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구미 보통학교를 다닐 무렵 생가에서 남쪽으로 약 2백m 떨어진 곳에 '상모교회'가 있었다. 1901년 3월13일에 선교사 언더우드 의 제자가 세운 이 교회는 선산군에서 두번째로 선 기독교 교회였다.
박정희가 다녔던 상모교회의 건물은 해방 이후 다시 지어졌으나 6·25 때 상당부분이 파손된 채 1960년대를 맞았다. 1966년 가을에 생가와 선 산을 둘러보던 박정희 대통령은 주일학교 시절의 친구 한성도(82세)장 로를 만나 교회재건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게 된다. 소년기의 박정희 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몇 가지 생각거리를 제공해주었을 것이다. 기도 의 힘, 천당과 지옥, 영생불멸, 죄의식, 신 앞에서의 인간평등. 동시에 교회는 이 시골 소년으로 하여금 서구문명의 중요한 부분을 들여다보게 하는 최초의 좁디좁은 창역할을 했을 것이다.
당시는 개척교회를 세우려던 사람들과 토착 양반들과의 대립이 심 했다. 전통을 상징하는 유교와 근대를 상징하는 기독교 사이에 문명의 충돌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박정희 소년이 6년동안 이 교회를 다녔다는 사실은 이번 취재에서 처음 밝혀진 사실이다. 정기현(67) 장 로는 박정희가 교회를 다녔다는 사실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8촌 조부되는 정인백씨가 이 교회를 세우셨는데 뒷날 박정희 대 통령이 소년시절에 교회에 자주 나왔다고 하셨지요. 박대통령과 한 살 아래였던 삼촌 정규선(1991년 사망)씨도 상모교회 옆에 사셨는데 대통 령이 우리 교회에 다녔다고 가끔 말했습니다.".
박정희와 동갑내기인 한성도(82)장로는 현재 생존해 있는, 박정희 의 유일한 교회친구다. 그는 박정희가 꾸준히 교회를 다녔다고 말했다.
"박정희와 저는 처음에 유년 주일학교에 나왔습니다. 구미 보통학 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교회에도 나가게 되었습니다. 일요일 오전9시 부터 10시까지 하는 주일학교에 열심이었습니다. 소년들이 막 코흘리 개의 때를 벗을 무렵 성경책과 찬송가를 들고 한복차림으로 교회에 모 여들던 시절입니다. 우리가 제일 먼저 배운 것이 기도하는 법이었지요".
고사리 손을 모으고 당시로서는 기상천외할 수도 있는, 서구 문 명의 정점에 선 신에 대해 박정희소년은 외경심을 갖고 기도했을 것이 다. 주일학교에서 특별히 한글을 가르치거나 학교 과정을 가르친 적은 없다고 한다.
"주로 성경을 읽고 찬송하는 것이었지요. 학교 교육처럼 가르치고 하는 것은 해방 이후에 많았고, 당시는 주일학교 교사마다 달랐지만 거의 그런 교육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에도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다고 한 다. "예수님 생일날이면 교회에서는 새벽기도도 하고 집집마다 돌아다 니며 찬송도 불렀지요. 물론 박정희도 저와 함께 성가대를 따라다녔던 게 기억납니다. 워낙 말이 없고 싱긋 웃기만 했지요. 크리스마스 때는 선물로 과자나 빵을 주었어요.".
박정희가 다닌 주일학교에는 어린이가 약 20여명이었다고 한다. 나 이가 보통학교 1∼2학년쯤 되는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박정희의 가족들 중 교회에 나온 것은 그가 유일했지요. 꼬박꼬 박 잘 다니던 박정희는 대구 사범에 진학하면서부터 나오지 않았어요." 당시 교회건물은 기와집 네 칸을 연결해 만든 예배당이었다. 길 옆으로 작은 초가 한 채를 지어 목회자들의 사무실로 썼고 마당 한 쪽 에는 종탑이 세워져 있었다. 박정희는 교회 종소리를 듣고 자랐던것이 다.새벽마다 뎅그랑 뎅그랑 울리는 종소리는 시계가 없던 마을에 좋은 시간 표준이 되었을 것 같은데 박정희의 이야기에는 경부선 기차 소리 만 등장한다.
그 무렵 상모리에서는 박정희 생가 부근의 선산 김씨 집성촌락쪽 으로 양반들이 모여 살고 상모교회가 들어선 곳으로는 머리도 짧게 깎 은 비교적 개화된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경제적으로는 양반촌 이 월등히 나았다.
이들은 교회가 '우상숭배'라며 제사를 금기시하는 데 불만이 많아 자녀들이 교회에 다니는 것을 극구 반대하곤 했다. 그럼에도 박정희만 은 어른들의 반대에 봉착하지 않고 자유롭게 교회를 드나들 수 있었 다. 어머니 백남의의 배려나 권유에서 가능했던 것이라 보여진다.
1962년6월초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최고위원들과 함께 김포로 가서 모심기를 했다. 논두렁에 앉아 쉬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말했다.
"의장님이 오시는 데 맡추었는지 마침 비가 내렸습니다.".
이때 옆에 있던 한 기자가 그 말을 받았다.
"의장께서도 이번 기회에 종교를 하나 선택하시지요.".
박의장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는 원래가 유신론자입니다. 하늘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비를 내려주시고 게으르게 앉아서 놀기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비를 안주 시는 것입니다.".
김선도 목사는 소령 시절에 육군사관학교의 군종실장이었다. 1971년 육사졸업식장에서 김목사는 축도를 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 우리 사관생도들이 이제 할퀴고 찢긴 이 조국을 지키려 나갑니다. 이들을 보호해주시고 국군통수권자이신 대 통령이 외롭지 않도록 살펴주십시오. 솔로몬의 지혜와 다윗의 용기를 대통령께 부어주십시오.".
축도를 끝내고 김 목사가 대통령에게 인사를 드리려고 했더니 그는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졸업식이 다 끝난 뒤 에 인사를 했다. 대통령은 김 목사의 손을 잡더니 "좋은 기도를 해주어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김선도 목사는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기에 주 일학교에 다닌것이 그분의 인생관과 신관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 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박정희의 하느님은 공짜가 없는 하느님이고 사랑만의 하느님도 아니 다. 1976년 1월24일 국방부를 연두순시한 자리에서 그는 보고를 들은 뒤에 미리 준비된 원고를 읽는 식이 아니라 자신의 소감을 솔직하고 담 담하게 밝히는 강평을 했다. 부산의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찾아 낸 녹음 테이프에서 한 대목을 인용해본다.
'언젠가 그들(편집자 주· 북한공산당)이 무력으로 접어들 때는 결 판을 내야 합니다. 기독교의 성경책이나 불경책에서는 살생을 싫어하지 만 어떤 불법적이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침범할 때는 그것을 쳐부수는 것을 정의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누가 내 볼을 때리면 이쪽까지 내주고는 때려라고 하면서 적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지만 선량 한 양떼를 잡아 먹으러 들어가는 이리떼는 이것을 뚜드려 잡아 죽이는 것이 기독교 정신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랑과 정의라는 기독교의 두 사상적 기둥 중 어느 한 편만 강 조하지 않고 균형을 취하고 있다. 대통령 시절 그는 사랑이란 보편적 가치와 더불어 정의라는 특수한 가치를 조화시킨, 신라의 호국불교와 닮은 호국기독교를 선호하였다. 박대통령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졌 다고 본 한경직, 김준곤, 김장환목사를 가까이 했다.
신라의 원광법사는 불교의 자비정신에 위배해가면서까지, 화랑도의 신조인 세속오계를 만들면서 '산 것을 죽임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 (살생유택)는 항목을 끼워넣었다. 원광은 '나는 중이기 이전에 신라 사 람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970년대에 일부 기독교회가 반정부 투쟁에 앞장서자 박정희는 서구적인 가치관으로 추종하는 풍조를 개탄 하면서 '국적 있는 종교'로서의 신라 불교 정신을 여러 번 강조했다.이 때문에 박정희를 불교신도로 생각한 사람도 많았다. 1974년12월11일 박 정희는 청와대 참모들 앞에서 천주교계에 대해서 불평을 털어놓은 뒤에 이런 농담을 했다.
"교회에서 정치에 간섭하면 우리도 교회에 간섭할까?".
이 무렵 작성된 박정희 대통령의 공무원인사기록카드에는 종교란에 아무것도 기재되어 있지 않다. '무'라고 적지 않은 것은 특정 종교의 신을 믿지는 않지만 그가 나름대로 개념정리해둔 절대자의 존재는 부인 하지 않으려는 심리를 엿보게 한다. 여러 문화요소의 주체적인 종합을 강조해온 박정희는 이념이나 신까지도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고 통합 하여 자기 나름의 것을 만들었던 모양이다.
박정희는 1975년 3월10일자 일기를 이렇게 끝맺고 있다.
'오 신이여! 북녘 땅에 도사리고 있는 저 무지막지한 공산당들에게 제 정신으로 돌아가도록 일깨워 주시고 깨닫게 해 주소서.'.
여기서도 문장은 기독교식 기도문인데 '하나님'이라 하지 않고 '신' 이라적고 있다. 기독교의 '하나님', 샤머니즘의 '하느님'도 아닌 자신의 주관에 따라 객관화시킨 절대자를 의미하려고 하는 의지를 엿볼 수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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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큰 산 원문보기 글쓴이: 큰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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