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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남목사의 성서원어 칼럼
대답만 잘하지만 대답에 대한 실천은 없다.
기독교의 본질은 살아있는 생명의 실천이다. 열정적인 복음을 전하는 곳에는 표어와 같은 “아멘”과 “할렐루야”란 소리가 우렁차다. 특히 부흥사들이 설교 도중에 아멘과 할렐루야를 강요하는 가운데 대답하게 하는 형태를 자주 볼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아멘’의 뜻은 그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렇게 될 둘 믿습니다.’ '옳습니다', '언급한데로 이루어 주옵소서'라는 의미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의미는 너무나 소극적이며 대답만 잘하지 그 대답에 대한 실천이 거의 없게 만들어 버리는 용어로 전락하고 있다. 물론 그 아멘에 대하여 실천하는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실천할 수 없는 내용이나 실천하지 않아도 되는 내용까지 아멘이라고 남발하는 것이 문제다.
히브리어 단어 속에는 구문이나 문장으로 숨겨져 있다. “아멘”이란 단어는 ‘살아있고 규정되어 있는 생명의 말씀을 배우고 최선을 다해 일하겠습니다.’라는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
지금 현재 사용되고 있는 단어 해석집이나 사전 그리고 주석으로는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히브리어 알파벳 자음 문자가 담고 있는 의미들을 구문으로 나열한다면 이러한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진정 아멘으로 살아가신 분은 누구일까? 즉 살아있고 규정된 생명의 말씀을 철저하게 배우고 그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며 실천하신 분은 그리스도 예수 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증명하는 말씀이 요한계시록 3장 14절에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편지한 내용 중에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라는 말씀 속에 아멘을 지칭하는 존재를 표현하고 있다.
아멘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지칭하고 있다면 함부로 ‘아멘’ 한다는 것은 아멘의 가치를 격하시켜왔다는 것을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따라서 아멘이 그리스도 예수라는 존재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규정하신 생명의 말씀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배우고 그 분과 함께 실천하여 생명으로 나타나겠습니다.”라는 의식 속에 이제부터 아멘을 올바르게 해야 할 것이다.
또한 할렐루야도 너무나 쉽게 해버려 할렐루야라는 의미와 가치를 변색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준 할렐루야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할렐루야는 단순히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하는 것만 의미를 고집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부흥사들이나 설교자들이 설교의 흥을 돋우기 위해서 사용하는 표어가 아닌 것이다.
얼마나 부흥사들이 할렐루야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설교하다가 진정 할렐루야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멋대로 사용하고 있음을 자주 볼 수 있다. 히브리어 속에 할렐루야는 “하나님과 함께 호흡하면서 생명의 말씀을 익히고 익혀서 하나님의 일을 연결시키며 확장해 나가겠습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단순히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 한다’는 의미도 분명히 갖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성령의 법을 하나님과 함께 호흡하면서 익히고 숙련되게 익혀서 하나님의 일을 삶의 현장에 연결시키며 확장해 나가는 것”이 진정 할렐루야라는 단어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을 갖고 아멘을 하고 할렐루야를 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성경의 단어와 문자는 증명하고 있다.
이렇게 단어의 의미가 어떤 주장이나 논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이미 하나님께서 문자를 통해 표현해 오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도하신 내용의 문자를 무시하고 이성에 의한 논리만 주장하여 좌충우돌의 성경을 번역해 왔음을 지금 현재 번역되어 있는 성경을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대답만 하는 종교인이 아니라 그 대답에 따라 하나하나 실천해 나가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함이 마땅하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에 살과 뼈가 있을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는 과정에서 볼 때 첫째 하나님께서 나를 엄청나게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 창조신앙, 둘째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 함께 하고 싶은 임마누엘 신앙, 셋째 하나님의 사랑은 고난과 역경을 견뎌내야만 숭고한 사랑의 절정에 이르게 하는 십자가 신앙, 넷째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승리하게 되는 부활신앙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장사된 지 삼일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어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절정과 극치에 이르게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게 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40일 동안 지상에 거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주셨다. 그렇게 만나주셨던 주님의 모습이 어떤 모습일까? 그 모습을 본 많은 사람들의 표정을 한번 상상해 본다면 다양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것은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이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기로는 세상에 계셨을 때의 육신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부활하고 나신 후에 모습은 뼈와 살이 없는 상태로 육체로부터 이탈되신 모습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한 뒤에 제자들은 놀라고 무서워하여 “영”(ghost)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즉 뼈와 살이 없는 존재로 여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안심시키며 말씀하시길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ghost)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살과 뼈가) 있느니라.”고 명확하게 알려주시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부활하실 때 육체이탈로 인해 유령처럼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살과 뼈가 있는 존재로 나타나신 것이다. 그로 인해 구운 생선 토막을 잡수실 수 있지 않은가?(눅 24:42) 헬렐레 귀신처럼 등장하신 것이 아니라 아주 분명하게 사람과 거의 동일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마땅하게 여겨야 한다. 부활의 주님은 유령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 온 천하에 알리고자 지금도 부활의 주님으로 등장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살과 뼈가 있는 존재로 나타나신 것은 여러 많은 의미가 있을 것이며 계획이 있다고 확신한다. 지난번 신문 칼럼에서 십자가의 사건이 과거 이천여 년 전에 골고다 갈보리에서 돌아가신 것과 동시에 내 안에서 일어나야만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도다.”라고 외치는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면 부활의 사건도 내 안에 일어나야 함이 마땅하지 않은가?
뼈와 살이 있는 상태에 부활하신 주님과 내 가 한 몸이 되어 있다면 지금 현재 내 살과 뼈가 누구의 것이 되는 것일까? 부활의 주님과 연합되어 하나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과연 내 몸은 누구의 몸인가? 한번 만져보고 꼬집어도 보고 옆에 있는 사람의 모습의 보고 누구의 몸인지 살펴봄이 어떨는지.
집회를 인도할 때 옆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의 몸이 누구의 것인지 살펴보고 만져보고 하면서 과연 우리는 예수 따로 나 따로 마치 따로 국밥처럼 살아온 것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렇게 만져보고도 부활하신 주님과 한 몸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도 한번 만져보시라.
과거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 손과 발을 보고 나 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는 말씀이 지금 나에게 들려와야 하며 받아들여져야 한다. 부활신앙의 극치는 내 안에 부활하신 주님과 한 몸이 된 새 생명으로 살아감에 따라 기쁨의 근원이 되고 희망이 되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활력소를 얻게 되어 결국에는 로마서 8:35-39의 상태에서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회개라는 말은 신앙인이든 아니든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시편 7편 12절과 13절에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너무나 끔찍하게 표현되어 우리의 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다.
회개는 기독교인들에게 너무나 절실하게 필요한 구원의 지름길이다. 시 34편 18절에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라고 할 만큼 회개는 사람의 마음이 소생케 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사 57:15) 그뿐만 아니라 회개하는 사람을 돌봐주신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 55:2)
회개를 하려면 먼저 죄가 무엇인지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죄는 사회적이고 윤리와 도덕적인 죄를 포함하여 성경에 언급된 죄를 모두 시인하고 몸부림치며 통회 자복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죄를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그런데 성경에 나타나 있는 죄의 본질을 모르는 채 무작정 회개만 한다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의도하심을 모르고 자백만 한다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문으로 罪(죄) 넉 四(사) + 아닐 非(비) = 네 가지가 아닌 것을 뜻하는 의미를 기준해서 롬 14:23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非信 비신) 요일 3:4 죄는 불법이라.(非法 비법) 요일 5:17 모든 불의가 죄로되,(非義 비의) 약 4:17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非實踐 비실천)고 살펴 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의 본질적인 뜻은 남편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신랑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내 안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상태, 주와 연합된 상태를 깨닫지 못한 상태,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에 도달하지 못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어 죽은 상태, 그리스도 예수 앞에 자신을 발견하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화개는 인간 본연에 자리 잡고 있는 짐승의 속성을 깨뜨리기 위한 작업을 바탕으로 한다. 일반적인 사회 윤리 도덕적인 죄를 하나님 앞에 나열만 한다고 해서 죄를 뉘우치거나 심령 깊숙이 자신의 죄를 통회 자복을 하는 것은 무시하지 않는다면 회개는 사람에게 반드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지름길이다.
그러나 회개의 본질을 안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는 회개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회개라는 헬라어 단어는 메타(함께) + 노이에오(깨닫다) = 메타노에오오라는 합성어로서 나와 함께 하는 존재인 주님과 함께 진리를 깨닫는 차원을 회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노이에오(깨닫다)라는 단어는 누스(마음)이라는 단어와 동의어로 나와 함께 하는 주님과 함께 한 마음이 되는 상태를 회개라고 관찰할 수 있다.
따라서 회개는 주님과 함께 진리를 깨닫는 한 마음이 된 연한된 상태를 엄청난 의미를 갖고 있다. 이제 우리는 한번만 죄를 회개하는 단발성의 회개를 주장하는 구원파나 다른 종교집단의 교리에 주눅들 필요가 없다. 한번만 회개하는 정도가 아니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구절에 따라 회개한다면 평생을 해도 다 못할 것이다.
따라서 죄 사함을 받는 차원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들어가 그 분과 하나가 되어질 때 죄 사함을 받는 것(엡 1:7)이며, 예수의 피가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는 죄 사함(요일 1:7)을 얻는 것이고 주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었을 때라야 진정한 죄 사함이란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된 상태를 천국이라고 할 수 있으며 주님과 연합되지 않으면 죽고 난 뒤에 천국도 갈 수 없게 된다. 지금 현재 회개하는 삶을 영위하지 못하면 천국의 근처도 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까이 다가와 있는 천국도 보지 못하는 소경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면 매일 회개하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
사울이라는 이름 큰 자로 바울을 작은 자로 알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이름들이 한 가지 의미만 갖고 있지 않고 다양한 뜻을 갖고 있다. 사울이라는 히브리음으로 쏴울인데 높다는 뜻만 갖고 있지 않다. 명사의 뿌리인 동사에서 다양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쏴알이라는 단어에서는 “요구한다. 굳게 한다. 욕심낸다. 폐를 끼친다, 빚을 진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달라고 요구한 대로 요구하는 자 사울을 택한 것이 사무엘이 단독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에 의한 사람을 뽑은 것이다.
사무엘상 10장에 사울 왕이 기름 부음을 받을 때 사무엘이 <기름 병>에 담은 기름으로 다윗 왕이 기름 부음을 받을 때는 사무엘 선지자가 <기름 뿔>에 땀긴 기름으로 안수하였다. 여기서 병과 뿔로 된 재질의 그릇에서 하나님의 의도가 숨겨져 있다. 쉽게 깨어지기 쉬운 존재인 인생과 쉽게 깨어지지 않는 인생을 발견할 수 있다.
마음과 생각이 굳어진 사울은 자기 위치를 고수하기 위해서 욕심을 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남의 빌리는 삶을 가졌다. 죽은 사무엘을 만나기 위해서 박수무당의 힘을, 자신의 우울증을 치료하기 다윗의 음악을 빌렸던 존재다. 그런데 빌린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바울(파울)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파루르로써 낮다는 뜻이다. 명사 파루르의 동사 어간은 파아르로서 여기도 다양한 뜻을 갖고 있다.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쓴다. 구석에 들어간다. 옆으로 간다. 조각이 난다, 아래에서 문을 두드린다, 모퉁이에서 슬피 운다, 신발을 씻는다”는 뜻을 갖고 있다.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쓴다(고전 11:5) 의미는 순종을 말한다. 또한 구석에 들어간다는 것은 겸손을 의미한다. (사울을 왕으로 추대되었을 때 행구 속에 있었음 삼상 10:22)
아래에서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은혜를 사모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모퉁이에서 슬피 운다는 뜻은 모퉁이 돌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의미다. 신발을 씻는다는 의미는 모퉁이에서 슬피 운다는 개념과 비슷하다.(요 1:27, 눅 7:38) 옆으로 간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것을 의미한다.
헬라어로 파우로스는 파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다.
제어한다, 금한다, 그치다 사도 바울처럼 자기 자신을 제어하는 자는 사도 바울의 살을 추구하는 것이다.(삼하 3:37, 잠 10:19, 25:28, 시 81:14, 벧전 2:11)
제어한다는 개념과 상이한 금한다는 뜻은 절제한다는 의미인데 울이 사울이었을 때는 원하는 바를 금지하는 사항이 없었다.(전 2:10) 아무 것도 금하는 것이 없었다.(창 37:9)
그러나 바울로 개명되었을 때는 철저하게 금지고 절제된 삶을 살았던 흔적을 그가 기록한 성경에 찾아 볼 수 있다.
사울이었을 때는 혈기가 하늘을 찔렀고 굳어진 마음으로 끊임없는 욕심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지만 이름이 빠뀐 뒤부터 원욕이(전 12:5) 교만이(겔 33:28), 다툼이(잠 18:18) 분노(에 7:10) 시비가(잠 15:18) 악행이(사 1:16) 원망이(민 17:10) 어두움의 생활이(롬 13:12) 이방의 행동이(벧전 4:3) 기독교인 체포 작전이(행 9:2)이 그쳤다.
이와 같이 이름 속에 귀한 뜻을 발견할 수 있다. 이름이 갖고 있는 다양한 뜻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 가지 뜻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이름에 걸맞지 않는다고 해서 핀잔을 주거나 무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과감히 고쳐야 한다.
야곱이 씨름 한 이유는?
넨센스 퀴즈에서 최초의 씨름 선수는 누구일까요? 하는 질문의 답이 야곱이라고 한다.
창세기 32장에 씨름의 대상자가 사람으로 되어 있는데 해석이 여러 가지다. 천사라고 하며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런데 씨름의 결과 이후에 야곱에게 새로운 이름이 지어졌는데 이스라엘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다는 뜻을 갖고 있다.
야곱이 씨름한 상대방은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과연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길 수 있을까?
그러면 하나님은 왜 야곱에게 져 주었을까? 3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다리를 절게 만드셨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졌으면 그냥 물러나야 되는데 왜 불구자로 만드셨을까? 여러 가지 의문투성인 장면 속에서 귀한 뜻을 발견하게 되었다.
거듭난다는 헬라어 단어가 3824 pali;ggenesia팔린게네시아 3825 + 1078의 합성어
3825 pa;lin(팔린) 다시 새롭게, 후면에, 다시 한번, 다른 손에, 때, 멀리
떨어져 있는 √3823
3823 pa;lh(팔레) 시합, 씨름 pa;llw 팔로(to vibrate) 진동하다(반복적으로)
거듭난다는 단어에서 살펴본다면 변화, 생명의 전이, 연합, 예속, 재창조, 전화, 중생, 혁신, 회복의 뜻을 갖고 있다. 거듭 난다 즉,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가 우리 삶 속에서 부여하는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죽을 뻔하여 다시 살아난 분이나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다시 회생하신 분들에게 상당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얍복 강나루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야곱의 상태는 성경의 전체를 조명하여 본다면 거듭나는 차원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자신의 새로운 삶이 전개되기 바로 전에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놀라운 사건이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굴복하여 얻은 결과가 무엇인가?
평생토록 불구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물론 살아가면서 많은 덕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드러나 있는 부분만 우리에게 준 것이 결코 아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서 얻은 이름인 이스라엘은 죄가 없는 상태 즉, 거듭남으로 인해 얻은 결과인 것이다.
하나님과 싸워서 하나님보다 높아진 것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위대해진 것도 아니다. 그 분을 지배하는 것도 결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상태일까?
거듭난다는 것은 주님의 것이 되는 것이며 그 분의 지배와 통치 속에 살아가겠다는 자신의 결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야곱이 하나님을 겨루어서 이겼다는 승리의 개념이 하나님을 제압한 것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다른 뜻을 담고 있는가? 여기에 숨은 비밀이 있다.
나 혼자로는 이 강을 건널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나의 길을 헤쳐 나갈 자신이 없습니다. 내가 이것을 감히 해낼 수가 없습니다.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이 아니면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저를 다스려 주십시오. 라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사건이요, 나를 지배하시고 주관해달라고 하는 사건이 바로 주님과 씨름한 사건이다.
지금 현재 주님과 씨름하는 분이 있는가? 그 분을 이기려고 하지 말라. 도저히 이길 수 없다. 나를 장악하시며 압도하시고 나를 사로잡으시는 주님의 것이 되는 것이 바로 승리하는 것이다. 내 안에 사시는 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사건이 바로 야곱과 씨름하는 사건과 똑같은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또 오해하실 분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귀 사탄과 싸워서 이기면 마귀사탄의 지배를 받는 것이겠네” 하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 것이다.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거듭난다”는 뜻이 주님과 연합되는 차원이라면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씨름한 것이 단순히 외형적인 씨름만이 아니다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주님과 하나가 되는 사건이 얍복 강나루 사건이요,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사건이요, 내가 누구인가를 깨달은 사건이 주님을 만난 브니엘 사건이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는 뜻이다.(창세기 32장 32)
거듭난다는 뜻은 생명의 전이다. 즉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건이다.(요한복음 5:24, 요한일서 3장 14절) 즉 히브리 민족이란 건너간 민족을 의미하는데 바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민족을 의미한다. 어둠에서 빛으로, 죄에서 의로, 옛법에서 새 법으로, 죄와 사망ㅇ의 법에서 생염과 성령의 법으로 건너간 민족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이 거너간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소금과 빛이 되는 삶의 의미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말씀과 너희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에서 세상이라는 단어는 한글번역은 똑같이 세상으로 구분 없이 번역되어져 있다. 이에 따라 원래 담고 있는 의미가 상실되어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다. 너희는 빛으로 사역하는 세상은 코스모우(원형: 코스모스)( )으로 너희는 소금으로 사역하는 세상은 게스(원형:게( )로, 뿐만 아니라 소금으로 사역할 세상은 여성(F)으로, 빛으로 사역할 세상은 남성(M)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건대 한글개역 성경으로서는 도저히 두 가지 세상을 구별할 수 없는 문장이지만 원문에서는 두 단어가 서로 다른 단어로 기록되었으며 더욱이 그 단어가 지닌 성(性)까지 구분하여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세상이란 단어로 표현한 코스모우나 게스에 대해서 나중에 언급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지면상에 한계가 있으며 그 자체를 설명하려면 많은 성경을 인용해야 하며 부연 설명이 너무나 많이 따르기 때문이다. 간단히 피력한다면 코스모우는 코스모스(빛의 세상)라고 하는 명사로 질서가 잡혀 있는 존재가 구성되어 잇는 세상을 의미하며 게(소금의 세상)라고 하는 단어는 하나님의 나라에 기업을 이어받을 존재로 구성되어 있는 세상을 의미하고 있다.
빛의 게는 요한계시록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계시록도 이런 게(세상)라는 의미에서 풀어야만 종말론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계시록에 나오는 땅에 대한 해석이 분명치 않으면 엉뚱한 종말론을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따라서 땅이란 단어를 소홀히 하지 말라. 차근하게 땅이란 단어를 관찰해야 하며 올바른 의미 분석을 해서 성경을 접근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설교자들이 소금과 빛을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물질적인 소금과 빛을 인용하고 비유로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해석한다고 해서 문제를 삼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의미를 올바르게 전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소금의 성분이나 특징을 갖고 얼마든지 감동을 줄 수 있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빛에 대해서 얼마든지 분석하여 성경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한 뜻만 갖고 있을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드러내지 않는 소극적인 존재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암시도 있다. 그리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라는 드러내는 적극적인 존재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뜻은 천국의 맛을 내라는 엄청난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소금의 역할은 맛을 내는 특징을 갖고 있는데 그 특징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면 복잡하게 특징이나 역할적인 내용에만 치중하게 된다.
과연 우리는 어떤 맛을 내고 있는지 싱거운지 짠지도 모르고 그냥 소금이라는 이름만으로 허울 좋게 신앙생활하고 있다면 길가에 밟히며 살게 된다. 진정한 맛을 낼 줄 아는 사람은 드러내지 않아도 그 맛 때문에 음식점에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처럼, 천국의 맛을 내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라는 뜻은 천국의 길을 내라는 의미로 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는 말씀처럼 어둡고 망망한 바다에 빛으로 존재하는 것은 단순히 방향을 잡아주기 위함일 뿐만 아니라 길을 제시하고 나아갈 길을 제공하는 역할을 감당한다면 우리는 과연 맛을 낼 수 있는 존재로, 올바른 길을 가르칠 수 있는 생명과 진리의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여 살고 있는지! 자기도 못 믿는 예수를 가르치고 잘 모르는 예수를 전하고 있는 목회자들 그리고 선생들 이거라도 올바르게 알고 살아가기만 해도 천국은 가지 않겠나?
십자가의 장소가 또 다른 곳에 있다면
우리 주변에서 십자가를 달고 다니는 사람들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심지어 연예인들이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나오면 신앙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과연 십자가를 달고 있다고 해서 십자가의 신앙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는 장식용이나 상징의 표시로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목적이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바라보면서 고통의 모습을 보고 감동되라는 뜻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나무기둥은 죄로 인해 죽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그 죽은 나무인 나와 생명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는 사건을 십자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십자가의 은혜는 다른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와 죽은 나무인 내가 한 몸이 된 것이며 나의 존재가 새롭게 이루어진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다.(고전 1:18)
그런데 2000년 전에 돌아가신 사건만을 믿고 접하는 것으로 끝낸다면 믿음이 너무나 제한적이 되고 만다. 한낱 역사적인 사건만 믿고 있다면 그 신앙은 반쪽의 신앙이나 다름없다.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건만을 믿으라는 것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루어져야할 사건이며 신앙의 본질을 발견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장소가 골고다, 갈보리로 알고 있었다. 그 장소를 부인하거나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1장 8절에 보면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 소돔과 애급으로 나오고 있다. 성경을 읽다가 의문 나서 도대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장소가 왜 또 다르게 거론되고 있는지 궁금하였다.
그래서 소돔과 애급에 관련된 구절을 다 찾아본 결과 이사야 31장 3절에 “애급은 사람이요”라는 구절에서 놀라운 비밀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 예수님께서 사람 안에서 즉 내 안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구나.”라고 깨닫는 순간 세미한 음성을 들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인 "다 이루었도다"라는 음성이 나의 삶의 현장에서 듣는 순간 역사적인 십자가 사건만을 믿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십자가 사건이 이루어져야만 하나님의 목적이 달성되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구원의 완성이다.
부산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오다가 기차 안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남여 몇몇 집사님들을 만나게 되어 자연스럽게 성경 이야기가 시작되어 또 다시 부흥회가 되었다. 대화중에 지금 언급하고 있는 십자가 사건을 증거하는데 어느 여자 집사가 통곡을 하길래 “왜 집사님 그렇게 우십니까?” 하니 “제가 이제까지 십자가의 신앙이 역사적인 사건만 믿는 절반의 신앙인인 것을 아니까 너무나 한심스럽다”는 것이다.
그렇다 십자가의 신앙은 역사적이고 사실적이어야 함은 물론이며 신앙의 여부에 따라서 그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사건이 내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지 못한다면 그리고 아무리 십자가를 달고 다닌다고 할지라도 신앙인이라고 인정할 수 없지 않은가? 십자가는 달고 다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예수와 함께 죽어진 사건이며 함께 장사되어진 사건이 되지 않는다면 그 다음에 일어나는 부활의 사건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은 나무인 나와 생명나무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 되는 장소가 바로 소돔과 애급이요, 골고다와 갈보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안다면 십자가를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달고 있는 것이요, 그보다 더 좋은 십자가를 달고 다니는 것이다.
십자가는 고통만이 나타는 것이 아니라 연합되어지는 장소며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부활할 수 있는 기쁨을 발견할 수 있는 장소다.
이 은혜를 믿는 자들 모두에게 전하고 싶어서 오늘도 십자가를 또 다시 묵상한다. 아니 묵상만 하지 말고 주님과 연합되고 하나가 되는 감격을 누려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만 보고 있지 마시고 그 분과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하여야 한다. 주님과 강한 체험을 하는 것이 고난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에 어떤 고난을 원해야 하는지 다시 한번 고난의 의미를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다. 사순절이며 고난주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매번 새롭게 느끼며 상고할 수 있는 사건을 발견하시라.
그리고 나의 존재가 십자가 현장인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놀라운 사건을 경험하시기 바란다. 이것이 진정한 십자가 신앙의 묘미라고 반추할 수 있어야 한다. 사순절이나 고간주간이 되면 금식을 하고 세상의 오락을 즐기는 것이 끊고 오로지 주님만을 그리고 십자가만을 묵상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십자가의 핵심적인 사건이 내 안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과거 역사적인 십자가 사건만을 인정하고 믿고 사순절과 고난주간의 전통적인 행사에만 치중한다면 십자가의 완성을 다 이루신 구원의 사건이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 없이 지나갈 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내 안에서 십자가의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가 되지 않는다면 주님과 나는 아무런 의미 없는 관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내용을 접하며 사건이 되고 장소가 되어 십자가의 완성이 될 수 있도록 서로 권고해 주기 바란다.
성경에서 말하는 광야라는 의미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광야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광야와 같은 의미일까?
아니면 다른 의미일까? 세상에서 말하는 광야는 물이 거의 없어 항상 기후가 메말라 있는 상태에서 풀도 없고 나무도 없으며 인적인 드문 사막과 같은 황폐하고 거치른 땅으로 알고 있다. 이런 광야에서 세례 요한이 복음을 외쳤고 심지어 예수께도 복음을 외친 곳이다.
그렇다면 인적이 드문 왜 광야에서 복음을 외쳤을까? 사람이 많은 도시의 광장이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런데 복음서에 보면 세례 요한이나 예수는 광야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 심사숙고해야 되지 않은가?
히브리어로 광야라는 단어는 ‘미뜨바르’라고 부르는데 ‘미’라는 단어와 ‘따바르’라는 단어의 합성어인데 ‘미’는 무엇이 임하는 장소‘라는 의미이며, ‘뜨바르’는 ‘따바르’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질서 있게 정돈된 말씀’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미드바르’는 ‘질서정연한 말씀이 임하는 장소’를 “광야”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나 예수께서 광야에서 말씀을 전하신 이유가 어떤 지형적이고 환경적인 상황 때문이 아니라 광야라는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계셨기 때문이 아닌가? 사람들이 많은 도시나 광장에서 말씀을 전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장소인 광야에서만 복음을 선포해야 되는 차원을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이 아닌가?
말씀을 선포하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머물러야 하는 장소 광야는 바로 내 안에 말씀이 올바르게 임하는 장소로서 광야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지 아니면 말씀이 제대로 임하지 않는 화려한 도시인지 제대로 인식했으면 좋겠다. 간혹 광야교회라는 이름을 건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만 말씀이 질서 있게 정돈된 말씀이 임하는 교회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말씀이 제대로 임하는 곳이 되려면 광야의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도시는 이미 질서 정돈된 상태이기 때문에 굳이 질서를 잡아 나갈 필요가 없다 그러나 반면에 광야는 아무 것도 계획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질서 정돈의 상태를 잡아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안에 말씀이 제대로 임하는 장소와 존재로 되어지는 것이 주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광야가 되는 것이 아닐까? 이미 대형교회나 중형교회는 질서가 잡혀 이런 내용의 설교나 올바른 개념의 성경공부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말씀을 전하기를 원하는 목회자들은 질서정연하게 자리 잡힌 말씀으로 가득 차 있는 교회보다는 좀 무질서한 교회에서 질서를 잡아 주는 설교를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므두셀라가 오래 동안 살게 된 이유는?
창세기 5장을 묵상하다 보면 성경에 가장 오랜 살았던 인물 중에 므두셀라를 꼽는다. 장장 969세 천년 가까이 살았던 므두셀라는 살아생전에 많은 자녀들이 그리고 후손들을 얻었을 것이다. 그가 단순히 자녀들만 낳고 죽은 것이 아닐 것이다. 육체적인 자녀만 남기고 떠났을 것인가? 자문해보기로 하자. 분명히 하나님의 은총으로 오래 살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므두셀라의 아버지 에녹(하노크/히브리 발음/전수받은 자)으로부터 전수받은 므두셀라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로 인해 은총을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간 곳이 없더라고 할 만큼 므두셀라 아버지는 철두철미하게 하나님과 연합된 삶을 추구해 왔다.
에녹이 사라졌다고 표현하는 것은 에녹의 사상, 정욕, 짐승의 속성이 없어지고 하나님의 속성으로 채워진 상태로 변화된 차원을 의미하며 하나님과 하나가 된 연합된 상태가 된 에녹은 육으로 이루어진 상태에서 하나님과 한 몸이 되어버렸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러한 삶을 전수하는 존재가 바로 에녹인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에녹처럼 짐승의 속성이 없어지고 하나님의 속성으로 채워지는 연합된 몸으로 교체된 것으로 전수하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것을 전수하는 존재인 에녹은 과거도 존재했지만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며 존재해야만 된다.
우리는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의 이름에 숨은 뜻을 발견할 수 있다. 므두셀라(메투쉬알라흐/보낸 것으로 죽게 된 자)의 이름은 므두(메투/죽다)라는 단어와 셀라(쉬알라흐/보내다)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히브리어는 한 단어 속에 단어로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문장이나 구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 무엇을 보낸다는 뜻입니다. 그 무엇이 무엇일까? 바로 죽음을 가져다주는 홍수를 보내겠다는 의미다. 므두셀라의 삶과 죽음은 홍수의 심판과 연결되어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므두셀라가 오랜 살게 된 이유는 그 시대 한 영혼이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에 모범을 보였을 것이며 방법을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전수를 받은 에녹(하노크)이 므두셀라에게 모든 것을 전수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의 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므두셀라는 애만 놓고 죽은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의도가 있음을 그의 이름 속에 내포하고 있다. 므두셀라가 그의 아버지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며 순종의 삶을 살다가 최장수의 은총을 누리게 된 것은 그 이름답게 살았기 때문이다.
믿음의 전수를 받아 동행하였으며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죽음을 갖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으며 홍수의 심판을 예고하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 평생 전도자로 구도자로서의 삶을 가졌을 것이다. 우리도 므두셀라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것을 전수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것을 받으면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되는 은총을 누려야 하겠다.
므두셀라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존재일 것이다. 천년 가까이 살았던 그는 죽음에 대해 오히려 초월된 삶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새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을 초월할 수 있었던 므두셀라처럼 살아가자.
성경에서 오래 산다는 것은 단순히 생명의 연장이 아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지닌 사람으로서 해야 될 일을 순종할 때 오래 산다는 의미다. 한 영혼이라도 살려 낼 때 오래 산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장수한다는 의미는 내 생명이 더욱 길게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존재하는 그리스도 예수가 다른 영혼 속에 존재하여 생명력을 갖게 될 것이 그것이 바로 내 생명의 연장 노선에 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전도는 내 안에서 계시는 그리스도 예수가 또 다시 탄생하여 천국의 생명이 연장되어 간다면 이것이 바로 므두셀라의 삶이 아닐까? 한다. 기독교인들이여 주님과 함께 오래 살기를 바란다.
성경의 개념을 올바르게 알아야 풀린다.
히브리어로 ‘샬롬’은 “번영, 고요, 안식, 하나가 됨”으로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데 이스라엘에서 인사로 사용되는 단어로 헬라어에서 ‘에이레네’라고 표기한다. 특히 히브리어는 철자 하나하나가 구문이나 문장으로 되어 의미 분석을 단순히 명사화하기로 어려운 상황이다.
마찬가지로 헬라어도 철자보다는 어근이나 동의어, 문법 시제에 따라 의미 분석하기에 다소 어려운 점이 있지만 기본적인 내용을 알게 된다면 아주 쉽고 올바른 개념으로 접근하여 하나님의 의조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에이레네' 단어가 '에이로'(to join 결합하다, 하나가 되다)에서 파생된 단어이며 히브리어는 무릎 관절 부분이나 기계의 연결이 잘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샬롬’이란 단어는 단순히 인사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이 잘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즉 비유로 한다면 허벅지와 정강이를 서로 연결하고 있는 무릎 관절이 서로 맞물려 잘 움직이듯이 활동의 차원을 말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해나 일치, 평화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적인 입장에 표명해야 한다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그리스도 예수가 연결고리가 되어 십자가 사건으로 하나가 된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평화라고 하며 화해, 일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주님과 연합되지 않고 신앙을 논한다면 벌써부터 어긋나는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것이며 활동의 지장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주님과 연결이 잘 되어 움직이는 상태가 유지한다면 번영하게 되며 고요를 느낄 수가 있으며 진정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고요는 주변에 아무런 소용돌이가 없는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참 안식을 누린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와 국방부 차원에서 하리케인의 주요 핵심부 근원을 알기 위해서 공군조종사들이 위험을 무릎 쓰고 하리케인의 핵심부인 태풍의 눈 속으로 들어갔다. 들어가기 전 폭풍과 번개와 천둥으로 인해 비행기 기체가 너무나 심하게 흔들려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태풍의 눈 속에 들어갔을 때 거기는 비바람도 번개도 천둥 소리마자 없었다. 너무나 고요함을 느낀 조종사들은 그 속에 하나님을 찾았으며 기도하고 찬양했다는 실화가 있었다.
따라서 진정한 평화는 위험과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 가운데 발견하는 것이다. 어느 미술전시회에서는 평화라는 주제아래 전시된 그림 중에서 폭포 옆에서 둥지를 틀고 있는 어미 새와 새끼 새들의 보금자리를 그린 그림이 제일 멋진 그림으로 전시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그림으로 인정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는 마치 노을 낀 저녁에 예배당 종소리를 듣고 안식을 누리는 너무나 평화로운 모습의 차원도 될 수 있다.
존 베일리 목사가 세계 2차 대전이 한창인 곳에 어느 교회를 방문하여 주일예배에 설교했다. 그날 밤 공습으로 인해 한잠도 자지 못하는 가운데 폭탄이 떨어지는 상황에도 방문한 목사의 딸은 곤한 잠을 청할 수 있는 안식과 평화를 누릴 수 있는지... 그 다음날 그 아이에게 어떻게 폭탄이 떨어지는데도 잠을 잘 수 있었니? “목사님께서 어제 설교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품 안에 있다면 얼마든지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라는 신앙고백을 듣고 회개했다는 고백을 표현했다.
히브리어로 ‘솨바트’라고 하는 안식일은 예배를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 라는 차원보다 더 높은 주님과 연합된 상태에서 정착되고 잇는 차원으로 점검하는 시간의 의미로 바뀌어야 한다. ‘평화’인 단어인 ‘에이레네’와 ‘멍에’라는 단어 ‘쥐고스’(짝짓기, 예속, 법, 의무, 계시록에서는 저울) 단어와 전대, 허리 띠, 주머니라는 ‘조오네’라는 단어에서 내용이 동일한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같은 체격의 소의 등에다 ‘멍에’를 서로 연결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서로 균형이 되지 않으면 ‘저울’의 역할을 할 수 없다면 제 구실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달란트라고 단어도 화폐 단위만이 아니라 무게 단위로 사용하고 있는데 “균형을 잡다”는 ‘딸란또’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다. ‘재주, 은사’라는 의미는 ‘상대방과 나와 서로 균형을 잡아나가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과 나 사이에 균형을 잡는 신앙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평화는 일반적인 개념은 전쟁이 없고 아무 걱정근심도 없는 차원을 의미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는 ‘전쟁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님과 올바르게 연결되어 연합되어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평화를 누리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예수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신 구원의 은총으로 연결된 것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신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진리의 허리띠를 매는 것도 진리이신 주님과 한 몸이 되어 있지 않으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천방지축으로 날뛰게 되어 있다.
히브리어 단어인 “안다(야다)라는 의미도 단순히 의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 붙이는 아교풀처럼 아주 단단히 붙어 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서로 떨어질 때는 붙어있는 부분 이상의 것이 떨어져 나가 서로 고통을 주게 된다. 이런 상태를 염려 걱정, 근심의 상태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을 단순히 단어나 문법적으로 해석하여 개념정리 없이 내놓는다면 성경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좌충우돌 혼란만 야기시킨다는 것을 인식하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 또한 이런 내용을 목회자들이나 교사들이 올바르게 인식한 뒤 성경을 가르쳐야 하며 전해야 한다. 원어성경을 번역한다고 다 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한국 성서공회와 한국교회는 인식하고 교권주의와 개 교회주의적인 자만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 2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들 주변에서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고 신년이나 매월, 아니면 수련회 기간 동안 그토록 다짐하여도 하나님의 의도와는 정반대, 내 뜻대로, 내 멋대로, 내 고집대로 살아가는 양상이 태반이다. 그러나 자기 멋대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된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기 임의대로 한 결과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존재가 되었다. 그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삼상15장 22절은 너무나 잘 아는 구절이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 23절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의 명령(말씀)을 거역(불순종)하는 것은 사술의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고집으로)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우상숭배)하는 죄와 같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앙생활을 자기 고집대로 하는 존재는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는 경우가 된다. 따라서 성경에서 고집 센 신앙인들을 바리새인이라고 한다. 오늘날 이러한 바리새인들을 교회 안에 많이 볼 수 있게 된다.
로마서 2장 5절에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 도다.”고 사도 바울이 말씀하셨다. 즉 내 멋대로 하는 신앙생활의 결과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모르고 죽으려고 환장하는 행위인 것이다.
주님과 한 몸 된 연합체로써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주님의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고전3;23) 따라서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은 주님과 연합되는 것을 거부하는 고집을 내세우게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도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주님의 양식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나온다. 그러면 우리의 양식이 무엇인가? 우리가 매일 먹는 삼 시 세끼가 결코 아니다. 또한 말씀을 묵상하는 차원도 더군다나 아니며 오로지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주님께서 하나님을 향하여 존재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그 분의 뜻에 따라서 지키는 자가 되어야만 최고의 복을 받는 존재가 된다.
요한복음 6:39~40절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예수께서 강조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을 살리는 일 즉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되어 끊어지지 않고 나도 매달리고 다른 사람도 영원히 매달려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신앙생활은 내 방식대로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만약 자기 고집대로 하는 신앙생활이라면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고 점쟁이에게 가서 점치는 죄와 같다. 따라서 자신의 고집을 과감하게 버리고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드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드리자!
2307 qe,lhma 델레마 2309연장형: 결정, 선택, 목적, 교시, 의지, 경향, 열망, 기쁨
2309 qe,lw델로 eqe,lw에델로:(결정,선택,선호,기뻐,열망,사랑,의미,하려,원,뜻,하려고,
목록을 작성)하다, 기울어지다, 결정되다, 오히려 갖다
138 ai`rh,somai하이레오마이 : 자력으로 취하다, 택하다 = evllomai헬로마이로부터 취해짐
1014 vboulomai블로마이:(결의,기꺼이,처리,유념,의도,열거,뜻)하다 2309와 비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란 단어는 어떤 상태를 이루어지는 결과도 의미하지만 어떤 존재를 의미하고 있는데 그 뜻이 포함하고 있는 단어에는 “무엇을 원하는 존재(뜻)” 즉, 무엇을 결정하고 선택하고 기뻐하고 열망하고 사랑하고 선호하고 의미하는 존재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어떤 상태를 이루는 것도 되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형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된다. 어떤 일의 결과보다는 어떤 존재로의 상태를(하나님의 형상화 되어지는) 형성하는 것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
올바르게 전달되어졌으면 하는 바램으로
기독교를 비롯하여 타종교에서도 성경을 읽고 있다. 그리고 비신자까지도 성경을 읽고 있다. 성경을 읽는 시각들이 서로 달라 견해 차이가 여러 다양성을 갖고 이 땅에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성경의 견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여러 종류의 번역 성경들이 출판되어 읽히고 있지만 이것마저도 차이가 많아 올바르게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많은 분들에게 혼란을 야기 시키고 있다.
어쩌면 이것마저 하나님의 계획인지 아니면 마치 바벨탑처럼 각기의 소리는 내는 것처럼 성경에 대한 인식과 해석의 견해 차이는 계속되어 지는 것이 당연 한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국성서공회는 40여 종류의 번역 성경으로 인해 혼란을 주고 있어 앞으로 20년 동안 번역을 하지 않고 올바른 번역을 내놓기 위해서 공포를 해놓은 상태다.
그런데 한국기독교가 120년이 넘은 가운데 번역된 성경은 많았지만 세계에 내놓을만한 코리언 버전이 없다는 것이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조선 말기에 사용되었던 언어구조로 성경을 읽고 있는 실정이며 더 나아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는 성경이라는 교리로 인해 과감하게 성경을 고칠 수 없는 상황이 오히려 더 난관에 부딪히게 한다.
장로회신학대학 교수이신 나 채운 박사님께서도 주기도문 재번역 공청회에서 언급하시기를 수만 군데가 틀린 성경을 보고 설교를 했다면 잘못된 설교라고 하여 논쟁된 적이 있다. 심한 표현이었지만 얼마나 모순되어 있으면 그런 주장을 하였겠는가?
이미 번역된 성경 그대로도 은혜를 받고 천국에 간다. 그것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신학공부를 하여 이것을 깨달은 분들은 성경에 오역되었거나 올바르게 이해되지 않고 있는 부분을 이미 알고 계신다. 건드리면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얼마나 무모한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시정하려고 하는 아니 개혁해야 하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물론 현재 당면된 문제도 얼마나 많이 산재되어 있는데 골치 아픈 것까지 손을 대려고 하니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다. 한국교회가 수습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교회가 그렇지 못하면 어떤 기관이나 단체가 아니면 개인도 감당해야 한다.
이미 이러한 내용을 간파한 신학교수들이나 목회자들도 섣불리 거론하지 않는 이유가 자신 위치를 고수하려면 조용히 있는 것이 신상에 피해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7장 37절에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라는 문장에 가지고 와서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코미조(komizw)라고 하는데 “되돌려 받기 위해서”라는 단어다 그렇다면 여인이 자신이 소유한 옥합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갖고 계시는 옥합을 받기 위해서 나오는 장면이 된다.
이것뿐만 아니라 전에도 언급했지만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주어라’는 구절도 원래의 의미는 길 하나를 달라고 하면 길 두개를 주어라는 뜻과 길 하나를 ! ! 주어 반복해서 깨닫게 해라는 뜻이다. 우리가 길을 준다는 것은 걸어 다니는 길을 줄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소유하고 계시는 길과 진리, 생명을 주라는 의미다.
성경에 나오는 이름과 지명들 그리고 여러 사물에 대한 명칭은 성경에 나오는 핵심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 진다. 그 이름에 걸맞게 사는 사람도 있지만 그 이름에 반대로 사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의 의도하신 대로 성취하는 분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는 이도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에 나오는 지명도 마찬가지다. 성경에 나오는 지명은 그곳에 주는 의미도 있지만 사실은 사람의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이사야 1:26, 60:14, 62:12, 64:10)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이 역사적인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읽혀지는 분들 안에서 또 다시 일어나야 하는 사건이며 역사 되어져야 하는 일들이다. 물론 성경과 똑같은 상황이 되지 않지만 정황 자체가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성경을 읽다가 아!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하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인 것이다.
처음 기록된 성경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만약에 있었다면 아마 우상 정도가 아니라 신으로 섬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성경을 차지하기 위하여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많은 사본에 의하여 전달되어져 온 것 성경은 이제 여러분 속에 이루어져 원본이 되어져야 한다. 아니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성경은 계속 읽어져야 하고 연구되어져야 하며 그것이 내 안에 하나님의 계획 아래 지켜져야 하겠다.
성경은 읽혀지는 분들에 의하여 이루어져 간다.
성경을 풀어 해석하는 것을 들음으로 믿음이 형성되어진다.
성경 말씀을 나의 삶의 현장에서 지킴으로 성취되어 진다.
환란이 주는 의미는?
사람은 누구나 환란을 당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하면서 환란을 주는 이에게 원망을 하곤 한다. 어느 누구도 환란을 즐겨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환란은 우리에게 너무나 슬프게 하는 요소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환란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무언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한다.
2347 qlei,fj 들리프시스 환난, 압박, 고뇌, 짐 진, 핍박, 고통, 상처받은 2346 동의어
2346 qli,bw 들리보오 핍박하다, 모여들다, 괴롭히다, 에워 싸다는 뜻이 있는데
천국을 향해 나가는 진리를 하나님의 짐을 운반하는 상태를 말한다. 히브리어의 알파벳 중에 기멜(ל)이라는 단어는 낙타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진리를 배워서 실어 나르고 보답하는 문자다. 좀 더 진보된 의미를 한다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상황이 환난이라는 의미를 갖게 한다.
마태복음 7장 14절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은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는 말씀에 “좁고” 라는 단어인데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에 많이 모여 에워싸여져 좁아진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길 자체가 좁은 상태를 의미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전진할 수 없는 상태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두라. 이것을 환난이라는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5147 tri,boj 트리보스 길, 바퀴자국, 닳아버린 흔적 tri,bw 트리보오(to rub) 문지르다
5131 tei,rw 테이로 염소, 수 염소, 갉아먹는 동물 √5176
5176 trw,gw 테트로오고오 먹다, 갉아먹다, 씹다, 긁히는 소리
5134 trauma 트리우마 상처 titrwskw 티트로스코오 상하게 하다
환난이란 단어를 살펴본 결과 천국의 문을 향해 가는 길이 많이 문질러져 닳아버려 흔적이 없어 길을 찾을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길을 잘 몰라 자기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는 짐승을 비유하고 있다.
환난은 하나님의 양식이 없는 상태가 되면 자기의 영혼이라도 갉아먹는 처지가 되어버린다. 그런데 성경을 삐딱하게 보는 친구들은 세상에 돌발적인 환경의 변화나 전쟁이나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면 종말이다. 환란이다. 라고 하면서 세상의 종말을 선포한다.
물론 그러한 환난이 환난 측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환난이라고 분류할 수 있지만 하나님 족에서 보는 환난은 내 안에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해 버릴 그때부터 환란이 시작되는 것이다. 내 안에 아버지라는 존재가 없다고 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고아의 차원이다. 그리고 남편이나 신랑이 없다고 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과부라고 구분하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을 돌아보고 격려하는 일을 하는 것이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며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고 야고보서 1장 27절에 언급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환난을 주시는 이유가 성경 속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믿음이 요동치 않게 하시려고(살전 3:3) 경건하게 생활하게 하시려고(딤후 3:12)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살후 1:5) 영광을 받기 위하여(롬 8:17) 등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환난은 이 땅에서 남들과 다를 바 없이 받는 환난도 있지만 이 세상 사람들이 받을 수 없는 환난을 받게 된다.
그렇게 받은 분들이 환난을 당하는 분들을 찾아 위로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신다. 환난을 천국으로 가는 길에 하나의 관문에 불과한 것이다.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고자 몸부림친 신앙의 영웅이었다. 자신의 몸에 환난의 흔적을 평생 갖고 살면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 것처럼 환난을 주신 것에 감사하자.
마음을 길들이는 것
마음을 길들인다는 것은 사람 혼자 힘으로 쉽지 않다. 성경에서 마음을 길들이는 내용을 여러 군데 언급해 있지만 산상수훈에 나오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라는 구절에서 온유한 자란 마음의 상태가 온화하거나 인격적으로나 성품적으로 부드러운 사람을 뜻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과 전혀 다른 내용을 원어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어떤 동물이나 짐승을 길들이는 상태를 온유”라고 한다.
여기서 짐승이란 시편 49편 12절과 20절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한다면
"사람은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한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라고 한다.
깨닫지 못한 존재가 바로 짐승인데 그런 짐승을 길들여서 사람다운 사람을 만들어내는 상태를 온유라고 한다.
어떤 야생마를 잡아서 길들여 놓으면 어떤 말보다 더 온순해지고 순종을 잘하는 내용의 영화나 실화를 접했을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께로 철저하게 길들여지는 상태에 있는 자를 온유한 자라고 할 수 있다. 엉덩이 뿔이 난 망아지와 같이 마치 럭비공처럼 길길이 뛰는 야생마와 같은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길들이시려고 지금도 수고하고 계신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도, 교회를 다니지만 길들여지지 않는 야인처럼 행동하는 무리들이 있다.
허리케인이라는 태풍을 알아보려고 미국 공군이 조사하였는데 그 태풍의 눈 중심부에 들어가 보니 번개도 천둥도 비바람도 흔들림이 전혀 없는 고요함에 탄복하였다고 한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중심부에 들어가야 하는데 들어가지 않아서 회오리바람에 번개와 천둥에 흔들림에 우리의 인생이 엉망진창이 되는 것이다.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 안에 내가 들어가서 길들여지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길들여질 것이다. 아닌 길들여진 상태로 변할 것이다.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마음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하나가 된 상태가 된다.
그 마음으로 살아 들이자.
환난이 주는 의미는? (2)
환난을 주는 의미라는 글을 올렸는데 여러분들이 자신의 처지에 대한 내용의 글과 함께 상담이 들어 왔다. 상담을 할 정도로 유명하지도 않는데 저에게 문의한다는 것에 부담을 가졌다.
환난이 없어지기 위해서 신앙을 가진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라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데 왜 그런 일을 만나는지 이유 없는 당하는 일들은 진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큰 사고 속에 기독교인들이 있다면 그것이 저주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인가?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그 환난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받아들인다면 그 환난은 꼭 필요한 사건인 것이다. 그런데 그 환난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항변을 하게 된다면 그 사건은 본인의 인생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출애급기 15장 22절에서부터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급 한 뒤 사흘 동안 물을 찾다가 마라라는 샘물가에서 도착하였다. 그런데 그 물은 마시기에 곤란한 아주 쓴 물이었다. 그 물을 대한 백성들은 그들을 인도하는 모세를 원망하였다. 그들의 지도자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나무 가지를 꺾어서 마라의 물에다 던졌더니 그 백성들이 마시기가 아주 좋은 단물이 되었다.
그런데 마라의 물을 달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시험하시는 하나님은 그 마라의 물만이 아니라 다른 쓴 물을 만나게 하신 것이라는 것을 파악해야 한다. 그 뒤에 엘림이라는 곳에는 열두 샘물과 칠십 주 종려나무가 있는 곳을 준비해 두신 은총을 깨달아야 한다.
환난을 만났을 때 원망과 불평을 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지만 환난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안다면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항상 갖춰야 할 것이다.
마크 트웨인이라는 선교사님이 선교 일을 하시다가 안식년이 되어 자기 고향에 가서 안식하는데 친구 목사님이 자기도 안식 차 유럽으로 가야 하는 상황에 자기 교회에 와서 임시 목사로 수고를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런데 그 교회에 출석을 별로 잘 하지 않는 어느 교인이 급히 와달라는 전화를 받고 심방을 하였는데 아무리 찾아도 그 집이 보이지 않아 헤매다가 그 교인이 길가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만나서 대화를 하였다.
자기의 사업 처에서 전화가 왔는데 아들이 캠핑에 가서 수영을 하다가 익사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전화를 했는데 전화를 받지 않아 집으로 와보니 화재로 인해 전소가 되었는데 그 집 안에 아내가 숨지는 사건이 있었다. 하루에 한꺼번 자기의 가족들이 죽음을 맛보게 되어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그에게 무슨 말로 위로해야 될지 몰랐다.
한꺼번 가족을 잃은 장례식 날에 설교를 해야 하는 선교사님께서 그 전날 밤에 밤새도록 기도하면서 얻은 말씀이 여호수아 24장 14절에서 18절까지를 중심으로 이렇게 초두의 말씀을 꺼냈다.
스미스 씨 당신은 지금 이 시간 이 장소에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당신은 이 시간 이 장소에서 하나님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당한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향해 얼마든지 폭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하나님을 향해 얼마든지 찬양할 수 있습니다. 선택하십시오.
라고 위대한 설교를 하여 스미스 교인이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모습으로 인하여 많은 조문객들이 은혜를 받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환난을 만나는 사람들은 무너질 것만 같은 아픔과 고통을 갖게 된다.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어려운 일을 만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연결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줄은 어떤 도구로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마치 헤라클레스라는 월드디즈니 만화영화에서도 악마가 헤라클레스의 생명의 줄을 끊으려고 해도 끊어지지 않는 장면을 보면서 이 땅에 많은 성도들에게 시련과 역경을 주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항상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로마서 8: 35-39)
중보 기도가 과연 성경적인지
교회에서 중보 기도의 붐이 일어나 중보기도를 하는 기구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중보기도를 전문으로 하는 기관도 생겨났다. 전에 중보기도 7000클럽 초창기 초두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문의 전화 중에 중보는 “오직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는데 너희가 뭔데 중보 기도를 하느냐?”식의 항의 전화가 있었다. 과연 중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정당한 것인지 설명하기도 전에 끊어버렸다.
중보라는 단어를 분석하면
3316 mesi,thj (메시테에스) 중보자, 중개인, 대리사절, 화해자(조정자), 중개인, 중보
3319 me,soj (메소스) 가운데서, 중간, 중에, 사이에, 앞, 한(낮, 밤), 길, 속에, 배가
3326 meta. (메타) 와 함께, 부속물을 나타냄, 한 복판에(연합, 연속) 다시 한번, 중에, 대적 하여, 그리고 따르다, 아래
3316 mesiteu,w(메시튜오) (중재, 인준, 확증)하라는 단어 서로 연결되어 있다.
단어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오직 중보자는 한 분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기도할 필요가 있겠는가? 주님께서 중보의 역할로서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해 주신다면 그렇게 애를 써서 기도할 이유가 무엇인가? 자칫 잘못하면 예배뿐만 아니라 교회까지 존재할 필요성이 없어지는 것이다. 억지로 논쟁이나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중보자라는 개념의 차원에만 살펴본다면 그러한 지론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위에 열거된 단어에 의한다면 중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한 마음과 한 몸이 되어서 기도할 때 중보의 기도가 완성되는 것이다. 나 혼자 하는 기도가 바로 중언부언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중보 기도도 아니요. 하나의 종교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주님과 함께 하는 기도가 바로 중보 기도의 정신이 되는 것이다.
중보 기도라는 단어 자체가 문제로 본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중보기도가 아니가. 그렇다면 예배 중에 대표기도를 하는 것이 중보 기도의 성격이 아닌가? 그리고 안수기도나 심방 기도나 그밖에 기타 여러 기도는 중보가 아니고 무엇인가? 예수님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면 중보 기도가 된다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피와 죽음을 통하여 죄인들의 죄를 속죄하사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수직관계로서 화해, 용서, 평화로 회복하신 중보자이심을 동시에 구원받은 사람들 사이의 수평관계도 회복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 그 어떤 존재도 가치의 상실함과 존재성의 결여가 생길 수 있다.
따라서 기도를 할 때 자기 혼자 불균형의 상태에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연합된 균형된 상태에서 함께 기도하는 것이 바로 중보 기도의 기초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바탕을 근거로 하여 중보 기도는 계속 실행되어져야 한다.
분명히 헬라어도 중보의 개념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억지를 부린다면 무식이 탄로 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다. 그러나 그 분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것이 중보 기도가 아니라고 한다면 지금 현재 교회마다 시행되고 있는 각종 기도를 폐지해야 하는 결과가 온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많은 영혼들이 중보 기도를 하고 있다. 주님과 연합된 상태에서 중보 기도를 하고 있다.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지만 다른 영혼을 위해서 대신 기도해 주고 있는 분들에게 중보 기도가 잘못되었다고 헷갈리게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죽어 가는 영혼을 놓고 대신 기도하는 많은 분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소방꾼이 되지 말라.
중보 기도자는 중재자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역할을 감당하는 것으로 수직적인 관계와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거나 균형을 잡아주는 존재다. 따라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달란트라는 단어와 연결할 수 있다. 달란트는 화폐의 단위나 동전의 무게로서 저울 달 때 얼마큼의 무게가 나가는지 측정하는 도구로서 “균형을 잡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어떤 존재와 존재 사이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달란트요, 중보 기도의 본질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균형을 잡아주는 재주꾼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중보 기도자는 상대방의 균형을 잡아주는 자로서 기도하지 못하고 있는 영혼을 위하여 균형을 맞추어 주는 위대한 기도자라는 것을 잊지 말라
질그릇 삶이 아닌 보배로운 삶
질그릇의 생활에서 보배로운 생활로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라는 문장에서 이때까지 질그릇은 사람을 보배를 예수님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흙으로 빚어낸 질그릇을 비유로 된 말씀들이 표현된 관계로 그렇게 이해되어 져 왔다. 그렇게 해석하는 것을 부정하거나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에 거꾸로 해석하여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보배를 예수님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과 함께 연합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보배로 여기신다는 말씀이다. 과거에는 우리가 질그릇이라는 인생으로 표현할 수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주님과 연합된 사람은 보배로운 존재이며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말씀이 이사야 43장 4절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신명기 26장 18절에 "오늘날 너를 자기의 보배로운 백성으로 인정하시고"
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을 가장 최고의 보배로 여기신다는 말씀이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그렇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보배로 인정하시고 존귀하게 여기신다. 그러기 때문에 지극히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신다.
신명기 33장 19절에 "바다의 풍성한 것 모래에 감추인 보배를 흡수하리로다"는 말씀과 같이 우리는 모래 속에 감추인 보배가 현재의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에 믿게 될 인생을 보배로 여기신다는 의미다. 그러면 보배의 진가는 언제 드러날 것인가? 흙 속에 모래 속에 바위 속에 묻혀있는 보배는 진가를 아는 분에 의해 발견될 것이다.
이사야 33장 6절에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라는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을 향한 삶이, 경외하는 생활이 보배의 가치를 나타낸다. 요한복음 1장 2절에 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느니라"는 말씀에서 "함께"라는 단어 프로스가 "누구를 향하여"라는 뜻이 더 심중 있는 뜻을 갖고 있는데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을 향하여 존재하셨던 분이시다.
그러한 삶을 누리는 것이 즉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보배로운 인생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 인생을 지금 그리고 항상 누릴 수 있다. 주의 말씀을 순종하면 참 보배가 된다는 찬송가 299장처럼 살아가자.
단순히 의식적인 개념의 발달보다 그 분과 연합되어 보배가 된다면 지금은 감추어서 잘 드러나 있지 않더라도 보배가 갖고 있는 위용은 변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이 세상에 가장 값진 보배는 우리가 액세서리로 알고 있는 그런 보석들이 아니라 진리를 깨닫고 주님과 연합되어 살아가는 분들이 가장 귀한 보배라는 것을 깨닫자.
태초라는 의미를 올바르게 알려면
태초라는 말은 구약에 4번 신약에 6번 총 10번 등장하는 단어다.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태초는 히브리어로 “베레쉬트”라고 지칭한다. 베레쉬트는 시작, 처음, 맏물, 첫 수확 등 여러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베레쉬트 단어는 베(집)이란 단어와 로쉬(머리)라는 단어의 합성어로서 머리를 담고 있는 집이 바로 태초라고 의미하고 있다. 로쉬는 머리, 우두머리, 족장, 두령이란 뜻을 담고 있다.
우리가 이때까지 태초를 시간적인 개념만으로 이해왔기 때문에 태초를 다르게 생각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이런 시간적인 개념이 단순히 역사적인 차원에서 제일 첫 시간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존재적인 개념에서 이해하지 못하면 시간적인 개념의 분석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머리는 ‘로쉬’는 바로 존재를 지칭하고 있는데 고린도전서 11장이나 에베소서 4:15, 골로새서 1:18에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태초의 의미는 어떤 머리를 담고 있음에 따라 태초가 되고 안 되고 하는 뜻을 갖고 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내 생각의 머리를 깨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머리로 바꾸는 사건을 태초의 사건이다. 이러한 상태가 되는 것을 창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사상이 하나님의 사상으로 바꾸는 시간이며, 장소이며,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태초는 자연현상계가 시작된 137억만년 전을 말하는 시간적 개념보다는 그리스도의 머리 안에서 피조물이 목표를 가지고 올바름을 배우기 시작함을 나타내는 의미를 포함하지 않으면 결코 시간적인 개념의 분석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그냥 역사적인 시간에 머물러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태초에 대한 의미를 저버리고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 첫 단추를 잘못 끼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 것이다.
좀 더 쉽게 접근한다면 생명의 문이 열리는 차원과 상태(시간을 포함)가 되어야만 하나님의 근본! 적인 의도하심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내 속에 있는 이상하고 잡다한 사상들인 짐승의 속성들을 제거한 후 질서정연한 하나님의 사상이 올바르게 심어놓은 상태를 태초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를 창조의 차원이라 한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해왔던 차원에서 벗어나 성경의 진면모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내용들이 한 개인의 주장이나 사상이 결코 아니며 ‘베레쉬트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내용을 분석하면 그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원어를 접근해 본 경험이 있는 자라면 이런 의미의 내용을 접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냥 한글로 된 성경을 다독하신 분 가운데 극소수이지만 이런 내용의 근처까지 접근한 분도 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시간적인 의미를 갖고 태초라는 의미를 증명하며 살아가야 한다. 아주 먼 역사적인 137억만년 전의 시간만을 주장할 것인가? 아니면 내 안에 살아계시는 존재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며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온전하게 구원하신 그리스도 예수와 더불어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삶을 태초로 여길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태초의 의미가 분명해지면 옛 법은 사라지고 반드시 새로워진 법이 생기는데 그것이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세워서 여는데 목적을 갖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새로운 법에 적응을 잘 하지 못하여 다시 옛 법으로 되돌아가 버리는 경우가 우리 주변에 허다하다. 그래서 이 교회 저 교회를 기웃거리거나 잡았는가 싶으면 다른 것을 잡아버리는 오리무리의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이 아니 종교생활(행위)를 하는 자들이 있어 답답하다.
이제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이것을 알기 위해 여러 선배들이 이런 파고들었다.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과 한 몸이 되어 심어졌다면 태초의 존재다. 옛 법이 사리지고 새 법으로 새롭게 살아가게 되었다면 바로 태초의 시간이다. 흐트러졌던 내 안이 질서정연하게 창조되어 간다면 성령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태초를 많은 사람들에 알려야 한다. 그리고 태초로 시작하여 열심히 살아가자.
진짜 성경 원본은 어디에 있는가?
성경이 전 세계에 보급되고 있는 현황으로 볼 때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성경의 원래 뜻을 올바르게 전달하고자 많은 기독교 국가에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진짜 성경의 원본은 이 지구상에 없다는 것이다. 지금의 성경이 나온 것은 사본과 사본을 대조하여 같은 문장의 내용을 검증하여 현재의 성경이 탄생된 것이다.
하지만 여러 나라가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사본을 대조하거나 원본으로 인정하는 성경을 번역한 것을 버전(Version)이라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의 성경은 버전이라고 할 만큼 내세울 성경이 없다. 영어성경을 그만 번역하고 다만 원어성경에 의한 번역이 되어 버전이라는 이름의 성경이 나오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가 말하는 성경은 문자화가 된 성경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을 보는 과정에서 성령의 조명에 의한 깨달음의 차원을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깨달음이 사람마다 조금의 차이는 있겠지만 거의 대동소이하다면 성경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다.
성경은 나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이다.(시 40:7, 눅 24:44) 말씀이 나의 존재와 나의 삶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라면 성경은 나의 정체성을 밝히는 책이다. 이러한 성경이 문자화되어 깨달음을 주는 귀한 책의 원본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그 원본은 하나님에게 있다. 만약 사람에게 있다면 그것을 우상화할 것이며 그것을 자치하려고 전쟁이 끊임없을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단순히 기록된 책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로마서 10장 8절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고 신명기 30장 14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말씀이 사람의 입과 마음에도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시편 기자는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시 37:31),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시 40:8)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 “마음에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사 51:7)라고 표현한 성경구절에도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문자화된 성경을 아무리 갖고 있어도 내 마음에 새겨 두고, 내 입에서 전파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쪽 성경에 불과하다. 아니 성경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내 마음 속에 새겨져야만 비로소 성경다운 성경이 될 수 있다. 암송한다고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 아니다. 그 말씀으로 인해 짐승의 속성을 깨뜨려버리고 주님과 연합되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루질 때 비로소 진정한 성경이 되는 것이다.
내 마음과 내 입에서 발생하게 되지만 주님과 연합된 관계가 형성되지 않고 인위적으로 얼마든지 흉내를 낸다면 일반적인 책에 불과하다. 따라서 성경의 원본은 주님과 연합된 관계에서 이루진 사건이나 대화나 의도된 내용들이 나타날 때 성경의 원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히브리어나 헬라어만 갖고 풀이하거나 해석하는 차원만 원어성경공부라 할 수 없다. 얼마든지 한글성경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내용들도 있다. 따라서 원어성경공부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라는 단어라는 수단을 통해 한글로 발견해야 하며 전달해야 한다.
어느 분이 “성경을 몇 번 읽었느냐?” 질문한 적이 있다. 그 분은 500번 읽었다고 자랑했다. 그래서 필자는 “한 번도 다 읽지 못했다. 왜냐하면 성경을 다 깨닫지 못했고 회개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성경의 의문난 점을 질문했더니 “잠시 화장실 간다.”고 해놓고 도망가 버렸다.
성경을 몇 번 읽었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천국 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성경의 단어 중 하나만 올바르게 깨달아도 성경을 수십 번 읽은 효과가 있으며 심지어 하나님의 의도하신 성경 전체의 내용을 깨달을 때도 있다. 오늘날 새로운 설교의 자료를 얻고자 하는 설교자들에게 주석이나 기타 서적들보다 성경에서 놀라운 광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진짜 성경은 창세전부터 내 마음 속에 새겨져 있으며 내 입에서 나오게 되어 있다. 진짜 성경의 원본을 발견하시라.
성경에서 의미하는 해방(광복)
이 나라가 광복이 되던 날을 아무리 재현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상 능가할 만큼 재현할 수 없을 것이다. 목청이 터지라고 만세를 부르고 누구나 할 것 없이 서로 부등켜안고 기뻐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춤을 추는 광경을 다시 한 번 봤으면 한다.
성경에서 이와 흡사한 장면이 있을까하고 묵상해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의 종살이를 마치고 애급에서 가나안 땅으로 향하여 행진 그 자체가 해방의 기쁨을 누리는 대목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여 년 동안 종살이를 마치고 자신들의 고향으로 가는 발길은 아마 날아갈 듯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초전에 불과했다. 홍해 앞에 도달했을 때 뒤따라오던 애급 병사들의 추격에 혼비백산하여 해방의 기쁨도 잠시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모세를 통하여 홍해를 건널 때 혼신의 힘을 다해 건너는 동안 애급의 병사들은 하나님의 방해로 추격을 막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건너온 후 애급의 기마병들이 추격하다가 홍해가 원상 복귀하는 과정에서 애급병사들이 완전히 모두 몰사하는 장면은 너무나 스릴 있는 장면으로 꼽고 있다.
이것이 하나의 과거 역사로 여기고 감동의 장면으로 끝나는 것은 다시 한 번 고려해 볼 문제다. 성경에 나타나는 역사의 사건은 과거에만 일어난 사건으로만 여기고 현재 지금 일어나야 하는 사건을 적용하지 못한다면 성경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결과로 본다. 이 사건이 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역사의 중심점을 찾아 나 자신이 진정한 해방을 누리는 경험을 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이 누려야 할 해방은 우리나라의 광복의 정신을 바탕으로 기쁨을 누리고 역사의 뒤안길을 되돌아보는 시간도 필요하겠지만 십자가에서 온전히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계속 재현해야 한다. 그런데 과거 구원을 받았던 은혜의 기쁨을 상실하고 온전히 이루신 구원의 은총을 망각하고 있는 현재 기독교인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우리가 죄에서 해방 받은 사건을 경험한 기독교인 각자 개인들이 모여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이 성경에서 의미할 수 있는 광복절이라고 할 수 있다. 혼자만이 누릴 수 있는 감격과 기쁨을 모아서 함께 나누 곳이 바로 교회 예배당이며 또 기쁨과 감격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바로 전도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의 시작은 애급에 있을 당시 열 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재앙인 장자를 죽임을 당하는 사건을 당하지 않도록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도록 하는 사건이 바로 해방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과 해방을 받는 장면을 시청각으로 보여주는 한 단면으로 볼 수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해방은 죄에서 구원받은 기독교인들이 누리는 감격과 기쁨이다. 물론 각자 받은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서로 다르겠지만 하나님께서 해방의 표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우리나라에 가장 중요한 역사를 만들어 주신 것이다. 따라서 광복절은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이 아니었다면 얻을 수 없는 역사의 축복이라 생각한다.
우리 민족에게 주신 해방은 이미 성경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지금 현재 또 다시 일어난 사건이고 앞으로 계속 일어나야 하는 사건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온 세계에 알려야 되는 사건으로 인식하고 광복절을 맞이해야 된다. 십자가에서 온전히 이루신 구원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옷을 전신갑주로 여기고 승리의 나팔을 힘차게 불어야 한다.
우리에게 준 역사는 과거에 묻어버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재현시켜야 하며 이루어 가야 하는 책임성을 갖는 것이 기독교인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해방의 감격이 시들해져 버린 지금 이때 성경에서 의미하는 광복의 은총을 계속 되새기면 감격하며 기뻐하는 기회를 마련하자.
믿음과 믿는다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목회자나 아니면 기도원 원장 가운데 다른 성도들의 신앙을 지도하면서 “믿음이 있어, 믿음이 없어”라는 표현을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이 표현했던 믿음이 있다는 의미는 진정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하는 것인지 한국교회는 재조명을 해 줘야 한다. 그런데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가만히 있는 한국교회는 여기에 관심이 없는 건지 다른 데에만 신경을 쓰는 것 같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정의하는가? 대부분 믿음으로 나타나는 행위적인 내용을 의미한다면 신앙적인 의미보다는 종교적인 행위로 나타나는 교회 봉사를 잘하는 것, 헌금을 잘 내는 것, 예배를 비롯하여 기도회에 잘 참석하는 것을 믿음이 있다, 없다고 표현한다면 아직도 믿음의 의미도 모를 뿐만 아니라 믿는다고 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 모르는 것이 아닌가?
믿음의 정의에 대한 개념을 잘 안다고 엄청난 믿음의 소유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무엇인가에 대해서 올바르게 알았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믿음이 좋아지거나 신앙인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어떤 성도의 행위가 성경의 기준에 의해 보거나 신앙의 전통에 의해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성경과 신앙의 기준에 의해 언젠가 한번 윤리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오점을 남기면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전락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 그 사람 속에서 있으면서 믿음의 행동이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그 사람 속에 믿음의 본체는 없으면서 그 형태만 뒤집어쓰고 있는지 살펴보아야함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있다 없다고 판단해 버린다.
자연만물은 언제나 외형적으로나 내면적으로 일치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진실이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만은 그렇지 않은데 겉모습은 평화롭고 인자하지만 실제로는 전쟁을 준비하고 입으로는 민주주의 영웅이지만 그의 삶은 독재로, 아집으로 단련되어 있는 존재들이 수두룩하게 많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짐승이라면 이런 것을 따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짐승들은 겉 다르고 속 다른 능력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만은 충분히 겉과 속을 다르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며 헌금하는 수많은 ‘믿음의 행위’들이 참으로 자신들의 속에 있는 ‘믿음’이 나타난 모습이라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겠는가? 믿음이 좋은 자들도 한순간에 무너지는 잘못으로 인해 믿음이 없는 자로서 전락하는 것을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어떤 행위가 아니라 어떤 존재가 내 안에 있는가?에 따라 믿음이 있다 없다로 구분 지어야 할 것이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내 안에 하나님이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가 어떻게 존재하느냐는 것이다. 세계 어느 사람도 그 안에 그리스도 예수가 그리고 하나님이 존재한다. 그러나 살아 있어 생명으로 존재하느냐? 아니면 잠들고 있든지, 죽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믿는다는 것, 믿음의 행위는 믿음의 존재 여부에 따라 존재하고 있는 그 분과 함께 표출되어져 나오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믿음이 내면의 실체라면 믿음의 행위는 외형적인 실체의 현현이다. 믿음이 명사라면 믿음의 행위는 동사로서 이 두 가지를 서로 혼동하면 안 된다. 사람들은 얼마든지 속과 상관없이 겉을 꾸밀 수 있으므로 믿음이 없으면서고 얼마든지 믿을 수 있다. 따라서 믿음이 없으면 없을수록 겉으로 표현되는 믿음은 얼마든지 강력하고 화려하게 마련이다. 이런 강력하고 아름다운 믿음에 사람들은 너무나 잘도 속아 넘어간다. 자신도 속고 주변 사람도 속고 믿는 사람도 속고, 믿지 않는 사람까지 속는다. 그리고 이 ‘믿음’없이 존재하는 ‘믿음의 행위’만이 남아 ‘믿음’을 대신하고 ‘믿음’을 축출하며 믿는 자라고 떠들고 다닌다. 그래서 예?! ! 嗤? 믿지 않아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에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예수라는 목수의 아들에 의해 비방 받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주인공인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는데 자기들이 앞장서서 예수를 죽여 버린 것은 곧 하나님을 죽여 버리는 믿음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과연 자신 마음 속에 존재해야 하는 하나님도 그리스도 예수도 사라지게 하는 그런 믿음으로 유대인들이 전 세계에서 축복받았다고 할 수 있는지 설교 시간에 자주 인용하는데 성도들에게 잘못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허상을 좇게 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죽게 하고, 그리스도 예수라는 존재를 말살시키는 믿음이다. 강력하고 화려한 그리고 아름다우기까지 한 믿음 우리 주위에 그리고 화려하고 거대한 교회 안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믿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을 죽이고 내어 좇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에 한국교회는 무엇을 자성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다시금 점검해야 한다.
우리들 스스로의 믿음에 우쭐하지도 말고 거들먹거리지도 말며, 현혹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 언급하는 믿음으로 스스로를 발견하고 회개하며, 확인하고 점검해야 할 것을 권한다. (고후 13:5) 그렇지 않으면 유대인과 같은 믿음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믿음으로 천국 간다고 방정맞게 까불고 벌거벗고 돌아다니는 주책스러운 존재가 된다는 것, 아니 그보다 더 심한 사람을 죽이는 정도가 아니라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죽이는 꼴이 된다는 사실을 묵과해서는 안 된다.
글/이종남목사
천국의 거지가 되는 진정한 의미는?
성경에서 나오는 문장이 단어와 구문으로 나열되다 보니까 문법적인 해석으로는 의미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아 성경을 읽는 자들로 하여금 혼란을 야기 시키는 경우가 많다. 산상수훈에 나오는 첫 번째 문장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요.”라는 문장은 마음에 욕심도 없고 법 없이 살 수 있는 그런 부류의 사람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사람은 종교가 있든 없든 욕심도 없고, 법도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가르치고 종용하고 있다.
오늘 문장 앞 단어인 ‘심령’은 원어에서 ‘성령’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도 ‘심령’으로 번역되어 산상수훈의 첫 번째 의미가 사람의 마음이 가난해져야만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는 식의 인위적인 내용으로 이해하고 있다. 위험천만한 일이다. 원래 의미는 “성령에 감동감화하심으로 인하여 천국의 거지가 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천국의 소망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문장 구조로 되어 있다.
굳이 ‘성령에 감동감화하심으로 인하여’라고 하지 않더라도 ‘성령에 의하여’라는 정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성령에 의한 가난한 자가 되어야 만이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의 노력에 의한 가난해지면 천국을 갖게 되는 인본주의적인 천국을 얘기한다면 성경에 말하는 천국과는 거리가 멀다.
그 다음 단어인 ‘천국의 거지’라는 표현은 ‘가난한 자’라는 의미를 좀 더 하나님의 의도하심 즉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오직 한 가지만 추구하는 자가 천국의 거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호이 프토코이”라고 하는 단어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자’를 의미하고 있다. 그냥 아무 것도 없는 거지나 가난함을 의미할 수 있지만 소유적인 개념보다는 존재론적인 개념으로 오직 주님과의 관계성에 있어 하나됨을 연합을 추구하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그래야만이 천국이 현재 내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천국은 미래지향적인 의미도 갖고 있지만 고보다는 현재지향적인 의미가 매우 크다.
마태복음 6:33에 나오는 너희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 천국의 거지로서 삶을 추구하는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라는 천국과 동일한 의미라고 보는데 하늘에 속한 형상을 가진 독생자를 소유한 사람을 의미한다. 나라나 천국은 어떤 장소나 지역을 의미하는 것보다 어느 누구로부터 지배를 받고 소속이 되어 있느냐라는 의미가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면 각 사람의 마음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상과 말씀에 따라 내 안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상태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나라가 내 안에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나라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나라를 소망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거지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와 내가 연합된 상태가 되지 않으면 천국이 형성할 수 없다는 핵심을 전하시려고 지금도 예수께서 비유로 전하고 계시는 것이다. 본문 문장에 천국은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은 순수한 한글로 한다면 하늘나라로 번역되어야 한다. 우리가 단순히 알고 있는 ‘하늘’이라는 개념은 우리 눈에 보이는 우주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라고 하는 그 속에 우리가 하늘의 점이 되어 들어가 있는 상태를 하늘이다.
좀 더 쉽게 언급한다면 주님과 하나가 된 상태가 하늘이며 나라다. 즉 고린도전서 6:17에 “주와 합한 자는 한 영이다”는 말씀에 의한다면 주님과 연합된 사람은 성령에 감동감화하심으로 인해 이루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천국의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오직 그것만을 추구하며 인생의 전부요, 삶의 핵심이요, 나의 생명이며, 본질이고 핵심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그가 바로 천국의 거지다.
족보에서 깨닫는 비밀
마태복음 1장을 읽으면 이해되는 분이 거의 없을 것이다. 외국 사람들이 이름만 등장하기 때문에 영성을 깨닫기 쉽지 않다. 무슨 산부인과 족보인 줄 착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복음서 중에 제일 먼저 기록한 마가복음이 신약 척 부분을 장식하지 못했다. 세례 요한부터 시작되는 역사적인 누가복음도 그렇지 못했다. 또한 태초부터 시작되는 요한복음은 더 더군다나 앞에 나오지 못했다. 왜 마태복음일까?
구약 성경의 총정리하며 깨닫고 난 뒤 들어가는 책이 바로 마태복음 1장이다. 마태를 따라가면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다는 마태복음은 우리에게 엄청난 내용을 시사하고 있는 바이다.
1장에 나타난 족보는 한국의 개념인 족보로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 족보의 내용은 사람들이 이름만 나열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들을 통해서 어떻게 해서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처럼 신앙의 족보에 올라갈 수 있을까? 어떤 행위나 지식으로 부귀영화로, 노력해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존재로 거듭나고 깨닫는 존재는 그 어느 누구도 족보의 계열 낄 수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통상적인 개념의 족보가 아니라 신앙 족보로서 아브라함의 순종의 신앙이 이삭의 겸손의 신앙을 낳고 이삭의 겸손의 신앙이 야곱의 끈질긴 인내의 신앙을 낳았다는 신앙의 계보이다. 여기서 낳았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기노스코마이’라고 하는데 가는 실로 아름다운 천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로서 단순히 육체적으로 낳아지는 인물이 아니라 신앙으로 탄생시키는 인물로 만들어졌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신앙으로 낳아지지 않으면 이 족보에 낄 수 없다.
셋째, 족보 속에 여성들의 이름들이 거론되고 있다. 부득이 창녀 행세를 하면서까지 시아버지인 유다와 관계를 가져 며느리 다말, 여리고 성에서 기생(사실은 이방제사장) 라합은 보아스를 낳았고, 이방여인인 나오미의 며느리 룻은 보아스와 결혼하여 나중에 다윗의 증조할머니,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는 다윗과 관계를 맺어 솔로몬을 잇는 계보의 여인들이었다.
여성해방운동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의 족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따라서 생명을 잉태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탄생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는 여성들 거의 다 명성이 있고 덕망이 있는 여성들이 아니라는데 주목해야 한다.
넷째, 등장한 인물 중에 유명한 이도 있지만 아주 평범한 이름들이 거론되고 있어 읽는 평신도들로 하여금 깨닫는 바가 클 것이다. 또한 보이지 않는 인물들 즉 기록되지 인물들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족보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빠트린 것이 아니라 족보를 기록하는 법칙에 따라 기록하다 보니 누락된 자도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기독교는 신앙의 인물 중에 누구를 닮는 것이 아니며 그들의 신앙을 본받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존재가 되어야만 생명과 신앙의 족보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장을 읽고 일말의 가치가 없어 보이는 내용이라 소홀할 수 있는 부분을 지식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선포한다면 아주 멋진 설교 한편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