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이 훨씬 넘어 늦깎이로 출발한 중 놀이. 지금은 37세가 출가 평균연령이라니 세상은 많이도 변했다. 중 될려고 들어선 산은 아니었지만 산이 나를 중으로 만들었다. 산이 좋아 산에 묻혀 살다 한 세상 끝내려 한 인생이 다시 저자거리에 내려와 살게 되다니 팔자소관(?)인가보다. 중 될 때 포교 하겠다 마음먹고 시작한 중 있겠나?
산에 스며들어 몇 년 살다보니 몸이 몹시 쇠락해졌다. 약 좀 얻어먹으려 들어선 80년대 중반의 서울 강남땅은 빨간 십자가 천지였다. 정말 눈에 불이 날 정도였다. 건물마다 붉은 십자가가 매달려 있었다. 잠시 머물던 서초삼익상가 건물엔 한 건물에 십자가가 7개나 되었다.
저렇게 교회가 늘어나면 도무지 앞으로 중들은 뭘 먹고 사나? 의심과 안타까움이 마음을 타고 흘렀다. 그 당시에는 포교가 중요하다 얘기하는 사람도 없었고 포교를 하겠다고 나서는 중들도 별로 없었다. 교회나 성당이 무풍지대를 달리던 시절이었다. 멋도 모르고 겁도 없이 그저 눈에 불이 나 시작된 강남생활이었다. 산에 살다 서울에 오면 잠시 쉴 공간이나 하나 마련하자 시작했다. 중 된지도 얼마 안됐지만 누가 해도 할일이면 내가 해 보자 하는 심정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능인선원이었다.
사람이 좀 늘자 기독교인들이 건물을 통째로 사버려 부처님을 끌어안고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졌던 날도 있었고 타종교인들이 도끼로 문을 부수는 바람에 도망을 쳐야만 하던 날도 있었다.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던 날들의 기억들이 뇌리를 스친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게 포교란 어떤 숙명같은 일이 아니었던가 생각 지워진다. 교회와의 싸움뿐 아니라 인근사찰의 갖가지 중상, 모략 등.
요즈음 강남땅은 교회가 엄청 줄어들었다. 3선을 했던 강남 서초구청장이 작은 교회 몇 백 개는 줄었을 것이라 하니 격세지감이 있다. 지금 강남거리를 걸어보면 1980년대 중반과는 비교가 안 된다. 물론 곳곳에 대형교회들이 있기는 하지만…. 진정 포교는 목숨을 던질 각오로 해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참선도 목숨을 던질 각오로 해야겠지만 포교는 만난(萬難)을 극복하려는 의지에 찬 신념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아무런 도움도 배경도 문중도 없이 시작하다보니 몸을 던지고 피를 부르는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행히 지난날 운동권의 결사적 자세가 만난극복의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앞으로도 얼마나 고통의 강과 바다를 건너야 될까? 다행히도 요즈음 포교가 중요하다는 얘기들을 하기에 반갑다. 아직도 부잣집 자식들이 부모덕에 세상물정 모르고 안주하는 양 느껴질 때면 가슴이 답답해온다. 진실로 포교는 종합예술과도 같다 하면 너무 과한 얘기인가. 정신적 육체적인 모든 노력뿐 아니라 안팎에서 끌어들일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끌어들여 투입해야만 하는 통합적 예술이다. 모든 것을 끌어들일 수 있는 역량은 나를 비우고 버리고 던질 수 있는 투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제 20여년을 지나 60에 가까운 나이지만 언제나 시작하는 마음으로 산다. 항상 새벽이 문을 열면 모험가의 자세로 하루를 시작한다. 매일매일 떠오르는 새로운 태양 밑에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간다. 어디에까지 나가다 인생을 마감지을지 모르겠다.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 모든 것을 부처님께 맡기고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부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살아가리라. 몸과 마음을 다해 부처님 전에 최선을 다하는 한 부처님께서는 천개의 팔로 보호해주시고 지켜주시며 천개의 눈으로 앞길을 살펴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지광스님은 1980년 입산 도선사 현성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85년 도심포교당 능인선원을 창건했다. 강남지역에 포교의 선풍을 일으켰으며 1998년 조계종 포교대상 수상, 12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했다. 2005년 보성스님으로부터 율맥을 전수받았다. 2006년에는 태국국립 출라롱콘대로부터 명예철학박사학위를 수여 받았고 현재 재단법인 능인불교선양원 이사장, 학교법인 국제불교대학원대학 이사장, 능인선원 원장으로 있다.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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