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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식 / 사랑과 배려로 나눔을 꽃피우는 아동문학 『문화탐구.권두특집』... 한강문학 2023년 여름. 제32호... 2023.6.12. 발행
■ 안재식 『문화탐구, 권두특집 』
- 사랑과 배려로 나눔을 꽃피우는 아동문학
。 한강문학 2023년 여름. 제32호
。 2023년 6월 12일 발행
。 정가 15,000원
《문화탐구. 권두특집》 제41회 한국아동문학회 세미나 발제 강연 논문..인천시청소년수련관
사랑과 배려로 나눔을 꽃피우는 아동문학
안재식(1942~)
1. 머리말
필자는 세미나 발표 요청을 받고 얼떨결에 수락하고는 고민을 많이 했다. 왜냐하면 사랑과 배려, 나눔이라는 주제가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고 골이 깊은 산맥으로 이루어진 교훈적 관념의 연합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앞만 보고 달려온 필자의 입장에서 주제를 소화할 만한 그릇도 못되거니와, 그런 일에 넉넉한 품으로 살아오지 못했기에 낯이 간지러웠다. 그동안 표면적으로 그리하는 척만 했을 뿐, 진정 가슴으로 사랑하고, 진정 가슴으로 배려하고, 진정 가슴으로 나눔을 실천한 기억이 별로 나지 않는다.
그리고 짧은 지면에 다분히 추상적이고 광범위한 주제를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문제 제기에 끝나고 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계속 흔들어댔다. 그러나 수락을 한 마당이고, 본회 회원으로서 의무도 있기에 나름대로 주어진 주제에 틀을 맞춰 고해성사를 하는 기분으로 이 글을 쓰기로 했다.
필자는 ‘마더 데레사’ 수녀를 존경한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그분이 남긴 어록 중에서 “병든 몸보다 남의 고통을 외면하는 병든 마음이 더 큰 병”이라는 말씀에 크게 감명받았고, 출판사를 운영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81년은 UN이 정한 「세계 심신장애자의 해」였다. 필자는 장애인 관련 복지사업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김동극(자혜학교장, 한국특수교육협회장) 아동문학가, 장애인의 어머니로 존경받던 이방자(영친왕의 부인) 여사, 황년대 정립회관장(한국소아마비협회장) 등 사회복지분야 활동가들의 제의로 〈전국학생 재활문고 읽기운동〉을 맡아서 하게 되었다.
그 시절에는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심했다. 그렇기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전국의 초・중・고 학생들이 읽고, 그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들의 자립 재활을 돕자는 취지가 참 좋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전국의 학생들이 심신장애자 재활에 관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야 하는데, 정작 서점에는 학생들에게 읽힐 만한 책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할 수 없이 출판에는 문외한이지만 필자가 직접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부랴사랴 작가들에게 원고를 청탁하고, 편집부를 꾸리고, 《재활문고》를 시리즈로 발간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전국단위의 독후감 공모사업은 필자의 평생 직업으로 발전하였고, 1990년대부터 2000년대 말까지는 환경보전에 관한 책인 《녹색문고》를 잇달아 펴내게 되었다.
3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전국의 학생들에게 독후감을 공모하고, 후원부처인 교육부(문교부)・환경부・보건복지부・과학기술부・문화관광부 등 각부 장관들의 상장을 시상하는 등 독서운동에 매진하였다.
필자 명의의 상장을 받은 학생, 지도교사, 각급학교장이 30,000여 명에 이르고, 상당수의 입상 학생에게는 문학특기자전형으로 우수 대학에 입학하는 영예를 안겨주기도 하였다.
그동안 필자는 300여 종의 독서운동용 책을 출간했다. 참여한 집필 작가가 100여 명이 넘는다. 주로 동화작가들인데, 참으로 영혼이 맑고 동심이 충만한 분들이었다. 필자는 문청 시절부터 시나 소설 등 성인 문학에 매달렸지만, 이분들의 순수純粹를 접하고는 동화집을 여러 권 쓰고, 동시를 발표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 종영된 MBC드라마에서, “청류淸流가 탁류濁流를 이긴 역사가 없다.”라는 주인공의 말을 듣고, 필자는 공분을 느꼈다. 청류가 탁류를 이겨야 한다는 건 시대의 바람이고, 그것이 정의인데도 왜 탁류가 아직도 세상의 주류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혹자는 필자가 영리사업의 일환으로 사회분위기에 맞는 테마를 선택하여 독서운동을 한 것으로 여기는 분들도 있고, 어떤 분은 독서운동을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출판에 뛰어든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훗날 올바른 평가가 내려질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요즈음 정부가 펼치고 있는 ‘저탄소 녹색성장’이란 슬로건이 전국 방방곡곡에 넘치는 것을 보면 감개가 무량하다. 필자가 1990년대부터 일관되게 주장하고 전개한 ‘환경보전 생명사랑 인간존중’을 바탕으로 한 녹색운동, 즉 〈녹색문고 읽기운동〉이 이제야 빛을 보는 것 같아 흐뭇하기 때문이다.
2. 동심이 세상을 구원한다
필자는 2000년대 초부터 미력하나마 올곧은 문인 양성을 위해 중랑문화원 중랑문학대학 및 소정문학창작실을 개설하고 지도교수로 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강의에서 중점을 두는 것은, 기교를 부려 글쓰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문인으로서 갖춰야 할 품성을 제일 덕목으로 삼고 있다. 특히 동양철학의 근간인 사단(四端: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과 인의예지(仁義禮智: 인간을 완성하는 4가지 덕목)의 실천에 두고 있다. 무엇보다 나를 사랑하되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남을 사랑할 줄 아는 그런 문인으로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사랑과 배려, 나눔이란 주제는 누구나 다 알고 있고, 주문처럼 외울 정도다. 그러나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문학이란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역시 명쾌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랑이란 것을 사전적인 의미로 풀어보면, 한없이 베푸는 어머니의 사랑 같은 것, 남녀 간에 정을 들여 애틋하게 그리는 일, 너그럽게 나누는 사랑의 손길, 달과 별을 사랑하는 마음, 가장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내줄 수 있는 상대, 진실한 우정, 전우애, 나라 사랑, 신에 대한 무한한 믿음 등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다.
그리고 배려配慮란 양보가 바탕이 되어 여러모로 자상하게 마음을 써서 염려해 주는 것이고, 나눔이란 물질이든 마음이든 재능이든 지식이든 가진 것을 나누는 행위를 말한다.
일찍이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작품 《백치》에서 주인공의 말을 빌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라고 외쳤다. 제정 러시아 시대에 사형수였던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5분 동안, 그는 인간의 한계와 비애를 처절하게 느꼈다. 생의 한가운데서 빚에 쪼들려 글을 써야 했던 그로서는 술과 도박에 의존하지 않고는 삶을 지탱할 수 없었다. 비록 비참한 삶을 산 그였지만 ‘아름다움’을 평생 동경했기에 구원의 메시지로 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아름다운 사랑, 아름다운 배려, 아름다운 나눔, 참으로 곱고 예쁘고 마음씨 또한 착한 말로 궁합이 잘 맞고 잘 어울린다. 익히 알다시피 문학의 본질은 진선미眞善美를 추구한다.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움을 이상으로 삼는 것이 문학이란 말이다.
정채봉 동화작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에 기꺼이 동의하면서도 “동심이 세상을 구원한다.”라고 바꾸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가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하느님이라고 외치기보다는 동심이라고 절규한 그 깊은 뜻은 무엇일까.
그리고 김완기(전, 한국아동문학회장) 시인은 〈아동문학의 날〉 표어로 “동심으로 살면 세상이 아름다워집니다.”라고 지었다.
모두가 맞는 말이다. 주옥같은 글들이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한 워즈워드(영국의 낭만주의 시인)가 지하에서도 반길 일이다. 한편으론 오죽 어른들이 동심을 잃고 추하게 살았으면 그런 말을 하였겠는가, 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동심이란 무엇일까?
동심은 사람으로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되는 첫마음이다. 여닫을 문이 없는 모든 이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진선미,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이다. 동심에는 거짓되고 악하고 추한 것에 물들지 않은 순수가 있다. 자연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마음에 꾸밈이 없는 순진 그 자체다. 세상 만물을 내 몸처럼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곳에는 미움도 탐욕도 없다. 따라서 “동심으로 살면 세상이 아름다워진다.”라는 말은 당연히 옳은 말이고, 진리인 것이다.
이를테면 어른들이 동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진선미를 가질 수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다. 동심을 잃어버리면 문학의 본질인 진선미를 추구할 자격이 없고, 따라서 ‘나뿐만 아는 이기적인 마음’으로는 세상을 구원하는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벤허라는 영화에서 여주인공 에스터가 “개는 개를 낳듯 피는 피를 부르고, 악은 악을 낳는다.”라고 부르짖듯 미움은 증오를 낳고, 욕심은 이기심을 낳는다.
성경(마태오복음 7:6)에도 “거룩한 것은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라는 구절이 나온다. 개는 교만의 상징이고, 돼지는 이기심의 상징이다. 교만과 이기심을 살찌우지 말라는 교훈일 테다.
그러나 삶의 때가 많이 낀 어른의 입장에서 동심을 회복한다는 것은 지난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저 노력을 거듭하면서 동심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뿐이다.
하지만 사랑과 배려, 나눔은 마음만 다잡으면 가능한 일이다. 사랑은 배려를 낳고, 배려는 나눔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아동문학이란 무엇인가?
어른이 어린이를 위해 쓴 작품이라고 한다. 아동문학의 본바탕은 어린이에 대한 사랑에 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어린이의 순진무구함에 빠져버리는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린이들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고, 그들이 올바르게 자라도록 도와주려는 정신을 뜻한다.
그리고 어린이는 인형이 아니라는 인식을 필요로 한다. 그들 역시 하나의 인간으로서 때마다 희로애락을 겪으며 살아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아동문학의 대상인 어린이들은, 그 자체가 동심의 덩어리다. 어른들은 어린이들이 갖고 있는 동심이 탁류에 휩쓸려 훼손되는 것을 막아줘야 하고, 동심의 덩어리를 더욱 확장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이 세상에는 사랑과 배려와 나눔이 절실한 일도 많고, 그 대상도 많다. 결손가정(한부모, 조손, 입양, 고아원)의 아이들, 소외된 다문화가정의 아이들, 북한의 아이들, 멀리 조선족 우리 겨레의 아이들, 장애를 지닌 아이들, 그리고 불행을 당한 이웃, 독거노인들에 이르기까지 계층과 대상이 다양하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했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른들을 닮아가는 것이 어린이다. 그렇기에 어른들의 말 한 마디,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어린이들에게는 거울이 되고, 나침반이 되고, 밑바탕이 된다.
이에 필자는 사랑과 배려로 나눔을 어떻게 꽃피울 수 있는가, 나눔정신의 필요성과 나눔정신이 왜, 아동문학의 근본 바탕이 되는가에 대하여 다소 관념적이기는 하나 인간 존재의 한계성과 관련지어 밝혀보려고 한다.
3. 인간 존재의 한계성과 나눔정신
한민족의 역사서인 북애北崖 저서 《규원사화》(揆園史話: 저자 이름은 밝히지 않고, 서문에 숙종 2년 을묘 3월 상순 북애노인이라고만 표기돼 있음)는 오랫동안 금서禁書로 묶여 있던 사서史書로 목숨을 걸지 않고는 쓸 수 없었던 책이다. 이 책의 ‘서문序文’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무릇 힘으로써 사람을 복종시키고자 하는 자는 그 힘이 다하면 배반당하게 되고, 재물로써 사람을 부리고자 하는 자는 그 재물이 없어지면 사람들이 떠나게 마련이다. 힘과 재물을 내가 갖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바라거나 구하지도 않았으니 황량한 북악 비탈에 무슨 힘과 재물이 있을 것인가.
또한 명예는 사실 손님과 같은 것이어서 내가 장차 명예를 그리다가 그렇게 되면 무엇하랴. 명예 또한 바라지 않는다.
옛날에 물계자(勿稽子: 신라 내해왕 때의 지사)가 말하기를 “하늘은 사람의 마음을 알고, 땅은 사람의 행실을 알며, 해와 달은 사람의 뜻을 비추고, 귀신은 사람이 하는 것을 본다.”라고 하였으니, 무릇 사람의 선악과 바르고 바르지 않은 것은 반드시 천지신명天地神明이 밝히 살펴 알 것이다. 죽으면 백골이 되는 인생인데 어찌 작은 명리에 급급하여 다투랴. 오직 본성本性을 간직하고 뜻을 기르며, 도를 닦고 공을 세워 후손들이 본받게 하고자 할 뿐이다.
그러나 비록 세상을 마치는 날까지 이를 알아주는 자 없다 해도 한탄하지 않을 것이니, 이는 만세 후라도 이것을 알아주는 사람을 한 번이라도 만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번쩍하는 동안 가버린 지난 천 년 동안의 일을 보면서 어찌 총애와 모욕을 가지고 바쁜 세월 속에서 다투랴.
북애노인이 숙종 을묘년에 지었다고 하니 서기로 1675년이다. 지금으로부터 348년 전이다. 이렇듯 옛조상들은 후세들에게 귀감이 될 말씀들을 많이 남겼으나, 이를 지키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까울 뿐 아니던가.
한국천문연구원 박석재 원장의 말에 의하면, 하늘에서 빛나는 별의 숫자가 약 2천억 개라고 한다. 세상에서 제일 큰 망원경으로 약 1백억 광년의 거리를 천문학자들이 관측한 결과라고 한다.
그런데 우주를 지구만한 크기로 축소한 다음, 지구의 크기를 측정한다면 어느 정도가 될까? 결과는 원자보다도 작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원자보다 작은 지구에 살면서 지구만한 우주를 관측하고 있는 게 사람들이고 보면 신기한 일이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다. 원자라는 것은 화학반응을 통해 더이상 쪼갤 수 없는 단위로써 현미경으로도 보이지 않는다니 말이다.
그 작은 지구에 붙어살고 있는 사람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멍하니 추측에 잠겼다가, 하루살이에 대한 일화가 생각나서 이를 인용한다.
어느 날, 베짱이와 하루살이는 친구가 되었다. 베짱이는 자신의 노래를 뽐내고, 하루살이는 비행 솜씨를 뽐내며 한나절을 즐겁게 놀았다.
저녁나절 베짱이가 “오늘 재미있게 잘 놀았다. 내일 다시 나와 놀자.”라고 했다. 하루살이가 그 뜻을 몰라 “내일이 뭔데?” 라고 되물었다. 하루밖에 살지 못하는 하루살이는 ‘내일’을 몰랐던 것이다.
며칠 후, 베짱이는 다람쥐와 친구가 되었다. 하루살이와는 하루밖에 놀지 못했지만, 다람쥐하고는 매일 놀게 되어서 좋았다.
겨울이 되었다. 다람쥐가 베짱이에게 “난 이제 겨울잠을 자러 가야 해. 내년에 다시 만나 재미있게 놀자.”라고 하였다. 베짱이가 그 뜻을 몰라 “내년이 뭔데?”라고 되물었다. 겨울을 나지 못하는 베짱이는 ‘내년’을 몰랐던 것이다.
베짱이에게 하루살이는 하루밖에 살지 못하는 불쌍한 존재지만, 베짱이 역시 다람쥐에게는 몇 달밖에 살지 못하는 불쌍한 존재였다. 만약 수백 년 산다는 거북 같은 동물의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 인간은 채 백 년도 살지 못하는 불쌍한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루살이 앞에서는 우쭐대며 사는 게 우리 인간이다. 우리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모르는 사람을 하루살이 인생이라고도 말한다.
하루살이는 알이 성충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알이 애벌레가 되고, 번데기가 되면서 약 1,000일 동안 물속에서 성충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한다. 그동안 허물벗기도 대개 25번이나 한다. 하루를 살기 위해 하루살이는 수많은 변신의 노력을 하면서 견디어 내다가 드디어 화려하게 날기 시작한다.
하루살이는 입과 소화기관이 거의 퇴화되어 있다. 하루를 살기 때문에 먹을 필요도 없지만 1,000일을 준비해서 하루를 마련한 입장이니만큼 시간을 줄여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는 짝짓기를 하고, 하루살이의 일생은 끝이 난다.
우리 인간은 1,000일 뒤의 하루를 염두에 두고, 얼마나 준비하며 열심히 살고 있을까. 단 하루의 멋진 비행과 짝짓기를 위해서 3년을 인내하고 준비한 하루살이는, 우리들에게 온갖 탐욕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친다.
하루살이는 결코 하루살이 인생을 살지 않는다. 하루살이에게 있어서 하루는 평생의 삶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북애노인의 ‘명예는 손님 같은 것’이라는 말씀에 이의가 없다. 하긴 손님 같은 게 어찌 명예뿐이랴.
“고통은 나눌수록 작아지고 사랑은 나눌수록 커진다.”라는 말이 있다. 그 말에 누구든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서도 어떤 이는 재물을 많이 모은 뒤에 나누겠다고 한다. 그건 욕심에 불과하다. 어떤 이는 가진 게 없어서 나누지 못한다고 한다. 그건 핑계일 뿐이다.
왜냐하면 ‘나눔의 본질은 물질 이전에 마음’이기 때문이다. 나눔을 단지 물질을 교부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옹색한 마음으로는 백만장자라고 해도 어느 것 하나 나눌 수 없다. 진실로 나눌 마음이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든 실천할 수 있는 것이 나눔이다. 마음의 문을 연다면 나누지 못할 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다행히 요즈음 나눔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세상은 좀 더 공평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하지만 나눔이 형식에 그치고, 행사에 그치고, 과시에 그친다면 나눔의 본질을 왜곡, 변질시키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인가.
사랑은 배려와 나눔의 형태로 나타난다. 배려는 양보하는 마음이고, 나눔이 없는 사랑이란 입으로만 외치는 한낱 구호일 뿐이다. 잠시 잠깐 왔다 가는 세상에 욕심을 안고 간들 무엇에 쓸 것인가. 사랑하기에도 바쁜 삶인데, 탐욕에 시달리고 산다면 인간의 삶이란 게 너무 허망하지 않은가.
동심에는 마음의 문이 없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순리를 따라 서로 돕고 나누는 마음을 원초적으로 갖고 있다. 그렇기에 나눔정신의 본바탕은 동심에 있고, 아동문학의 근본은 나눔정신으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이다.
4. 사랑과 배려, 나눔정신이 깃든 작품 살펴보기
한국아동문학회가 발행한 《아동문학예술》에 게재된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사랑이나 배려, 나눔을 주제로 삼은 우수한 작품이 많이 발표되었으나, 지면 관계로 몇몇 작품만을 예문으로 삼게 되었음을 아쉽게 여긴다.
(1) 우리나라 설화와 전래동화에 대하여
대부분의 설화나 전래동화는 이미 권선징악을 바탕으로 씌어졌기 때문에 일일이 나열하지 않고,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논하기로 한다.
(2) 최근 발표한 동시 작품 중에서
예문①
허리에 탈이 도져 찜질하며 누우신/ 아빠의 빈 지게를 가만히 져 봅니다/
땀 절고 닳아진 멜빵 어깨를 누릅니다//
가풀막 골목 끝집 혼자 사는 할머니/ 연탄 떨어졌겠다는 아빠의 걱정으로/
엄마는 한 대야 이고 추운 길 나섭니다
-모상철, 〈연탄 집〉 전문(아동문학예술 제3호)
이웃사랑이 짙은 시조다. 아빠의 땀 절은 빈 지게를 가만히 져 보면서 아빠를 염려하는 마음, 허리에 탈이 도져 앓아누운 아빠는 가파르고 비탈진 곳에 혼자 사는 할머니의 추위를 걱정하고, 아빠 대신 엄마가 연탄을 한 대야 담아 이고 추운 길을 나서는 모습이 눈에 선하고, 아름답다.
예문②
어느 날 인적 드문 공원을 거닐고 있었다. 화장실 부근을 지나는데 누군가가 소리쳐 부른다. “이봐요! 이봐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나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어떻게 할까? 생각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다시금 부르는 애절한 목소리. 쭈뼛쭈뼛 다가갔다. 등 굽은 할아버지가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며 문 좀 열어달라신다. 세상에 이럴 수가? 유리창엔 큼지막한 글씨로 ‘당기세요’라고 적혀 있었건만…. 글귀를 읽지 못한 할아버지는 계속 밀고만 있었다니….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양봉선, 〈까막눈〉 전문(아동문학예술 창간호)
글을 읽지 못해 오랫동안 화장실에 갇혀 있던 할아버지, 얼마나 답답하고, 억울한 일을 많이 겪고 살았을까.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는 시인의 마음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랴.
예문③
그 별은 오늘도/ 그 자리에 나와 있다//
하늘 문밖,/ 바람 부는 날에도/ 그 자리에 앉아 있다//
누굴 기다리는 것일까?//
외로운 아이 같다/ 그 별을 데려오고 싶다.
‒이상현, 〈그 별을 데려오고 싶다〉 전문(아동문학예술 제3호)
하늘에 빛나는 별, 하늘 문에 달린 초인종 같은 별을 보면 필자는 짓궂게 슬쩍 눌러보고 싶다. 그러나 시인은, 바람이 불어도 그 자리에 앉아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별이 안타깝고, 외로움을 나누고 싶어 그 별을 데려오고 싶어 한다. 배려하는 마음이 푸근하다. 어찌 보면 공해로 찌든 도시의 하늘이 싫다고 이사를 가버린 그 별을 그리워하는 건 아닐까. 아니면 그리움의 대상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외로운 아이를 감싸 안고 싶은 시인의 마음인가. 찡한 감동을 준다.
예문④
제 주위를/ 절벽으로 높이 쌓아 놓고/ 항상 돌아앉아 웅크리고 있는 섬//
파도가/ 하얀 갈기 세우고 달려와도/ 소나무 위의 달빛이/ 머리칼 흩날리며 내려앉아도/ 꼼짝하지 않는 섬//
한 달 전 전학 온/ 그 섬 같은/ 옆자리 내 짝꿍//
오늘은/ 어떤 배 타고 그 섬에 들어갈까?/ 어떤 새가 되어 그 마음 둥지에 하얀 알을 낳을까?
‒전영관, 〈내 짝궁〉 전문(아동문학예술 제3호)
주위에는 결손가정의 아이들, 소외된 다문화가정의 아이들, 장애를 지닌 아이들, 갑자기 불행이 닥친 아이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 아이들일수록 옹이가 박혀 닫힌 섬이 되고 만다. 시인은 닫혀 있는 짝꿍의 마음을 열기 위해 상륙을 준비한다. 오늘은 어떤 배를 타고 그 섬에 들어갈까, 어떤 새가 되어 그 마음 둥지에 하얀 알을 낳을까, 궁리를 한다.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간다면 나누지 못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진실로 나눌 마음이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든 실천할 수 있는 것이 나눔이다.
(3) 최근 발표한 동화 작품 중에서
김희경의 〈아름다운 용서〉(아동문학예술 창간호)는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 엄마가 새아빠를 맞아 새가정을 꾸리면서 이복형제들과 갈등이 생긴다. 가족간 심리 묘사가 현실감 있게 표현되고, 상대방을 먼저 이해하고 용서를 구하는 사랑하는 마음, 배려하는 행위가 화목을 불러온다는 교훈적인 이야기다.
정영기의 〈할머니와 조롱박〉(아동문학예술 제2호)은 배려의 필요성을 강조한 작품이다. 혼자 사는 할머니가 박씨 하나를 심고 가꾸어 조롱박을 만들고, 그 조롱박 속을 모두 긁어내어 쪽박으로 태어나는 과정의 묘사가 섬세하다. 자신의 가슴 속에 들어 있는 고집과 욕심을 모두 버려야 진정 남을 위한 배려가 되고, 쓸모가 있게 된다는 깨우침을 준다. 쪽박은 등산로 약수터에서 목마른 이들의 도구가 되었다가, 늙어서는 쌀독에 묻혀 살며 화주승에게 공양하는 도구가 된다.
조임생의 〈도시로 간 아기 솔바람〉(아동문학예술 제2호)은 시골에 살던 아기바람이 공해로 신음하고 있는 도시로 놀러와 병든 가로수, 지하도 노숙인, 새벽 거리를 청소하는 미화원에게 신선한 바람을 나누어 주고 간다는 이야기로 환경문제의 심각성, 나눔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강용숙의 〈나 한국 사람이거든〉(아동문학예술 제3호)은 방글라데시 부모한테서 태어나 우리나라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르’와 그 학교 친구들의 이야기다. 아르는 김치를 좋아하고, 세종대왕을 존경할 정도로 한국인이 되려고 노력한다. 다문화가정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내용의 작품이다.
5. 쓴소리 몇 마디
필자는 한국아동문학회가 발행한 《아동문학예술》 창간호와 제2호, 제3호를 정독하였다. 역작을 내주신 아동문학가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며, 좀 더 자존과 긍지, 발전을 위해 쓴소리 몇 마디는 하고 싶다.
첫째, 작품의 대부분이 생활동화였다. 의인화동화, 환상동화는 어쩌다 눈에 띄었다. 중국과 조선족 문단에서는 동화의 개념을 환상과 의인화 수법으로 된 작품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활동화는 ‘이야기’ 장르로 분리시키고 있다. 특히 김만석(조선족아동문학평론가) 교수는 “한국에서는 동화도 동화요, 소설도 동화요, 이야기도 동화라고 하며 혼란에 빠져 있는데, 시급히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통일민족의 아동문학 발전 방향을 위해서라도 견해 차이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시급하다.
둘째, 노쇠함을 풍기는 작품이 여럿 있었다. 너무 교훈적이었다. 마음이 늙으면 글도 늙는다. 몸이 늙었다고 마음도 따라 늙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아동문학의 주독자인 어린이들의 생각이나 언어, 행동과 비교해서 세대 차이가 유별나다면 그 교훈은 쓸모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읽던 책을 덮어 버리는 부작용을 초래한다. 어른의 눈높이에서 글을 쓰면 어린이에게는 잔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다.
셋째, 가볍게 쓴 작품이 더러 있었다. 진부한 소재로는 신비로운 세상을 파헤치지 못한다. 어린이들은 계속 물음표를 달고 사는데, 어른들은 물음표를 잊고 산다. 사람은 “질문을 잃어가는 순간부터 늙기 시작한다.”라고 한다. 물음표(?)가 있어야만 느낌표(!)가 있다는 진리를 도외시하면 안 된다.
아동문학가는 글밭에 농사를 짓는 농부다. 어린이들의 마음밭을 가꾸고, 어린이들의 인생살이를 참견하는 선생님이다. 단 한 편을 쓰더라도 제대로 된 무게 있는 작품을 써야 한다. 대충 쉽게 써서 작품을 남발하면 조롱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문장부호나 맞춤법이 틀리면 창피한 일이다. ‘어른들이 부호사용법도 모르고 맞춤법도 모르니 큰일’이라고 어린이들에게 걱정거리를 안겨준다면 주객이 전도되는 것이다.
넷째, 평론의 활성화가 아쉽다. 물론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고 하지만 오히려 쓴 약이 몸에는 좋은 것이다. 칭찬할 작품은 격려하고, 꾸중할 작품은 거울을 보게 해야 한다. 《아동문학예술》 제4호부터는 전호前號 발표 작품에 대한 서평이 게재되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람이다.
6. 맺음말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사랑과 배려, 나눔이란 주제는 인간이 갖춰야 할 근본 명제요, 아동문학이 추구하는 기본적 바탕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배려도 없고, 나눔도 없다. 배려나 나눔은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랑은 언제라도 깨질 것 같은 위태로움을 속성으로 안고 있다. 그만큼 소중한 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정성수 시인은 〈사랑〉이라는 시에서 “주머니에 넣고 싶었다// 저녁 햇살 속/ 허공에 뜬/ 유리그라스”라고 사랑의 속성을 갈파했다.
신체의 일부가 마비되면 불인不仁하다고 한다. 다리가 마비되었다면 누군가가 칼로 다리를 찔러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이것이 불인이다. 반대로 누가 다리를 찔렀을 때 고통을 느낀다면 나는 다리와 인仁의 관계가 된다.
말하자면 꺾인 꽃을 보고 고통을 느낀다면 꽃은 내 것이 되는 것이다. 만약 세상의 모든 것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공감할 수 있다면 세상의 모든 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만물일체萬物一體다.
타인의 고통에 똑같이 반응하는 사람은 타인의 몸에 비수를 꽂을 수 없다. 사이코패스(반응하지 않는 사람)만이 타인의 몸에 비수를 꽂을 수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여기는 것, 즉 인仁을 맹자孟子는 측은지심으로 명료화했다. 측은지심은 어린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할 때, 어린이의 불안과 공포를 마치 나의 일처럼 느끼는 감수성을 말한다.
책 한 권이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작가는 작품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문학은 자기표현이다. 얼마나 진정성 있게 ‘나’를 표현하느냐가 독자들에게 감동의 가늠자가 된다.
그 진정성은 어디에서 우러나올까. 작가 자신이 타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이기와 탐욕은 모두 헛된 것들을 낳을 뿐이다.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소외된 이들을 배려하고 절절한 나눔정신을 작품에 담을 때 아동문학의 길은 활짝 열리고, 아동문학의 꽃은 활짝 피게 될 것이다.
■ 참고문헌
북 애, 1986.5.20. 《규원사화》, 자유문고・한뿌리
이남호, 1997.11.6. 〈오솔길〉, 포스코신문
김만석, 2008.7.29. 〈韓中兒童文學세미나 論文〉, 한국아동문학연구회
안재식, 2010.11.10. 《설화의 고향, 중랑》, 중랑문화원・세계문예
▶안재식(安在植) 약력 1942년 서울 신설동 출생. 한국문인협회 편집위원, 국제PEN한국본부 자문위원,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한국아동문학회 지도위원, 「소정문학」 동인, 중랑문학대학 출강. 수상 : 환경부장관 표창(1997. 문학부문), 한국아동문학작가상 외 시가곡 : 「그리운 사람에게」 등 20여곡 저서 : 『야누스의 두 얼굴』 등 20여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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