어두워 거짓말을 했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교회에 가서도 그렇게 말하니 교인들이 가슴을 치고 후회하며 그분을 찾아가 다시 교회에 모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 성직자가 잘했습니까? 잘못했습니까? 그분이 마귀에게 말려든 것입니다. 성직자가 과부와 아기를 낳았다는 것이 이십 년간 사실로 되어 있었으니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습니까? 교회에 손해가 얼마나 컸습니까? 성도들의 믿음이 얼마나 상처를 받았겠습니까?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마귀에게 쓰임 받는 미망인을 존중하여 그 여자를 위해 이십 년간 묵묵히 산 것은 영적인 전투에서 여지없이 실패한 것입니다.
“나는 저 여자를 모른다. 그런 일은 없다. 이것은 마귀의 장난이다.”하고, 교회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변명을 해야 할 때는 분명히 변명을 해야 됩니다.
따라 합시다.
“말할 것은 해야 된다.”
한 병사가 전쟁터에서 장군의 막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에 장군의 워커를 보니 ‘장군님이 아침에 저 워커를 신으시면 얼마나 발이 시리시겠나?’라고 생각되어 그 장군을 사랑하는 당번 병사가 장군의 워커를 품에 안고 밤새도록 보초를 섰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장군이 워커를 신더니 벌컥 화를 냈습니다.
“야, 이 새끼야! 네가 내 워커를 깔고 앉아 있었구나. 이 나쁜 놈!”
“아닙니다. 제가 깔고 앉은 게 아니라 아침에 찬 워커를 신으시면 장군님의 발이 시리실까봐 밤새도록 제 품에 품고 있었습니다.”
“아, 그랬나?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그 후에 장군이 그 병사를 더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때 병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 얻어맞았을 것입니다. 해야 할 말은 해야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해야 할 말은 해야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변명은 궁색한 자기 변명이 아닙니다. 악한 마귀의 전략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 교회의 사자(使者), 하나님의 목회자가 땅에 떨어지면 교회도 같이 떨어지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단호하게 자기를 지켜서 변명하고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목회자인 저를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지만 여러분도 저를 지켜야 되고 저도 여러분을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악한 마귀가 틈도 타지 못하도록 서로 우리 교회를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잘 지켜나가서 우리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 교회가 든든히 서서 큰 빛을 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을 구원하고 하나님께 칭찬 받는, 이 세상을 비추는 등대 같은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자랑스러운 사람
고후10장 13~18절 / 이규왕목사
(고후 10:13)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세상에는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비판 문화가 용납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비판의 대상이 되어 보면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만일 비판이 남을 비난하는 도구로 전락될 때 그것이 악플이 되어 개인에게 깊은 상체를 주어 자살을 하게 만들고 하나가 되어야 할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부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더구나 우리 사회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이고 남을 좋에 말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고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사람들만 늘어 가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왜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될까요? ‘남을 칭찬하는 사람과 헐뜯는 사람’이라는 책을 펴낸 이탈리아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F. Alberoni 는 “나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지혜롭고 이성적이며 남을 걱정해 주고 있는 사람처럼 생각이 되지만, 그렇게 보기 때문에 우리는 실수를 하게 된다. 왜냐하면 나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좋지 않은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 심리적 사회적으로 특이한 인물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조차 그러한 문화에 살다보니 긍정적이기 보다는 냉소적이고, 칭찬하기보다 비난하는데 더 익숙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 우리가 매주일 살펴보고 있는 고린도 교회입니다. 우리는 오늘 고린도 교회를 통해서 오늘의 교회의 문제점과 잘못된 자아상을 찾아 영적인 수술을 받음으로 자랑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1. 남을 비난하는 사람들
열길 물속은 알 수 있지만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속담처럼 세상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시간과 물질과 정열을 쏟아서 이룩한 결과물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일이삼차의 선교 여행을 통해 여러 교회를 세웠다는 것과, 우상과 죄악에 빠져 지옥을 향해 가던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시켜 예수님을 믿게 한 위대한 사도라는 증거입니다.
고린도 교회도 세상에 어느 도시보다 우상과 온갖 악이 하수구처럼 흘러넘치는 죄악의 도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의 헌신적인 사역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교회는 몰라도 고린도교회 만큼은 바울을 위로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인들은 그러한 사도 바울을 존경하지는 못할망정 헐뜯고 비난하기를 일삼았습니다.
(고후 10:10)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여기서 ‘무게’라는 말은 이단자들이 고린도 교회와 바울을 이간하기 위해서 바울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바울 사도의 편지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을 비난하는 것으로 바울의 편지를 악평하는 것입니다.
또한 ‘약하고 시원하지 않다’ 는 말 역시 바울을 칭찬하는 말이 아니라 설교를 잘 못한다고 비난하고 멸시하는 말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다수의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 사도의 편에서 옹호하거나 위로해 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의 일부 사람들이 바울을 까닭 없이 비난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울의 영향력을 차단시켜 이단자들이 고린도 교회를 장악하려는 불순한 동기에 비롯된 것임을 고린도 교인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린도교인들처럼 남을 비판하는데 앞장을 서지 말야 하는 이유는, 비판이나 정죄는 하나님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2.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할 수 있으면 침묵으로 일관하고 눈물로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행위가 자신을 비판하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분열시키려는 사단의 음모임을 깨닫고 그들과 맞서 싸워 교회에서 그 사단의 세력을 몰아내야 하겠다고 굳게 다짐하였습니다.
(고후 10: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여기서 ‘싸운다’는 말은 이해관계에서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진흙탕에서 둘이 다 똑같이 더럽혀지는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영적싸움입니다.
또한 ‘견고한 진’이라는 말은 성채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곳에 적을 방어하기 위해 무너지지 않을 견고한 요새를 건축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한 때는 사단에게 접수된 견고한 진처럼 한동안 혼란과 무질서와 비판과 정죄하기에 급급했던 모습은 ‘과연 이런 곳이 교회 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사단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하나님의 교회, 주님의 몸된 교회, 성령의 전인 교회를 흔들어 보고 약점을 찾고, 확대 해석하여 여론화 하고, 패를 갈라 교회를 분열시키기 때문에 어제까지 한 교회 안에서 형제처럼 지내던 사람이 원수가 되어 피터지게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누가 이기고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교회를 부정적으로 보도록 만들어, 교회를 오지 못하게 하고, 교회를 떠나도록 만들어 교회가 복음의 전진 기지가 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의 시험에 들게 되면 그것이 교회를 위하는 일이고, 교회를 지키는 일이라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자기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일에 앞장을 서고, 사단의 시중을 들면서도 마치 자신이 교회를 개혁하는 사람, 정의로운 일꾼인 줄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보면 하나님의 교회를 보호하는 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공의로운 심판자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무리 사단의 진이 견고할지라도 결국 그것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교회를 지켜 나가십니다.
그와 같은 사단의 세력을 무너뜨릴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바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전신 무장할 것을 재촉한 전신무장입니다.
(엡 6: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엡 6: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엡 6: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엡 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그러므로 사단과의 싸움은 혈육의 싸움이 아니기 때문에 진리, 복음, 믿음, 구원, 말씀으로 전신 무장을 해야만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누가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인지, 누가 참 사도이고 거짓 사도인지를 구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 분별력이 없는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 바울의 외모와 말 주변과 허물을 극대화 시켜 매도하는 일을 하는 사단의 궤계에 빠져 나중에는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는 극단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고후 10: 7)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사람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장단점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자기를 자랑하기를 좋아하고 대신 다른 사람의 약점을 들추어 비판을 하고 정죄를 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사람만 해하는 것이 아니라 부메랑처럼 결국 자신을 해하는 도구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결국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문제가 생기는 가장 큰 피해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고후 10:12)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인내하고 대적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과거로 되돌아가는 부정적인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과거에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고 교인들을 잡아 죽이는 일이 사단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을 위해 충성스런 일꾼처럼 착각하며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3. 주님만을 자랑하는 사람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사람이나 교회가 제비를 뽑아 세운 것이 아니라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그를 사도로 세워주신 사도 중에 사도였습니다.
(행 26:16)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그것만이 아니라 바울의 혈통과 가문과 학벌과 사회적인 지위는 말할 것 없고 체험한 성령의 갖가지 신비한 은사들이 많았습니다.
(고후 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마치 역전의 용사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어느 누구보다 많은 고난을 체험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고후 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을 비판하는 이단자들과 달리 자신을 자랑하고 남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자랑스러울 정도로 큰일을 하고서도 묵묵히 침묵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무엇을 자랑하였을까요?
1)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자랑하였습니다.
(딤전 1: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에 부끄러운 부분은 감추고 그 대신 높은 학벌이나 화려한 업적을 이력서에 담아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외모를 중요시하는 인간들은 이력서가 사람을 평가하는 첫 번째 구비서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를 숨기지 않고 마치 자랑하듯이 사람들에게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2) 자신의 무능함을 자랑하였습니다.
(고후 11:18)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고후 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사도 바울은 많은 병자를 고친 능력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에게는 말 못할 육체의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주는 고통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육체의 가시 사단의 사자라고 표현할 정도였으나 숨기지 않았습니다.
외모를 보고 사람을 평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병도 고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병을 기도로 고칠 수 있는가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자를 고쳤다면 그것은 바울이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것이기 때문에 주님만을 높이 드러내는 기회가 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3)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였습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해 모욕이나 고난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이 십자가를 아는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를 체험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러므로 바울은 과거에 그처럼 혈기가 등등했던 사람이 변하여 이제는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온갖 고난을 당할지라도 묵묵히 참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십자가를 선포하기 위해서 ‘날마다’ 죽어야 했습니다. 십자가를 설교하고 노래하기는 쉬우나 십자가 앞에서 날마다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일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할까요? 십자가는 종점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으로 가는 길이며, 십자가의 고난 없이 부활의 영광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역사의 종말을 뜻하는 말세의 여러 현상 중에 하나는 갈수록 사람들이 자기를 자랑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원인은 ‘자기 사랑’이라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딤후 3: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사랑이 하나님을 향하고, 남을 향할 때만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주님을 자랑하는 사람을 주님은 칭찬을 아끼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고후 10:17)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18)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속담에서 본 한국인의 처세관(김도환)’ 이라는 학술 논문에 실린 대인 관계의 지침을 살펴보겠습니다.
1. 대인적 언사
1) 말을 현명하게 하도록 2) 말에 신중을 기하도록 3) 자기를 자랑하지 말도록 4) 남을 흉보지 말도록 5) 말을 많이 하지 말도록
2. 대인적 행동
1) 남을 적절하게 대우하도록 2) 관용을 배풀도록 3) 화합·협조하도록 4) 겸손하도록 5) 인정 베풀도록 6) 다투지 말도록 7) 남을 경시하지 말도록 8) 남을 괄시하지 말도록 9) 남에게 해를 주지 말도록 10) 비난이나 미움을 받을 짓을 하지 말도록 11) 악인을 사귀지 말도록 12) 어리석은 자와 상종하지 말도록 13) 원수를 맺거나 갚으려고 하지 말 것 14) 다른 사람의 언동이나 심사에 조심하도록 15) 교우나 이웃을 잘 선택하도록
우리 조상들이 예수를 믿지 않을 때도 이처럼 대인 관계에서 언행을 조심하였다면 하물며 오늘 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더 말 할 것이 없습니다.
불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이 비난을 받게 되는 대부분의 원인인 대인관계가 자기들보다 그리스도인들이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부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은 분수에 넘는 일로 내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의 구설수에 오르지 않도록 그리스도인답게 언행을 늘 조심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비판받지도 하지도 않는 삶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선한 삶을 살며, 선한 결과에 대해 주님을 자랑하고,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빌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그러한 사람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축복의 통로이며 그러한 사람에게 장차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을 약속하셨습니다.
(고전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설령 그렇게 살지라도 교만하지 말고, 그것이 내 힘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인 줄 알고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자랑스러운 사람입니다.
참된 자랑
고후 10장 17~18절 / 조학환목사
1. 세상 자랑은 헛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뭔가 좀 남보다 잘나고 능력있고 돈이나 지위가 권세를 가지고 있으면 왠지 어깨에 좀 힘이 들어가고 남에게 자랑하고 싶어 하죠. 뭐 그 정도야 인지상정이려니 하고 봐줄만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뭔가 남보다 잘나고 똑똑하고 좀 많이 가지고 있으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러분, 이런 모습은 정말 가소롭고 무지하고 어리석고 교만한 모습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설령 좀 잘나고 똑똑하고 능력 있고 돈 많고 권세가 있으면 얼마나 있겠으며, 그런 것들이 가면 얼마나 가겠으며, 설령 그런 것들을 마르고 닳도록 가지고 있다 해도 얼마나 우리 인생을 고귀하고 아름답고 가치 있게 하겠으며, 얼마나 참 생명의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가져다주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잘난 것 조금 가지고 있다고 으스대며 자랑하며 게다가 그까짓 별거 아닌 것도 조금 더 있다고 남을 무시하며 살아간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한 인생이냔 말씀입니다.
게다가 여러분 뭐 좀 있다고 자랑하려는 것은 설령 고의적으로 그러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결국 나는 이렇게 잘나고 뛰어나다. 너는 그런 거 없지? 못하지? 하면서 남을 은근히 무시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남을 기분 상하게 하고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악한 모습이기도 한 것이지요.
그 뿐 아닙니다. 자랑은 자기가 자랑하는 그것이 마치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된 것인 양 착각하고 하나님께 돌려져야 할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는 행위이기 때문에 악한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설령 좀 잘나고 똑똑하고 능력과 지혜가 있다한들 모두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재료를 가지고 우리에게 주신 힘과 지혜와 의지를 사용하여 힘썼을 뿐이 아닙니까? 게다가 지금도 여전히 공급해 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마치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된 것으로 여기며 자랑하며 높임을 받으려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한 일이며, 게다가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일이니 어찌 죄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10:15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 즉 도끼나 톱이 뭔가를 해놓고 마치 자기가 다 한 것처럼 여긴다면 도끼나 톱을 사용하는 사람을 제쳐 놓고 자기가 다 한 것처럼 여기는 어리석고 무지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자기가 한 일을 마치 자기 능력과 지혜로 다 한 것처럼 여긴다면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지혜와 여건과 조건을 주신 하나님을 제쳐놓고 자기가 영광을 받으려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렘9:23,24(상)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설령 지혜와 용맹과 재물과 권세를 가졌어도 네 것도 아니고 네가 한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준 것이요 하나님께서 한 것이고, 게다가 그런 것들은 잠시 잠깐이면 사라지는 것이요, 너를 지켜주는 것도 아니므로 그런 것을 자랑거리로 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따라 선과 진리와 의를 행하는 것을 자랑거리로 여기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에게 주신 것이 많든 적든, 능력과 지혜나 외모나 조건이나 환경이 좋든 그렇지 못하든 그저 우리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오직 믿음과 선과 진리와 의를 따라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자신도 주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는 복되고 귀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주안에서의 자랑이 참된 자랑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의 것을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고 죄된 일이지만 우리가 꼭 해야 할 자랑이 있는데 그건 하나님 자랑, 예수님 자랑,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자랑, 하나님을 따라 선과 진리와 의를 따르는 것에 대한 자랑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키 크고 인물 좋다고 자랑하고, 돈이나 권세가 좀 있다고 자랑하고, 공부 좀 잘한다고 자랑하고, 지식이 많고 인품이 좀 좋다고 자랑하고, 우리 조상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를 자랑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사돈의 팔촌이 국회의원이니 장관이니 검사니 하면서 자랑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상의 제아무리 대단하고 위대하고 지혜롭고 크나큰 권세를 가졌다해도 그것과는 비교 자체가 안되는 완전하고 영원하고 온전한 능력과 영광과 권세와 지식과 선과 의와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가지신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름으로 그 위대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야말로 세상의 어떤 권세나 부귀영화나 지식이나 은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원하고 온전하고 무한 생명의 은총과 부귀영화를 누릴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러니 이 놀랍고 영광스럽고 굉장한 사실을 어찌 자랑치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그까짓 세상의 별것 아닌 돈이나 명예나 권세가 좀 있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믿고 구원받아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되었다는 이 놀랍고 영광스럽고 굉장한 사실을 자랑하고 이것 때문에 감사하고 기뻐하고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리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뭐 좀 지식과 지혜가 있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알고 믿음 안에서 말씀과 선과 진리와 의를 따르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아 더욱 믿음과 선과 진리와 의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참되고 영원하고 온전한 자랑거리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자녀로서 그런 참된 자랑 거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주님이 주시는 참되고 영원하고 온전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존귀와 영광을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세상 자랑은 마치 자기가 다한 것처럼 여기며 자신이 높임받기 위한 우매한 자랑이지만 예수님 자랑은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오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선포하며 예수님을 높여드리는 자랑입니다.동시에 세상 자랑은 남을 낮추는 자랑이지만 예수님 자랑은 남을 귀히 여기고 아끼고 사랑하며 그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한 자랑인 것입니다. 또한 세상 자랑은 헛되이 금방 지나갈 자랑이지만 예수님 안에서 하는 자랑은 영원하고 완전한 생명의 은총과 영광을 가져다주는 자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자랑은 어리석고 무지하고 교만하고 악한 자랑이지만 예수님 자랑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과 남에게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가져다주는 귀하고 복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자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7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앞서 말씀드린대로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그래서 그 안에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강이 있으므로 세상 그 어떤 존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그 예수님을 자랑하고, 내가 그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덧입어 주님의 자녀가 되어 여기서도 정망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음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그까짓 별것 아닌 것들을 자랑거리로 삼지도 말고, 그런 것들 때문에 근심 걱정 불평불만 낙심하지도 말고, 그까짓 것들에게 얽매이고 끌려 다니지도 말고, 오직 완전하고 영원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님, 주님의 자녀로서 누리게 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자랑거리로 삼고, 오직 주님을 따라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달려가게 된 것을 자랑거리로 삼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며 주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 나라에 세워가는 복되고 귀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주를 자랑하려면 하나님께 인정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을 자랑하며 살아야 하는데 우리가 진정 주님을 자랑하며 살려면 사람이 아닌 주님의 칭찬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능력과 지혜와 사랑과 은혜와 구원과 생명과 진리와 길과 축복이 있음을 자랑한다면 마땅히 주님을 따라 살아야 하고, 그렇게 그 진리의 도를 따라 살아가면 하나님께 칭찬과 인정을 받게 되고, 그러면 물론 당연히 생명의 능력과 은혜와 기쁨 속에 살게 되고, 그러면 우리의 자랑이 진정한 자랑임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지게 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오늘 1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자기를 칭찬하거나 자랑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해 주시고 칭찬해 주시는 것만이 영원하고 온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사람들은 무엇을 칭찬합니까? 물론 나름대로 사랑과 선과 진리와 의를 인정하고 그렇게 사랑과 선과 진리와 의를 따라 사는 사람을 칭찬하기도 하긴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톡 까놓고 우리가 무엇을 우선시하고 무엇을 중요하게 여깁니까? 솔직히 돈과 외모와 능력을 우선시 하고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보세요. 키가 훤칠하고 예쁘고 잘나고 능력과 돈 많은 사람과 믿음과 성품은 좋은데 돈도 능력도 없고 외모도 볼품 없는 사람 중에 누가 사람들의 선택을 받을까요? 물론 외모 능력 돈은 없어도 믿음과 성품이 좋은 사람을 선택하는 경우도 혹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믿음과 마음이 좋아도 돈 지식 능력 외모가 볼품 없으면 거의 대부분은 사람들의 선택을 받지 못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람들은 말로는 마음이 제일이라고 하지만 결국은 외모 능력 지식 재력을 우선시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냔 말씀입니다.
바로 그렇게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나 외적인 것을 더 중요시하고 우선시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믿음이나 진리나 선이나 의보다는 죽어라고 세상을 지식과 능력과 권세를 좇아가며 거기에 인생을 걸고 인생의 모든 정열을 거기에 바치게 되고,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아예 거부하고 설령 하나님을 좀 안다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진짜 생명의 능력과 은혜와 기쁨 속에 살지 못할 때가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주님을 알고 믿음으로 주님의 자녀가 되어 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의 나라가 얼마나 굉장하고 대단하고 영광스러운 지을 알고, 믿음과 선과 진리와 의를 따름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되고 행복한 일인지를 안다면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하여 힘쓰기 전에 먼저 믿음과 선과 진리와 의를 따르는 삶에 힘쓰게 되고 그러면 참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사랑과 존귀함을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 칭찬받고 상급받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께 칭찬받고 인정받는 것만이 참되고 온전한 칭찬이요 인정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받으려고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인정받고 칭찬 받는 삶이되기 위하여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세상의 별것 아닌 것들을 자랑하지 말고, 유일하고 완전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그 생명의 주권자이신 예수님의 자녀로서 누리게 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자랑거리로 삼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정말 주님을 자랑거리로 여긴다면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하여 세상의 것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는 하기 전에 오직 하나님께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하여 믿음과 진리와 선과 의가운데 굳게 서서 주님과 동행하는 일에 힘씀으로 진정 생명의 능력과 은혜와 기쁨과 소망이 넘쳐나는 가운데 남에게도 생명의 기쁨을 가져다주며 주님 영광 나타내어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귀하고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